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2/문경아제

작성일 작성자 하늘과 바람과 별시



 

 

 

 

 

 

 

 

 

 


 스/토/리/텔/링



1937년 9월, 소련은 연해주에 살고 있었던 17만 명의 한국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한국인이 일본인의 첩자노릇을 할 위험이 있고, 군사작전을 할 때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 소련의 명분이었다.

강제이주하는 과정에서 1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숨졌다고 했다.

강제이주를 당한 한국인은 중앙아아의 카자흐스탄에서,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갔다.

그들 고려인의 후손들은 된장, 고추장, 김치담궈 먹으며 아리랑을 불러가며,

이제는 제2의 고국이 되어버린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지금껏 별탈없이 살아가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살고 있는 지금의 한국인은 그들 고려인의 후손들이다.

 

1945년 세계제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사할린 남부는 승전국 소련의 영토에 귀속됐다.

일제강점기, 사할린 탄광에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은 동토의 땅 사하린에 눌러앉을 수 밖에 없었다.

북한행을 택한 교민은 북으로 갈 수 있었지만 남쪽으로 가려했던 동포들은 동토의 땅 사할린에 그대로 눌러앉아야 했다.

이념이 다른 38선 이남으로의 귀환은 소련이 허용을 하지 않아서였고,

광복된 조국도 어수선한 상태였기에 그들에게 신경쓸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들 사랄린의 한국인들은 동토의 땅 사할린에 그렇게 눌러 앉을 수 밖에 없었다.

해서, 사할린에 눌러앉은 한국인들은 소련인 아닌 소련인, 무국적자로 살아가야만 했다.

동토의 땅 사할린은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강제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했던, 조선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땅이다.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하기까지 45년간 강제동원되어 끌려간 조선인과 그 후손들은 그렇게 사할린에 버려졌다.

그리고 세상은 까맣게 그들을 잊었다.

러시아의 소설가 안톤 체호프는 사할린을 '슬픈 틈새의 땅'이라고 했다.


무국적자로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고 살아왔던 사할린 동포들의 귀국이 실현된 것은 광복된 지 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1989년 7월 한.일 적십자사 간의 '재(在)사할린 한국인 지원 공동사업체'가 결성되고 사할린 동포들의 모국방문이 성사됐다.

18세에 끌려가 75세가 되던 해에 영구 귀국했다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할린 동포마을에 산다는,

아흔이 넘었다는 어느 노인분의 동영상을 보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물은 얼굴이 아닌 가슴을 적셨다.

동영상이 떠오르며 나레이션이 이어졌고, 배경음악으로 민족의 가락, 민족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우리의 민요 아리랑이 흘러나왔다.

아리랑 앞에서는 그대도 나도, 하나다.

아니, 우리 모두가 하나다.

이념을 달리하는 남과 북도 아리랑 앞에서는 하나가 된다.

해서, 남과 북이 하나의 국가되어 국제경기에 나갈 때, 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연주된다.



멕시코 첫 이민은 1905년에 있었다.

1905년 그 해는 을사강제늑약이 체결되던 해였다.

말이 이민이었지 당시 정황으로 미뤄볼 때, 조선인의 불법송출이었다. 불법송출된 조선인 이민자들은 사탕수수밭이나 목화농장으로 팔려간 농노(農奴)나 다름없었다.

을사강제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군국주의 일본과 멕시코사이에 벌어진 이민체결에 의해 조선인은 그렇게 농노로 팔려갔던 것이다.

물론 일본과 멕시코 두 나라에서는 국제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겠지만, 외교권을 강탈당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란 사실이다.

멕시코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그때 농노로 팔려간 조선인의 후손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을 아닐 것이다.

그네들 조선인의 후손들도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배웠던 아리랑을 그네들의 선조들이 살았던 동방의 해돋는 나라 코리아를 그리며 틈틈이 불렀을 것이다.


