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화 이야기와 스위시 영상

03. 성 소피아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 건축의 역사

작성일 작성자 은행나무


성 소피아 사원의 평면도


성 소피아는 기독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기간 306~337년)시대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였다고 하지만, 첫 번째 교회가 완공된 것은 360년, 즉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때였다.

이 첫 번째 건물은 기본적으로 장방형 바실리카(basilica) 형태에 목재 지붕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실리카란 원래 로마의 공공건물을 이르는 말이지만,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를 짓기 시작했을 때
달리 본받을 만한 건축 양식이 없었으므로 초기 교회는 바실리카의 형태로 지어졌다.
이후 장방형 평면을 갖는 교회 건물을 바실리카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성 소피아 사원 입면도


첫 번째 교회는 404년 대지진으로 극히 일부만 남고 거의 파괴되었다.
두 번째 교회는 오랜 기간에 걸친 재건과 보수 끝에 415년 완공되었다.


그 구조는 첫 번째 교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두 번째 교회는 532년의 폭동(Nika Riot) 때 완전히 불에 타고 파괴되었다.


세 번째 교회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Justinianus)의 재위 기간 중인 532년부터 537년까지

약 5년에 걸쳐 두 번째의 교회 건물과 매우 다른 새로운 형태로 지어졌다.


그동안 여러 차례의 지진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파괴되어 보수를 거쳤고 19세기에 또 한번 크게 보수를 거쳤지만
현재의 건물은 537년에 완성된 건물의 기본적인 구조를 보인다.
즉 바실리카 형과 돔(dome)을 가진 원형 로마 건축의 형태가 배합된 독특한 새로운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돔을 강화하기 위한 외부 벽 버팀 


이 교회의 가장 신기한 특징은 내부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가운데에는 지름이 약 32m 정도인 돔이 있고
그 돔은 지상 57m 되는 높이에 올라앉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큰 돔을 이렇게 높이 올리기 위하여 건축가들(Anthemius of Tralles와 the Elder Isidorus of Miletus)은

새로운 공법을 고안하였다.


그것이 곧 펜덴티브(pendentive)라고 하는 구조로

돔의 바로 아래 네 군데에 보이는 구면(球面)의 일부처럼 굽은 삼각형 벽이다.
현재 내부 수리 공사로 복잡한 이 사진에서는 하나는 완전히 보이고 또 하나는 반쯤 보인다.


이 펜덴티브는 평면도의 가운데 부분에서 보이는 도형(⌼)처럼
돔의 원형을 안에 넣을 수 있는 가상의 사각형에서 원형을 제한 네 모서리의 삼각형을 입체적으로 상상하면 된다.


돔 바로 아래의 동·서 양쪽에는 각각 이 돔과 같은 지름의 반(半) 돔이 있고

이들 각각의 양쪽에는 또 작은 반쪽 돔 두 개씩이 붙어 있다.


즉 돔의 무게를 네 개의 아치(반 돔 두 개, 그리고 남·북쪽의 아치형 벽면)가 받치고,
또 이 네 개의 펜덴티브는 무게를 그 바로 아래 기둥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 밖에도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돔에 쓰인 벽돌의 무게는

그 이전까지 만들어진 벽돌 무게의 12분의 1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창문으로 밑 부분을 빙 돌린 그 커다란 돔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인상을 창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전통적인 비잔틴 양식의 주두(柱頭)


비잔틴 건축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겉모습보다 내부 장식에 치중하는 것이라면

이 성 소피아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겉에서 보면 높은 돔의 무게를 받쳐주기 위해 세운 버팀벽(buttress)들이 여기저기 있어 하나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으나
내부에는 아름답게 부조된 비잔틴 특유의 주두(柱頭)를 가진 대리석 기둥, 모자이크(mosaic)로 장식된 벽면들,
기타 찬란한 금빛의 여러 가지 장식품들로 화려했던 원래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대성당의 변화 양상
조감도 오른쪽 테오도시우스 대제 때 모습. 가운데 537년 때 모습. 왼쪽 끝 557년 때의 모습.


동로마 제국 건축의 최고 걸작이자 정교회의 총본산이었던 곳.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후 메흐메트 2세의 명으로 모스크로 바뀌었다.


