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가는 페이스북 친구 이영지 선생님의 담벼락 게시글에 단 댓글이다.
"제가 전라도농대를 다닐 때 기숙사에는 무진장 촌에서 온 심리학과 학생이 있었습니다. 한번 만나면 음습한 기운에 하루가 찌뿌둥했지요. 대화라도 나누면 그 부정적인 시각 덕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8남매 중에 맞이로 대학생인 자신을 위해 나머지 7남매는 공순이 공돌이로 맞이 뒷바라지 전선에 뛰어들었다는 거예요. 제가 재벌이라도 되었다면 이 친구와 이 친구의 나머지 남매들을 위해 과분할 정도의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지원했을 뻔했습니다. 그 부정적이고 음습한 분위기와 대화 내용 때문에 말이지요. 전라도 대학 심리학과생의 처참한 삶이 이 친구에게는 이미 예견되어 있고 자신의 뒷바라지를 하는 나머지 7남매에 그 어떤 보답을 할 수 없다는 암시가 흐르고 있어 이 친구를 보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습니다. 이 친구를 통해 저 역시 3남 2녀인 저의 형제자매의 모습도 얼추 같은 범주에서 바라보아졌습니다. 제 큰형은 서울대 의대 출신, 제 작은 형은 재수해서 한양대 딴따라과 제 누나도 재수해서 한양 여전 미술교육학과, 저는 전라도농대, 제 여동생은 덕성여대 가정과. 작은형 누나 저 제 여동생이 큰형 뒷바라지를 위해 공순이 공돌이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맞이의 서울대 의대를 위해 정량이 정해져 있던 부모님의 노고가 몰아졌음을 다들 대충 짐작 할만할 겁니다. 언젠가 제 여동생이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나도 큰오빠처럼 과외를 받고 조부모 부모의 뒷바라지를 받았다면 서울대 의대 뿐 아니라 하버드 의대도 갔을 거야." 글쎄 전 그럴 말 할 자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특별한 부자들이 아니라면 다들 비슷한 차별과 편애를 받으며 살아왔을 겁니다. 비록 제가 제힘으로 미국 유학하여 날고 기는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받았지만 형제·자매 많은 집안의 편애가 있었다는 것에는 정말 공감이 많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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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 총량의 법칙은 거의 모든 인간사에 두루 적용되는 것 같다.
한 인생에 좋은 일과 나쁜 일, 행복과 불행이 다 골고루...그 총량은 가늠할 수 없으나, 비 오는 날 있으면 볕 좋은 날도 있고, 바람 부는 날이 많아도 결국 개이고 파란 하늘에 날아 갈 듯 가볍고 부푼 날도 오는 법이다.
그래서 고생 좀 했다고 마냥 혼자 비극의 주인공인냥 엄살 떨 일도 아니고, 귀하신 몸으로 대접 받고 산다고 끝까지 그렇게 갈 것이라 자신도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의 총량이 정해져 있지만, 우리는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얼마가 지금 내가 겪어내야 할 몫인지를 모른다.

우리 남매 셋의 인생을 보아도 그렇다.
오빠는 외아들, 장남이라 부모님 생전에 언제나 특혜를 받고, 예외로 면제 받고, 재정적으로도 도움만 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그것도 어릴 때, 그리고 부모의 재력과 상황이 좋을 때까지... 기운 빠지고, 상황이 나빠지면서 오빠는 바구니 속 썩은 사과가 되어갔다.
정해진 수순... 책임감 보다 특권과 권위에만 익숙하고 떠받들여지며 길러진 사람이 달리 바뀌지 않는다.
늦둥이 삼촌이 그랬듯이, 오빠도 역시 그러했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크게 뭐라하지 않았다.
“제 속은 어떻겠냐. 뭐라도 더 챙겨 줘야지.”
딸 둘에겐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공감과 동정이 오빠에겐 당연하게 돌아 갔다.
당신들 애정의 총량도 정해져 있을 터, 역시나 골고루, 모두에게 똑같이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죽고 나면 그래도 제사 지내 줄 자식이라고...
장례식에 상주로 서야 할 책무는 다했으니, 보셨다면 만족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당신들이 옳았다고...거봐라...딸내미들 키워 봐야 소용없잖냐...
그래도 가실 때까지 온갖 수발이며 궂은 일, 돈 드는 일은 다 딸들이 했건만...
무슨 상관이랴...가신 분들은 그것으로 끝, 남은 자식들은 알아서 제 인생만 잘 살면 끝, 서로 기대고 얽히고 교통하며 살게 되지 않는다.
부모님께 물려 받은 업보라면 업보, 교훈이라면 교훈, 몸으로 체득한 진리라면 진리인 그것... 서로의 인생에 뭐라 하지 말자.

어릴 때 유독 아들과 막내만 편애 하신 덕에 나의 유년 시절은 우울했으나, 따져보면 고작 10년도 못 가는 세월이었다.
부모님 보내고 둘이서 지난 이야기 하면서 처음으로 동생의 사정을 자세히 들었다.
“언니는 내가 기억도 못 하는 어릴 때 받은 편애와 무시를 두고두고 아프다 하지만, 차라리 그게 나아. 나는 좋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어. 어릴 때는 예쁘다, 귀엽다, 무슨 장난감처럼 데리고 놀다가 내가 뭐라도 좀 싫다하면 금새 날벼락을 내리셨지. 그게 좋은 줄 알아? 게다가 나중엔 엄마가 날 얼마나 자주 이용하고 변명거리로 썼는지 모를거야.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진짜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어.”

