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4월 5일 UC Berkley 강연] 5.18 최초의 희생자 이세종 열사

작성일 작성자 黃薔(李尙遠)

[5.18 최초 사망자는 1980년 5월 18일, 새벽 0시 전라북도 전주 전북대 학생회관에서 금마7공수 부대원에게 무참히 살해된 전북대 농대 농학과 2학년 이세종 열사입니다. 제가 그 과정을 바로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본 산 증인입니다. 진실을 왜곡하는자 천벌을 받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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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상에서 5.18의 진실을 왜곡하며 첫 희생자가 5월 20일 밤에 사망한 경찰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0시 5.18의 첫 희생자는 금마7공수 부대원에게 전라북도 전주 전북대 학생회관에서 살해된 이세종 열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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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http://blog.daum.net/enature/15849754
2. http://blog.daum.net/enature/15849836
3. http://blog.daum.net/enature/15849763
4. http://blog.daum.net/enature/15850359
5. http://blog.daum.net/enature/8180402
6. http://blog.daum.net/enature/1585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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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전두환‬ 을 처형(處刑)하라! 한 손엔 몽둥이 한 손엔 짱돌을 움켜쥐고 연희동(延禧洞)으로 몰려가 살인마(殺人魔) 전두환(全斗煥)을 주살(誅殺)하라!!]



5.18 최초의 희생자 이세종 열사

 

5.18 민주화유공자 공학박사 이상원 (Sam Lee, 미국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근무)

 

우선 자리를 마련하여 주신, 친애하는 세계적인 명문대학 UC Berkley 구성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은 특별히 아직 한번도 공개적으로 증언하지 못한 5.18 최초의 희생자 이세종 열사의 희생 순간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이세종 열사가 5.18 최초의 희생자라는 내용은 이미 2002 5.18 학술 세미나를 통해 한국 순천향대학교 이민규 교수님이 발표하여 역사적인 사실로 peer review 되어 공인된 내용입니다. 이세종 열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첨부한 내용이나 5.18 공식 사이트를 통해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1. 외국잡지를 통해서알게된 전두환의 야욕

 

1980 전북대학교 농학계열 1학년이던 저는 집이 마침 용산 미군기지 근처이고 미군으로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친구들을 통해 뉴스위크지나 타임지 같은 미국 잡지들을  구해서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군사정권은 모든 언론을 검열을 통해 통제하고 감시하였습니다.

 

군사정권은 외국에서 발생된 신문이나 잡지에 한국관련 보도가 실리면 부분을 못보도록 자르거나 먹칠을 하여 배포토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군사정권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미군부대에서는 자유롭게 외국 신문과 잡지를 볼수 있었습니다.   

 

미국 친구들이 전해준 검열을 거치지 않은 뉴스위크지 등에는 1979 12 12 발생한 전두환 육군소장의 쿠테타 소식이 자세히 보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당들의 동향과 향후 정권찬탈 계획등이 자세히 분석되어 있었습니다.

 

보도 내용중에는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총격전을 벌이며 납치구금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충격적인 내용은 전방의 노태우 소장이 사단장으로 있는 9사단이 서울로 반란군을 몰고 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9사단은 휴전선에서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여 밤낮없이 경계를 하며 북한과 대치하여 있던 부대인데 휴전선을 비워놓고 총부리를 아군에게 돌린 반역을 저질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못했답니다.

 

저는 그런 한심한 내용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는 막연한 소명의식 같은것이 생겼습니다.

 

대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저는 자연스럽게 외국 잡지의 한국관련 보도 내용을 번역하여 학생회관에서 등사지에 철핀으로 써서 등사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번역한 내용을 등사지에 철핀으로 쓰면 농대 1년선배 였던 이세종 열사와 같은 학년 같은 (농학계열이라 반으로 되어 있었습니다)이었던 김차순 동기가 등사판에 잉크를 붇고 롤러를 밀어서 열심히 복사를 하여 유인물을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배포를 했습니다.

