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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과 여유


 

(1) 장준하, ‘뼛속까지 항일’ 집안의 젊은 신학도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37년만에 다시 세상에 드러나 타살 의혹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김종철 전 연합뉴스 사장이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와 그의 죽음이 2012년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를 연재하는 칼럼을 시작합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내가 장준하 선생을 처음으로 만난 때는 1974년이 저물어 가던 어느 날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사 기자로 일하던 나는 서울 종로1가의 조광현 내과에 입원해 있던 그를 취재하려고 병실을 찾아갔다. 문 앞에는 눈매가 날카로운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당시 ‘기관원’이라고 불리던 중앙정보부원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장 선생에 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사상계>라는 잡지를 통해 치열하게 민주화운동을 해왔고,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이 체포와 투옥을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반독재투쟁을 펼쳤으며, 1973년 말부터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근자에 행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는 사실 정도였다. 

내가 등에 꽂히는 수상한 사내의 눈길에 섬뜩함을 느끼면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 ‘동아일보사에서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장 선생은 병상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는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장 선생이 협심증과 간경화 증세가 악화되어 감옥에서 풀려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젊은이보다 억센 힘으로 내 손을 잡고 한참 동안이나 놓지 않는 바람에 나는 팔뚝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1960년 사상계(思想界) 사무실에서. ©장준하 기념사업회
 
그 무렵 동아일보사는 세계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광고 탄압’을 겪고 있었다. 국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조사와 사법부의 재판에서 드러났듯이, 광고 탄압은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무산시키려고 박정희 정권이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기관들을 동원해서 저지른 사건이었다. 장준하 선생이 병실에 입원하고 있던 무렵에 박 정권이 광고 탄압의 강도를 높여가자 재야단체들과 종교계는 물론이고 뜻있는 시민들이 텅 빈 동아일보의 지면을 채우기 위해 ‘격려광고’를 열성적으로 보내고 있었다. 

장준하 선생은 내 손을 꼭 잡은 채 “동아일보사 언론인 여러분 덕분에 박정희 유신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운동이 뜨겁게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13년 동안 박정희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면서 갖은 고난을 겪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용기가 치솟고 희망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지만 눈동자에서는 강렬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장 선생이 1974년 1월 15일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된 뒤 겪은 일들을 자세히 들었다.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장시간 잠을 재우지 않거나 육체적 고통을 주는 고문을 당한 끝에 ‘헌법 개정을 빙자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불안을 조성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2월 1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3월 2일 비상고등군법회의가 같은 형량을 선고한 뒤 대법원 형사부는 8월 20일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고 형을 확정했다.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장 선생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정보기관에서 당한 고문과 감방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심신이 피폐해진 데다가, 모든 신문과 방송이 ‘긴급조치 관련 양심수들’과 가족의 참혹한 실상을 하나같이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으나 200 명이 넘는 ‘민청학련·인혁당’ 관련 정치범들은 아직도 차디찬 감방에 갇혀 있었다. 

두 시간이 넘게 장준하 선생을 취재하고 병실을 나서려는 나의 손을 그가 다시 굳게 잡고 말했다. “동아일보사 여러분이 가장 큰 희망입니다. 이제 민중이 떨쳐 일어나 유신독재를 무너뜨리는 싸움에 나설 것입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일하세요.” 

그는 결국 박정희 정권의 몰락이나 붕괴를 보지 못한 채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 아래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그날부터 37년이 지난 2012년 8월 15일, 광복 기념일에 ‘실족사’가 아니라 ‘타살 의혹’이 짙은 유골을 통해 역사의 현장에 되살아났다. 오는 12월 19일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기까지 박정희 정권이 그의 죽음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공권력에 의한 ‘타살’로 확정될 경우 1975년 8월 당시 청와대에서 퍼스트레이디로서 공적 업무를 수행했던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어떤 견해를 밝히고 박 정권의 책임에 대한 언급을 할는지 유권자들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것이다.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책들이 적지 않은데도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지금 20대부터 50대 초반까지의 청·장년층 가운데 대다수는 그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과 죽음은 대통령선거라는 중대한 행사와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정치사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다.

항일의식이 투철한 할아버지와 아버지

장준하는 3·1독립운동 이듬해인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장윤희(1864~1950)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장로님’ ‘학자 어른’ ‘동의보감 할아버지’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선각한 계몽주의자’인 동시에 철저한 ‘배일사상가’였다. 할아버지는 의주에 양성학교라는 사학을 세워 스스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 장석인(1901~1966)은 기독교 계열 학교인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를 거쳐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고 숭실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장석인은 1938년에 일제가 강요하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사직에서 쫓겨난 뒤 삭주의 한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그는 6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남한에서 장로회신학대학 강사로 시작해서 서울 연희동교회 목사와 당회장을 지냈다. 

   
동경 유학시절. 왼쪽부터 김용욱, 김익준,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장석인의 5남 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난 장준하는 형이 어릴 적에 숨지자 장남이 되었다. 1933년 15세의 나이에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들어갔다. 1934년 아버지가 선천 신성중학교로 옮겨갔기 때문에 그 학교 2학년으로 전학한 장준하는 졸업반(5학년)이던 1937년 5월 생애 처음으로 항일운동의 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일제 경찰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교장 장이욱을 체포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격분한 장준하는 전교생을 이끌고 동맹시위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시위 방법이 특이했다. 우선 그는 각 학년의 대표를 불러놓고 전교생 모두가 각자의 책가방에 든 일본어로 된 책을 모두 꺼내 찢어버리도록 한 뒤에 시위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몰려나와 대열을 짓자 장준하가 그 선두에 서서 교문을 박차고 나갔다. 구호는 “장이욱 교장 선생님을 석방하라!”였다. 그러나 시위 대열은 얼마를 가지 못하여 급히 출동한 일경에 부딪혀 차이고 두들겨 맞으면서 진로가 막혔다.  

대열은 무너지고 되밀려 흩어지며 여기저기서 고함과 비명이 터졌다. 장준하는 후퇴하여 쫓기는 대열을 그대로 대목산으로 몰고 올라가 산상의 농성을 폈다. 그리고 일제히 목이 터져라 교가와 아리랑을 번갈아 부르며 발 아래 선천 읍내가 진동하도록 교장 선생님을 돌려달라고 외쳐댔다.(박경수 지음,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2007, 57~58쪽)

일제 경찰이 들이닥쳐서 총개머리로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치고 때리면서 주모자를 대라고 압박하자 장준하는 ‘내가 주모자’라고 나섰다. 아래 학년 대표들도 ‘내가 주모자’라고 주장하자 경찰은 장준하와 그들을 연행했다. 유치장에 갇혔다 풀려난 그들의 첫 번째 항일투쟁은 패배로 끝났지만 그때부터 장준하는 일제 침략자들과 더욱 치열하게 싸우리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1938년 3월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장준하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그 학교가 곧 폐교되자 정주의 신안소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그는 창고건물이나 다름없이 허술한 학교에서 실질적으로 ‘교장 대행’ 구실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 5학년 여학생들의 긴 머리채를 가위로 잘라 단발이나 갈래머리로 만드는가 하면 펄럭거리는 치마 대신에 블라우스와 통치마를 입게 했다. 보수적인 정주의 어른들이 펄쩍 뛰었지만 그는 ‘학교 근대화’를 꿋꿋하게 밀고나갔다. 그는 6학년 남녀 학생들과 함께 과수원을 뒤엎어 새 교사를 짓기도 했다. 

장준하는 태평양전쟁이 터진 1941년 봄 신안소학교를 그만두고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도쿄에서 곧바로 동양대학 철학과(예과)에 입학한 그는 한 해 동안 거기서 공부한 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일본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때 그 신학교 3년 과정의 본과에는 박영출, 황재경, 오택환 등이, 2년 과정의 예과에는 전택부, 문익환, 문동환, 김관석, 박봉랑 등이 있었다. 예과 학생인 문익환, 동환 형제와 김관석은 1970년대에 장준하와 함께 박정희의 독재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는 동지가 된다.

 

 

(2) 갑작스런 결혼과 일본군 ‘자원입대’

 

장준하가 일본신학교 예과에 다니던 시절 도쿄에는 목사 박영출이 조선인 학생들을 위해 운영하던 ‘숭덕학사(崇德學舍)’가 있었다. 그곳은 ‘배일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목회를 여는 장소’로 유명했다. 숭덕학사에 열심히 나가던 장준하는 거기서 평생 동지가 되는 게이오대 학생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을 만났다. 장준하는 숭덕학사의 교회위원이 되어 주일학교 선생으로서 동포 어린이들에게 찬송가와 동요를 가르치면서 조국의 역사에 눈을 뜨게 하려고 애썼다. 

장준하의 신학생 생활은 한 해 반 만에 끝났다. 1943년 들어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의 거센 공격에 밀리자 일제가 10월 20일 조선인 대학생들을 상대로 ‘학도지원병제’를 공포한 뒤 11월 8일부터 문과계 대학, 전문학교, 고등학교 재학생 가운데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징용영장을 발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로만 지원제일 뿐 실제로는 강제징집제도였다. 장준하는 그해 11월 하순 짐을 꾸려 도쿄를 떠나 귀국했다. 그가  겨울방학이 되기도 전에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요시찰인’이 되어 늘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던 아버지와 가족을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주의 집으로 돌아간 장준하는 달포만인 1944년 1월 5일 김희숙과 결혼식을 올렸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세례명이 ‘로자’인 김희숙은 장준하가 신안소학교에서 담임으로 가르치던 제자였다. “김희숙의 어머니 노선삼(비리스다) 여사는 경건한 천주교 신자로서 주위의 존경을 받는 부인이었다. 부군 김준덕은 반일 사상가로서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그 바람에 가세가 어려워져 하숙을 치면서 가계를 꾸려 나갔고 장준하와 김용묵이 신안소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동안 그 집에서 하숙을 하였던 것이다. (·····) 동경에 온 장준하는 3년간의 하숙생활에서 정이 든 고국 정주의 노선삼 여사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곤 했다. 그 편지 겉봉에 쓰인 발신자 장준하의 주소를 보고 로자가 은사인 장준하에게 어머니를 대신하여 답장을 썼고 그로부터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레 편지가 오가게 된 것이다.”(<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83쪽)

도쿄에서 귀국하기 직전에 친한 벗들에게 ‘일본군에 자원입대하겠다’고 실토한 장준하의 갑작스런 결혼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장준하와 김용묵이 떠난 뒤 김희숙의 어머니는 다른 하숙객을 구할 수가 없어서 집안 형편은 훨씬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보성여학교에 다니던 김희숙은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일제는 조선의 처녀들을 징발해서 이른바 ‘정신대(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공장이나 전선으로 보내고 있었다. 반일 망명인사의 딸인 김희숙이 위안부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편지를 받은 장준하는 “나는 귀국하는 대로 로자를 먼저 안정시켜 놓고 일본군에 가겠다”고 김용묵에게 말했다고 한다. 일제가 유부녀는 위안부로 징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김희숙과 결혼한 지 2주 뒤인 1944년 1월 20일 일본군에 입대했다. 그때 신부의 나이는 16세였다. 

장준하는 자신의 저서 <돌베개>(화다출판사, 1971)에 입대하던 날의 기억을  이렇게 기록했다.

일본말 성경과 독일어 사전, 희랍어 성경과 사전, 이렇게 네 권을 든 학생   모 학생복 차림의 내가, 정주역에 닿았을 땐 아무도 내게 눈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에게는 만장도, ‘다스키’라는 멜빵도 그 ‘무운장구(武運長久)’의 띠도, 히   노마루(일장기)의 머리끈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 전쟁 중의 물자난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시골에서 입영을 위해 ‘축하한다’는 플래카드들이 지방관청과 유지들로부터 마련되어 보내왔건만, 나는 그것을 몸에 한 번 대어보지도 않은 채, 몽땅 우리집 아궁이 속에 넣어버렸다. (···) 정주역에서 평양행 발차까지는 한 시간 반의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역 대합실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자식들의 입영 때문에 우울한 그 지방의 유지들, 흐르는 눈물을 닦기에 정신 없는 아낙네들, 거의 술에 만취되어 이성을 잃은듯한 학도지원병들, 이 틈을 놓칠세라고 친일파다운 격려와 축하인사를 뿌리고 돌아다니는 가증스러운 얼굴들, 이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홀로 고독을 즐기고 있던 내 귓전을 스치던 발차시간을 알리던 확성기 소리, 그리고 경의선 열차의 요란한 기적 소리, 이 모든 것들이 주마등 같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돌베개>, 8~9쪽)

평양 제42부대에 배치된 장준하는 ‘맨손으로 말똥을 치우고 말발굽을 닦아내는 일을 강요당했다. 그곳에는 2백여명의 학도병들이 끌려와 있었다. 

그때의 울분은 지필로 기록할 수가 없지만 함정에 빠진 젊은 사자들의 울분과도 같이 처절한 것이었다. 몹시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적 작   업을 계속하여온 우리들은 대부분 손발에 동상이 걸려 고생을 하였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 

밤이면 밤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부어오른 엄지손가락을 통해서 등골까지 쑤시게 만들었다. 불침번을 서는 초년병 동료들이 나의 고통을 안타까워 해 주던 그 정성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때마다 나는 내 가슴속에 지닌 성경책을 꺼내어 몇 장씩을 읽어가며 아픔을 참아보았다.(<돌베개>, 10쪽)

많은 학도병들이 오후에 받는 교련을 피하려고 가족이 날마다 면회를 오게 하는가 하면, 어떤 부모들은 아들이 일선이 아니라 평양 근처의 부대에 남게하려고 일본군 고급장교들을 요정으로 초대해서 환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준하한테는 어머니와 아내가 한 번, 아버지가 한 번 면회를 왔을 뿐이었다. 

동상이 악화된 엄지손가락 때문에 ‘뼛속을 후벼내는듯한 아픔’을 나흘 동안이나 참고 견디던 장준하는 닷새 째 되던 날 의무실을 찾아갔다. 의무관인 일본군 중위는 ‘마취제가 없으니 생으로 상처를 째야 한다’면서 엄지손가락에 알콜을 한두 번 문지르더니 그대로 메스를 갔다 댔다. 장준하는 의무관이 다섯 군데를 째는 동안 결연하게 고통을 참아냈다. ‘수술’을 마친 일본군 중위는 “야, 내 외과의사 생활 십여년에 너 같이 지독한 놈은 처음 본다. 장하긴 장하다. 독종이구나”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장준하가 입영한 지 만 4주가 되던 날, 학도병 200여 명 가운데 160여 명이 중국 북부지방으로 파견된다는 소문이 병영 안에 퍼졌다. 거의 모든 학도병들이 평양이나 조선반도 안에 남으려고 갖은 공작을 하고 있었지만 장준하는 동상에 걸린 엄지손가락 때문에 중국의 전선으로 가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내일 중지 파견 선발에만 끼면 나는 조국의 아들이 될 수 있으련만. 그 당시의 나의 절망 속에 일루의 희망은 내가 중경(중국 사천성에 있는 당시 중국의 수도)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든 중국만 가면 일군을 탈출할 수 있고 탈출만 하면 임정에도 찾아갈 수 있으리라고만 믿어졌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중국군에라도 편입할 수 있을 것이다.”(앞의 책, 14쪽)

이튿날 아침 각개점호 시간에 소좌인 일본인 부대장이 학도병들을 점검하다가 손에 붕대를 감은 장준하를 보고 “그 팔은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물었다. 그는 생손을 앓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부대장이 ‘아픈 몸으로까지 떠날 필요는 없다’고 말하자 장준하는 “아닙니다. 이번에 꼭 동료들과 함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강하게 호소했다. 소좌는 “됐어, 그 원기가 장해!”라고 칭찬했다. 그렇게 해서 장준하는 평양 제42부대를 떠나게 되었다.

   
1945년 8월 산동성(山東省) 유현(維懸) 어느 사진관에서. 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장준하 기념사업회

 

그는 며칠 전에 면회를 온 아내 김희숙에게 장차 자신의 계획을 은밀히 알려준 바 있었다. “중국에 가면 매주 주말마다 편지를 하마. 만약 그 편지의 끝이 성경 구절로 되어 있으면 그것이 마지막 받는 편지로 알아도 좋을 것이다. 당신이 그 성경 구절을 읽고 있을 땐 이미 나는 일군을 탈출하여 중국군 진영이나 우리 ‘임정’의 어느 곳으로 들어가 있을 것이다.”

장준하를 포함한 학도병 160여명을 태운 열차는 압록강을 건너고 만주를 지나 사흘 만에 중국 강소성의 서주에 도착했다. 그날이 2월 16일이었다. 그들은 30분쯤 행군해서 지금의 보충대 비슷한 대대 규모의 부대에 도착했다. 처음부터 일본군을 탈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던 장준하는 ‘일본제국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행한 탈출이 아니라 부대의 지휘급 일인들의 불찰과 오만에 원인이 있는 탈출로 꾸미자’는 생각을 굳혔다. 

어느 날 그런 계획에 딱 들어맞는 사건이 벌어졌다. 장준하가 저녁식사를 마치고 밥통을 취사장에 반납하고 있는데 일본인 상등병이 ‘이 더러온 반도놈아’라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이미 깨끗하게 씻은 밥통을 다시 씻어오라고 시비를 걸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갈아앉히면서 불침번을 서고 난 장준하는 ‘얼마쯤 인정을 가진 하사관’인 내무반장 우에다를 찾아가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지금 불침번 교대를 마치고 들어오다가 발길을 돌려 탈출을 하려다 다시 마음을 돌려먹고 돌아왔습니다.” 일본인 상등병에게 당한 모욕을 차분하게 이야기하자 내무반장은 숨을 거칠게 물아쉬면서 장준하를 처다보았다. 장준하는 내무반장과 고참병들이 너무나도 친절하게 대하면서 지도해주어서 ‘내가 조선사람인 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더러 친형님들 틈새에 끼어 있는 것처럼 병영생활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그는 탈출할 생각을 하다가 ‘반장님에게 인간적으로 죄를 짓는 것 같아 포기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내무반장의 보고를 받은 중대장은 이튿날 아침 시간에 문제의 상등병에게 “너 같은 놈 때문에 황은(皇恩)에 감동하여 고등교육을 받고도 그 몸을 홍모(鴻毛)처럼 여겨 용약 군에 지원하여 온 많은 학도병들을 탈출시킨 것이야”라고 꾸짖으서 그를 사흘 동안 영창에 가두었다. 그날 밤 내무반장은 장준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걷자고 하면서 ‘아리가토오(고맙다)’를 연발했다. 

 

 

(3) 치밀한 작전으로 일본군을 탈출하다

 

장준하가 속해 있던 부대에서는 조선인 학도병들의 탈출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그가 평양에서 그리 옮긴 지 3개월 반 만에 학도병 전원이 쓰카다부대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장준하는 그동안 익혀 두었던 지리와 지형이 못내 아까웠지만, 다행이도 쓰카다부대까지 함께 오게 된 내무반장 우에다가 중대 간부들 앞에서 그를 따뜻하게 대해준 덕분에 모범적인 조선 학도병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쓰카다부대는 단 한 사람의 탈출병 밖에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그 한 사람조차도 부대 본부에서가 아니라 전선의 파견대에서 탈주한 것이었다. 그만큼 군율이 엄하고 감시가 삼엄한 부대였다. 그런 부대라 그런지 조선인 학도병들 가운데는 비굴한 행태를 보이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고참병인 일본놈들이 외출 갔다 돌아오면 매식으로 배부르니 별로 병영 음식이 먹고 싶지 않아 계란을 깨어서 비벼 몇 젓가락 먹다 말고 선심 쓰듯 밀어 던져주는 밥 한 그릇을 더 받아먹고자 혈안이 된 우리 동료들, 그나마도 대학교육을 받다 입영했다는 처지에···. (······) 보다 못해 나는 몇 친구들에게 말하여 잔반불식동맹(殘飯不食同盟)까지 만들었다. 일본놈들이 먹다 남긴 밥찌꺼기는 먹지 말자는 이 동맹은 배고파 창자가 뒤틀리는 한이 있어도, 우리의 자존심만은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한때 우리나라 육군의 최고책임자였던 모 장군도 사실은 나와 같은 동료였다. 그러나 나는 그를 동료로 보기에 가슴이 아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잔반불식동맹’을 만들어 그의 자존심을 길러주자고 했건만 그것은 허사가 되어버리고 만 슬픈 기억도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친구는, 고참병이 먹다 남은 밥을 던져주면, 그릇째로 뺏기 내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숫제 두 손을 밥그릇에 넣어 먼저 밥만을 움켜쥐고 돌아서서 그 더러운 밥을 먹곤 했다.(<돌베개>, 26~27쪽)
 
장준하는 밤낮으로 전투훈련에 시달리면서도 휴식시간이면 교관 옆에 다가앉아 ‘적(중국군)’의 상황을 물어보면서 위치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동북방 120리 지점에 중국군이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알아냈다. “당시 중국 대륙에 퍼져 있는 중국군은 그 갈래가 많았다. 충칭에 정부를 두고 있는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국부군과 모택동의 공산군이 있고, 그리고 왕정위군이란 게 또 있었다. 왕정위는 중국 국민당의 중심 인물로 장개석과 함께 손문을 보좌하다가 손문 사후 장개석과 대립하다가 결국 중경을 탈출해서는 대일(對日) 화평을 구실로 남경에 친일 괴뢰정부를 세우고 군대까지 가지고 있었다.”(<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99쪽) 

치밀하게 탈출을 준비하던 장준하는 그 사실을 아내 김희숙에게 은밀한 문구로 알렸다.

벌써 며칠 전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다른 때와 달리 짤막한 사연을 엽서 한 옆에 적고 그 끝에 ‘로마서’ 3장 9절을 인용했다. 나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라는 구절이다. 

가만히 엽서를 내 뺨에 비벼대었다. 나의 체온이 묻어나 나 살던 곳으로 전해질 것이라는 생각보다도, 내 감상이 이렇게 해서 위로될 수도 있다는 무의식이 나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돌베개>, 32쪽)

1944년 7월 7일, 장준하와 동지들은 마침내 일본군 탈출을 감행했다. 그날은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기 시작한 ‘지나사변’ 발발 7주년 ‘기념일’이었다. 일본군 전체가 그랬듯이 쓰카다부대에서도 질탕한 잔치가 벌어졌다. 훈련이 일찍 끝나자 내무반들에는 ‘천황’이 하사했다는 술과 담배가 돌려졌다. 병영 안은 노래와 춤으로 시끌벅적했다. 

오래 전에 장준하와 함께 탈출하기로 약속하고 치밀하게 준비를 해온 학도병은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이었다. 그들은 탈출에 대비해서 그동안 준비해온 배낭, 나침반, 성냥, 그리고 약간의 식량과 수통을 다시 점검했다. 

저녁 점호시간이 되었지만 병사들이 만취해서 점호가 불가능해지자 주번사관이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15분 이내에 목욕을 마치고 돌아와서 취침해라. 오늘 저녁엔 야간학과는 중지한다. 점호 끝.” 

밤 9시 10분, 장준하와 동지 세 사람은 비밀리에 마련해둔 행장을 목욕대야에 넣고 내무반 밖으로 나갔다. 네 사람은 부대 철조망 바깥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개약진’을 했다. 장준하의 귓전에서는 “탈출하다 붙잡히면 일본도로 목을 쳐서 연병장에 내걸고 본보기로 삼겠다”고 위협하던 일본군 장교의 말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장준하는 짙은 어둠에 몸을 숨기면서 3m 높이의 철조망을 기어 올라서 넘었다. 적어도 부대원들이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기 5분 전까지는 세 동지와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구마밭 고랑을 타고 달려 옥수수밭에 이르렀다. 세 동지는 이미 거기 모여 있었다. 

장준하 일행이 앞에 우뚝 솟아 있는 험준한 돌산을 기어서 중턱에 이르니 시원하게 트인 사방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들은 동이 트기 전에 일본군과 맞서고 있던 왕정위 군대의 진영까지 접근해야만 했다. 일행이 돌산을 내려가 자 뜻밖에도 운하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윤경빈이 운하로 들어가서 가늠해보니 물이 가슴까지만 차올랐다. 그러나 전혀 헤엄을 치지 못하는 장준하는 공포에 사로잡혀 너비가 20m밖에 안 되는 운하를 천신만고 끝에 건넜다. 그들은 나침반을 꺼내 방향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성냥이 물에 젖어버려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네 사람은 동북방향이라고 짐작되는 곳을 향해 수수밭을 달려나갔다. 

먼동이 트는가 했더니 얼만 안 있어 날이 밝기 시작했다. 파김치가 된 장준하 일행은 조밭에 숨어 그날 낮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다른 세 동지는 눕자마자 코를 곯았지만 장준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조 포기들을 뽑아 그들의 몸을 덮어준 뒤 한참만에야 잠이 들었다. 잠에 빠졌던 그들은 뜨거운 햇살을 견디지 못해 눈을 떴다. 바로 그때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네 사람이 탈출한 사실이 발각되자 일본군이 중국 주민들을 동원해서 벌판을 뒤지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조밭에 납작 엎드렸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메율라, 메율라(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어)” 하는 소리가 조밭 너머 수수밭에서 울렸다. 수수밭을 나와서 네 사람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 중국 청년 두서너 명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 그리고 뒤에 한 사람 이렇게 세 사람의 중국청년이 우리가 누워 있는 조밭의 한쪽 끝으로 약 30m의 거리를 두고 지나가 주었다. 대지가 빙그르 지축을 중심으로 기우는듯했다. 우리는 현기증에 시달리는 듯이 그대로 그 순간을 지속시켰다. 뒤에 따르는 중국인이 또 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 시간이 실히 되었을 시간이 우리에게 지옥을 실감케 해주고 지나갔다. 이윽고 ‘크락숀’ 소리가 나더니 자동차 소리가 사라져 갔다. 이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제서야 일어났다.”(앞의 책, 45쪽)

   
1945년 8월 19일 산동성(山東省) 유현(維懸) 비행장에 불시착하여 중국군과 함께. ©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 일행은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면서 광야를 한 걸음씩 걸어나갔다. 살갗을 태울 듯이 퍼붓던 햇볕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을 때 장준하의 뒤를 따라 걷던 홍석훈이 기진맥진해서 쓰러졌다. 세 사람은 그의 팔과 다리를 주무르고 세차게 흔들기도 했으나 그는 좀체로 깨어나지 않았다. 한참만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도저히 걷지 못하겠다면서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세 사람은 교대로 그를 부축하고 앞으로 나가다가 웅덩이를 발견했다. 그들은 미친듯이 물을 마시고 나서 홍석훈에게도 먹였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참외밭을 만나서 주린 배를 채운 일행은 졸음을 이겨낼 수가 없어서 옥수수밭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잠을 깬 장준하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기적소리를 들었다. 쉬저우에서 동북방향으로 가는 기차는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네 사람은 아직도 일본군 관할지역 안에 있음이 분명했다. 일본군은 중국 대륙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철도 연변과 주요 도시들에만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날이 밝자 강행군을 계속하다가 어느 마을 근처에서 한 무리의 농부들이 둘러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행이 긴장한 표정으로 접근하자 그들은 기꺼이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차를 넉넉히 마시고 물통까지 채운 일행은 서투른 중국말로, 그리고 땅바닥에 쓴 한자로 거기가 어디인지를 물었다. 농부들은 쉬저우까지 시오리밖에 안 되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네 사람은 죽을 힘을 다해 사흘 동안 걸어온 데가 쓰카다부대에서 6km쯤 떨어진 곳이라는 말을 듣고 몸서리를 쳤다. 

농부들은 앞에 보이는 산까지 삼십리라면서, 그 너머에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 주둔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장준하 일행이 그 산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뒤쪽에서 손을 휘저으며 고함을 질렀다. 일행이 불길한 예감 때문에 앞으로 치닫자 그들은 등 뒤에서 총을 쏘아댔다. 무작정 달리던 일행 앞에 강이 나타난 것을 본 그들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노를 저어 강을 타고 흘러가던 사공이 배를 태워주었기에 그들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배에 타고 보니 김영록이 없었다. 동지를 잃은 슬픔을 억누르면서 배를 내려 삼십리 길을 달아난 세 사람은 땅바닥에 누워 곯아떨어졌다. 

장준하가 눈부신 햇빛에 눈을 떠보니 구식 모젤권총을 든 사내를 따라 몇 사람이 20여m 앞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일행은 그들과 땅바닥에 한자를 쓰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장준하가 “우리는 한국 청년, 그제 밤 일군 병영 탈출, 지금 팔로군을 찾아간다”라고 쓰자 그들은 ‘우리가 바로 팔로군’이라고 대답했다. 세 사람은 그들을 따라 본부가 자리잡은 곳으로 갔다. 대장처럼 보이는 풍채 좋은 남자가 중국어로 무엇인가를 묻자 장준하는 그의 책상에 놓인 붓을 들어 종이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한국 청년이오.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하려는 청년들이오. 우선 중국군에 편입해도 좋소.” 그는 붓글씨로 “우리는 중국 중앙군 소속의 유격대요. 우리의 영수는 장개석 총통이오”라고 적었다.

우리 셋은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얼싸안고 울고 싶었으나, 어느새 눈매가 아프고 가슴에 뭉쳤던 한이 뺨을 타고 내려왔다. 울음에 가까운 흐느낌이 솟구쳐서 우리는 웃음도 웃을 수 없어, 그 벅찬 기쁨을 억누르지 못한 채 발을 굴렀다. 이제 모든 의혹은 말끔히 벗어지고 우리의 탈출이 성공한 것을 확인했다. 

추격당하던 그때의 절박하던 긴장이 어느새 아름다워졌다. 그들이 팔로군이라고 자처하면서까지 우리를 데려온 것까지도 고마웠다.(앞의 책, 69쪽)

 

 

(4) 평생동지 김준엽을 만나다

 

청색 군복에 장총으로 무장한 장개석군대(국부군) 10여 명이 장준하 일행 세 사람을 사령부로 호송하는 일을 맡았다. 이십 리를 걸어서 도착한 사령부는 조그만 마을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행은 어느 집으로 안내되어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중국 군복을 입은 홍안의 미청년’이었다. 그는 세 사람을 벌써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를 띠었다. 그 청년이 “한국분들이죠?”라고 우리말로 물었다. 장준하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와락 달려들어 세 사람을 차례로 끌어안았다. 그는 학도병으로 쉬저우에서 탈출했다고 말했다. 그가 바로 쓰카다부대 학도병 ‘탈출 제1호’였다. 그의 이름은 김준엽이었다. 그는 탈출 이후에 3, 4개월 동안 배운 것이라는데 놀라울 정도로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있었다.

장준하, 윤경빈, 홍석훈은 탈주 도중에 생이별을 한 김영록의 행방을 아느냐고 김준엽에게 물었다. 그는 일행이 처음 끌려갔던 지대(支隊)에서 김영록을 수배했으며 유격대 사령부에서도 찾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날 저녁식사를 배부르게 하고 잠자리에 든 세 사람은 이튿날 아침 요란한 소리에 잠을 깼다. 어떤 사건이 벌어진 듯했다. 

마침내 우리는 꿈의 실현을 보았다. 어김없는 기대의 실현이다. 분명코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우리 앞엔 김영록 동지가 나타나주었다. 꼭 죽은 줄 알았던 김영록 동지가 안으로 끌려 들어오는 것이었다. 벌떡 일어나 우리는 소리를 질렀다. ‘김 동지이!’ 우리 셋은 김영록 동지에게 매달려 마음속에 숨었던 죄를 고하듯이 울음 머금은 그의 동자를 쳐다보았다.(<돌베개>, 75쪽)

김영록은 다른 세 사람이 강을 건너기 전 수수밭에서 길을 잃었다고 한다. 그는 추격자들의 총격이 너무 심해서 그 자리에 엎드려 있다가 방향을 잃고 여기저기를 헤맸다. 그러다가 장개석군이 보낸 수색대에 발견된 것이었다. 

김준엽은 장준하 일행을 처음 만나던 날의 기억을 이렇게 기록했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할 때다. 갑자기 마을사람들이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손 참모가 하는 말이 ‘일본 병사들’이 방금 도착하였다는 것이었다. 마당으로 뛰어나가 보니 일본 군복 차림의 청년 셋이서 있었는데, 그 지성적인 얼굴과 느낌으로 대번 나는 나와 같은 한국의 ‘학병’일 것으로 단정했다. 

“한국분들이죠?”
 

   
일본신학교 시절. 맨 왼쪽이 김준엽, 왼쪽 두 번째가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그들을 차례로 꽉 끌어안았다. 나는 이때처럼 감격에 차고 희열에 넘친 일은 없었다. 이제 한국인의 동지가 생긴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려는 씩씩한 동지들을 얻은 것이다. (·····)

나와 장준하 형의 만남은 이때가 처음인데 이로부터 그와 나는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으며, 그가 1975년 8월에 별세할 때까지 연인처럼 일생 고락을 함께하게 된다.(김준엽 지음, <장정>, 나남, 1995, 186~187쪽)

장준하의 평생동지 김준엽은 어떤 인물이었는가? 1920년 8월 26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난 그는 1940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 게이오대 동양사학과에 입학했다. 앞에 적은대로 그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에 강제징집을 당해 중국의 쓰카다부대에 배치되었다가 1944년 3월 29일 새벽 탈출했다. 

1945년 광복 이후 그는 중국의 국립 동방어전문학교에서 강사 생활을 하다가 귀국해서 고려대 사학과 조교수가 되었다. 그는 분단된 조국의 통일에 대비해서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등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김준엽은 학자의 길을 고수하면서 정치권의 ‘영입’ 제안을 모두 고사했다. 1960년 4월 혁명 뒤 장면 정권이 고위관직을 주겠다고 했던 때, 1961년 5·16쿠데타 뒤 박정희 정권이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직을 맡아달라고 했던 때, 그리고 1972년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한 뒤 국토통일원 장관으로 들어오라고 했던 때도 그는 응하지 않았다. 

김준엽은 1982년 고려대 총장에 취임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을 제적하라고 압력을 가하자 의연하게 버티다가 이사회의 결정에 밀려 총장직을 사퇴했다. 그는 고려대 학생들이 ‘김준엽 총장 강제 사퇴 반대’ 시위를 벌인 일을 두고 ‘그것을 인생의 최고훈장으로 여긴다’고 회상했다. 그 이후에도 그는 국무총리직 등 정권의 제의를 모두 뿌리치고 학자로서 평생을 보내다가 2011년 6월 7일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준하 일행이 김준엽을 만난 지 미처 하루도 지나지 않아 긴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김준엽이 새벽 2시에 밖에 나갔다 오더니 어딘가를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한낮에 부대로 돌아온 그는 “나는 오늘 우리가 탈출해 나온 부대, 바로 쓰카다 부대장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다시 쓰카다부대로 넘어갈 뻔했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사령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산에서 중국인 노동자들과 일본인 관리자들 사이에 벌어진 임금 인상 관련 분규를 중재하려고 사령관 한치륭의 통역 자격으로 일본군 수비대장을 만나러 갔다고 말했다. 수비대장이 사령관에게 전한 공한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 귀 부대의 병사 30여 명을 우리는 이곳에 포로로 하여 잘 대우하고 있고 있은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정확을 기하는 의미에서 그 명단을 드린다. (···)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부대에서 이탈한 군인 수 명이 귀대에 강제 억류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과 귀하의 부하 30여 명과 상교(相交)함이 어떤가? 즉시 교환할 것을 제의한다. 만약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본관으로서는 특별한 조처를 할 각오가 되어 있다. 현명한 장군의 신속한 판단을 바란다.(<돌베개>, 79~80쪽)

‘이 부대에서 이탈한 군인 수 명’은 바로 장준하 일행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잔뜩 긴장한 네 사람을 향해 김준엽은 “사령관이 즉석에서 거절했어. 정말야, 정말야! 날 믿어줘”라고 말했다. 장준하와 동지들은 그 순간 “충칭으로 가자. 우리의 참된 영도자들이 계시고 우리 조상의 그림자가 지금 충칭에 있다면 그리로 가자”고 다짐했다. 

이튿날, 김준엽이 지난 밤처럼 새벽 2시에 밖으로 나갔다 오더니 비상이 걸렸다고 알려주었다. 장준하 일행은 어제 지급된 군복을 부랴부랴 입고 뛰쳐나갔다. 사령부가 위치 이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유격대는 밤새 40여 리를 걸어 새로운 사령부 자리에 도착했다. 장준하와 동지들은 군영 앞을 흐르는 강가로 나갔다. 

우리는 동북쪽의 조국을 향하여 경건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글대는 태양을 마주하고 가로로 한 줄을 만들어 서서 이 가슴의 감격을 조국에 고하고자 했다. 김준엽 동지, 윤경빈 동지, 김영록 동지, 홍석훈 동지, 그리고 나, 이렇게 차례로 서서 조국을 향한 배례를 한 것이다. 

머리가 깊이깊이 숙여져 내려가기만 했다. 두고 온 산, 강, 뛰놀던 고향이며 부모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욱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윽고 머리를 들었을 때는 모두 눈물을 가득 머금어 아침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숭고한 것이랴. 

“·····우리 다 같이 애국가를 부릅시다!”

애국가의 가사가 분명치는 않았지만 나는 2절까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힘찬 나의 선창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불로하 강변에 애국가가 퍼졌다. 

강물 따라 흘러 흘러 그 장엄한 애국가의 여운은 물살을 지으며 불로하 깊은 강심으로 스며들었다.(앞의 책, 85~86쪽)

‘광활한 중국 땅 천지’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장준하는 벅찬 감동 때문에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를 마저 부르지 못했다. 일행 가운데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애국가 흘러 흘러 황해로 흘러라!”

 

(5) 유격대 거쳐 광복군 훈련반으로

 

불로하 강변에서 애국가를 합창하고 돌아온 장준하 일행은 유격대 참모 손영한테서 부대 현황과 부근의 지형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이어서 벌어진 오찬 자리에서 사령관 한치륭이 일행에게 일본군의 전황을 물었다. 장준하가 김준엽의 중국어 통역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자세히 알려주자 한치륭은 자신이 이끄는 유격대의 임무와 현황을 들려주었다. 그 부대는 게릴라전과 정보 수집뿐만 아니라 실제로 군정까지 맡고 있었다.

그날부터 장준하 일행은 손영한테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김준엽이 일본군 부대를 상대로 뿌릴 선전전단을 작성하고 인쇄하는 작업을 도왔다. 

그들이 유격대에 편입된 지 열 하루째가 되던 날 새벽 3시쯤 막사 부근에서 ‘꽝’ 하는 폭음이 터졌다. 일본군이 던진 수류탄이라고 직감한 장준하와 김준엽은 신발과 소지품을 잽싸게 챙겨 불로하 강변의 갈대밭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수류탄 터지는 소리와 콩을 볶는 듯한 소총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그때 갈대밭에 웅크리고 있는 몇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참모 손영과 장준하의 세 동지였다. 가까스로 습격자들의 포위망을 벗어난 여섯 사람은 어느 산자락에 있는 마을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유격대의 파견대가 나와 있었다. 새벽에 그들을 기습한 적의 정체가 일본군이 아니고 중국의 팔로군이라는 사실을 파견대 사람한테 들은 장준하는 깜짝 놀랐다. 

팔로군의 정식 명칭은 국민혁명군 제팔로군(第八路軍)으로서, 1937년의 제2차 국공합작 때 장개석의 국부군과 함께 항일민족전선에서 함께 싸우기로 합의했으나 독자적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국부군과 팔로군 사이에서는 알력이 끊이지 않았다. 

장준하와 김준엽 일행은 손영과 함께 산줄기를 타고 내려가다가 초저녁에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거기에서 그들은 유격대의 연락책을 통해 사령관 한치륭이 팔로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팔로군이 계속 추격해 오면서 쏘아대는 총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은 수천 명의 유격대원과 함께 유명한 고양탄광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탄광을 경비하고 있던 일본 경비병들은 탄광 문 앞을 지나가는 유격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장준하가 알아보니 일본군은 국부군과 공산군의 충돌에는 절대 끼어들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밤을 새워 강행군을 한 그들은 먼동이 틀 무렵 전투 지구에서 완전히 벗어난 한 마을에서 군장을 풀었다. 유격대는 거기서 하는 일도 없이 한 주일을 묵었다.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고 있던 장준하 일행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었다. 거기서 무위도식하며 보내던 일곱 번째 날 그들이 참모장에게 ‘충칭으로 가게 해 달라’고 호소하자 그는 선선히 승낙했다. 

“여러분이 지금 목표로 가는 충칭까지는 여기서 6천 리 길이오. 그 안에는 일본군도 있고 중국군도 있고 왕정위군도 있소. 또 세력이 그에 못잖은 토비(土匪)도 있소. 적이 많고 길이 험하지만 우리 유격대원들은 늘 왕래하는 통로인 만큼 안내원만 따라가면 위험을 피할 수 있소. 그동안 고생들이 많았소.”(<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126쪽) 

이튿날인 1944년 7월 28일 저녁, 노을이 질 무렵 장준하, 김준엽,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은 참모장과 굳은 악수를 나누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벌판으로 나섰다. ‘장정(長征)’의 시작이었다. 

   
스물여섯의 광복군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길이 워낙 멀고 길어서 도중에 안내자가 계속 바뀌었다. 그렇게 릴레이식으로 호송되는 일행이 한 유격부대에서 다음 부대까지 가는 시간은 닷새에서 1주일 가량이나 걸렸다. 그들은 하루에 120~150 리씩이나 걸었다. 중간에 큰 비를 만나거나 친절한 사령관을 알게 되면 며칠을 묵으면서 쉬기도 했다. 중원에서 가장 무더운 8월에 하루 120 리가 넘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날이 갈수록 다리에 힘이 더 붙고 발바닥이 굳은 살로 두꺼워져서 맨발로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다.

장준하 일행은 40여 일이나 행군을 한 끝에 6천 리 장정의 중간쯤 되는 임천이라는 소도시에 도착했다. 그들은 거기까지 오는 도중에 유격대를 통해 임천에 동포들이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한국인이 집결한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어느 부대의 영문에 도착했다. 

아, 그런데 불과 1,2분이 지났을까. 별안간 아우성이 저 영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몰려나오는 환성이었다. 

나는 나의 전신이 흔들리는 것 같은 기분 속에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었을까. 

서로 다투어 앞으로 몰려나오는 그 환성의 청년들은 분명 한국인인가. 우리 동포의 뜨거운 환성인가. 핏줄의 힘과 핏줄의 감격이 영문을 미어져라 떠밀며, 그 영문을 밀어 제쳤다. 

