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Tretyakov Gallery Room 13 - 14. 바실리 트로피닌,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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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Tretyakov Gallery Room 13 - 14. 바실리 트로피닌,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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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m 8 - 15] 19세기 전반기 회화 <초기 풍속화의 시대>

 

Self-Portrait with Brushes and a Palette Against a Window Facing the Kremlin. 1844.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by Vasily Tropinin. Tretyakov Gallery Room 13.

 

크렘린이 내려다 보이는 창에 브러시와 팔레트가 있는 바실리 트로피닌 자화상. 
바실리 트로피닌(Vasily Andreevich Tropinin 1776~1867)은  러시아 노브고로드 현 

칼포보 촌에서 출생하여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농노 출신 화가다. 
트로피닌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푸시킨 상> (1827, 레닌그라드, 푸시킨기념관),  
<레이스를 짜는 여자>(1823,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미술관)가 유명하다. 

19세기 러시아 회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 거리 가운데 하나가  
농노출신 화가들의 엇갈린 운명이다.  
농노는 지주의 재산이므로 그의 삶은 전적으로 주인의 호의에 달려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여기서 한번 상상을 해보자.  
때는 농노가 집에서 기르는 소나 말과 다름없었던 그 시대,

우리는 넓은 토지를 보유한 귀족 지주들이라 하자.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고매한 신분의 사람들이지만 
휴머니즘에 대해서는 어떤 교육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아마 우리의 일상은 좀 따분할 것이다.  
물려받은 넓은 땅이 있으니 그저 농노와 가축들을

엄히 다스리기만 하면 먹고사는 문제는 다 해결된다.  
게다가 농경사회의 일상은 거의 변화가 없다. 
어제 같은 오늘, 그리고 오늘 같은 내일이 있을 뿐이다. 

하루를 가득 채우고 있는 지독한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벤트가 필요하다.  
심심찮게 열리는 무도회는 그래서 우리의 중요한 소일거리가 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고 서로 교양을 뽐낸다. 
하지만 사실 주된 관심은 이성에 관한 것이다. 
능력이 되고 운이 좋은 사람은 불륜을 즐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질시에 가득차서  
그에 대한 가십을 씹으며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그렇게 오늘도 무료한 하루가 그럭저럭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부리고 있는 농노들 가운데 바실리란 녀석이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 요놈 봐라. 역시 소나 말보다는 사람이 더 기특한 존재이다.  
특이한 재능이 발견된 바실리는 그때부터 경작용 가축에서 
나리의 무료함을 달래줄 애완동물로 보직이 바뀌게 된다. 

나리는 우선 이것저것 그림을 그려 보게 할 것이다.  
그리고 주위의 다른 귀족들을 불러 자랑하기 시작할 것이다.  
부러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간 귀족들은 자신의 농노들 가운데에는

저런 녀석이 없는지 찾아볼 것이다. 

이제 이 애완동물은 주인에게 큰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어느 날 주인은 이 녀석의 가치를 좀 더 키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좀 더 재미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바실리는 미술학교에 입학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된다. 

바실리는 처음에 무척 행복했을 것이다.  
힘겨운 노역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그림만 실컷 그리면 되었으므로.  
그는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고,  
주변의 풍경과 농민들의 생활을 그려 나간다. 

주인님의 배려로 미술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는 꿈이 아닐까 싶었다.  
주님과 주인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밤새 올렸다.  
학교에서 만난 동료학생들은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들이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의 재능을 부러워하며 친구처럼 대해주기도 하였다. 

바실리는 행복했다.  
아무 대중없이 그려대던 그림은 하루하루 수업을 받는 동안 틀이 잡혀가고,  
이제 예술이 무엇인지를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전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림이 무르익을수록 기쁨도 커갔지만 마음 깊은 곳에 언제부턴가  
까칠한 모래 한 알이 박혀 아픔을 주고 있다.  
그림에 대한 주위의 찬탄이 커질수록 아픔도 점점 커짐을 느낀다.  
문제는 그의 신분이 미천한 농노라는 것이다. 

미술학교의 동료들은 저마다 삶의 주체로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으나 그는 그럴 수 없다.  
바실리에게 그림 그리기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인가.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창의적으로 표현하고 행복을 느끼는 행위가 아니라  
주인을 기쁘게 하는 노동일 뿐인 것이다. 

그의 그림이 아무리 빛을 더해도, 어느 날 붓을 놓고 다시 밭으로 나가라는  
주인의 한 마디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일장춘몽으로 돌아가는 신세인 것이다.  
농노의 신분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지금까지 그는 그것을  
숙명으로 생각했을 뿐이므로 이처럼 뼈저리게 절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고통은 점점 깊어간다. 밤이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가축으로 지내던 시절이 더 나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는 비록 몸은 고되었으나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어느 날 바실리의 재능을 아끼던 스승이 그의 딱한 처지를 보다 못해 나선다.  
그는 바실리를 농노신분에서 풀어주도록 주인에게 간청한다. 
주인은 당연히 펄쩍 뛸 것이다. 
스승은 그를 열심히 설득한다.  
바실리의 재능을 한낱 농노의 흥미로운 재주쯤으로 썩혀버리는 건 너무 아깝다.  
그가 당당한 예술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당신께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아마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평생토록 보답할 것이다.        