지난 3월 29일부터 31일까지 연 삼일간 KBS1TV에서는 3.1운동 100주년 특집프로인 다큐, '아리랑 로드'(Arirang Road)를 3부작으로 제작,방영했다.

특집 다큐, '아리랑 로드'는 집 떠난 이들의 발길 따라 피어난 노래, 아리랑.

갈피마다 민족사의 희노애락이 묻어있는 노래, 아리랑.

전 세계로 흩뿌려진 한민족의 고난과 극복의 노래,

아리랑을 찾아가는 '다큐멘트리'라고 했다.

여기서 잠깐, 한마디 하고 넘어가자.

다큐 제목을 '아리랑 로드'라 하지말고 '아리랑의 길'이라고 하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더 낫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덜 떨어진 철수의 생각이겠지만,

그런 맘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얘기다.


영어가 아무리 국제어라고 하지만,

'아리랑 로드(Arirang Road)'는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찾아가는, 제목으론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글쟁이는 나랏말과 글을 아름답게 갈고 닦아야할 의무가 있다.

같은 맥락으로 본다면 KBS 같은 언론기관도 시청자에게 민족혼을 일깨워 줄 의무가 있다.

민족이 나아갈 청사진을 제시하고,

길라잡이 역활을 해야한다는 얘기다.

그런 이치로 생각해보면 사대(事大)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리랑 로드'보다는 '아리랑의 길'이 낫다는 얘기다.

우리말인 '길'보다 국제어인 영어의 'Road'가 더 품격있게, 격조높게,보인다는 제작진의 관념이 잘못되었다는 얘기다.

나는 1, 2부는 시청하지 못하고 3부, '아리랑 꽃 피다' 만 시청했다.

어쨌던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찾아 길을 떠나보자.


어릴 적, 고향동네 앞들, 건들배기 청보리밭엔 녹색바람이 불어오곤 했다.

해마다 오월이면 청보리밭은 불어오는 녹색바람으로 출렁대곤 했다.

그 바람은 세상에서 제일 고운 평화의 바람, 녹색바람이었다.

단오가 가까워오면 보리는 누렇게 익어갔고, 학교에서 돌아오던 꼬맹이들의 입은,

보리깜부기를 따먹어서 먹물칠한 듯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보리깜부기 가시가 목에 걸려 켁켁거리는 손자에게 우리 할머니는 걸린 가시 넘어가라고 상추쌈을 싸먹여주시기도 했다.

해거름할 즈음이면 왕릉장에 가셨던 어머니가 장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목고개 굽잇길을 돌아오시곤 했다.

어머니와 함께 장에 가신 아버지는 오랜만에 이웃동네 친구를 만나셨을까!

막걸리 몇 사발을 들이켜셧는지 해가 떨어지고 어둠어둠해서야 삽짝을 들어서곤 하셨다.

아버지는 아리랑을 부르며 목고개 마루를 오르셨을 것이다.


여름밤이면 앞산 중턱에서는 산비둘기 구성지게 울어댔다.


구구구구 자식죽고

구구구구 계집죽고

앞마당에 매어놓은

암소죽고 구구구구


어머니는 산비둘기 우는 소리가 그렇게 들린다고 하셨다.

산비둘기는,

역병(疫病)으로 자식 잃고, 계집잃고,

앞마당에 매어놓은 암소까지 죽어버리자

홧병(火病)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홀아비넋이 환생한 새라고 했다.


아랫목엔 않는 아기 윗목에는 푸닥거리

아침에 눈떠보니 애기얼굴 안보인다

울아기 가녀린 혼불 초가삼간 떠나간 듯.


이 밤도 소쩍새는 피 토하며 울어대고

산비둘기 설운 노래 어매 가슴 멍드는데

까만 밤 밝혀보려고 박꽃은 피나보다.


나이들고 생겨버린 객쩍은 버릇 하나

밤하늘 쳐다보며 별을 헤기 시작했다

내 동생 땅꼬마별을 오늘밤엔 찾으려나.