그들은 우리를 와락 껴안았다. 전신의 수분은 모두 나의 이목구비로 몰려 빠져나올 곳을 찾는 듯이 벅차게 솟구쳐 눈물이 되었다.

“얼마나 고생들 하였소?” “얼마나 고생스러웠소?”

그것은 정녕 그렇게 그립던 모국어였다. 모국어의 신비가 우리를 드디어 울리고 말았다. 

나는 그 ‘고생스러웠느냐’는 우리말의 합창에 귀가 먹어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그들이 밀고 이끄는 대로 둥둥 떠밀려가 영문 안으로 들어섰다.(<돌베개>, 136~137쪽)

장준하 일행이 들어간 곳은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였다. 그 안에 한국광복군 훈련반이 부설되어 있었는데, 주임은 김학규, 그를 돕는 교관은 이평산과 진경성이었다. 훈련반은 약 4개월 전에 설치되었다고 했다.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는 한 해 전부터 탈출 학병과 한국 청년들을 모아 왔는데, 그 수가 꽤 많아지자 임천분교에 요청해서 그들을 위한 훈련반을 신설했다는 것이었다. 

임천분교의 광복군 훈련반에는 한국 청년이 80여 명이나 모여 있었다.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이 50여 명, 전선 지역으로 장사를 하러 다니다가 중국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혔다가 광복군에게 넘겨진 일반인이 몇 명, 왕정위군에서 장교로 있다가 탈출해서 찾아온 사람이 몇 명, 그리고 심지어 접대부 노릇까지 하면서 연락 공작에 참여했던 여성 몇 명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날 저녁 훈련반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환영회가 열렸다. 흙바닥에 가마니를 깐 내무반에 군데군데 등불을 켜놓고 장준하 일행을 맞이하는 조촐한 잔치가 벌어진 것이었다. 독한 중국술인 배갈을 뚝배기에담아서 차례로 돌려가며 마시던 동지들이 주임 김학규에게 노래를 청하자 그는 함경도 신민요의 노랫말을 바꾸어 신명나게 불렀다.

“석탄 백탄 타는 데 연기가 펄펄펄 나고요/ 이 내 가슴 타는 덴 혁명의 불길이 오른다/ 에헤야 에헤야 혁명의 불길이 오른다/ 사쿠라밭이 떠나서 태평양 보탬이 되고요/ 무궁화가 피어서 3천만 기쁨이 되누나.”

취흥에 겨운 동지들의 입에서 ‘개성난봉가’를 비롯해 팔도강산의 온갖 민요가 쏟아져 나왔다. 환영회는 ‘독립군의 노래’로 끝을 맺었다.

 요동만주 넓은 들을 쳐서 파하고
 청천강수 수병(隋兵)백만 몰살하옵신 
 동명왕과 을지공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검수도산(劍樹刀山) 무릅쓰고 나아갈 때에 
 광복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삼천만 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이튿날부터 장준하 일행은 일본군 제복을 중국 군복으로 갈아입고 훈련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첫 날의 감격과 기쁨과 희망은 차츰 시들어들기 시작했다. “하루의 일과라는 것이 중국 국기의 게양식과 하기식 거행에 참가하는 것 외에 하루 한두 시간 정도씩의 도수(맨손) 훈련(중국인 장교 한 사람과 우리나라 장교인 진경성 교관이 지도했다)과 김학규 주임의 한국 독립운동사 강의를 청강함이 고작이고 이평산 씨의 세계혁명사라는 너무도 상식적인 강의가 2, 3일에 한 번씩이며 그밖에는 할 일이 없어 온종일 편히 노는 것이 일이었다.”(앞의 책, 143쪽)

학도병이 되기 전에 한두 해씩이나마 대학 강의를 듣다가 온 장준하 일행은 강좌를 개설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장준하가 처음으로 한 강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가페와 에로스’였다. “오로지 주기만 하는 사랑, 이것이 ‘아가페’라는 사랑의 범주에 속합니다. 그저 완전한 순수로써 마치 분무기처럼 뿜어주기만 하는 사랑입니다”라고 그가 설명하는 대목에서 청중은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한 가운데 귀를 기울였다. 강의가 끝나자 폭포수처럼 박수가 쏟아졌다. 그 다음에 김준엽이 사관(史觀)에 관해 강의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벅찬 보람을 느낀 장준하 일행은 신학, 사학, 철학, 법학, 문학 등 여러 분야로 강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6) 내의 잘라 표지를 만든 ‘등불’ 창간

 

장준하와 김준엽이 광복군 훈련반의 동료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작한 강좌가 뜨거운 반응을 얻자 그 내용을 한 번 듣고 그냥 흘려버릴 것이 아니라 좀 더 정리해서 기록으로 돌려보며 연구교재로 삼자는 의견을 여러 사람이 냈다. 그렇게 하려면 인쇄나 등사 시설이 있어야 하는데 맨땅에 가마니를 깔고 기거하는 훈련반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장준하와 네 동지는 각자가 손으로 쓴 원고를 모아 책을 만들기로 했다. 처음 며칠 동안의 강좌 내용을 모아 책을 꾸미고 다음 것도 계속 모아 꿰매어 놓으면 결국 몇 권의 책자가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며칠 동안 토의한 끝에 그런 책자를 잡지 형태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제호를 <등불>로 정했다. 

그들이 그런 뜻을 학교 당국에 전했더니 작은 방 한 칸과 책상 하나를 내주었다. 그것이 도서실 겸 편집실이 되었다. 편집 책임은 장준하, 김준엽, 윤재현이 맡았다. 그런데 막상 잡지를 만들려고 하니 잉크와 펜은 물론이고 종이도 없었다. 날마다 ‘화장지’로 쓸 종이가 없어 나뭇잎을 사용하는 판국에 잡지를 꾸며 낸다는 일은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궁리 끝에 붓으로 선화지(仙花紙, 닥나무로 만들어 두껍고 질기며 빛이 누르스름한 종이. 봉투나 포장지로 썼음)에 글씨를 쓰기로 했다. 학교 당국에 간곡하게 호소했더니 선화지를 조금 내주었다. 

‘편집위원’ 세 사람은 강의를 한 동료들에게 내용을 원고로 작성하게 한 뒤 시, 단편소설, 수필, 희곡, 만화까지 모집했다. 세 사람은 작품에 손질을 하고 나서 다시 베끼는 한편 체제, 배열 순서 등을 진지하게 논의했다. 김준엽이 그린 컷과 삽화를 곁들여 똑같은 잡지 두 권을 손으로, 붓글씨로 써서 만들었다. 1950년대 초 피난수도 부산에서 <사상계>를 창간하게 되는 장준하는 <등불>에 관해 이렇게 기록했다.

이것이 나와 잡지와의 최초의 인연이었다. 말하자면 효시인 것이다. 세상이 말하는 출판업자나 잡지 발행인으로서의 그 출발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 이상의 긍지를 가지고 있다. 그 이상의 것이다. 

또 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붓글씨 한 자 한 획을 그을 때 마다 손에 힘을 넣었고 그 힘은 나의 신념에서 솟아 흘렀다. 

중국 임천의 밤이 깊어도 그 칠흑의 밤보다 더 검은 먹을 갈아 붓글씨로 잡지를 베끼는 일로 밤잠을 밀어 제치고 지새운 것이, 결코 그런 세상의 말을 듣게 되는 그 기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으로 안다. (·····) 

<등불>은 진정 우리들의 뜻대로, 등불로써 불을 밝히고, 앞장서 길을 밝히며, 꺼지지 않는 등으로 이 민족 누구에게나 손에손에 들게 만들어 주고 싶은 그때의 그 뜻을 스스로 짓밟고 싶지 않다. 그것은 가마니를 깔고 누워 받은 최초의 사명감이었다.(<돌베개>, 146~147쪽)

제본도 장준하, 김준엽, 윤재현이 몸소 했다. 겨우 두 권의 잡지를 80여 명이 돌려가며 읽어야 하니 책을 웬만큼 단단히 매지 않으면 곧 찢어질 것이었다. 그들은 생각다 못해 천으로 표지를 만들기로 했지만 종이조차 구하기가 힘들던 그 시절에 천을 마련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김준엽이 하루 낮, 하루 밤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내의를 빨기로 했다고 두 동지에게 말했다. 

“여자도 아닌데 왜 하필 밤에 내의를 벗어 빠느냐”는 장준하의 물음에 그는 “응, 그저···”라고 얼버무렸다. 이튿날 세 사람은 김준엽의 내의를 잘라서 종이에 겹겹으로 붙여 표지를 만들었다. 김준엽은 표지에 램프를 그려 넣고 ‘등불’이라는 제호를 붓으로 써 넣었다. 훈련반 동지들은 <등불>을 서로 먼저 보겠다고 야단법석을 쳤다.  

그 무렵 훈련반의 학생들은 점심을 거르고 오후 4시가 되어서야 호떡 한 덩이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그때부터 밤 10시 취침 시간까지 배고픔을 잊으려고 <등불>을 서로 차지하려는 동지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곤 했다. 장준하의 회상에 따르면 선화지에 붓글씨로 내용을 쓰고 내의를 잘라 표지를 만들어 붙인 <등불>에는 수준 높은 문학작품이 실려 있었다. 편집을 함께 하던 윤재현의 단편소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일본의 동지사대학을 다닐 때 문학을 하던 청년이었다. <등불> 창간호에 김준엽이 그린 만화 두 편 가운데 하나인 ‘천손강림(天孫降臨)’은 동지들한테서 걸작 중의 걸작이라는 평을 들었다. 일본의 후지산을 비롯한 전역에 연합군의 낙하산부대가 ‘왜놈의 국사 속의 말대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내용이었다. 

장준하 일행이 머물던 군관학교의 중국군 초급 군사반 교육 기간은 4개월이었다. 정규군 현역장교의 위관급들이 재훈련을 통해서 새로운 지휘 전술을 배우고 4개월 만에 졸업하는 것이었다.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에 속해 있던 한국광복군 특별반(한광반)도 중국군처럼 4개월 만에 졸업이 되긴 했지만, 배우는 것이 별로 없었다. 

중국군 졸업반은 졸업식 행사를 거창하게 하면서 대규모 작전훈련과 사열·분열식도 했지만 학교 당국은 한광반 학생들에게 기념행사로 연예회를 하라는 요구를 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졸업식 2주일을 앞두고 학교에서 약간의 예산을 얻어 연습에 들어가기로 했다. 연설과 독창, 연극과 승무 등 몇 가지 종목으로 순서를 짰는데, 중국어로 하는 연설은 김준엽이 맡기로 했다. 연극은 30여 명이 출연하는 4막짜리로, 학병들이 일본군을 탈출하는 내용을 뼈대로 삼았다. 

졸업행사를 준비하면서 장준하와 동지들은 <등불> 제2호를 낼 준비를 시작했다. 졸업 이전에 제2호를 내지 못하면 그 잡지가 창간호로써 수명을 마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 장준하 일행은 연극까지 준비해야 했다. 김준엽이 각본을 쓴 연극은 한광반 학생 노능서의 슬픈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었다. 외아들로서 홀어머니를 남겨주고 학병에 끌려나온 그의 경우는 ‘학병의 전형적 비극’으로 알려져 있었다.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는 아들 하나만을 믿고 20여 년을 살아왔는데 일본 유학까지 시켰던 그 아들이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전쟁터에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몸져 누웠다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의 주검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능서의 집에 일본 헌병들이 들이닥쳤다. 능서는 ‘어머니의 장례라도 치르고 나서 가게 해 달라’고 애원했으나 헌병들은 “너 하나 때문에 수천 명의 입영 날짜를 연기하란 말이냐”라고 윽박지르면서 그를 끌고 갔다. 

<등불> 제2호 편집을 마친 장준하는 연극 연출을 맡게 되었다. 각본을 쓴  김준엽은 노능서의 비극이 일어난 순서를 뒤집었다. 제2막에서, 학병으로 끌려간 노능서는 중국 쉬저우의 일본군 부대에서 고국의 어머니와 편지를 주고 받다가 , ‘불온한’ 내용이 검열에 걸려 미움을 사게 된다. 어느 날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슬피 우는 능서에게 일본 군인들이 무참하게 매질을 한다. 제3막은 능서가 10여 명의 동지들과 탈출하기로 결의하고 중대장인 대위를 칼로 찔러 죽이는 데서 끝난다. 제4막에서 그들은 탈출에 성공해서 증국군 진영으로 아슬아슬하게 넘어간다. 연극의 주인공은 노능서가 맡았다.

마침내 졸업 전야에 연예회가 열렸다. 강당에는 이 지구사령관과 임천군관 학교 교장 이하 즐비하게 장성급들이 모두 참석하였고 전 군관들과 병사들이 참관하고자 빽빽이 들어찼다. (·····)

박수 속에 김학규 주임의 인사말 겸 개회사가 있었고 이어, 김준엽 동지가 한광반을 대표하여 우리의 결의를 말하는 연설을 하였다. 

미청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강당 안에 한국 청년의 기개를 토하고 있었다. (·····)

이어 연극의 막이 열렸다. 연극은 의외로 심각하고 참착하게 진행되었다. 진 교관이 변사로서 무대 한옆에 서서 연극의 내용을 중국말로 설명하였다. 우리의 열연이 통역으로 설명될 때마다 중국군 관중의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지독하게 얻어맞는 노능서 동지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동지들의 실제의 비명이 날 괴롭혔다. 나는 내 얼굴을 감싸고 박수갈채 소리에 귀가 먹은 나 자신을 발견했다.(앞의 책, 178~179쪽)

마침내 졸업식 날이 왔다. 장준하와 동지들은 정성껏 만든 <등불> 제2호를 내놓았다. 그들은 졸업식장에서 중국군 육군준위로 임명되었다. 준위는 사병의 계급에서 장교로서 대우를 받는 최초의 계급이었다. 

졸업식 전날 밤의 연예회는 한광반에 대한 중국군의 인식을 새롭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장준하와 동지들의 감격 앞에는 실망이 기다리고 있었다. ‘졸업만 한다면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떠나 충칭으로 갈 수 있으려니’ 하는 기대와 흥분으로 여태까지 견뎌왔는데, 한광반 주임 김학규가 임천에서 일을 같이 하자고 제의한 것이었다. 

 

(7) 파촉령을 넘어 임시정부로

 

김준엽은 한광반 졸업생들에게 임천에 남아 달라고 제안한 주임 김학규의 속내를 이렇게 해석했다. 이미 70여 명의 유능한 간부를 확보했으므로 그들을 활용하면 1개 사단은 몰라도 적어도 1개 연대의 병력은 쉽게 편성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독립투쟁에서 홍범도 장군이나 김좌진 장군처럼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아무튼 김 주임은 끈질기게 우리의 중경행을 저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중경은 자기가 있어봐서 잘 알지만 노인들이 당파싸움을 거듭하고 있어 시끄러 운 곳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곳에 가 보았댔자 할 일도 없거니와 크게 실망할 것이니 자기와 함께 임천에서 대일투쟁을 하자는 것이 그의 설득 내용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태도는 김 주임의 설득공작이 심할수록 반비례로 강경하게 되었다. 전체회의를 열고 나와 장준하 동지를 대표로 선출하여 김 주임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국면이 되고 말았다. (<장정 1- 나의 광복군 시절>, 400쪽)

장준하와 김준엽의 주장에 동조하는 동지들이 임시정부로 가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자 김학규는 고집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1944년 11월 22일 오후 2시 53 명이 임천을 떠났다. 일행은 학병 25명과 여성 6명, 어린이 3명 등이었다. 그들이 출발하기 전에 학교에서 지급받은 것은 약간의 밀가루와 소금국을 끓일 정도의 부식비뿐이었다. 옷은 한광반에서 입고 지내던 청색의 얇은 여름군복이었다. 광활한 중국 땅에 겨울이 다가오기 시작한 시기에 일행은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장정’의 길에 올랐다. 

어린이까지 함께하는 그 길은 임천부터 충칭까지 무려 6천 리나 되는 거리였다. 일행 53명은 닷새 동안 강행군을 한 다음에 후방으로 이동하는 중국 중앙군 1개 사단의 병력에 합류해서 그날 밤중에 80리를 더 가서 평한선(북평에서 한구까지의 철도)을 넘어 다시 50리를 더 걸어야 안전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바람까지 겹친 날씨는 몹시 추웠다. 그들이 중앙군 사단 병력을 따라 평한선 가까이 이르렀을 때 일본 기병대가 기습해 왔다. 일행은 30리를 후퇴해서 닷새나 머물러야 했다. 그들은 캄캄한 밤에 10리를 달려 평한선을 넘었다. 그때가 1944년 12월 1일 새벽이었다.

중국 중앙군은 시안 방면으로 가고 장준하와 김준엽 일행 53명은 충칭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그들은 바로 그날 밤 길을 잘못 들어 산적의 소굴에서 식량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빼앗길 뻔했다. 산적들은 일행의 인원이 적고 지닌 물자와 돈도 형편없는 데다 한국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석방해주었다. 그 산속을 빠져 나온 다음부터 충칭까지는 이렇다 할 위험이 없었다. 일본군은 물론이고 왕정위군이나 공산군도 없었기 때문이다.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완전히 지배하는 안전지대라서, 자고 먹는 것이 고통스러웠지만 마음은 한결 느긋해졌다. 

일행은 이발이나 목욕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온 몸을 누비고 다니는 이 때문에 가려움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옴에 걸리기까지 했다. 날씨는 갈수록 추워졌다. 외투와 내의는 커녕 양말도 없었으니 그들은 ‘상거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를 만나도 부끄럽지 않았고 우리의 사기는 대단하였다. 지금 비록 왜적을 피하여 후퇴하는 것이지마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에 불과하다. 승리는 반드시 우리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우리는 충칭의 임시정부를 향해 장정을 힘차게 계속하였다.”(앞의 책, 411쪽)

평한선을 넘어 닷새 동안 행군한 일행은 12월 5일 난양에 도착했다. 그곳은 제갈공명의 고향으로서 유비가 다스리던 촉나라 땅이었다. 난양은 그들이 임천을 떠난 뒤 보름만에 도착한 첫 번째 도시였다. 그들은 난양시에서 열흘을, 중앙군의 보급창이 있는 노하구로 이동했다. 필요한 식량과 여비를 보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일행은 무료함을 달래려고 ‘묘안’을 짜냈다. 그들은 노하구에 있는 10여 곳의 중·고등학교를 순방하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한 항거심을 고취하는 한편 한국의 독립에 대한 정신적 지원을 호소하기로 했다.

장준하와 김준엽을 비롯한 학병들이 임천 군관학교 한광반 졸업식에서 연극 공연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방 당국이 재연(再演)을 부탁했다. 김준엽 극본, 장준하 연출의 <광명지로(光名之路), 일명 일본군 탈출기>가 3회에 걸쳐 공연되었다. 무대는 1차는 어느 고등학교, 2차는 시민회관, 3차는 공설운동장이었다. 김준엽은 공연 때마다 ‘일본 점령 하의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장준하의 <돌베개>에는 연극 공연을 노하구에서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김준엽의 <장정 1>에는 난양에서 공연을 한 뒤 노하구에서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45년 9월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 비행장 구내막사에서. 뒷줄 왼쪽에서부터 세 번째가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특히 제3차의 공연 시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환영 한국 혁명청년’, ‘한국독립 만세’ 등의 구호를 쓴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우리를 감격시켰다. 우리의 강연과 연극에 감동된 남녀 학생들은 우리들을 찾아와 자기들도 종군하여 왜적과 싸우겠으며, 가능하면 이곳에 남아서 자기들과 함께 일하자고 호소도 하였다. 

또한 시내에 ‘환영 한국광복군’이란 플래카드가 나붙게 되자 각 기관은 앞을 다투어 건물에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요소마다 모필(毛筆)로 대서한 벽보가 나붙기 시작하자 모금운동이 전개되어 많은 일용품과 돈이 전달되었다.(앞의 책, 417쪽) 

장준하는 <돌베개>에서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 연예의 노하구 공연 피날레의 막이 열광적인 박수 속에 천천히 내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속으로 혼자 감격하고 있었다. 흥분하고 있었다. 그리고 흐느끼고 있었다. 막이 천천히 무대 가까이 내려와 청중들의 뒷좌석이 가 려지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조명과 같은 눈부신 황홀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청중들이 고마웠고, 출연 동지들이 고마웠으며 내게 힘을 준 조국이 고마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고마웠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넘어지고 말았다. 막이 3분의 1 정도 미처 덜 내려졌을 때,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넘어진 내 위엔 천천히 막이 덮였다고 했다.(234쪽)

노하구에 있는 중앙군의 사령관은 이종인이라는 중국인이었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사령부를 찾아가서 그를 면담하고 보급품과 여비 지원을 요청하려고 했으나 그가 전선 시찰을 나갔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사령관 대신 참모장을 만났다. 두 사람이 ‘충칭에 가면 임시정부를 통해 갚을 테니 10만 원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끝까지 싸우자’면서 외투를 비롯한 보급품과 함께 10만 원을 선뜻 내주었다.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중국군 소위들에게 봉급 명목으로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10만 원이라는 대금을 일행 한 사람당 2천 원씩 분배하고 나머지는 노능서가 보관하도록 했다. 

1945년 1월 6일 일행은 노하구를 떠나 파촉령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안광언과 김영록이 노하구에 남게 되어 학병 출신은 23명 만이 충칭으로 장정을 계속했다. 김영록은 옴이 심해서 도저히 함께 걸을 수가 없었다. 장준하 일행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행군을 했다. 파촉령을 넘으면 양자강에 도착하고, 거기서부터 배편으로 충칭까지 갈 수 있으므로 파촉령이 장정의 마지막 고비가 될 것이었다. 임천을 떠난 이래 5천여 리를 걸었는데 높은 산을 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촉령은 제비도 날아서 넘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높고 험한 산으로서 정상인 대파산은 높이가 3천m가 넘는다. 말도 지나가지 못하는 파촉령 길은 이창이 일본군에게 함락된 뒤 양자강을 이용하는 수송로가 차단되자 국민정부가 전후방을 연결하는 통로로 개발한 것이었다. 

장준하 일행은 도중에 드문드문 있는 주막에서 두부탕을 사먹기도 하면서 고원지대를 향해 엿새를 걸어 올랐다. 마침내 파촉령의 최고봉인 대파산 정상에 이르자 눈부신 햇살이 설원을 비추는 장엄한 경관이 나타났다. 그 봉우리에 오르기까지 일행은 동상에 걸릴 정도로 얼어붙은 손발을 비비는가 하면 눈 위에서 졸음을 이기지 못해 얼어 죽을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파촉령을 내려가는 길은 순탄했다. 그들이 파촉령을 벗어나자 양자강의 작은 지류가 나타났다. 노하구를 떠난 지 열사흘 만에 도착한 그곳은 흥산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일행이 충칭으로 가려면 파둥까지 가서 배를 타야 했다. 그런데 노하구를 떠날 때 각자에게 분배한 2천 원을 요령 없이 쓴 사람들에게는 배표를 살 수 있는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틀을 더 걸어서 파둥까지 가야 했다.

배를 탄 사람들은 1945년 1월 20일 파둥에 도착했다. 그들은 걸어서 오는동지들을 기다리면서, 충칭까지 가는 군용선박을 타기 위해 거기서 사흘을 묵었다. 1월 23일 일행은 충칭으로 가는 500톤급 군용선에 올라탔다. 배는 여드레째 되는 날 오후 3시쯤 충칭에 도착했다. 동지들은 서로 얼싸안고 흑흑 흐느껴 울었다. 임천을 떠난 지 7개월 만에 마침내 목적지에 이른 감격을 억누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충칭시내에서 물어물어 임시정부 청사를 찾아갔다. 그들은 층암 위에 지어진 단층 건물 앞에 이르렀다. 옥상에서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나의 온몸은 마비되는 듯이 굳어졌는데, 몇몇 동지들은 태극기를 향해서 엄숙히 거수경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임정 건물 위에 휘날리는 태극기가 나에게는 점점 확대되어 보였다. 휘날리는 기폭마다 나의 뜨거운 숨결이 휩싸여 안겼다. 그리고 태극기의 기폭은 임정 청사가 아닌 조국의 강토를 뒤덮고 있었다.

물결치는 기폭 아래 두고 온 조국의 산하가 떠올랐다. 아니, 나의 조국에 지금 분명히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는 환상이었다. 그토록 경건한 기(旗)의 상념이, 거룩한 조국의 ‘이미지’ 위에 드높이 춤추고 있었다. 

‘조국의 땅 방방곡곡마다 이 태극기의 바람이 흩날리고 있었구나!’

그때서야 나의 손도 천천히 올라갔다.(앞의 책, 262쪽) 

 

(8) 김구와 임시정부 각료들을 만나다

 

1945년 1월 31일 오후 장준하 일행 50여 명은 임시정부 앞뜰에 2열 횡대로 정렬했다. 인솔 책임을 진 교관 진경성이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누런 군복에 누런 색깔의 외투를 걸친 50대 중반의 남자를 모시고 나왔다.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1888~1957)이었다. 일행은 부동자세로 숨을 죽인 채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이청천이 그들 앞에 서자 진경성이 “일동 차렷! 총사령관님께 경례”라고 구령을 외쳤다. 그는 대열 앞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면밀하게 살펴보며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튀어나온 이마가 그의 특징이었다. 꽉 다문 입에는 나이를 초월한 투지가 서려 있었다. 총사령관의 군복에는 견장도 계급장도 없었다. 사열을 마친 이청천은 강철 같은 목소리로 훈시를 시작했다. 

수고들 많았소이다. (···) 동지들이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원하고 있었소. 동지들은 총사령관인 나보다도 훌륭하오. 나는 옛날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청도작전에 배치되어 탈출하려다가 실패하고 수 년 후에야 비로소 탈출에 성공하여 만주의 우리 독립군에 참가하였는데 동지들은 학병으로 중국전선에 오자마자 대번 탈출에 성공하였으니 말이오. 한마디로 독립군의 투쟁이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오. (···) 앞으로 나와 함께 이곳에서 일을 할 터이니까, 차차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고, 오늘은 피로한 동지들에게 긴 얘기 하지 않겠소. 곧 우리 정부의 주석이신 김구 선생께서 나오실 것입니다. 이만 끝.(김준엽, <장정 2-나의 광복군 시절> 하권, 50~51쪽) 

이청천이 말을 마치자 위쪽 층계를 몇 사람이 걸어 내려왔다. 푸른 중국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앞서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10여 명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저분이 김구 선생이시구나’ 하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때 김구(1876~1949)의 나이는 69세였다. 검은 테 안경에 인자한 인상의 그는 백발이 성성한 동지들과 함께 장준하 일행의 앞에 섰다. 

그간 소식을 듣고 기다리던 여러 동지들이 이와 같이 씩씩한 모습으로 당도했으니 무한히 반갑소이다. 더구나 국내로부터 갓 나온 여러분을 눈앞에 대하고 보니 마치 내가 직접 고국산천에 돌아온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북받쳐 오르는 감회를 억누르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많은 말이 소용없습니다. 우선 좀 쉬도록 하고, 오늘 저녁 정부에서 동지들에게 베푸는 환영회에서 또 만납시다.(앞의 책, 52쪽)

6천 리 장정을 마친 일행의 피곤을 헤아려서인지 김구의 말은 아주 짧았다. 환영사를 끝낸 그는 좌우에 도열한 임시정부 각료들을 한 사람씩 소개했다. 김규식, 이시영, 조소앙, 최동오, 박찬익, 신익희, 엄항섭, 조완구, 유림, 유동열, 황학수, 차이석이 바로 그들이었다. 장대한 체구의 김구, 역시 몸집이 큰 조소앙, 신익희, 유림과 달리 나머지 사람들은 쇠약해 보였다. 특히 이시영은 노쇠한 기색이 확연했다. 

   
광복군 시절. ©장준하기념사업회

 

이분들은 내일의 우리 자신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분들의 과거는 우리들의 현재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납득하기 어려운 슬픔이 다가왔다. 눈앞의 백발이 성성한 임정 각료들의 모습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이분들이 왜 이같이 중국 각지를 유랑하면서 충칭 구석까지 쫓겨와 허구한 날을 이렇게 늙으면서 지냈는가. 조국이란 이미지는, 과연 이렇게도 냉혹한 현실을 통해서만 실감될 수 있는 것인가. 

조국의 독립을 누가 버렸으며, 버린 자와 찾고자 하는 자는 어떻게 다르기에 여러분은 이렇게 고생 속에, 가고 아니 올 생애를 허송하고 있는 것일까.(<돌베개>, 269쪽)

장준하 일행은 목욕과 이발을 마치고 임시정부 청사에서, 너덜너덜 찢기고 넝마처럼 해진 청색 군복을 광복군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다음인 밤 9시쯤 주석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각료 전원과 광복군 총사령부 간부들, 그리고 충칭에 있던 혁명진영의 동포 등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환영식이 열렸다. 뚝배기에 담긴 배갈을 한 모금씩 돌려 마시는 가운데 내무부장 신익희의 환영사에 이어 김구가 격려사를 했다. 고희를 앞둔 고령인데도 그의 목소리는 힘차면서도 인자했다.

오랫동안 해외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국내 소식에 아주 감감합니다. 그동안 일제의 폭정 밑에서 온 국민이 모두 일본인이 된 줄 알고 염려했더니, 그것이 한낱 기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왜놈들에게 항거하여 이렇게 용감하게 탈출해서 이곳까지 찾아와 주었으니 더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낍니다. 나의 지금까지의 착잡하고 헛된 고민이 한꺼번에 사라집니다. 숭엄한 조국의 혼이 살아 있는 하나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지금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들이 한결 같이 일본 사람이 되고자 원할 뿐만 아니라 다 되었다고 선전하고 있고 또한 젊은이들은 한국말조차도 할 줄 모른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한국의 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스스로 보여주었습니다. 내일은 이곳에 와 있는 전 세계 신문기자들에게 이 자리에서 이 산 증거를 알려주고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충칭에 와 있는 모든 외국인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떳떳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진정 나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고 이 밤중에라도 여러분을 끌고 이 충칭 거리에서 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앞의 책, 273~274쪽)

김구의 격려사에 이어 장준하가 일행을 대표해서 답사를 했다. 

저희들은 왜놈의 통치 아래서 태어났고, 또 그 밑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국기조차 본 일이 없었던 청년들이었습니다. (·····) 우리나라의 국기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전국에 나부끼는 것이 일장기가 아니고 우리의 국기라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던 옛 그리움이 이제, 오늘 이 충칭에서 다시 살아나 깊은 감회에 젖게 합니다. (·····) 오늘 오후, 이 임정 청사에 높이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고 우리가 안으로 울음을 삼켜가며 눌렀던 감격, 그것 때문에 우리는 6천 리를 걸어 왔습니다.  그 태극기에 아무리 경례를 하여도 손이 내려지지를 않고 또 하고 영원히 계속하고 싶었습니다. (···) 그래서 아까 총사령관께서 사열을 받으실 때, 전 정성을 기울여 차렷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왜놈 상관 앞에 차렷을 강요당하던 그 모든 힘을 한데 묶어 아니 그 몇 십 배로 늘려 차렷을 하고 마음속으로 깊이 울었습니다. 아! 우리도 우리의 상관 앞에 참다운 사열을 받고 있구나. 꿈만 같았습니다. 주석 김구 선생님 앞에 선 때엔 더 말할 것이 없었습니다. 진정한 조국의 이미지와 우리의 지휘관과 우리가 몸 바칠 곳을 찾았다는 기쁨에 몸을 떨었습니다.(앞의 책, 274~275쪽)

장준하가 여기까지 말을 한 뒤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잠깐 숨을 크게 쉬면서 보니 김구를 비롯한 각료들이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아까 백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왜놈들은 우리 한국인들이 스스로 일인이 되길 바란다고 황당무계한 날조를 일삼지만, 그 반증은 우리들 50여 명의 각자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섞인 노능서 동지도 한 좋은 예입니다”라고 장준하가 말하는 순간 김구는 ‘흑!’ 하면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장내는 삽시간에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장준하는 말끝을 맺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았다. 

초상집처럼 처절한 통곡이 흘렀다. 음식이 들어왔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참석자들이 한참 동안 그렇게 울고 있자 김구는 “너무 지쳤을 테니 다들 돌아가 쉬자”면서 먼저 일어섰다. 

이튿날인 2월 1일 아침 종이 울리자 이 방 저 방에서 노인들이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임정 청사에는 50여 명의 요원들이 기숙하고 있었는데, 흙방에 침대 하나씩을 놓고 잠을 자고 있었다. 임시정부라고는 하지만 두드러진 사무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들은 나라를 걱정하면서 하루를 보내고는 침대에 누워 잠을 자다 일어나는 생활을 되풀이했다. 

임시정부가 충칭 시내에 버젓한 청사를 마련한 것은 겨우 4개월 전이었다. 주석의 판공실장으로 일하던 민필호가 중국 국민당이 지원해준 돈으로 중국인 소유의 호텔을 한 해 40만 원의 세를 내고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정 형편이 여전히 어려워서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하루 두 끼밖에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것도 밥 한 그릇에 밀가루 무국이 전부였다. 그러니 노인들의 얼굴은 기름기가 없고 늘 부석부석했다. 

그날부터 장준하 일행은 여러 단체가 열어주는 환영회에 참가하기에 바빴다. 오후 4시에 광복군 총사령부가 마련한 잔치에서는 사령관 이청천의 인사말을 듣다가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그 다음날 중한문화협회가 연 모임에는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 측 신문기자들이 몰려들어 사진을 찍으면서 인터뷰를 했다. 장준하 일행이 쉬저우에서 일본군을 탈출해서 6천 리 장정 끝에 항일 광복군이 되었다는 기사가 국제적 뉴스가 된 것이었다. 

 

(9) 임시정부 안의 파벌 다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정당과 단체는 장준하 일행을 위한 환영회를 열어주겠다고 경쟁적으로 나섰다. 그들이 오로지 임정을 찾아가려는 목적으로 목숨을 걸고 6천 리 장정을 강행한 것이 국제적 뉴스의 초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처음에는 그런 경쟁적 초대가 고마웠으나 임정의 구성과 성격을 알게 되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어보겠다. 

1919년 3·1독립투쟁의 영향으로 세 군데에서 임시정부가 태어났다. 그해 3월 21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대한민국 의회정부’, 4월 13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4월 23일 서울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었다. 그 뒤 안창호, 여운형, 김구, 김규식, 이동휘, 이동녕, 이승만 등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3도 대표회의에서 결성된 한성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해야 한다고 합의한 뒤 1919년 9월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공식 출범시켰다. 그들은 9월 6일 대통령중심제와 삼권분립을 뼈대로 하는 전문 8장 58개조로 된 헌법을 완성해서 11월 임시의정원을 통해 공포하는 한편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선출했다. 

임정은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발간하면서 나라 안팎의 독립투쟁 상황을 보도하는 한편 사설이나 논설로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1921년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열강들의 군축회의가 열리자 임정은 이승만을 수석대표, 서재필을 대표로 파견해서 한국의 독립을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다. 1922년 1월에는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인민대표대회’에 대규모 대표단을 보내 민족의 해방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대통령인 이승만은 미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수준의 운동을 하면서 동포들의 성금을 불투명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신뢰를 잃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고국과 중국에서 독립투쟁에 목숨을 걸고 있는 애국지사들과는 달리 미주 동포 사회에서 세력 확장을 위해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1920년 12월 8일,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에 오자 국무총리 이동휘는 ‘미국 동포들의 독립자금을 축내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맡는 데 반대한다’면서 총리직을 사임했다. 신채호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이승만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임시정부를 떠났다. 

   
광복군 시절. ©장준하기념사업회

 

이동휘가 국무총리직을 그만둔 배경에는 그가 1920년 12월 소련의 레닌 정권한테서 받은 독립지원금 40만 루블을 임정에 전하지 않고 ‘고려공산당’ 창당 활동비로 쓴 사건도 있었다. 임정 안에서 규탄의 소리가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때문에 1921년 말에 국내의 ‘애국성금’이 완전히 끊어지고 북미와 하와이에서 추진하던 공채(公債) 모집이 좌절되자 임정은 와해될 위기에 빠졌다. 특히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이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에 신탁통치를 청원했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탄핵안을 의결한 뒤부터는 미주로부터의 송금이 단절되었다. 그해 5월 국무령으로 선출된 이동녕의 권유에 따라 12월에 김구가 국무령에 취임했다. 그는 국무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개정하고 주석이 되었다. 김구는 1928년 이동녕을 주석으로 추대하고 내무부를 맡아 임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독립운동단체들의 분열과 갈등 때문에 1천여 명이나 되던 독립운동가들이 수십 명으로 줄어들어버렸다. 일제가 정탐꾼들을 보내 임정 요인들의 가족을 체포, 납치, 암살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김구가 잔뜩 위축된 임시정부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은 계기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본 왕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이었다. 그는 일왕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으나 조선 독립의 의지를 온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이봉창의 거사를 주도한 김구는 그로부터 석 달 뒤 윤봉길로 하여금 상하이에서 일본군 장성들을 폭사시키게 하는 대사건을 다시 일으켰다. 김구와 임정 요인들에 대한 일제의 추적이 더욱 심해지자 임정은 같은 해에 항저우로 본거지를 옮겼다가 전장(1935), 창사(1937), 광둥(1938), 류저우(1938), 치장(1939)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자리를 잡았다. 끝없는 유랑의 세월이 8년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장준하 일행이 임시정부를 찾아간 1945년 1월 국무위원회에는 좌우파와 중도파가 망라되어 있었다. 

1.한국독립당: 주석 김구, 국무위원-외무 조소앙, 재무 조완구, 선전 엄항섭, 국무위원- 박남파, 차이석, 황학수, 조성환, 조경한
2.조선민족혁명당: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군무 김원봉, 문화 김상덕, 국무위원 -성주식, 최석순
3.한국무정부주의자연맹: 국무위원 유림
4.한국민족해방동맹: 국무위원 김성숙
5.한국청년당: 국무위원-내무 신익희
6.천도교: 국무위원-법무 최동오
7.무소속: 국무위원 유동열, 김봉준(<돌베개>, 283쪽)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던 장개석의 국민당정부는 1943년 9월에 구성된 임정에 참여한 정파들에게 통합을 권유했지만 그들은 전혀 단합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장준하는 충칭에 도착한 뒤 며칠 동안 느끼던 감격과 환희가 심각한 고민과 실망으로 변한 원인을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충칭에 닿은 이래 임정 각원들에게 돌아가며 교양이란 이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수륙 몇 만 리 이국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이렇게 지내고 있구나 하는 존경도 품어봤으나 차츰 지나가자, 그것이 다 자당의 선전이며 타당에 대한 비방이란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어리둥절했다. 어떤 기대에 대한 배반에서 오는 허탈감 같은 것이었다. 
 
마침내 우리들은 우리끼리의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는 각 정당에서의 환영회를 조건 불문하고 거절하기로 단단히 합의를 보았다. 

맨 처음 거절당한 것이 김구 선생이 당수로 계시는 한국독립당이었고 그밖에도 차례로 거절을 했다.(·····) 하여간 그들의 소위 환영회 작전은 우리에게 완전히 패배했다. 그러나 그들의 환영회 작전은 실패했어도, 결코 우리들에 대한 자당 포섭 공작은 중지되지 아니했다. 다만 집단 포섭이 불가능한 대상이란 것만을 알아차린 눈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단과 방법을 달리 해서 개별 포섭 공작을 집요하게 벌이기 시작했다. (·····) 분화구를 찾은 용암처럼 우리들 가슴마다에 흘러 고인 분노는 언젠가 터지고 말 것이 예감되고 또 기대되었다. (앞의 책, 284~285쪽)

충칭에 온 지 2주쯤 되던 날 장준하는 동포들이 모이는 주회(週會)에 초대받아 참석하게 되었다. 전 국무위원과 100명에 가까운 동포들이 나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국내 상황을 자세히 보고했다. 징용이나 ‘정신대’에 끌려가는 젊은 남녀들, 관솔 뿌리 캐기에 동원되는 국민학교 학생들의 참상 등을 들려주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장준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비감한 어조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러 선배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자 해서, 아니 그 여념의 손과 발이 되고자 해서 몇 번의 사경을 넘고 수천 리를 걸어 기어이 이곳을 찾아온 것입니다. 때문에 일군에서 중국 땅에 배치된 것을 알고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는지 몰랐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일군에게 끌려오면서 계획한 탈출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는 이곳을 하루빨리 떠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솔직히 말해 이곳을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오히려 오지 않고 여러분들을 계속 존경할 수 있었다면 더 행복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군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충칭 폭격을 자원,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구요? 선생님들은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러 온 것이지, 결코 여러분의 이용물이 되고자 해서 이를 악물고 헤매어 온 것은 아닌 것을 말합니다. 이것으로 저의 말을 맺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앞의 책, 285~286쪽)

흥분을 못 이긴 장준하는 연단을 내려서서 밖으로 나왔다. 임정 각료들은 멍하니 앉아 있었고, 주회는 끝나버렸다. 곧 긴급 국무회의가 열렸다. 영문을 모르는 장준하의 동지들이 그의 침소로 달려왔다. 그는 내무부장 신익희가 자기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국무회의실로 갔다. 회의실 문 앞에서 얼굴이 상기된 신익희가 장준하를 호령조로 꾸짖었다.

“뭣이, 3·1운동의 피로써 세워진 임정을 그렇게 모욕하는 망발이 어디 있어. 빨리 국무회의에 들어가서 국무위원들에게 정중히 사과하시오.” 장준하가 회의실로 들어가자 ‘한국무정부주의자연맹’ 대표 유림이 ‘오늘 주회를 주관한 내무부장을 사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의를 주재하던 김구는 ‘먼저 장군의 이야기부터 들어보기로 하자’고 말했다.