우리가 만약 바실리의 주인나리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여기서 유의할 것은 우리 휴머니즘의 눈높이를  
당시 러시아 귀족의 평균적 수준으로 한참 내려 맞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농노를 매매하거나 재판도 없이 형벌을 가하는 일에 가책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랬으므로,  
그런 일에 왜 가책을 느껴야 되는지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의 수준으로 말이다. 

러시아 미술사에는 실제로 이와 유사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결과는 두 가지 상반된 경우로 나와 있다. 
먼저 고난 끝에 행복을 찾은 사나이, 바실리 트로피닌(1776~1857)의 이야기이다.   
시집가는 주인댁 따님의 혼수로서 모르코프 백작 가문에 들어가 살게 된 그는  
그림에 대한 재능이 눈에 띄어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에 보내졌다.  
당시 아카데미에 농노가 입학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교장의 재량에 속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때그때 달라졌다.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  
물을 만난 고기처럼 그림에 빠져든 트로피닌.  
그의 뛰어난 능력은 학생들 가운데에서 금방 드러나게 된다.  
이를 아깝게 생각한 교장은 그의 주인에게  
농노의 신분에서 풀어줄 것을 간청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백작은 트로피닌을 학교에서 빼내어 우크라이나 시골로 데려가 버린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농노의 삶을 이어가게 된다.  
트로피닌의 하루는 온갖 허드렛일과 그 틈틈이  
주인이 주문하는 그림을 베끼는 노동으로 저물었다. 

자신도 창의성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미 인식해버린,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그의 절망이 얼마 컸을까. 
하지만 그렇게 그의 인생이 끝나버렸다면 해피엔딩이라 할 수 없다.  
오랜 고통의 시간이 지난 후 그에게 마침내 기쁜 날이 찾아온다.  
트로피닌이 47세가 된 1823년, 주변의 설득으로 백작이 마침내 마음을 바꾼 것이다. 

왜 그랬을까. 평판을 의식해서였을 수도 있고,  
마음 한구석에 숨어있던 인간적인 연민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혹은 당시 몰락해가던 귀족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돈이 궁해서일 수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트로피닌은 그의 신분과 가족을 백작으로부터 돈을 주고 산 것으로 나와 있다. 
평판에 대한 의식과 연민이 비록 얼마간 작용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이 일은 공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르코프 백작을 치사한 인간으로 비난하는 것은 그리 적절한 처사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그라면 다른 처신을 하였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트로피닌은 해방된 이듬해에 아카데미의 회원 자격을 얻게 되었고,  
그후 삼십 여 년간 인정받는 화가로서 행복한 삶을 살다 갔다.

 

자화상. Self-Portrait. 1830.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바실리는 백작의 농노로 태어났다.  
주인의 딸이 시집갈 때 지참금으로 함께 보내진 노예. 
손재주가 많아서 빵기술을 배워오라고 상트 페테르부그로 보내졌는데 거기서 미술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원래 노예는 입학이 안 되는데 마침 그때 교장이 트로피닌의 재주를 알아보았나 보다.​  
교장이 바뀌어 트로피닌은 아카데미에서 쫒겨난다. 
재주를 알아본 교장이 백작에게 자유를 주라고 간청했지만 들어줄 리가 없다. 

그림을 잘 그리는 노예, 남에게 자랑하기 딱 좋은 노예를 풀어줄 리가 또한 없다. 
영지로 돌아온 트로피닌. 빵 만들고, 백작이 시키는대로 거장의 그림을 모사하고, 초상화를 그린다. 
그때 트로피닌에게 그림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그 시기에 바실리는 아들의 초상화를 그린다. 왼쪽 상단에서 비춰지는 빛속에 환히 드러난 아들.
아들만은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함. 아들은 과연 자유를 얻었을까? 
트로피닌은 47세에 백작의 지인들이 설득해서 자유인이 된다. 
트로피닌이 돈을 모아 자유를 샀다는 설도 있다. 
그때부터 트로피닌은 부자들의 초상화를 그리지만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도 그린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재능 있는 화가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제과 예술을 공부하기 위해 젊은 예술가는 여가 시간에  
제국 예술 아카데미의 수업에 비밀리에 참석했다.  
트로피닌 주인의 사촌이 그의 작품을 보고 재능 있는 젊은이의 교육비를 지불하도록 요청했다.  
이 결정은 젊은 예술가가 자신의 기술을 업그레이드 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아내인 안나 (Anna)를 만날 수 있게 했다. 

