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륙은 고구려 초에도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반란사에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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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륙은 고구려 초에도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반란사에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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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륙은 고구려 초에도 강역 ‘반란사에 드러나’

성헌식의 ‘대고구리’…역적 발기의 아들 ‘위수(渭水, 섬서성)의 어부’ 자처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14-05-04 23:17:54

<삼국사기>에는 산상왕(연우)에 대해 “산상왕의 이름은 연우(延優)이며, 고국천왕의 아우이다”라는 짤막한 기록만이 있어 그의 출신과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구리사초·략>에는 “신대제 9년(173) 계축 정월 5일 궁인 주씨가 연우 태자를 낳았는데 방안에 향기가 가득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주씨를 마산궁 비로 봉했다”는 기록이 있어 연우는 황후의 소생이 아니라 미천한 궁녀가 낳은 서출(庶出)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산상왕은 24세에 태왕위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발기의 출생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으나, “신대제 11년(175) 을묘 발기가 호천에게 장가를 들었다”라는 기록이 있어 연우가 3살 때 발기가 결혼했으므로 연우보다 최소 십년 이상은 연상으로 보이며, 발기는 신대제의 황후 목씨의 소생으로 고국천제의 동복아우이다. 참고로 고국천제는 155년생이고, 176년 정윤(동궁)이 되었다가 179년 태왕위에 오른다.
그래서 고국천제의 황후 우씨의 농간으로 서출 연우에게 태왕위가 넘어가자 궁궐을 포위하고는 “형이 죽으면 아우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것이 예이거늘, 네가 서열을 어기고 왕위를 찬탈하는 대역죄를 저질렀다”라고 호통을 친 것이고, 발기가 요동태수 공손도를 찾아가 “저는 고구려 왕 남무의 동복아우입니다. 남무가 아들이 없이 죽었는데, 내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해 왕위에 올라 천륜의 대의를 어겼습니다”라고 하소연했던 것이다.
 ▲ 고구리사초·략에 기록된 신대제 가계도.

<삼국사기>와는 다른 산상왕의 등극 기록
산상제의 등극에 대한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인용) 산상제의 휘는 연우 또는 위거이며, 신대제의 서자(庶子)이다. 모친 주태후가 꿈에 황룡과 몸을 섞어 교합하였다기에 (신대제가) 그 꿈을 이상히 여겨 바로 그날 밤을 같이한 후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바로 사람을 쳐다보았다.
매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외모가 멋져서 (고국천제의) 우(于)황후가 연우를 좋아해 남몰래 상통하였고, 고국천제가 죽으매 초상을 숨긴 채 몰래 연우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가짜조서로써 보위에 세우고 나서 고국천제가 붕어했음을 알렸다. 우황후가 산상제를 맞아들여 고국천제의 유명에 따라 혼인했다.
산상제는 황제의 면포를 착용하고서 황후가 바치는 대보를 받았다. 황후가 절하고 말하기를 “신첩은 대행(고국천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자식이 없어 따라죽는 것이 마땅합니다만, 대행께서 이르시기를 ‘당신은 마땅히 내 동생과 혼인해 아들을 낳아 내 뒤를 잇게 하시오’라고 하셨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따라죽지 못한 가련한 저에게 조속히 훌륭한 아들을 점지해주시면, 그로써 대행의 영혼을 위로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산상제는 답례로 절하고는 대보를 받고나서 말하기를 “형수를 처로 맞아들이는 것은 온당한 일이오. 조속히 태자를 낳아 형황(고국천제)께 바치시오”라고 말했다. 이윽고 산상제가 황후를 데리고 천자의 옥좌에 오르자 백관은 산신에게 붉을 밝히며 만세를 불렀다.
 