장준하는 잠깐 마음을 가다듬은 뒤 말을 시작했다. (·····) 사랑한다는 것과 탐욕을 내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탈출해서 기나긴 행군으로 오면서 임정은 모두 일치단결되어 있는 완전한 애국 투쟁의 근본이라고 여겼습니다. 이곳에 오기만 하면 그 단결된 힘으로 오직 잃은 나라 찾는 데만 목숨 바쳐 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습니다. (·····) 조국을 잃고 망명한 입장에서 임정을 세웠기에 임정이 하는 일에는 파쟁이 개재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저희들이 잘못 본  것입니까? 아니면 사실입니까? (·····) 이후 광복의 날이 와서 귀국하게 된다면 그때도 국내에서 이곳 임정의 타성이 그대로 옮겨갈 것을 생각했습니다. 필경 이런 것이 다 두고두고 생각해서 얻은 가정의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이 임정이 왜 필요한 것입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진정 나라 사랑의 일념이라면, 있어서 안 될 것이 있는 이 실정은 무엇입니까? 진정코 임정을 목숨 그대로 사랑하시는 뜻에서 주는 벌은 받겠습니다.(앞의 책, 289쪽)

장준하가 말을 마치자 주석 김구가 뜻밖에도 ‘허허’ 웃으면서 “장군, 그만 나가게”라고 일렀다. 신익희가 죄수를 다루듯이 그를 떠밀어 내보냈다. 안에서는 격론이 벌어진 듯, 성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10) 임시정부 떠나 무장투쟁의 길로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에게 피 맺힌 호소를 하면서 “이곳의 파쟁이라는 인상이 가셔진다면 그 벌은 제가 받아 오히려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한 뒤 회의실에서 밖으로 떠밀려 나온 장준하에게는 아무런 문책이 없었다. 내무부장 신익희의 사과로 마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장준하가 임정의 독립운동가들을 향해 정파 간 다툼을 그치고 단합하라고 절규한 뒤에도 충칭의 정치 풍토는 갈수록 어지러워졌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장준하 일행은 임천군관학교 분교에서 2호를 내고 중단했던 <등불>을 속간하기로 했다. 임정에는 등사판이 있어서 임천에서 붓으로 글을 써서 두 호를 냈던 때보다 수월하게 150부를 펴낼 수 있었다. 젊은이들이 독립운동 선배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이 대부분이었고, 선배 몇 사람의 글도 실었다. <등불> 3호는 임정과 광복군 산하의 기관들과 충칭의 동포들에게 배포되었다. 

그러나 일행은 멈추지 않는 파쟁과 일부 정치세력의 난잡한 행태를 보면서 날이 갈수록 권태와 해이함을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 충칭을 떠나자는 말이 일행 가운데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임정에 그런 사정을 말한 뒤 충칭에서 서북방으로 30리쯤 떨어진 토교라는 마을로 옮겨갔다. 충칭에 도착한 지 20일 만의 일이었다. 토교대라는 이름의 부대를 만든 그들은 <등불> 발간을 계속하면서 충칭의 강사들을 초빙해 혁명운동사를 배우고 체력 단련에도 힘썼다. 

토교로 옮긴 뒤 달포만인 3월 하순 장준하에게 한 장의 편지가 날아왔다. ‘준하 군 청람(淸覽)’으로 시작된 그 편지는 주석 김구의 친필로 쓰여 있었다. “지금 충칭에 세계기독교선교회 총무 데커 박사가 와 있는데, 나한테 와서, 장차 종전 뒤에 한국 기독교 재건 문제를 상의하고자 하니, (···) 군이 한 번 데커 씨를 만나 그 건을 상의해보라”는 내용이었다. 장준하는 바로 충칭으로 가서 데커와 여러 명의 외국인을 만났다. 그 가운데는 미국 <타임>지의 기자도 있었다. 장준하가 부주석 김규식의 통역으로 그들에게 알려준 ‘제2차 대전 이후의 한국 기독교 실태’는 나중에 <타임>에 보도 되었다. 

장준하 일행이 토교에 머무는 동안 내무부장 신익희가 대원들을 한 두 사람씩 충칭으로 불러가더니 마침내 그 수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임정 내무부 관할로 ‘경위대’라는 것을 조직하려는데 대원으로 고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신익희는 충칭에서 임정이 연립내각으로 발족하던 때 ‘한국청년당’ 대표로 입각했는데, 그 당은 ‘1인 1당’의 고독한 당이었다. 신익희가 내무부 아래 경위대를 두고 세력을 확대하려는 것을 간파한 장준하와 동지 20여 명은 신익희와 여러 정파를 규탄하는 내용을 실은 <등불>을 호외 형식으로 만들어 가지고 충칭의 임정 청사로 출동했다. 그들은 “경위대를 해체하라” “젊은이는 전선에 나가 죽게 하라”고 외치면서 신익희를 찾았지만 그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었다. 

   
1945년 10월 상해(上海)에서 광복군 시절. ©장준하기념사업회

 

기운이 빠져 청사 언저리를 서성대고 있던 그들은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시안에 나가 있는 광복군 참모장 겸 제2지대장 이범석(1900~1972)이었다. 그는 일행을 말없이 한참 바라보더니 전단과 몽둥이를 놓게 한 다음 청사 안의 한 방으로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시안에 가 있는지 아는가? 나도 그분들의 정치 싸움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뿐더러 이곳에 더 이상 머물러 있다는 것은 나와 나라 모두에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범석은 그 무렵 광복군 제2지대가 시안 땅에서 미군과 합작으로 한국 침투작전을 위한 훈련을 계획하고 있다면서 “나의 동지로 맞고 싶소. 같이 가주지 않겠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소. 그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라야 하오”라고 말했다. 

장준하는 ‘한국 침투, 적지에의 상륙작전 훈련! 그것도 미군과 합작으로!’를 입속으로 되뇌면서 동지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모두 흥분하고 있었다. 그들은 잠깐 여유를 달라고 이범석에게 청했다. 일행은 김구 주석과 의논해보기로 결론을 내린 뒤 그를 찾아갔다. 

“이범석 장군의 시안 이야기는 사실입니까? 또 사실이라면 우리가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김구 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실이다. 만일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곳에서 진실한 위국(爲國)의 길이 열릴 것이다.”

한참 만에 김구 주석은 이렇게 짤막한 한마디를 하고 나서 일어나셨다.(<돌베개>, 300쪽)

그날부터 일행은 시안으로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이범석은 시안으로 떠나기 전에 각자가 이름부터 바꾸라고 일렀다. 정보 누설을 막기 위해 그럴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신(信)’자 돌림으로 이름을 짓기로 했다. 장준하는 ‘김신철(金信鐵)’, 김준엽은 ‘김신일(金信一)’이 되었다. 의형제 같은 마음으로 함께하자는 뜻이었다.

1945년 4월 29일, 일본이 항복할 날이 불과 석 달 반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아무도 예상할 수 없던 때였다. 그날 새벽 장준하 일행은 토교를 떠나 충칭으로 가서 임시정부 청사 앞에 도열했다. 그들이 처음 그 자리에 정렬했던 석 달 전처럼 주석 김구를 비롯한 임정 각료 대다수가 일행에게 석별의 인사를 했다. 일행이 사지(死地)로 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그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격려하고 위로했다. 

김구는 “여러분의 젊음이 부럽소, 젊음이. 반드시 훈련이 끝나기 전에 한 번 시안에 가볼 생각이오”라고 말하면서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는 중국 두루마기 안주머니에서 둥근 회중시계를 꺼내서 일행이 잘 볼 수 있게 높이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늘 4월 29일은, 내가 윤봉길 군을 죽을 곳에 보낸 날이오. 또 지금이 바로 그 시각이오. 여러분도 다 알 것이오.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시로가와 대장을 죽이던 그날의 의사 봉길 군이 나와 시계를 바꿔 차고 떠나던 날이오. 내가 가졌던 허름한 시계를 대신 차고, 내게는 이 회중시계를 주고 떠나던 윤 군의 모습을 생각하며, 바로 같은 날인 오늘 앞으로 윤 의사와 꼭 같은 임무를 담당할 여러분을 또 보내는 내 심중이 괴롭기 한이 없구려. 

“선생님, 제 시계와 바꿔 찹시다. 제가 가진 것은 선생님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어차피 저는 시계가 필요 없어질 것이지만, 제 일이 성공하기 위해선 시계가 아주 없어선 안 되겠지요.” 하던 윤 의사의 눈망울이 이제 여러분의 눈동자로 빛나고 있기 때문이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반드시 하늘이 정한 것인가 보오.(앞의 책, 304쪽)

장준하는 ‘무엇인가 자꾸 목구멍으로 넘쳐 넘어가는 슬픔이 미처 다 빠지지 못하고 입으로 새어 나왔다’고 회상했다. 임정 요인들과 굳은 악수를 나눈 일행(장준하는 30명, 김준엽은 19명이라고 기록했다)은 이범석의 인도에 따라, 대기하고 있던 미군 트럭 네 대에 나누어 탔다. 목적지는 충칭비행장이었다. 그들을 태운 수송기는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시안을 향해 날아갔다. 비행기 안에는 뜻밖에도 젊은 여성이 한 사람 앉아 있었는데, 주석 김구의 판공실장인 민필호의 딸 민영주였다. 이범석의 비서로 동행하게 된 그는 나중에 김준엽과 결혼하게 된다.

일행은 세 시간을 비행한 끝에 시안에 착륙했다. 미군 트럭을 타고 서북방으로 16km를 달려 뚜취라는 마을에 있는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 이르자 180여 명의 한국인 동지들이 달려와서 박수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날 저녁 일행은 미제 군복과 군화를 지급받았다. 야전용 침대와 담요까지 받은 데다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게 되니 생활이 갑자기 화려해진 듯이 느껴졌다. 

그들이 시안에서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미국전략사무국)의 대원이 되기 위해 3개월 동안 특수훈련을 받는 것이었다. OSS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창설된 정보기관으로서 미 육군의 여러 부대들을 위해 정보 수집과 유격 활동을 병행하면서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OSS는 세계대전 뒤에 CIA(중앙정보국)로 개편되었다. 쿤밍에 본부를 둔 OSS는 장준하 일행이 시안에 도착한 1945년 4월 말, 미군의 일본 상륙작전을 위해 예비 단계의 공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뚜취 지구의 OSS 대장은 사젠트라는 미군 소령으로서 위관급 장교들을 비롯해서 문관과 하사관까지 20여 명을 데리고 장준하 일행을 포함한 광복군 50여 명을 훈련시키기로 되어 있었다. 

훈련과정은 예비훈련과 정규훈련으로 나뉘어졌다. 광복군 청년들은 한 주일 동안 예비훈련을 받았다. 도강술, 사격술 등 게릴라전에 필요한 기초 지식과 전술을 비롯해서 밧줄을 타고 절벽 오르기, 매복해서 폭탄 터뜨리기, 특수 음폐·엄폐법 등이었다. 

장준하가 ‘정규훈련 과정은 여기서 밝히지 않기로 한다’고 <돌베개>에 쓴 데 비해, 김준엽은 <장정 2-나의 광복군 시절> 하권에 이렇게 기록했다.

예비훈련을 받은 다음에 내가 배치된 곳은 ‘통신반’이었다. 이로부터 7월 말까지 3개월간 정규훈련으로서 나는 타전(打電)기술과 무전기 조작이나 수리법, 암호의 작성이나 해독법, 심지어 암살법(권총에 특수장치를 하여 총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어 있었다)이나 교량이나 건물의 파괴 등을 배웠다. 특히 타전기술의 숙달에 치중한 훈련을 받았는데, 이것은 적중(국내)에서  신속히 그리고 정확하게 시안 본부나 쿤밍의 미군본부 등과의 연락을 짧은 시간 내에 수행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200쪽)

그 무렵 태평양전쟁이 북상해서 유황도 작전에 이르기까지 전세는 날이 갈수록 급박해졌다. 

 

(11) 벼르고 벼르던 국내 잠입이었건만…

 

OSS의 고된 정규훈련을 3개월 동안 받으면서도 장준하는 충칭과 토교에서 제5호까지 펴낸 <등불>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없었다. 시안에 오자마자 김준엽은 이범석의 부관으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에 장준하 혼자서 잡지를 만드는 일을 주도해야 했다. 그는 훈련을 받다가 틈이 나면 책을 편집하곤 했다. 잡지 이름은 <제단(祭壇)>이라고 정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제단에 자신을 바치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범석의 동의를 얻어 <제단> 제1호 300부를 펴내고는 광복군 제2지대원들은 물론이고 충칭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미주의 동포들에게까지 책을 보내 대환영을 받았다. 

잡지사로 쓸 사무실을 따로 가지고 있던 장준하가 <제단> 제2호를 8월 5일까지 출간할 계획으로 밤을 새우면서 일하고 있던 시기인 8월 3일 정오쯤 누군가가 그의 방 문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김신일(김준엽의 가명)이 보낸 사람이었다. 본대로 급히 오라는 것이었다. 동지 몇 사람과 함께 <제단>을 제본하고 있던 김신철(장준하의 가명)은 1km가 넘는 본대까지 황급히 달려갔다. 김신일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철 동지, 대장께선 신철 동지를 국내로 들여보내지 않을 모양이오.” 이 말을 들은 김신철이 깊은 한숨을 쉬자 김신일은 사정을 설명했다. “나로서는 충분히 신철 동지의 뜻을 들은 것 같은데, 대장께서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아. 국내 잠입 공작도 중하지만, 전후에 쓸 수 있는 인재는 남겨야 한다고 고민하시는 걸.”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국내 잠입을 지원했던 장준하는 흥분을 억누르면서 ‘나의 결심이 무거우냐, 조국의 무게가 무거우냐’를 가늠했다. 그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나의 각오는 한 장의 정수표다. 발행인은 장준하, 결재인은 조국이다.’

한반도에 대한 연합군의 공략은 일본의 본토 사수의 결의를 꺾자는 데 있는 것이다. 이 공략을 돕기 위해 경무기로 무장된 우리가 잠수함이나 낙하산으로 투입되어 우선은 첩보 활동, 다음 단계로 정보 송신, 그리고 최종으로 유격대 조직 및 군사시설 파괴 공작을 수행하도록 미리 결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3단계 활동이 성공할 경우 국민군을 조직하여 미군 상륙과 때를 맞추어 후방 교란을 지휘하는 책임까지 졌으며, 국내 교란에 필요한 무기와 탄약의 공중 지원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면밀한 작전의 초안자가 바로 이 장군 자신이었으므로 그 위험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나의 죽음을 골짜기에 집어넣기에 고민이 컸던 모양이다.(<돌베개>, 317쪽)

1944년 겨울에 그 작전계획은 연합군 중국전구사령부를 거쳐 미국방성의 승인을 얻은 바 있었다. 그래서 사령부는 OSS의 한국인 공작대 훈련을 시안에서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준하는 본대 영내를 벗어나 중국인 이발소로 가서 삭발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잡지사 사무실로 돌아온 장준하는 동지들과 함께 <제단> 편집을 마무리하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을 탈출하던 1944년 7월 7일부터 그날에 이르기까지 일기를 써온 일곱 권의 노트와 <등불> 다섯 권, 그리고 <제단> 1호와 아직 제본이 끝나지 않은 2호와 함께 유서를 두 겹의 종이로 쌌다. 그것들을 담은 봉투에는 두 곳의 주소를 적었다. 한 곳은 부모가 계신 데고 또 하나는 아내의 친정이었다. 그는 그 꾸러미를 들고 김준엽의 숙소로 갔다. 그가 집에 없어서, 갓 결혼한 신부 민영주에게 소포를 주면서 “내가 죽은 것이 확인된 뒤에, 귀국하면 이 주소대로 둘 중의 하나 어느 곳이든 쉬운 곳으로 부쳐달라”고 신신당부했다. 

8월 4일 아침이 밝았다. 장준하는 김준엽의 안내를 받아 지대장 이범석을 찾아갔다. 그는 악수로 반기면서 영내의 정원을 걷자고 했다. <제단> 2호 제작 등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장준하는 “대장님, 원정 계획대로 들여보내 주셔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모든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머리도 깎았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군모를 벗었다. 이범석은 놀라더니 곧 웃는 얼굴로 장준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해외 혁명세력의 분포와 상황을 보면 지극히 한심스럽고 염려되는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어차피 일본의 패망이 눈 앞에 다가왔으니 유능한 동지들을 아꼈다가 종전 후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장준하는 “서울지구 침투 공작이 우리 원정 계획 전체의 성패에 관계가 있고, 이것이 우리 조국 광복에서 가장 큰 작용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 일은 제가 맡아 해보겠습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범석은 결국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신철 동지의 뜻이 정 그렇다면 더 막고 싶진 않아. 그럼 뜻대로 한 번 해보라”고 말했다. 

   
광복군 시절. ©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와 동지 50여 명은 8월 20일 안으로 정규훈련을 마치고 함경도부터 남해까지 4~5 명씩 지구 공작반을 조직해서 고국에 잠입할 계획을 세운 뒤 쿤밍에서 출동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8월 7일, 임정 주석 김구와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이 전에 약속한 대로 뚜취를 찾아왔다. 영내의 가설무대에서 열린 환영회에서 동지들은 두 혁명 지도자를 모시고 신명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것이 마지막 향연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8월 10일 오후 본대에서 전통이 내려왔다는 사실이 영내에 알려졌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중립국을 통해 연합국에 통고했다는 것이었다. 영내는 발칵 뒤집혔다. 죽음의 길로 가려고 대기하고 있는 마당에 뜻밖의 희소식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장준하와 동지들은 환희와 실망을 동시에 느꼈다. 조국 광복이 눈 앞에 다가오고 있는데, 목숨을 걸고 해방의 기수가 되겠다는 각오가 덧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8월 13일 아침 구대장인 노태준과 안춘생이 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곧 지대장 이범석이 나타나더니 “오늘 오후 나는 국내로 들어갈 계획이오. 여기 모인 동지들도 나와 함께 행동을 해줘야겠소. 이상”이라고 말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두 구대장은 뒷일을 처리해주어야겠소. 오늘 아침 임시정부는 내게 국내 정진군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겨주었소. 국내에 누구보다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길도 생겼소. 중국전구 미군사령부가 내일 사절단을 서울로 들여보낸다니 우리도 그편에 편승하라는 전달이오.”

그날 오후 5시쯤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과 대원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이해평이 트럭을 타고 시안비행장에 도착했다.(김준엽은 시안에 남아 있었다고 <장정>에 기록함). 미군 사절단 대표인 대령 번즈와 한 무리의 군인들이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미군 측은 모두 22명이었다. 

8월 14일(김준엽은 15일이라고 기록) 오전 4시 15분, 일행을 태운 C-47 수송기가 이륙했다. 비행기가 후난과 산시를 거쳐 산둥을 향해 날아가던 밤 10시 40분쯤 미군 무전사가 종이 한 장을 들고 번즈의 자리로 왔다. 그는 쿤밍사령부의 지시가 적힌 그 종이를 보더니 “한국 진입 중지!”라고 소리쳤다. 14일 아침 도쿄만에 진입하던 미군 항공모함이 일본 특공대의 습격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열두 시간을 서울을 향해 날아가던 비행기는 기수를 시안으로 돌렸다. 

일제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 8월 15일 장준하와 동지들은 광복의 기쁨을 한껏 느끼면서도 소련군이 미군보다 먼저 한반도로 진주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날 밤 11시에 쿤밍에서 무전으로 지시가 내려왔다. “언제 진입하게 될는지 아직 유동적이니, 일단 시안비행장에서 대기하라.”

18일 새벽 5시, 광복군 정진대(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와 미국 OSS 측 18 명은 시안비행장을 이륙했다. 22 명을 태운 수송기는 산둥반도를 지나 정오 무렵 인천 앞바다 상공에 이르렀다. 고도를 낮춘 비행기는 한강 하류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황해를 건너면서 5분마다 ‘미국 군사사절단 진입 중’이라는 무전을 일본군에 보냈는데도 반응이 없더니 영등포 상공에 이르자‘여의도로 내려라’라는 답전이 왔다.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한 비행기는 격납고 앞 광장에서 멈췄다. 사절단은 일본군에 대한 전의(戰意)가 없는 것을 보이려고 기관단총을 어깨에 걸치고 비행기를 내렸다. 그런데 어쩐 셈인지 착검을 한 일본군이 돌격 태세로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얼마 뒤 험상궂은 방독면을 쓴 일본군이 비행기를 향해 원거리 포위망을 좁혀 오기 시작했다. 사절단이 타고 온 수송기에서 50m쯤 떨어진 격납고 앞에는 1개 중대나 되는 일본군 병사들이 일본도를 뽑아 든 장교에게 인솔되어 정렬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장성 몇 명을 포함한 고급장교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중형전차의 기관포도 보였다. 

육군중장을 앞세운 일본군 장교단이 미군 사절단 쪽으로 걸어왔다. 중장은 조선군 사령관 조츠키였다. 미군 대령 번즈가 그와 마주섰다. 조츠키가 “무슨일로 왔느냐?”고 묻자 번즈는 영등포 상공에서 뿌리다 남은 선전 전단을 내밀었다. 조츠키는 “아직 도쿄 대본영에서 아무런 지시가 없으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사절단 대표가 “일본 천황이 이미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 사실을 모르느냐? 이제는 도쿄의 지시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반박했지만 조츠키는 물러서지 않았다. 논쟁이 멎지 않자 조츠키는 나무 그늘 밑에서 이야기하자고 제의했다. 미군과 일본군이 실랑이를 하면서 몇 시간인가를 보내고 있을 때 대좌(대령) 한 사람이 달려오더니 흥분한 일본군 병사들이 공격할는지도 모르니 돌아가라고 사절단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병사들을 향해 “이쪽을 보고 경계하지 말고 밖을 향해 서서 경계하라”고 외쳤다. 그것으로 사절단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번즈는 일본군 대좌를 상대로 사절단이 중국으로 돌아가는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장준하와 동지들은 일본군이 안내한 다다미방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다시피 했다. 8월 19일 새벽 먼동이 터오자 번즈는 시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오후 3시 반쯤, 평양에서 운송해 왔다는 휘발유를 채운 수송기는 5시에 여의도비행장을 이륙했다. 여의도를 떠난 지 세 시간쯤 되던 무렵 휘발유가 떨어질 정도가 되자 비행기는 산둥성의 유현비행장에 불시착했다. 그들은 국부군의 호의에 힘입어 거기서 엿새를 묵은 뒤 8월 25일 아침에 수송기를 타고 정오쯤 시안비행장에 내렸다. 

8월 29일 오전, 구대장 안춘생을 포함한 장준하 일행 7 명은 윈난성의 쿤밍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 측 연합군 사령관 장개석의 참모장인 미군 중장 웨드마이어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쿤밍을 거쳐 상하이로 가면 제7함대의 배를 타고 한국으로 가도록 주선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쿤밍에서 닷새를 머문 일행은 9월 3일 밤 상하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상하이는 승전 때문에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장준하 일행은 미7함대의 배편을 구하지 못해 초조하게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0월 7일,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이 상하이로 왔지만 귀국의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10월 중순께 그들이 미7함대 편 귀국을 포기하려 할 즈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한국 주둔 미군사령관인 중장 하지가 비행기를 보내 임시정부 요인들을 국내로 데려간다는 것이었다. 

1주일이 지난 11월 5일 김구 주석 일행이 탄 비행기가 상하이 강남비행장에 내렸다. 

상하이 홍커우공원에는 6,7천을 헤아리는 교포들이 공원 광장을 메웠다. 환영식이었다. 김구 선생이 단에 오르자 교포들은 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다. 

백범 김구가 올라선 그 단은 바로 그 자신이 윤봉길 의사를 시켜 일본군 시로가와 대장 일행에게 폭탄을 던지게 한 자리였기에 그 만세 소리는 더욱 우리들 가슴을 뒤집어 놓았다.(앞의 책, 369~370쪽)

김구 일행이 상하이에 도착한 지 18일 만인 11월 23일, 하지가 보낸 비행기가 상하이로 날아들었다. 

 

(12) 돌아온 임시정부를 냉대한 미군…

 

1945년 11월 23일 오후 1시 정각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가 보낸 C-47 수송기에 올랐다. 주석 김구를 선두로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이시영, 문화부장 김상덕, 참모총장 유동열, 선전부장 엄항섭, 김규식의 아들로 비서 일을 보던 김진동, 주석의 의무관 유진동이 비행기 날개가 뿜어내는 은빛 때문에 눈을 가리며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수행원인 장준하, 이영길, 백정갑, 윤정빈, 선우진, 민영완, 안미생이 그 뒤를 이었다. 유일한 여성인 안미생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딸로서 김구의 장남 김인과 결혼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시아버지의 비서로 일하면서 재충칭애국부인회의 일을 도왔다.

장준하가 비행기 창문으로 내다보니 임시정부 요인들과 동포들이 미친 듯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이륙하자 누군가가 “아, 떠난다”라고 감격이 소리를 질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김구는 그 소리에 눈을 떴다. 장준하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맴돌았다. ‘아아, 아직도 동포의 만세 소리가 장안을 덮었을까? 목쉰 만세 소리가 서울의 하늘을 진동시킬까? 거리마다 골목마다 해방의 기쁨이 넘쳐흐를까? 진정 모두가 기뻐하여 감격만이 차고 흐를까?’

비행기가 세 시간쯤 날고 있을 때 누군가가 외마디 소리로 외쳤다. “아······아, 보인다 한국이!” 창밖에는 초겨울의 황해가 ‘푸른 잠’을 자고 있었고 그 바다 위에 거뭇거뭇한 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부르기 시작했는지 애국가 합창이 기내에 울려 퍼졌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들은 바로 그 ‘우리나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감상을 내버린 지 오래고 울음을 잊어버린 지 이미 옛날인 강인한 백범 선생, 그의 두꺼운 안경알에도 뽀얀 김이 서리고 그 밑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린다.” 그는 ‘거대한 돌부처럼, 우는 돌부처럼, 주먹을 쥐어 무릎 위에 얹은 채’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강화도와 인천 상공을 지난 비행기는 오후 4시쯤 김포비행장에 착륙했다. 일행은 벨트를 풀고 일어섰다. 미공군 하사관이 기체의 문을 열어젖혔다. ‘화악’ 하고 상쾌한 바람이 ‘조국의 냄새’를 풍겼다. 그 순간 일행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벌판뿐이었다. 

 

일행이 한 사람씩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미군 GI들뿐이었다.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깨어지고 동포의 반가운 모습은 허공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 너무나 허탈한 상태에서 나는 몇 번이나 활주로의 땅을 힘주어 밟아 보았다. 

나의 조국이 이렇게 황량한 것이었는가. 우리가 갈망한 고토가 이렇게 차가운 것인가. 나는 소처럼 발에 힘을 주어 땅을 비벼대었다. 

이윽고 일행 열다섯 명이 김구 주석을 따라 정렬하는 식으로 서자, 한 미군 병사가 비행장에 와 있는 장갑차를 가리키며 승차를 알려주었다.

나부끼는 태극기, 환성의 환영, 그 목 아프게 불러줄 만세 소리는 환상으로 저만치 물러나 있고 거무스레한 김포의 하오가 우리를 외면하고 있었다.(돌베개>, 380쪽)

김구 일행은 두서너 사람씩 장갑자동차에 나누어 탔다. 미군의 표정은 극히 냉담했다. 여섯 대의 자동차는 한 줄로 천천히 김포비행장을 벗어났다. 그냥 군용차가 아닌 장갑차에 그들을 태우고 달리는 미군 병사들은 ‘하나의 작전’을 수행하듯이 기계적으로 행동했다. 장준하는 차창으로 보이는 흰옷 입은 농부를 향해 태극기를 흔들었다. 미군은 그것마저 제지했다. 

일행은 오후 5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서대문의 경교장(京橋莊) 안으로 들어섰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국내에는 ‘임시정부 환국 환영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있었다. 경교장은 그 위원회가 김구 일행의 숙소로 마련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창갑차를 내릴 때까지 위원회 사람들은 임시정부의 환국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일행 열다섯 명이 내리자 미군 차들은 그대로 철수해버렸다. 준비위원회 사람들은 눈앞에 나타난 김구를 보고도 멍하니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27년 만에 고국의 수도 서울에 돌아온 김구는 경교장 2층의 한 방에 여장을 풀었다. 그때부터 얼만 지나지 않은 저녁 6시 정각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다. “오늘 오후 김구 선생 일행 열다섯 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랫동안 망명하였던 애국자 김구 선생은 개인의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온 것이다. 이것이 전부였다. 김구가 목숨을 걸고 독립투쟁을 펼친 사실을 언급하지도 않고 ‘애국자’라는 한 마디를 썼을 뿐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키고 있던 임시정부의 존재는 아예 외면한 채 ‘개인의 자격’으로 돌아왔다고 단정해버렸다. 

미군의 냉대와는 달리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의 환국 소식을 들은 동포들의 환성으로 장안이 떠나갈 듯 했다.

하지의 성명이 나온 뒤 가장 먼저 경교장을 찾아온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그는 저녁 6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김구를 만나 길지 않은 회담을 했다. 그는 며칠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임시정부의 한 사람이다. 임시정부가 들어와서 정식 타협이 있기 전에는 아무런 데도 관계할 수 없다. (···) 며칠 안 돼서 그들이 귀국하게 되면 전 국민이 대환영할 줄 믿는다.”

국내 언론인으로는 처음으로 서울 중앙방송국 기자 문제안이 경교장으로 달려와 김구 일행의 임국 경위를 취재해서 방송으로 내보냈다. 그 소식을 들은 동포들이 경교장으로 모여들어 서대문에서 광화문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여러 언론사의 기자들이 김구의 환국을 정식으로 확인하려고 하자 오후 8시 선전부장 엄항섭이 주석의 귀국 제1성이 담긴 성명서를 그들 앞에서 낭독했다. 이것은 역사적인 문건이므로 전문을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27년 간 꿈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 강산을 다시 밟을 때 나의 흥분되는 정서는 형용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경건한 마음으로써 우리 조국의 독립을 전취하기 위하여 희생하신 유명무명의 무수한 선열과 아울러 우리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피를 흘린 허다한 연합국 용사들에게 조의를 표합니다. 

다음으로는 충성을 다하여 3천만 부모 형제 자매 및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소 등 우방군에게 위로의 뜻을 보냅니다. 

나와 나의 동사(同事)들은 과거 2,30년 간을 중국의 원조 하에 생명을 보지(保持)하고 우리의 공작을 전개해 왔습니다. 더욱이 금번에 귀국하게 되는데에 중국의 장개석 총통 이하 각계각층의 덕택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나의 동사는 중·미 양국에 대하여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금번 전쟁은 민주를 옹호하기 위하여 파시스트를 타도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 승리를 얻은 원인은 연합이라는 약속을 통하여 호상단결 협조함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금번 전쟁을 영도하였으며, 따라서 큰 공을 세운 미국으로서도 승리의 공로를 독점하려 하지 않고 연합국 전체에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겸허한 미덕을 찬양하거니와 동심륙력(同心戮力)한 연합국에 대하여도 일치하게 사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작풍(作風)은 다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이라고 확신합니다. 

나와 나의 동사는 각각 일개의 시민 자격으로 입국하였습니다. 동포 여러분의 부탁을 맡아 가지고 27년 간을 노력하다가 결국 이와 같이 여러분과 대면하게 되니,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에게 벌을 주시지 아니하고 도리어 열렬하게 환영하여 주시니 감격의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나와 나의 동사는 오직 완전 통일된 독립 자주의 민주국가를 완수하기 위   하여 여생을 바칠 결심을 가지고 귀국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조금이라도 가림 없이 심부름을 시켜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하여 유익한 일이라면, 불속이나 물속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기쁘게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구에 또 소련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북쪽의 동포도 기쁘게 대면할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우리와 함께 이날을 기다립시다. 그리고 완전히 독립 자주하는 통일된 신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공동 분투합시다! (앞의 책, 385~386쪽)

이 성명은 2012년 현재 한국 사회에 살면서 ‘민주와 자주,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엄항섭은 성명을 낭독하고 나서 임시정부의 ‘14개 당면 정책’을 발표했다. 주요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임시정부는 조속한 기일 안에 입국할 것.
 · 연합국의 중요 국가인 중·미·소·영 등 강국을 향하여 먼저 우호협정을 체결할 것.
 · 평화회의 등 각종 국제 집회에 참가하여 한국의 폭 넓은 발언권을 행사할 것.
 · 전국적 보선에 의한 정식 정권이 수립되기까지의 국내 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국내 각 계층 각 혁명 당파, 각 종교집단, 각 지방 대표의 민주영수회의를 소집하도록 노력할 것.
 · 국내에서 건립된 정식 정권은 반드시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원칙으로 한 신헌장에 의해 조직할 것.
 · 적의 일체 법령이 무효와 신법령의 유효를 선포하는 동시에 적의 통치 하에 발생된 일체 처벌범을 사면할 것.
 ·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에 대하여서는 공개적으로 엄중히 처벌할 것.(앞의 책, 386~387쪽에서 요약) 

 

(13) 해방공간에서 백범의 비서로

 

임시정부 선전부장 엄홍섭이 김구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나자 기자들은 ‘동포들이 백범 선생의 육성 방송 듣기를 열망하고 있다’면서 방송 시간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김구는 미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어떤 공개적 행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경교장 건너편의 동양극장 앞에 진을 친 군중은 그런 사정도 모르고 김구를 먼 발치에서나마 보려고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귀국한 지 첫날 밤, 경교장의 큰 방에서 젊은 동지들과 함께 잠자리에 든 장준하는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가 김구의 환국을 ‘개인 자격’이라고 못박은 것이 자못 마음에 걸렸다. 그 말은 ‘임시정부 해체’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가 이튿날 아침 김구의 거처로 가서 보니 송진우, 정인보, 안재홍, 김병로, 그리고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권동진, 옥중생활에서 두 다리를 모두 잘린 김창숙 등이 백범을 둘러싸고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경교장은 광복군 국내 지대가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하도 많은 사람들이 김구를 만나 보려고 몰려드는 바람에 인력을 보강해야 했다. 엄항섭은 장준하에게 몇 가지 지시를 했다. 공적으로 찾아오는 원로급 국내인사는 백범이 직접 면담하도록 하고, 그밖의 중요한 인사들은 자신이 만나게 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장준하가 맡으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시간부터 임명장도 받지 않은 채 김구의 비서가 되었다.

11월 24일 오후 김구는 동아·조선일보와 서울신문, 인민보(공산당 기관지) 등 언론사 기자 30여 명과 회견을 가졌다. 기자들의 질문에는 당시 정치상황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현재 국내에서는 통일전선 결성에 최대한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선생의 포부는 어떠신가요?”라는 물음에 그는 “통일전선을 결성하는 데 있어 내가 이승만 박사보다 나은 생각을 갖고 왔으리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대답했다.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먼저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를 제외하자는 소리가 높다”는 지적에 관해서는 “나쁜 분자를 먼저 제외하고 뭉치는 것은 매우 훌륭한 방법일 것이나, 뭉쳐가지고 나쁜 분자를 골라내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하면서 “현재 무엇보다도 시급한 통일부터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 기자가 ‘어젯밤 귀국 제1야의 감상’을 묻자 김구는 “나는 어제 고국 땅을 밟았으나, 그러나······나의 혼이 왔는지, 육체가 왔는지, 분간할 수 없는 심정”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기자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김구는 “개인 자격으로 입국했다고 발표되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단호한 어조로 답변했다. “우리 한국에는 현재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관계로 대외적으로는 개인 자격이 될 것이나, 우리 한국사람 입장으로 보면 임시정부가 환국한 것이다.”

 

김구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장준하가 느낀 점들을 <돌베개>에 기록한 것을 보면, 그는 좌익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몇 번의 기자회견을 통하여 나는 기자들의 질문 자체 속에 묘한 정치적 색채가 숨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모여드는 신문기자들 속에 섞인 공산주의자들의 유도 질문 내지는 회유 질문에서 나타났고, 이러한 질문은 으레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는 것이었다. 

“인민의 소리를 들으시오. 인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인민이라는 이름을 팔아, 여러 정치세력이 통일전선을 형성하려는 기운을 꺾고, 김구 선생의 회견을 그들의 의도대로 좌화시켜 왜곡 발표하려는 유도 질문이요, 또 공산주의세력에 어떤 결정타적인 정치 발언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회유 질문이 으레 이렇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그때 국내의 정세는 공산당 당수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세력과 이를 배척하고 견제하는 이승만 박사의 노선과 공산당에게 주로 이용 당하고 있던 여운형 씨 중심의 중간노선으로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401~402쪽)

그날 저녁 장준하가 식당에 앉아 있는데 엄항섭이 와서 그를 데리고 김구의 방으로 갔다. 미군정청이 김구의 육성 방송을 허가하면서 ‘오늘 밤 8시에 2분 안팎의 방송을 해도 좋다’고 했다고 엄항섭이 김구에게 보고했다. 

“장 목사, 장 목사가 좀 이 원고를 알아서 써주어야 하겠소. 간단한 도착 소식만을 내 목소리로 알리라니······”

장준하가 일본신학교를 다녔다는 사실 때문에 충칭 시절부터 김구는 그를 ‘장 목사’라는 애칭으로 부르곤 했다. 

김구는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단 2분 동안에 할 수 있는 말이라·····.”

방송 시간까지는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장준하는 원고지 서너 장 정도의 글을 작성했다. 김구는 경교장 가까이 있는 정동 방송국으로 엄항섭 등 수행원을 대동하고 떠났다. 

밤 8시 정각, 장준하는 경교장에서 라디오로 김구의 방송을 들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27년 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 강산에 발을 들여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나는 지난 5일 충칭을 떠나 상하이로 와서 22일까지 머물다가 23일 상하이를 떠나 당일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나와 각원 일동은 한 갓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 완성을 위하여 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국가 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앞으로 여러분과 접촉할 기회도 많겠기에, 오늘은 다만 나와 나의 동사 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만을 전합니다.(앞의 책, 406~407쪽) 


김구는 11월 26일부터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그날 오전 10시 군정청(일제의 조선총독부 청사, 현재 경복궁 자리)에서 내외 기자단과의 회견이 열렸다.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의 안내로 김구가 회견장에 들어섰다. 그는 짤막하게 인사말을 했다. “나는 앞으로 여러 선배와 각급 각계 대표자들을 방문 또는 초청하여 담론할 것이며, 미군 당국과도 깊이 의논한 뒤에 우리가 할 일을 알려드리겠습니다.” 

27일에는 김구와 4당수의 회담이 열렸다. 한국민주당의 송진우, 한국국민당의 안재홍, 인민당의 여운형,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의 국무총리 허헌이 바로 그들이었다. 장준하는 회담에 앞서 이런 지시를 받았다. 회담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서 김구에게 브리핑을 하고, 그가 당수 한 사람씩과 단독 회동을 할 때 입회해서 내용을 기록하라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회동을 한 송진우는 김구의 친서를 지닌 몇 개조의 친선사절단을 연합국에 파견해서 독립을 승인받도록 하고, 광복군을 모체로 국군을 편성하자고 제안했다. 여운형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는 않은 채 김구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헌은 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렸으나 너무 늦어져서 ‘인민공화국’을 조직했다면서 “이제 김구 선생이 들어오셨으니 잘 지도하여 주시기 바라며 저는 백지로 돌아가 받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안재홍은 해방 직후 여운형이 주도해서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가했다가 좌익이 실권을 장악하자 건준을 탈퇴하고 조선국민당을 결성한 인물이었다. 장준하는 김구와 그의 회동에 관해서는 이렇다 할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12월 1일 장준하는 김구를 수행하고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에 참석했다. 3만여 명의 군중이 모인 그곳에서 이승만과 임정 요인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봉영회가 끝난 뒤 임정 요인들은 자동차에 나눠 타고 서울시내 중심가를 행진했다. 시민들은 열렬하게 그들을 환영했다. 

장준하가 누린 감격의 시간은 아주 짧았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고 극렬하게 다투는 정파들의 행태에 환멸을 느꼈다. 그리고 개선장군처럼 으스대는 임정 요인 일부의 행동거지를 보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간 속에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 속에선 아무런 지표도 찾을 수가 없었다. (···) 결론은 언제나 우리의 무력함에 귀착되었다. 아니 나의  무력함이었다. 나의 과대망상인지 모르나, 나라의 운명은 어떤 이의 과대망상이라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기로에서 닻줄에 매인 듯 흔들리고 있었다. 임정의 법통이 애석하였고 임정의 진로에는 이미 미군정의 닻줄이 걸려 있었다. 조국에의 통로는 멀고 먼 것이련만, 그 항로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뱃사공으로 타고 있었다.(앞의 책, 463쪽)

 

(14) 경교장 떠나 족청의 이범석 곁으로

 

장준하가 젊은 시절의 자서전으로 쓴 <돌베개>는 1944년 7월 7일 일본군을 탈출해서 충칭의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6천 리 장정으로 시작되어,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개선환영회’로 마무리된다. 물론 그 1년 5개월 남짓 이전에 장준하가 겪은 일들이 소급되어 기록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돌베개>는 그의 일생을 아우르는 온전한 자서전은 아니다.

그래서 ‘장준하는 누구인가’를 짚어보려면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한 글들을 참조해야 한다. 장준하에 관한 글들과 다양한 자료들은  <장준하문집> 3권(10주기추모문집간행위원회 편, 1985)에 실려 있다. 그리고 소설가 박경수(1930~ )가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에 그의 일생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 소중한 자료로 살아 있다. 박경수는 군대에서 이등병으로 복무하던 시절, 장준하의 <사상계>가 1955년 창간 2주년 기념으로 공모한 현상소설에 응모해서 입상함으로써 그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제대한 박경수는 사상계사에서 대표인 장준하가 바쁠 때 그의 글을 대필하는 일을 맡았다. 박경수의 그런 임무는 장준하가 1960년대 초 국토건설본부에서 일하던 시기와 <씨알의 소리>에 관여하던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박경수가 ‘이 엄청난 인물에 관한 총체적 일대기’를 2003년 8월에 펴낸 것이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이었다.  지금부터 장준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특별히 출처를 밝히지 않는 경우 위의 두 책에 바탕을 둔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1946년 초에야 비로소 장준하는 38도선 이북에서 월남한 가족을 만나게 되었다. 그 과정은 이렇다.

장준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평안북도 삭주에서 월남을 결심하고 여러 가지 계획을 짰다. 그들은 풍편에 들은 소식으로 장준하가 서울 경교장에 머무는 김구의 비서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보다 먼저 장준하의 아우인 명하와 익하가 전문 안내꾼에게 금품도 주면서 우여곡절 끝에 이남으로 넘어왔다. 1946년 4월에는 장준하의 장모 노선삼과 아내 김희숙이 월남했다. 결혼한 지 2년이 지나 만 18세가 된 김희숙은 성숙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장준하는 아내가 이북에서 내려왔다고 김구에게 알렸다. “장 목사, 부인을 여기로 한 번 모시고 오시오”라는 그의 말에 따라 장준하는 소녀티를 벗지 못한 김희숙을 데리고 경교장으로 갔다. 너무도 유명한 ‘김구 선생’ 앞에서 겁을 먹은 김희숙은 고개를 못 들고 백성이 임금을 알현하듯 큰절을 올렸다. 