터키 공화국 수립 후 아타튀르크의 지시로 박물관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5년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명칭인 아야 소피아(Αγία Σοφία)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으로, 동방 교회에서는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하기아 소피아, 아야 소피아, 성 소피아 사원, 성 소피아 성당, 성 소피아 대성당 등으로 불린다.
터키에서 터키 리라가 굉장히 인플레이션이 심했을 때에는 미국 달러로 입장료를 받은 적도 있다.


하기아 소피아는 로마 제국의 기술력이 만들어낸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일 뿐더러,

당시 세워진 그 어떠한 건축물보다도 광대한 실내 공간을 가진 건물이었다.
이 성당은 16세기에 스페인 세비야의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성당이기도 했다.


돔의 직경만 하더라도 31.87m로, 로마의 건축물인 판테온 다음 가는 크기였으며
수백 년 뒤의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피렌체의 두오모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석조 돔이기도 했다.
물론 이 건축물이 르네상스 건축물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대성당 입면도


초기의 대성당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후 30년이 지난

360년 2월 15일 대제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첫 번째 하기아 소피아를 건설했다.


당시에는 '위대한 교회(Μεγάλη Ἐκκλησία, 메갈리 에클리시아)'라고 불렸으며
건축은 목조 지붕의 바실리카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창건한지 40년도 지나지 않은 404년 6월 20일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내 에브도시아 황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Ο Άγιος 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를 박해하여 추방할 때

수도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소실된 대성당은 11년 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 치세 때인 415년 10월 10일에 재건되었으나
120여년 뒤인 532년 1월 13일경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휩쓴 니카의 반란 때 일어난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첫 번째 하기아 소피아와는 달리 두 번째 하기아 소피아의 흔적은

현존하는 하기아 소피아의 일부 원기둥 등에 약간 남아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재건


대성당이 전소된지 열흘 후인 532년 2월 23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하기아 소피아의 세 번째 재건을 결정하면서
이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바라며 물리학자인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트랄레스의 안시미오스에게 설계를 맡겼다.


유스티아누스는 그의 정복 사업이 그러하였듯이 이 공사에도 엄청나게 빠듯한 기한을 주고 닥달했다.
그리스인인 두 사람은 전문적인 건축가가 아니었지만 1만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어 532년부터 537년까지
채 6년도 걸리지 않은 공사기간을 통해 당시까지 사상 유례가 없는 광대한 규모의 대성당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대성당의 건설을 위해 제국 전역에서 각종 자재들이 공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원기둥들을 징발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마침내 537년 12월 27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나스가 집전한 하기아 소피아의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대성당의 웅장함에 감동한 황제는 하기아 소피아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능가했다고 생각해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완공 이후 하기아 소피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주교좌가 위치한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비잔티움 제국 역대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정치적·종교적 의례가 거행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된 다양한 성유물들이 봉안된 성소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십자군에게 털렸다.

동로마 건축의 전성기의 정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며 또한 대단히 빠르게 완공한 역사적 건물이다.
하지만 기존 건축물을 뛰어넘는 규모와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한 무리한 공사와 실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


헌당식 이후 20년이 지나기도 전인 553년 8월과 557년 12월 14일 두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강타한 지진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상징인 중앙돔에 금이 갔고, 결국 558년 5월 7일에 발생한 지진을 견디지 못해 중앙돔이 무너졌다.


붕괴 직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의 조카인 이시도로스에게 즉각적인 복구를 명령했으며,
이에 따라 젊은 이시도로스는 중앙돔을 원래의 위치보다 6.25m 가량 낮추고 구조를 보강하여 건축했다.


그로부터 약 3백년이 흐른 859년에 발생한 화재와 869년 1월 8일에 발생한 지진으로

대성당의 버트레스(half dome)가 파괴되었다가 바실리오스 1세 황제에 의해 수리되었다.


120년 뒤인 989년 10월 25일의 대지진으로 서쪽 돔의 아치가 붕괴되자 바실리오스 2세 불가록토노스 황제는
아르메니아인 건축가 티리다티스에게 수리를 명령해 6년간의 공사 끝에 994년 5월 13일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약 350년이 지난 1344년 10월에 발생한 지진으로 중앙돔에 다시 금이 가더니

2년 후인 1346년 5월 19일에 대성당 곳곳이 또 무너졌다.
이때의 피해는 8년 동안 공사에 들어가서 1354년에 끝났다.