 ▲ 형수인 고국천제의 황후 우씨(아래 사진)를 아내로 맞이한 산상제. <사진=mbc 화면 캡쳐>

적형(嫡兄) 발기의 반란
고국천제의 동복아우 발기는 연우의 적형인지라 마땅히 제위에 섰어야 마땅함에도 그러하지 못한 까닭에 이 소식을 듣고는 대노하며 사병(私兵) 300명을 데리고 궁궐을 포위하려하자 발기의 처와 아들이 함께 그러지 말라고 극력 말렸다. 그럼에도 발기가 말을 듣지 않자 발기의 처가 궁궐로 달려가 고변했다.
국상 을파소가 “나라의 주인은 이미 정해졌소. 제위를 다투는 자는 적이오”라고 교통정리를 하자, 나라사람들이 산상제를 받들어 발기를 치기로 결정했다. 발기가 와서 보니 궁궐의 문이 굳게 닫혀있고, 사방에는 지키는 병사들이 빽빽이 서있었다. 만궁이 기다리고 있다가 “태왕께서는 우애 있고 어지신 마음으로 이미 당신을 용서하시었습니다. 그럼에도 더 이상 다가오시면 후회하시게 됩니다”라고 경고했다.
발기는 울분을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하여 발기를 오랏줄로 묶어 귀양을 보냈고, 그의 군대 모두는 ‘새 임금 만세!’를 불렀다. 산상제는 형님 발기가 어리석었을 뿐이지 모의한 것은 아니라 하여, 죄를 면해주고 배천(裵川)형왕으로 봉했다. 그러나 발기는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못하고 무리를 이끌고 모반하여 두눌(杜訥) 땅으로 들어가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 서출 동생에게 태왕위가 넘어가자 분노해 스스로 칭제한 발기. <사진=필자제공>

그리고는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말하기를 “소국은 불행합니다. 형이 죽자 형수가 가짜 조서로 동생을 제위에 세웠습니다. 대왕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나라를 되찾으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손도가 “고구리에서 증모처수(烝母妻嫂)는 일상적인 관습이다. 지금 발기는 형수를 처로 삼지 못하고 이복동생에게 빼앗겨 예법을 따지며 제위를 다투고 있으니, 이때를 틈타 말로는 발기를 돕는 척하면서 기습한다면 그 나라를 빼앗을 수 있겠다”라고 말하자,
공손도의 아들(공손연)은 “고구리에는 을파소라는 훌륭한 신하가 있어 방비가 튼튼할 것이므로 깊숙이 들어가 치는 것은 가당치 않으니, 발기의 무리와 함께 고구리의 서쪽 변방을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공손도가 3만의 군사로 말로는 발기를 돕는 척하며 개마·구려·하양·도성·둔유·장령·서안평·평곽군 등을 급습해 차지하고는 발기를 돕지 않았다. 이에 발기는 울분으로 인해 등창이 났다.
9월 계수가 두눌을 정벌해 그 뿌리를 뽑아버리니, 발기는 배천으로 패주하고는 아들 박고에게 이르길 “나는 적장자인데도 우씨의 거짓놀음으로 서얼에게 쫓겨났고, 나라의 서쪽 땅마저도 공손씨에게 빼앗겼으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서 살 수 있겠느냐?”라 말하고는 스스로 목을 칼로 그었으나 아들이 구해 죽지 못했다. 발기가 말하길 “곧 종창이 도질 것이다. 죽지 않으면 무엇 하겠느냐?”라고 말하고는 물속으로 기어가 물에 빠졌다.
발기를 잡으러 뒤쫓아 온 기마병들이 다다랐더니 발기는 이미 죽어 있었다. 산상제는 왕의 예법에 따라 배령에 장사하여 주고 ‘배천대왕지릉’이라는 비석도 세워주었다. 박고는 무덤을 지키면서 물고기를 잡아 연명했고, 자신을 ‘위수(渭水)의 어부’라 하였다. 임금이 여러 번 불렀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형 공주를 처로 삼아 보내주었다. (인용 끝)
참고로 발기의 아들이 배천에 있는 발기의 무덤을 지키면서 살았는데 자신을 ‘위수의 아들’이라 했다는 기록은 당시 고구리의 강역이 섬서성 중부를 가로지르는 물길인 위수까지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위수는 섬서성 중부를 가로지는 물길. <이미지=필자제공>

