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O 8240 이범구

한국전쟁(6.25전쟁,6.25사변) - 한강 방어선 전투 (2)

작성일 작성자 KLO 8240 이범구

한국전쟁(6.25전쟁,6.25사변) - 한강 방어선 전투 (2) 한국전쟁(6.25전쟁)

2014. 3. 2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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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6.25전쟁,6.25사변)

 

 

II 지연작전과 미군/UN군의 참전

 

 

2. 한강 방어선 전투

 
 
2. 한강방어선 전투
 

 

 

한강 방어선 전투는 북한군 제 105전차사단 및 제 3, 4사단과 이를 저지하려는 한국군 시흥전투사령부 예하 혼성사단 간의 전투로, 북한군을 한수 이북에 6일간이나 묶어둔 6.25전쟁사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전투였습니다.

 

한강은 서울 동남 방향 양수리에서 서울을 남쪽에서 원형으로 감싸면서 흐르다가, 김포반도 끝에서 서해로 흐르는 2~3km의 하폭을 갖는 강입니다. 한강 방어선은 대략 북서쪽으로는 영등포에서 동남부로는 광나루까지 한강의 차안지역 전체를 의미하며, 주 병력은 영등포에서 노량진에 배치되었습니다.

 

육군본부는 서울이 피탈되자마자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어요. 사령부는 미군참전이라 쓴 간판을 곳곳에 세우고 한강을 도하하는 장병들을 수습하였습니다. 장병들을 임시방편으로 500명 단위의 혼성대대로 편성한 후 혼성수도사단(여의도 포함 영등포 방면), 혼성 제 7사단(노량진 방면), 혼성 제 2사단(신사리 방면), 3, 5사단’(전방부대보강)으로 재편하여 한강 남족의 방어선에 배치하였습니다.  이때 배치된 병력은 총 병력 3,000여 명 6개 대대였습니다. 이들 사단은 화포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공용화기로는 박격포 2~3문과 기관총 5~6정이 고작이었어요. 서울을 탈출할 때 모두 유기했기 때문이에요.

행주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도착한 제 1사단은 예비로 시흥에 배치됩니다. 시흥사의 한강 방어선 작전개념은 후보계획에 따라 산출한 미군의 한반도 투입시간 3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맥아더가 파견한 6.25전쟁 조사반장인 처치 춘장이 미군이 한강선까지 진출하려면 3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었어요. 다행히 6 29일부터 미 공군의 폭격이 개시되었지요.

 

북한군은 28일 서울점령 하루를 보냈습니다. 29일 도하준비를 완료하고 밤부터 정찰대를 투입하여 탐색전을 전개했지요. 북한군은 제 4사단을 주공으로 여의도 대안을 통하여 영등포 방면으로, 3사단을 조공으로 용산일대에서 노량진 방향으로 도하를 시도하여 29일 밤섬과 흑성동 차안에 중대규모 공두보(공중수선의 물자보급을 위한 지역)를 확보합니다.

 

도하개시 2일차인 30일 새벽 북한군 제 3사단은 전날 밤 확보한 도하 지점을 발판으로 노량진 신사리 방면으로 본격적인 도하공격을 실시합니다. 한국군 혼성 제 7사단은 미군 제 19폭격전대의 지원을 받아가며 북한군의 도하를 저지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오후 한남동에 위치한 북한군 제 3사단에 의해 신사리 일대가 독파되어, 혼성 제 2사단이 남태령-우면산을 연하는 선에서 북한군 부대를 저지하였습니다. 도하 2일차 북한군의 작전은 노량진의 고지군을 확보하여 그 엄호하에 철교를 보수하며 전차를 도강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는 한국군의 필사적인 저지와 미군의 공중포격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도하 3일차인 7 1, 북한군 제 4사단이 이른 새벽 04:00시부터 여의도-영등포 방면에서 마포-하중리 나루터를 이용하여 본격적인 도하를 시도합니다. 북한군은 영등포를 장악할 목적으로 하루 종일 공격하였으나 혼성수도사단에 의하여 도하가 좌절되었습니다. 북한군 제 4사단은 전차없이 도하작전이 여의치 않자 야간에 선로반을 동원하여 경부선 철교 보수작업을 실시하였습니다.

 

도하 4일차인 7 2, 북한군은 여의도 대안의 제 4사단이 또 다시 도하를 기도하였으나 혼성수도사단 제 8연대가 이를 격퇴합니다. 이때 판교로 진출한 일단의 북한군을 예비로 있던 한국군 혼성 제 3사단이 후방을 차단하고, 미 공군기가 계속 공격하여 어느 정도 대열을 와해시켰습니다. 그러나 도하 5일차인 7 3일 새벽부터 전황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영등포에서 04:00시에 철로 복구를 완료한 북한군은 전차 4대를 우선적으로 도강시켰습니다. 이후 열차를 이용하여 전차와 병력을 축차적으로 도강시키면서 영등포와 노량진 일대를 석권하기 시작했습니다. 영등포 정면의 혼성 제 8연대는 전차가 진출하고, 설상가상으로 김포의 북한군 제 6사단이 오류동 쪽으로 들이닥쳐 연대의 배후를 교란함으로써 전, 후방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게 되어 전선을 포기하고 철수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시흥지구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계획된 철수명령을 하달하였고, 나머지 부대들도 분산되어 안양과 과천으로 철수하였습니다6 30일 육군 참모총장(//공 참모총장)으로 부임한 정일권 소장은 현 전선에서 북한군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영등포-수원 간을 연하는 선에서 축차진지 상의 지연전을 전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한강변에서 방어를 담당했던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와 사단은 안양으로 철수하였고, 7 4일 육군본부는 평택으로 이동했습니다.

 

한국군 부대들은 임시 편제된 상황 하에서도 사력을 다하여 6 28일부터 전차가 도강한 7 3일까지 목표한 3일을 넘어 6일간이나 한강 방어선을 지켜냈습니다. 탁월한 전쟁지휘 능력을 갖춘 김홍일 사령관과 한강이라는 자연물 그리고 미군의 적절한 시기의 공중지원이 밑바탕이 되었지요. 이로써 한국군은 미군 참전의 시간을 획득하고, 지연작전을 통해 전략적 후퇴를 단행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들이게 된거죠. 따라서 이 한강 방어선 전투는 한국군에게는실로 초전의 실패를 만회하고 기사회생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북한군에게는 수원 북방에서 한국군을 격멸하고 미군 증원이전에 전쟁을 종결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무산시켜버리는 전투가 되어버렸습니다.


 



 ▲ 아이의 손을 잡아주는 미군




피를 흘릴 각오 없이 승리를 얻고자 하는 자는 피 흘릴 것을 불사하는 자에 의해 반드시 정복된다

-       클라우제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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