성상 파괴와 십자군의 약탈


730년, 레오 3세 황제(Λέων Γ΄, 685~741, 재위 : 717~741)가 모세의 십계명 중 우상숭배 금지를 내세워

성상을 파괴할 것을 내용으로 한 칙령을 공포하면서 제국 전역이 헬게이트로 빠져들었다.


성상파괴론자와 성상옹호론자가 너 죽고 나 살자를 외치며 갑론을박 하는 사이,
비잔티움 제국의 대표적인 성당인 하기아 소피아를 장식하던 수많은 조각상과 모자이크 예술품들이 훼손되어 철거되었다.


성상 파괴의 광풍은 아테네의 이리니 여제(Ειρήνη η Αθηναία, 752경~803, 재위 : 797~802)가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일단락되었고, 하기아 소피아에는 다시금 성상과 성화상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1204년 4월 9일, 공격하라는 이슬람은 공격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해 점령한 십자군은
도시를 마구잡이로 약탈하고 파괴하는 반달리즘을 자행해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당대의 재부가 모여 부유하기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때의 약탈로 전성기의 화려함이 괴멸되었다.


도시 곳곳에 있던 수많은 보물들이 십자군들에게 털렸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모후 성 헬레나 이래로
비잔티움 제국이 열성적으로 수집해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여러 성당에서 소중하게 모시던 각종 성유물 또한
십자군들의 손에 의해 강탈되어 서유럽으로 빼돌려졌다.


이 덕분에 비잔티움 제국 동방정교회 신도들은

 "십자가 든 악마에 견주면 초승달 이교도가 그래도 사람이다."이라면서 두고두고 이를 갈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십자군들은 하기아 소피아를 가톨릭 성당으로 바꾸고 정복 직후 사망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시신을 매장하여 무덤을 만드는 폭거를 저지르기에 이른다.


다만 단돌로의 무덤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후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파괴되어 사라졌으나, 그 자리는 아직도 남아있다.


2층 오른편에 가보면 Henricus Dandolus라고 라틴어로 쓰여진 돌판을 볼 수 있는데

거기가 무덤 자리로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이미 그 위치가 알려져 있었다.


다만 아무래도 죽은 사람 무덤이라 그런지 터키인들도 건드리긴 영 껄끄러웠는 듯하며
19세기 이탈리아에서 무덤이 있던 자리에 돌판을 세웠다.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탈환된 후에야 황폐해진 하기아 소피아도 정교회 성당으로 환원되었으며
1317년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가 대성당 북쪽과 동쪽에 새로운 버트레스를 증축했다.

입면도
절충적인 원개 바실리카식 성당, 돔을 직접적으로 지탱하는 기둥을 볼수 없다. 허공에 떠있는 듯하다.


예언, 최후의 순간, 전설


로마 제국에서는 언젠가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숙명론적 예언이 오랫동안 전해졌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표로 1453년에 병력을 동원하자 사람들은
"로마 제국은 창건자의 이름과 같은 황제 때 멸망한다"는 예언을 떠올리고는
로마 제국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이자 비잔티움 제국의 실질적인 창건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마지막 황제가 될 거라며 불길하게 여겼다.


또한 달이 차 있을 때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지만,
5월 24일에 보름달이 떠서 이제 달이 기우는 일만 남은데다가

하필이면 바로 그날 밤에 월식이 일어나 시민들을 공황상태에 빠지게 했다.


5월 25일에는 폭우가 쏟아졌고, 비가 그친 5월 26일에는 짙은 안개가 도시 전체를 뒤덮었는데,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호하던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도시에서 떠나는 걸 숨기기 위해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고 수군거렸다.


오스만 제국의 총공세가 시작된 5월 28일, 시민들은 하기아 소피아로 향해
"이교도가 성벽을 넘어 대성당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대천사 미카엘이 강림해 빛나는 검으로 그들을 지옥불에 던져 넣으리라"는
오래된 예언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오스만 병사들이 하기아 소피아로 몰려들자 대성당의 거대한 청동문이 닫혔지만
얼마 못가서 병사들이 청동문을 때려 부수고 내부로 난입했다.