Vasily와 달리 Anna는 자유 농민이다.  
당시의 법에 따르면 결혼 생활은 자발적으로 종업원이 되어야 했지만 사랑에 찬성하여 결정을 내렸다.  
아카데미를 졸업 한 직후, 트로피닌은 쿠카브키 (Kukavki) 마을의 교회를 페인트칠하라는  
첫 번째 명령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는 일을 마치고 연인과 결혼했다. 
1823년, 트로피닌에게 대망의 사건이 일어났다.  
부활절을 위한 선물로, 그는 주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5년 후, 그의 아내와 아들에게도 관리 권한이 부여되었다.  
그들의 행복한 가정 생활은 거의 5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Anna가 사망한 1855년에 끝났다. 

 

The Lace Maker, 1823.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74.7 x 59.3cm. Tretyakov Gallery Room 13.

레이스 뜨는 일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근면함과 미덕을 드러내는 고귀한 일로 여겨져 왔다.  
레이스가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녀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레이스가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울지를 말이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미인 대회를 하면 반드시 5위 안에 들어갈 이 미인은  
바실리 트로피닌(1776~1857)이 그린 <레이스 뜨는 여인>이다. 

<레이스 뜨는 여인>의 군살 하나 없는 팔은 조각처럼 매끈하고 단단해 보인다.  
화면에 떨어지는 빛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명암을 만들어낸다.  
텅 빈 배경은 관람자로 하여금 그녀에게만 집중하도록 한다. 

​여러 가지 작업 도구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이것은 풍속화적인 관점이 아니라  
인물을 신분이나 업적을 통해 묘사하는 고전주의적 관념에 따른 그림이다.  
17세기 얀 베르메르의 그림 속 여인은 레이스 뜨기에 여념이 없다. 

섬세한 노동을 위해서는 대낮의 밝은 빛이 필수적이다.  
환한 빛에 노출된 여인의 이마와 손에 나타난 드라마틱한 음영은  
집중력을 요하는 일에 몰두한 작업자의 내적 긴장감을 표현하고 있다.  

​20세기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는 베르메르의 작품 <레이스 뜨는 여인> 을 보고 

베르메르는 바늘을 그리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바늘에 찔린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작업하는 여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고 바늘도 보이지 않지만  
베르메르의 작품은 압축적인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베르메르 작품의 인물은 초상화적이라기보다 풍속화적으로 해석되어 있다. 

즉 베르메르가 '노동'을 강조했다면 트로피닌은 '인물'을 강조했다.  
트로피닌의 그림 속 여인은 관람자를 위해 기꺼이 일을 멈추고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고 있다.  
트로피닌은 고전주의적인 명료한 필체와 섬세한 감정을 결합시킴으로써  
평범한 여인을 위엄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녀는 마치 민중의 옷을 입고 등장한 여신과도 같은 존재다.  

​트로피닌은 상류층 귀족 부인을 그리는 방식대로 이 평범한 농민 여인을 그렸다.  
물론 그림 속 여인은 그림 속의 귀족들처럼 이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이상화가 역겹거나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농노 출신 화가 트로피닌이 
귀족 부인이나 위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농민 아낙네에게서도 
인간적인 존엄성을 발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친숙하고도 자기 완결적인 미소는 그녀를 그림 속 어느 귀부인 못지 않은  
당당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 만들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녀의 현실은 어땠을까?  
레이스 뜨기는 여성 민중들에게 부가된 과외 노동이었다.  
십중팔구는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가사 노동을 하고 
아이들을 돌본 다음 밤에 주로 과외 노동을 하였다. 
​간혹 재주가 뛰어나 레이스 뜨기만 전문으로 하는 여성의 경우에도 
가사 노동과 육아를 면제받을 수는 없었다.  
가전제품이 전무하던 19세기 여성들의 노동 강도는 오늘날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다.  
이 그림을 그린 트로피닌도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러시아 귀족들은 확실히 더 부유하고 행복하고 세련되어졌다.  
그러나 귀족들이 '황금 시대'를 누리고 있을 때, 
시골 영지의 민중들은 여전히 암흑 속에서 살았다.  
러시아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19세기까지 봉건 농노제가 유지된 나라다. 

예카테리나 2세 재위 기간에 카자크의 농민 푸가초프가 
반란을 일으켜 여제를 위기에 몰아넣기도 했다.  
그러나 반란은 곧 진압되었고 1785년 발표된 '귀족 헌장'은 
오히려 귀족의 특권을 더욱 강력하게 보호했다. 
당시에 농노 소유주는 농노를 체벌로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정도로 농노의 처지는 비참했다.  
자유로운 신분의 농민의 삶도 참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바실리 트로피닌은 이런 비극적인 현실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농노로 태어난 그의 주인인 백작의 딸이 
모르코프 백작 집안으로 시집을 가면서 결혼 지참금으로 함께 보내진다.  
비록 농노 신분이었지만 트로피닌은 빼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손으로 하는 일이라면 못하는 것이 없었던 그를 
주인은 재빵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낸다. 