그로부터 두 달쯤 뒤인 1946년 6월에 장준하의 할아버지와 부모, 그리고 막내아우 창하가 38선을 넘어왔다. 그해가 저물 때까지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로 있었으나 임시정부는 갈수록 빛이 바래고 김구는 한국독립당(한독당)이라는 한 당파의 영수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테러와 암살이 잇달았다. 1945년 12월 송진우, 1947년 12월 장덕수, 1947년 7월 여운형이 괴한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남으로써 좌익과 우익 간의 대립과 갈등이 더 치열해졌다. 

장준하가 충칭에 머물던 시기에 광복군 제2지대 대장이던 이범석이 1946년 6월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귀국했다. 그는 1915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래 독립투쟁의 일선에 섰다. 1920년 10월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을 도와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국내에 독립영웅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범석은 이런 명성을 후광으로 삼아, 1946년 10월 9일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결성했다. 미군정청은 그 청년단체를 활용하려고 500만여 달러를 지원하는 한편 미군 대령을 훈련고문으로 파견했다. 

“족청은 김활란(이화여대 총장), 백낙준(연희대 총장), 최규동(서울대 총장), 현상윤(고려대 총장) 등으로 이사회를 구성하고, 수원에 있는 옛 일본육군병원 건물에 족청 중앙본부를 설치함과 아울러 이곳에 훈련소를 마련하였다. 소련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 비밀을 유지하는 가운데, 수원 훈련소에선 1947년 7월까지 약 7만 명이 훈련을 받았다. 교육 목적은 장래의 군대였으며, 실제로 상당수가 국군으로 편입되었다.”(강준만 지음,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권>, 267쪽)

족청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사람은 안호상이었다. 그는 나치 독일의 예나대학을 졸업한 ‘헤겔 학도’로서 공개적으로 ‘히틀러 유겐트(청년단)’를 찬양한 바 있었다. 족청의 ‘단지(團脂)’에는 안호상의 그런 ‘사상’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었다. ‘민족 지상, 국가 지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족청 ‘단원의 신조’는 이렇다. “우리는 반만년의 자랑스러운 전통과 배달민족의 피와 흙속에서 생겨난 이 나라의 새 생명이다. 민족 지상 국가 지상의 이념을 신봉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래 최후까지 심신을 바친다.” 

족청 단장 이범석이 어느 날 장준하를 부르더니 “장 동지, 시안에서의 일을 생각하고 나를 도와주시오”라고 부탁했다. 장준하는 “이런 일을 하시면서 왜 김준엽 동지를 안 데려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범석은 김준엽이 공부를 하겠다면서 중국에 남았지만 조만간 돌아올 것이라고 대답했다. 장준하가 주석을 모시고 경교장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다고 말하자 이범석은 “장 동지 같은 사람이 아니면 안 돼. 내가 백범 선생께 말씀드릴 테니 이리로 오도록 하라”고 설득했다. 

장준하는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족청 같은 사회단체가 체질에 맞는 것 같고, 정치 싸움과 당리당략으로 시간을 보내는 경교장의 분위기가 역겨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신뢰하는 김구를 떠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장준하는 김구 앞에 가서 그런 사정을 고백했다. 그의 성품을 익히 아는 김구는 즉석에서 이범석에게 가는 것을 허락했다. “철기(이범석의 호)가 장 목사를 탐내는 거야 당연하지. 본디 충칭에서도 임정의 정치판이 싫다고 뛰쳐나갔다가 시안으로 철기를 따라가지 않았나. 가서 열심히 도와주게.”

경교장을 떠난 장준하는 1947년 12월 족청의 교무처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이 또한 오래 가지 못한다. 족청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단장 이범석은 지난날 광복군의 시안 지대장 이범석 장군이 아닌 것 같았다. 어느 사이 엔가 그에게서도 한 정파의 영수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언행에서는 자꾸 계략과 술수가 비쳐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가 하면 족청도 다른 정당 단체나 다를 게 없이 급격한 세력 키우기가 눈에 보이면서 마침내 거기 모여 드는 구성원에 온갖 시정잡배들이 옥석을 가릴 수 없게 뒤섞여 가고 있었다. 

조직 관리의 책임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 훈련을 맡은 장준하의 성격에 그런 오합지중이 화합될 리가 없었다. 순수 정예를 지향하려는 장준하와 세력 확대를 급선무로 하는 이범석은 자꾸 의견이 맞지 않게 되고, 장준하의 굽히지 않는 고집과 불평을 이범석은 곧 성가셔하였다.(<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226쪽)

그렇다고 해서 장준하는 경교장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제는 임정 주석 김구 편이 아니라, 이승만의 ‘밀명’에 따라 반공을 표방하면서 좌익세력과도 타협하는 이범석의 족청에서 일하다가 다시 복귀하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결단을 내린 장준하는 족청 단복과 단모를 벗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고 이범석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사무실을 떠났다. 

1948년 5월, 중국에 남아 중국사를 공부하던 김준엽이 신장결석병 수술을 받으려고 귀국했다. 그가 거의 3년 만에 만난 장준하는 족청과 결별한 뒤 미국 유학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준하는 이범석과 헤어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좌우의 테러분자들 문제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였소. 철기는 지금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요.”

그 이후로는 이범석도 장준하를 다시 찾지 않았다. 이범석은 날이 갈수록 독재적 기질을 드러내는 이승만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충성을 바쳤다. 미국이 이승만을 신생 독립국의 대통령으로 밀고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준하는 어쩌다 이범석을 만나도 의례적인 목례만 나눌 뿐이었다. 

미국 유학이 뜻대로 되지 않자 장준하는 순수한 문화운동을 하겠다는 뜻으로 ‘한길사’라는 출판사를 차려 운영했다. 중국 임천에서 창간했던 <등불>을 이어받으려고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경영난 때문에 계속할 수가 없었다. 

1948년 봄에 장준하는 일본신학대학 교우인 문동환의 주선으로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의 전신)에 편입했다. 4년 전에 마치지 못한 신학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서였다. 문익환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학교 강의는 빈약했지만 교수, 학생 사회가 익히 친숙한 이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조직신학과 기독교윤리와 구약은 김재준 목사, 교회사는 한경직 목사, 목회학은 송창근 박사, 헬라어와 신학은 정대위 목사가 가르쳤다. 학생들도 문동환의 은진학교 동창인 강원용을 비롯, 장준하, 이우정 등 동생의 친구들이 중심 그룹을 형성하여 낯설지 않았다.”(김형수 지음, <문익환 평전>, 261~262쪽)

일찍이 도쿄의 일본신학교에서 학우로 만나게 된 장준하와 문익환은 1918년 생으로 동갑이었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충격을 받은 문익환은 ‘벗 장준하의 뜻을 이어받아’ 반유신독재운동의 선봉에 나서게 된다.

장준하는 6개월 만에 조선신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신학 공부를 하던 기간에 남한에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15) 피난수도 부산에서 ‘사상계’ 창간

 

1949년 6월 29일(일요일) 오후 12시 26분 경교장 2층에 있던 김구의 거실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렸다.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가 권총으로 그를 쏜 것이었다. 김구는 <중국시선(中國詩選)>을 읽고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74세였다. 누군가가 김구를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은 오래 전부터 나돌았다. 그때마다 김구는 “왜놈도 나를 죽이지 못했는데 동포가 설마 나를 죽이겠나”하면서 유언비어를 일축했다. 

김구가 암살당한 이튿날 대통령 이승만은 묘한 어감이 풍기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구 씨를 살해한 동기에 관하여서도 공표하고 싶은데, 그것은 발표할 때가 되면 반드시 공포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때 모든 사실을 일반인 앞에 공개해 놓는다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그 생애를 조국 독립에 바친 한국의 한 애국자에 대한 추억에 불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252~253쪽)

김구의 장례는 7월 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정부가 국장으로 하자고 제의했으나 장례위원회는 “너희들이 죽여 놓고 무슨 국장이냐?”고 항의하면서 ‘민족장’을 추진했다. 결국 김규식의 조정으로 국민장으로 결정되었다. 김구의 국민장에는 전국에서 100만이 넘는 조문객이 모여들었고, 영결식 날에는 40~50만 명의 인파가 거리를 메운 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장준하가 김구 암살 당일 어디에 있었는지, 장례식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기록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다만 그가 가장 존경하던 애국지사이자 혁명투사인 그의 암살 소식을 듣고 청천벽력 같은 충격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과 함께 장준하 일가에게도 비극이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그 무렵 서울 원효로 4가에 있는 교회에서 목사로 일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동네의 고갯마루에 올라가 서울에 진입한 인민군이 탱크를 몰고 오는 것을 보고는 충격으로 쓰러져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장준하는 교회 마당에 어머니를 가매장하는 것으로 장례를 대신하고 한강을 가까스로 건너 상도동으로 피난했지만 거기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그는 1951년 1·4후퇴 때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갔다. 그런 와중에 원효로 교회에 남아 있던 할아버지가 노환으로 별세했고, 연희대(연세대의 전신)를 졸업한 아우 익하는 유엔군 통역관으로 들어가 일하다 전투 중에 실종되었다. 피난지 부산에서는 장준하의 두 살배기 첫 딸이 목숨을 잃었다. 

군인 신분도 아니고 족청 같은 정치단체 구성원도 아닌 장준하는 부산에서 마땅하게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행동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는 중국 임천의 한광반에서 창간한 <등불>과 시안의 OSS 시절에 펴낸 <제단>의 경험을 살려 잡지 창간에 참여했다. 당시 부산에는 정부기관이 모두 피난 와 있었는데, 문교부 산하에 ‘국민사상연구원’이 신설되었다. 연구원의 기관지로 1952년 9월에 창간된 잡지가 <사상>이었다. 그곳의 연구원이던 장준하가  편집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 무렵 정부는 잡지 발간에 필요한 예산을 마련할 수 없어서 장준하에게 <사상>의 제작과 판매를 일임했다. 그는 창간호 ‘편집 후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 민족 4천 년의 역사는 실로 이 땅에 생을 받았던 모든 생명들의 사고와 행위의 집적이다. 그 속에는 이 집단의 고민, 희열, 성공, 실패 등 모든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다. 민족과 인류의 역사가 가장 험난한 고비를 넘는 오늘날 우리 앞에는 과거와는 전혀 그 각도를 달리하는 고민과 과제가 놓여 있으니 이 고민과 과제를 해결하고 이 겨레의 활로를 개척함에는 선인들의 경험과 아울러 새롭고 또는 넓고 깊은 세계적인 사고가 요청된다. <사상>은 실로 이러한 역사적 사명을 느껴 나서게 되는 바이므로 그 편집에 있어서도 특히 연구적이며 이념적인 것에 치중하였다.(<장준하문집 3>, 76쪽) 

장준하는 <사상> 창간호 3천 부를 찍어 세상에 내놓았는데, 주로 학자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조금 반응이 있었을 뿐, 대중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잡지가 나온 지 얼마 뒤 미국공보원의 문정관 슈바커가 장준하를 찾아오더니 <사상> 출판은 시기적절한 사업이지만 한국의 실정에서 그렇게 수준이 높은 잡지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미국공보원이 돕겠다고 말했다. 제2호부터 공보원이 2천 부씩을 사서 한국의 여러 기관과 주요 인사들에게 무상으로 배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힘을 얻은 장준하는 10월에 제2호 5천 부를 펴내서 미국공보원에 2천 부를 납품하고 나머지 3천 부는 부산시중에 내놓았다. 그런데 시판용으로 낸 3천 부 가운데 2천 부 이상이 반품되었다. 창간호를 샀던 독자들 대부분이 미국공보원이 무료로 준 <사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그 사실을 공보원 측에 알리고 앞으로 도움을 주려면 잡지를 사는 대신에 용지를 공급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제3호(11월호)부터 용지를 지원했다. 그러나 제3호도 1천 부 안팎이 팔리고 나머지는 되돌아왔다. 그 잡지는 미국공보원이 기증하는 것이라고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무가지(無價誌, 기증지)를 함부로 낸다는 것은 그것이 설혹 선전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잡지 경영에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후 일관해서 기증지를 내는 것을 매우 꺼리게 되었다. 비록 반품된 책이라 할지라도 그냥 파괴하여 제지회사에 파지로 넘길지 언정 무가로 내어 놓는 일은 없었다.(앞의 책, 77쪽)

<사상>은 제4호(1952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용지를 무상으로 공급받았는데도 판매가 부진해서 결손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문교부장관에게 사표를 낸 뒤 이미 마련되어 있던 <사상> 제5호의 원고를 들고 국민사상연구원을 떠났다. 사표가 몇 차례나 반려되었지만, 장준하는 그를 적극 후원하던 백낙준이 문교부장관직을 떠나자 혼자서 <사상>을 속간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야인이 된 백낙준을 찾아가서 <사상>을 계속 펴내겠다는 뜻을 전하자 그는 좋은 일이라고 격려하면서 얼마쯤 용돈을 주었다. 그 돈이 제5호 발행 준비금의 전부였다.

   
사상계

 

사무실이 없어서 다방에서 잡지 속간 준비를 하던 장준하는 뜻밖의 장벽에 부닥쳤다. <사상>의 발행인으로 되어 있던 국회의원이 제호를 인수하려면 3천만 원을 내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3천만 원이 아니라 단돈 3천 원도 없던 그는 난감했다. 몇몇 친구들과 의논한 끝에, 정태섭(당시 연희대 교무처장)의 제의에 따라 ‘사상’에다 ‘계’자를 더 붙여 제호를 <사상계(思想界)>로 정했다.

<사상>의 제호를 써주었던 서예가 오기석한테 장준하가 <사상계>의 제호를 써달라고 부탁했더니 그는 흔쾌히 응해주었다. 공보처 부산분실에 들러 판권 신청서를 제출한 장준하 앞에는 제작비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민과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리더스다이제스트> 한국어판 발행인이던 이춘우를 소개했다. <사상계> 창간 때문에 장준하가 겪고 있던 어려움을 들은 그는 원고를 보내주면 자기가 경영하는 조판소에서 작업을 맡아줄 것이고, 자신이 거래하는 인쇄소에서 책을 찍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원고와 출판계획 서류, 참고서적 등이 빽빽이 들어 있는 큰 가방을 들고 거리를 헤매던 장준하는 <사상계> 조판이 시작되자 <리더스다이제스트> 기자들이 외근을 나가서 비어 있는 책상 앞에 앉아 편집과 교정 일을 할 수 있었다. 혼자서 그 많은 작업을 다 할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아내 김희숙을 동원해서 교정을 맡기기로 했다. 경험이 전혀 없는 아내는 진땀을 흘렸다. 그럭저럭 조판을 끝내고 인쇄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난관이 장준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이춘우의 호의에 힘입어 조판도 인쇄도 외상으로 할 수 있었는데, 사진과 컷 등의 동판대(銅版代)만은 현금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판대는 제1차 화폐 개혁 직후의 돈으로 2천2백환이었다. 그때 장준하의 형편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그래도 이런 때 위급을 헤쳐 나가는 지혜는 남자보다 여자의 편이 우월하다고 그 후에도 때때로 기억하여 감탄하고 있지만 실로 그때 돈을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내자였다. 내자의 겨울 외투를 비롯하여 옷가지 몇 벌 있는 것을 내다 팔아 만든 것이었다. 그 어려운 피난통에 내자가 그렇게 돈이 될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알았던 것이지만 그보다도 나의 필요한 돈 2천2백 환을 내자가 나의 손에 쥐어 줄 때 비로소 그 의복가지들을 시장에 팔아 만든 돈이라는 고백을 나는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인쇄도 끝나고 제본까지도 다 끝났다. 그것이 1953년 2월 20일이었으나, 뜻밖의 사정이 생겨 3월 10일 에야 배본을 하였다.(앞의 책, 83~84쪽) 

나중에 한국의 진보적 지성을 대변하게 되는 <사상계>는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빛을 보게 되었다.

 

 

(16) 사상계 창간호 매진과 ‘등짐꾼 발행인’

 

어렵사리 창간한 <사상계>를 시중에 배포하고 집으로 돌아온 장준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잡지를 만드는 일에만 골몰하느라고 판매 문제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는데, 막상 창간호를 내고 보니 얼마나 팔릴는지 걱정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집에 들고 온 창간호를 뒤적이며 체제와 내용을 꼼꼼히 짚어 보았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네 권을 펴낸 <사상>보다는 발전한 흔적이 뚜렷했다.

<사상계> 창간호에는 대형 특집 ‘인간문제’가 실렸다. 장준하는 ‘권두언’에서 인간문제를 특집으로 꾸민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이다. 즉 인간은 복잡하고도 명료한 언어를 사용하며, 개념적·추상적·논리적인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 실현을 위한 의지적이며 적극적인 활동과 반성능력을 소유하였으며, 각종 문화 창조의 능력을 가진 자다. (···) 통일교육으로써 세계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유네스코 헌장에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므로 평화는 반드시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 정의 자유 및 평화를 지향하는 인간성에 대한 교육은 인간의 존엄을 위하여 불가결한 것이며 모든 국민이 서로 돕고 서로 관심을 가지려는 정신으로써 다해야 할 신성한 의무이다”라 하여 인간성 교육의 긴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침략자도 피침략자도, 통치자도 피통치자도, 악귀적인 착취와 억압을 감행하는 자도, 이 같은 착취와 억압을 당하는 자도, 정의의 깃발을 들어 만인을 복되게 하는 자도, 극악무도하여 만인을 해치는 자도, 위선과 사기와 모함과 중상을 일삼는 자도 모두가 인간인 한, 인간 문제는 무엇보다도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장준하문집 3>, 183~184쪽)

창간호 특집에 실린 글들은 ‘인간과 문화’(김계숙), ‘인간생활과 종교’(김재준), ‘동양인의 인생관’(배성룡), ‘인간에 대한 소고’(지동식), ‘인간과 교육’(임한영), ‘불교의 인생관’(권상로), ‘칸트의 인간관’(김기석) 등으로 내용이 다양했다.

배포한 창간호 3천 부 가운데 부산에 뿌린 1천 부만 그가 직접 관리하기로 했고, 나머지 2천 부는 <리더스다이제스트> 한국어판 발행인 이춘우가 지방 판매망을 이용해서 배본하기로 했다. 당시 그 잡지는 5~6만부를 발행하는 국내 최고의 인기간행물이었다. 

부산시내 서점들에 깔린 <사상계> 창간호는 사나흘만에 반 이상이 팔려 나갔다. 처음에 그 잡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던 서점들도 책을 보내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이춘우가 대구, 대전, 광주 등 다른 지방에 보낸 책들도 반품이 거의 없었다. 그는 창간호 판매 걱정은 접고 제2호(1953년 5월) 준비를 서두르라고 장준하에게 말했다. 빨리 원고를 넘겨주면 조판에 착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날마다 오전에는 원고 청탁과 편집을 하고 오후에는 서점으로 수금을 나가는가 하면 저녁에는 조판소에서 조판공들의 작업을 돕고, 밤 10시쯤 그들과 함께 대포집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인 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성실한 장준하의 태도를 본 조판공들은 <사상계> 원고만 넘어오면 다른 일들을 제치고 우선 조판을 해주었다. 장준하는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4평 남짓의 단칸방에 장준하 내외와 어린애, 그리고 두 동생이 함께 살았음)으로 돌아가서 편집 보따리를 펼쳐 놓고 이것저것 뒤적이다 이튿날 새벽 2시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사상계> 제2호 발간을 앞두고 장준하는 고민에 빠졌다. 창간호가 며칠 만에 매진된 데다, 제2호의 내용 가운데 ‘부산정치파동’을 다룬 것이 많아 시사성이 높아서 부수를 얼마로 할까를 정해야 했던 것이다. 그는 5천 부를 찍기로 결정하고 인쇄소를 물색했으나 당시 부산시내에는 대한교련의 두 개 공장 말고는 이렇다 할 만한 데가 없어서 삼륜차 두 대에 종이를 싣고 부산진에 있는 작은 인쇄소로 달려갔다. 5월호를 내야 하는 5월 10일까지는 겨우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한밤중에 삼륜차 운전사들이 차에서 내려준 종이 60연을 차례로 등에 지고 인쇄소로 옮겼다. 그 공장에서 사흘 동안이나 인쇄공들과 침식을 함께한 결과 5월 16일에야 5월호 견본을 손에 들 수 있었다. 

   
1955년과 1956년 초창기 사상계(思想界)를 이끌었던 장준하 사단. ©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는 배본을 마친 뒤 5월호를 들고 백낙준을 찾아갔다. 그는 잡지를 훑어보더니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정인보(1893~?)의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이라는 글을 사상계에 다시 연재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동아일보가 보관되어 있는 곳은 서울의 국립도서관밖에 없었다. 장준하는 이튿날 서울로 올라가서 무교동의 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간 뒤 두 해 남짓 만에 돌아간 서울은 전쟁의 참화를 입어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국립도서관에 가서 임시책임자 남상영과 사서 남영우의 도움을 받아 1925~1935년 동아일보에 실린 정인보의 글을 열람하기 시작했다 ‘그 문장이 어쩌면 그렇게도 유려한 문체로 흘러내려간 것인지 원고지로 옮겨 7백여 장이나 되는 글’을 장준하는 점심과 저녁도 거른 채 읽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 도서관 개관 시간에 맞추어 특별열람실에 들어가 즉시 필사에 착수했다. 첫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이틀간을 베껴 먼저 6월호 게재분으로 원고 3백 장을 아주 편집까지 하여 마침 인편이 있기에 부산에 있는 조판소에 상세한 지시 편지와 함께 보내 내가 돌아가기 전 조판을 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나머지를 7월호 게재분으로 모두 꼬박 닷새를 걸려 필사를 끝내가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하여 <사상계> 6월호에 58면, 7월호에 111면의 지면을 할애하여 전문을 게재할 수 있었다.(앞의 책, 96~97쪽)

서울에서 한 주 동안 일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간 장준하가 시내 서점들을 돌아다니며 <사상계> 제2호 판매 상황을 살펴보니 결과가 좋지 않았다. 창간호 판매부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6월호는 2천 부를 줄여 3천 부를 찍었다. 6월호를 배포하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5월호 발행부수의 절반이 넘는 2천5백 부가 반품되었다. 그때부터 장준하의 악전고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사무실도 직원도 없이 다방, 조판소, 인쇄소, 제본소 등을 전전하면서 7·8·9월호를 거쳐 10월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장준하를 항상 밀어주던 박기서가 고려노트라는 회사를 설립하려고 부산시청 앞의 2층건물에 7,8평 정도의 방 한 칸을 얻었다면서 한 구석을 그에게 내주었다. 처음으로 갖는 사무실이었다. 장준하는 싸구려 책상과 벤치 하나를 들여놓고 10월호를 편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0월호 인쇄에 착수하려던 때 정부가 서울로 환도(還都)한다는 결정이 발표되었다. 장준하는 10·11월호를 합병호로 낼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까지 그는 미국공보원(USIS)의 용지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던 브루노라는 사람이 합병호 인쇄를 앞둔 어느 날 ‘앞으로 상업잡지에 대해서는 원조를 끊기로 했다'는 방침을 전해왔다. 부산에서는 더 이상 <사상계>를 펴낼 수 없게 된데다 정부가 환도하므로 장준하도 세 해 가까이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큰 보람을 느끼던 그 도시를 떠나 서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장준하는 1953년 11월 20일 화물차량 40t짜리 한 개 반을 빌려 고려노트회사에서 인수한 인쇄지와 반품된 <사상계>를 싣고 서울로 떠났다. 

서울에 올라오자 우리는 종로 네거리 화신 앞에 있던 한청빌딩 4층에 여섯 평 반짜리 방을 빌려 짐을 풀고 12월호 편집에 착수하였다. 그로써 처음으로 곁붙이살이까지도 면한 완전 독점한 방 한 칸을 따로 쓰게 되는 셈인데 그때 우리 사상계사의 식구라야 유창균 형과 이 양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식구뿐이다. 오히려 방이 넓은 편이었으며 마침 <문학예술>이란 잡지를 발행하던 오영진 씨가 찾아와 사무실이 없으니 한쪽을 빌려달라 하여 그러자고 같이 쓰게 되어 쓸쓸하지 않고 십상 좋았다. 그때 그 편의 식구는 박남수 씨, 원응서 씨, 그리고 미스 김이라는 여 사무원 이렇게 세 사람이었으며 원응서 씨는 따로 중앙문화사라는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물론 사무실 임대료는 사상계사 단독 부담이었다.(앞의 책, 103쪽)

역사학자 김성식(1908~1986)은 1985년 7월에 쓴 글 ‘장준하라는 인물’에서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한국과 같은 정치 풍토에서 장준하와 같은 인물은 천의 하나로 드문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군정이 25년을 넘으려고 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또 그동안 국민들이 자꾸 왜소해 가는 이 마당에서 그와 같은 용기 있는 인물을 찾기는 촉도지난(蜀道之難)에 방불하다. 또 그에게는 객기도 있고 오기도 있어서 이 3기(氣)가 때와 경우에 따라 그의   언행에 계속적으로 나타났다. 화가 났을 적엔 “당신 마누라가 바구니 들고 콩나물 가게에서 방황하던 시절을 생각하라!”는 등 욱하는 기질을 숨기지 못했고, 판매 일선에서 연달아 반품되는 <사상계> 표지를 뜯고 재생공장으로 보내 잡지의 체면을 살리려고 애쓰던 곤경에서도 남에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던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오기, 그러나 모든 것이 그의 기질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용기에서 우러나온 것이다.(<장준하문집 1>, 9쪽)

 

(17) 지성인이 되려면 사상계를 읽어라

 

한청빌딩에 둥지를 튼 장준하는 1953년 12월호부터 이듬해 1·2·3월호까지 사상계를 어렵지 않게 펴낼 수 있었다. 그런데 4월호 조판을 앞두고 예상하지 못한 암초에 부닥쳤다. 사상계 총판을 맡고 있던 대한도서주식회사가 화재를 당해 수금이 일절 끊어졌던 것이다. <사상계>는 창간 뒤 처음으로 결간(缺刊)할 수밖에 없었다. 장준하는 6월에 가서야 4월호로 조판된 것을 6월호로 냈다. 그러나 7월호를 낼 일이 암담하기만 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7월호의 조판은 물론 앞으로도 계속 조판을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어떤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그는 서대문구 교남동에 배화사라는 조판 전문 시설을 갖추고 있던 조영근이었다. 그는 “사상계 같은 지성지를 출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다”면서 있는 힘을 다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상계>가 순탄하게 발간을 계속하자  전문잡지인 <교육문화>, 학술지인 <역사학지>, <동방학지>, <진단학보>, <철학>, <국어국문학>, <영어영문학> 등이 사상계사에 제작을 의뢰했다. 장준하와 직원 두 사람만으로는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때 강봉식(나중에 고려대 교수), 전택부(나중에 YMCA 총무), 정덕희(뒤에 명지대 교수)가 새 식구로 들어와 장준하를 도왔다. 

<사상계> 1954년 8월호는 창간 이래 최대의 정치적 도전을 감행했다. 사태의 발단은 이승만 정부의 국무총리 백두진이 그해 4월 27일에 ‘훈령 제8호’로 발표한 ‘한글간소화안’이었다. 이승만은 그로부터 한 달 전인 3월 27일 ‘3개월 이내에 한글을 간소화 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담화문을 발표한 바 있었다. 

이전에 우리 국문학자들이 임시로 교정해서 철 주자판을 만들어 신·구약과 기타 국문서에 쓰던 방식에 따라서만 국문을 쓰게 할 것이고 이를 공포 후 석 달 안에 한글을 교정해서 써야 할 것이다. 본래 우리 국문은 배우고 익히기 쉬운 글인데도 학자들이 공연히 어렵게 만들어 놓았으니 통탄할 일이다. 반드시 원모습대로 환원되고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학자들에게 누차 이 일을 종용하였는데도 듣지를 않아 부득이 명령으로 한다. 모든 정보기관과 나의 이 뜻을 따라 문명 진보에 장애가 되지 않는 쉬운 글로 간소화하라.(<장준하문집 3>, 108쪽)

이승만의 담화문은 전제군주의 어명이나 다름없는 어조를 띠고 있었다. 국가의 어문정책을 3개월 안에 고쳐야 한다는 강압적 명령이 나오자 언론계, 교육계, 문화계 등 여러 부문에서 반대의견이 빗발쳤다. 문교부 장관 김법린과 편수국장 최현배는 사표를 냈다. 이선근이 문교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한글간소화안’을 밀어붙이자 국회는 7월 9일과 10일 그를 불러 질의·응답을 거친 뒤, “한글간소화안은 정부, 국회 문교위원회, 학술원으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대책을 강구하여 국회에 보고하도록 한다”는 동의안을 가결했다. 그러자 이승만 정부는 더 이상 한글간소화안을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장준하는 <사상계> 8월호 ‘권두언“에 아래와 같이 썼다.

정치가 문화를 위하여 있어야지 문화가 정치를 위하여 있어서는 안 된다. (···) 만약 국가가 개인의 인격을 지배하고 문화의 진로를 강요하거나 방해   한다면 개인은 국가의 종이 되며 문화는 그 자율성과 독자성을 잃고 완전히 소멸되고 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글간소화안에 대한 전번 제21차 국회 본회의의 결의는 민족문화 수호를 위한 빛나는 기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첫째로 이 결의는 입법부 전체가 행정부의 잘못을 솔직히 지적하여 그 시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던 일이며, 둘째로 민의원 제위는 정치와 문화 관계의 올바른 자각 하에서 민족문화 수호를 위하여 용감하게 싸웠던 것이다. 

특히 자유당은 이 문제에 대하여서도 정부안을 무조건 지지하게 될 것이라 고 생각했던 국민의 예상을 뒤집어엎고 반대당과 합세하여 정부안을 반대 시정하고 건설적인 건의로써 사태를 수습하려고 애쓴 것은 잃었던 국민의 신임을 다시 찾을 만하다.(앞의 책, 108~109쪽)

한글간소화안이 국회의 결의 때문에 철회되기는 했지만 독재로 치닫고 있던 이승만이 앞으로 비슷한 횡포를 부리는 것을 막는다는 목적으로 <사상계>는 9월호에 ‘독립투쟁에서 본 한글운동의 위치’라는 제목으로 대형 특집을 실었다. 당시 지면이 226쪽이었는데 130쪽을 특집에 할애했던 것이다. ‘한글의 총괄적 역사’, ‘일제의 탄압과 한글투쟁’, ‘건설기에 들어선 한글 투쟁에서 최현배 선생의 업적’, ‘행정부와 입법부의 성스러운 결투’ 등이 주요한 내용이었다. 그 특집은 ‘민족문화 발전을 좀먹는 어리석음을 다시 범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상계>는 1954년 11월호에서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경장을 소재로 한국의 근대화문제를 거론했다. 12월호에 실린 천관우의 글 ‘갑오경장과 근대화’는 8·15 이후 근대화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논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상계>가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문화적으로도 진보적인 정론을 펼쳐나가자 사회 각 분야에서 ‘지성인이 되려면 사상계를 읽어라’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조숙한 고등학생들이 사상계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모습도 더러 볼 수 있었다.<사상계>는 1955년 들어 ‘장준하 1인 편집 체제’를 마감했다. 주간이 주재하는 편집위원회 체제를 구성했던 것이다. 초대 주간에는 소설가 김성한이 취임했고, 편집위원으로는 발행인 장준하를 포함해서 엄요섭, 홍이섭, 정병욱, 정태섭, 전택부, 신상초, 강봉식, 안병욱이 위촉되었다. 1월 6일 처음으로 열린 편집위원회는 ‘편집 방침’으로 ‘민족의 통일 문제’, ‘민주사상의 함양’, ‘경제 발전’, ‘새로운 문화의 창조’, ‘민족적 자존심의 양성’을 내세웠다. 

1955년 1월호부터 <사상계>는 학술적 연구논문, 각 분야의 편론, 국내외 정세 전망, 문예란 등 다양한 내용을 담은 종합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전체 지면 190쪽 가운데 47쪽이 문학란이라는 사실은 발표할 매체에 굶주려 있던 문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편집위원회는 다달이 특집을 엮되, 지면의 5분의 1 이상을 써도 좋다는 방침을 정했다. 

   
사상계 시절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사상계>는 2월호를 문학 특집으로 엮으면서 ‘사상계신인상’ 제도를 신설했다고 사고(社告)로 알렸다. ‘문학계의 고질화한 파벌 의식을 타파하고 올바른 민족문화의 문을 열어보자’는 뜻이었다. 그 이후 ‘사상계신인상’이라는 관문을 통해 유능한 문인들이 배출되었다. 소설가로는 박경수(1955) 한남철(1958), 송상옥(1959), 서정인(1962), 박순녀(1964), 이청준(1965)등 14명, 시인으로는 황운헌(1958), 강계순(1959), 강태열(1960), 임종국(1960) 등 21명이었다. 

<사상계>는 창간 2주년을 맞은 1955년 4월호에 ‘현대사상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특집을 실었다. 전체 지면 230쪽 가운데 11쪽을 차지한 파격적 편집이었다. 

대만 국립중앙대학에서 여러 해 동안 중국사를 연구하던 김준엽이 그해 3월에 귀국했다. 그는 1948년에 고국으로 와 고려대에서 잠시 강의를 하다가 대만으로 돌아가서 공부를 마치고 온 것이었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중국의 유명한 고사(故事)에 나오는 ‘관포지교(管鮑之交)’에 못지 않은 내력을 가진 평생동지였다. 김준엽은 5월호와 6월호에 ‘중국 국민정부는 이렇게 하여 몰락했다’는 논문을 연재했다. ‘국민정부가 그 넓은 중국 본토를 송두리째 중공에 내어주고 대만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사실(史實)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명문’이었다. 그는 그해 6월 편집위원으로 <사상계>에 참여했다. 

<사상계> 1955년 6월호는 ‘학생에게 보내는 특집’으로 꾸며졌다. 백낙준, 유진오, 최현배, 홍이섭 등 30여 명의 석학과 학계 중진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그 이전까지 발행부수 3천을 고수하던 <사상계>는 6월호를 6천 부나 찍었다. 부수 확장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로 한 것이었다. 여러 대학과 주요 중고등학교, 그리고 문화기관들에 선전포스터를 붙이고 전단 30만 장을 뿌렸다. 6월호는 출간 한 주만에 매진되어버렸다. 그래서 재판으로 2천 부를 더 찍었다. 그것도 그 달 안에 모두 팔렸다. 

그 무렵 <사상계>의 지향에 대해 장준하는 이렇게 기록했다. 

<사상계>의 독자는 대학생과 30대 이하의 젊은 지성인으로 주축을 삼는다. 여기에 뿌리를 박는다. 일본 교육으로 자란 기성 지식인들은 우리말 잡지를 손에 들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글은 외면한 채 일본글만으로 읽고 쓰던 사람들이기에 일본글에 대한 매력은 알면서도 우리글의 맛은 모른다. 그러니 그들이 잡지라고 즐겨 손에 쥐는 것은 일본말 잡지 <문예춘추>나 <중앙공론>이다.

한편 우리말 집필자들도 우리말 구사력이 심히 부족하다. 우리말로 글을 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상계> 초기에 발표된 글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이 일본말을 직역하여 놓은 것 같은 딱딱하고 맛없는 문장들이다.

그러니 독자는 일본 교육을 받지 않은, 일본말을 모르는 젊은층에서 찾아야 하고, 한편 필자들을 자극하여 읽을 맛이 나는 아름다운 우리 문장을 쓰도록 성장시켜야 한다.(앞의 책, 118·119쪽)

이런 필요에 따라 장준하는 1955년 8월호 권두에 ‘사상계 헌장’을 발표했다. 그는 매호마다 권두를 장식한 헌장을 ‘많은 독자들이 거의 암송을 하다시피 감명 깊게 읽었다’고 회상했다. 헌장 전문은 아래와 같다.

자유와 평등을 근본 이념으로 하는 근대적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봉건사회에서 직접 제국주의 식민지 사회로 이행한 우리 역사는 세계사의 조류와 격리된 채 36년간 암흑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그것은 자기 말살의 역사요, 자기 모독의 역사요, 노예적 굴종의 역사였다. 

다행히 제2차 대전의 결과로 이 참담한 이민족의 겸제(箝制)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자기 광정(匡正)의 여유를 가질 겨를도 없이 태동하는 현대의 진통을 자신의 피로써 감당하게 된 것은 진실로 슬픈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자유의 적을 처부수고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또다시 역사를 말살하고 조상을 모독하는 어리석은 후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자기의 무능과 태만과 비겁으로 말미암아 자손만대에 누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이 역사적 사명을 깊이 통찰하고 지성일관(至聖一貫) 그 완수에 용약 매진해야 할 줄로 안다. 

이 민족 사생관(死生關頭)에서 우리는 과연 유신 창업의 기백과 실천이 있었던가? 사를 위하여 공을 희생한 일은 없었던가? 정치인은 과연 구국대업에 헌신하고 발분망식(發憤忘食) 하였던가? 민은 과연 대를 위하여 소를 버릴 용의가 있었던가? 우리는 서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음을 지극히 유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지중(至重)한 시기에 처하여 현재를 해결하고 미래를 개척할 민족의 동량은 탁고기명(托孤寄命)의 청년이요, 학생이요, 새로운 세대임을 확신하는 까닭에 본지는 순정무구한 이 대열의 등불이 되고 지표가 됨을 지상의 과업으로 삼는 동시에 종으로 5천 년의 역사를 밝혀 우리의 전통을 바로잡고 횡으로 만방의 지적 소산을 매개하는 공기(公器)로서 자유·평등·평화·번영의 민주사회 건설에 미력을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앞의 책, 119~120쪽)

<장준하평전>을 쓴 김삼웅은 ‘사상계헌장’이 ‘당대의 명문’으로서 ‘뒷날 4·19혁명 당시 대학의 학생선언문이 여기서 영향 받은 바 적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18) 사상계, 함석헌을 영입하다

 

장준하는 1955년 <사상계> 10월호부터 판매부수를 1만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종래 200쪽 안팎으로 펴내던 지면을 300쪽으로 늘렸다. 명성이 높은 필자들을 30여 명이나 동원해서 내용을 더 충실하게 만든 뒤 60만 장쯤 전단을 돌렸다. 그 효과가 차츰 나타나자, 11월호를 낼 무렵에는 <사상계 월보>를 비매품으로 발행해서 <사상계>를 소개하는 한편 논설과 시, 콩트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사상계>는 창간 33개월 만인 1955년 12월 ‘1만3천 부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그해에는 장준하와 <사상계>의 역사에서 공적이자 흠집이 될 수도 있는 일이 벌어졌다. 10월에 제정한 ‘동인문학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장준하는 이 상을 만든 동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동인문학상은 한국문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인 김동인 씨를 기념하고 우리 문학의 순화 발전에 기여하는 일단으로 제정한 상이다. 1년간을 통하여 국내 주요 신문 잡지에 발표된 신인 창작 단편소설 중에서 심사위원회를 통과한 한 편에 시상하기로 하며 신인의 규정은 문단에 진출한 지 10년 이내의 작가로 하였다.”(앞의 책, 121쪽)

김동인(1900~1951)이 ‘한국문학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1919년 일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동인지인 <창조>를 자비로 출판하면서 창간호에 실린 ‘약한 자의 슬픔’이라는 단편소설을 통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같은 작품을 통해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양식을 확립하고, ‘광염 소나타’(1929), ‘붉은 산’(1932) 등의 간결한 문체와 양식적 완결성으로 순수문학의 토대를 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김동인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이른바 ‘성전(聖戰) 종군작가’로 중국 임둔 지방의 일본군 ‘위문’에 나섰으며, 1942년부터는 ‘내선일체’를 외치거나 ‘성전’을 찬양하는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44년 8월부터 12월까지에는 일본 역사를 소재로 한 장편 <성암(聖巖))의 길>을 잡지 <조광>에 연재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장준하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친일문인에 속했던 김동인을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교회 장로의 아들’로 같은 기독교 인이라는 것 이외에는 장준하가 적지 않은 상금을 내걸고, 그를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한 이유를 어디서도 찾기 어렵다. <사상계> 창간 이래 필진의 상당수가 친일경력의 소유자들인 것은 당시 한국 지식인 사회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동인문학상’ 제정만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장준하평전>, 363쪽)

1967년까지 <사상계>의 동인문학상을 받은 작가 13명 가운데는 극우보수적 문인도 있었지만 손창섭, 이범선, 남정현, 이호철, 송병수, 김승옥, 최인훈, 이청준처럼 역사와 현실에 충실한 작품을 쓴 이들이 다수였다. 1968년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를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어진 동인문학상은 1979년부터 동서문화사가 주관하다가,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로 넘어갔다. 

<사상계>는 1956년 1월부터 정기구독제를 실시했다. 회사 측은 <사상계 월보>를 받아 보는 이들에게 ‘독자 3배가 운동’에 참여해 달라는 서신을 발송하는 한편 1월호에 사고(社告)를 냈다. 3개월, 6개월, 9개월, 1년 단위로 예약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함께 지사·지국·보급소 설치규정도 발표했다. 그때부터 다달이 3천 부 가량이 더 팔려 나갔다. 

1956년은 <사상계>가 재야의 거목 함석헌(1901~1989)과 인연을  맺은 뜻 깊은 해였다.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3·1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을 당했다. 그는 2년 뒤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는데 거기서 평생의 스승 유영모(1890~1981, 교육가, 종교인)를 만났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이듬해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집회’에서 무교회주의를 처음 알게 되면서 거기에 심취했다. 1928년 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 귀국해서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수신(修身)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34~1935년에 그는 동인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나중에 ‘뜻으로 본 조선역사’로 개칭)를 연재했다. 1942년 5월 그의 친구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쓴 글이 문제가 되어 일본 경찰이 수사에 나서 관련자들을 체포하던 때 그도 붙잡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복역했다. 함석헌은 8·15 해방 뒤 신의주에서 일어난 ‘반공’ 학생시위에 참여했다가 북한 당국에 투옥되었으나 1950년 6월 전쟁이 터지자 북한을 탈출해서 부산으로 내려갔다. 