일찍 커버린 내가 부모님에겐 부담이었다.
자식이지만 커갈수록 함부로 할 수 없으셨던 게다.
뭐 하나 쉽게 넘기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드는 내가 나이가 들수록, 커 갈수록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어디서나 인정 받고, 제 앞가림 알아서 하는데다 부모에게 기대지 않고 사니 대놓고 막하기도 애매한...그러다가 연 끊는다고 나오면 당신들만 손해일 터... 어쨎든 마지막에 아쉬운 소리 하고 손 벌릴 곳은 나였기 때문이다.

할매는 그런 부모님을 보며 항시 내게 미안해 하셨다.
그럴 것이 할매는 일평생 밭일, 들일, 남의 집 품을 팔아도 당신 손으로 살아 내신 분인데, 부모님은 환갑도 전에 은퇴 선언하고 자식들에게 오롯이 의존하며 살다 가셨으니...근본 생각이 확연히 달랐다.
“어디를 뜯어 봐도,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어디 하나 복 받을 구석이 없는데, 자식복은 많아서 니들이 고생이다.”

그 마음 고생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정말 느닷없이, 전조도 없이 끝이 났다.
한 해 전에 캐나다로 떠나 온 나는 가장 힘든 마지막 2년을 동생과 함께 해주지 못 했다.
결국 막둥이는 가장 짧은 시간을 부모님과 보내면서, 가장 힘든 시간의 책임도 가장 많이 치룬 자식이 되었다.
서로 누가 더 많이 했나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각자에게 서로 다른 힘든 시간과 이유가 있었고, 모두가 어떤 의미에선 피해자였고, 또 다른 면에선 수혜자였다.
그럼에도 언니인 나는 동생에게 늘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멀리 떠나 사는 사람은 굳이 가질 필요 없는 일에도 미안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하다.
그것을 공평하게 만들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내 인생의 총량이 어떻게 정해지고 나누어 질지 아직도 다 알 수 없으나... 받은 것은 받은 대로, 잃은 것은 또 그것 대로 다 의미가 있기에... 알 수 없는 그 양이 완전히 채워 질 때까지 계속 살아 가야만 한다.
덤덤하게...조금씩 더 가벼운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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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薔 제가 전라도농대를 다닐 때 기숙사에는 무진장 촌에서 온 심리학과 학생이 있었습니다. 한번 만나면 음습한 기운에 하루가 찌뿌둥했지요. 대화라도 나누면 그 부정적인 시각 덕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8남매 중에 맞이로 대학생인 자신을 위해 나머지 7남매는 공순이 공돌이로 맞이 뒷바라지 전선에 뛰어들었다는 거예요. 제가 재벌이라도 되었다면 이 친구와 이 친구의 나머지 남매들을 위해 과분할 정도의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지원했을 뻔했습니다. 그 부정적이고 음습한 분위기와 대화 내용 때문에 말이지요. 전라도 대학 심리학과생의 처참한 삶이 이 친구에게는 이미 예견되어 있고 자신의 뒷바라지를 하는 나머지 7남매에 그 어떤 보답을 할 수 없다는 암시가 흐르고 있어 이 친구를 보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습니다. 이 친구를 통해 저 역시 3남 2녀인 저의 형제자매의 모습도 얼추 같은 범주에서 바라보아졌습니다. 제 큰형은 서울대 의대 출신, 제 작은 형은 재수해서 한양대 딴따라과 제 누나도 재수해서 한양 여전 미술교육학과, 저는 전라도농대, 제 여동생은 덕성여대 가정과. 작은형 누나 저 제 여동생이 큰형 뒷바라지를 위해 공순이 공돌이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맞이의 서울대 의대를 위해 정량이 정해져 있던 부모님의 노고가 몰아졌음을 다들 대충 짐작 할만할 겁니다. 언젠가 제 여동생이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나도 큰오빠처럼 과외를 받고 조부모 부모의 뒷바라지를 받았다면 서울대 의대 뿐 아니라 하버드 의대도 갔을 거야." 글쎄 전 그럴 말 할 자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특별한 부자들이 아니라면 다들 비슷한 차별과 편애를 받으며 살아왔을 겁니다. 비록 제가 제힘으로 미국 유학하여 날고 기는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받았지만 형제·자매 많은 집안의 편애가 있었다는 것에는 정말 공감이 많이 갑니다.
  • 이영지 黃薔 제 친한 동기들 중에도 맏이가 여럿 인데...다들 부모의 기대와 다른 형제 자매들의 희생에 큰 부담을 느끼더라고요. 그때 느꼈지요. 과분한 기대와 성원이 좋은 것만은 아니고, 결코 그 책임에서 자유롭기도 힘들다는 것을요.
    크고 나서 제 인생에 만족하고 살면 괜찮지만, 자괴감과 불만족이 평생을 가는 경우도 많아서... 슬픈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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