화려한 도시는 그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그림에 대한 열망을 부추켰다.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농노 또한 자랑할 만한 것이어서 
주인은 그의 아카데미 입학을 도와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입학 자격은 교장의 입장에 따라 그떄그떄 달라졌는데,  
트로피닌이 입학할 당시에는 다행히 농노의 입학이 허용되었다. 
그러다 1817년에 올레닌이 미술 아카데미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농노 출신 학생의 입학이 금지되었고 재학생들까지 쫓겨났다.  

트로피닌은 아카데미에서도 발군의 재능을 보여 주었다.  
1804년 미술 아카데미 연례 전시회에 출품된 그의 작품은 예카테리나 2세의 주목을 받는다.  
당시 미술 아카데미 교장이었던 스트로가노프는 트로피닌이 농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중재를 하지만 정작 주인인 모르코프 백작은 재능있는 농노를 잃기 싫어 
졸업 직전에 그를 우크라이나의 영지로 다시 불러들인다. 

근대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재능있는 젊은 화가는 
신분이라는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꿈이 꺾이고 만다.  
영지에 돌아와서 그는 제빵사로, 하인으로 일한다. 
그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유럽과 러시아 거장들을 그림의 모사하기도 하고  
주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우크라이나의 고립된 시골 영지 생활을 회상하며 트로피닌은 그때 
자신은 노예에 불과했다고 술회했다.

 

Zolotoshveyka​, Gold-Embroideress, 1826,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81.3 x 63.9 cm. Tretyakov Gallery Room 13.

농노들에 대한 트로피닌의 깊은 이해와 따뜻한 배려가 그림에 배어 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어떤 대우도 받지 못하는 농노들이지만,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관찰해 가장 최상의 순간을 그림으로 탄생시킨다. 
그림 속 소녀 또한 자수를 놓던 손길을 멈추고 가장 깨끗하고 선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그런 소녀의 청순함과 아름다움이 이 그림에서 넘쳐난다.

눈이 예쁜 소녀들이 우릴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일하던 손을 멈추고 얼굴을 돌려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 자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마라 속삭인다. 
잘 익은 복숭아 같은 볼에 분홍빛 생기를 넣고, 예쁘게 부풀어 오른 입술에 살짝 붉은빛을 물들이며, 
미소 짓는 도톰한 입매에 새침함을 덧칠하고, 적당히 솟은 콧날로 얼굴 전체에 귀품을 입힌다. 
매끈한 소녀의 피부는 환한 빛을 받아 더욱 건강하게 빛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가는 빛을 뿌리고 생명을 넣어 소녀들의 맑은 눈동자를 그렸으리라. 
선하고 순수한 눈매를 그리기 위해 세밀한 붓 터치를 반복했을 거다.

그렇게 탄생한 트로피닌의 소녀들은 아주 매끈하고 싱그럽다. 
작가의 손에 순차적으로 살아났을 소녀들의 생명력을 상상하며 그림을 본다. 
바로 눈앞에서 숨 쉬는 듯 생생함이 느껴진다. 
손으로 만지면 체온이 느껴질 듯 그림이 따뜻하고,  
소녀들이 품어내는 풋풋함이 화폭 전체를 생명력 있게 메운다.

 

Spinner.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부드럽고 은은한 아름다움.  
예술 작품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작가들의 본성이나 내면을 읽어낼 수 있다.  
트로피닌은 분명 선한 본성을 가졌을 거다.  
작품에서 그의 내면이 우러나온다.  
'아름다운 것이 가장 선한 것이다'라고 말한 도스토옙스키의 가르침처럼  
예술을 향유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을 받아 스스로 선해지는 데 있다.  
트로피닌의 소녀가 충분히 나를 선하게 만든다.

인간 개개인의 심성 표현을 중시한 러시아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릴 때 
모델의 표정과 내면 정서를 부각하는 데 중점을 둔다. 
트로피닌은 귀족들의 전유물인 초상화에 과감히 평민 소녀를 모델로 등장시키고 
일하는 모습 속에서 발현되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진실되게 표현한다.

소녀들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포착해 내는 트로피닌의 관찰력과 표현력이 정말 대단하다. 
서양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트로피닌의 소녀들만큼 순수하고 깨끗하고 
어여쁜 초상화가 또 있을까? 감히 최고라 말하고 싶다.
그러나 트로피닌의 화가로서의 삶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19세기까지 봉건 농노제가 유지되었던 러시아는 
귀족과 농노 이 두 계급으로 분리된 사회구조였다. 


당시 귀족의 소유물이었던 농노는 자유로이 공부할 수도 여행을 다닐 수도 없었으며, 
지주들은 농노를 체벌로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불합리한 신분제도를 가진 러시아였다. 트로피닌 또한 농노 출신이다. 
다행히 트로피닌은 지주의 허가로 뻬쩨르 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 
정규 미술 교육을 받는다.