 

도대체 전두환이 누구길래 물러나라고 하느냐는 시골 할아버지들도 유인물을 읽고는 전두환이 정권을 탈취할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  5월 17일 밤 12시 (5월 18일 자정)

 

5 15 근처의 35사단에서 장갑차등을 이끌고 시내쪽으로 나오다 되돌아 갔던 군인들의 무력시위가 있었던 차라 군인들이 계엄군을 빙자하여 학교로 처들어 올수도 있겠다는 예감은 하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설사 학교에 진주한다 하더라도 막연히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데모등 집단행동을 못하게 하겠지 라고 순진하게 생각했었습니다.

 

1980 5 17일도 다른 날처럼 전두환과 일당들의 정권 찬탈 음모가 담긴 내용의 이런 저런 외국잡지의 보도내용을 번역하고 유인물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등사를 하던 이세종 선배와 함께 있다가 자정이 다되어 기숙사로 돌아갈려고 하던 차였습니다.

 

12, “후다닥” “우당탕소리를 내며 검은 베레모를 쓰고 착검한 M16 곤붕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이 테러진압작전을 연상시키듯이 학생회관을 뒤흔들며 들이 닥쳤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난뒤에 알게된 것이지만, 공수부대원들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소재한 7공수 31년대 소속이었습니다.

 

그때 3층에 이세종 선배와 있었는데 서로 도망가자고 하며 옥상으로 향했지만 이세종 선배는 곤봉과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수차례 가격당하곤 나무토막 쓰러지듯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착검한 총이 보이고 이세종 선배처럼 개죽음을 당할거라는 공포감이 사로 잡혔습니다. 그리곤 다리는 그자리에서 굳어 버렸고 도망갈 용기조차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냥 두손을 들고 죽이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이세종 선배의 목숨을 앚아간 곤봉과 개버리판은 저에게도 개잡듯 쏫아졌습니다.

 

다리 인대가 파열되고 피투성이가 된체 포승줄에 묶여 공기도 통하지 않는 군용 무기차에 다른 학생들과 뒤섞여 잡혀 갔습니다. 전주 경찰서로, 인후공사라 위장된 보안대로, 그리고 전주 35사단 헌병대 유치장으로 그야 말로 개처럼 끌려 갔습니다.

 

3. 5월 18일 부터 10월까지의 고문과 구타 그리고 불법구금의 순간들

 

솔직히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순간들을 생각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좀더 시간이 흐르고 좀더 상처가 아물면 언젠가는 별도로 공포의 순간들을 증언할 기회가 있을것이라 믿습니다.

 

4. 그 이후

 

온갖 고문과 구타가 난무하던 불법구금의 현장을 벗어나 학교로 돌아 왔을때는 이미 전두환은 광주 학살을 자행하고 뒤였습니다. 그리고 최규화 대통령을 협박과 위협으로 하야시키고 체육관에서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을 동원하여 대통령이 되고 후였습니다.

 

그리고 원통하고 절통한 일은 계엄군의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머리를 무차별하게 가격당해 비명 한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즉사한 이세종 선배는 계엄군을 피해 도망가다가 학생회관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다 계엄군이 발표를 했습니다.

 

후론 월례행사를 방불케 하듯 전북대를 지키던 전주경찰서의 박수복 반장과 형사일행에게 감시를 당하고 끌려가 두들겨 맞으며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군대에 가서는 보안대 박모라는 준위라는 자가 사무관이라는 직책을 달고 밀착 감시하는 녹화사업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녹화사업이란 전두환이 내린 작전명으로 학생운동과 관련된 사람들은 빨갱이들이니 파랗게 바꾸어야 한다고 녹화사업이라 하였습니다. 내용은 학생시절 학생운동을 한것에 대해 반성하고 아는 운동권 지인들의 동태를 보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무릎이 잘못되어 대구통합병원에 장기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간호사관생도였던 지금의 각시를 만나게 됩니다.