   
장준하 '사상계' 시절 ©장준하기념사업회

 

1955년 말, 당시 연희대에서 철학 강의를 하면서 <사상계> 교양란 편집을 맡고 있던 안병욱이 함석헌에게 원고를 청탁해보자고 장준하에게 제안했다. 안병욱은 신촌 이화여대 앞에서 작은 셋집에 살고 있던 함석헌을 자주 찾아가더니 12월 초순에 원고 한 편을 받아 왔다. 제목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 원고를 받아든 장준하는 ‘사상계가 교회 잡지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제목의 글을 실을 수 있겠는가’ 하고 걱정을 했다. 그러나 원고를 정독해 보니 그 글은 현실 교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기독교와 관련 있는 일부 교직자들을 제외한 일반 독자들이 절실하게 느끼는 문제들을 실감 있게 파헤치고 있었다. <사상계> 1956년 1월호에 실린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기 기독교라 하는 것은 천주교나 개신교의 여러 파를 구별할 것 없이 다 한데 넣은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말은 해방 후 10년 동안 그 교회가 걸어 온 길을 주로 역사적 사회적인 입장에서 보고 하는 말이다.

전문적인 학적(學的)인 비판은 못 되고, 그런 것을 할 능력도 없고, 그러나 그런 깊고도 날카로운 공정한 비판이 나오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하는, 민중의 한 사람의 상식적인 소감이다.(126쪽)

‘비판의 필요’, ‘처음의 예언’, ‘예언’, ‘교파 싸움’, ‘성신 운동’이라는 소제목으로 기독교의 역사와 현실을 짚어보고 비판한 그 글은 ‘상식적인 소감’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언이었다. 함석헌은 글의 ‘맺음’에서 교회를 강렬하게 질타하면서 대안을 제시했다.

 (···) 교회의 증상은 고혈압이라 진단할 수밖에 없다. 뚱뚱하고 혈색도 좋고 손발이 뜨끈뜨끈한 듯하나 그것이 정말 건강일까? 일찍이 노쇠하는 경향 아닌가? 그러기에 이렇게 혼란해 가는 사회를 보고도 아무 용기를 내지 못한다. 전쟁이 났다면 기독교의용대나 조직해 불신자로부터는 병역기피라는 비방이나 듣고 수많은 청년을 양심의 평안도 못 얻고 육신의 생명도 못 누리고 죽게 하고 성직자는 먼저 구해야 한다고 그 가족은 먼저 도망을 하고 신도는 또 그렇다고 비난을 하고, 교회당에 피난민이 오면 신자를 먼저 들이고 불신자를 막고, 구호물자가 오면 그 때문에 싸움이 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미끼로 전도를 하려 하고, 그리고 선거를 한다면 누구를 대통령으로 써라 누구를 부통령으로 써라 하고 기독교연합을 하여 추천을 하는지 매수를 하는지 하고, 교회를 지반으로 정당운동이나 하고, 기독교학교는 남   보다 못지않게 학생을 착취하고 있을 뿐이지 이 역사를 세우려 기독적인 입장에서 높은 이상을 주장하는 커다란 사상적인 노력도, 기울어져가는 집을 한 손으로 당해보려는 비장한 실천적인 분투가 힘있게 나오는 것도 없다. (·····)

죽은 누에는 자기의 힘은 아닌 신비에 의하여 변화해 보아 영광스러운 생명으로 나오는 날이 올 것이요, 그때에 이때껏 보호와 압박의 일을 기이하게 겸해 하던 집을 대담히 깨치는 날이 올 것이다. (···) 적어도 최후로 스스로 양보해 열리는 겸손과 아량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때까지의 실패가 그 한 일로 인하여 자랑으로 살아날 수 있으나, 만일 그때에도 역시 고혈압의 버릇을 그대로 고수해 나오는 새 생명을 질식케 하는 일이 있다면 멸망이 있을 뿐이다. 탑이 높아가는 석조교당 밑에, 그 중압 밑에서도 산 신앙이 있다면 그것을 들치는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은 산 대기를 마신다는 것이다. 고치 속에 있는 번데기가 죽지 않았다가 변화하려면 산 공기와 일광 속에 있어야만 하는 것 같이 중압하는 교회당의 무게 밑에서도 생명의 씨가 살려면 역사적 대세의 분위기를 마셔야 할 것이다. (139~140쪽)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56년 전 <사상계>에 실렸던 이 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함석헌의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 글 때문에 <사상계> 판매부수가 수천이나 늘었다. 그런 상황에서 천주교 신부 윤형중은 함석헌의 글에 대한 반론을 <신세계>라는 종합잡지에 실었다. 

함 선생은 일부 기독교도들의 비행이나 경거망동을 기독교 전체에 뒤집어 씌우면서 “지금 우리나라에 정당한 사업은 양심적으로 될 수 없다, 이 사회의 정치 경제의 조직이 권력 없는 자의 소득을 부정하게 빼앗아서 상층계급에 주도록 되었고, 사회를 자세히 관찰한다면 거의 죄악적인 제도가 합법적인 가장구조(假裝構造)를 가지고 되어 가며, 미국의 원조도 미국의 자본주의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약탈자와의 사이에 서 있어 그 울타리 혹은 충돌을 피하는 스프링 노릇을 하는 것이다. 정당한 보수 하에 신부·목사 노릇을 한다 할지 모르나 그 정당은 뉘 정당인가? 하나님의 정당인가? 자본주의 정당인가?” 등 독설을 퍼부었다. 함 선생이 시시비비로 비판한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침소봉대로 나가면서 일부의 것을 전부에게로 일반화 시킴은 옳지 못하다. (<장준하문집 3>, 126~127쪽)

장준하는 윤형중의 반론에 대해 “함 선생님의 글은 기독교의 관련 있는 일부 교직자들을 제외한 일반 독자 즉 객관적으로 읽어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침소봉대가 아니라 현실의 절실한 문제점들을 너무도 실감 있게 파헤쳤다는 데서 너무도 공감을 주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19) 함석헌의 ‘민중’과 ‘씨알’

 

장준하는 1956년 2월 중순 안병욱의 안내로 함석헌이 세 들어 사는 집을 찾아갔다. 1월호에 실린 글 ‘한국 기독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할 겸 앞으로도 기고를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함석헌을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만 그의 이름과 ‘도깨비’라는 별명은 어릴 적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장준하가 다니던 중학교가 함석헌이 교사로 있던 평북 정주 오산학교의 바로 이웃인 선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중학생 시절에 들은 함석헌의 일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다. 

동맹휴학이 자주 일어나던 오산학교에서 어느 날 학생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주먹깨나 쓰던 학생들은 평소 좋지 않게 보아오던 교사 몇 명을 때려준다면서 교무실로 몰려갔다. 그것을 알아차린 교사들은 모두 재빨리 피해버렸다. 함석헌 혼자만 태연히 앉아 있다가 학생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냉정을 되찾은 학생들은 나중에 함석헌을 찾아가서 “다른 선생들은 모두 피하셨는데  선생님은 피하지 않고 계시다가 매를 맞으셨다는데 무슨 까닭이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 수양이 모자라서 성인들처럼 너그러울 수가 없어. 맞은 것이야 별 것 아니지만 나를 때리는 학생이 누군지 알면 앞으로 그 학생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좋을 수가 없는 게 아닌가. 그래 나에게 손찌검을 하는 그 학생의 얼굴을 안 보려고 눈을 가린 것이지.”(<장준하문집 3>, 128쪽)

장준하가 처음으로 만난 함석헌은 ‘퍽 수줍어하는 잘 생긴 노인’이었다. 장준하가 <사상계> 발행 취지를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사상계를 선생님이 직접 하시는 잡지라고 생각하시고 계속해서 글을 써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그는 “글쎄요” 하면서 미소를 띨 뿐이었다.

그 이후 함석헌은 <사상계>에 계속 원고를 보내왔다. 1957년 3월호에 실린 그의 글 ‘할 말이 있다’는 일대 ‘사건’이 되었다. 

(···) 나는 아무 것도 못 되는 사람이다. 그저 사람이다. 민중이다. 민(民)은 민초라니 풀 같은 것이다. (···) 나는 풀을 먹고 살아 남의 밥이 될지언정 누구를 내 밥으로 하지는 않는다. 모든 생명이 밑에 깔렸건만 또 아무리 잘 나고 아름답고 날고 긴다 하던 놈도 내 거름으로 돌아오지 않는 놈도 없더라. (·····)

우리나라 역사는 벙어리 역사다. 무언극이다. 이 민중은 입이 없다. 표정이 없다. (···) 그러나 민중이 무표정이면 무표정일수록 구경하는 격이 되면 될 수록 특권자들의 싸움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고 압박은 더욱더 꺼림없이 하게 된다. 그러면 비겁한 민중은 더욱더 무표정한 구경꾼이 됐다. (···) 무언극이라니 생의 가장 적은 벗댐이다. 생명은 가만 못 있는 것, 말을 해야 할 터인데, 하면 죽을 것이므로 하지도 아니 하지도 못하는 것이 무언극이다. 꿈틀거림이다. ‘죽기 전 한 번 움직거림’이다. 이런 음성(陰性)의 역사가 어디 있나? 독자여, 그대와 나는 다 이런 음성의 역사에서 같이 나온 존재이다.

이 음성의 벗댐이 풍수설로도 되고 ‘정감록’으로도 되고 ‘간다 노자’ ‘아리랑’으로 되고 나라는 우리나라냐 너희 나라지, 싸움을 하거나 말거나 우리와 관계가 없다, 나라는 너 될 대로 되라, 해라, 우리는 우리의 이 구차한 모가지 하나를 안구는 것과 새끼를 치는 것을 단 하나의 일로 삼겠다 하는 태도로 돼버리다가 그래도 생명의 명령을 마지막까지 어길 수 없어서 그래도 사람이어서 터져 나온 것이 홍경래요, 최제우요, 전봉준이었다. (앞의 책, 131~133쪽)

이 글에서 함석헌은 민중에 대해서, 그 중에서도 젊은이들을 보고 ‘할 말이 있다’고 외친다고 했다. 마치 민중운동이나 봉기를 선동하는 듯이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이 글이 발표되자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시원하고 통쾌하다, 독설이 너무 심하다, 너무 독선적이라는 등 특히 지식인들이 다투어 견해를 밝혔다. 그런데 이번에도 신부 윤형중이 대표적인 반론자로 나섰다. 그는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라는 제목의 글을 <사상계> 1957년 5월호에 실었다. 그는 이 글의 결론 부분에 이렇게 적었다.

복음서를 손에 들고서 천당 지옥도 믿지 않는 미지근한 함 선생이요, 현실의 모든  방면에 대하여  그처럼 지독한 불평과 불만을 품고 있는 함 선생이면 복음서와 함께 그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현행 질서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공산당에 본격적으로 입당함이 여하?

그렇다고 나의 이런 말을 공산당에 입당을 권고했다고 함석헌 식으로 알아 들을 것은 아니다. 함 선생이 흐리터분한 이론보다는, 바르지는 못하지만 공산당의 이론이 더 분명하지 않으냐는 말에 불과하며 함 선생이 그 괴상한 태도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나아간다면 아무리 복음서를 들고 있을지라도 경찰당국으로부터 공산당의 오열(五列)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받게 되리니 조심하란 말에 불과하다.(손세일 편, <한국논쟁사 1>, 1976, 280쪽)

함석헌과 윤형중의 논쟁은 <사상계> 독자들은 물론이고 지식인 사회에서도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사상계>는 그 덕분에 월 판매부수가 4만까지 올라갔다. 

함석헌은 <사상계> 1957년 6월호에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거기에는 씨에 대한 그의 생각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나는 할 말이 있다면 민중에게 있다. 나는 돈도, 감투도, 이름도 없는 무식한 민초의 하나다. 무연한 들의 풀들이 바람이 불면 춤을 추어도 같이 추고   비가 오면 울어도 같이 울듯이, 나는 씨알(민중)의 한 알갱이로 울고 웃고   하고 싶은 사람이지, 말할 것이 있다면 그 하나님의 씨알, 역사의 씨알에 대해서지 어느 개인과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천하의 신부가 다 떠들어도 말하고 싶은 생각 없다. 그들은 다 교회라는 제도 밑에, 교황이라는 낮도깨비 앞에 제 인격의 자존성을 내놓고, 의지의 자유를 빼앗기고, 판단의 자유를 팔아버린 사람들이니, ‘제 말’이라고는 한 마디를 할 수 없는 이들이다. 제 말이 없는 사람들에게 종교가 무슨 종교요, 진리가 무슨 진리일까? 그들과 씩둑깍둑 할 필요가 없고, 말을 한다면 그 꼭지 되는 교황과 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로마 교황더러 와서 말하라 하라.

그러나 민중아, 하나님의 발가락인 민초야, 너 보고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제 피와 땀을 흘려 번 것을 빼앗기고도 합법적이라는 한 마디 때문에 어디 가 말도 못하는 농사꾼 노동자들, (···) 미움과 업신여김만 받는 타락자들, 망나니들, 소매치기, 깡패, 거지들, 양갈보들, (···) 독서인들, 그리고 자유사상인들, 판단하라. 나와 윤형중 신부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정말 못 할 말을 했나? 내가 그대들을 속였나?(앞의 책, 282~283쪽)

함석헌의 거칠 데 없는 ‘독설’에 대해 윤형중은 <사상계> 7월호에 ‘함석헌 씨의 답변에 답변한다’는 반박문을 기고했다. 그는 함석헌이 ‘난치의 무분별증’에 걸렸다고 비판하는 한편  ‘회개하라 지옥은 있다’고 경고하면서 이렇게 글을 맺었다.

함 선생이 처음부터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왔다면 별 문제이었겠지만, 그처럼 천주의 존재를 알고 또 복음서를 손에 들고 읽어보고서도 천당 지옥을   믿지 않는다면 이는 천주께 대하여 지독한 불경이요, 불신일 것이다. 고로 만일 바른 신앙에로 회개함이 없이 지금 그런 상태로 세상을 떠난다면 그 영혼은 틀림없이 지옥으로 통행할 것을 예언하노니, 그때 가서 회상하면  ‘이 <사상계> 지상에 윤 신부와 논전하던 때는 만복시대였구나!’ 느끼겠지만, 때는 이미 늦은 다음이리라. 나의 이 말을 함석헌 식으로 알아들어 지옥 가라는 축원으로는 절대로 알아듣지 말지니 ‘바른 신앙에로 회개하지 않으면’이란 조건이 엄연히 붙어 있는 연고이다. 

성서에 나오는 ‘천당’ ‘지옥’이란 말들을 무슨 ‘비유’나 ‘상징’이겠지 하고 자의(恣意)로 해석하지 말지니, (···) 오주(吾主) 예수 친히 창립하신 천주교회만이 유일한 증인이요, 또 교사이니라. 천당 지옥의 객관적 실재는 5억의 가톨릭 신자 교역자들이 일치하여 주장하는 바이요, 유구 2천년 가톨릭 역사가 입증하는 바이며, 수백만 가톨릭 순교자들의 선혈이 단언하는 바이니라!(앞의 책, 324~325쪽)

<사상계>에서 함석헌과 치열한 논쟁을 펼치던 윤형중이 보수적인 성직자의 면모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의 종교활동과 삶에서는 많은 사제들과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인물이었다. 1903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그는 1918년 예수성심학교에 입학해서 1930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서울 중림동 본당의 보좌신부로 사목을 시작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가톨릭청년사 사장에 임명되어 <경향잡지>와 <경향신문>을 운영했다. 1954년 가톨릭대학 의학부장, 1961년 복자수녀회 지도신부로 일하면서 많은 사회 인사들을 천주교에 귀의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윤형중은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극으로 치닫던 1974년 9월에 결성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신부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같은 해 12월에 창립된 민주회복국민회의에 함석헌과 함께 참여해서 ‘반유신독재 운동’에 앞장섰다. 1957년의 <사상계> 논쟁 당시 일면식도 없던 그와 함석헌은 17년 뒤에 동지가 되어 같은 길을 걸어간 것이다. 윤형중은 지병인 폐암으로 1979년 6월 15일 76세로 ‘선종’하기 전에 전 재산을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에 기증했다. 

<사상계>를 통한 논쟁에서 감정에 앙금이 생겼을 법도 한 함석헌과 윤형중이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20) 이승만에 정면 도전한 사상계

 

<사상계>는 광복 13주년이 되는 1958년 8월호를 기념특집으로 꾸몄다. 특집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함석헌의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였다.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라는 제목의 그 글은 2백자 원고지로 1백여 장이나 되는 긴 분량이었다.

 

우리가 일본에서 해방이 됐다고 하나 참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던 대신에 지금은 둘 셋이다. 일본시대에는 종살이라도 부모 형제가 한집에서 살 수 있고 동포가 서로 교통할 수 있지 않았나? 지금은 그것도 못해 부모 처자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남한은 북한을 소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그러니 6·25는 그 꼭두각시의 놀음이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이 없지 않은가. (<장준하문집 3>, 24~25쪽)

 

함석헌은 “6·25 전쟁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승만과 소련 중공을 배경으로 한 김일성의 싸움이었지 민중이 한 싸움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멸공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는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했을 때 이승만은 임진란 당시 선조가 그랬듯이 국민을 버리고 ‘민중 잡아먹고 토실토실 살이 찐 강아지 같은 벼슬아치’들과 ‘여우 같은 비서 나부랭이들’만 끌고 한밤에 한강을 건너 도망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승만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기에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글이었다.

 

함석헌은 “국민들은 정부를 신용하지 않았다. 전쟁을 정권 쥔 자들의 일로 알았지 국민의 일로 알지 않았다. 사실 국민이야 싸울 아무 이유가 없지 않은가”라고 지적한 뒤 “미국 소련한테 속아 한 전쟁 아니냐?”고 물었다. ‘김일성이 주도한 남침’을 강조하던 이승만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함석헌의 글은 아래와 같이 계속된다.

 

속아서 그 앞잡이 된 것은 정권 쥔 자들이요 속은 것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렇게 큰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날 아침까지 몰랐으니, 정말 몰랐던가? 몰랐다면 성의 없고 어리석고, 알았다면 국민을 팔아넘긴 악질이다. 그리고는 밤이 깊도록 서울을 절대 아니 버린다고 공포하고 슬쩍 도망   을 쳤으니 국민이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다. 저희끼리만 살겠다고 도망을 한 것이지 정부가 피난한 것은 아니었다. 

 

문서 한 장 도장 하나 아니 가지고 도망한 것이 무슨 정부요 관청인가? (···) 이렇게 정부는 국민을 기만하여 일백만 백성을 살상하고 강산을 온통 잿더미로 만드는 전쟁을 하고도 오매간에도 못 잊을 그 전쟁을 치른 지 지금 8년째나 되건만 정부 사람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나라의 뿌리인 농촌은 나날이 시들어가는데 도시에는 한 집 건너 보석상, 두 집 건너 요리집 그리고 다방, 땐스홀, 연극장, 미장원, 또 그리고 더욱 나라 망치게 하는 외국원조 받아다가 저희들 배나 채워 아무 것도 없던 사람들도 벼슬 한 번 하고 고급장교만 되면 큰집을 턱턱 짓고 (···) 이것이 제 동포의 시체 깎아먹고 살아난 사람들인가?

 

선거를 한다면 표를 노골적으로 내놓고 사고 팔고 억지로 하고, 내세우는 것은 북진통일의 구호뿐이다. 내 비위에 거슬리면 빨갱이라고 협박 공갈을 하니 될 말이냐? 통일은 반드시 칼이라야만 되느냐? 그렇게 사치한 벼슬아   치들이 칼은 무슨 칼이 있느냐?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런 허튼 수작들   을 버리고 깨끗이 지난 잘못을 회개하여 진정으로 나라 위해 일하라. (앞의 책, 25~26쪽)

 

   
사상계 시절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나는 1958년에 중학교 2학년생이었으므로 <사상계>라는 잡지를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함석헌이 그 잡지 8월호에 쓴 글을 인용하다 보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까지 드러난 기록을 보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처럼 독재자 이승만을 정면으로 비판한 글은 거의 없었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호칭은 최소한도가 ‘이 박사’였다. 그런데 함석헌이 존칭을 쓰지 않고 ‘이승만’이라고 계속 썼으니 그에게 아부를 일삼던 자들이 고자질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함석헌의 그 글이 실린 8월호에 장준하는 8·15 해방 이후의 상황에 대한 평가와 반성을 소재로 한 ‘권두언’을 실었다. “첫째, 일제와 싸운 순국 선열들의 유족과 혁명 선배들과 그 가족들을 보살피는 일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둘째, 과연 해방의 기쁨을 전 국민이 고루 누리고 있는가? 셋째, 현 상태로서 과연 해방이라 할 수 있는가?”를 물은 뒤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애국자의 유족들이 결식을 하게 되고 이 애국자들을 박해한 일제의 충복들 이 활보를 하는 사회일진대 여기에서 애국과 도의를 찾는 것은 가시덤불 속에서 무화과를 찾는 것과 같은 일이다. 우리는 가끔 후진의 부도덕과 무   례에 격분하는 선배들을 대한다. 그러나 이 사회는 후진들에게 애국심을 길러주는 대신 애국자의 참담한 말로를 보여주었으며 예와 덕을 보여주는 대신 무례와 패륜을 주었고 선의 성장보다는 악의 번영을 보여주었다. (·····) 

우리가 얻은 해방은 한낱 주인을 바꾸어 섬기는 것이요, 형태를 달리한 노   예 생활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가? 생각하는 방향은 일본인이 가르쳐 준 바요, 조직된 제도는 첨단적인 미국류의 모방이요, 운영 방식은 이민족을 통치함에 사용한 일제의 방식이니 우리의 문화를 어디서 찾겠는가? 이러고도 해방된 민족이라고 하겠는가? (앞의 책, 26쪽)


함석헌의 글 ‘생각하는 국민이라야 산다’가 실린 <사상계> 1958년 8월호가 출간된 지 며칠 뒤인 8월 8일 경찰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함석헌을 구속했다. 당시 정부와 언론은 북한을 ‘북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함석헌이 대한민국을 ‘꼭두각시’라고 칭한 것은 남과 북을 동일시한 행위로서 ‘군의 전투의욕을 감퇴시키고 비상시기에 놓인 사회의 사상과 질서를 문란시킨 행위’라는 것이 구속 사유였다. 

함석헌이 감옥에 갇힌 뒤 서울시경 사찰과 형사들이 남대문 근처에 있던 ‘통일사’라는 대공 사찰 전담기관으로 장준하를 연행해 갔다. 고약한 인상의 수사관은 “당신과 함석헌 영감이 공모해서 이런 글들을 쓴 게 아니냐”면서 ‘당신들은 빨갱이보다 나쁜 놈들’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장준하는 그날 7~8시간이나 고문에 가까운 조사를 받고 풀려난 뒤 두 번이나 더 끌려가서 심문을 당했다. 수사관들은 번번이 함석헌과 그가 ‘공모’해서 ‘빨갱이들’이나 할 소리를 글로 썼다고 몰아붙였다. 

함석헌은 스무 날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검찰의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다. 이승만 정권이 사회적 여론과 압력을 감당하지 못했는지, 정치적 계산을 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57세이던 그는 경찰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간부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출감 뒤에 밝혔다. 함석헌은 일제강점기부터 그때까지 다섯 번이나 투옥되었다. 

함석헌 구속이라는 사건은 <사상계>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경찰관들이 전국의 서점들에서 <사상계> 8월호를 수거하려고 했지만, 서점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책을 숨기고는 ‘다 팔렸다’면서 경찰을 따돌렸다. 독자들이 앞을 다투어 사가는 바람에 8월호는 4만부 매진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1960년 3월 15일로 예정된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정권은 대대적으로 부정을 저질렀다. 대통령후보 이승만과 그의 ‘후계자’로 지명된 이기붕은 국가공권력을 총동원해서 야당을 탄압하고 대낮에 후보자와 유권자들에게 테러를 자행했다. 선거 당일 경남 마산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 경찰이 그들에게 사격을 하면서 최루탄을 발사했다. 마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그런 상황에서 4월 11일 오전 11시 반쯤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학생복을 입은 김주열의 주검이 발견되었다. 마산상고 입학식을 앞두고 시위대열에 합류했던 그의 눈에서 뒤통수까지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그 참혹한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자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함성이 전국을 뒤흔들었다. 

사상계사가 있는 종로 네거리 옛 화신백화점 건너편의 한청빌딩은 4월 혁명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학생들의 시위 물결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동대문까지 종로 거리를 가득 메웠다. 한청빌딩 머리에 내걸린 ‘사상계’의 깃발은 그 물결을 지켜보며 나부꼈다. 파란 바탕에 흰 글씨로 제호 ‘사상계(思想界)’ 석 자만을 독특한 서체로 새겨 넣고 아무 문양도 없는 이 사기(社旗)를 장준하는 무던히도 사랑하였다. 그래서 강연이나 행사를 할 때도 연단에 그것을 걸었고 타고 다니는 자동차에도 그것을 만들어 꽂고 다녔다. 대부분이 학생인 시위 인파에게도 그 깃발은 낯이 익었다. 

종로 네거리를 메우며 지나가던 시위대는 한청빌딩에 걸려 나부끼는 ‘사상계’ 깃발을 보고 움직임을 멈추거나 또는 그쪽을 올려다보며 뜨거운 환호를 올렸다. 이는 그 깃발과 시위대 간에 흐르는 공감의 우렁찬 확인이었다.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283쪽)

장준하는 4월 혁명이 시민과 학생의 승리로 마무리되자, 미리 써두었던 <사상계> 5월호의 권두언 내용을 고쳐 ‘민권전선의 용사들이여 편히 쉬시라’는 글을 새로 썼다. 

“자유라는 나무는 피를 마시고 자란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서구사회의 민권운동이나 미국 시민들의 자유를 쟁취하기까지의 노정이 가장   잘 압축되어 표현된 말인 줄 압니다. 실로 ‘자유’니 ‘민권’이니 하는 말은 그저 안일한 농담이 아니고 이것을 찾으려는 ‘전사들의 피’로 새겨놓은 말들임을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민권운동도 이제 피를 흘리기 시작하였으나 만방의 자유민들 앞에 머리를 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천인이 공   노할 관권의 야만적 횡포 아래서도 그저 울고만 있는 유약한 백성이란 낙인은 우리에게 다시는 찍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

여기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전국의 지성과 용기를 모음에 총명을 기울이는 일입니다. 확실히 우리 민족은 희망이 있는 민족입니다. 부정을 거부   하고 악에 항쟁할 줄 아는 민족입니다. 이 민족의 자유와 민권을 위한 투쟁   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관권의 어리석음은 물러갈 것입니다. 참된 민주사회는 건설될 것입니다. 자유와 민권은 어느 누구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민의 손으로 쟁취하는 것입니다. (<장준하평전>, 400~401쪽)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8~1960년은 <사상계>의 전성기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발행부수가 7, 8만 부 수준이던 그  시기에, 월간이기는 하지만 <사상계>의 판매부수는 8, 9만에 이르렀다. 4월 혁명 뒤에 낸 1960년 6월호는 10만 부가 넘게 나갔다.

 

 

(21) 장면 정부의 국토건설본부를 이끌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발표한 뒤 경무대(지금 청와대)를 떠나서 이화장으로 갔다. 그는 수석국무위원이던 외무부장관 허정에게 과도정부 구성을 맡겼다. 과도정부 수반이 된 허정은 4월 혁명이 심판의 표적으로 삼았던 이승만이 5월 29일 하와이로 떠나도록 주선하는 등 혁명 과업 수행과는 거리가 먼 움직임을 보였다. 

5월 2일 국회 본회의 결의에 따라 ‘국회위원선거법안 기초위원회’가 구성되었고, 22일 선거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7월 29일에 치러진 선거는 야당이던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신파와 구파로 갈라져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민주당은 민의원 233석 가운데 175석, 참의원 58석 가운데 31석을 차지했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헌법에 따라 8월 12일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윤보선을 선출했다. 윤보선은 국무총리 후보로 같은 구파인 김도연을 지명했다. 그러나 그는 17일에 열린 민의원의 국무총리 인준 투표에서 과반에 3표가 못 미치는 득표로 인준을 받지 못했다. 두 번째로 지명을 받은 장면은 찬성 117표, 반대 107표, 기권 1표로 총리가 되었다.

 

장면이 구성한 내각에는 4월 혁명 이전부터 <사상계> 동인이던 김영선이 재무부장관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4·19 이후의 혼란기에 틈만 나면 사상계사를 찾아와서 장준하와 함께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던 사람이었다. 그 무렵 <사상계> 동인들은 4월 혁명의 정신과 이념을 살릴 수 있는 사업을 논의한 끝에 ‘국제연구소’를 차리기로 합의했다. <사상계> 편집위원들을 주축으로 학계, 언론계, 문화계, 경제계의 전문가 30여 명이 연구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사상계사에 설치된 국제연구소는 첫 사업으로 연구위원들에게 비용을 지급하고 10여 개 부문에 걸쳐 논문을 작성하게 한 뒤 <사상계> 특별부록으로 출판했다. 연구소는 다양한 논의를 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집중적으로 검토한 것은 국토건설사업이었다. 국제연구소는 ‘국토의 개발이란 관점에서 치산, 치수, 항만, 도로, 전력 등 사회간접자본의 이용과 개발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연구한 논문들을 <사상계>에 실었다.

 

어느 날 재무부장관 김영선이 장준하를 찾아와서 “민주당 정권이 국토건설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려고 하는데 그 사업을 맡아서 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영선은 정부조직법을 고쳐서 무임소장관이 그 사업을 주도하도록 할 계획이니 무임소장관을 맡으라고 장준하에게 강력히 권했다. 그러나 장준하는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이유는 국토건설사업은 관이 주관해서는 안 되고 반관반민 단체를 구성해서 범국민운동으로 해야 하며, 자신은 <사상계>를 버리고 그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선은 “당신은 정신 물질 양쪽의 일을 모두 할 수 있지 않으냐, 두 가지 일 가운데 하나가 실패하더라도 성공한 하나는 남지 않겠느냐”면서 끈질기게 그를 설득했다. <사상계> 동인들도 김영선의 의견에 찬성했다. 특히 당시 한국은행 부총재로서 <사상계> 동인이던 유창순도 그 일을 맡으라고 간곡하게 권유했다.

 

그러나 장준하는 마지막으로, 사상계사를 운영해오면서 막대한 빚을 지게 되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김영선은 국내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사상계>가 빚더미 위에 앉아 있다는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장준하는 그렇게 된 내력을 설명했다. 사상계사는 자유당 정권 시기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과 보도사진으로 유명한 <라이프>를 국내에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사업은 한때 제법 흑자를 내기도 했으나 자유당 때 600 대 1이던 달러 환율이 민주당 정권의 환율 현실화 정책 때문에 1100 대 1로 바뀌자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뉴욕의 본사로 송금해야 하는 돈이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상계사는 3천만 환이라는 부채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상계>의 존립을 위협하는 거액의 빚이었다.

 

그런 사정을 듣고 난 김영선은 장준하가 진 빚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의 시책 때문에 생긴 불가항력의 소산이라고 말하면서 그 채무는 재무장관인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지 처리해 줄 테니 국토건설사업을 꼭 맡아 달라고 당부했다. 장준하는 그 사업을 반관반민으로 하되, 자신은 순수한 민간인으로 참여할 것이며, 앞으로 적격인 사람을 찾을 때까지만 책임을 지겠다는 조건으로 그 일을 맡기로 했다. 

국토건설본부장은 총리인 장면이 겸임했고, 장준하는 그 밑의 기획부를 이끌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본부장대리 업무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사상계> 편집위원이던 장군 출신의 신응균, 교수 이만갑, 일제강점기에 한강대교를 설계한 것으로 실력이 널리 알려진 최경렬이 각각 관리, 조사연구, 기술 부서를 맡았다. <사상계>팀이 그 일을 완전히 책임지게 된 것이었다. 

 

국토건설본부의 관리, 기술 부문에는 현역과 예비역 군인들을 상당수 기용했다. 그 무렵 군 내부에서 일어난 하극상 사건에 관련되어 예편당한 장교들이 그 사업에 참여하기를 원했는데, 그 가운데는 예비역 육군중령 김종필도 들어 있었다. 장준하는 그의 이력서가 자기 책상 서랍에 들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때는 아직 초창기라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어 그들의 기용이 천연되었던 것이지만 그때 그 일을 좀 더 일찍 시작하여 그들을 곧 기용시켜 함께 일을 했던들 5·16 군사쿠데타 같은 건 이 땅에 없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두가 다 국운인 것만 같다.”(<장준하문집 3>, 37쪽)

국토건설본부가 맨 처음에 한 일은 대학 졸업자 가운데 군 복무를 마친 2천여 명을 공개 채용으로 뽑는 일이었는데 무려 1만여 명이 지원을 했다. 장준하는 그들을 일정 기간 훈련시켜 국토건설 요원으로 전국에 배치하고, 온갖 보고서들을 점검하고 전국 규모의 사업을 기획하느라고 <사상계>에는 ‘권두언’을 서너 번밖에 쓰지 못했다. 

그들 대학 졸업자 2천 명 ‘특공대’의 역할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일만 하고 말라면 누가 거기에 만족하고 참여할 것인가. 장준하의 계획은 이들을 국가 공무원이 되기 위한 예비 수습 기간을 거치는 것처럼 6개월 동안 각처의 농어촌에서 봉사하며 일하게 한 다음 다시 불러들여 중앙관서에 기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1년간 전국을 순회시켜 건설사업 현황과 지방 실정을 함께 파악하게 하고 3년 후부터는 우선 지방의 군수 자리부터 모두 그들 국토건설 정예 요원으로 대체시킬 획기적인 안을 세웠다.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294쪽)

장준하와 함께 국토건설본부에 참여했던 이만갑(사회학자, 서울대 명예교수)은 ‘국토건설사업과 장준하 선생’이라는 글에 그 시절의 일화를 소개했다.

국토건설 요원들은 국토건설 사업이 착수되기 이전에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동요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장차 받게 될 처우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그러한 동태를 알았는지, 장준하 기획부장은 서울대학교의 문리대 강당에서 있은 국토건설 요원들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과정에서 자기 자신 요원들과 같이 빵조각을 저녁식사 대신 씹으면서 밤늦게까지 기탄없이 의견을 교환하고 성심성의 소신을 피력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동요하여 이탈할까 생각했던 요원들도 마음을 돌려, 그렇다면 다시 마음을 잡고 나라를 위해 한 번 일을 해보겠다고 다짐할 만큼 요원들간의 분위기가 일신되었다고 한다. (장준하선생 20주기 추모문집간행위원회 편, <광복 50년과 장준하>, 106쪽) 

그러나 장준하의 원대한 기획은 1960년의 5·16 쿠데타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박정희가 이끌던 ‘군사혁명위원회’가 국토건설본부를 접수했기 때문이다. 쿠데타세력은 장면 정부의 정책 가운데 국토건설사업만은 그대로 계승해서 시행한다고 포고문에 밝혔으나 그 사업의 정신적 바탕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 장준하가 주도하던 국토건설본부가 우수한 인력을 뽑아 현장으로 보낸 것과 정반대로 쿠데타 세력은 깡패와 불량배들을 잡아들여 강제노동을 시켰다. 장준하는 박정희가 가장 큰 업적으로 내세우는 경제건설을 이렇게 비판했다. 

우리나라와 같은 농업국으로 경제건설을 도시건설부터 한 나라는 아마 이 세상에 우리나라 하나밖에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나라 경제의 바탕이 농촌이니만큼 당연히 그 농촌부터 일으켜야 된다. 농촌이 부유해진 후에 그 과실로써 도회 건설을 하든지 공장을 짓든지 하는 것이 순서다. 전후 일본, 대만, 이스라엘 같은 나라가 모두 그런 순서로 시작하여 오늘날 부를 누리고 있다. 미국이 오늘날 세계 제일의 공업국으로 부를 누리고 있지만 그 기초는 농사부터 시작하였음은 물론이며 남부의 목화농사가 아니었던들 절대로 오늘의 미국은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공업이 농업을 능가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부유한 경제적 기초를 만들어 준 것이 바로 농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경제개발 도상에 있는 나라는 공업화보다도 오히려 먼저 농촌의 부유화를 위한 강력한 시책이 최상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장준하문집 3>, 39쪽)

장준하가 국토건설본부 일을 하는 동안 김영선은 사상계사의 부채 3천만 환 가운데 1천만 환을 갚아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머지 2천만 환을 갚지 않아 사상계사는 빚더미 위에서 허덕이다가 5·16쿠데타를 만나게 되었다. 장준하는 김영선한테서 받은 1천만 환 때문에 장차 ‘부패언론인’으로 몰리는 수모를 겪게 된다.

 

 

(22) 5·16 쿠데타를 지지한 사상계

 

어떤 개인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일생을 보낼 수는 없다. 집단이나 조직 역시 마찬가지이다. 장준하와 <사상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육군소장 박정희가 이끄는 군인 3,600여 명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맨 처음으로 한강 인도교에 이른 해병대 제1여단 병력은 그곳을 경비하던 헌병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서울시내로 들어가서 육군본부 광장, KBS방송국, 국회의사당, 중앙청을 차례로 점거했다. 쿠데타군은 새벽 5시 라디오방송을 통해 ‘군사혁명’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린 뒤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과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며’,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며’,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쿠데타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들은 그날 오후 ‘포고 제4호’를 통해 장면 정권 인수를 정식으로 선언하는 한편, 국회를 해산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4월 혁명 이후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국회가 선출한 국무총리 중심의 정부를 뒤엎은 쿠데타가 분명했다. 그리고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의 역사가 입증했듯이 ‘혁명공약’의 내용은 거의 모두가 공약(空約)으로 드러났다.

 

쿠데타세력은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회의)’로 확대 개편하고 6월 6일 헌법의 기능을 정지시킨 뒤 최고회의가 입법·사법·행정권을 장악한다는 내용의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했다.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된 상태에서 국토건설본부가 해체되자 장준하는 사상계사로 복귀했다. <사상계> 6월호의 제작이 진행되던 시기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인지 ‘권두언’과 화보, 그리고 ‘편집후기’에만 쿠데타의 내용이 실렸다. 김삼웅은 “<사상계> 15년의 역사에서 1961년 6월호의 권두언, 화보, 편집후기는 ‘사상계 정신’을 가장 크게 훼손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라고 평가했다.

 

“화보 ‘혁명 새벽에 오다’에서는 쿠데타의 전개과정을 장도영과 박정희의 인물사진과 함께 24컷으로 장식했다. 1년여 전 ‘민중의 승리 기념호’의 화보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무기명으로 실린 권두언 ‘5·16혁명과 민족의 진로’는 아무리 계엄하의 상황이라 해도 이것이 과연 <사상계>의 권두언일까 싶을 정도의 글이다.”

문제의 ‘권두언’부터 보기로 하자.

 

(···)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 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의 군사혁명은 단지 정치권력이 국민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민족적 죄악이 되는 것이다. (···) 본래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더욱이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 함은 하나의 정치학적 법칙이다. 이러한 권력의 자기 부식(腐蝕) 작용에 걸리지 않고 오늘의 청신한 자세를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시급히 혁명 과업을 완수하고 최단 시일 내에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한 후 쾌히 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엄숙한 혁명 공약을 깨끗이 군인답게 실천하는 길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군인의 위대한 공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사상에 영원히 빛날 것임은 물론이요, 한국의 군사혁명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후진국 국민들의 길잡이요, 모범이 될 것이다. (<장준하문집 3>, 9쪽)

 

장준하는 이 ‘권두언’을 자신이 썼다고 시인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 “1년 전 우리나라의 젊은 학도들은 그 꿈 많은 청춘을 바쳐 부패와 탐욕과 수탈과 부정에 도취한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사경에서 회생시켰었다”로 시작된 이 권두언에서 나는 그 젊은이들이 꽃 같은 청춘을 바쳐 ‘사경에서 회생시킨’ 이 나라의 민주헌정을 다시 중단시킨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당시 민주당의 무능한 정권에 의한 ‘국가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찾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라면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일단 그 5·16 쿠데타를 수긍하면서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니 군사정권의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참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당시의 <사상계>가 세상의 공기(公器)임을 떠나서 나 개인의 사물로 나 개인의 의견이나 써내면 되던 그런 잡지가 아니었음은 당시 <사상계>를 애독하던 10만 애독자들이 지금도 증언할 터이니 내가 이 자리에서 굳이 사족을 달아서까지 변명할 필요는 없는 것이겠다. 그만큼 그때 그 ‘권두언’이 나 개인만의 의견이 아니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앞의 책, 10쪽)

 

참고로 말하면, <사상계> 6월호가 제작되어 출간되던 시기에 쿠데타세력은 계엄령 제3항을 통해 ‘언론·출판·보도 등의 사전 검열’을 강제하고 있었다. ‘보도가 일절 금지’된 사항은 아래와 같았다. 

1) 적을 이롭게 하는 사항
2) 군사혁명위원회의 제 목적에 위반되는 사항
3) 반혁명적 여론 선동·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사항
4) 치안 유지에 유해한 사항
5) 국민 여론 및 감정을 저해하는 사항
6) 군 사기를 저해하는 사항
7) 군 기밀에 저촉되는 사항
8) 허위 및 왜곡된 사항
9) 기타 지시하는 사항


신문과 잡지를 비롯한 모든 출판물이 위와 같은 금지사항들을 지키려면 자율적인 보도와 논평은 전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계엄사령부의 검열관들이 간행물의 내용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잘라버리거나 고치라고 지시하는 데 맞서 항의를 하던 언론인들은 구속되어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상계>의 온건한 ‘5·15 지지’와는 달리 대다수 언론은 쿠데타를 열렬히 찬양했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아 1959년에 폐간당했다가 4월 혁명 덕분에 복간된 경향신문이 5·16 쿠데타 이튿날에 실은 사설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4·19 이후 혁명과업 수행에 있어 정부가 보여준 불투명한 태도와 무능, 그리고 혁명정권으로서의 확고한 소신과 결여는 날이 갈수록 사회불안과 정부 불신의 분위기를 조장하였을 뿐 국민에게 뚜렷한 방향과 희망을 주지 못했던 것은 세인이 주지하는 바와 같다. 장 정권이 수립된 것은 여하튼 이 민족을 위해 하나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사태를 초래하게 한 것은 궁극적으로 말해서 기성정치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과 부패, 무능과 파쟁의 소치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며,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감을 짙게 한다.  

천주교 재단이 경영하던 경향신문은 가톨릭 신자인 장면이 이끄는 정부를 적극 옹호하던 매체였다. 그러나 박정희 일파의 총칼 앞에서 단 하루만에 쿠데타를 찬양하는 신문으로 변신해버렸다.