      -문경아제의 시조 '초우2'전문


초우는 첫비이다.

연초에 내리는 첫비, '초우(初雨)'

얼마나 멋스럽고 운치로운가.

나는 페티김의 노래, '초우'를 좋아한다.

문경아제의 연작시조 '초우'는 11번까지 이어진다.

어머니는 산비둘기가 울때마다 따라 우셨다.

피덩이로 죽어간 어린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는 산비둘기가 울 때면 따라 우셨다.

아무리 울어도 당신 가슴에 맺혀있는 응으리는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치실어른은 상투머리였다. 

그때만해도 어른들은 다들 하이칼라를 하셨는데 치실어른만 유독 상투를 고집하셨다.

그 어른은 앞산 중턱을 개간해서 옥수수를 심어셨다.

여름밤, 옥수수가 익을 무렵이면 원두막을 짓고, 옥수수밭을 지키며 퉁소를 부셨다.

이 곡, 저 곡을 부셨지만 아리랑을 잘 부셨다.

퉁소소리는 청아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오

아리라앙 고개고개를 넘어넘어 가안다

나를 버리고오 가아시이는 니임은

십 리도 못가서어

발병나안다


구성지고 청아한 퉁소소리에 매혹되었을까.

밤하늘 별님들이 사다리타고 내려오실 때도 있었다. 

나즈막한 산, 뒷산마루에 내려오신 별님들은 밤이 이슥해지고 마당에 피워놓은 모깃불이 꺼져갈 무렵이면,

아쉬운 듯 뒤를 돌아다보시며 별나라로 올라가셨다.


구구구구 자식죽고 구구구구 계집죽고

앞마당에 매어놓은 암소죽고 구구구구

닥나무 껍질보다도 더 질긴 그 몹쓸 인연의 줄.


개똥개똥 개똥불이 마당에 등불켜고

별님이 사다리타고 밤마실 내려오면

보랏빛 모깃불 연기 초가삼간 휘감는다.


초사흘밤 쪽달님과 서쪽하늘 저 별님은

사랑하는 사이란 걸 온 세상이 다 아는데

그 무슨 사연 있기에 등돌리고 앉아있나. 

        -문경아제의 시조, '초우3'전문


한지(韓紙)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 껍질은 질기기가 그만이었다.

한지는 문을 바르는데 사용하는 종이라고해서 '창호지'라고도 했고 '문종이'라고도 불렀다.

한지를 만드는 문종이 공장은 수질이 좋은 냇가에 있었다.


텁텁한 막걸리 한 잔 하신 여름밤이면 아버지는 목침 돋워 베시고 나즈막히 마룻장 두드리가며 손바닥 장단에 맞춰

아리랑을 부르곤 하셨다.

아버지가 부르시던 아리랑 가락속에는 핏덩이 어린 자식을 잃은 설움이 녹아들었을 것이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숨져간 간난아기의 무덤을 애총이라 부른다.

고향 산 이 골짝  저골짝엔 애총이 많았다.

애총은 무덤 봉우리를 짓지 않고 돌을 얼기설기 올려놓았다.

봄이면 애총엔 아기의 넋이 환생해서 피어난 꽃, 빨간 진달래가 붉게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리랑 아리라앙 아라리이요오

아리랑 고개고개로 넘어가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니임은 

십 리도 못가서어

발병 나안다


아리랑 아리라앙 아라리이요오

아리라앙 고개고개를 넘어간다아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오오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오 많다아아
 

소백산 동쪽 이 골짝 저 골짝에서 흘러내리는 옥류수 맑은 물은 죽계구곡(竹溪九曲)을 휘돌아 순흥 배점마을을 지나,

청다리밑을 건너뛰어 소수서원 앞으로 흘러 간다. 이 물줄기가 바로 곧디 곧은 대나무 혼이 드리워져 흐른다는 죽계천(竹溪川)이다. 