 

제대를 하고 이후에도 보안대 사무관은 뻔질나게 집으로 찾아오고 감시의 고삐를 느추지 않았습니다.

 

1988 한국과 한국사람에 대한 모든 미련을 접고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와서 1999 함께 불법구금을 당했던 동지들의 수소문으로 명예회복을 신청하기 전까지 한국을 잊고 살았습니다. 2003 한국정부는 5.18 민주화 유공자법에 근거하여 저를 5.18 민주화 유공자로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1980 5 18 광주 학살을 통해 집권했던 전두환은 아직도 자신은 5.18 학살과 무관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학살의 책임자를 아직도 처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없다고 합니다. 부디 시대의 양심이자 세계의 지성인 UC Berkley 구성원 여러분들이 이세종 열사를 비롯한 불의에 저항하다 죽어간 무고한 생명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1980 5 18 새벽, 전주의 전북대학교 학생회관에서 발생한 금마 7공수부대원들이 자행한 5.18 최초의 희생자인 전북대 농대 농학과 2학년 이세종 선배의 죽음의 목격자로서 분의 억울한 죽음을 증언하여야 책임을 회피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어2002 3 2일에 작은 책임감으로 5.18 민주화운동 – 80518 (http://cafe.daum.net/80518) 만들어 날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5.18 후예들에게 배울수 있는 미래의 희망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5.18 대한 많은 관심과 의미에 대한 성찰있으시길 기원합니다.

   

 

 

5.18 첫희생자는 고 이세종 열사"

재조명이 필요하다

 

매년 5 17 전북대학교 민주광장에서는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식과 이세종 열사 추모식이 열린다.

 

광주 망월동에 있는 이세종의 묘비(묘비번호 4-11)에는“어머니 그날! 새날이 때까지 두손에 횃불을 들고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복판에서 우리불꽃으로 활활 타오릅니다”라고 쓰여 있다.

 

그는 생가근처인 김제시 연정동에 쓸쓸히 개인 묘로 안치되었다가 무려 19년의 시간이 지난 99 45, 뒤늦게 5.18관련자로 인정돼 광주망월동 신묘역에 안치됐다.

 

80 당시 전남·북 대학 연합체인 `호남대학총연합회' 연락책임자였던 이세종은 517 전북대 1학생회관에서 농성을 벌이다 건물에 진주한 7공수 부대원들에 쫓겨 옥상으로 올라간 , 18 새벽 1시에 땅바닥에서 몸이 멍들고 피투성이인 주검으로 발견됐다. 사인은 단순 추락사로 발표됐었다.

 

그러나 당시 주검을 검안했던 전북대병원 이동근 교수는 훗날주검에 나타난 두개골 골절과 간장파열 등은 추락이라는 한가지 원인에 의해 동시에 발생할 없다”며 추락 전에 계엄군의 집단폭행 가능성을 제기했었다.

 

59 716 김제군 월촌면 연정리(현재 김제시 연정동)에서 출생한 이세종은 월촌초등, 김제중앙중, 전라고를 졸업하고 80 5 당시엔 평범한 전북대학 농학과 2학년생이었다. 학생회 간부는 아니었지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컸고 또한 실천력이 있었던 그는 역사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젊음을 꽃피우지도 못하고 유명을 달리 해야만 했다.

 

지난 85년에 전북대 학생회관 옆에 그의 비가 세워지고 그곳은 '이세종광장'으로 이름지어졌다. 95년에는 대학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또한 98 10, 광주민주화 관련 보상심의회에서 논란 끝에 5.18 사망자로 인정돼 명예회복과 함께 보상을 받았다. 계엄확대조치와 일환으로 진행된 각종 체포와 구금이 바로 5.18 서막이라고 이세종은 5.18 관련한 희생자라고 있다.