반항하던 몇몇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예배를 드리던 나머지 사람들은 포로로 잡혔으며
성찬예배를 집전하던 사제들은 지성소에서 끌려나가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성가를 불렀다.


여기서 전설이 하나 생기는데, 최후의 순간 몇몇 사제들이 성반과 성작을 움켜쥐고 대성당의 벽 너머로 사라졌으며,
하기아 소피아가 모스크에서 성당으로 바뀌는 날 다시 나타나 성찬예배를 마칠 것이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단면도


오스만 제국

1453년 5월 29일 메흐메트 2세(1432~1481 재위:1444~1446, 1451~1481)가 이끌던 오스만 제국에게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던 날, 이 성당도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이 성당만은 남겨두라고 엄명을 내리고

말에서 내려 성당 안을 보며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다른 이야기론 병사들이 성당을 약탈하자 메흐메트 2세가 탐욕스런 약탈행위를 기분이 나쁘듯 쳐다보긴 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 병사들에게 대가로 사흘 동안의 약탈 행위를 허락한다고 약속했던게 있어서 놔두었다.


다만 몇몇 병사들이 메흐메트 2세가 보는 앞에서 소피아 대성당에 불을 지르자 분노하면서 불을 끈후에 그들을 잡아와서 채찍질하며
'약탈은 허락해도 소피아 대성당을 불태우는 짓은 절대 허락 안했다'며 주의를 줬다고 한다.


사실 국왕이 보는 앞에서 국왕이 절대 손대지 말라고 한 대성당에 불을 지른 행동은 사형당해도 할말이 전혀없는데
해당 병사들을 채찍질만하고 주의를 주는데서 끝난걸 보면 메흐메트 2세는 정말로 관대한 국왕이라고 할수있다.


다른 이야기로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나서

그날 저녁으로 이 성당에서 저녁예배를 드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병사들에게 약속한 사흘 동안의 약탈 기간이 끝나고 나서 그는 공석이 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자리에
옌나디오스 2세 스콜라리오스를 임명하고 정교회와의 공존을 허락했다.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대대로 비잔티움 황제가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메흐메트 2세가 총대주교 취임식에 필요한 은제 십자가도 손수 마련해 옌나디오스 2세 스콜라리오스를 임명한 것은
종교적 관용을 베푸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비잔티움 황제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적법한 계승자임을 나타낸 것이기도 했다.


단, 하기아 소피아는 아야 소피야라는 이름을 그대로 보존한 채 이슬람 성원으로 개조하고
내부의 모자이크에 회칠을 하여 성화들을 가리며 건물 자체는 그대로 남게 되었으며,
성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바예지드 2세(1447~1512 재위:1481~1512.)와 셀림 2세(1465~1520, 재위:1512~1520) 때
건물 주변에 네 개의 미나레트(첨탑)을 증축했다.


위의 성당 내부 사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건물과 제대의 방향이 약간 틀어져 있다.
이는 원래 예루살렘 방향으로 세워진 제대를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메카 방향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서 모든 예배는 메카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

평면도


터키 공화국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터키 공화국을 수립한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는
국교를 없애고 세속주의 정책을 취하면서 아야 소피아 이슬람 성원을 개방한다.


이슬람 신도만이 출입할 수 있었던 이곳을 비이슬람인도 보게 만들었고,
미국 및 유럽 고고학자들이 오스만 제국의 정복 당시 덧칠했던 회칠을 제거하여 성화가 드러나게 하는 것도 허락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회칠 위에 그려진 코란의 내용과

이슬람의 온갖 문양이 훼손된다는 반발에 1931년 회칠 제거를 금지시킨다.


그리고 1935년에 새롭게 박물관으로 문을 열게 했다.
이와 함께 하기아 소피아 내부에서의 모든 종교 행위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2013년에 들어와 하기아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라 논란이 일고 있다.


왼쪽은 로마의 판테온, 오른쪽은 537년 당시 하기아 소피아 성당.


기본 구조는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와 같은 석조 볼트 천장을 활용한 광대한 면적의 건물과
"판테온"과 같은 돔형 천장을 가진 건물의 조합을 시도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형태의 건물이었다.


물리학자인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안시미오스가 설계한 것도 특징적인 부분인데,
당시의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장인 집단의 축적된 경험적 지식을 기반으로 설계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다.