1457년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험, 영주 순흥의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일어켰던 정축지변(丁丑之變)이 실패로 돌아가던 날,

저 맑디맑은 죽계천은 소수서원 뒤 청다리 아래에서 처형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했다.

붉은 피는 삼일 동안 떠내려갔다고 했다. 

십여 리를 떠내려온 붉은 피는 안정 동촌마을 앞에서 멎었다고 했다.

해서, 마을이름이 '피끈마을'로 불리워졌다고 했다.

죽계천은 영주 서천교 700여 미터 위에서 풍기에서 내려오는 남원천과 합수한다. 그렇게 합수하여 흘러가는 내를,

우리 영주사람들은 서천(西川)이라고 부른다. 

서천은 영주 서쪽을 돌고 돌아 무섬마을을 지나 예천 삼강으로 흘러던다. 


산골짝에서 내려오는 가느다란 실개천이 한 줄기 또 한줄기가 만나 내(川)를 이룬다.

냇물이 모여 강이 된다.

두만강이 되고, 압록강이 되고, 그 옛날 고구려 사람들이 아리수라고 불렀던

한강이 되고, 영남의 젖줄기 낙동강  칠백 리 되어 흐른다.

이땅의 강은 서해로, 남해로, 동해로 흘러던다.

강이 흐르 듯, 민족의 노래 아리랑도 흐른다.

세계속으로 흐른다.

세계인의 가슴속으로 구부야 구부야 흘러던다.


19세기말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난뒤 은둔의 나라 조선의 항구는 이웃나라 일본과 구미열강의 압력에 의해 개항(開港)됐다.

부산항과 목포항, 군산항과 인천항, 청진항 같은 굵직굵직한 항구가 열강의 압력에 의해 개항됐다.

열려진 조선의 항구로 외국상선들은 물밀듯 밀려들어왔다.

2019년인 올해가 마산항이 개항된지 120년째라고 한다.

하늘 아래에 살고 있는 그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종교,

기독교는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그 무렵에 이 땅에 전파되었다.

인간의 신분을 사(士) 농(農) 공(工) 상(商) 네 등급으로 분류해 놓고 차별하는 유교!

전통적가치를 부정하는 기독교교리는 유교의념을 숭상하는 지배계층에게는 배척해야할 사상이었지만,

민초들에게는 석달 열흘 가뭄끝에 속살거리며 내리는 단비 같았다.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쇄국주의가 막을 내렸고 항구가 개항되자 구미의 선교사들은 앞다투어 상륙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다는 전설적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bert)!

그가 한국을 얼마나 사랑했던가는 "나는 웨스터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그의 유언에 잘나타나있다.

그는 평소 소원한 대로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묻혔다.

그의 묘지 한켠에 있는 비석엔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고 한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한국인의 친구,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bert) 이곳에 잠들다" 

이홍직이 펴낸 국사대사전에는 헐버트를 이렇게 소개했다.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조차 한국사 연구는 헐버트로부터 시작되었다."

헐버트는 한국을, 한국인을 사랑하는 한국의 친구였다.


헐버트는 1863년 미국 버몬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회중교회의 목사였고 미들버리대학의 학장이었다.

회중교회(會衆敎會, Congregational Church)는 회중정치로 교회를 운영하는 개신교 교회이다. 조합교회(組合敎會)라고도 한다. 장로교회는 당회의 권한이 강하지만, 회중교회는 전체 회중들의 의견에 따라서 교회의 결정과 정치가 실현된다.

어머니는 다운마운트 대학 설립자의 후예였다.

그는 미국에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헐버트는 유니온 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886년에 조선조정의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호머 헐버트 그가 이 땅에 남긴 공적은 참으로 지대했다.

그는 YMCA를 창설해서 이 나라 청년들을 개몽했고, 그가 쓴 '한국사', '대동기년', '대한제국망국사'는 '대한제국'을 세계에 소개하는 창구역활을 했다.