 

이민규 순천향대 교수가 2002 학술세미나에서 “5.18최초의 무력진압은 바로 전북대이고 5.18 최초의 희생자는 바로 이세종”이라고 밝힌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5.18 민중항쟁 전북동지회에서는 이와 관련해서 “5.18 비단 전남광주만의 문제가 아닌 전북과 전주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민중항쟁이었다는 비로소 인정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5.18 최초의 희생자는 바로 이세종임이 재확인됐다고 밝혔다.

 

김제의 자존심인 열사의 정신을 영원히 계승하기 위해서는 열사의 죽음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이뤄진 김제시 차원에서의 추모사업이 적극 추진돼야 것이다.

 

또한 민간차원에서도 이들을 배출한 김제가 민주화의 산실이었음을 알리는 상징물 등을 제작하여 김제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지난 역사에서 이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것이다.

 

2003-05-17 08

 

한국의 80년 5월, 첫 희생자 이세종

 

80 5 17 12, 그러니까 5 18 자정을 지나면서, 전북대 학생회관은 익산시 금마면 소재 7공수 31연대대 소속 계엄군의 작전 현장이다.

 

건물을 흔드는 군화발 소리와 거친 고함 소리, 사이로 짓밟히는 학생들의 비명소리만이 뒤섞인 아수라장이다. 농성학생들은 곤봉과 군화발에 무자비하게 짓밟힌 질질 끌려간다. 잡힌 이들은 포승줄에 줄줄이 묶인 군용 트럭에 던져진다.

 

군인들은 눈을 부라리며 학생회관 곳곳을 뒤지고 다닌다. 학생들은 좁은 대에 실린 3시간 넘게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기다린다. 손목을 조여오는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다 멈춘다.

 

 지켜 섰던 군인 하나가 대검을 치켜든 것이다. 어렴풋한 불빛에 날선 대검이 시퍼렇게 비친다. 놀란 이들의 겁에 질린 표정들! 대검은 손목에서 피를 흘릴 정도로 조여진 어느 학생의 손목으로 다가가 포승줄을 잘라낸다.

 

"내가 포승줄을 풀지 못해 자른 거다!" 공수부대원들은 도저히 없을 만큼 억세게 학생들을 묶었던 것이다. 트럭에 실려 있던 이들 몇은 엄습하는 공포감 속에서도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군인들이 무전기로 주고받는 , "학생 명이 학생회관에서 떨어져 죽었다."

 

5.18 최초의 희생자 이세종의 죽음은 이랬다. 죽음을 목격한 이는 시각 옥상에 올라가 그를 짓밟은 군인들 뿐이다.

 

땅바닥에서 피범벅이 되어 발견된 이세종이 옥상에서 이미 숨을 다해 아래로 던져졌는지, 계엄군의 발표대로 난간에 매달리다 떨어져 숨졌는지, 떨어져 신음하다가 병원에서야 숨을 다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적어도 현장의 군인들이 나서서 고백하기 전에는.

 

마지막으로 이세종을 동료 학생들의 증언을 모아 보면, 이세종은 군인들이 뛰어들기 조금 학생회관 방송실에선 예닐곱명의 학생과 함께 다음 시위 사용할 "노래" 녹음했다.

 

녹음 전에는 서로 대책을 논의하며 유광석과 함께 서울지역 대학들과 연락을 취하는 역할도 맡았다. 농성 기간 내내 이세종은 유인물을 뿌리는 여러 후배들 명이었다.

 

"군인들이 학교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이세종은 여학생회장실로 자러간 저희들이 걱정이 되었나봅니다. 문을 두드리고, 군인들이 들어오니 어서 피하란 말을 남기고 황급히 사라졌어요.