야당이 된 민주당 구파의 대변지나 다름없던 동아일보는 신파가 주도하던 장면 정부의 정책과 행정을 사사건건 비난했다. 그래서인지 그 신문은 5월 16일자 무기명 칼럼 ‘횡설수설’에서 장면 정권 시기의 상황에 대해 극단적인 독설을 퍼부었다.

무능 부패한 정부, 정당 아닌 도당, 혁명을 팔고 다니는 학생 아닌 정상배, 심지어 김일성 앞잡이들까지 멋대로 놀아나서 바야흐로 세상은 난장판이 되었다. 이 틈에서 좌경기회주의분자, 회색분자, 부역자들이 때를 만난 듯이 실없는 통일방안이라는 것을 쳐들고 돌아다니면서 사회는 더욱 어수선만 해갔다. ‘적기가’를 부르는 무리가 나와도 겨우 15일의 구류, 공산괴뢰들과 판문점에서 만나 같이 부둥켜안고 울겠다고 괴상한 촌극을 꾸미는 분자들도 법이 없다는 핑계로 수수방관하는 세상이다. 

 

 

(23) ‘5·16을 어떻게 볼까’와 사상계의 수난

 

<사상계>가 5·16 쿠데타 직후 6월호에 실은 무기명 ‘권두언’과 ‘편집후기’를 본 많은 독자들은 ‘이것이 이승만 독재와 치열하게 싸우던 바로 그 잡지란 말인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장준하는 7월호 편집 마감을 하기까지 한 달 가까이 군사정권이 하는 일들을 면밀히 지켜보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혁명이 참 혁명이 되려면, 즉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민족 장래에 살 길을 찾아주는 그런 혁명이 되려면 이 사람들이 그들의 공약대로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그 절대 권력에서 손을 씻고 민주주의를 새로운 정신과 내용에서 복구시켜야만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게 아니라 흔히 ‘사이비 애국혁명’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사람들도 그들의 공약이나 우리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항구 집권의 기색이 여러 면에서 드러나 보였다. 

처음부터 구경이나 하고 있었던 일이 아니요 나라의 장래가 더욱 더 크게 우려되는 일이라 나를 중심한 우리 <사상계> 동인들은 도저히 그대로 묵과해 넘길 수가 없었다. 즉각 편집회의를 열어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웠다. (<장준하문집 3>, 10~11쪽) 

장준하는 편집회의의 결정에 따라 7월호 ‘권두언’을 기명으로 썼다. 제목은 ‘긴급을 요하는 혁명과업의 완수와 민주정치에로의 복귀’였다. 

혁명정권은 국민을 국가권력으로부터 소외시키지 말고 권력권 외에 있는 많은 국민들의 의견을 널리 듣고 그리하여 이 단계를 되도록 신속하게 통과함으로써 우리들의 궁극적 목표인 민주주의 복귀의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만일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감격적인 8·15 해방 기념일을 계기로 총선 일자가  공표된다면 (···) 항간의 구국한 억측을 불식하고 민심을 더 효과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앞의 책, 11쪽)

편집위원들은 ‘권두언’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아 함석헌에게 원고를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글이 5·16 쿠데타 이래 발표된 그 어떤 논설보다도 가장 강력한 논조를 펼친 ‘5·16을 어떻게 볼까’였다. 이 글은 “한마디 하자. 요새는 초면, 구면, 유식, 무식, 남, 녀, 노, 소를 가릴 것 없이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맨 먼저 하는 말이 ‘이번 일을 어떻게 보십니까?’이다”로 시작된다. 역사적인 기록이자 명문으로 살아 있는 그 글의 주요 대목을 보기로 하자. 

아기 어미의 앓는 소리가 듣기 싫거든 애당초 아기를 만들지 말았어야지, 소리도 내지 말라면 너무도 잔인 아닌가? 그것은 아기 아버지가 아니라 강간한 놈이다. 나오는 아기부터가 ‘으앙’ 하고 소리를 지르고야 나온다. 소리없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 병혁(病革)이다. 병이 혁 하면 그 다음은 죽는다. 그런데 나 보기에 걱정은 이 혁명에 아무 말이 없는 것이다. 말이 사실은 없지 않은데, 만나면 반드시 서로 묻는데,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일체 이렇다는 소감 비평이 없다.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이따금 있는 형식적인 칭찬 그까짓 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말이 아니다. (···)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총칼 보고 겁을 집어먹었지. 겁난 국민은 아무 것도 못한다. 국민이 겁이 나게 하여가지고는, 비겁한 민중 가지고는, 다스리기는 쉬울지 몰라도 혁명은 못한다. 다스리기 쉽기야 죽은 시체가 제일이지 시체를 업어다 산 위에 놓고 스스로 무슨 공이 있다 할 어리석은 사내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공동묘지의 매장인부 아닌가? (···) 선의의 독재란 말들을 하지만 그것은 내용 없는 빈말이다. 선의인데 어떻게 독재가 있으며 독재거든 어떻게 선일 수 있을까? 강간이 사랑일까? (·····)

제가 마지막 길에 나선 줄을 아는 민중은, 결코 생각 없는, 성의 없는, 죽은 민중은 아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있다. 그들을 무시해서는 너무 낮춰봐서는 안 된다. (···) 마지막이란 말이 무슨 소리일까? 이번 군사혁명은 먼젓번 학생 혁명에서보다 일단 낮아진 것을 아는 말이다. 그때는 맨 주먹으로 일어났다. 이번은 칼을 뽑았다. 그때는 믿는 것이 정의의 법칙, 너와 나 사이에 다 같이 있는 양심의 권위, 도리였지만 이번은 믿은 것이 탄알과 화약이다. 그만큼 낮다. 그때는 민중이 감격했지만 이번은 민중의 감격이 없고 무표정이다. 묵인이다. 그때는 대낮에 내놓고 행진을 했지만 이번은 밤중에 몰래 갑자기 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낮다. (···) 혁명은 실패할수록 정신적으로 내려가는 법이다. 4·19 이후 자주 장난처럼 일어나는 데모를 보고 하지 말라고 반대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더 험한 것이 될 것이므로 한 말이었다. 그래 이제 그것을 알았으므로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다시 또 한 번 외치자. “이것이 마지막이다.” (앞의   책, 12~13쪽)

함석헌은 글의 끝을 이렇게 맺었다. “써 놓고 보면 속과는 딴판 같아서 찢어 버리고 깊은 넋두리를 하는 동안에 6·25의 밤이 다 새었구나. 3년 전 이 밤엔 잠 못 자고 한 생각을 말했더니 ‘나라 없는 백성’이라 했다고 이 나라가 나를 스무 날 참선을 시켰지. 이번엔 또 무슨 선물 받을까?”

   
5.16직후 '사상계'에 실린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은 당시 박정희 일파에게 직격탄을 날린 글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은 지난 1975년 2월 장준하 선생과 함석헌 선생이 함께 민주회복을 위한 모든 국민의 노력을 단일화 할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모습.

 

함석헌의 그 글은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주장하던 박정희 일파에게 직격탄을 날린 셈이었다. 그는 ‘총칼로 민중에게 겁을 주고 민중을 시체나 다름없이 만든 뒤 공동묘지에 묻은 매장인부’라는 표현을 썼는데, 바로 박정희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함석헌이 그 글의 마지막에 ‘이번엔 또 어떤 선물 받을까’라고 예상한 것은 그대로 적중되었다. <사상계> 7월호가 시중에 나간 지 4~5일쯤 지난 날 저녁 수사기관에서 장준하한테 연락이 왔다. 문의할 일이 있으니 편집 책임자와 함께 다음날 아침에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그는 취재부장 고성훈과 함께 수사기관에서 나온 검정 지프를 타고 회현동 어디쯤엔가 있던 허름한 건물 2층의 한 방으로 끌려갔다. 그는 거기서 다시 중앙정보부(속칭 ‘남산’) 부장실로 연행되었다. 한참 기다리자 ‘혁명의 주체 중의 주체요 귀신도 떤다는 군사혁명 정권의 총사령탑’ 김종필이 나타났다. 에비역 육군 중령인 그는 박정희의 조카사위였다. 

그는 장준하와 고성훈을 슬쩍 쳐다보더니 자기 책상 앞에 앉았다. 보좌관이 그에게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장준하가 얼핏 보니 <사상계> 7월호였다. 당시 35세이던 김종필은 금세 주먹질이라도 할 듯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사상계> 표지에 찍힌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제목 언저리에 볼펜으로 줄을 긋더니 43세의 장준하 앞에 책을 내려놓았다. 그는 자기 소개도 하지 않은 채 다짜고짜 장준하에게 고함을 쳤다. “정신분열자 같은 영감쟁이의 이 따위 글을 도대체 어떤 저의로 여기에 실었소? 성스러운 혁명 과업 수행 과정에서 당신은 우리 혁명을 모독하는 거 아니오? 이것을 싣게 된 목적과 경위를 말해보시오.”

장준하는 ‘이 글은 내가 함 선생님께 집필을 부탁했고, 내 손으로 직접 받아다가 실은 것’이라고 말한 뒤 ‘양약은 입에 쓴 법으로 이 글이 당장 보기로는 눈에 다소 거슬릴지 모르지만 내 확신이 틀리지 않는 한 여러분들을 위하고 나라의 장래를 위하는 충정이 넘쳐 흐르는 글’이라고 강조했다.

김종필은 처음으로 그를 정면으로 보더니 탁자 위의 <사상계>를 집어들고는 빨갛게 줄이 쳐진 함석헌의 글과 ‘권두언’의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이것도 혁명을 위하는 것이고 격려하는 것이냐”라고 거칠게 물었다. 장준하는 남의 글을 부분적으로만 읽고 그렇게 말하느냐, 전체를 가지고 응수하라고 반박했다.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장준하의 진실이 얼마쯤 전해졌는지 김종필은 존칭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장 사장께서는 그렇게 얘기하지만 내가 만난 모든 문화인, 학자, 언론인들의 얘기는 그게 아니고 민정 이양을 너무 빨리 하면 결국 썩은 구정치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기 마련이고 그들이 정권을 잡으면 또 나라를 망쳐놓을 것이니 혁명은 하나마나의 결과가 될 터인즉 되도록 군인들이 장기집권해서 그런 못된 구정치인들이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합디다.” 그 말을 듣고 장준하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그 따위 소리를 합니까? 그런 부류들이야말로 면종복배하는 자들로 당신들 앞에서는 그런 소리를 하지만 나아가서는 정반대의 소리를 하는 놈들이며 결국 그런 놈들은 나라를 해치고 당신들을 배신할 자들이요.”

김종필은 한숨을 크게 쉬더니 “오늘 좋은 얘기 많이 들었다. 앞으로는 밖에서 말하지 말고 뛰어와서 직접 책망해주면 고맙겠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1972년 1월)까지 그와 나의 첫 대화이자 마지막 대화가 된 채 그 후 피차 인사도 없이 지내는 터이며 그때 그렇게 표면상 좋게하고 헤어졌지만 그 후 <사상계>는 점점 엄습하는 음성적 탄압에 견딜 수가 없게 되었으니 과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이었을까? 난데없이 판매 루트를 봉쇄하는가 하면 반품 공세를 퍼붓고 자금 길을 막고 세무사찰을 벌이고 제작 관계 업자들의 감시와 사찰이 날이 갈수록 가혹해지니 말이다. (앞의 책, 19쪽) 

 

 

(24) ‘부패언론인’ 오명, 막사이사이상 수상 계기 말끔히 씻어

 

장준하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김종필에게 심문을 받고 나온 뒤 2주일쯤 지난 1961년 7월 중순, 당시 서울시청 안에 자리잡고 있던 ‘부정축재처리위원회’가 그에게 출두명령서를 보냈다. 그는 지정된 날 오전에 그곳으로 갔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육군 소령이 담당자였다. 장준하가 출두명령서를 보이자 그는 대뜸 반말로 물었다. “너, 김영선이한테서 돈 얼마나 받았어?” 장준하가 어이가 없어 잠자코 그의 얼굴만 쳐다보자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영선이가 네게 돈 줬잖아? 그게 얼마냐 말야?”

장준하는 치솟는 화를 억누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사상계> 동인으로서 민주당 정권의 재무부장관이 된 김영선이 자기에게 국토건설본부장을 맡으라고 강권하다시피 하던 때 일이 떠올랐다. 장준하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그 자리에 갈 수 없다고 해도 김영선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장준하는 사상계사를 경영하면서 미국의 주간지 <타임>과 <라이프>의 한국 내 판매를 대행하다가 환율 급등으로 3천만 환의 빚에 지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다. 김영선은 재무부장관인 자신이 그 빚을 갚아주겠다면서 우선 1천만 환을 장준하에게 준 뒤 나머지는 차츰 갚겠다고 약속했다. 장준하는 1천만 환에 대한 차용 담보로 자기가 살던 집의 문서를 김영선에게 주었다. 그런데 5·16 쿠데타가 나자 구속되어 수감된 김영선이 군사정권의 강압에 못 견뎌 장준하에게 1천만 환을 주었다고 진술했던 모양이다.

장준하는 반말과 욕설을 섞어 자기를 윽박지르는 소령에게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 그 어투는 좀 고치시오. 엊그제 김종필 씨를 만났는데 그분도 당신 같은 어투는 쓰지 않았소. 그런데 여기서는 왜 다르오?” 그러나 그는 계속 을러댔다. “뭐라고? 잔말 말고 어서 묻는 말에 대답해.” 장준하가 “하리다. 받은 건 사실이고 1천만 환이요”라고 말하자 그는 더 있을 텐데 똑바로 대라면서 그러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 한 채 사상계사에 가서 문서와 장부를 모두 압수해 오라고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소령은 다른 일이 있는지, 장준하를 민간인 조사관에게 넘겼다. 그는 별실로 끌려가서 경위서를 상세히 쓰고 나서야 풀려났다. 장준하는 그  뒤에도 부정축재처리위원회, 혁명검찰소, 혁명재판소, 서울지방국세청에 불려다니며 조사를 받았다. 그는 1천만 환을 연말까지 국가에 분납하기로 각서를 쓰고서야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돈의 회수관청으로는 성동세무서가 지정되었다.

그 무렵 빚더미 위에 올라앉아 있던 장준하는 1천만 환이라는 거액을 분납할 수가 없었다. 약속한 날짜를 넘겨 가산을 차압당하기까지 했다. 결국 1962년 3월에야 그 돈을 마저 갚았다.

장준하가 남한 땅에 들어와서 최초로 갖게 된 부동산은 지금의 신촌 현대백화점 뒤쪽 철둑길 사이에 있던 집이었다. 당시 신촌 로터리로부터 현대백화점 건너편이 모두 논바닥일 때 장준하는 거기에 연세대 재단 소유의 제법 넓은 대지를 마련해 가족과 함께 손수 집을 지었다. 이때  한꺼번에 목돈을 들일 수가 없는지라 그것을 조금씩 짓기 시작하여 한쪽에 들어 살면서 다른 쪽을 덧붙여 대는 식으로 자그마치 7년이 걸려서야 집을 완성하였다. 7년이나 걸렸다고 해서 무슨  대저택을 지은 것은 아니고 뜨락과 정원 이 널찍한, 철대문이 별도의 문간 시멘트 구조물과 함께 달린 그런 집이었다. 그 집을 완성하고 장준하와 그의 가족은 거기서 꼭 3년을 살았다. 그리고 남의 손으로 넘어간 이후 장준하는 다시는 자기 이름으로 된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하게 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성동세무서에 1천만 환의 돈을 갚자 1962년 3월 16일에 ‘정치활동정화법’이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310~311쪽)

정치활동정화법(정정법)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공포한 것으로, 그 법에 따라 정치활동정화위원회에서 적격 판정을 받지 못한 정치인은 1968년 8월까지 6년 남짓 동안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5·16 쿠데타를 암묵적으로 지지한 뒤 군사정권의 ‘방탄조끼’ 구실을 하며 상징적 대통령으로 머물고 있던 윤보선은 정정법에 반대한다고 밝힌 뒤 3월 22일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희는 24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해서 명실상부한 ‘국가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정치활동정화법에 따라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사람은 모두 4,373 명이나 되었다. 장준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천만 환을 갚느라고 집까지 빼앗긴 데다 사상계사는 더욱 늘어난 부채 때문에 숨을 허덕이고 있었다. 군사정권이 부패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정치활동 금지’ 낙인을 찍은 민간인들은 정치활동을 못할 뿐 다른 분야에서는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치에 관여할 생각이 없던 장준하는 그런 낙인에 구애받지 않았지만 <사상계>가 받은 타격은 아주 컸다. 그가 ‘부패언론인’으로 정정법에 묶였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그 실상을 잘 모르는 <사상계> 독자 다수가 잡지를 사서 읽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 5만을 넘던 판매부수가 차츰 줄어 2만 6,7천까지 떨어져버렸다. 

장준하와 편집위원들은 독자들의 오해를 풀어 전과 같은 관계를 회복하는 길은 <사상계>를 더 잘 만드는 것뿐이라고 확신하고 충실한 내용의 잡지를 제작하는 데 정성을 쏟았다. 그러기 위해서 정한 편집 방향이 있었다. 

1) 민주재건을 촉구하는 이론의 전개 
2) 헌정 복귀를 위한 전 국정의 검토
3) 민주주의의 근본 이념 추구
4) 자유의 재인식(공산주의와 대결할 정신적 거점으로서) 
5) 민주재건을 위한 지도세력 문제
6) 언론과 지식인의 각오
7) 경제건설 문제
8) 교육 문제 


<사상계>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의연하게 정론을 펼쳐나가자 박정희 군사정권은 교묘한 방식으로 압력을 가했다. <사상계>의 서점 판매를 방해하는 수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지방의 서적상들이 사상계사에 주문을 해서 책을 도매상 창고에 쌓아두고 풀지 않다가 다음 호가 나오면 반품을 함으로써 경영난을 가중시키도록 조종하는 수법이었다. 박 정권의 그런 탄압은 1965년까지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1962년 8월 막사이사이상 시상식을 마치고 수상자들과 함께 한 장준하(사진 윗줄 왼쪽). ©장준하기념사업회

 

장준하는 그 시절을 ‘마치 무원(無援)의 고군(孤軍)이 대작(大敵)을 상대로 피투성이의 혈전을 하는 것을 방불케 하였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바로 그 위기의 시기에 ‘하늘이 보낸 원군(援軍)’이 나타났다. 1962년 8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재단이 수여하는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학 부문의 수상자로 장준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었다. 막사이사이상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일제 침략자들에 맞서 게릴라전을 지휘하고 1953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필리핀의 발전에 이바지한 라몬 막사이사이(1907~1957)를 기리기 위해 그의 사후에 제정되었다. 그 상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장준하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내가 그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차치해 놓고서라도 국내에서는 ‘부패언론인’이라고 낙인을 찍어 정정법으로 묶어 놓은 사람을 갖다가 외국에서는 “지식인들이 국가 재건에 정력적 참여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불편부당한 잡지를 발간함에 있어서 성실성을 나타냈고 금전상의 이익이나 정치적 권력을 잡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한국의 새로운 세대를 계몽하여 그들로 하여금 더욱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길을 찾게 하였다”라는 내용의 수상 결정서를 발표하고 상까지 주며 격려하여 주었으니 참 아이로니컬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장준하문집 3>, 41~42쪽)


장준하가 막사이사이상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국내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박정희 군사정권이 그에게 안겼던 ‘부패언론인’이라는 오명은 말끔히 씻겼다. 그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던 <사상계> 독자들의 태도가 달라졌음은 물론이다. 시중에는 이런 소문이 나돌았다. “막사이사이상은 이승만과 박정희가 장준하에게 준 것이나 다름 없다.”

당시로서는 한국의 국위라는 게 썩 보잘 것 없던 때였다. 국위라기보다는 오히려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세계에 오명을 퍼뜨리기 일쑤였다. 외국과의 축구나 권투시합 하나만 이겨도 온 국민이 들썩하게 반기던 때인데 장준하가 이런 상을 탄다니 여간한 뉴스거리가 아니었다. 군사정부 당국도 속으로야 땡감을 씹은 맛이지만 겉으로 이 같은 국민적 쾌거이자 국위 선양의 오브제를 잘못 건드려, 소련에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게 노벨 문학상을 못 받으러 가게 하는 식의 바보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314쪽)

장준하가 막사이사이상을 받으려고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로 떠나기 전에 <사상계> 동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를 만나고 가라고 권유했다. 그렇게 하면 군사정부와 화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상 타러 간다고 그 사람을 찾아 갔다 하면 후세에 누가 나를 장준하로 보겠는가.”

장준하가 막사이사이상을 받고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962년 11월 어느 날 중앙정보부의 고문인가 하는 직책을 가진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근자에 미국의 시시주간지 <뉴스위크>가 한국 군사정부의 4대 의혹(증권 파동, 새나라자동차, 빠찡꼬, 워커힐) 등 부정과 비리를 파헤친 기사를 1쪽 반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그에 대한 반박 기사를 한국의 권위지인 <사상계>에 실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는 견해가 바로 그 <뉴스위크>지의 견해와 같은 것인데 아니 그보다도 몇 배나 더 심각한 것인데 무엇을 어떻게 반박하라는 말이냐?” (···) 그들은 나의 말에 ‘이 사람이?’ 하는 듯싶은 묘한 안색을 지었지만 나 역시 그들 못지않게 ‘당신네들이 <사상계>를 어떻게 보고 온 건지 알 수가 없다’ 하는 얼굴색을 지어 보였다. 
자유당 때에 ‘국부 이승만 박사의 계시’ 운운한 그 해괴한 글을 실으라고 한 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사상계>가 <사상계>인 이상 그 따위 글을 실어가며 구차히 살기를 원치 않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준하문집 3>, 43 쪽)

 

 

(25) 군정연장 반대투쟁을 선도한 사상계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일파는 이른바 ‘혁명공약’을 통해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고 다짐한 바 있었다.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8월 12일 성명을 통해 민정이양에 관한 일정을 발표했다.

1963년 초에 정당활동을 허용하고, 1963년 여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군사정권은 1962년 10월 8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개정하고, 10월 12일 ‘국민투표법’을 제정해서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제도를 도입했다. 11월 15일 최고회의가 헌법 개정안을 발의하자 대통령 권한대행 박정희는 즉각 개정안을 공고했다.

최고회의는 12월 6일 계엄령을 해제한 뒤 헌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헌법 개정안은 12월 17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85%, 찬성률 79%로 통과되었다. 새 헌법의 뼈대는 ‘4년 임기의 단원제 국회, 당적 이탈·변경과 정당 해산 시 의원직 상실, 4년 임기의 대통령이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있는 대통령중심제’였다.

박정희는 1962년 12월 27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1963년 4월에 실시되고 국회의원 총선거는 5월에 치러질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1963년 1월 1일부터 민간인들의 정치활동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날 ‘민정이양’ 공약을 뒤집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

“내외 정세를 종합 고찰하여 검토한 결과 최고위원들이 군복을 벗고 민간인 자격으로 민간정부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국가를 위해 더욱 충실하게 봉사하는 길이라고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본인도 최고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민정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대통령 출마에 관해 ‘당에서 결정을 내린다면 당원은 당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대통령 선거에 나설 뜻을 내비쳤다. 

쿠데타세력이 군복을 벗고 민간정부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히기 오래 전부터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와 ‘재건동지회’라는 조직을 통해 관제여당인 ‘민주공화당(공화당)’을 만들고 있었다. 이른바 ‘불법 사전조직’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1962년 12월 23일 최고위원들에게 공화당 창당 상황을 보고한 뒤 이듬해 1월 10일 자신을 포함한 발기인 12명과 함께 창당 작업을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사전조직에서 소외된 김동하, 김재춘 등 ‘반 김종필 세력’은 공화당의 이원(二元)조직과 ‘공산당식 밀봉교육’을 문제 삼아 창당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김종필의 독주를 비판하는 쿠데타세력의 소리가 갈수록 높아지자 최고회의는 1963년 1월 21일과 23일에 회의를 열고 김종필의 당직 사퇴와 중앙정보부의 창당 관여 금지 등을 박정희에게 요구했다.

2월 16일에 열린 3군 수뇌회의는 박정희의 민정 참여에 반대한다고 결의했다.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도 같은 의견을 보이자 박정희는 2월 18일 9개 항으로 이루어진 ‘시국수습안’이 받아들여지면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9개 항의 핵심은 ‘군의 정치적 중립과 민간정부 지지’, ‘5·16의 정당성 인정’, ‘한일 문제에 대한 군정의 방침에 협력할 것’이었다. 김종필은 2월 25일 일체의 공직을 사퇴하고 ‘자의반 타의반’의 외유를 떠났다. 

그 무렵에 박정희의 잦은 변심을 가리키는 ‘번의(翻意)’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박정희의 번의는 열흘이 멀다하고 되풀이되는 적도 있었다. 그는 1963년 2월 27일 각 정당과 정치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정국수습선서식’을 열고 민정에 불참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3월 7일 강원도 원주의 1군사령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해악을 끼친 구정치인들은 물러나야 하며, 만약 정계가 혼란해진다면 다시 민정에 참여하겠다’고 발언했다. 3월 15일에는 박정희의 측근 박종규의 사주를 받은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군인 80여 명이 무장을 한 채 최고회의 앞마당에서 ‘군정을 연장하라’면서 시위를 벌였다. 박정희는 바로 그 이튿날 민정 불참과 민정 이양 약속을 깨뜨리고 ‘군정을 5년 동안 연장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한 뒤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함으로써 모든 정당 활동을 정지시키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했다.     

1963년 1월 1일 민간인 정치활동이 허용되면서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있던 정치인 다수가 그 법의 족쇄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장준하는 정정법에 그대로 묶여 있었다. 그는 ‘정국수습선서식’이 열린 2월 27일 정정법의 굴레를 벗어났다. 정치에는 뜻이 없고 <사상계>를 잘 만드는 일에만 전념하던 장준하는 박정희가 3월 16일 ‘군정 5년 연장과 국민투표 실시’에 관한 발표를 하자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

그때 <사상계> 4월호는 편집과 조판이 끝나서 인쇄에 걸리기 직전이었다. 발행인 장준하는 긴급 편집회의를 소집해서 편집을 완전히 바꾸어 ‘군정 연장 반대’ 특집을 꾸몄다. 4월호는 마침 창간 10주년 기념호라서 평소보다 지면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런 지면의 3분의 2 이상이 ‘번의! 번의! 번의’라는 특별 화보와 군정연장을 반대하는 글들로 채워졌다. 

함석헌은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박정희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민정으로 넘어가는 길을 묻느냐? 어려운 것 아니다. 간단 명료하지 않으냐, 군인은 군도직입이라더라.이야말로 사뭇 들어가는 칼 같이 뻔한 진리지, 군인이 정권 쥐었으니 민정 되려면 군인이 물러서는 것이지 무슨 다른 복잡한 것이 있겠나? 물러설 마음이 없기에 헌법 개정이요 민의요 하지 깨끗이 물러서는 사람이 토론이 무슨 토론이냐? (·····) 민중이 곧 일어서야지, 도대체 정권 넘겨준단 말부터 고쳐야 한다. 정권이 뉘건데 누가 뉘게 넘겨주어? 천하는 단 한 사람의 것이 아니란 말을 벌써 몇 천년 전의 사람이 했는데 정권을 민중에게 넘겨주다니 그런 시대착오가 어디 있나? 이양이란 글귀를 쓰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민중 모욕이다. 이양이 아니라 가져갔던 정권을 도로 바치는 것이다. (···) 스스로 영웅인 듯 하는, 스스로 나라 일 맡은 듯 생각하는 그런 구식 머리 좀 고쳐라. 이 시대를 모르나, 매스컴의 시대라 하지 않나? 인생이 예와 다르다. 한 사람이 걱정해서 천하를 건진다는 생각은 이제는 인생을  망치는 생각이다. 너는 겸손히 민중에게 물어라. 그러기 위해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전체만이 자기 일을 하고 자기 길을 택한다. 신문 잡지를 마비시켜 놓고 민정이 무슨 민정이냐? (<장준하문집 3>, 44~45쪽)

<사상계> 4월호 특집에는 ‘종교인들의 지상 기도’가  실렸다. 목사 김재준·한경직·홍현설은 ‘한결같이 하나님 아버지를 두려워할 줄 알고 사심 없고 양심과 자유를 바로 이해하고 지혜와 지식이 충만하고 용맹 과감한 지도자를 보내어 하루바삐 민정이양을 이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 특집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모는 민주주의 회복을 열망하는 재야인사들을 총망라한 듯했다. 김병로, 변영태, 윤보선, 이범석, 이희승, 최석채, 홍종인, 홍승면, 김성식, 신상초, 탁희준, 조지훈, 부완혁 등이 박정희의 군정연장을 반대하는 <사상계>의 투쟁에 동참했던 것이다. 

<사상계> 4월호 특집에서 단연 돋보인 것은 특별화보였다. 11장의 사진에 달린 설명들은 박정희의 ‘번의’가 얼마나 뜬금없고 자기중심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상계 시절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4월호 초판 5만 부는 1주일 만에 매진되었다. 곧 2판 1만 부를 더 찍었으나 다 나가버려 3판 5천 부를 다시 인쇄해서 배본했다. 

4월호 초판이 시중에 나간 지 며칠 되지 않은 4월 8일 박정희의 ‘번의’가 다시 나타났다. 군정 연장에 관한 국민투표를 9월 말까지 보류하고 정치활동을 허용하되, 그 기간에 모든 정당이 체질을 개선하고 정치계를 정화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정연장을 철회하는 정치적 쇼를 통해 박정희는 자신의 민정 참여를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그는 5월 27일 공화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는 7월 27일 민정이양을 위한 구체적 선거일정을 발표하면서 자신과 군인들의 민정 참여를 공식으로 선언했다. 박정희는 8월 30일 “이 나라에 다시는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라는 말을 남기고 군복을 벗은 뒤 곧바로 공화당에 들어갔다. 그는 이튿날 열린 공화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선출되자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했다. 

박정희가 군정연장과 민정이양을 오락가락하는 정치적 곡예를 하는 동안 <사상계>는 민정이양을 기정사실로 밀고 나가기로 편집 방향을 정했다. 4월호가 3판까지 매진된 데 이어 5월호와 6월호도 서점들에 배포하기가 무섭게 불티 나듯 팔려 나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7월호를 시중에 내놓고 나니 뜻밖에도 4월호 5월호의 반품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양 월호 합하여 무려 6만여 부란 어마어마한 수자에 달했다. 찍어 내놓은 부수 중 정기독자 1만6천을 제외하고는 거의 7~8할이 팔리지 않고 발송한 포장을 풀어보지도 않은 채 창고에 처박았다가 꼬리표만 바꾸어 붙여 되돌려 보내온 것이다.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잡지를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8월호는 부수를 대폭 줄여서 찍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6월호가 4, 5월호의 잔부와 합쳐 3만여 부나 쏟아져 돌아왔다. 그 후 또한 7, 8, 9월호 등 수만 부의 반품이 돌아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앞의 책, 49~50쪽) 

장준하는 그것이 정보기관의 공작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아챘다. <사상계> 판매 대리를 맡은 지방의 큰 서적상들은 대다수가 국정교과서 공급을 하고 있기 때문에 권력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기관은 그런 약점을 이용해서 <사상계>를 서점에 진열하지 않은 채 창고에 묵혀 두었다가 반품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로 1천3백만 원이 넘는 부채를 안게 된 사상계사는 명맥을 이어 나가는 데도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장준하는 그런 곤경 속에서도 여러 대학이나 사회단체, 정당이 주최하는 학술·사상 토론회와 시국 강연회에 연사로 초대되어 부지런히 나갔다. 박정희 정권의 악정과 폭정을 폭로하는 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26) 세무사찰로 폐간 직전에 이른 사상계

 

박정희가 비상계엄을 선포한 6월 3일 밤 장준하는 서울 남산 밑에 있는 허름한 호텔로 몸을 숨겼다.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수사기관과 경찰이 많은 인원을 동원해서 두 달 동안이나 그를 체포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7월 29일 계엄령이 해제되자 사상계사로 돌아갔다. 

장준하는 다시 전국을 돌면서 ‘굴욕적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강연을 계속했다. 1964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1965년 2월 <사상계>는 또 긴급증간호를 펴냈다. ‘신을사조약의 해부’라는 부제가 달린 증간호는 170쪽이나 되는 부피였다. 거기에는 시인 박두진·박남수·조지훈의 연작시 ‘우리는 또 다시 노예일 수가 없다’가 실렸다. 그리고 ‘한국 근대화와 일본침략’,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 ‘이제는 더 침묵할 수 없다’, ‘한·일 협정문의 분석’, ‘개문납적(開門納賊)의 한·일회담’, ‘115인의 발언’, ‘한·일협정 전문’ 등이 눈길을 끌었다. 장준하는 “지난번 증간호와 더불어 완벽한 내용의 교본이며, 이 두 책이 바로 이 운동을 선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주로 정당인, 교수, 목사, 학생들이 증간호를 많이 찾아 날개가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장준하가 신바람이 나 있던 1965년 3월 중순 어느 날 종로세무서 직원 10여 명이 사상계사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출판사의 모든 장부와 전문서적들을 임의로 압류하면서 세무사찰을 하는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세무서원들은 열흘 동안이나 경리장부를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사상계사의 업무를 마비시켜 놓고 돌아간 그들은 그 뒤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장준하가 전해들은 바로는, 사상계사가 발간한 책의 부수에서 반품된 양을 빼고 보니 이미 납부한 세금 가운데 일부를 정부가 되돌려주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사상계사는 빚에 쪼들리면서도 세금만은 꼬박꼬박 내고 있었다. 조그만 잘못이라도 있으면 박정희 정권이 언제든지 시비를 걸 수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세무서 사람들이 난장을 치고 돌아간 뒤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열흘쯤 뒤에 전보다 더 많은 세무서원들이 다시 몰려왔다. 종로세무서 소속인 그들은 서울지방국세청에 임시로 배속된 ‘특별조사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상계사가 거래하던 서울 시내의 모든 인쇄소, 제본소, 지업사, 광고주, 서적상을 샅샅이 뒤지기 위해 서울지방국세청에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장준하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종로세무서 사람에게 슬그머니 물어보았더니 자기들은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받으며 세무사찰을 하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두 번째 조사는 그야말로 ‘이 잡기’처럼 진행되었다. 세무서원들은 창고에 쌓인 <사상계> 반품을 한 권씩 세어 나갔다.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그 일을 하는 데 이틀이나 걸렸다. 그들은 지난 5년 동안 <사상계>에 광고를 낸 기업이나 개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몇 백 원짜리 쪼가리 광고까지 들춰냈다. 그런 조사가 2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1965년 5월 14일 종로세무서장이 사상계사 대표 장준하에게 ‘통고서’를 보냈다. “1962년 1월 1일부터 1964년 12월 31일까지 월간지 <사상계>와 단행본 판매 수입금액을 정부에 정당하게 신고하지 않고 총 1천3백47만 원의 매출을 누락시킴으로써 조세를 포탈했다”는 것이었다. 통지서를 받은 날부터 7일 안에 벌과금 1백수십만원과 서류 송달비를 납부하지 않으면 법에 따라 처벌하겠다는 ‘경고’가 들어 있었다. 

당시 사상계사는 문화방송국(5·16장학회가 인수하기 전)에 광고업무를 대행시키고 있었다. 문화방송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그 회사의 사원들이 광고주를 찾아다니는 것이므로 사상계사는 계약서에 따라 월 20만 원씩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세무서원들은 광고주를 일일이 만나서 광고비 액수를 물은 뒤 합계액을 계산해서 사상계사의 수입으로 잡았다. 그들은 장준하가 문화방송과의 계약서를 보여주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장준하는 추징금 고지서와 통고서의 사본과 함께 총판 계약서, 문화방송국과의 광고계약서, 소매상에게 보낸 책 내역서 등을 곁들여서 종로세무서장 앞으로 재심 청구서를 보냈다. 그러나 며칠 뒤에 ‘이유 없다’는 붉은 줄이 쳐진 공한과 함께 청구서가 반송되었다. 

나는 너무 분하고 억울하여 장차 행정소송까지 발전시켜서라도 기어이 그 흑백을 가릴 작정으로 그에 앞서 우선 국세청에 다시 한 번 이의신청을 하려 했지만 그나마 다른 이유로 좌절되고 말았다. 

다른 이유란 앞서 말한 그 2차 때의 세무사찰로 인하여 우리 <사상계>와 관계있는 업체들이 조사를 받은 결과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들이 또다시 장부 조사를 당하면 모두 저마다 야단법석이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사상계사에는 종이도 팔 수 없다, 인쇄도 하기 어렵다, 제본도 그렇다, 판매도 곤란하다, 광고 거래도 끊어진다, 이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문을 닫아야 한다. 

나 자신 억울하다 하여 타인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히고 결과로 자신도 죽어 버리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 국세청에의 이의신청을 포기하고 그 추징분 세금과 부가되는 시세(市稅)가 나의 채무에  가산되어 도합 1천7,8백만 원의 부채를 지고 말았다. (<장준하문집 3>, 62~63쪽)

박정희 정권은 그렇게 장준하와 <사상계>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장준하가 담보물을 맡기고 거래하던 은행들에게 담보물을 공매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장준하는 담보로 은행에 넣었던 친구 집을 공매당하기 직전에 신촌의 자기 집을 헐값으로 팔아서 빚을 갚았다. 장준하 일가 10여 명은 그의 친구가 경영하는 여관으로 가서 한 달 반 동안 자취를 하다가 서대문구 평동에 작은 전셋집을 얻어 이사를 했다.

장준하가 그렇게 궁지에 몰리자 사채를 빌려준 채권자들이 소송을 제기해서 출판사의 집기들과 그의 가산을 압류했다. 그의 집 전화기는 물론이고 회사의 전화기 7대가 종로세무서에 의해 헐값으로 팔려 나갔다. 그런데도 추징금을 마저 갚지 못해 사채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장준하는 날마다 ‘딸라이자’라는 고금리로 돈을 빌려 은행의 수표를 막아야 했다. 

그는 그 무렵 몇 가지밖에 남지 않은 가재도구에 붙던 ‘딱지’와 관련하여 잊을 수 없는 일을 겪었다. 여덟 살이 된 막내아들이 귀여워하던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 강아지에도 딱지가 붙을까봐 아들이 부모한테 울면서 호소했다. ‘강아지한테 붉은 딱지를 붙이려면 차라리 자기 몸뚱이에 붙이라고.’

장준하는 사상계사의 직원을 반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4백여 쪽으로 이루어진 잡지를 거르지 않고 발간했다. 

장준하의 자녀들은 버스비가 없어 서대문에서 신촌까지 걸어서 통학을 하고 공납금이 1년 반치나 밀렸다. 그는 피로가 심한 데다 불면증까지 걸렸다. 결국 급성간염으로 종로의 조광현 내과에 입원해야 했다. 그러나 <사상계>만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달이 나왔다.  

장준하가 입원해 있던 1965년 4월 3일 ‘한·일협정’이 가조인되었다. 야당 의원들은 한·일협정이 비준되면 총사퇴하기로 결의했고, 범국민투위는 5월 초부터 각 지방을 돌면서 비준을 저지하기 위한 궐기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재야세력과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희 정권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협정을 조인했다. 한·일협정은 ‘한·일기본조약’, ‘한·일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한·일어업협정’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한·일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등 13조약 4협정으로 이루어졌다. 14년 동안이나 진행되던 한·일회담이 일단락된 것이었다. 야당과 학생운동권이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공화당은 8월 14일 국회에서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장준하는 병상에 누워 있던 6월 22일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사상계> 7월호에 ‘한·일협정 조인을 폐기하라’는 ‘권두언’을 실었다. 그리고 퇴원한 뒤 발행된 7월호 ‘권두언’에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이제 한·일 수교라는 미명 아래 집권자의 부정과 그 폭력은 최고에 달하고 있다. 배반자의 무리가 도리어 가상할 만한 군상으로 등용되고 매국하는 자가 스스로 애국하는 자라고 불러도 아무도 그를 탓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이 강산을 흑암으로 뒤덮은 채 그들은 득의양양하고 이에 발분하는 양식의 소리는 너무나 가냘프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심대한 국난에 직면하였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343쪽)


장준하가 입원해 있던 동안 간 기능 검사를 한 의사는 결과가 나오자 그가 사흘밖에 살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투병생활 4개월 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해서 사상계사로 돌아갔다. 


박정희 정권은 <사상계> 인쇄와 판매를 끈질기게 방해했다. 장준하는 몰래 인쇄소를 찾아다니며 <사상계>를 펴냈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다보니 유통망을 거치지 않고 우송 판매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반품 공작을 피하려고 편집실의 직원들이 밤늦게까지 봉투에 책을 넣고 주소를 써서 우송을 했다. 장준하는 자신이 ‘왜 정치 현실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하는 편지를 써서 친필로 서명하고 봉투 안에 넣었다.

 

 

(27) 박정희는 ‘밀수왕초’, 남로당 ‘조직책’

 

196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 한·일회담’을 추진하는 데 대해 야당과 재야세력이 강력히 반대하던 시기에 한국과 미국 정부는 중대한 사안을 협의하고 있었다. 존슨 행정부가 안고 있던 최대의 난제인 베트남전쟁에 한국이 파병을 하는 데 관한 논의였다. 미국과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옛날의 식민지배자 프랑스를 물리치고 독립을 이룬 베트남에 미국이 개입해서 전쟁을 치르겠다는 것을 격렬히 비판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이 ‘추악한 전쟁’의 원인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는 1961년 11월 미국 대통령 케네디와의 정상회담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다. 1962년에 베트남을 방문한 김종필도 파병 의사를 밝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베트남에서 다른 나라의 지원을 받을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1963년 11월 케네디가 암살당한 뒤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존슨은 남북 베트남의 대립에 미군이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존슨이 동남아시아안보조약기구와 유럽의 동맹국들에 참전을 요청했으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1964년 초 박정희가 적극적으로 파병 의사를 밝혔으니 존슨 행정부가 보기에는 ‘최상의 원군’이었을 것이다. 

1964년 5월 미국 정부의 베트남 파병 공식 제안을 받은 한국 정부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7월 30일 베트남으로 보냈다. 이어 1965년 2월 25일 수송부대와 공병대로 이루어진 ‘비둘기부대’가 베트남에 도착했다. 5월 28일 정부는 ‘전투병파병동의안’과 한·일협정비준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8월 23일 한·일협정비준동의안에 반대하던 야당 의원들이 사퇴서를 낸 가운데 공화당 의원들만 참석한 본회의에서 전투병파병동의안이 가결되었다. 정부는 곧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과 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을 10월에 베트남으로 파견했다. 두 부대의 병력은 2만여 명에 이르렀다. 1966년까지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은 5만여 명으로 미국이 보낸 병력과 비슷했다. 