이때 트로피닌의 천재적 재능이 빛을 발해
미술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예카테리나 2세의 극찬을 받는다. 
당시는 황제의 말 한마디가 요즘의 그 어떤 상보다 가치가 있었을 거다.
하지만 트로피닌의 급성장을 두려워한 주인은 졸업도 하지 않은 그를 
고향으로 불러 들이고 미술교육을 중단시킨다. 
천재적 재능을 가졌으나 트로피닌은 그렇게 화가의 꿈을 접고 
지주의 뜻에 맞춰 살아가게 된다. 

꿈을 펼치지 못하는 천재화가 트로피닌의 시골에서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 했을까.
그러던 트로피닌은 주위 지인들의 끊임없는 부탁으로 44세가 되어 
신분 해방이 이뤄지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화가는 인고의 세월을 보냈겠으나 농민으로 보낸 시간들이 그림에 깊이 배어 있다. 
농노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따뜻한 배려가 예술로 승화되어 있다. 
노동하는 민중, 농노에게도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 삶이 있음을 여러 
그림들을 통해 세밀하게 표현한다.

 

Portrait of Arseny Tropinin, Son of the Artist, 1818, 트로피닌 아들의 초상.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이 그림은 트로피닌이 미술 아카데미에서 쫓겨난 후
우크라이나의 모르코프 백작의 영지에서 농노로 일할 때 그린 아들의 초상화다.  
사려깊어 보이는 소년은 모델 서는 일이 어색한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꿈을 접어야 했던 아버지는 아들을 그리고 있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속내를 알고 있는 것일까?  
아들만은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빛의 축복을 내리고 있다.  
빛은 흰색 셔츠 깃에 반사되어 소년의 눈썹과 코를 타고 흘러내려 목과 쇄골에 이른다.  
설렘같은 조용하면서도 가쁜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다. 

​빛이 강한 만큼 얼굴의 반대편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화가는 어린 소년이 세상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을 이해하는 듯이 어두움을 드리운다.  
이 어두움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자유는 아주 늦게 찾아 왔다.  
1821년 모르코프 백작은 식솔을 거느리고 모스크바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때 농노인 트로피닌도 함께 모스크바에 오게 된다.  
그의 재능을 알고 있는 지인들이 모르코프 백작을 여러모로 설득해 
마침내 그는 농노 신분에서 해방된다. 

​그의 나이 마흔네 살 때였다.  
선천적으로 선량한 사람이었던 트로피닌의 그림 속에는 어떤 악의도 없다.  
그는 귀족이건 농민이건 똑같은 태도로 인물을 대했다.  
트로피닌은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지만 농노로 살았던 자신의 삶을 잊지 않았다. 

그는 노동하는 민중의 삶을 아름답게 그려 내며 그들의 덕성을 칭송한다.  
<레이스 뜨는 여인>도 이런 맥락에서 그려진 것이다.  
이 드림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해도 어쩔 수 없다.  
실제로 목가적이고 조화로운 그의 인물들은 소비에트 시절에는 
'너무나 수동적이고 명상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저항 의식의 결여를 지적한 것인데, 트로피닌이 농노의 거친 삶을 

견뎌 낼 수 있었던 건 오히려 이런 고전주의적인 회화 감각 덕분이었다.  
감정적 중용을 중시하는 고전주의적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로 
트로피닌은 삶의 어두움을 지워버렸다. 

그는 오래 살았다. 농노에서 해방된 말년은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해방된 농노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많은 농노들이 1863년 농노 해방령이 내려질 때까지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 

 

An Old Man. ​지팡이를 만드는 장인.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oil on canvas. 
76 x 56 cm. Tretyakov Gallery Room 13.

이 그림은 트로피닌의 여러 초상화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그림이다. 
아쉬운 점은 실제로 봐야 느낄 수 있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지만 이렇게 포스팅해 본다. 
오랜 세월 저 자리에 묵묵히 앉아 평생을 일했을 장인의 모습이다. 
그의 눈빛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세월을 참아낸 그의 시간들이 그림 전체에 배어 있다. 
굳은 살 밴 그의 손에서, 숱이 얼마 남지 않은 흘러내린 그의 머리 카락에서, 
꽉 다문 입술에서, 평생을 관조했을 그의 삶을 읽어낼 수 있다. 
초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감동을 품은 그림이다.

 

Portrait of A. I. Baryshnikov, 1829.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Portrait of E. A. Sisalinoy, 1846.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Portrait of Ivan Vitali, 1839.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Portrait of Vladimir Davydov.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Portrait of V. M. Yakovlev, 1830.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A Spinner. 1820.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Portrait of A. I. Tropinina, the Artist`s Wife, 1809.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Portrait of the Writer and Historian Nikolay Karamzin, 1818.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Guitarist, 1823.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Portrait of Morkov.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Woman at the window, 1841.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3.