 

그게 세종이를 마지막 모습입니다. 피하란 말은 들었지만 저희들은 어디로 피해야하는지도, 그리고 이미 경직된 몸이나 마음이 도무지 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습니다."(김성숙)

 

"농성장 문을 나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서너 내려 왔을까! 앞에총 자세로 착검한 총을 앞세워 4-5 종대로 계단을 밀고 올라오는 2,3 명의 계엄군(당시에는 공수부대원임을 몰랐음) 맞닥뜨리는 순간 공포에 질린 세종과 나는 순간적으로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운명의 순간, 거기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되어 버린 찰나의 시간 -아니 세종군에 대한 참회와 이후 기억하기조차 싫었던- 그렇게 이어진다.

 

나는 2 화장실로 도망쳐 창문을 통해 베란다로 도망쳤지만 곧바로 뒤쫓아온 일단의 계엄군에 의해 무차별 구타와 함께 붙잡히고 말았는데 다행히도 위관급 장교로 기억되는 지휘관의 제지로 부질없는 생명은 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3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쫓겨 세종군은 불행히도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가해자는 말이 없고 피해자 또한 말이 없으니 어느 누가 상황을 증언할 있겠냐마는 순간적 생과 사를 달리한 내가 폭행과 구타를 당했던 것을 기억하면, 옥상에서의 상황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유광석 )

 

이세종은 결국 광주에서 처음 인명피해가 발생한 18 오후보다 반나절 이상 먼저 신군부에 의해 타살된 5 항쟁의 희생자가 됐다. 5.18 엄청난 비극을 예고하는 서곡이 셈이다.

 

13년만의 사인 규명

 

당시 계엄군은 이세종 열사의 죽음을, 학생회관 2층에서 농성을 벌이다 계엄군이 교내로 진입하자 옥상으로 달아나다 떨어진 '단순 추락사-계엄군이 난입하자 무서워서 피하던 난간에 매달려 자연 추락한 ' 이라고 발표해 버렸다.

 

어이없게도 이세종 열사의 죽음은 단순추락사로 단정되고 말았다. 당시 사망진단서(부검의 전북대병원 이동근박사) 직접사인을 '두개골 골절 두개강내 출혈', 부검 결과는 '상박골 슬개골 골절, 간장파열, 복막후강내 출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동근 박사는 13 뒤인 지난 93 6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발급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용 의견서'에서, " 군의 두개골은 광범위한 복합골절 양상을 보였고 안면부, 흉부, 복부, 사지 등에 많은 타박상이 존재했다.

 

이들 손상 가운데 상당 부분은 추락 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것으로 생각된다." 밝혔다. 이세종이 옥상에서 떨어지기 전에 이미 무차별 폭행을 당했음을 말하고 있으며, 최소한 단순 추락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역사 속에 묻혀 있던 고귀한 죽음

 

이세종 열사의 죽음이 명백히 알려지고 사람들 가슴속에 고귀한 희생으로 자리하기까지 많은 세월이 걸려야 했다.

 

5년이 지나서야 당시 동료들과 전북대 총학생회가 열사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를 세우지만, 군사 정권의 눈치를 보던 학교측의 탄압으로 쉽지만은 않았다.

 

85 5 18 전북대 민주광장에 ' 리세종 열사 추모비' 세워지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학교와 경찰은 비석을 뽑아 숨기고, 학생들과 추모비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85 전북대 총학생회장 김중길씨는 "몰래 만들어진 비석을 간신히 학교에 가지고 들어왔더니 교수들이 우리를 막았다" 말한다.

 

88년에는 광주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지역이 다르다' 이유로 심사대상에서 제외했다. 88 6 16 다시 추모비가 세워지고, 89 이후 끈질기게 이세종 열사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계속되는 가운데 조금씩 진전을 보여 95 2월에야, 전북대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게 된다.

 

이어 98 10 광주민주화관련 보상심의회 에서조차 논란을 벌인 끝에 뒤늦게 5.18 사망자로 인정돼 명예회복과 함께 보상을 받고, 99 4 비로소 광주 망월동 신묘역 4-11 안치된다.

