나관중[羅貫中] 1330? ~ 1400년 원나라 말기 ~ 명나라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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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羅貫中] 1330? ~ 1400년 원나라 말기 ~ 명나라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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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 1330? ~ 1400년 원나라 말기 ~ 명나라 초기

 

중국 원말·명초의 소설가 겸 극작가. 강담()의 이야기책을 기초로 해 구어체 장편소설을 지은 선구자이다. 《삼국지연의()》 및 시내암()과의 공저인《수호지()》의 2대 걸작을 비롯하여 《수당연의()》,《잔당오대사연의()》,《평요전()》 등의 작품이 있다.

출생-사망자 / 호 / 본명 / 국적 / 활동 분야 / 출생지 / 주요 저서 

 

자 관중. 호 호해산인(). 본명 본(). 산시성[西] 루링[] 사람. 1364년에 살았다는 기록 외에 전기()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최하급의 관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송원시대()에 유행한 강담()의 이야기책을 기초로 하여 구어체 장편소설을 지은 선구자로서, 《삼국지연의()》 및 시내암()과의 공저인 《수호지()》의 2대 걸작을 비롯하여 《수당연의()》 《잔당오대사연의()》 《평요전()》 등의 작품이 있다.

희곡에는 3편의 작품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것은 《조태조용호풍운회()》 하나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관중 [羅貫中] (두산백과)

 

 

나관중[羅貫中 , Luó Guànzhōng]

 

『삼국지연의』를 지은 소설가

 

원말명초의 소설가

나관중의 석상(얼굴)

 

시대출생 - 사망

 

목차

1. 총명하고 고집 센 소년

 

원래 이름은 본()이다. 자는 관중()이고, 호는 호해산인()이다. 산서(西) 병주() 태원부1) 출신이다.

 

그의 출생지에 관하여 여릉(, 지금의 장시(西)성 지안()시), 전당(, 지금의 저장()성 항저우()시), 동원2) 등의 설이 있으나 태원부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나관중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으나 고집이 대단했다. 책을 많이 읽었고, 한 번 읽으면 잊지 않았다. 나름대로 역사의식도 상당했던 듯하다. 원나라의 통치에 늘 불만을 품었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반원() 감정을 드러내어 그곳 관리들의 귀에까지 그 소식이 들어갔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안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봐 집에서 43킬로미터쯤 떨어진 태원으로 보내 공부와 일을 하도록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관중의 반원 감정이 수그러들 리 만무했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아들을 타향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관중이 간 곳이 남방의 숙부 집이었다. 청년 나관중은 이렇게 고향을 떠났다.

 

2. 많은 이야기와 전설을 수집하다

 

나관중이 살았던 원나라 후기에는 잡극과 평서화본()이 평민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유행했다. 특히 민간에는 지식과 예능을 파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이들이 주도하는 평민을 위한 연극과 이야기가 저잣거리를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풍조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나관중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장사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늘 민간에 떠도는 전설을 수집하곤 했다. 이 때문에 민간의 풍토와 인정, 그리고 민간 정서를 풍부하게 반영한 평서화본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평서3)를 말하는 법을 배웠고, 다니는 곳마다 민간 전설을 수집하여 36줄기의 전설을 모았다. 『수호전』이 36줄거리에서 72줄거리로 늘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었다. 나관중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대가로 노잣돈을 해결하면서 천천히 하북성(허베이성) 평원으로 진출했다. 이렇게 해서 훗날 강소성(장쑤성) 북부까지 여행할 수 있었고, 그곳 출신인 『수호전』의 원작자 시내암을 만나 그의 제자이자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나관중은 시내암의 추천을 받아 원나라 말기 봉기군의 수령인 장사성 밑에서 모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사성은 원나라에 투항해버렸고, 이를 견디지 못한 나관중은 항주(, 지금의 저장()성 항저우()시)로 가서 은둔 생활을 했다.

 

3. 정착하여 창작생활을 시작하다

 

항주 생활은 나관중의 일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여 창작에 몰두했다. 명 태조 주원장이 중국을 다시 통일하여 명나라를 세운 후 유백온(유기)을 보내 나관중을 초빙했으나, 나관중은 “선비는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물론 나관중은 당시 자신의 측근들을 하나하나 제거해나가는 주원장의 잔인성을 알고 있었고, 이 점이 그의 거절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항주 생활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고향 생각이 났던지 나관중도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어 일단 고향에서 좀 더 가까운 허난()성 허비()시 교외의 허가구촌()에 정착하여 문학 창작을 시작했다. 여기서 그는 죽을 때까지 『삼국지통속연의()』(『삼국지연의』)를 집필했다.

그의 일생에서 굳이 흠을 잡자면 결혼했음에도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4. 남긴 작품들

 

나관중은 『삼국지연의』 외에 『수당지전()』, 『삼수평요전()』, 『잔당오대사연의()』 등을 편찬했다. 많은 작품이 전하지만 모두 후대 사람의 손질을 거쳤다. 『삼국지연의』와 『삼수평요전』은 원작의 기본 틀을 유지하고 있으나 나머지는 원래 모습을 대부분 잃었다. 『수호전』도 나관중이 손질한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시내암이 손질하고 나관중이 차례를 다듬었다는 주장도 있다.

 

산곡(, 가곡의 일종)과 은어를 잘 구사했고, 『송태조용호풍운회()』, 『충정효자연환간()』, 『삼평장사곡비호자()』 등과 같은 잡극()도 썼다. 『송태조용호풍운회』가 남아 있다.