물리와 수학 이론을 동원하여 건축물의 구조를 설계하려고 했던 것은

오늘날의 건축 공학으로 이어지는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전례없이 큰 건축물을 원했고, 전례가 없다는 것은

기존 장인들의 경험적인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물리적인 계산이 불가능했던 당시로서는 한계가 명확하여 하기아 소피아의 구조는 불완전했고,
완공되기 전부터 거대한 돔과 단기간의 완공을 위한 부실 공사 때문에 붕괴될 위험이 많았다.

하기아 소피아가 가진 문제의 핵심은 거대한 반구형의 돔 무게를 버티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돔은 가볍고 내구성이 좋은 건축자재들을 활용해 만들어졌지만,
높이 56m에 직경 31m가 넘는 거대한 크기로 인해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돔을 받쳐주던 30.5m 폭의 대형 아치 4개로도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볼트의 일종인 펜덴티브(삼각궁륭)를 사용해 대원개를 형성한 결과,
펜덴티브가 각 아치 사이의 틈을 메꾸어 돔의 무게로 인해 옆으로 벌어지려는 아치의 수평추력을 완화시켜줬다.


그러나 돔은 계속해서 아치와 그 밑의 기둥을 짓눌렀고,
기둥은 바깥으로 쓰러질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공사 와중에 붕괴 위기가 오자
돔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들의 바깥 부분인 회중석 부분에 좌·우에 4개의 대형 버팀목을 만들고,
한쌍의 버팀목을 연결시켜 위·아래로 아치형의 회랑들을 개축해 기둥이 밀려나는 것을 버티게 하였다.


이런 급한 땜질에도 불구하고 회랑들의 가장 윗쪽 아치에 균열과 함몰, 뒤틀림이 발생했는데,
이는 아직도 버티는 힘이 모자란다는 증거였다.


만약 회랑의 아치를 좀 더 작게 만들거나 메꿔버렸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각 버팀목마다 4군데의 아치형 회랑을 너무 크게 뚫었기에 버팀목이 약해진 것이었다.


결국 버팀목 위에 기둥과 아치를 더 세워 힘을 보태고, 가로 지지대를 추가한 후
가장 위에 있는 아치를 벽돌로 겉을 메꿔서 좁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진행된 상단부의 뒤틀림을 고칠 수는 없어

지금도 이 공간에 가면 천장이 뒤틀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앙 기둥들이 밀려나게 되자 당연히 돔이 올라갈 공간 역시 정사각형이 아니라

좌우로 길죽한 직사각형 모양이 되게 되었다.


결국 시간이 부족했던 건축가들은 그 위에 완전한 원형 돔은 포기하고,

대신 타원형으로 돔을 완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구조적을 봤을 때 타원형 돔은 완전한 원형 돔보다 비균일하게 무게를 전달하므로 다소 불안정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서 성당은 완공될 수 있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성당이 건설될 때부터 이시도로스와 안시미오스는 이 지역이 지진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둥이 허용된 것 이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방지하는 턱을 만드는 등 어느정도 내진 설계를 했다.


그러나 완공 이후 20년이 지나기도 전에 발생한 기록적인 지진으로 결국 558년에 돔이 붕괴되고 만다.
안시미오스와 이시도로스는 이미 사망하였기에 이시도로스의 조카인 젊은 이시도로스가 공사를 맡게 되었다.
새로운 이시도로스는 이 성당의 돔을 연구한 뒤 돔의 결함을 발견하게 된다.


기존의 돔은 채광을 위해 짧은 기둥들을 빙 둘러 원형으로 세운 드럼인 스트롱길롱을 놓은 뒤

그 위에 돔을 올렸는데, 이는 지진에 매우 취약하였다.


그래서 젊은 이시도로스는 기둥을 사용한 스트롱길롱 대신 훨씬 두꺼운 벽들로 바꾸고
돔의 위치를 6.25m 정도 낮춰 벽에 좀 더 안정되게 지지되도록 바꾸었다.


또, 젊은 이시도로스는 전체 공사기간과 비교하면 매우 긴 4년이란 시간동안 돔을 보수 할 수 있었고,
돔에 쓰인 회반죽 등이 마른 후에야 건축용 지지대를 철거하는 등 안정된 방법을 쓸 수 있었다.