 

Bulakhov Peter, 1823.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Portrait of Konstantin Ravich. 1823.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Portrait of Countess N. A. Zubova. 1834.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Portrait of Karl Brulloff, 1836.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Portrait of Yu. F. Samarin in the Hunting Dress. 1846.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Boy with zhaleyka.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An Old Man. ​by Vasily Tropini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0

이 그림은 트로피닌의 여러 초상화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그림이다. 
그의 눈빛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세월을 참아낸 그의 시간들이 그림 전체에 배어 있다. 
굳은 살 밴 그의 손에서, 숱이 얼마 남지 않은 흘러내린 그의 머리 카락에서, 
꽉 다문 입술에서, 평생을 관조했을 그의 삶을 읽어낼 수 있다. 
오랜 세월 저 자리에 묵묵히 앉아 평생을 일했을 장인의 모습이야말로
초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감동을 품은 그림이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3. 바실리 트로피닌 작품 전시실

 

Self Portrait, 1811, 자화상.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화가이자 판화가인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Alexei Venetsianov 1780-1847)는 
러시아 농민을 주제로 한 장르화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러시아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사립기숙학교에서 공부한 뒤 디자이너로 일했다. 

1802년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 측량기사로 일하며 독학으로 회화를 공부했다.  
1820년대 초 공무원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생활 속의 장르화를 그렸다.  
미술아카데미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으며, 그의 많은 제자들은 '베네치아노프 파'를 형성,  
러시아 미술사의 주요한 풍속화가 그룹으로 성장했다.   
베네치아노프는 사고로 길에서 비명횡사했다. 

19세기 들어 농노 출신 화가가 늘어나자 마침내 화단에서도 
신분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선봉에 선 사람은 미술아카데미 원장 올레닌이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아카데미에서 농노 출신 학생들을 추방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하고 외국 유학을 앞둔 학생들의 발목을 잡고 앞길을 막는가 하면,  
과정 중인 학생들은 지주에게 돌려보내 그들의 '신분에 걸맞은' 하인이나 요리사 등으로 일하게 했다. 

이런 억압에 분노한 자유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였다.  
그는 하층 계급 출신들을 위한 작은 미술학교를 여는 것으로 나름의 대안을 모색했다.  
특히 1818년 아버지의 유산으로 트베리 현 사폰코보 마을의 땅을 사게 되자  
그곳에 학생들을 불러 모아 안정적인 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 

시골 마을에 자리 잡은 것이 화가로서 베네치아노프에게는 큰 축복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러시아 농민의 일상과 노동을 주제로 한 수많은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러시아 미술사는 베네치아노프를 러시아 미술사상 최초로 
농촌 세계를 본격적으로 형상화한 화가로 평가한다.  

데카브리스트의 영향으로 민중에게 봉사하는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베네치아노프는  
러시아 회화사에서 처음으로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화가이다.  
그의 그림은 흡사 밀레의 농촌 풍경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사회적 모순에 대한 치열한 번민과 문제제기를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사후인 1860년대에 “미술을 인민에게”라는 구호아래 러시아 화단을 뒤집어 놓았던  
<이동파>의 정신이 그에게 닿아 있으며, 바실리 페로프(1834~1882) 등이 꽃피운  
러시아 풍속화의 원류도 베네치아노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베네치아노프가 농노들을 위한 미술학교를 설립한 것은, 1817년 A. 올레닌이란 냉혈한이  
미술아카데미의 새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농노출신 학생들을 깡그리 추방한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아카데미에는 농노 신분의 학생들이 상당수 재학하고 있었다.  
그때 러시아 인구의 60% 이상이 농노였던 점을 생각하면 이는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농노 화가들이  잠시 신분을 잊고 자유와 예술을 만끽하던 행복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올레닌에 의해 추방된 농노들은 다시 장원으로 돌아가서 숙명처럼 고된 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베네치아노프는 그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그림을 가르치던 아카데미와는 달리  
주변의 꽃과 가구, 실내장식을 스케치하며 실제의 생활에서 부딪치는 대상들에 주목하도록 지도하였다.  

19세기 후반을 장식한 크람스코이와 레핀, 수리코프, 세로프, 브루벨에 이르면  
러시아의 그림들은 미학적 기준으로도 서구의 걸작에 뒤지지 않을 만큼 수려하다. 
그러나 그 이전의 작품들은 주류로부터 때로

‘키치 (Kitsch, 대중적 싸구려 문화)’로 폄하될 만큼 세련되지 못한 점들이 있다.  
하지만 프랑스나 네덜란드의 회화와 러시아의 회화는 즐기는 방법이 달라야 하지 않을까. 

19세기 전반까지의 러시아 그림은 비록 고급스럽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 배경과 내용에서 독보적인 역사성을 갖고 있다.  
모네나 고흐의 그림에서 거친 터치와 빛나는 색채를 몰역사적으로 즐기듯이, 
19세기 러시아의 그림들로부터는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그 사회에서  
어떻게 무르익어 갔는지를 되새겨 보는 것이 제 맛을 느끼는 방법이 아닐까. 