<삼국사기> 기록의 오류 분석
1. 고국천제의 정실 우황후와 시동생 연우는 몰래 상통하는 내연(內緣)의 관계였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목숨을 걸고 고국천제의 거짓조서를 꾸며 연우를 태왕위에 올린 것이다. 만약 허위 조서라는 것이 사실이 발각되었다면 우황후와 연우는 대역죄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히 국상 을파소가 나서서 교통정리를 잘해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한 것으로 보인다.
2. 증모처수(烝母妻嫂) 제도는 아버지나 형제가 죽으면 계모나 형수·계수를 처로 거두는 제도로 일명 형사취수(兄死娶嫂)제라고도 하는데, 흉노와 고구리·부여 등 북방유목민족에게 있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형이 죽으면 형의 재산을 물려받은 형수가 만일의 경우 다른 혈족의 남자와 혼인하게 되면 혈족의 재산이 바깥으로 유출됨을 방지하며, 또한 형수에게 재산이 없을 경우 생활능력이 없으므로 형수를 혈족이 부양해 준다는 의미도 있다.
형사취수제는 한족들에게 없는 혼인풍습인지라 중국과 조선왕조의 기록에서는 지극히 야만적인 풍습이라 비하하고 있으나, 이는 유교사상에 적은 소중화의 사고라 할 수 있다. 고려와 청나라 때까지 행해졌던 우리 민족의 고유 혼인풍습이었던 것이다.
3.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고국천왕이 죽자 우왕후가 발기의 집을 먼저 찾아가 다음 왕위를 계승함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는 기록과, 우왕후가 발기에게 무안을 당하자 그 생각을 접고는 연우의 집으로 갔다는 기록은 우왕후와 연우가 서로 상통하는 내연의 관계였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산상왕 즉위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임의로 집어넣은 기록으로 보인다. 즉,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기록인 것이다.
 
 ▲ 중국이 임의대로 그린 공손씨의 요동 지도. <이미지=필자제공>

4. 적출 형님임에도 우황후의 농간으로 서출의 동생에게 태왕위가 넘어갔으니 발기는 분통이 터질 만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외적의 힘을 빌려 조국을 쳤다는 것은 명백한 역적행위이다. 여하튼 발기의 역모로 인해 고구리는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기습을 당해 서쪽 땅을 잃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를 400년 식민지 한사군이 계속 이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런지 다음 연재에서 공손씨의 요동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두 태왕을 남편으로 섬긴 우황후와 ‘역적 발기’

성헌식의 ‘대고구리’…외세의 힘 빌린 발기 반란의 최후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14-04-28 01:13:45

중국의 상징 한나라를 망하게 한 훌륭한 군주였던 고국천태왕이 붕어하자 동생 산상태왕이 즉위하고는 형수 우씨(고국천왕의 왕후)와 결혼한다. 두 태왕을 남편으로 섬긴 우왕후와 역적 발기에 대한 사연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용) 고국천왕이 죽자 왕후 우씨(于氏)는 국상이 났음을 비밀로 하고는 밤에 왕의 아우 발기의 집에 가서 "왕이 아들이 없으니 그대가 계승함이 마땅합니다"라고 말했다. 발기는 왕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하늘의 운수는 돌아감이 정해져 있는 것이니 경솔하게 논의할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부인으로서 밤에 함부로 나돌아 다니니 어찌 이를 예라 할 수 있으리까?"라고 대답하자 왕후가 부끄러워하며 바로 연우의 집으로 갔다.
연우가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고 문에 나와 왕후를 맞아들여 자리에 앉히고는 술을 대접했다. 왕후가 "대왕이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집안의 어른이라 마땅히 뒤를 이어야 되겠으나, 나더러 딴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무례하고 오만하며 예절 없이 대했기에 아주버니를 보러 온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연우는 예를 더욱 극진히 하여 직접 칼을 들고 왕후에게 고기를 베어주다가 잘못해 손가락을 다치자, 왕후가 허리띠를 풀어 그의 다친 손가락을 감싸주었다. 우왕후가 환궁하면서 연우에게 "밤이 깊어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길지 염려되니, 그대가 나를 대궐까지 데려다 주셨으면 합니다"고 말하자 연우가 그렇게 하겠다하니 왕후는 연우의 손을 잡고 대궐로 들어갔다. 이튿날 동틀 무렵 왕후가 선왕의 유명이라고 거짓말을 해 군신들로 하여금 연우를 왕으로 삼게 하였다.
 