비둘기부대가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부터 국내에서는 ‘비전투부대라 하더라도 게릴라전의 특성 때문에 곧 전투에 휘말릴 것’이라는 우려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투병 파병이 거론되면서 야당 일부 의원들이 신중론을 제기했다. 젊은이들을 남의 나라 전쟁에 보내 피를 흘리게 할 명분도 실익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65년 8월 한·일협정비준안과 전투병파병동의안을 둘러싸고 야당인 민중당이 두 파로 갈라짐으로써 박정희 정권에 맞서는 전선에 혼란이 일어났다. 윤보선계의 강경파 의원들은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고 공화당이 조약을 국회에서 단독으로 비준하자 의원직을 사퇴하고 민중당을 탈퇴해서 신한당을 만들었다.

1966년 5월 26일 신한당 총재 윤보선은 전북 남원 유세에서 “박정희 씨의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는 결국 베트남전쟁의 청부행위에 그치고 말았다. 베트남 증파가 미국의 뜻을 승인한 것도 아니며, 민주주의를 신봉하기 때문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우리 청장년의 피를 팔아 정권을 유지하고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동아일보, 1966년 5월  28일자)

베트남 파병에 관해 견해가 엇갈린 야당과 달리 장준하는 많은 대중집회에서 박정희를 날카롭게 공격했다. 그는 1965년 10월 ‘특정재벌 밀수진상 폭로 및 규탄 국민대회에서 “존슨 대통령이 방한하는 것은 박정희 씨가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1967년 5월 총선거 유세 기간에는 “박정희 씨는 국민을 물건 취급하여, 우리나라 청년을 베트남에 팔아먹었다”고 비판했다.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이 충격적인 사실을 단독으로 보도했다. 그해 5월 삼성재벌이 경남 울산에 (주)한국비료 공장을 건설하면서 대량의 사카린을 건설자재로 위장해서 밀수하다 당국에 적발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최대의 재벌이 밀수로 축재를 하고 있음이 드러나자 여론이 들끓었다. 

이병철의 큰아들 이맹희는 1990년대에 발간된 회고록에서 이 사건이 한국 비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물산이 삼성에 100만 달러 상당의 리베이트를 제공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그에 의하면 박정희를 비롯한 정부 최고위층과 삼성은 이 100만 달러를 셋으로 나누어 3분의 1은 정치자금으로, 3분의 1은 삼성의 공장건설 대금으로, 3분의 1은 한국비료의 운영자금으로 쓰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돈을 직접 반입하기가 쉽지 않자 도입 방법이 논의되었고, 청와대의 회의에서 밀수를 통해 물건을 반입·처분하여 나누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방안은 박정희가 직접 제시했다고 한다. (<한국민주화운동사 1>, 488쪽)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 기간 중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된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신한당 총재 윤보선은 9월 26일 한국비료 밀수사건의 책임이 박정희에게 있으므로 국회가 대통령 탄핵안을 발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중당은 10월 9일 서울 효창구장에 4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밀수 진상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대회를 열었다. 장준하는 10월 15일 민중당이 주최한 대구 집회에 초청연사로 나섰다. 그는 ‘박정희란 사람은 우리나라의 밀수 왕초’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그는 10월 26일 ‘국가원수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었다. 

장준하는 대구 집회에 나가기 전에 <사상계> 10월호 ‘권두언’(‘우리는 또다시 우리의 할 일을 밝힌다’)을 써서 편집진에게 맡겼다. 그는 먼저 1962년 4월 창간 4주년 기념호에 실었던 ‘권두언’을 상기시켰다. “<사상계>는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어떤 특수한 개인이나 집단의 기관지로 전락한 일이 없으며 또한 장차도 그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지는 어떤 개인이나 당파를 맹목적으로 변호하거나 또는 무조건 비판하는 태도를 극력 배격해 왔으며, 그러한 입장은 미래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어서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의 <사상계> 탄압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가는 길을 혼란시킴에 그치지 않고, <사상계>의 자립조차도 허용하지 않으려고 달려들고 있다. 악랄한 수법은 더욱 지능화되어 음성적인 탄압(끈덕진 제작 방해, 판매망에 대한 교란, 제작 유관처에 대한 압력)으로 <사상계>를 고립화시키려고 획책한다. 집권층의 이러한 탄압이 과연 상부로부터의 지시에 의한 것인가, 또는 말단에서 시도하는 과잉충성의 결과인가는 모르나, 그것이 <사상계>를 궁지에 몰아넣어 스스로 그 발간이 불가능함을 절감하도록 하려는 일관된 의도의 노출임이 명백해 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재력과 정력을 기울여 발버둥을 쳐왔으나, 부득이하게 지난 6,7월호를 결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상계>를 아끼는 애독자 제위의 절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다시 8,9월호를 속간하였으며 오늘 이 10월호를 내놓게 되니, 그 감개가 무량할 뿐 이다. 이 시점에 고고히 서서, 그동안 많은 애독자로부터 받은 진실된 충고와 격려의 힘으로 또다시 애독자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아니하는 길을 걸어갈 것을 천명하는 바이다. (<장준하문집 1>, 309~310쪽)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를 두 달 동안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그는 옥중에서 <사상계> 1966년 11월호에 이런 ‘권두언’을 보냈다. “이 난을 메울 수 있는 자유를 못 가져서 미안합니다.” 말 그대로 ‘백지 권두언’이었다.

옥살이를 하면서 건강이 크게 나빠진 장준하가 12월에 출감하자 함석헌을 비롯한 <사상계> 동인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그는 잠시도 한가롭게 쉴 수가 없었다. 1967년 5월의 대통령선거와 6월의 총선을 앞두고 야당통합과 대선후보 단일화를 이루는 작업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상계사는 독재자 박정희의 재집권을 막고, 민중당과 신한당으로 분열된 야당을 하나로 만들어서 총선에서 승리하도록 하는 ‘전략본부’의 구실을 맡게 되었다. 당시 야권에서는 윤보선, 이범석, 허정, 유진오, 백낙준 등이 자천타천으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장준하와 <사상계> 동인들은 후보 단일화를 위해 윤보선, 이범석, 유진오, 백낙준의 4자회담을 주선했다. 

함석헌과 장준하를 비롯한 <사상계> 동인들이 재야세력과 함께 노력한 데 힘입어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해서 신민당으로 출범했다. 대통령후보로는 윤보선이 선출되었다. 

대통령선거를 한 달 앞둔 1967년 4월 장준하는 윤보선의 선거캠프에 들어가서 유세 최일선에 나섰다. 

그 유세에서 장준하는 현직 대통령이자 재선을 노리는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박정희를 통박하는 데 지금까지 그 누구도 감히 쓰지 못했던 언사를 동원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윤보선이 지난 4년 전의 대선에서 ‘사상 논쟁’을 통해 박정희의 아킬레스건을 찌르기는 하였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포문을 연 것은 장준하가 처음이었다. 

“박정희 씨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의 독립 광복군에 총부리를 겨누었으니 이런 인물이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있는 것은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수치입니다.” (·····) “박 씨는 과거 공산주의의 남로당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남한에서 지하조직 활동을 한 사람이며 조직원 동료들을 팔아 희생시키면서 자기 한 목숨을 산 사람입니다.”

이런 유세를 듣는 이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과연 저러고도 무사할까 싶어 박수조차 잊은 채 물을 끼얹은 듯 듣고만 있었다.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350~351쪽) 

1967년 5월 8일 장준하는 대통령선거법 제148조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특정 후보를 비방했다’는 것이었다. 

 

 

(28) ‘옥중 출마’로 국회의원 당선되다

 

장준하가 대통령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1967년 5월 8일은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닷새 뒤였다. 그는 ‘관권 부정선거’ 논란에 아랑곳없이 신민당 후보 윤보선을 116만여 표 차이로 눌렀다. 장준하는 박정희가 재집권하면 자신이 투옥될 것을 예상했는지 <사상계> 5월호에 비장한 어조의 ‘권두언’을  썼다.

도대체, 민주주의 뿌리를 뽑아버린 그 무리들에게 원정(園丁)을 다시 시켜야 하는 것이 이 나라 국민의 판단이라면, 그래서 이 현실이 60년대 우리의 명운이라 한다면, 민족의 전도엔 서광마저 없는 것이다. 총을 대고 돈을 빼앗으면 강도요, 총을 대고 정권을 빼앗으면 ‘전진세력’이라면, 아아, 민족의 장래엔 광명이 있을 리 없다. 또 다시 4년 후, 새로 이 터전을 갈 때엔 눈물일랑 흘리지 말라. 그 대신 피를 삼키고 싸워 이겨낼 각오로 이제부터 응보의 길을 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책임은 국민이 아니면 그 아무도 지고 나설 사람이 없다. 어떤 역사의 반역이라도 그 죄업은 개인 일대(一代)에 그치지만 그 죄업을 가능하게 한 국민의 죄책은 결코 이대로 끝나지 아니한다. 두고두고  그 응보는 국민이 져야 한다. 조화의 장미에 다시 국민의 뜨거운 피가 뿜어져 그 혈훈의 향기가 장미를 싱그럽게 할 때에야 비로소 조화의 민주주의에라도 생기가 돌 것인지······. 그러나 우리는 피를 삼키며 또 4년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열매 없는 허송의 세월이요 죄보(罪報)의 길이요 수난의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장준하문집 3>, 418쪽)

6월 8일로 예정된 제7대 총선거를 앞두고 정부와 집권당은 승리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공화당은 “박 대통령 일하도록 밀어주자”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나중에 밝혀졌듯이, 박정희의 목표는 개헌선인 3분의 2가 넘는 의석을 차지해서 제3공화국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없애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와 내무부가 노골적으로 나서서 공무원들을 동원하고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면서 ‘선거 대책’이라는 것을 마련했다. 정부는 5월 9일 국무회의에서 ‘선거법 시행령’을 고쳐,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 정부위원 등 별정직 공무원도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법 시행령 개정안이 헌법 위반이라는 해석을 내렸다가 정당의 대표자인 대통령만은 국회의원선거법에 따라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고 후퇴했다. 

비가 내리던 5월 어느 날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장준하가 면회를 온 <사상계> 편집부장 유경환에게 철창을 사이에 두고 뜻밖의 말을 했다. 앞으로 투쟁방법을 바꿔야 하겠으므로 6·8 총선에 옥중 출마를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유경환은 장준하가 불러준 대로 몇 마디를 적은  ‘출마의 변’을 언론에 전했다. 장준하가 거주지인 서울 동대문을구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보도를 본 신민당은 이의 없이 그를 공천했다. 

청량리부터 면목동까지의 동대문을구는 장준하가 세금 추징을 당해 집을 잃어버리고 나서 셋집을 돌다가 이사한 곳이었다. 그는 지역 기반은 물론이고 낯을 익힌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공화당 서울시당 위원장인 강상욱은  육사 9기 출신의 이른바 ‘혁명주체’로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는 현역 의원인데다 지역 기반이 탄탄하고 재산도 많았다. “거기에 이쪽은 포승에 묶여 구치소 감방 속에 앉아 있는 몸인데다 그 선거운동원이라는 것은 사상계사에서 나간 취재부장 고성훈 등 세 사람에다가 흰 한복의 수염이 하얀 함석헌 노인 정도였다. 갖출 것을 다 갖춘 상태에서도 막판에는 비정한 돈의 살포가 당락을 좌우하는 선거에서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니 마치 외딴섬이나 어느 허허벌판에 내던져져 선거를 치르는 것이 이쪽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354쪽)

장준하 쪽 사람들은 후보 등록 절차를 허겁지겁 마치고 5월 16일 초저녁 청량리역 광장에서 유세를 시작했다. 청중이 제법 모여들었는데 대다수는 ‘옥중 출마’에 호기심을 느낀 이들 아니면 공화당 쪽에서 ‘염탐’하러 나온 사람들이었다. 청중은 머리와 수염이 새하얀 함석헌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연단에 올라서자 신기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연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러분, 장준하를 살려 주십시오. 장준하 사상계 사장을 국회로 보내 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장준하, 이 사람 감옥에서 죽습니다. 자살할 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앞의 책, 355쪽)

함석헌은 잠깐 말을 멈추고 두루마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청중은 숨을 죽였다. 그의 연설이 끝날 무렵 청중은 깊은 감동을 받은 듯 숙연한 표정이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뒤 신민당의 전국 유세반을 이끌던 박순천이 동대문을구에 나타났다. 민중당 대표를 지낸 그는 ‘정치권의 여장부 ’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함석헌과 박순천의 ‘합동유세’는 놀라운 결과를 빚어냈다. 이튿날부터 ‘장준하 바람’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화당 표가 장준하 쪽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당황한 공화당 후보 강상욱은 검찰 수뇌부에 전화를 걸어 “장준하를 빨리 내놓으라고”고 호통을 쳤다. 석방 절차고 뭐고 따지지 말고 빨리 풀어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장준하는 투표일을 1주일 앞둔 6월 1일 오후에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버스가 지나간 뒤에 손 흔들기나 마찬가지였다. 장준하를 전혀 모르던 유권자들까지 그의 얼굴을 보려고 유세장으로 몰려들었다. 그의 연설은 거침이 없었다.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짖던 이가 대통령으로 군림하여 이 나라는 민족 정기가 말살되고 있습니다. 군사정권이 여러분 자제의 젊은 목숨과 여러분의 고혈을 착취하여 부정 축재한 거금에서 몇 푼씩 나누어 주는 돈봉투에 여러분 고유의 주권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앞의 책, 356쪽)

함석헌과 장준하가 짝을 이루어 하는 연설을 들으면서 청중이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음은 물론이다. 두 사람은 투표일 전날까지 15번이나 합동유세를 했다. 

6월 8일 투표가 끝나자 청량리고등학교 강당에서 개표가 시작되었다. 장준하는 처음부터 강상욱을 멀리 앞질러 가더니, 이튿날 새벽 3시에 당선이 확정되었다. 장준하가 얻은 표는 5만7,119, 강상욱은 3만5,386이었다. 그야말로 압승이었다. 

6·8총선은 ‘총체적 부정선거’였다. 대통령 박정희는 전국적으로 공화당 후보들에 대한 지원유세를 하면서 ‘지역 개발’ 공약을 남발했다. 대다수 국무위원들도 지방 출장을 빙자해서 실질적으로 공화당 후보들을 도왔다. 중앙정보부는 재일동포 출신으로 신민당 전국구 후보가 된 김재화를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뒤 ‘조총련 자금 유입’을 조사한다는 구실로 신민당의 선거자금을 한동안 동결시키기도 했다. 

1967년 6월 8일 선거 당일에는 금권·관권·폭력 선거가 극에 달했다. 군수나 경찰서장은 말할 것도 없고, 선거관리위원장까지도 부정선거에 나섰다. 여수와 벌교에서는 유권자들이 단체로 공화당 운동원이나 공무원들에게 여당 후보를 찍은 투표용지를 보인 다음 투표함에 넣는 공개투표를 하다 발각되었다. 괴한이 투표소에 난입해 야당 참관인을 강제로 밀어내고 미리 기표를 해놓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무더기로 쏟아 넣기도 했다. 항의하던 야당 참관인들은 공화당원들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ㅤㅉㅗㅈ겨났으며 개표가 야당 참관인이 없는 가운데 진행되기도 했다. 경찰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 개표 과정에서는 야당 후보를 찍은 투표용지를 무효표로 만드는 피아노표니 빈대표니 하는 것이 무더기로 나왔다. (<한국민주화운동사 1>, 496~497쪽) 

개표 결과는 ‘박정희의 압승’이었다. 공화당은 130석(지역구 103석, 전국구 27석)을 차지했다. 신민당은 44석(지역구 27석, 전국구 17석)에 그쳤고, 대중당이 1석을 가져갔다. 박정희가 3선 개헌을 마음대로 밀어붙이고도 남을 만한 의석을 챙긴 것이었다.

총선거 이튿날인 6월 9일부터 전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청주, 순천, 곡성, 남원, 무안, 안동, 상주에서 신민당원들과 시민들이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을 규탄하고 나섰던 것이다. 같은 날 신민당은 ‘6·8 총선은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3·15 정·부통령선거보다 더한 최악의 부정선거’라고 규정하고 범국민대회 등 모든 수단을 통해 강력히 투쟁하겠다고 발표했다. 6월 12일부터 신민당이 시작한 장외투쟁은 전국의 대도시와 중소도시들로 번져 나갔다. 신민당은 제7대 총선을 ‘선거쿠데타’라고 단정하고 ‘6·8선거무효화투쟁위원회’를 결성한 뒤 전면 재선거를 요구했다. 

6월 9일부터 부정선거 규탄 성토대회를 열기 시작한 대학생들은 12일부터 본격적인 항의 투쟁에 들어갔다. 13일 서울 시내 주요 대학들에서 터지기 시작한 집회와 시위는 14일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부정선거 규탄 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자 박정희 정권은 15일, 시위가 일어난 대학들에 휴교령을 내렸다. 그래도 항의운동이 더욱 거세지자 박정희는 16일 ‘과열과 부정선거’를 인정한 뒤 화성, 군산·옥구 등 7개 선거구의 공화당 당선자들을 제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신민당은 6월 30일부터 제6대 대통령 취임일인 7월 1일까지 인사동의 당사 옥상에서 ‘민권선언대회’를 열고 취임식장인 중앙청을 향해 부정선거를 성토했다. 

정국이 그렇게 어수선하던 때 국회의원 당선자 장준하는 개인적인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신민당이 등원을 거부했기 때문에 의원 선서를 하지 못한 그는 세비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당연히 큰돈을 만질 것이라고 생각한 빚쟁이들이 집으로 몰려들었다. 사상계사를 경영하면서 진 빚을 갚으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가 옥중에서 출마한 뒤 선거 운동원들이 벽보대나 기본 인쇄물 등을 제작하면서 빌려 쓴 빚까지 갚아야 했다. 빚쟁이들은 장준하의 당선을 축하하러 온 손님들이 보는 자리에서 “그래, 네가 국회의원이냐? 너도 명색이 국회의원이냐?”고 악다구니를 썼다. 장준하는 묵묵히 앉아서 수모를 견딜 수밖에 없었다.

 

 

(29) ‘장준하의 사상계’ 숨을 거두다


6·8부정선거 규탄운동으로 마비된 정국은 다섯 달 가까이 풀리지 않았다. 제7대 국회 개원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신민당은 10월 2일 공화당과 접촉하기로 결정했다. 10월 30일 김종필이 국회 정상화를 위한 대표회담을 제의하자 신민당은 전권대표자회담을 열면 응하겠다고 답했다. 11월 6일 공화당의 백남억·김진만과 신민당의 윤제술·김의택이 회담을 갖고 난 뒤 11월 20일 여야 공동성명서와 의정서 발표에 합의했다. 신민당 당선자들은 11월 29일 등원해서 의원 선서를 마쳤다. 

의원 선서를 하면 공식으로 국회의원 자격을 얻게 되므로 장준하는 미리 사상계사 발행인직을 사퇴해야 했다. 국회의원의 ‘겸직 금지’ 조항 때문이었다. 장준하는 <사상계> 편집위원이며, 조선일보 주필을 지낸 바 있는 부완혁에게 무상으로 판권을 넘겨주기로 했다. <사상계> 편집간부이던 유경환과 고성훈이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공증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장준하가 국회의원직을 떠나면 ‘무상양도’ 형식으로 판권을 되돌려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민당 국회의원 김세영이 사상계사에 자금을 대기로 장준하, 부완혁과 합의했다. 

장준하는 국회에서 의원 선서를 하기 직전 <사상계> 11월호에 ‘야당의 등원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으로 ‘권두언’을 썼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부서진 것이라도 돌려야 한다. 그 한 책임이 한쪽의 수레바퀴처럼 야당에도 있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선거 시에 전 국민으로부터 명백하게 받은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4년간이나 지속되는 헌정에의 빚이다. 여당의 수레바퀴에 비해서 형편없이 작고 약한 것이지만, 국정의 짐을 싣고가는 사명에는 충실하여야 한다. (···) 소수당의 존재 의의 자체조차도 집권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권자를 위해서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국민이 원하는 짐의 탁송을 성실히 수행하는 헌정에의 길에는 야당의 수레바퀴가 닳고 문드러지도록 힘겨운 것이겠지만, 그 어려움을 자임하고 나선 이 상에는 여당의 바퀴에 끌려간다고 생각지 말고 국민의 짐을 받치고 간다고 자부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국민에 대한 야당 의원의 책임을 절감할 것이다. 부서진 바퀴로서 헌정 대도에 분골쇄신할 때 이를 지켜보는 국민도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철저히 일당 국회로 역사 죄인으로 집권당을 몰아세우는 비장한 각오로 임하라. 문제는 야당이 아니라 국민이 의회에 탁송한 의회정치라는 이름의 짐인 것이다. 만일 의회정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에는 새로운 역사를 쟁취해야 할 것이다. (<장준하문집 3>, 427쪽)

장준하는 이 ‘권두언’이 그가 목숨처럼 사랑하고 아끼던 <사상계>에 실은 마지막 글이 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상계>는 1967년 12월호를 낸 뒤 부완혁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는 장준하와 맺은 ‘약정’에 따라 재력가인 김세영의 도움을 받아 1968년 2월호를 발간했다. 당시 사상계사는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지칠대로 지친 데다 자금은 바닥이 나고 빚만 걸머진 채 숨을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사상계>는  종전의 부피보다 훨씬 적은 두께로 제작되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던 중 1970년 5월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터졌다. <사상계> 5월호에 실린 김지하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이 박정희 정권의 아픈 데를 노골적으로 쑤시는 ‘거사’를 감행했던 것이다.   

박 정권은 <오적>이 널리 읽히는 것을 막으려고 <사상계> 시판을 중단시켰으나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이 6월 1일자에 그 작품을 전재하자 엄청난 반응이 나타났다. 6월 2일 새벽 중앙정보부와 종로경찰서 요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가 <민주전선> 10만여 부를 압수했다. 6월 20일 검찰은 김지하, <사상계 발행인> 부완혁과 편집인 김승균, <민주전선> 출판국장 김용성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계급의식을 조장하고 북한의 선전에 동조했다’는 것이었다. 

그 시기에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기관들은 1971년 4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박정희의  ‘3선’을 위해 갖은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박정희는 난데없이 튀어나온 <오적>에 관한 보고를 받고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당시 29세이던 김지하가 판소리 형식으로 쓴 <오적>은 부정과 부패로 물든 권력과 재벌을 통렬하게 풍자하고 조롱하는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오적>은 이렇게 시작된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 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길 하나 쓰것다.


김지하는 박정희가 독재자로 군림하던 1970년에 호의호식하던  ‘오적’을 질펀한 풍자와 해학으로 묘사했다.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 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 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쪽
 남북간에 오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 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하고 목 질기기가 동탁 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의 소굴이렸다.

 사람마다 뱃속이 오장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의 배안에는 큰 황소불알만한 도둑보가 곁붙어 오장칠보, 
 본시 한 왕초에게 도둑질을 배웠으나 재조는 각각이라
 밤낮없이 도둑질만 일삼으니 그 재조 또한 신기(神技)에 이르렀것다.


위에 나오는 ‘황소’가 공화당의 상징이고, ‘한 왕초’는 박정희를 가리키는 표현임은 웬만한 중고등학생들도 선뜻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문공부는 1970년 9월 1일자로 <사상계>의 등록을 취소했다. ‘자체 인쇄소를 지니지 못한 출판사는 인쇄 계약을 맺은 인쇄소 책임자를 잡지의 인쇄인으로 등록하라’는 규정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사상계사는 문공부장관을 상대로 ‘등록취소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내서 1972년 4월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지만 되살아나지 못했다. 경영자금도 없는 데다 갈수록 포악해지는 박정희 정권 앞에서 <사상계>에 글을 쓰겠다는 사람도 거의 없고 인쇄소를 구하기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984년 부완혁이 사망한 뒤 장녀 부정애가 <사상계> 판권을 상속 받았다. 부정애는 1998년 6월에 통권 206호를, 2000년 6월에 통권 207호를 발간했으나 상징적인 출판에 불과했다. 

장준하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뒤 그와 부완혁은 <사상계> 판권 양도를 둘러싸고 심한 이견을 보이다가 감정이 악화되어 송사까지 벌였다고 한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함석헌은 ‘사상계’라는 제목으로 쓴 긴 글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사상계>가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장준하가 옳아서 이겨도 아니 되고 부완혁이 옳아서 이겨도 아니 됩니다. 누가 이겨도 <사상계>는 자살입니다. 두 사람이 의견이 다르다는 것, 싸운다는 것은 그것을 바로 듣는다면 이렇습니다. “<사상계>가 죽게 됐습니다. 제발 살려주시오.” <사상계>가 다 죽게 되어도 누가 살려주려 들지도, 힘을 쓰지도 않기 때문에 내분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은 물론 도덕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 개인적인 시비를 따져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옳고 그름은 개인적인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5·16에 대하여는 그 일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도덕적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도학선생의 도덕이 나라와 시대를 못 건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잘잘못을 가리는 동시에 그 역사적 시점에서는 박 모나 김 모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아니 됐던가 하는 것을 가려내어야 역사는 구원됩니다. <사상계>의 비극의 원인은 개인적인 데 있지 않습니다. (<함석헌전집 10-달라지는 세계의 한길 위에서>, 35쪽)

장준하는 1967년 12월호가 발행인으로서 펴내는 마지막 <사상계>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국회의원 자리를 떠나면 부완혁이 ‘약정’에 따라 당연히 판권을 돌려주리라고 믿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장준하의 사상계’는 1967년이 저물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30) 3선 개헌 반대투쟁 선봉에 서다


장준하가 1967년 11월 29일 제7대 국회의원으로 등원한지 두 달도 되지 않은 1968년 1월 21일 북한이 보낸 특수부대가 청와대 습격을 기도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틀 뒤인 23일에는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북한 해군 초계정에 납치되었다. 국민들은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공포분위기에 휩싸였다. 

박정희 정권은 ‘안보 위기’를 강조하면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4월 1일 항토예비군을 창설했다.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는’ 향토예비군은 무려 250만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모든 예비역 장병이 ‘유사시’에  ‘총력전’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그 조직의 목적이었다. 5월 10일에는 주민등록법이 공포되었다. ‘행정사무의 원활한 처리를 위해 주민의 거주관계를 파악하고 인구동태를 명확히 하고자’ 제정되었다는 그 법 때문에, 주민등록을 피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개인의 신상이나 동향도 정부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다. 

4월 5일 정부는 ‘학생군사훈련 강화 방침’을 발표했다. 국방부와 문교부가 정식 합의를 거쳐 1969년 신학기부터 남자고등학교 2·3학년 학생과 ROTC 교육을 받지 않는 남자 대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전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예비역 출신의 장교를 배치해서 고등학교는 매주 3시간씩, 대학교는 1·2학년생에 한해 매주 2시간씩 기본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했다. 향토예비군 창설,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강제 군사훈련은 ‘사회의 병영화’로 가는 첫 걸음이었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이던 장준하는 <신동아> 1968년 7월호에 기고한 ‘향토예비군 무장의 선행조건’이라는 글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사회 병영화 정책’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신민당이 당론으로 개정을 반대하던 ‘향토예비군 설치법’의 개정법률안이, 드디어 집권당만으로 변칙국회에서 통과되는 시간에, 나는 본회의장이 아닌 방청석에서 그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신민당 의원들과 같이 퇴장을 함으로써, 소수 의사가 짓밟히는 의회정치의 새로운 비극을 면하려는 투쟁 방법···, 그러나 나는 이 법률안의 통과에 대해서만은, 똑똑히 나의 두 눈에 기록하고 싶었던 어떤 무의식적 충동에 이끌리어, 방청석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 내가 국방위원회에서 제공하여 준 자료로 분석 판단할 적에, 가상 북괴의 남침에 대비 대처해야 할 일은, 군의 정신면의 철저한 재무장과 더 적극적인 자립 국방책과 이에 따르는 군수산업 및 국군의 장비 현대화 등 더 고차적인 문제이지, 경찰에 끌려 다녀야 할 예비군의 조직과 무장으로는 미흡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가지 문제점을 지적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향토예비군설치법 개정법률안이 통과되기도 전에 서두르는 예비군의 조직은 무엇을 우리에게 암시하는가. (···) 금이 간 것은 이미 수백만의 국민이, 청장년이, 경찰의 지휘 감독 안
에 고스란히 들어가버린 사실이다. (<장준하문집 1>, 124~126쪽)

박정희 정권이 ‘안보 위기’를 강조하면서 사회 병영화를 강행하고 있던 1968년 5월 ‘국민복지회 사건’이 터졌다. 김종필의 측근인 공화당 의원 김용태가 송상남, 최영두, 예춘호, 신윤창, 이원만 등과 함께 ‘한국국민복지연구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1971년 4월 대통령선거에 김종필을 박정희의 후계자로 내세우려는 공작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공화당은 5월 24일 당기위원회를 열어 김용태, 송상남, 최영두 등을 ‘해당행위자’로 규정하고 제명했다. 김종필은 30일, 공화당 의장직을 사퇴하고 탈당한 뒤 모든 공직을 떠나 정계에서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박정희의 조카사위로서 5·16 쿠데타세력의 제2인자이던 김종필은 ‘3선 대통령’을 향해 치닫던 박정희에게 도전한 ‘죄’로 ‘팽’당하고 말았다. 

1968년 12월에 접어들면서 공화당의 박정희 심복들은 본격적으로 3선개헌을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은 12월 17일 부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이 원한다면 개헌을 단행하겠다’고 말했다. 공화당 사무총장 길재호는 1969년 1월 6일 ‘헌법 개정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고, 정책위원장 백남억은 9일 당무회의에서 3선개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마침내 1월 10일 박정희의 입에서 개헌에 관한 의견이 나왔다. 그는 연두 기자회견에서 “특별한 상황이 없는 한 내 임기 중에는 헌법을 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심경”이며,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꼭 있다 해도 연초부터 왈가왈부 하는 것은 좋지 못하며, 금년 말이나 내년 초에 얘기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공화당 안에서 개헌을 거론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특유의 아리송한 어법이었다. 그 말을 듣고 대다수 야당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은 박정희가 3선 개헌을 강행하리라는 판단을 굳히게 되었다. 

   
국회의원 시절 군부대를 시찰하고 있는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청와대와 공화당,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박정희 측근들이 개헌 작업을 계속 추진하자 4월 8일, 공화당 안의 반대파가 신민당이 제출한 문교부장관 권오병 해임건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4·8 항명’이라고 부르는 그 사건이 터지자 격분한 박정희는 주동자들을 찾아내라고 중앙정보부에 지시했다. 결국 4월 15일 예춘호, 김달수, 박종태 등 국회의원 5명과 당원 93명이 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개헌반대세력이 약화되자 박정희는 7월 25일 아래와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1)기왕에 거론되고 있는 개헌 문제를 통해 나와 이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는다.
2)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될 때에는 그것이 곧 나와 이 정부에 대한 신임으로 간주한다.
3)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될 때에는 나와 이 정부는 야당이 주장하듯이 국민으로부터 불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즉각 물러선다.

7월 30일 공화당 의원총회는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는 헌법 조항을 ‘2차에 한하여’로 고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공화당 의원 121명은 8월 7일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1969년 6월부터 대학가에서 3선개헌에 반대하는 집회와 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던 신민당과 재야세력은 7월 17일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투위)’ 발기인대회를 열고 목사 김재준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범투위가 발족한 뒤에 신민당은 내부적으로 진통을 겪었다. 국회를 떠나서 ‘장외’로 나가는 데 반대하는 의원들이 다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비교적 소장층에 속하던 박영록이 ‘거리로 나선 학생들과 함께 3선 개헌 반대투쟁을 벌이자’고 장준하에게 제안했다. 장준하는 그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장준하는 이미 그 이전부터 범투위 결성에 깊이 관여한 바 있었다. 윤보선과 함석헌을 고문으로, 김재준을 위원장으로 추대하면서 자신은 선전위원장을 맡았던 것이다. 장준하는 범투위의 전위대 역할을 맡은 학생운동권 출신의 청년들이 3선 개헌 음모를 고발하는 전단 50만여 장을 서울시내 전역에 뿌리도록 했다. 전단 살포의 배후를 파악한 경찰이 장준하를 종로서로 소환했다. 수사관은 전단을 누가 작성했는지를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장준하는 ‘그 전단은 내가 문안을 만들고 배포도 내가 시킨 것’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경찰은 전단을 뿌린 청년들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3선개헌을 반대하는 가두투쟁에 대해 장준하의 동의를 얻은 박영록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비록 초선이었지만 이미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국제적 인물이었고 <사상계>를 통하여 이 나라 지성인의 귀감이 되어 있는 터였으며 재야의 대표로 국회에 파견되어 있는 분위기여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같은 의원이면서도 상당한 무게를 싣고 있었다. 특히 그가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이 ‘밀수 왕초’ 발언으로 투옥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당선 초부터 폭풍을 몰고 왔던 처지였다. 그런 장 의원이 원외투쟁을 하자는 내 제의를 거절할 리가 없었다. 나는 그의 동의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고 이어서 이기택 의원, 우홍거 의원 등의 동의를 얻었다. (‘온 몸으로 실천한 애국운동’, <장준하 선생 20주기 추모문집>, 317~318쪽) 

신민당의 박영록 등 의원 몇 사람은 장준하한테서 가두투쟁에 대한 동의를 얻은 이튿날 거리로 나섰다. 철사로 서로 몸을 묶고 태평로의 국회의사당을 뛰쳐나간 것이었다. 그들은 경찰의 저지를 뚫고 시청 앞을 거쳐 을지로 입구까지 진출하면서 ‘3선개헌 반대’를 외쳤다. 그날 오후 신문들에는 철사로 몸을 동여맨 국회의원들의 사진이 크게 보도되었다.

박영록은 앞의 글에 당시 느낌을 기록했다.

“나는 이 데모의 수행 전후에 장 선생의 인간됨을 다시 한 번 절감한 바 있다. 그분 정도의 커리어를 가진 국회의원은 점잖게 뒤로 앉아서 앞장서지 않는 것을 마치 권위인양 내세우는데 장 선생은 그 점에서 너무도 소탈했다. 역시 아무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애국운동을 해온 분이 다르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것이다.”

야당과 재야세력, 그리고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공화당은 1969년 8월 7일 ‘3선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신민당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항의농성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9일 전인 7월 29일 신민당 소속 의원인 성낙현, 조흥만이 ‘3선 개헌에 찬성한다’면서 탈당한 데 이어 30일 연주흠이 그 뒤를 따르자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이라는 비판이 일어났다. 신민당은 9월 7일, 탈당한 세 사람의 의원직을 박탈하기 위해 자진 해산한 뒤 신민회라는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다. 

공화당은 9월 9일 ‘3선개헌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다. 신민회 의원들이 본회의장에서 장기 농성을 하고 있던 14일 새벽 2시 30분쯤 국회의장 이효상이 태평로의 본관 건너편에 있던 제3별관에서 제6차 본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는 도둑고양이들처럼 어둠을 헤치고 온 의원 122명(공화당 107명, 정우회 11명, 무소속 4명)이 모여 있었다. 이효상은 의원 김용진의 제안설명만 듣고 질의와 토론을 생략한 채 개헌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야당 의원들과 시민들의 눈을 피하려고 희미한 불빛 아래서 치러진 표결은 박정희에게 ‘대통령 3선’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 헌정쿠데타’를 통한 그의 종신집권 기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31) 정치활동과 함께 '씨알의 소리' 편집


1971년은 제7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지는 해였다. 민주공화당 후보로는 개헌으로 ‘3선’이 가능해진 박정희가 나섰고 야당인 신민당 후보로는 김대중이 출마했다. 4월 27일로 예정된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의 종신집권인가 야당의 승리인가’에 국민의 관심이 쏠렸다. ‘40대 기수론’을 함께 내건 김영삼과 이철승을 물리치고 신민당 후보로 선출된 김대중은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교류’,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평화 보장’,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박정희 진영은 그런 공약이야말로 ‘빨갱이들이나 주장할 정책들’이라고 몰아붙였다. 

박정희와 그의 참모들은 ‘호남인이 집권하면 경상도 사람은 다 망한다’고 지역감정을 부채질하면서 전라도 지방에서는 장밋빛 공약을 남발했다. 김대중은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면 앞으로 직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근거로 ‘유력한 국제정보 소식통’을 들었다. 박정희가 타이완의 장개석처럼 종신집권을 꾀하리라는 것이었다. 1972년의 ‘10월 유신’은 실제로 그런 결과를 낳았다. 

‘관권과 금권이 총동원된 선거’라는 야당의 비난이 거셌지만 대선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로 나타났다. 박정희는 유효투표 가운데 634만여 표, 김대중은 539만여 표를 차지했다. 

장준하는 대통령선거를 앞둔 4월 어느 날 신민당을 탈당해서 무소속 의원이 되었다. 당시 신민당 총재 유진오가 3선개헌 저지투쟁 과정에서 과로로 쓰러져 정계 은퇴를 선언하자 유진산이 당권을 잡게 되었다. ‘타협의 명수’라는 별명을 듣고 있던 유진산은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었다. 유진산은 신민당 대선후보 경쟁에 나선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사이에서 정치적 술수를 부리다가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 

 장준하는 신민당의 이와 같은 사정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자신이야말로 박정희와 대결하여 한판 자웅을 결할 수 있는 적격   인물이라고 믿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광복군과 일본군 출신, <사상계>를 통한 민주신봉자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독재자······. 무엇으로 보든 자신이야말로 박정희를 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주변의 양심적인 인사들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장준하는 신민당의 ‘40대 기수’ 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의 장벽은 너무 높았다. 장준하를 아끼는 사람들은 출마를 말렸다. 정당이나 자금, 조직도 없는데다가 이북 출신이라는 단점을 안고 있었다. 장준하는 고심 끝에 신민당을 떠나 새로운 민주세력의 규합을 위하여 신당운동을 추진했다. (<장준하평전>, 495~496쪽)

장준하가 신민당을 탈당하던 때 함께한 정치인들은 민주당 구파 계열의 윤보선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이들이었다. 장준하는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1971년 1월 6일 윤보선, 박기출 등과 함께 국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대통령선거가 박정희의 승리로 끝난 지 한 달 뒤인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졌다. 장준하는 국민당 후보로 자신의 지역구인 동대문을구에 출마했다. 4년 전에는 여당의 강상욱과 싸웠지만, 이번에는 제1야당인 신민당 후보와도 경쟁을 벌여야 했다. 박정희 정권이 은밀하게 장준하를 견제했음은 물론이다. 다른 후보들은 대낮에 유세를 하는데 장준하는 어두워진 뒤에야 연설을 할 정도로 탄압이 심했다. 결국 장준하는 낙선하고 말았다.

3선에 성공한 박정희가 총선을 ‘방임’했던지, 신민당이 크게 약진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공화당 의석이 선거 전의 117석에서 113석으로 줄어든 데 비해 신민당 의석은 37석에서 89석으로 무려 52석이나 늘었다. 윤보선과 장준하의 국민당 의석은 선거 전 2석에서 1석으로 줄어들었다. 낙선한 장준하가 정치활동을 하기에는 너무나 왜소한 정당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장준하는 현역 의원이던 1970년 4월, 함석헌이 창간한 <씨알의 소리>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함석헌은 서울 원효로 4가의 작은 집에서 발행인 겸 편집주간으로 그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장준하의 <사상계>는 1967년  말에 부완혁에게 판권이 넘어갔고, 그 <사상계>마저도 ‘오적 필화사건’으로 명맥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장준하는 피난수도 부산에서 <사상계>를 창간한 1953년으로 돌아가서 <씨알의 소리> 원고를 직접 청탁하고 편집도 하는 일을 맡았다. 장준하를 중심으로 구성된 편집위원회에는 전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 스님 법정, 연세대 교수 김동길, <사상계>의 오랜 동인들인 김성식, 계훈제, 최석채, 안병무, 이병린이 참여했다. 나중에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 이태영도 합류했다. 

그 무렵 인쇄술이 발달해서 잡지들이 갈수록 화려해졌는데 <씨알의 소리>는 초라한 표지에 국판 70여 쪽밖에 낼 수 없었다. 함석헌은 같은 호에 세편이나 글을 싣기도 했다. 재정이 어려워서 두 달치를 합병호로 내는 것이 예사였다. 장준하는 그 잡지에 <브니엘>이라는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971년 5월에 펴낸 <돌베개>에 기록한 항일투쟁과 해방정국의 경험 이후 30년간의 삶과 활동을 자전적으로 쓴 내용이었다 

당국으로서는 오랫동안 골치를 썩인 <사상계>가 없어져서 한시름 놓았다 싶었는데 또 <씨알의 소리>라는 새 골칫거리가 생겨난 격이었다. 겉보기에 별 색깔이 없는 척하다가 어느 때 돌발적인 기사와 특집을 실어 폭발을   일으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창간 초에는 내색이 덜하다가 차츰 색깔과 목소리를, 그 실린 글의 행간에 내뿜기 시작하자 정보당국의 손길이 미쳐왔다.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390쪽)

<씨알의 소리>는 인쇄와 제본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제때 대금을 주지 못하는 데다 정보기관이 인쇄소와 제본소에 일을 맡지 말라고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편집회의를 하는 일조차 쉽지가 않았다. 장준하는 어느 날 은밀한 장소에서 편집회의를 주재하다가 정보기관원에게 연행되었다. 마침 그날이  8월 15일이었다. 그는 “광복군 장교였던 내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중국 땅 수천 리를 맨발로 헤맨 내가 오늘날 광복된 조국에서 그것도 광복절날 이런 데로 끌려다녀야 하겠소?”라고 호통을 치고 풀려났다고 한다. 

장준하가 <씨알의 소리>에 실은 대표적인 글은 ‘민족주의자의 길’(1972년 9월호)이었다. 이 글은 그의 사상과 삶의 철학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민족주의자가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한 인간이 민족적 양심에 따라 자기의 생애를 살아가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인간적인 삶, 고달픔과 보람을 민족의 그것과 함께하는 것이리라. 

민족적인 삶이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받고 있을 때 민족적인 양심에 살려는  
사람의 눈물과 노력은 모두 이런 민족적인 간난을 극복하려는 데 바쳐진다. 

