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기의 패션의 제국

파리 지하철엔 진보와 보수가 함께 산다

작성일 작성자 김홍기

 

사회를 이끌어가는 두 가지 관점은 크게 진보와 보수로 나뉜다. 동일한 사물과 사건을 보는 관점이 다를 뿐, 그들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간다. 좌와 우, 두 날개가 존재하기에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처럼, 시대의 단층을 읽기 위해선 이 두 개의 힘이 어떻게 대립하고 조화를 이루는지 살펴야 한다.

 

나는 파리에 갈 때마다 지하철을 탄다. 최근 리노베이션을 거치며 거의 현대화 되었지만, 수십개 지하철 입구는 프랑스 정부가 역사적 유물로 선정해 보호하고 있다.

 

지하철 입구의 단판 표지는 유연한 곡선으로 피어나는 한송이 꽃의 형상이다. 이 꽃에는 1890년대 시대정신의 핵심, 바로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아르누보란 미술양식이 담겨 있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는 이를 기념하여 세운 에펠탑으로 인해 단순 육면체의 삭막한 콘크리트 건물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반면 박람회 개최와 더불어 개통된 파리 지하철은 과학기술의 진보 속에 전통적인 자연미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였다.

 

철골 구조물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건축을 인간미 숨쉬는 건축으로 조화시킨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싸움은 건축을 어떤 방식으로 지을 것인가를 놓고도 치열했다. 성장과 효율이란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보수와, 그 속에서도 인간의 꿈과 냄새가 묻어나는 건축을 꿈꾸었던 그들의 싸움은, 오늘날 현 정권의 무계획적 성장주의를 반성하는데 좋은 지침이 될 것 같다.

 

과학적 진보만을 외치며, 잿빛 도시의 그림을 그렸던 보수와, 중세의 꿈을 잃지 말자며, 형태와 자연의 미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 진보가 공존의 언어를 만든 것이다.

 

"철물건축에도 인간의 취향과 따스함이 배어나야 한다"고 한 건축가 기마르(Hector Guimar)는 지하철 METRO 간판의 꽃을 디자인하면서 이 점을 명확하게 살렸다. 아르누보 양식은 무엇보다도 곡선의 아름다움이 살아 있다. 굵기와 휜 정도, 형태를 조율하여 시대에 만연한 사람들의 정서를 표현했다. 여기엔 화려한 욕망과 안정, 기계주의문명의 발달과 맞물린 역동감 등이 함께 들어 있다.

 

지금 보시는 파리 메트로는 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동안의 건축에 대한 논의와 시민과 전문가 집단의 공청회, 이념투쟁이 문화적 산물로 꽃 피어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1890년대 말은 과학문명이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던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라 불리는 시대다. 루이 14세 때의 거리의 가스등은 전기등으로 대체되고, 유흥문화가 발전하면서 파리의 매춘부들은 다리의 곡선을 꼭 감싸는 실루엣의 패션을 입고, 남성들을 유혹했다.

 

파리의 부르주아는 대중문화에 빠졌다. 성에 대한 의식도 더욱 개방적인 형태로 변했다. 사진기가 개발되었고 저렴한 인쇄기술은 매춘부들의 자신을 알리려는 욕망과 맞물려 자신의 누드를 판화로 찍어 거리에 뿌렸다.

 

이런 시대의 풍경을 담아낸 미술사조가 바로 인상주의다. 흔히 밝은 팔레트의 색조가 가득한 르누아르와 마네의 인상주의를 떠올리지만, 그 속살을 뒤집어 보면 완전 '아니올시다'다. 그림 속 여인들의 패션이 화려한 건 전적으로 인공염료 기술의 발전과 재봉틀의 대중화와 맞물려 있다.

 

당시 파리의 고혹적인 밤의 거리, 유흥가의 풍경을 그린 로트렉의 그림을 보면, 카바레와 서커스,윤락가 등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본능을 생상하게 느낄 수 있다.

 

그는 특히 특정한 사조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가진 화가였기에, 세기말 프랑스의 탐미적인 풍경을 그릴 수 있었다. 툴루즈 로트렉은 포스터 칼라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광고와 선전 목적으로 그려야 했던 그림이 많았다는 증거다.

 

포스터는 색채 사용에 잇어 수의 제함을 받기 위웠기에, 상렬한 선의 표현으로 효과를 극대화 해야 했다. 로트렉의 <물랭주즈로 들어서는 잔 아브릴>이란 작품을 보면 강한 선의 윤곽이 눈에 띈다. 몇 개의 선으로 파리의 밤 문화, 그 속살의 뜨거움을 간결하고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로트렉의 그림 속 꿈틀거리는 선은 기마르가 디자인한 아르누보 양식의 지하철 간판과 닮아있다. 이처럼 세기말의 파리는 인간소외와 기계 문명에 대한 불안감과 우려를 표현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그들은 심리적인 도피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내면 속 몽롱한 환상의 세계를 만들며,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집의 형태로 지어냈다.

 

 

툴루즈 로트렉 <입맞춤> 1892년, 캔버스에 유채

 

부유한 중산층 주택은 인간의 심장을 상징하듯 정원을 만들었다. 집은 인간의 희망과 꿈을 담는 장소이고 그림은 마음의 정원을 거니는 이들의 꿈을 캔버스에 담는다. 건축과 미술, 이 두 장르를 함께 공부하다 보면, 보수와 진보, 해묵은 이념 논쟁에 대한 답이 보인다. 더불어 따스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함께 싸워가야 하는 것임을. 그 단단한 지혜를 우리에게알려준다.

 

최근 전 국토의 자전거 도로화를 완성하겠다는 정부의 야심찬 계획을 봤다. 일면으론 찬성이지만, 그 속내를 보면, 녹색성장이란 정치적 수사아래 복속된 형편없는 계획이다. 국민과의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인터넷의 오용 때문이라는 식의 시선을 견지하고 싶은 여당. 그러나 결국 그 속내를 보면,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일방통행하려는 심사가 그대로 보인다. 이 땅에 오랜 세월 기억될 건축물과 랜드마크가 없는 이유다. 그들은 언제쯤 그 예의 조급함을 버리게 될까.

 

그들에게 건축가 기마르의 말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싶다. 철로 지어도 인간의 따스함이 베어나도록 만들수 있다. 문제는 그런 문화적 감성을 갖지 못한 자들이 이 땅의 4대강을 문화적 운운하며 발전시키겠다는 청사진을 보이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정치적 수사만큼, 쉬운 것도 없다. 그저 말로 때우는 정책. 국민들이 더 앞서나가고 있다. 적어도 이 나라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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