 ▲ 고국천제와 산상제 두 태왕의 왕후가 되는 우씨. <사진=필자제공>

역적 발기의 조국 고구리 공격
발기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해 군사를 동원해 왕궁을 포위하고는 "형이 죽으면 아우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것이 예이거늘, 네가 서열을 어기고 왕위를 찬탈하는 대역죄를 저질렀다. 빨리 나오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처자들까지 죽여 버리겠다"라고 호통을 쳤다. 연우는 3일 동안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고, 백성들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발기는 일이 성사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는 처자들을 데리고 요동으로 달아나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저는 고구려 왕 남무의 동복아우입니다. 남무가 아들이 없이 죽었는데, 내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해 왕위에 올라 천륜의 대의를 어겼습니다. 이에 분개하여 상국으로 귀순해 몸을 의탁하려 합니다. 원컨대 군사 3만 명을 빌려주어 연우를 쳐서 난을 평정하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하자 공손도가 이를 허락했다.
연우가 아우 계수에게 군사를 주어 요동에서 오는 군사를 막으니, 한나라 군사가 크게 패했다. 계수가 스스로 선봉이 되어 도망가는 군사를 추격하자 발기가 계수에게 "지금 네가 감히 늙은 형을 해하려고 하느냐?"라고 외치자, 계수가 형제간의 정을 저버릴 수 없어 감히 그를 죽이지 못하고 "연우가 왕위를 사양하지 않은 것은 비록 의로운 행동은 아니지만, 형이 일시의 분함을 이기지 못해 나라를 멸망시키려함은 이 무슨 뜻이오?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선조들을 대하려는가?"라고 말했다.
발기가 이 말을 듣고 부끄럽고 뉘우침을 이기지 못해 배천으로 도주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계수가 슬피 울며 발기의 시체를 거두어 임시로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다.
 
 ▲ “형이 죽으면 아우가 왕이 됨이 예이거늘, 서열을 어기고 왕위를 찬탈하는 대역죄를 저질렀다”고 외친 발기. <사진=필자제공>

왕은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뻐하며 계수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형제의 예로 대하면서 "발기가 타국에 군사를 청해 국가를 침범했으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대가 발기를 쳐서 이기고도 풀어주어 죽이지 아니했으니 그로써 족한 일인데, 발기가 자결한 것을 무척 애통해하니 그대는 도리어 나를 무도하다 여기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계수가 서글픈 표정으로 눈물을 머금으며 "제가 지금 한 말씀 올리고 죽기를 청합니다"라고 대답하니 왕이 "무슨 말인가?"하고 하문했다.
그러자 계수가 말하기를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즉위하게 했음을 대왕께서는 예로써 사양하지 않았으니 이미 형제간에 우애하고 공경해야 한다는 의(義)가 없어진 것입니다. 신이 대왕의 미덕을 나타내고자 짐짓 발기의 시신을 거두어 초장을 한 것인데, 이로 인해 대왕의 노여움을 사게 될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대왕께서 만약 어진 마음으로 발기의 죄악을 잊으시고, 형에 대한 상례를 갖추어 장례를 지내주신다면 누가 대왕이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할 말을 다 했으니 죽임을 당해도 산 것과 같습니다. 청컨대 나아가 형리의 처형을 받겠습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앞으로 다가앉으며 온화한 얼굴로 위로하며 "내가 불초하여 미혹됨이 없을 수 없었는데, 이제 너의 말을 들으니 진실로 나의 잘못을 알게 되었구나. 너는 나를 탓하지 말라"라고 말하자, 동생이 왕에게 절하고 왕도 그에게 또한 절을 하고는 마음껏 즐기다 헤어졌다. 가을 9월 관리에게 명하여 발기의 상례를 지내되, 왕의 예로써 배령에 장사지내도록 했다. 왕이 원래 우씨로 인해 왕위를 얻었으므로, 다시 장가들지 않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인용 끝)
 