미술아카데미에서 쫓겨난 농노 화가들을 위해 트베르 지방의 시골에 학교를 세워  
그림을 가르쳤던 베네치아노프의 독특한 이력은, 당시 대부분의 동료화가들과는 달리  
그가 아카데미 출신이 아니라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러시아 사회의 비주류로서 귀족들을 조롱하는 풍자화를 남기기도 한 사람이다.  
그러나 평화롭기만 한 그림 속 풍경이 시사하는 바처럼, 베네치아노프는 사회적 모순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시정하려는 투철한 의식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말자.  
그는 무엇보다 불행한 농노 화가들에게 어버이와 같은 사람이었으며, 러시아 회화사에서 최초로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사람이고, 파벨 페도도프(1815~52)를 거쳐 바실리 페로프(1834~82)에서 
만개한 장르화(풍속화)를 균형 있고 완전한 예술적 체계로 처음 정립한 사람이다.  
그것만 해도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는 우리가 주목할만한 화가인 것이다.

In the Fields. Spring, 1820,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51,2 х 65,5 cm. Tretyakov Gallery Room 14.

눈이 녹고 푸릇푸릇한 풀들이 돋아나는 땅에 여인은 첫 받갈이를 하고 있다.  
두 마리 말을 이끄는 그녀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해 보인다.  
그녀는 땅과 하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미덕을 강조한 탓인지 여인을 말보다도 더 크게 그렸다.  
여인은 작업복이 아니라 축제용 의상을 차려 입고 있다.  
의도적으로 농민의 삶을 이상화시키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그림의 매력은 여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놀고 있는 젖먹이 어린아이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들판에 앉아 노는 아이는 이 모든 봄 풍경의 가장 핵심 주제라하겠다.  
아기는 모르지만 그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 밭에서 풍요를 기원하는 것 보다 더 큰 풍요를 어린아이에게서 기대할 것이다.  
비록 자기땅은 아니지만 여인의 시선은 농민들이 갖고 있는 토지에 대한 모성애를 그대로 보여준다.

 

In the Fields. Spring, 1820,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51,2 х 65,5 cm. Tretyakov Gallery Room 14.

눈이 녹고 푸릇푸릇한 풀들이 돋아나는 땅에 여인은 첫 받갈이를 하고 있다.  
두 마리 말을 이끄는 그녀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해 보인다.  
그녀는 땅과 하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의 미덕을 강조한 탓인지 여인을 말보다도 더 크게 그렸다.  
여인은 작업복이 아니라 축제용 의상을 차려 입고 있다.  
의도적으로 농민의 삶을 이상화시키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그림의 매력은 여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놀고 있는 젖먹이 어린아이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들판에 앉아 노는 아이는 이 모든 봄 풍경의 가장 핵심 주제라하겠다.  
아기는 모르지만 그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 밭에서 풍요를 기원하는 것 보다 더 큰 풍요를 어린아이에게서 기대할 것이다.  
비록 자기땅은 아니지만 여인의 시선은 농민들이 갖고 있는 토지에 대한 모성애를 그대로 보여준다.

 

A Peasant Girl with a Calf, 1820, 소녀와 송아지.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65.5 x 53 cm. Tretyakov Gallery Room 14. 

베네치아노프는 귀족 화가이면서 자신의 집에 농노를 위한 미술학교를 만들고 
제도권 안에서 교육받지 못하는 농민들이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것이 대중 미술학교의 전신이다. 
또 그는 농민의 일상을 그림으로그린 최초의 작가이기도 해서 
러시아 미술사에서 풍속화의 처음을 연 작가로 베네치아노프를 꼽는다. 

그의 대표작 <소녀와 송아지>에는 소녀의 순박한 이미지와 어린 송아지의 맑은 눈, 
순수한 이미지가 서로 잘 어우러져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순박함이란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게 해준다.
그는 농민의 일상을 그림으로 그린 최초의 작가이기도 해서 
러시아 미술사에서 풍속화의 처음을 연 작가로 베네치아노프를 꼽는다. 

 

That is, Those Fathers Dinner!, 1824. 여기, 아빠의 저녁이 있다.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25.8 X 20.8 cm. Tretyakov Gallery Room 14.

1820년대에는 농부 주제가 베네치아노프의 예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림 “아버지의 저녁이 있다” 는 Imperial Academy of Arts (1824)의 첫 번째 보도 전시회에서 
발표되었으며 우유로 주전자를 떨어 뜨리고 그것을 흘리는 것에 대해 소년이 슬픈 표정을 짖고 있다. 
1820년부터 아카데미 홀은 사람들, 즉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아무 제한없이 들여 보낼 수있었다. 
베네치아노프의 예술은 그들과 공감하고 있었다. 


Imperial Academy of Arts V. I.의 비평가 및 미래 컨퍼런스 비서 Grigorovich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우유가 담긴 주전자를 떨어 뜨리고 흘려서 슬퍼하는 소년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했다. 
그의 충성스러운 친구인 개는 작은 주인의 불행을 같이 느끼고 있다. 
이 그림은 그 구성, 조명의 힘, 그리고 다소 큰 것 같은 왼발을 제외하고 
전체 인물을 아주 잘 묘사 한 점에서 돋보인다.” 

