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격진천뢰와 이장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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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찾습니다" 이름 이장손, 나이 주소 불

빼앗겼던 천년 고도, 비격진천뢰로 되찾았다

17.06.22 09:55l최종 업데이트 17.06.22 09:5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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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 복원된 경주읍성의 모습.
 일부 복원된 경주읍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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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경주에 처음 진입한 것은 1592년 4월 21일이었다. 이날은 경상도 전역이 일본군에게 철저하게 유린된 치욕의 하루였다.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소서행장의 1군은 이날 대구를 점령했고, 4월 18일 상륙한 가등청정의 2군은 경주를 짓밟았다. 4월 19일 상륙한 흑전장정의 3군은 20일 김해를 손에 넣은 기세를 몰아 창원과 창녕 일원을 휩쓸고 있었다.
이날 경주에는 부윤도 없었다.

고려 중기부터 조선 시대까지 경주에서 근무한 경상감사 이하 관리들에 대한 관청의 공식 기록인『경주선생안(慶州先生案)』에 따르면 경주부윤 윤인함은 4월 16일 집경전에 모셔져 있던 이성계의 초상을 피란시키는 조치는 취했지만, 그 후로는 달아난 수령들을 잡으러 간다면서 성 밖으로 나간 뒤 행방이 묘연했다. 게다가 윤인함은 그 사이에 전임 부윤으로 신분이 바뀌어버렸다. 강계부사 변응성이 신임 부윤으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부윤 교체로 지휘관도 없이 전투가 시작된 경주읍성
이형석은『임진 전란사』에 '이러한 위기에 부윤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인사의 맹점이었다.'면서 '더구나 그 후임을 (까마득히 먼) 평안도 강계에서 새로 부임하게 한 것은 잘못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라고 비판한다. 당시 '조정의 대일본 전쟁 대비 의욕이 매우 희박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인사 발령이라는 것이다.  
그날 경주읍성 안에는 경주판관 박의장, 장기현감 이수일 등이 있었다. 하지만 최고 책임자도 없는 상황이라 적의 침입에 적절히 대응할 수가 없었다. 경주읍성 1차 전투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싸움 없는 전투, 일본군으로서는 무혈입성이었다.  

 경주 월암 종택(통칭 "김호 장군 고택") 중요민속자료 34호, 경주시 탑동 633, 지붕을 새로 갈고 있는 광경.
 경주 월암 종택(통칭 "김호 장군 고택") 중요민속자료 34호, 경주시 탑동 633, 지붕을 새로 갈고 있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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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큰 전투가 벌어진 때는 8월 2일이었다. 관군은 없고 김호(1534∼1592)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군과 영천에서 쫓겨나 7월 28일부터 경주와 언양 일대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군이 경주 외곽 노곡(내남면)에서 부딪쳤다.    
김호는 27세이던 1570년 무과 급제 후 관직 생활을 했는데, 임진왜란 당시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켜 경주 주변 곳곳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초유사 김성일로부터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지역을 총괄하는 의병 도대장(총대장)에 임명된 김호는 약 14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주와 언양 사이에 주둔했다. 영천에서 도망친 일본군이 경주를 근거지로 하고 버텼으므로 적을 고립시키기 위해 도로를 차단한 것이었다.

경주 일원 왜군의 사기를 꺾은 김호 경상좌도 의병 도대장
8월 2일 노곡에서 싸운 왜적은 언양에서 경주로 올라오던 500여 기병이었다. 양산성의 왜적은 경주 부근까지 자신들의 지배에 두려고 했다. 김호 의병군에는 전 현감 주사호가 소모관(의병 모집관), 진사 최신린이 소모유사(모집 담당관)를 맡고 있었다. 이이화는『조선과 일본의 7년전쟁』에 '이 전투에서 의병군은 언덕 위를 먼저 차지하고 내려다보며 공격을 퍼부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일본군은 거의 궤멸되었다. 이이화는 노곡 전투를 '경주 주변에 있는 일본군의 사기를 꺾은 일격'으로 평가했다. 이형석도 '이 싸움 뒤에도 제2, 제3, 제4차 경주 전투가 있었으나 이만한 첩리(큰 승리)는 없었으니 경주 일원의 적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끝까지 추격을 감행했던 만큼 그 전과가 컸다.'라고 보았다. '김호는 이 전투에서 죽었으나 의병은 계속 활동을 전개했다(이이화).' 