하물며 민족이 민족으로서의 존재조차 없어지려 할 어두운 시절에는, 민족이 외세의 침략에 눌리어 그 마지막 숨통이 끊어지려는 암울한 시절에는, 민족주의자는 자기의 생명조차 민족적인 삶을 되찾는 싸움 속에서 불태우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민족의 생명, 민족의 존재가 이미 없어져 버릴 때는 민족의 한 사람인 그의 개인적인 인간적인 생명과 존재조차 없어져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적인 생명과 존재와는 따로 있는 자기, 민족의 생명이 끊어진 뒤에도 살아 있는 자기, 민족이 눌리고 헐벗고 있을 때 그렇지 않은 자기는 이미 자기 아닌 자기이며, 그렇기에 자기의 생명을 실현하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자기의 삶을 사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참으로 인간적인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살아간 길의 갈림길이었다. (<장준하문집 1>, 50~51쪽)


함석헌과 장준하가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씨알의 소리>를 꿋꿋하게 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권의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성금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씨알의 소리>는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기에 등록 취소와 폐간 등 온갖 탄압을 받아 명맥이 끊어졌다가 되살아나서 지금도 발간되고 있다. ‘씨알’의 생명은 참으로 끈질기기도 하다. 



(32) 정치권 떠나 재야 ‘반유신 투쟁’ 대열로


 

1971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야당과 학생운동세력에 대해 일시적으로나마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가 6월에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자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지난번 대선에서 ‘차기에는 불출마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을 지키려는 움직임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0월부터 유화국면에 찬물을 끼얹는 쪽으로 돌변했다.


11월 30일 국방부장관 유재흥은 “북한이 더욱 호전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20일 이내에 서울을 점령한다는 ‘20일 군사작전’을 채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주의권을 상대로 ‘데탕트 정책’을 펼치고 있던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즉각 그런 사실을 부정했다. 국무부장관 로저스가 12월 1일 주한미국대사에게 보낸 외교전문이 그 증거였다. “한국 정부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강조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것은 아시아에서 긴장 완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정책은 물론 남북대화 분위기도 해치는 것이니 미국 정부의 이런 우려를 한국 정부 요인에게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1971년 12월 6일 느닷없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안(국가보위법안)’을 국회에 제출한 뒤, 국회의장에게 서한을 보냈다. 만일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비상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야당인 신민당 의원들은 납득할 수 없는 박정희의 ‘국가비상사태’ 선포와 국가보위법안 통과 압력을 비판하면서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러자 공화당은 1969년의 ‘3선 개헌안’ 날치기 때처럼 12월 27일 국회 제4별관에서 그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했다. 

국가보위법은 ‘안보위기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했다. 거기에는 언론을 통제하고 노동자의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제약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1971년 7월 1일에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정희의 임기는 3년 반이나 남아 있었다. 그가 5·16 쿠데타 이후 10년 동안의 독재와 철권통치를 누그러뜨리고 민주화와 남북 화해를 위한 정책을 실천했다면 지난날의 과오를 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공포와 억압의 정치를 강화한 목적은 종신집권에 있었음이 나중에 드러났다. 그런 공작은 1972년 늦은 봄에 시작되었다. 5월 2일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해서 주석 김일성을 만나 두 차례 회담을 갖고 돌아왔다. 29일에는 북한 부수상 박성철이 서울에 와서 박정희와 회담을 했다. 그 결과로 7월 4일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 3원칙’을 밝히는 남북공동성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통일이 눈앞에 성큼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국민들의 착각으로 드러났다. 1972년 10월 17일 저녁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서울 시내 곳곳에 군 병력이 배치되고 광화문 네거리에 탱크가 동원된 상태에서 박정희는 텔레비전에 나와서 특별선언을 읽었다. 국회를 해산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며,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그 기능을 비상국무회의가 대행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향후 새로운 헌법개정안을 공고해서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하고, 개헌안이 확정되면 1972년 말까지 헌정질서를 정상화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의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이 들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른바 ‘10월 유신’이라는 명분으로 발표된 ‘대통령특별선언’은 헌정쿠데타를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위한 공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1월 21일 개헌안에 대한 찬반투표가 실시된 결과, 총 유권자의 91.9%가 참여해서 91.5%가 찬성했다는 놀라운 기록이 나왔다. 박정희는 12월 13일 계엄령을 해제하고 15일, ‘거수기’ 2,359명으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재야운동권 일각에서는 그 무렵 장준하를 ‘재야대통령’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내력은 1967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5월에 치러질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권에서는 후보 단일화와 야당통합을 위한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1965년 한·일협정 비준 과정에서 반대투쟁 방법에 관한 견해 차이로 민중당과 신한당으로 갈라진 야당은 대선을 다섯 달 앞둔 1966년 말에도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두 야당과 재야세력은 12월 24일 야당 통합과 대통령후보 단일화를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가 점검해 보니 10명이 넘는 정치인들이 서로 후보가 되겠다고 나서고 있었다. 거르고 거른 결과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은 윤보선, 백낙준, 이범석, 허정, 장택상, 유진오였다. 위원회는 그들 가운데 장택상 한 사람만 가까스로 사퇴시켰다. 

정치권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사상계> 동인들이 나섰다. 장준하와 <사상계> 주간 지명관, 편집위원 김준엽 등이 예비후보들을 접촉해서 한 사람씩 양보를 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백낙준만 경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그는 다른 예비후보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상계의 장준하 사장을 후보로 합시다. 어때요?” 그때부터 장준하에게 ‘재야대통령’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박정희가 ‘10월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헌정쿠데타를 저지른 1972년 10월 장준하는 함석헌과 함께 <씨알의 소리>를 만들어 보급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유신체제’가 세워진 뒤 첫 번째 국회의원 총선거가 1973년 2월에 실시된다는 정부 발표를 본 장준하는 다시 정치 일선으로 나섰다. 당시 통합야당인 신민당에서는 총재 유진산을 중심으로 체제 순응적인 정치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10월 유신’ 직전 일본에서 신병 치료를 받다 망명한 김대중은 1973년 7월 6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창설한 뒤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신민당 수석부총재 양일동은 ‘강경·선명야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탈당계를 낸 뒤 1973년 1월 민주통일당(통일당) 창당을 주도했다. 장준하는 그 당에 합류해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독립운동가 정화암, 장군 출신 김홍일, 야권의 원로 윤제술과 김선태도 통일당에 참여했다. 

그해 2월 장준하는 통일당 후보로 서울 동대문을구에 출마했다. 제9대 총선은 한 지역구에서 2명을 뽑는 ‘동반선거’였다. 그래서 대부분 지역에서 공화당과 신민당 후보가 나란히 당선되었다. 개표 결과 공화당은 7명, 신민당은 52명, 무소속은 12명이 당선되었다. 통일당은 단 2석을 얻었다. 장준하는  낙선했다.

3월 7일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이 추천한 후보 73명을 국회의원으로 뽑았다. 그들은 ‘유신정우회’라는 교섭단체를 구성했다.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임명한 의원들이 지역구에서 당선된 의원들과 같은 수자로 ‘유신국회’의 양 날개를 이루게 되었다.

유신체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 자체가 장준하의 대의나 입지(立志)와는 걸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박정희 체제와 싸울 길이 달리 없으므로 택   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장준하의 생각이 짧았을 수도 있고, 여전히 박정희 집단의 본질과 행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내린 서툰 선택일 수도 있다. ‘유신국회’는 장준하가 들어앉을 자리도, 들어갈 수도 없는 장막이었다. (<장준하평전>, 509쪽)

1973년 8월 8일 한민통 의장 김대중이 일본 도쿄의 그랜드팔레스 호텔에서 한국 중앙정보부의 공작원들에게 납치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배에 실려 태평양에 수장(水葬)될 뻔했다가 미국 정부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8월 13일 서울 동교동의 자택 부근에 버려졌다. 

일본 정부는 주일한국대사관 소속 1등서기관 김동운(중앙정보부 간부)의  지문이 납치 현장에서 채취되었다고 발표했고, 요미우리신문은 ‘한국의 모 기관이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련됐다’고 보도했다. 박정희의 최대 정적인 김대중을 중앙정보부가 납치해서 살해하려 한 사건이 나라 안팎에서 큰 파문을 일으키자 박정희는 궁지에서 벗어나려고 일본에 사절단을 보내는 등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그는 11월 2일 ‘사과’와 ‘재발 방지’를 적은 친서를 국무총리 김종필에게 주어 일본에 보내 ‘진사(陳謝)’를 하도록 하고서야 겨우 위기를 벗어났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유신독재 아래서 침묵하던 학생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 5백여 명이 교정에서 집회를 열고 ‘반독재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것을 필두로 전국의 대학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동아일보사의 젊은 기자들이 그때까지 금기로 되어 있던 ‘반유신 시위’를 처음으로 보도하자 잔뜩 위축되어 있던 재야인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준하는 그 무렵 통일당을 떠났다. 범야권을 하나로 묶으려면 통일당 당적을 버리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는 김재준, 김수환, 함석헌, 지학순, 홍남순, 이태영, 강원용, 법정, 계훈제, 백기완 등을 만나면서 유신독재체제를 깨뜨리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김대중은 자택에 연금된 상태였다. 

1973년 12월 23일, 장준하는 유신독재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동대문구 면목동의 자기 셋집으로 동지들을 불러들였다.

 



(33) 박정희 겨눈 ‘재야대통령’의 사생결단


1973년 12월 23일 저녁 장준하의 셋집에는 그와 계훈제, 백기완이 함께 앉아 있었다. 얼마 뒤에 동아일보사 문화부 기자 이부영이 들어왔다. 그들은 대문을 걸어 잠그고 ‘개헌청원운동본부’ 창립 취지문과 ‘헌법 개정 백만인 서명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성명서 초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0월 유신’ 뒤 1년 2개월 만에 박정희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개헌청원운동’에 얽힌 비화는 박경수의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부영은 (···) 조홍규·김도현 등과 함께 3선 개헌 반대운동의 구심체였던 ‘범투’의 청년위원 중 하나로 장준하의 아낌을 받는 젊은이였다. 장준하가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 비서였던 손수향이 그의 부인이 되었고 그래서 장준하와 더욱 각별한 사이였다. 그런 이부영은 장준하가 하는 일에 대한 보안을 철저히 지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 당시 기자였던 그는 개헌 청원을 위한 선언문을 받아 쓰라는 부탁을 은밀히 받고 이날 합석하게 된 것이다. 이튿날 새벽에야 취지문과 성명문, 그리고 서명 양식 등이 작성되고 미리 부탁해 놓은 등사집에서 프린트가 되었다. (381쪽)

장준하가 박정희를 직접 겨냥한 ‘개헌청원 국민운동’은 형식이 평화적이었지만 ‘유신헌법’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이었다. 정보기관원들이 감시와 미행을 당하고 있던 그가 그 일을 성사시키기까지 우역곡절이 심했다. 1973년 말 어느 날 그를 돕던 청년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김도현이 장준하에게 물었다. “선생님, 유신헌법을 고치자고 하는 것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더러 그만두라는 얘기 아닙니까? 지금 여건에서는 단지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생명마저 위협받는 것이 되니 그렇다면 이쪽의 생명도 그만큼 위협받지 않겠습니까?” 다른 청년들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장준하는 1972년 10월에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하기 1주일 전쯤 건장한 젊은이 몇 사람이 그를 찾아와서 그를 지프에 태우더니 ‘빙고 호텔(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달려갔다. ‘잡혀 들어가면 익사체로 한강에 뜨는 것이 예사’라는 소문이 나 있던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그들은 지하실에서 장준하를 향해 ‘박정희 정권에 협조하라’고 을러댔다. 

“내가 완강히 거절하니까 전기고문을 당해봐야 굴복할 것 같다면서 위협하더군. 그래서 벌떡 일어나면서 ‘일제하에서도 내가 왜군과 싸우다 죽지 못한 광복군 출신인데, 어디 광복된 조국에서 왜놈 군관 출신 독재자놈의 전기고문 맛을 좀 보자’고 소리치면서 웃옷을 벗어 던지고 전기고문 의자로 보이는 곳으로 걸어가니까 놈들이 당황하는 빛이 역력해지더군.” (···) 

“태도가 일변해서 ‘선생님,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선생님을 고문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조치가 있을 겁니다. 이러는 거야.”

그러더니 그들은 묻지 않는 말까지 덧붙였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인사들을 대하여 봤습니다만 전기고문 앞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한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 뵙습니다. 존경합니다.” (앞의 책, 383~384쪽)

장준하의 그 이야기를 들은 청년들은 ‘개헌청원 국민운동’에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다.

1973년 12월 24일 재야 민주인사 30명이 발기인으로 나선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서명 순서대로 된 발기인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장준하, 함석헌, 법정, 김동길, 김재준, 유진오, 이희승, 김수환, 백낙준, 김관석, 안병무, 천관우, 지학순, 김지하, 문동환, 박두진, 김정준, 김찬국, 문상희, 백기완, 이병린, 계훈제, 김홍일, 이인, 이상은, 이호철, 이정규, 김윤수, 김승경, 홍남순.

그들은 그날 서울 YMCA 회관에서 모임을 열고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시켰다. ‘개헌 청원운동 취지문’은 그 운동을 주도한 장준하가 낭독했다. 

오늘의 모든 사태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전히 회복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경제의 파탄, 민심의 혼란, 남북 긴장의 재현이란 상황 속에서 학원과 교회, 언론계와 가두에서 울부짖는 자유화의 요구는 등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오늘의 헌법 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오늘의 헌법은 그 개정의 발위권이 사실상 대통령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 국민은 이와 같이 헌법 개정 발의권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우리들의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   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 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이 운동은 우선 우리들 모두의 내 집안에서부터 시작하여 학원과 교회 그리고 각 직장과 가두에서 확대될 것이다. 

청원 내용

현행헌법을 개정하여 현행헌법이 이전의 민주헌법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김삼웅 편, <민족·민주·민중선언>, 1984, 171쪽) 

국무총리 김종필은 12월 26일 밤 9시 40분부터 40분 동안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특별연설’을 하면서 개헌운동을 즉각 중지하지 않으면 강력히 처벌하겠다고 경고했다. 12월 29일에는 박정희가 직접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나는 (···) 유신체제의 불가피성을 누누이 설명하고 절대로 경거망동이 있어는 안 되겠다는 점을 간곡히 호소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일부 불순분자들은 아직도 과대망상에 사로잡혀서 (···) 나는 이들의 황당무계한 행동이 자칫 국가안위에까지 누를 미칠까 염려하여 한 번 더 냉철한 반성과 자제를 촉구하는 동시에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소위 헌법개정 백만인 청원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경고해 두는 바이다.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1970년대 편 2권>, 122쪽) 


박정희의 노골적인 협박에 아랑곳하지 않은 재야인사들과 시민들은 ‘개헌 청원 서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운동이 시작된 지 8일만인 1974년 1월 1일 서명자가 5만 명을 넘었고, 1월 8일에는 10만 명에 가까워졌다. “개헌 지지 서명자가 계속 늘어가는 상황에서 박 정권을 압박하는 성명과 시위가 이어졌다. 1월 1일 기독교청년협의회 회원 3천여 명은 통일을 기원하는 예배 후에 가두시위를 벌였고, 5일엔 민주통일당이 개헌청원운동의 적극적 참여를 정무위원회에서 의결하였다.


1월 7일엔 문학인 61명의 이름으로 개헌 지지 성명이 나왔고, 광주 지역 성직자 41명이 자유민주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공화당의 초대 총재이자 당 의장을 역임한 정구영이 전 사무총장 예춘호와 함께 공화당을 탈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월 8일에는 제1야당인 신민당이 개헌을 위한전력 경주를 다짐하였다.” (앞의 책, 122~123쪽)


박정희는 추기경 김수환, 목사 김재준, 종교인 겸 언론인 함석헌을 비롯해서 많은 국민의 존경을 받던 재야 지도자들을 ‘과대망상’에 걸린 ‘불순분자들’로 몰아붙였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10월 유신’이라는 헌정쿠데타를 일으켜 죽을 때까지 대통령 자리를 지키겠다는 자기를 몰아내려고 ‘경거망동’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유신헌법’ 자체가 초헌법적인데, 그는 초헌법을 초월하는 긴급조치 1,2호를 1월 8일 발동했다.


긴급조치 1호는 1)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2)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며, 3)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1), 2), 3)항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조치를 위반한 자와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기로 했다. 긴급조치는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특별조치라고 유신헌법에 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발동함으로써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으므로 절대군주나 마찬가지로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긴급조치 2호는 ‘긴급조치 1호를 위반한 자를 처벌하는 비상군법회의 설치하고’, ‘중앙정보부장이 사건의 정보, 조사, 보안업무를 조정·감독한다’는 내용이었다. 

긴급조치가 발동되자 ‘개헌청원 서명운동’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곧 압수·수색이 들어올 것이 분명해서 장준하는 백기완을 급히 집으로 불렀다. 곧 압수·수색이 들어올 것이 분명하므로 10만 명 이상의 서명이 들어 있는 명단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명단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장남 호권과 백기완이 명단을 불사르는 것을 보면서 장준하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월 15일 비상계엄군법회의 검찰부는 장준하와 백기완을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한 뒤 안양교도소에 수감했다. 두 사람에 대한 재판은 고속으로 진행되었다. 

 



(34)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장준하와 백기완은 1974년 2월 1일 비상보통군법회의 제1심판부에서 각각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의 변론을 맡은 변호사 한승헌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1월 31일 결심공판에서 징역 15년 구형, 다음 날인 2월 1일에 떨어진 판 결이라는 것도 징역 15년, 단 하룻밤 사이의 일이었다. 구형량에서 한 푼도 깎아주지 않은 정찰제 판결이었다. 나는 그때 말했다. “대한민국의 ‘정찰제’ 는 백화점의 상관행이 아닌 군법회의의 판결에서 최초로 확립되었다”라고. 그게 ‘개판’이지 무슨 재판이냐고 분개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군법회의’니까 문자 그대로 ‘회의’에 불과한데 뭘 그러느냐고 달래기도 했다. (강준만, <한 국현대사 산책-1970년대편 2권>, 125~126쪽)

장준하와 백기완은 1974년 3월 2일 열린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1심과 같은 형량을 선고받았다. 8월 20일 대법원 형사부는 두 사람의 상고를 기각했다. 

장준하는 감옥에서 협심증과 간경화 증세로 시달리다 1974년 말 가석방되어 서울 종로 1가의 조광현 내과에 입원했다. 장준하가 혹시 감옥에서 ‘병사(病死)’라도 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파문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박정희의 ‘배려’ 때문이었을까?

장준하가 안양교도소에 갇혀 있던 1974년 4월 3일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 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상투적 방편으로 통일전선의 초기 단계적 지하조직을 우리 사회 일각에 형성하고 반국가적 불순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 불순세력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한다.”

긴급조치 4호는 ‘전국민주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단체’에 대해 대통령이 유신헌법에 규정된 비상대권을 발동한 것이었다. 재야세력의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탄압하려고 1974년 정초에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한 박정희 정권은 3월 28일 서강대에서 반유신체제 시위가 일어난 다음날부터 학생운동권의 중요 인물 수십 명을 체포했다.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일본 공산당원 및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고, 민청학련을 조직하여 국가변란을 획책한 학생들은 그들의 사상과 배후 관계로 보아 공산주의자임이 분명하다.”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추가로 발표했다. 서도원, 도예종 등 대구지역의 옛 혁신계 사람들이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여정남을 학원 담당으로 해서 대구지역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하다가, 여정남을 서울로 파견해서 이철과 유인태를 만나 전국적 학생조직을 만들게 했다는 것이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은 유신독재 정권이 고문으로 조작한 것이었다. 정부기구인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5년 12월 ‘민청학련 사건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공산주의자들의 배후 조종을 받는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한 학생운동 탄압 사건’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974년 여름 군법회의 법정에서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그들은 수사과정에서 당한 무자비한 고문과 가학행위를 폭로했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에는 그들의 진술이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구속된 사람들의 가족들은 신문사와 방송국을 찾아다니며 ‘반유신체제 투쟁’으로 위기에 몰린 박정희 정권이 궁지에서 벗어나려고 사건을 조작했다고 호소했지만 그 어떤 언론인도 긴급조치 4호 때문에 그런 사정을 기사로 쓰지 못했다. 

언론인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던 동아일보사의 젊은 기자들이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은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10·24 선언’은 전국의 언론사로 확산되었다. 

경영진과 편집 간부들의 방해 때문에 ‘자유언론실천선언’이 긴급조치의 벽을 넘지 못하자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사 분회는 1974년 11월 12일 아침 편집국에서 기자총회를 열고 ‘천주교의 인권회복 기도회’를 7면 머리기사 이상으로 사진과 함께 보도하라고 요구했다.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문 제작을 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경영진은 그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제작거부에 들어가서 하루를 넘긴 11월 13일 경영진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해서 천주교 인권기도회 기사가 사회면 중간머리에 사진과 함께 실리게 되었다. 박정희가 유신쿠데타를 일으킨 뒤 두 해 남짓만에 일어난 대사건이었다. 그것은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신동아와 여성동아가 독재권력에 대한 굴종을 떨쳐버리고 자유언론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날부터 그동안 ‘금기의 벽’ 안에 갇혀 있던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련 기사와 논평이 크기와 깊이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구속자 가족들이 개신교와 천주교의 인권기도회에서 폭로하는 고문과 ‘용공 조작’의 실상이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상세히 보도되었다. 동아일보사는 그야말로 한국 언론계에서 유일한 ‘해방구’가 되었다. 그런 현상이 긴급조치라는 ‘여의봉’을 휘두르면서 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던 박정희에게 공포와 위기의식을 안겨주었음이 분명했다. 

12월 20일부터 동아일보사에 대한 광고 탄압이 시작되었다. 광고주들이 ‘말할 수 없는 사정 때문’이라면서 광고 동판을 회수해 가자 며칠 뒤부터 동아일보 광고란의 대부분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동아방송도 마찬가지였다. 그 백지광고란을 재야인사들과 시민들이 성금으로 메우기 시작했다. ‘격려광고’의 문안들은 하나하나가 유신독재의 폭정과 동아일보사에 대한 탄압을 규탄하는 ‘민중의 소리’였다. 

이 기획연재를 시작하면서 앞머리에 썼듯이, 나는 바로 그 무렵에 종로 1가의 조광현 내과에 입원하고 있던 장준하 선생을 취재하러 갔다. 그의 병상 머리맡에는 격려광고들이 펄펄 춤을 추는 듯한 동아일보가 수북이 싸여 있었다.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민중의 힘에 밀려 박정희 독재가 무너질 날이 멀지 않았어요. 동아일보사 언론인 여러분이 가장 큰 희망입니다.” 그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장준하는 1975년 1월 8일 병상에서 ‘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박 정권 시기에 세 번이나 투옥된 그가, 그것도 협심증과 간경화증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던 그가 독재자를 향해 거침없이 비판과 경고를 날린 것이었다. 긴 ‘공개서한’의 주요 대목을 옮겨보겠다.

(·····) 우리 민족에게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 지난 72년 7월 4일에 일어났 습니다. 남북이 민족문제를 자주 평화통일로 발전시킬 것을 합의했다는 이 른바 ‘남북 공동성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귀하의 정치노선에 계속 비판적이던 본인도 벅찬 감격 으로 통일을 위한 남북대화가 기필코 성공되기를 기원하면서 귀하가 취한 역사적 결단에 찬사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의 모든 기대와 감격은 그해 10월 17일 이른바 ‘유신’이란 이 름으로 무참히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국헌을 준수한다고 서약한 귀하 스스로가 그 선서를 헌신짝 같이 버리고 헌법기관의 권능을 정지시키고, 헌법제정 권력의 주체인 국민을 강압적인 계엄 하에 묶어놓고 ‘국민투표’라는 요식행위를 통해 제정한 소위 ‘유신헌 법’으로 명실상부하게 귀하의 일인독재 체제만을 확립시켰습니다. (·····)

자유와 생존을 지키기 위하여서는 소위 ‘유신체제’를 폐지하여야 하고, 그 근본규범인 현행헌법을 완전히 민주헌법으로 개정하여 민주헌정 질서를 회 복하는 길밖에 없음을 분명히 깨닫고 굳게 믿는 인사들이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일으켜 실천운동에 옮기는 데 이르렀던 것이 73년 12월 24일 이었고, 이 운동은 요원의 불길 같이 번져 불과 10여 일만에 서명자 40만 돌파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합법적 민 의(民意)운동에 대해 귀하는 ‘긴급조치’라는 초현실적이며 초헌법적 권력을 발동하여 민주개헌을 위한 평화적인 청원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실질 적으로 무헌법 사태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과 폭정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민주개 헌에의 열화 같은 국민적 요구는 더욱 더 확대되어 가고 심화되어 가는 형 편입니다. (김삼웅 편, <민족·민주·민중선언>, 254~255쪽)

장준하는 ‘공개서한’의 결론 삼아 6개 항의 요구를 박정희에게 제시했다. 

1)파괴된 민주헌정의 회복을 위해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하되 민족통일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완전한 민주헌법으로 하여 앞으로 올 모든 집권자들이 규범으로 삼게 할 것.
2)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전원 무조건 석방할 것.
3)학원·종교·언론 사찰을 즉각 중지할 것.
4)자유언론에 대한 비열하고 음흉한 탄압정책을 즉시 철회할 것.
5)정부의 경제적 실책으로 가중되는 당면한 민생문제를 해결하고 획기적인 경제정책을 강구할 것.
6)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이상적이고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수립 추진하되 민중의 대표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 (앞의 책, 255~256쪽)

1975년 1월 22일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느닷없이 발표했다.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에 힘입어 제1야당인 신민당이 개헌을 추진하자 정권이 최대의 위기에 부닥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만일 국민이 현행헌법의 철폐를 원한다면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즉각 물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과 재야세력은 ‘국민투표는 박정희의 계략이자 기만적인 정치적 쇼’라면서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2월 10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뒤 ‘찬반 토론’마저 금지된 상태에서 2월 12일에 치러진 국민투표 결과는 투표율 79.8%, 찬성 73.1%, 반대 25.1%로 나타났다. 야당이 투·개표를 제대로 감시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나온 결과였다. 

‘국민투표 승리’를 자신에 대한 신임으로 여긴 박정희는 2월 15일 ‘특별담화’를 통해 긴급조치로 구속된 사람들을 석방하겠다고 발표했다. “현행 헌법 질서의 역사적 당위성과 국민적 정당성이 주권자인 국민의 총의로 재확인된 이 시점에서 이들을 석방함으로써 이들에 대해서도 국민총화를 더욱 굳게 다지며 민족중흥의 역사적 과업 수행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앞의 책, 202~203쪽)

2월 15일 박형규, 김지하 등 56명, 16일과 17일 지학순, 김찬국 등 93명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과 일부 청년들은 풀려나지 못했다. 말하자면 ‘볼모’로 잡힌 셈이었다.

 

 


(35) 반공·승공주의에서 통일지상주의로

할아버지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데다가 아버지는 존경받는 목사였고, 그 자신도 일본신학교와 조선신학교(한신대의 전신)에서 신학을 전공한 장준하는 젊은 시절부터 공산주의를 철저히 배격했다. 먼저, 중국에서 일본군을 탈출해서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던 도중에 장준하가 공산주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지를 살펴보자. 그는 장개석의 국부군과 모택동의 공산군이 갈등과 상쟁을 되풀이 하던 시기에 미국 정부가 보인 태도를 비판하면서 공산주의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중국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지 못한 미국은 중국공산당의 음흉한 속셈을 모르고, 계속 어리석은 협상을 주선, 주장해 왔으며, 오히려 중국공산당을 ‘서방식 민주주의자’, 또는 그들의 슬로건의 액면 그대로 ‘연합정부   주의자’ 또는 경제적인 면에서 ‘토지개혁자’로만 알아왔었다. 이러한 착각은 오늘날 중국 적화(赤化)에도 책임이 있는 잘못이다. (·····) 

공산주의자들은 그 어떠한 협약이든 처음부터 한 장의 휴지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국은 믿지 않았으며, 또 공산주의자들의 생리를 한국전쟁 때까지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론’에 미국은 홀린 것이다. 일본 패망의 기운이 나타나자 공산당의 국부군에 대한 공격은 반비례로 가열되었다.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치명적으로 국부군을 약화시키자는 그 의도는 도처에서 습격, 이간 등의 게릴라작   전으로 나타났다. 어부지리로 광대한 대륙을 차지하고 그 패권을 잡으려는 속셈이,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돌베개>, 99~100쪽) 

장준하가 목숨을 걸고 찾아가서 참여한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장개석과 국부군의 지원을 후하게 받았기 때문인지, 공산혁명과 ‘인민 해방’에 관한 모든 이론과 실천을 완전히 불신했기 때문인지, 또는 그 두 가지 모두 때문인지 그의 공산주의 혐오는 극도로 심했다.

박정희 일파가 1961년 5월 16일에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에 나온 <사상계> ‘권두언’(‘5·16 혁명과 민족의 진로’)에도 공산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구절이 들어 있다. 그는 그 ‘권두언’을 자신이 썼다고 시인한 바 있다.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 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장준하문집 3>, 261쪽)

장준하는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반란이 사적인 권력욕에서 비롯된 쿠데타라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사상계>를 통해 군사정권을 날카롭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와 북한 정권에 대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사상계> 1962년 6월호에 실린 ‘자유의 확보가 승공의 길이다’라는 글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다. 

휴전 후 9년간, 북한괴뢰는 안으로는 소위 ‘천리마 운동’이라 해서 북한인민을 가혹한 강제노동으로 혹사하고, 밖으로는 대한민국에 계속 간첩을 남파하는 등, ‘간접침략’을 집요하게 기도해온 것이다. 우리는 지난 9년간 북한 침략집단의 ‘시한폭탄’을 북방에 놓아둔 채로 이승만 정권 12년의 부패와 무능을 방치해왔고 4·19 후의 일부 청년들의 국토통일론을 목격하면서 아슬아슬한 위기를 여러 번 경험해 왔다. 

마침내 5·16 군사혁명은 공산군과 싸운 우리 국군이 일으킨 혁명이니만치 그 공약 제1조에도 반공체제의 강화를 약속하기에 이른 것이다. (···) 2차의 국내 혁명을 치른 우리는 대공태세 면에서도 진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군인들은 휴전선을 사수하고 대내적으로는 빈곤을 추방하여 복지 민주사회를 건설함으로써 경제전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할 것이다. (···) 공산당의 폭력독재와 획일주의에 대결하여 승리할 수 있는 무기는 여기 우리가 사수해온 자유요, 의회민주주의이다. 김일성 일인독재와 소수의 소위 ‘인민회의’ 간부정치와 ‘흑백선거’ 등과 같은   반민주적 요소를 규탄할 수 있는 우점(優點)을 우리가 확보하는 길이 곧 승공의 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앞의 책, 288쪽)

 

1972년 5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해서 주석 김일성과 회담을 갖고 돌아오는가 하면, 북한 제2부수상 박성철이 서울로 와서 박정희와 회담을 가진 뒤 남북  간에 화해와 공존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7월 4일, 텔레비전에 낮방송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이후락이 갑자기 화면에 나타나서 “대통령 각하의 명을 받아 평양에 다녀왔다”고 말한 뒤 ‘남북 공동성명’을 읽어내려갔다.

 

평양에서도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가 같은 문안을 동시에 발표했다. ‘7·4공동성명’의 뼈대는 ‘통일의 3대 원칙’, 곧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었다. “첫째, 통일은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 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텔레비전 생중계로 ‘남북공동성명’ 발표를 본 국민들은 충격과 흥분에 휩싸였다. 곧 통일이 되기라도 할 듯한 분위기였다. 1961년의 5·16 쿠데타를 ‘군사혁명’이라고 지지한 것 말고는 박정희의 독재와 폭정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비판해온 장준하는 ‘7·4 공동성명’에 대해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씨알의 소리> 1972년 9월호에 실은 ‘민족주의자의 길’은 ‘이 글이 과연 김일성 일인독재와 획일주의를 공격하면서 반공과 승공을 외치던 장준하가 쓴 것이 맞는가’ 하고 생각할 정도로 놀라움을 주었다. 

도대체 우리에게 언제 그토록 불구대천의 원수로 갈라진 무슨 주의가 있었   고, 그 주의에 따라 나라와 민족을 두 동강 내어 살기를 원했던가? 그뿐인   가, 역사의 똥인 전쟁, 그 가장 더러운 동족상잔을 우리가 청부맡아 했다니   오천년 민족사 앞에 아니 인류의 역사 앞에 무슨 낯을 들 수 있으랴. (·····)

전후(戰後) 냉전체제에 의한 남북 분단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 있어서 우리 민족에게 자기부정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는 이 분단에 내응한 국내세력의 움직임이 어떠했든 그 기본적 계기는 외세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하나는 분단된 민족은 역사의 실천 단위로서는 적어도 하나의 주체적 자기 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둘로 나누어진  그 한쪽은어느 쪽도 하나의 주체적 단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장준하문집 1>, 53쪽)

철저한 반공·승공주의자이던 장준하가 이렇게 혁신적으로 변화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갈라진 민족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남과 북의 권력이 분단을 악용해서 독재체제를 강화하는 한, 민주체제가 세워질 수 없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을까? 

‘7·4 공동성명’이 나온 지 100일 남짓 지난 때 남에서는 박정희가 ‘10월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헌정쿠데타를 일으켰다. ‘통일’이 한 사람의 종신집권에 이용된 것이었다. 북한은 12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 회의에서 주석제 신설을 뼈대로 하는 새 헌법을 공포하면서 ‘김일성 1인 중심 체제’를 강화했다. 1973년 8월 28일 북한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이유로 남북대화를 거부한다고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은 남과 북의 집권자가 체제를 강화하는 데 이용하고 폐기한 셈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장준하가 ‘민족주의자의 길’에서 제시한 ‘통일지상주의’는 민족통일론의 전범(典範)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로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하는 것일 때는 그것은 거짓 명분이지 진실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의 통일은 이런 것이며, 그렇지 않고는 종국적으로 실현되지도   않을 것이다. (·····)

실로 남북을 잇닿은 전화줄은 한두 사람의 대화의 수단이 아니라 갈라졌던 형제 동포의 눈물과 호소로 환희를 서로 만지는 가슴이며 손이어야 한다. 

남북공동성명과 적십자회담의 결과로 진실로 평화적인 민족 통일의 길이 열린다면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은 세계사에도 우리 민족사에도 없을 것이란   말을 감히 하겠다. (·····)

통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의 일이다. 통일은 감상적 갈망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생활과 직결된 것이다. 통일 없이는 가난, 부자유 이   모든 현실적 고통은 결코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못함을 알고 알려야 한다.    (·····) 

통일에의 길은 아직도 멀고 험난하다. 그렇지만 그 길은 기필코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우리 한 사람, 몇 사람의 재산과 지위와 명예가 희생되어서라도 가야 할 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다. 이 희생   과 설사 있을지 모르는 지는 것이야말로 더 영광스러운 이김이다. (앞의 책, 54~59쪽)

장준하의 ‘통일지상주의’는 1980년대에 ‘선 민주 후 통일’이냐, ‘선 통일 후 민주’냐 하는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장준하의 벗으로서 그의 ‘부활’을 위해 민주·통일운동의 최전선에 나선 문익환은 그런 논쟁에 관해 간명한 답을 내놓았다. 

그때 나의 관심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국토’가 아니라 ‘민족’이었다. 그 후로 민주냐 통일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이 둘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 바로 ‘민족’이라는 개념이었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국토는 무력으로도    하나가 될 수 있지만, 주종 관계로 갈라진 겨레를 하나로 묶는 길은 ‘민주’의 길밖에 없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문익환평전>, 428쪽)  

장준하는 ‘민족주의자의 길’을 통해 논리와 감성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통일론을 제시한 뒤 3년 만에 ‘민족의 땅’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갔다.

 

 

(36) 인혁당 ‘사법살인’과 김상진 할복 자결

 

1974년 12월 하순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장준하는 이듬해 2월 중순까지 조광현 내과에서 감옥에서 얻은 협심증과 간경화증을 다스리고 있었다. 평소 그를 따르던 청년 안병원이 어느 날 문병을 간 자리에서 장준하는 “내 다리를 손가락으로 눌러보라”고 말했다. 안병원이 가운데 손가락으로 장준하의 한쪽 다리를 찔렀더니 손가락이 3분의 2나 들어갔다. “아니, 선생님, 이렇게 많이 부으셔서 어떻게 합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우십니까?” 하는 물음에 장준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요. 내가 합병증까지 일으켜 이렇게 중병에 걸렸으니 내가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의심받지 않는 것이오. 이것이 나라를 위해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니 그나마 다행이 아니겠느냐는 말이오. 지금 내가 민주회복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있소. 그런데 김대중 선생이나 김영삼 신민당 총재, 윤보선 전 대통령, 양일동 통일당 당수 등 누구도 내가 사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으니 참 감사한 일이오.” (안병원, ‘장 선생을 기리는 글’, <장준하 선생 20주기 추모문집>, 429쪽)

장준하는 목숨까지 위협받을 정도의 중병에 걸린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도모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2월 중순에 병원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대중의 눈앞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975년 3월 중순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사에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벌이던 언론인들이 강제 해직에 맞서 신문과 방송의 제작을 거부하며 농성을 하고 있던 현장에 재야인사들과 함께 격려방문을 간 것이었다. 그는 입원해 있던 동안 각계에서 치료비로 보낸 성금을 동아일보사에 격려광고비로 기부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5월 중순 그의 장남 장호권이 종로 태화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 신정자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으로서, 3월 17일 새벽 박정희 정권과 동아일보사가 동원한 폭력배들에 밀려 동료 150여 명과 함께 거리로 쫓겨난 사원이었다. 장준하는 결혼식 축의금 전액을 동아투위 위원장 권영자에게 넘겨주면서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동아일보·동아방송 해직언론인들의 생활비에 보태라고 했다. 

1975년 4월 8일 고려대에서 격렬한 ‘유신독재 타도’ 시위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박정희 꼭두각시를 만들어 화형식을 한 뒤 돌멩이와 각목을 들고 경찰과 맞섰다. 그날 오후 박정희는 고려대를 대상으로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고 휴업령을 내렸다. 

바로 그날 오전 대법원은 인혁당 사건 피고인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다. 그들은 그로부터 18시간만에 서대문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사법사상 유례가 없이 ‘신속한’ 사형 집행이었다. 가족들이 9일 아침 서대문구치소로 면회를 갔을 때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형을 당한 송상진의 유족이 4월 10일, 연미사를 드리려고 고인의 주검을 영구차에 싣고 서울 응암동성당으로 가는 길에 녹번동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경찰이 주검을 탈취하려고 했다. 성직자들을 비롯한 재야인사들과 유족이 필사적으로 저항을 했는데도 그들은 기어코 주검을 빼앗아 어디론지 가서 화장을 해버렸다. 고문의 흔적을 송두리째 없애려는 것이 분명했다.  

4월 11일 수원에 있는 서울대 농과대 교정에서 ‘유신헌법 철폐와 박정희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던 중 축산과 4학년생 김상진이 ‘양심선언’을 읽다가 할복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그는 선언문의 마지막 대목에서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부의 대변자가 되어 가고, 어미닭을 잃은 병아리마냥 우리들은 반응 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우리의 주장이 결코 그릇됨이 아닐진대, 우리의 주장이 결코 비양심이 아닐진대 우리는 어떻게 더 이상 자존심을 짓밟혀, 불명예스런 삶을 계속할 것인가.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들으라, 동지여! 우리의 숭고한 피를 흩뿌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할 용기를 그대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 2권>, 240~241쪽)

김상진은 선언문 낭독이 끝날 무렵 길이 20cm 가량의 등산용 칼로 복부를 찔렀다. 학우들이 병원으로 갈 차를 부르는 동안 그는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애원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그는 병원에서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말해온 장준하였지만, 인혁당 피고인들에 대한 ‘사법살인’과 김상진의 할복 자결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1975년 4월 30일, 20여년 동안 계속되던 베트남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북베트남 제2군단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으로 진격해서 대통령궁을 점령하자 남베트남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관변단체들을 총동원해서 ‘안보궐기대회’를 열게 했다. ‘대한민국에서 불순분자들이 반정부 운동을 계속하면 안보에 허점이 생겨 북괴가 적화통일을 위해 침략할 것’이라는 주장이 신문과 방송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일부 국민들이 ‘안보 위기론’에 동조해서 ‘방위성금’을 내는 대열에 합류하고 있던 5월 13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7호를 해제하고 9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9호는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는 행위, 다양한 수단을 통하여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이 조치를 공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그리고 사전허가를 받지 않은 학생의 집회·시위 또는 정치 관여 행위를 금지하였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주무 장관이 위반자와 ‘범행’ 당시의 소속 학교, 단체나 사업체 또는 그 대표자에 대하여 제적·해임·해산·폐쇄·면허취소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아울러 이 조치에 의한 주무 장관의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기존 긴급조치의 내용을 한층 강화한 것이었다. 특히 헌법 개정에 대한 청원 자체를 금지함으로써 유신헌법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올려놓는 동시에,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였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됨에 따라 특정 발언이나 표현이 실제로 유언비어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권력자의 비위에 거슬리기만 하면 언제라도 영장 없이 체포·구금될 수 있었고, 언론 봉쇄로 인해 누가 그러한 부당한 처우를 받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조치를 위반하였다고 권력자가 판단한 사람에게 취해진 징계 조치는 법의 심판 대상이 되지 않았기에 사실상 권력자는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갖게 되었다. (<한국민주화운동사 2>, 181~182쪽)


   
1974년 1월 개헌 청원 서명운동으로 긴급조치 1, 2호를 위한했다 하여 선 군사법정에서. 왼쪽부터 백기완,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사람들에 대한 ‘사법살인’을 자행하자 그런 만행에 분노한 김상진이 할복 자결하는 처참한 현실을 보면서 장준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1974년 말부터 1975년 2월 중순까지 입원해 있던 동안 벌써 박정희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할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고상만(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은 1976년 가을 어느 날 강원도 오대산의 오두막에 기거하던 스님 법정을 찾아가서 그런 사실을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법정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1974년 12월 말 그가 장준하가 입원하고 있던 조광현 내과로 문병을 가서 ‘건강을 어서 찾으라’고 당부했더니 장준하는 베개 밑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내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누구누구를 만나 서류에 서명을 받아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