 ▲ MBC 서프라이즈에 소개된 산상왕(위)과 재혼한 형수 우왕후. <사진=mbc 화면 캡쳐>

그런데 상기 <삼국사기> 기록은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고국천왕이 붕어하자 우왕후가 발기의 집에 먼저 갔다가 심한 창피를 당한 다음 바로 연우의 집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는 같이 궁전으로 돌아와 이튿날 가짜 유명으로 연우를 태왕위에 올렸다는 것은 실로 뭔가 이상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의문점들은 다음과 같다.
1) 고국천왕이 붕어하자 과연 우왕후가 발기의 집을 먼저 찾아가 발기에게 다음 왕위를 계승함이 어떠냐고 물어보았을까?
2) 발기에게 창피를 당하자 우왕후가 발기를 왕위에 올리겠다는 생각을 접은 다음 연우의 집으로 갔을까? 솔직히 발기가 한 그 정도 말이야 누구나 흔히 할 수 있는 말 아니겠는가?
3) 어떻게 왕후가 연우와 말 몇 마디 나누어보고는 그를 지존인 태왕위에 앉힐 것을 결정할 수 있었을까?
4) 왕후가 목숨을 걸고 가짜 유명을 꾸며 연우를 보위에 올린 진짜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목숨을 걸 정도였다면 왕후와 연우는 도대체 어떤 사이였을까? 그냥 평범한 형수와 시동생 관계였을까?
5) 연우는 왜 다시 장가들지 않고 형수 우씨를 왕후로 맞이했을까? 단순히 자신을 태왕으로 만들어준 우왕후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던 것일까?
6) 태왕위가 동생 연우에게 넘어가자 발기는 왜 ‘서열을 어기고 왕위를 찬탈하는 대역죄’ 운운하며 그토록 분노했고, 왜 공손도를 찾아가 ‘천륜을 어기고’라고 말했을까?
 

 

 

발기(拔奇)의 요동태수 항복기록 ‘삼국사기 오류’

성헌식의 ‘대고구리’…조국 멸망시키려는 반역자들의 진실(1)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14-04-21 01:05:22