 

광주관련 보상의 기준이 시기, 장소, 민주성이고 유독 전남·광주로만 지역을 제한적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생겼던 문제다.

 

모교에 초라한 추모비가 세워지는 데에 5, 명예졸업장을 받는 데에무려 15년이 걸렸고, 숨진 19년만에야 광주 망월동 묘역에 안장됐다.

 

(2003/5/19 전민일보 5월특집시리즈 기사 중에서)

 

[군화발에 짓밟힌 토요일 밤]

 

5 17일은 토요일이다. 많은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오후, 대학의 교정은 조용하다 못해 평화롭다. 그러나 전북대 학생회관은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들려 오는 얘기로는 오늘이 D데이라고도 한다. 농성학생들은 향후 대책을 논의한다. 몇몇 단과대학에서도 술렁이는 분위기가 전해진다.

 

9시를 넘어 잔디밭에 나와 논의하던 학생들은 방송국과 전화를 통해 결국, 5 18 비상계엄 확대와 더불어 계엄군이 학내로 진입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이미 수배중이던 복적생들 가운데 김운주가 남아 농성장을 이끌고, 나머지는 검거될 것에 대비해 먼저 몸을 피하기로 한다.

 

이광철, 박종훈, 최인규, 이송재, 윤성모,김남규 등은 18 자정 계엄군 진입 직전에 학교를 빠져 나와 학교 근처에 마련해 ''으로 간다.

 

시각, 이미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계엄포고 10호를 발표한 신군부는 18 자정,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을 대학마다 투입해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한다.

 

당시 계엄군은 '학교점령시각' 전북은 새벽 1 30 이전에, 전남은 18 새벽 2 30 이전에, 완료하도록 지시한다.

 

농성현장에서, 김성숙은 다음날 '데모가' 녹음하려고 방송실로 간다. 7명이 모여 '흔들리지 않게' 노래를 녹음한 친구 김혜숙과 함께 여학생회장실로 잠을 자러 간다.

 

남학생이 긴장된 방안 공기를 의식해서인지 "군인들 오니 걱정 말라"면서 소주나 사서 마시자고 주머니 돈을 걷는다.

 

그러나 남학생이 나가고 , 이분도 안돼 요란한 군화발 소리와 함께 무장군인들이 뛰어 든다. 익산 금마에서 4대의 트럭에 분승해 출동한 7공수여단 소속 계엄군들이다.

 

순식간에 전북대 학생회관을 포위하고 계단을 뛰어오른 군인들은 고함을 치며 학생들을 엎드리게 하고는 이내 몽둥이로 사납게 두들겨 팬다.

 

"베레모를 비스듬히 쓰고 총에 칼을 꽂고 등장한 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은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몹시 화가 나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몽둥이를 들고 때리던 군인들의 무장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초라하고 힘없는 모습으로 학생들은 맞았습니다.

 

무장군인과 무장이 안된 학생들의 대비는 허무했습니다. 학생회관의 불을 환하게 밝히고 무장한 군인들은 여기저길 다니며 학생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잡힌 우리들은 좁은 차안에서 3시간 이상을 움직이지 못하게 묵인 상태로 기다립니다. 어디에선가 죽을 같다고 손목이 조여와서 죽을 같다고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도움이 되어주질 못했습니다.

 

소주를 사러간다고 나간 남학생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잡혔다면 얼마나 힘없이 맞고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습니다.

 

그만큼 군인들의 기세는 대단해 보였습니다."(김성숙의 회고) 그리고 학생회관 뒤에선 이세종(농학 2) 숨진 발견된다. 전북대에선 34, 원광대는 23명이 연행된다.