진정으로 감동적으로 묘사된이 장면은 감상적인 작가의 작품과 조화를 이루어 
약간 목가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사람들의 정신”에 대한 낭만적인 탐색, 관습과 방법에 대한 연구와 일치한다.

 

Summer, Reaping, 1827. 여름 수확.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Head of an Old Peasant, 1825.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Zakhar, 1825.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Room 14.

 

Portrait of the Artist's Daughter Alexandra, 1825~1826.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Nurse with a Baby, 1830.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Portrait of Merchant Obraztsov, Date unknown.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Gril with the Cornflowers, 1820.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Portrait of the Merchant's Wife Obraztsova, 1830.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Bather with a Cup, 1832.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Portrait of V.S. Putyatina, 1815~1816.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The Spinner, 1838.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Peasant Girl Embroidering, 1843.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Haymaking, Date unknown. by Alexei Venetsianov.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14.

 

Portrait of Nikolai Gogol, 1840. 니콜라이 고골의 초상화. by Otto Friedrich Theodor von Mölle. 
oil on canvas. 59 X 47 cm. Tretyakov Gallery Room 14.

화가 오토 프리드리히 테오도르 폰 묄러 (Otto Friedrich Theodor von Möller 1812–1874)
오토 묄러는 Sõmerpalus에서 장관이자 제독인 Otto von Möller의 아들로 태어났다 . 
그의 아버지는 군사 항구 건설의 감독자였다. 
그는 장교직으로 갈 수 있었지만 군 경력을 원하지 않아 사임했다. 
1840년 묄러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묄러는 작가 니콜라이 고골을 만났는데, 
고골의 부탁으로 그에게 있어서 평생의 대표작이 되는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이 고골의 초상화는 소련 우표로 두 차례에 걸쳐 사용되었고 
그 외에도 여러 러시아 그래픽 아티스트로 재현되었다.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Nikolai Vasilievich Gogol 1809~1852)은 

우크라이나 작가이며 극작가이다.
1809년 우크라이나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818년 풀타바 군립학교를 거쳐 1829년 네진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젊었을 때 배우를 지망했으나 성공하지 못해 문학으로 전환한 고골은 
철학, 문학, 역사에 관심을 두었고 이후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을 쓰게 된다. 

1827년에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주하여 우크라이나 인민의 생활을 취재한 
소설 <디카니카 근교 농촌 야화>를 출판하여 크게 명성을 얻었으며, 
이때부터 푸시킨을 사귀고 이후 그가 남긴 대작의 소재는 
거의 대부분 푸시킨으로부터 암시를 받았다. 
1834년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의 조교로서 세계사를 강의했으나 실패하여 곧 퇴직하였다. 
1836년 희극 <감찰관>을 알렉산더 극장과 모스크바에서 상연하였다. 
이것은 진보 세력의 절찬을 받았으나, 지배 세력으로부터는 공격을 받게 되어 그는 로마로 갔다. 

그 후 계속하여 스위스 · 파리 · 로마 등지에 거주하였다. 
1847년에 또 하나의 대표작 <결혼>을 쓰고, 같은 시기에 로마에서 
명작 <죽은 혼>의 제1부를 완성했고 제2부의 집필을 시작하며 
1848년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건강을 해친 뒤였다. 
결국 <죽은 혼>을 모스크바에서 완성했으나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정신적 고뇌와 사상적 동요로 인해 
정신 착란에 빠져 원고를 불 속에 던지고 10일 간의 단식으로 자살하였다.

고골의 작품들은 대체로 부조리를 풍자하는 작품이 많은데, 
이는 그가 1년 동안 하급공무원으로 일하면서 겪었던 부조리들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부조리와 부정을 풍자한 희곡 '감찰관'으로 큰 인기를 누렸지만, 
당시 차르였던 알렉산드르 2세가 불쾌하게 여겨 안전을 위해 로마로 피신하기도 했다. 

고골은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혀질만큼 그가 러시아에서 가진 위상은 높다. 
노보데비치 묘지는 흐루시초프, 유리 가가린 등 높은 위상을 가진 위인들이 잠든 묘지이다. 
그는 생전에도 단편 모음집 '고르드문드'가 성공을 거뒀고,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푸쉬킨이 그를 칭찬하면서 러시아에서 상당히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가 '가난한 사람들'로 데뷔했을 때 
그에게 제 2의 고골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러시아에서 고골의 위상은 높다.

그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부조리에 대한 풍자가 강하게 깔려 있다. 
여기에 고골 특유의 초현실적인 묘사 등이 어우러져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압도적인 분량의 장편 소설이 많았는데, 
고골은 단편을 많이 집필했기 때문에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이런 특성으로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인 인지도는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는 전공생들에겐 인기가 많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4.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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