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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어문편병(粉靑沙器魚文扁甁)

작성일 작성자 그림者

 

 

분청사기어문편병(粉靑沙器魚文扁甁) 조선초기 15세기?

 

 

조선 초기에 제작된 분청사기로, 청자에 화장/분장을 햇다는 제작과정의 명칭을 적용해서,

화장/분장한 청자라는 의미가 적용되어 분청사기라고 명명된 도자기로,

그 명칭은 우현 고유섭 선생에 의해 부여되었다고한다.

 

그런데, 위에 자료는 분청사기어문편병(물고기 문양의 납작한 분청사기)이다.

편병이란 납짝한 병이란 뜻으로, 물레로 제작되는 공정을 고려하면,

일반적인 물레 성형의 형태가 원형이 어야 하건만, 납작한 형태를 띄고있다.

 

일반적으로는 재료적이거나, 제작과정상 용이한 형태를 적용하는데,

분청사기 편병은 제작 공정을 무시한채 제작된듯하다,

즉, 물레로 성형해 구형의 형태로 제작한 후, 병의 양면을 눌러서 평평하게 제작한 편병은

굿이 번거롭게 이런 구조, 방식으로 제작되엇을까?

 

조선시대는 고려 다음의 왕조로 고려말기인 13세기에 유목민인 몽고족/원나라의 칩입을 받고,

일정 기간동안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형제국으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런데, 유목민족의 특성상, 주기적인 이동이 필수적인 요소이기에,

그들에겐 기동성이 필요햇고, 그러한 기동성과 연관해, 소지하기에 용이한 구조의 필수품들을 제작햇을 것이다,

그런데, 시대를 불문하고 야외 활동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것이,

수분을 보충할 음료수로 물을 담은 병이 필요햇으며,

휴대에 용이한 납작한 구조의 편병이 필요햇으리라,

 

유목민족인 몽고족은 이슬람 상인과 밀접한 교류를 했었고, 이슬람의 금속기술을 적용해서,

금속으로 제작된 납작한 편병을 수통/술통으로 활용했을 터인데,

이러한 구조를 적용해서 제작된것이,

원나라 간섭기에 우수한 고려청자를 제작했던 고려시대에 청자토를 활용한 편병을 만들엇으며,

그러한 시대적배경이 뭍어나는 도자기 중 대표적인것이, 분청사기 편병'일 것이다.

 

위 금속으로 제작된 편병은 15세기 명대에 제작된 편병이라고하는데,

명의 태조 주원장이 무인이라는 배경과 관련해서, 직접 칼을 차고 원정을 다니던

명나라 초기 황제들이 소지하던 물통/수통임을 짐작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은 몽고의 영향이 컷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조선초기의 분청사기편병이나, 위의 명대 금속제 편병은 유목민족인

원의 집권기 영향력이 적용된 형태일 것이다.

 

현대적으로 적용된 기동성을 염두에둔 수통인 군수품인 "군용 수통"도

유목민족인 몽고/원나라와 분청사기 편병의 역사적/양식적인 맥락이 현대에도 연관 지어진다.

 

 

위의 경우 매병의 형태를 지닌, 인화문 분청사기나 인화문 청자로 보이는데,

그릇이란 것이 주로 물이나 술등의 액체를 담는 용기이기에,

용도와 문양의 상관관계를 따지면 자연스레 어울리는 문양이 물고기가 아닌가한다. 

 

 

비록 부분 사진이지만, 가로형태와 하단의 일자 받침대로 추정하면

'분청사기 장군 편병' 또는 엄밀하게 분류하면 분청사기 장군,일텐데,

편병이라고 분류하기엔 애매해도 아마도 잉어가 그려진면은 평평/편편하게 다듬은후에 잉어 문양을 음각햇다.

 

잉어 또는 어류라는 소재가 알을 다량으로 낳기에,

과거 동북아 한자문화권에서 다산/多産의 상징이기도하며.

위에 얘기한 것처럼 물고기와 물병은 밀접한 상관성을 가지고있다.

 

그런데 위의 문양은 조선시대 관요에서 직업 화가인 화원화가들에 의해 제작된 좀더 사실적인 형태는 아니다,

하지만, 조선초기 고려청자를 제작했던 기술/인프라가 명맥을 유지하던 일개 도공에 의해 그려진 문양/그림 일 것이지만

당시 전문적으로 문양을 넣었던 기술자의 손맛이 녹록히 베어있다.

간략하면서도 지나치지안은 과장법으로 현대의 캐릭터처럼 유머러스하며 위트있게/해학적으로 그려진 문양.

이런 문양은 시각문화(다양한 영상매체,사진, 실물을 손쉽게 볼수 잇는 자연 도감,,,,)가 발달한 현대적 디자인과 비교해서

이를 제작한 도공 또는 문양만 전문적으로 그렸을 문양공?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능숙한 역량이 진득하니 뭍어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실제 잉어 또는 잉어의 사진을 볼 가능성이 현대와 비교해 적었었기에

부족이나 결핍에 대한 대안인 상상력의 나래가 꽃을 피웟던 결과일까?

 

과도한 시각이미지라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러한 다양한 정보를 통해 비교적으로 우위의 문양을 그려낼 수 있는 장점이 될까?

아니면, 정보가 과도할때 상상력을 북돋지 못함으로해서

독특하거나, 기발난, 유니크한 생각을 못하게되는 단점이 될까?

 

 

 

 

 

[어렴풋하나 이중섭이 담뱃종이에 , 일제 강점기당시 이왕가박물관에서 본 잉어문양을 그렸엇다는 일화가 기억난다.(맨위의 자료)

아마도 일본이 역사적으로 조선의 도자기및 문화를 흠모해서 임진왜란이 발발되고,

일제 강점기 당시에도, 조선의 골동품들에 미쳣던 일본인들의 과거의 한류/韓流 열풍에서 기인된 조선풍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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