외벽에 추가된 버팀목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로도 지진 등으로 인해 돔과 성당은 부분적으로 계속 파손되었고,
수백년이 흐르면서 돔의 무게 때문에 점점 기둥들이 바깥쪽으로 기우는 것이 보이게 되었다.


9세기에 이르러서는 건물 외부에 서유럽의 고딕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버트레스와 비슷한 버팀목을 추가하기 시작했고,
훗날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비슷한 땜질을 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기울어져 있는 기둥들이 보인다.


하기아 소피아에서 설계상의 문제가 계속해서 터져나오고,
세월의 풍파를 맞아오는 와중에도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자재의 품질 덕도 있다.


먼저 벽돌의 경우 로도스 섬의 점토로 만들어진 것인데 물에 던져도 뜰 정도로 가볍다고 한다.
또 로마의 시멘트와 콘크리트 기술이 쇠퇴한 중세 유럽과는 달리,
포졸란 시멘트와 콘크리트 기술이 이어져서 이를 성당을 개축할 때 사용하였다.


포졸란 시멘트는 지중해 서부의 채석장에서 발견되는 화산재인 포졸라나와

석회 등을 사용하여 만든 시멘트로 인장강도가 매우 우수하다.


하지만 최대 강도에 이를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단기간에 공사가 이루어졌다면,
뒤틀림 문제에 꽤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포졸란 시멘트 기술은 계속 전승되어서 오스만 제국까지 이어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접수한 오스만 제국의 사람들은 하기아 소피아를 존중하는 뜻에서 파괴하지 않고 모스크로 고쳐 사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도 이와 비슷한 위대한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16세기에 술레이만 대제는 건축가 시난에게 좀 작지만,

하기아 소피아와 유사한 구조의 술레이마니예 모스크를 세우게 하였고,
이후 술탄 셀림 2세는 역시 시난에게 하기아 소피아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모스크를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맞은편에 세우게 하였다.


그것이 1574년 완성된 셀리미예 모스크다.

하기아 소피아보다 돔 실내 면적은 약간 작지만 구조적, 외형적으로는 보다 발전되었다.


또한 1617년에 술탄 아흐메트는 건축가 메흐메트 아아(Mehmet Ağa)에게 하기아 소피아의 가까운 곳에

보다 넓은 면적을 가진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트 자미)를 세워 마주보게 하여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하기아 소피아는 이들보다 천년이나 전에 지어졌다는 점이다.


인근에는 이리니 성당이 톱카프 궁전 바로 앞에 있지만,

오스만시대 이후로 창고로 쓰고 있어서 공개하지 않으며,
이스탄불 서쪽의 에디르네카프(Edirnekapı) 너머 에윱구(Eyüp Belediyesi)에

카리예 박물관(Kariye Müzesi)이라는 이름의 비잔틴성당이 하나 더 있는데,
비잔틴양식의 성당건축과 모자이크를 보기 위해서는 그쪽도 함께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카리예 박물관 또한 오스만 시기에 회칠로 덮여 모스크로 사용된 적이 있지만,

오히려 회칠로 덮힌 덕에 훨씬 더 나은 상태로 이콘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


이곳은 트라브존(구 트레비존드)의 아야소피아 성당과 마찬가지로 13-14세기,

즉 팔라이올로구스 양식의 이콘들 가운데서도 걸작품들을 볼 수 있으며,
회칠 전부가 벗겨진 상태라 성당으로서의 옛 모습도 확인해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데이시스 중앙부 전통적인 비잔틴 양식의 그리스도 모자이크


이들 모자이크는 이 건물이 모스크로 전환된 후 모두 회칠을 하여 몇 세기 동안 그 존재가 잊혀졌었으나
1935년 박물관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후 벽을 씻어내는 작업을 한 결과 상당수 모자이크는 빛을 보게 되었다.
몇 세기를 걸쳐 제작된 이들 모자이크는 각 시대 양식을 반영하여 그 자체로도 상당히 귀중하다.


이 그림에 보이는 예수상은 양쪽에 각각 세례 요한과 성모 마리아가 자리를 같이한

'Deesis(전 인류를 위한 기도의 표현)'라는 테마의 가운데 예수 상이다.


