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마음 먹고 아마존으로 신청한 책. 미국 보그VOGUE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오랜동안 활동한 그레이스 코딩턴의 활동들, 사보작업을 한꺼번에 모아 선보인 책이다. 두께도 402페이지. 케이스에 들어있는데 무게도 정말 무거워서 서재에 들어가지 않는다. 스티븐 마이젤과 애니 레보비츠, 크레이그 맥더널드, 마리오 테스티노, 데이빗 심즈 등 세계적인 사진작가들과 함께 협업한 그녀의 화보작업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배송비까지 다하면 16만원이 넘지만 그 내용을 차분하게 하나씩 읽고 있자니 기분이 좋다. 



미술작가들에게도 자신의 총 작업목록을 정리한 도록들이 있듯이, 패션작업도 일종의 예술작업인데 모든 작업을 한 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나는 이번에 출간한 <옷장 속 인문학>에서 패션화보가 가지고 있는 매력과 미덕에 대해 논했다. 화보란 것이 단순하게 당대 바로 유행하는 옷들의 전시실이 아닌, 옷과 모델, 사진작가, 스타일리스트, 감독의 모든 시선이 용해되어 옷에 잠재된 힘을 이끌어내는 작업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수많은 리허설을 통해 매끈한 현실이 되어 우리와 만난다. 요즘은 화보작업들이나, 사진작가들의 작품 하나하나를 새기며, 이에서 느껴진 감정들을 글로 남기고 있다. 시각적 글쓰기에 대한 연습은 지금껏 계속된다. 옷과 모델, 사물의 배치는 영화와 미술상의 미장센 분석과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단순배치가 아닌, 배치를 통해 말을 건내는 일일 것이다. 



대학 1학년 미학수업 시간 첫 시간, 교수님은 그림에 대해 글을 쓰고 싶거든, 작가가 한 장의 그림을 그릴 때 들었던 시간만큼 그림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되돌아보면 너무 맞는 말이다. 작업이란 것을 분석하는 일을 하는 이가, 분석의 언어와 문법을 익히는 것은 기본이고, 작가들과의 인터뷰나 대화를 통해 기본적인 접근법에 대해 일말의 단서를 얻는 것도 중요하다. 패션이라고 그러하지 않겠는가? 



어마어마하게 무겁고 큰 책이 들어오는 날이면 내 서재들은 재정리에 바쁘다. 복식사 전반과 미술사에 관한 모든 책을 다 사보는 나로서는, 세부적인 주제에 따라 조금씩 책을 분류해 정리하고 있다. 복식사 전체, 사전류, 현대패션, 역사적 패션의 시대별 구분, 복종별 역사, 스타일링, 패션사진, 패션과 융합을 설명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과의 결합과 그 결과값을 보여주는 책들 등등이다. 암튼 너무 무거워서 들다가 허리가 삐끗할뻔한 이 책에서 나는 보그VOGUE의 미학적 변이와 과정들을 살펴볼 수 있어 좋다. 



옷도 하나의 내러티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녀의 작업 앞에 나는 지금 서 있다. 보그의 명성높은 화보제작도 이제 과거의 일이 될지 모른다. 아니 이미 패션계의 중요한 화보제작은 열악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2주간 아프리카를 가거나, 혹은 이국적인 풍경에 수많은 제작진들을 데리고 갈 수 있었겠지만 현재로서는 언감생심이다. 보그vOGUE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그녀의 철학을 지면으로 보는 것도 어찌보면 이 책을 통한 것이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오렌지색 머리칼과 백자처럼 하얀 피부의 코딩턴, 예전 르네상스 시대의 엘리자베스 여왕 1세를 연상시키는 외모다. 1960년대 패션의 변혁기에서 부터 그녀의 작업은 보그의 한 성격을 규정하는 요소였다. 


안나 윈투어의 실용적인 상업주의와는 결을 달리하는 예술성의 수호자로서 그녀의 작업은 기록될 것이다. 빅토리안 앤 앨버트 박물관의 사진 큐레이터인 수재너 브라운은 그녀의 사진 작업을 가리켜, 옷 이상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거대한 담론의 세계였다고 말한다. 1880년대 최초의 패션사진이 개재된 잡지들이 등장한 이후로, 보그가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개념을 구체적으로 풀어내고 소비자들에게 팔고, 현대 문화의 한 정신적 얼개와 물질적 구현물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덕이 컸다. 그녀가 많이 그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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