 

[이세종 열사 일지]

 

59 7 16 김제군 월촌면 연정리 출생

80 5 전북대 학생회관에서 농성-유인물 제작 담당

80 5 18 자정-1 30 전북대 학생회관에서 계엄군에 의해 사망

85 5 18 전북대학교 이세종 광장에 추모비 건립

88 광주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에 사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서한 묵살

88 6 16 추모비 이전식 전북 민주열사 추모사업회 창립보고대회

89 5 26 전북민족민주연합 이세종 열사 추모사업회, "이세종과 광주사망자는 동일한 희생자" 주장

94 8 12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보상 심의 기각(5.18 직전 피해는 5.18 희생자가 아니라는 사유)

95 2 22 전북대 명예학위수여

98 10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보상심의 3 신청 끝에 5.18 사망자로 인정(명예회복과 보상)

99 4 5 5.18 관련자로 인정, 국가 유공자 혜택, 광주 망월동 신묘역 묘비순서 4-11 안치

02 5 17 모교동문들 전라고 교정에 추모비 제막

03 5 17 전북대 민주광장 이세종열사 추모비 확대이전

 

이세종 열사가 5.18 최초의 희생자.

20년 지나서야 공식 확인!

 

이세종 열사가 5.18 최초 희생자임을 역사적으로 규명한 사람은 이민규 순천향대 교수(신문방송학)이다.

 

이민규 교수는 2000 5 "1980 광주민주화운동 언론보도 분석-검열 삭제된 기사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신군부의 언론검열 실상을 분석 공개하면서 '80 5 19일자 동아일보'에서 삭제됐던 기사 원문을 공개했다.

 

교수는 이를 근거로, " 5.18최초의 무력진압은 바로 전북대이고 5.18 최초 희생자는 5.17포고령 직후 계엄군의 교내 진입을 피해 달아나다 추락사한 전북대생이 이세종 열사" 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때까지 20 동안 '5·18 민중항쟁 전북 동지회' 등에서 꾸준히 주장해 오던 것을 처음으로 학계에서 인정하게 것이다.

 

다음은 삭제됐던 동아일보 기사 일부이다.

 

"18 새벽 130분께 전주시 덕진동 전북대 학생회관 3 옥상에서 동교 농학과 2 이세종(20,전북 김제군 월촌면 연정리 281) 13미터 아래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 숨졌다.

 

경찰에 따르면 숨진 군은 이날 자정 비상계엄령이 전국에 확대 발표된 직후, 계엄군이 학교에 진입 학생회관 쪽으로 몰려들자 학생회관 회의실에 있던 3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몸을 피해 옥상 밑에 부착된 철제 외등 걸이를 붙잡고 매달렸다가 밑으로 떨어져 숨졌다는 ... "

 

위의 기사를 살펴보면, 이세종 열사 사망시간은 518 오전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사상자가 발생하기 이전이어서 최초의 5 민중항쟁 희생자라는 점을 확인할 있다.

 

이세종은 80 5 당시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학생회 간부도 아니었지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컸고 성실해, 자연스레 농성장에 합류, 유인물 배포 활동을 벌였다.

 

당시 이세종 열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나, 당시 학생운동에 적극적인 KSCM 회원들의 출석 교회에 비해 훨씬 보수적 분위기인 전주 서문교회에 다니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다음은 전주 서문교회 백년사 기록이다.

 

" 서문교회 대학부에 성실하게 출석하는 전북대학교 농대 농학과 2학년에 재학중인 이세종(李世鐘) 군은 당시 군사정권 하에서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여 다음날의 민주화 투쟁 시위를 준비 계획 1980 5 18 밤에 무장한 계엄군이 급습하자 도피하였다.

 

그가 대학교 건물 3층에까지 추격을 받고 난간에 겨우 의지하여 있을 계엄군은 육중한 총대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강타했다.

 

이세종 군은 처참하게 21 나이로 희생을 당하였다. 당시 살벌한 계엄 하에서 시신을 김제군 월촌면 향리로 싣고 가서 마을 뒷산에서 서문교회 서은선 목사의 집례로 여러 교인들의 참예 하에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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