 <권응수 장군 유적>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유물 전시관 등이 갖춰져 있다. 주소를 몰라도 '권응수 장군 유적'으로 검색하면 찾아갈 수 있다.
 <권응수 장군 유적>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유물 전시관 등이 갖춰져 있다. 주소를 몰라도 '권응수 장군 유적'으로 검색하면 찾아갈 수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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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다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것은 김호 의병장이 전사한 노곡 전투로부터 18일이 지난 8월 20일이었다. 권응수, 정세아, 정대임 등 의병들이 7월 27일 화공(火攻)으로 왜군을 격퇴하고 영천성을 되찾는 것을 본 경상좌병사 박진은 용기백배하여 경주성 탈환을 시도했다.
박진은 정세아가 거느린 의병 5,000명을 권응수 군과 함께 안강에 집합시켰다. 이 전투에는 경주판관 박의장도 참전했는데, 박진은 권응수가 거느리는 군대를 자신이 직접 지휘하면서 그를 의병대장이 아니라 군관으로 대우했다. 전투 결과는 『선조수정실록』 1592년 8월 1일자에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다.
'경상좌병사 박진 등이 경주의 적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다. 박진이 열여섯 고을의 군사 1만여 명을 합쳐서 권응수로 선봉을 삼고 곧장 경주의 적에게 육박하였다. 그러나 적이 먼저 길 아래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전투가 한창 어우러졌을 때 뒤에서 돌진해 들어왔다. 이에 관군이 크게 패하여 전사한 자들이 즐비하였고 박진 등은 도망쳐서 돌아왔다.'
아군이 대패했다는 내용이다. 이이화는 '아군은 숫자만 많았지 준비가 소홀했고 전략 전술이 없어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라고 평가했다.

 고천서원의 사당 순국사
 고천서원의 사당 순국사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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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에서 '의병장 정세아의 군사들은 서문 밖에서 용전하였는데, 박진 군이 동요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맹공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적의 중위(겹겹의 포위)에 빠지게 되었다. 정세아의 아들 의번이 세 번씩이나 적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그의 아버지를 구출하였으나 자신은 수십 창을 받고 몸종 억수와 함께 잡혔다가 모두 순절하고 말았다(이형석).'

순국사 고천서원 사당


영천시 임고면 고천리 245에 있는 고천(古川)서원은 1592년 8월 20일 같은 날에 순절한 김대해(金大海) ‧ 김연(金演) ‧ 최인제(崔仁濟) ‧ 정석남(鄭碩男) ‧ 이영근(李榮根) ‧ 이지암(李之馣) ‧ 이일장(李日將) ‧ 이득룡(李得龍) ‧ 이득린(李得麟) ‧ 손응현(孫應晛) 열 분을 제향하고 있다. 기념물 144호로, 1705년(숙종 31)에 사당이, 1797년(정조 21)에 강당이 건립되었다.

아군 600여 명이 전사한 이 전투에서 영천 사람은 이호인 ‧ 이순복 ‧ 류복흥 ‧ 전억주 ‧ 한득의 ‧ 전흥제 ‧ 류원걸 ‧ 이정분 등 (정의번을 포함하여) 17명이 순절하였다. 지금도 영천에서는 이 분들을 '순국 17 의사'라 부른다.

관군은 물러가고 정세아 의병군만 혈전 
1차 경주성 수복 전투 기사를 싣고 나서 꼭 한 달 뒤인 1592년 9월 1일『선조수정실록』은 2차 경주성 수복 전투 소식을 전한다.  이번에는 대승 소식이다.
'박진이 경주를 수복하였다.

박진이 앞서 패하였다가 다시 군사를 모집하여 안강현에 주둔하다가 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발사하여 떨어뜨렸다.

적이 그 무기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았는데 잠시 뒤 포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에 맞아 넘어져 즉사한 자가 20여 명이었는데,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쳤다.

박진이 경주에 들어가 남은 곡식 만여 석을 얻었다.'

 경주성을 되찾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비격진천뢰는 이장손이 발명했다. 비격진천뢰는 일종의 시한폭탄이다. 아쉬운 것은 이장손이란 인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사실이다.
 경주성을 되찾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비격진천뢰는 이장손이 발명했다. 비격진천뢰는 일종의 시한폭탄이다. 아쉬운 것은 이장손이란 인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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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은 기사 뒤에 '비격진천뢰는 전에는 없었는데, 화포장(화포 제작 기술자) 이장손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를 대완포구로 발사하면 5∼600 보를 날아가 떨어지는데, 얼마 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으나 그 뒤에는 활용하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사관의 발언은 이장손이 비격진천뢰를 처음 만들었고, 성능이 아주 대단한 무기이며, 무슨 까닭인지 그 뒤로는 활용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비격진천뢰 제조법도 잊어버리는 조선
비격진천뢰가 사라진 데 대한 안타까움은 신경(1613∼1653)의『재조번방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신경은 '왜적이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제작하는지도 모르니 탄식할 일이다.'라고 썼다.
비격진천뢰는 포탄을 둥근 공 모양의 완구에 담아 발사하여 땅에 떨어진 후 폭발하게 하는 일종의 시한폭탄이다.

내부에 있는 대나무 통과 도화선을 감은 목곡(나선형의 홈이 파인 나무토막)의 심지 길이를 조절하여 폭발 시간을 조절했다.
사관이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비격진천뢰는 임진왜란 때 경주부 소속의 화포장 이장손이 발명했다. 박진은 이장손의 발명품이 지닌 위력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그것을 활용해 경주성을 되찾았다. 1592년 9월 7일 밤부터 8일 새벽까지의 혈투를 통해 얻은 쾌거였다.  