그는 한국에 온뒤 독선생을 들여앉혀 삼년간 한글을 배웠다고 했다.

그렇게 한글을 마스트한 그는 책을 낼만큼 한글에 능통했다고 한다.

헐버트를 통해 금속활자와 철갑으로 만들어진 거북선이 세계최초로 한국에서 발명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졌고,

무엇보다도 한글이 가장 훌륭한 소리글자라고 세계에 알려진 것도 헐버트의 공적이었다.

언젠가 문경새재제1관문 주흘관(主屹關) 앞에는 우리 민요 아리랑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문경아리랑'을 최초의 아리랑으로 소개하는 현수막이 걸렸다고 했다.

중국에서도 아리랑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기에 이 자료는 대단히 중요했다고 한다.

아리랑의 악보 가사는 한글이 아닌 영어로 쓰여졌다고 했다.

발굴자의 이름은 호머 헐버트라고 했다.

그는 한국인에게 아리랑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벌써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이미 아리랑의 가치를 알았고, 아리랑이 한국의 민요로, 가락으로 남을 수 있도록 증거까지 남겨놓은 호머 헐버트!

그는 진정 한국을 사랑하는 한국의 친구였고, 한국인의 스승이었다.

아리랑을 사랑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이루어져 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 셰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나는 이글을 쓰기 전까지 한국의 친구였고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다는 전설적 선교사 호머 헐버트를 알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헐버트를 국빈으로 초대했다

당시 헐버트의 나이는 83세였다고 한다.

그는 학국행을 고집했고, 가족들은 고령이라 위험하다며 출국을 만류했지만 그의 한국사랑을 꺾지는 못했다.

가족들의 염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그는 한국체류중 생을 마감했다. 소원대로 그는 그가 사랑하는 땅, 한국의 땅속에 묻혔다.

아니, 품안에 잠들었다.

그 언젠가 풍류객되어 한양엘 올라간다면 그 어르신의 묘소에 참배할 것이다.

'동방의 해돋는 땅, 한국을 사랑해주셔서 진정 감사합니다!'라고 넙죽 절 두번 올리고 올 것이다.


선교사들이 그들의 나라로 돌아갈 때 그네들은 아리랑을 가지고 갔다.

아리랑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과 중남미에 상륙했고. 인도양을 돌아 프랑스에 상륙했다.

도버해협을 건너 신사의 나라 영국땅에 상륙하기도 했다.

또 있다. 무리지어 아리랑을 퍼간 외국인들은 또 있다.

1950년 6월 25일 이땅에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터지고 전선에 투입된 이방의 나라 장병들에 의해 아리랑은 세계곳곳으로 전파되었다.

그네들은 함께 참전했다가 전사한 전우를 이땅에 묻은 대가(代價)로,

포탄 터지는 전장에서 한국인 전우에게서 배운 아리랑을 가지고 갔다.


대한민국 가수 서유석이 부른다.

'나홀로 아리랑'을.


저 멀리 동해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 받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고개를 넘어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

설악산 맑은 물도 동해가는데

우리네 마음들은 어디로 가는가

언제쯤 우리는 하나가 될까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고개를 넘어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백두산 두만강에서 배타고 떠나라

한라산 제주에서 배타고 간다

가다가 홀로 섬에 닻을 내리고

떠오르는 아침해를 맞이 해보자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른 넘어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아리랑 로드'(Arirang Road) 제작 중 KBS카메라에 잡힌 어느 멕시코 친구는 아리랑은 한국인의 '비공식 애국가'라고 했다.

아리랑을 찾아 먼길을 걷고 걸었더니 무척 피곤하다. 담에 또 길떠나기로 하고 이번엔 이쯤에서 쉬자.(끝)

 




*독자분들께 당부드립니다.

본문의 내용 중, 잘못된 부분이 있을 시, 댓글로 주저없이 지적해주십시오.

객관적 입장으로 보아 타당하다고 여겨지면 즉시 바로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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