우리 역사상 가장 악질 민족반역자를 꼽으라면 단연 고구리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淵男生)을 들 수 있다. 그 죄질은 대한제국의 매국노 이완용보다 훨씬 큰 매국적 민족반역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고구리의 대막리지가 된 남생이 도성을 비운 사이 동생 남건과 남산이 정변을 일으켜 도성을 장악하고는 형인 남생을 죽이려하자, 갈 곳이 없어진데다가 생명의 위협마저 느낀 남생은 아들 헌충을 당나라로 보내 망명을 신청한다. 게다가 조국을 칠 군사를 요청하고는 그 선봉에 서서 고구리로 쳐들어와 멸망시킨 인물이다.
고구리에 그러한 연남생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민족반역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이 발기(發岐)이다. 발기는 행촌 이암 선생이 쓴 <단군세기>의 서문에 “아아! 슬프도다. 얼마 전에는 잠(潛)·청(淸)과 같은 무리들의 못된 의견이 몰래 수많은 귀신들처럼 어두운 세상을 뒤덮었다. 남생이나 발기 따위들과 같은 반역하는 마음으로 서로 만나 합쳐진 것이다”라고 언급되는 천하의 역적이기도 하다.
참고로 위에 언급된 잠·청은 고려 때 간신 오잠(吳潛)과 유청신(柳淸臣)을 말하는 것이다. 오잠은 충렬왕·충선왕 부자를 모함해 이간시켰고, 어진 신하들을 모함하고 살해해 많은 원망을 산 인물이다. 그는 유청신과 함께 심양왕 고(暠)를 고려의 왕으로 올리려는 반역을 저질렀으며,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에 행성을 설치해 고려라는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의 직속령으로 할 것을 주청한 만고의 역적들이다.
 ▲ 당나라 군대의 선봉에 서서 조국을 멸한 연남생과 연헌성. <사진=필자제공/드마라 캡쳐>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고구리에는 민족반역자 발기가 두 명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 명은 신대왕의 장자로 고국천왕의 형인 발기(拔奇)이고, 다른 한 명은 고국천왕의 바로 아랫동생인 발기(發岐)이다. 두 명의 발기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① “고국천왕의 이름은 남무 혹은 이이모(伊夷謨)라고도 하며,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사람들이 왕의 맏아들 발기(拔奇)가 불초하다는 이유로 이이모를 왕으로 세웠다. 한나라 헌제 건안 초 발기가 형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와 함께 각각 민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에게 가서 항복한 후 비류수가로 돌아와 살았다)” 참고로 ( )는 <삼국지 위서>를 인용해 기록한 것이다.
②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죽자 동생 연우(산상왕)가 뒤를 이어 즉위한다. 그러자 고국천왕의 바로 아래동생이며 산상왕의 형인 발기(發岐)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호응하는 자가 없자 처자들을 데리고 도주해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에게 투항하면서 군사 3만 명을 빌려달라고 청해 승낙을 받아 고구리로 쳐들어온다.
산상왕은 아우 계수(罽須)에게 군사를 주어 막게 하니 한나라 군사가 대패했다. 형 발기를 만난 계수가 “형님이 일시의 분한 생각을 못 이겨 나라를 멸망시키려함은 무슨 뜻인가?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선조들을 대하려는가?"라고 말하자 발기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길 수 없어 배천으로 도주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 <삼국사기>의 두 기록을 종합하면 신대왕에게는 모두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아들이 발기(拔奇)이고, 둘째아들이 고국천왕(남무/이이모)이고, 셋째아들이 발기(發岐)이고, 넷째아들이 산상왕(연우)이고, 다섯째 아들이 계수(罽須)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삼국사기에 잘못 기록된 신대왕의 가계도. <이미지=필자제공>

신대왕의 둘째아들 고국천왕이 태왕위에 오르자 왕위계승에 실패한 장자 발기(拔奇)가 3만 명을 데리고 요동태수 공손강에게 투항하고는 되돌아와 비류수가에서 살고, 고국천왕이 붕어하고 신대왕의 넷째아들인 산상왕(연우)이 태왕위에 오르자 셋째아들 발기(發岐)가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3만 명의 병력을 빌려 조국 고구리로 쳐들어왔다는 말인데, 참으로 믿기 어려운 뭔가 이상한 기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3만 명을 데리고 한나라에 투항한 발기가 그냥 되돌아와 고구리에서 비류수가에 살았다는 것도 그렇고, 당시 한나라 요동태수가 공손강(公孫康)이었는지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대왕 밑에 발기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이 과연 두 명이나 있었을까 하는 강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결론을 내리자면 <삼국사기>의 발기(拔奇)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 위서30 오환·선비·동이·왜전 제30>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이는 고구리의 정치상황을 정확하게 모르는 중국에서 대충 적은 기록을 김부식이 아무런 검토 없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삼국지 위서>에는 이이모(고국천왕)가 죽은 이후 발기(發岐)라는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음에도 말이다.
 