 경주읍성의 흔적이 경주시 동부동 52 일대에 조금 남아 있다. 사적 96호인 경주읍성은 이곳 일대에서부터 복원이 시작되어 현재 공사 중이다.
 경주읍성의 흔적이 경주시 동부동 52 일대에 조금 남아 있다. 사적 96호인 경주읍성은 이곳 일대에서부터 복원이 시작되어 현재 공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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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武毅公收復東都碑 <박무의공(박의장) 수복 동도(경주) 비>는 경주 황성공원에 있다. 높이 2.3m, 폭 89cm, 두께 34cm로, 1861년(철종 12)에 세워졌다. 안내판은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이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했고, 경주판관으로 있으면서 이장손의 비격진천뢰를 이용하여 경주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으며, 7년 동안이나 경주에서 왜적을 막아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해설은 박의장이 그 공로로 경상좌도 병사가 되었고, 세상을 뜨자 무의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는 내용도 덧붙이고 있다.

▲ 朴武毅公收復東都碑 <박무의공(박의장) 수복 동도(경주) 비>는 경주 황성공원에 있다. 높이 2.3m, 폭 89cm, 두께 34cm로, 1861년(철종 12)에 세워졌다. 안내판은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이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했고, 경주판관으로 있으면서 이장손의 비격진천뢰를 이용하여 경주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으며, 7년 동안이나 경주에서 왜적을 막아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해설은 박의장이 그 공로로 경상좌도 병사가 되었고, 세상을 뜨자 무의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는 내용도 덧붙이고 있다.


그런데 실록의 기사와 달리 2차 경주성 전투를 이끈 지휘관은 박진이 아니라 박의장이라는 견해도 있다.

김강식은 논문「임진란 시기 경주성 복성 전투와 항쟁 활동」에서 '2차 경주성 복성 전투는 1592년 9월 7∼8일에 경주판관 박의장에 의해 주도된다.'라고 단정한다.

최효식의『경주부의 임진 항쟁사』도 '경주읍 탈환 전투는 9월 7일 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왜군이 성을 버리고 간 후 관군이 9월 8일 늦은 밤에 입성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입성 공략 작전은 경주부 절제도위 박의장에 의해 주도되었다.'라고 말한다.
최효식은 경주 의병장 손엽이 자신의『용사일기』 1592년 9월 8일자에 '(강동면 양동리 313) 수운정에서 잤다. 밤중에 경주 읍내를 바라보니, 성 안에 불길이 하늘에 닿았다가 날이 샐 무렵 꺼졌다.'면서 '병사(박진)는 2∼3일 전에 관찰사에게 갔다.'라고 기록한 것을 근거로 든다. 최효식은 '경주에는 좌병사가 부재 중이었다는 사실을 (손엽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라고 해석한다.

경주성 탈환의 주역은 박의장이었다
김강식은 논문의 '맺음말'에서 '2차 경주성 복성 전투는 경주부 판관 박의장이 담당하였는데, 의병진과 합세하여 소수 정예를 투입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1592년 9월 8일 (1592년 4월 21일 빼앗긴 지) 130여 일 만에 경주성 복성에 성공하였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이로써 경상좌도를 회복하여 조선군의 사기가 진작되었으며, 일본군의 전략전술에 있어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사실상 일본군의 보급로 역할을 하던 동로(東路)를 상실한 일본군은 울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경상좌도 전체의 전세 변화에도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최효식의 결론도 비슷하다. 최효식은 '경주읍성이 왜적에게 함몰된 지 100여 일만에 탈환된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면서 '읍성 탈환은 영천, 안동으로 통하고, 언양과 울산 간의 적의 교통망을 차단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경상도 북방의 대부분이 수복되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서생포 방면의 왜군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왜군은 바다를 통해서 겨우 낙동강 서안(서쪽 언덕) 지역을 연락선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라고 진단한다.
지금까지 경주성을 빼앗긴 1592년 4월 21일, 되찾기 위해 수복 전투를 벌인 1592년 8월 20일과 1592년 9월 7∼8일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직도 풀리지 아니한 의문점이 남아 있다. 어째서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 제작 기술은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을까? 이장손은 왜 태어난 때도 죽은 때도 알려지지 않는 것일까? 비격진천뢰를 발명하던 당시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이장손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장손에 대한 궁금증 안고 금장대에 올라보니
금장대는 경주성 수복 전투 당시 아군의 지휘 본부가 있었던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금장대에 올라 형산강 너머 경주 시내를 바라본다. 성을 쌓느라 진땀을 흘리는 고려와 조선의 백성들이 보이고, 왜적과 싸우느라 피를 쏟는 관군과 의병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이 맑고 잔잔한 강물이 그들에게는 무척이나 낯설 것이다.

 경주성 수복 전투 당시 아군의 지휘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장대
 경주성 수복 전투 당시 아군의 지휘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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