이 작품의 연대에 관해서는 13세기 후기라는 설과 14세기 초기라는 설이 있지만

얼굴의 음영 변화를 세밀하게 나타낸 것으로 보아 14세기 초기의 작품일 가능성이 많다.


세계 각지에서 민족적 종교적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 성 소피아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들 분쟁을 초월하고 살아남은 증인이다.


당시 모슬렘 지도자들의 종교적 관용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겠지만,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를 지닌 예술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보존된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의 하기아 소피아 내부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닦달로 인해

빠르게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비교적 장식이 간단한 편이었다.

기둥 하단 등도 조각 장식이 없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비교적 초대 교회 시절이라

성인들의 인물 묘사인 이콘의 법칙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다는 점도 있다.
아무튼 성당 내부는 금빛 모자이크를 쓰되 간단한 도안들로만 장식되었다.


그러나 이후 수백년 동안 성당은 다채로운 마감재를 사용해 예수와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 천사, 황제, 황후 및 각종 도안으로 구성된 모자이크로 장식하게 되었다.


1204년 십자군이 성 소피아 성당을 점령하면서 1000년 가까이 이어지던 성화들을 다 지우고

가톨릭 화가가 그린 성화들을 채웠기 때문이다.


당연한 게 이교도가 더럽힌 곳을 탈환했다고 명분을 내세운 십자군이

정작 그 이교도가 그린 성화를 놔둔다면 말이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교도가 세운 곳이지만 성당은 정화해 우리 종교의 성전으로 만든답시며

개조하고 성화들을 싹 지우고 다시 그렸던 것.


그러다가 1261년 여길 되찾은 정교회 측은 가톨릭 성화들을

싸그리 지우고 다시 그림들을 기록 및 그림을 토대로 재현, 복원했다.


하기아 소피아가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뀌면서

동로마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회칠로 덮여졌다.


20세기부터 시작된 복원 작업으로 몇몇 모자이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났지만,
회칠하고 역시 5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문화재인 이슬람 문양을 제거하는 데 따른 반발이 커

이 작업은 80년 넘게 중단된 상태이다.


사실, 1000년에 이르던 옛 성화들을 제거하던 게 다름아닌 기독교 십자군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하여 제거된 성화들이나 모자이크를 복원한 것도 1261년 일이므로,
200년 남짓 남아있다가 1453년 이후 회칠로 덮여졌기에 500여년이 넘은 이슬람 문양도

문화재로 값어치가 있는 만큼, 함부로 제거하기에 그렇다.


설계, 구조와 재료, 보수


비잔티움 건축의 전성기의 정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며

또한 대단히 빠르게 완공한 역사적 건물이다.


하지만 기존 건축물을 뛰어넘는 규모와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한 무리한 공사와

실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기본 구조는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와 같은 석조 볼트 천장을 활용한 광대한 면적의 건물과
"판테온"과 같은 돔형 천장을 가진 건물의 조합을 시도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로써는 새로운 형태의 건물이었다.


물리학자인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안시미오스가 설계를 한 것도 특징적인 부분인데,
당시의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장인 집단의 축적된 경험적 지식을 기반으로 설계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다.


물리와 수학 이론을 동원하여 건축물의 구조를 설계하려고 했던 것은

오늘날의 건축 공학으로 이어지는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전례없이 큰 건축물을 원했고, 전례가 없다는 것은

기존 장인들의 경험적인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물리적인 계산이 불가능했던 당시로써는 한계가 명확하여 하기아 소피아의 구조는 불완전했고,
완공되기 전부터 거대한 돔과 단기간의 완공을 위한 부실 공사 때문에 붕괴될 위기가 많았다.



[터키 여행-이스탄불]아야소피아 박물관/Hagia Sophia Museum/Byzantine/Mosque/Theodosian Walls




[아주TV 동영상]비잔틴 건축물의 최고 걸작! 터키 성 소피아 성당




참조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406881&cid=58425&categoryId=58425
https://namu.wiki/w/%ED%95%98%EA%B8%B0%EC%95%84%20%EC%86%8C%ED%94%BC%EC%95%84#fn-8
http://rigvedawiki.net/w/%ED%95%98%EA%B8%B0%EC%95%84%20%EC%86%8C%ED%94%BC%EC%95%84
https://blog.naver.com/naya_hug/40064874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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