 ▲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 백제 아신왕이 광개토태왕에게 항복하는 장면. <사진=필자제공/드라마 캡쳐>

<중국 백과사전>에서의 산상왕에 대한 설명을 보면 “산상왕은 고구려 제10대 군왕으로 이름이 연우이다. 연우는 사서 중에 이이모로 칭하기도 한다. (일설에는 고국천왕의 이름이 이이모다) 이이모와 연우는 동음이독이다.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었기에 산상왕은 왕위계승과 어우러져 큰 형 고국천왕의 부인인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라고 하여 이이모를 산상왕으로 보는 반면 <삼국사기>에서는 고국천왕의 이름을 이이모라고 한다. 과연 어느 기록이 옳을까?
(원문) 山上王(?-227年,在位时间:197年-227年)高句丽第10任君王,名延優,延优史书中又称为伊夷模(一说故国川王名伊夷模),伊夷模、延优是同音异读。由于故国川王无子,而继承王位并娶兄长故国川王的妻子于氏为王后。
우선 <삼국사기>가 인용한 <삼국지 위서>에 기록된 발기(拔奇)가 찾아간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에 관한 기록은 명백한 오류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고국천왕이 즉위한 해가 179년으로 후한의 12대 영왕의 광화(光和) 2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삼국사기>는 “한나라 헌제 건안 초 발기(拔奇)가 형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에게 항복했다”라고 기록했다.
헌제의 건안 원년은 196년이고, 고구리 산상왕이 즉위한 해가 197년이다. 따라서 <삼국지 위서>의 발기(拔奇)에 대한 기록은 명백한 오류이고, 그 기록은 고국천왕의 즉위 때가 아닌 산상왕 즉위 때에 발생한 발기(發岐)에 관한 기록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중국백과사전>에서 이이모를 고국천왕이 아니 산상왕의 이름으로 잘못 본 것이다.
이번에는 <중국백과사전>으로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와 공손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번역) 공손도(150~204) 원래 요동 양평인으로 어릴 때 아버지를 현토군으로 옮겨 살다가 스스로 요동후와 평주목이 되어 스스로 요동 왕으로 살았다. 204년 공손도에게 적자가 없자 서출인 공손강이 그 자리를 계승했다. 221년 공손강이 병사하자 그 아들들이 어려 동생인 공손공이 계승했다.
(원문) 公孙度(150~204)辽东襄平人。少随父迁居玄菟郡。公孙度自立为辽东侯、平州牧。俨然以辽东王自居。公孙度没有嫡子,继位的是庶出的公孙康。公孙康于曹魏文帝黄初二年(公元221年)病死之后,其子公孙晃、公孙渊年纪还小。于是由弟弟公孙恭继任。
위 연혁에서 보듯이 공손강은 204년 자칭 요동태수인 아버지 공손도가 사망한 후 그 직을 계승했으므로, 고국천왕 즉위 당시 <삼국지 위서>를 인용한 <삼국사기>의 발기(拔奇)에 대한 179년의 기록은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백과사전>에서 언급한 이이모가 산상왕의 이름이라는 설명 역시 오류인 것이다.
 
 ▲ 중국이 제멋대로 그린 공손씨의 요동군 지도. <이미지=필자제공>

고국천왕의 즉위에 대해 <고구리사초·략>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대제 11년(175) 을묘 3월 임금께서 장자인 현(玄) 태자가 선하기는 하나 선(仙)을 좋아하기에, 차자인 남무 태자를 정윤(계승자)으로 삼으려 했다. 남무는 ‘형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는 전국을 두루두루 살피며 제나에 이르러 오래도록 머물렀다. 이에 현태자가 찾아가 ‘예로부터 현명한 자가 뒤를 잇는 것이 옳다’라고 말하고는 해산으로 선을 즐기러 떠나가자 남무가 돌아왔다. 이듬해 3월 남무를 정윤으로 삼았다”
즉 고국천왕의 형은 발기(拔奇)와는 전혀 다른 인물인 현(玄)태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발기(拔奇) 관한 기록은 분명한 오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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