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함께 인간도 익어간다-이목을의 사과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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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Healing/내 영혼의 갤러리

사과와 함께 인간도 익어간다-이목을의 사과그림

패션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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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을_空831卍_나무에 유채_123×246cm_2008

 

오늘 1시경 인사동에 나갔습니다. MBC 문화사색 프로그램 PD님와 함께

인사동의 주요한 전시를 보러 다녔지요. 5분 가량 나오는데 4시간 이상 촬영했습니다.

쉽지 않았지만, 덕분에 좋은 전시를 마음껏 보고 작가 인터뷰도 했습니다.

 

아트 사이드에 들러 히로시 고바야시전을 봤고 이목을 선생님의

작품전을 두번째로 선정, 전시장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선생님께서 전시장에 나와

계셔서 만나뵙고, 평소에 궁금했던 것도 물어보고, 새로운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힐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네요. 이목을 선생님의 사과 그림하면, 예전 윤병락 선생님과

더불어 함께 이 블로그에서 소개드린 적이 있지요.

 

 

이목을_空833卍_나무에 유채_245×163cm_2008

 

그때는 단순히 미술시장의 활황 속에서 인기를 끄는 극 사실주의 작가로서만

소개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작가의 내면과 작품세계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그림값을 이야기하던 시절이죠. 열기가 식고 나니 오히려 작가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호흡을 고르고, 내 안에 있는 깊은 마음의 눈을 그림으로 가져간 탓입니다.

 

서양미술사에 보면 셰이프드 캔버스(Shaped Canvas)란 것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평평한 장방형의 캔버스-우리가 알고 있는-를 떠나 그림의 소재와 형식에

따라 형태가 바뀌는 캔버스를 말합니다. 르네상스 시절 라파엘로도 톤도(Tondo)라 불리는 원형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죠. 이 셰이프드 캔버스는 그림이 캔버스 위에

그려지는 것이라는 개념을 깨뜨림으로서 작가의 의도가 더욱 돋보일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면의 캔버스란 형태적 본질은 넘어서질 못했지요.

 


이목을_空901_나무에 유채_245×123.5cm×2_2009

 

자 이제 이목을 작가의 캔버스를 볼까요? 그는 캔버스가 아닌 생활의 손때가 묻은

오래묵은 널판지나 도마, 책상, 밥상, 나무 소반에 시절을 쫒아 향기를 발산하며 익어가는

과실을 담아냅니다. 모두 직접 손으로 목공예를 하듯 깍아 만든 것이지요. 작가의 온기어린 정이

나무의 결 위에 오롯하게 새겨지는 것도 무리가 아닐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생활의 풍경이 마치 화로에서 구워낸 벽돌처럼, 층을 이루고

하나하나 소중하게 쌓여 만들어낸 정신의 풍경은 고고하지만, 그 속에는 불의 자궁속에서

숙성된 작가의 손때어린 경험과 순수한 영혼이 맑게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익숙한 우리 내 사물에

마치 사진처럼 정확하게 재현된 사과를 그려냄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계절의 연금술이

만드는 사과의 향기를 맡는 효과를 발산합니다. 실재하는 사물을 이렇게 정교하게 그려낸다는 것은

단순하게 노력의 결실은 아니겠지요. 그래서인지, 그 정교함엔 세련미란 다소 차가운

단어가 만들어 낼수 없는 아취어린 예술미와 미적 가치가 녹아 있습니다.

 

 

이목을_空825_나무에 유채_125×12.5cm×2_2008

 

개인적으로 이목을 선생님께서 작품에 대한 의도와 해석을 일일히 말씀해 주셨는데요

저는 이 작품 앞에서 눈을 감을수가 없었어요. 대추씨가 시간의 경과 속에 익어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고

하더군요. 문제는 그림 속 대추나 사과가 그냥 과실로서의 사과나 대추가 아니란 점입니다.

작가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림 속 과실은 인간에 대한 은유라고 하시네요.