나관중의 석상(전신)

 

5. <참고자료1> 나관중의 집안과 출생지에 관하여

 

『삼국지연의』는 중국 고전문화의 보배로 꼽힌다. 이 책에는 중국인의 역사와 문화, 철학과 군사 사상 등의 정수가 담겨 있다. 평론가들은 아직까지 이에 맞설 만한 역사소설은 없다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정작 작자인 나관중의 일생이나 이 작품의 탄생 배경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이 때문에 『삼국지연의』의 역사적 창작 배경이나 작품 연구에 적지 않은 공백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생애와 행적이 신비화되어 후세에 큰 영향을 남기기도 했다.

 

나관중의 본적은 역사 · 문학 연구에서 최근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그의 본적과 출생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학자들이 각종 연구와 기록을 검토한 결과 그의 출생지는 지금의 산시성 타이위안시 칭쉬()현으로 굳어지고 있다. 1986년 6월 몇몇 연구자가 대대로 칭쉬현에 살고 있는 나씨 집안을 찾아 나씨 22대 후손을 만났다. 이들은 당시 68세였던 나예중()이 보관하고 있던 『나씨가보()』에서 마침내 나관중의 출처를 찾아냈다.

 

이 가보에 따르면 나관중 집안의 변천사는 다음과 같다.

 

나관중의 할아버지 나중상()이 오대 후당 때 사천성 성도부에서 태원 청주(, 지금의 칭쉬현)에 복야() 벼슬을 받아 부임했다. 당시 태원에서는 이존효, 석경당(), 유지원 등이 세력을 다투었기 때문에 진양(, 태원을 중심으로 한 산서성 중심부) 일대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나중상은 부임하지도 못한 채 청서 백석구()라는 곳에서 난을 피했다가 뒤에 청주성으로 돌아왔다.

 

나씨 집안은 역대로 독서인 집안이어서 벼슬을 지낸 인물이 많다. 가장 높은 벼슬로 하남어사를 지낸 인물이 있다. 이렇게 해서 나씨 집안은 칭쉬현의 명문대가가 되었다. 이 집안의 명성은, 칭쉬현성에 보존되어 있는 여섯 개의 패루 중 네 개가 나씨 집안에 관한 것이라는 점으로도 증명된다. 또한 현재 칭쉬현에 나씨 성을 취한 지명이 적지 않은데, 나가항(), 나가장(), 나가장(), 나가사() 등이 대표적이다.

 

원나라 때 나씨 집안에서 관리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나관중의 아버지 나금()은 지금의 산시성 타이위안시 칭쉬현에서 민간의 분쟁을 처리하는 오늘날의 사법부 서기관인 사리()직에 있었다. 말단 벼슬로는 집안을 꾸릴 수 없었는지 나금은 장사도 함께 했다.

 

나관중의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없고 다만 나금의 둘째 아들이 외지로 나갔다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나관중이 민간의 예인이 되어 강남을 떠돌며 반체제 저서라 할 수 있는 『수호전』을 편찬했기 때문에 족보에서 빼버린 듯하다. 현재 칭수현 내 5킬로미터 이내에 나씨 집안의 후예가 무려 2,600명이 넘는다. 그 밖에 산시성 진중()시 제슈()시의 의안촌(), 산둥()성 더저우()시 핑위안()현 소송장()에도 많은 나씨 후예가 옮겨가 살고 있다.

 

칭쉬현 사람들은 위대한 작가가 자신들의 고장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삼국지연의』에 관해 많은 문장을 쓰기 시작했고, 기금을 모아 거대한 ‘삼국연의성()’을 지었다. 이곳에 자료관 등도 있다. 또한 중앙 TV가 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장쑤()성 우시()시에 ‘삼국연의성’ 세트를 지었다.

나관중 기념관 전경

나관중 전시관

 

6. <참고자료2> 『삼국지연의』의 이름에 관하여

 

『삼국지연의』는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정식 명칭은 『삼국지통속연의』다. 줄여서 흔히 『삼국지연의』, 『삼국연의』라 불리고, 짧게 『삼국지』로 불리기도 한다. 이 때문에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와 혼동되는 일도 많았다. 그 밖에 『삼국지전』, 『삼국지전통속연의』, 『삼국영웅지전』, 『삼국전전』 등으로도 불렸다.

 

7. <참고자료3> 『삼국지연의』의 명암

 

나관중은 작가로서 총명함과 지혜 그리고 재능을 발휘하여 삼국시대의 많은 역사적 사실을 재현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삼국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체계화했다. 만약 그에게 깊이 있는 군사 지식과 정치적 안목 그리고 문화에 대한 조예가 없었다면 『삼국지연의』라는 거대한 작품이 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중국 문학사에서 견줄 수 없는 지위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중국 민중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삼국지연의』는 장쾌하고 웅장한 규모의 역사소설로 중국뿐 아니라 동양 사회(특히 한국과 일본)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낡은 봉건적 의식구조와 남성 중심적 사고, 끝없는 권모술수 등의 해악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주군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강조하는 등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 반동성과 결핍된 시대의식 등은 왕조체제에서 지배층이 민중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사회와 특히 청소년 교육에 해악으로 작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 『속문헌통지(續文獻通志)』
  • 『나관중(羅貫中)』, 중국경제망(中國經濟網), 2013. 12. 11.

    [네이버 지식백과] 나관중 [羅貫中, Luó Guànzhōng] - 『삼국지연의』를 지은 소설가 (중국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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