 

그래서인지 많은 미술평론가들이 선생님의 그림을 극사실주의란 양식을

빌어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하시더라구요. 굳이 해석을 내리자면 오히려

개념미술에 가깝다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나무를 깍아 캔버스를 만들고, 그 속에서 음과 양의 조화

인간과 인간의 조응, 인간과 자연의 배열과 조화를 녹여내고 싶었다고 하셨거든요.

 

 

이목을_空830_나무에 유채_255×261cm_2008

 

그래서였을까요? 예전 아트 페어를 다니며 선생님 그림을 볼때 제대로 보지 못했던

요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사과를 보니 정교하되 각자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개별적인 형태를 띕니다. 발그레하게 잘 익은 사과가 있는가 하면, 여전히 미만한 초록빛의 숙성되지

않은 사과가 있고, 어디엔가 부딪쳐 상처가 난 사과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또한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풍경을 이루는 것이겠지요.

 

 

이목을_空902_나무에 유채_163×326cm_2009

 

사람들과의 관계에 부대낄때, 누군가를 수용하기 어렵다고 느낄때

결국 내 안에 가득한 무언가를 덜어내지 못하고, 섭섭함과 서운함, 악한 감정을

바깥으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토해냅니다.

 

노자의 말을 떠올립니다. 그릇이 그릇으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비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텅빔은 그저 공허한

빔이 아닌것이지요. 비어있음으로서, 자신의 존재론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목을의 사과가 비어있는 공간 속에 어느 한 부분을 점유하며 채워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해야 하는 마음의 여백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네요.

 

 

이목을_空808_나무에 유채_91×120cm_2008

 

이목을의 그림에는 유독 빈 공간이 많고, 그 빔은

항상 희망적인 상황을 잉태할수 있는 가능성으로 가득 찹니다.

선생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렸죠. 예전 KIAF에서 작가의 그림을 보고

마음 한구석 아픈 부분을 치유할수 있었던 것, 그때는 말로 설명하지 못했지만

텅빈 공간속에 무르익어 가는 사과의 향기와 더불어,

내게 다가온 빔의 여백일 것이라구요.

 

전시장에 들어가니 온통

주변엔 환한 연두빛과 짙은 붉음의 사과꽃이 피었습니다.

불교적 卍 자를 해체시킨 작품이 우선 눈에 들어왔어요. 인간의 고통 속

균열이 금처럼 세겨져 있고, 그 속에도 인간의 은유인 사과가 정열되어

있었지요. 그러나 인간의 연합과 조화를 믿는 한, 그 고통은

철저하게 예술적 세계를 통해 해체될수 있을겁니다.

 

텅 빈 공간 위에 무르익은 사과가 마치 떠다니듯 유영합니다.

손을 뻣으면 꼭 발갛게 익은 사과를 딸수 있을것만 같습니다. 시간의 무르익음을

견딘 사물은 채움에서 텅빔으로 그 공간을 이동함으로서만, 더 큰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사과의 이미지가 들어간 부분과 들어가지 않은 부분이 대조를 이루고 마치

콘트라베이스의 중후함과 긴 음색을 삶의 유장함속에 아로새기는

것 같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정말 편합니다.

 

 

 

 이목을_空832_나무에 유채_257.5×177cm_2008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이 사과를 닮았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이해가 됩니다. 단단하게 여문 하늘을

베어무니, 막혀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닫혔던 물길이 트이고,

내게 주어진 햇살의 양과 바람, 순정품의 물을 먹으며

양 손 위에 펼쳐놓은 생의 행복을 생각합니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 십자가의 도열앞에 선 인간의 모습처럼

시간의 숙성 앞에서 겸허하고, 타인과의 조화를 꿈꾸는 제 자신이 되어보길

그렇게 꿈꾸고 꿈꾸어 봅니다.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을 핑계로 전시도 보고 작가와 이야기도

나누고요. 참 행복한 하루였네요. 멋지고 알찬 주말 맞이하세요. 그림읽어주는 남자

김홍기였습니다. 자 양손을 펼쳐 행복의 사과를 가득 담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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