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 패션칼럼을 쓴지도 이제 3년차에 들어간다. 패션에 대한 글은 쓸때마다 느낌과 한 시대의 감성을 읽는 데이터, 그 처리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섬세한 변화들을 겪는다. 일반적인 통론을 쓰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섬세하게 풀어내야 하는 트렌드 글은 항상 어렵다. 트렌드는 인간이 어떤 생을 지향하고, 어떻게 생을 만끽할 것인가와 같은 태도의 좌표를 보여주는 나침반이다. 트렌드는 인간이 공간을 설계하고, 옷을 입고, 밥을 먹고, 교제를 나누는 방식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2017년을 빛낼 라이프스타일의 열쇠말로 많은 이들이 ‘휘게(Hygge)란 단어를 입에 올린다. ’편안하고 아늑한 상태‘를 추구하는 덴마크의 생활양식을 뜻하는 말이 왜 이렇게 인기일까? 덴마크는 2016년 유엔에서 발표한 ‘세계 행복 보고서’에서 행복지수 1위의 나라로 뽑혔다. 



나는 3년 전 한창 한국에서 북유럽 디자인 열풍이 불 때, 덴마크를 비롯해 북유럽 주요 국가들을 연구하기 위해 여행했다. 초겨울의 코펜하겐은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턱없이 높은 물가, 울퉁불퉁한 포장도로 때문에 여행객을 힘들게 했다. 하지만 별의별 인테리어 소품과 가구, 바닥에 깔아놓으면 너무나 따스한 온기가 느껴질 러그, 나무로 만든 귀여운 인형 등 다양한 디자인 제품들이 즐비한 가게에만 들어가면 눈이 어찌나 행복하던지.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넘게 가야하는 바닷가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루이즈 미술관은 '죽기전에 가봐야 할 미술관 100'의 순위권을 열심히 지키는 곳이었다. 


게다가 다이아몬드 대신 호박을 더 좋아하는 이들이 흥미로웠다. 나무가 자신을 상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품어낸 수지가 굳어져서 만들어진 게 호박이란 보석이다. 덴마크 사람들이 집에서 켜는 따스한 전구의 조도는 호박의 빛깔을 닮았다. 그 불빛 아래 함께 요리를 먹는 이들은 나무가 품어낸 수지 속에서 함께 영그는 보석의 시간을 누린다. 휘게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아늑함을 뜻하는 ‘Cozy’이다. 여기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할 때 느끼는 단란함이 결합된 개념이다. 우리가 안락함/편안함이라고 옮기는 영어의 ‘Comfort’도 어원을 따져보면 함께(Com) 격려하고 힘을 북돋워주는(Fort) 데서 나왔다. 개념적으로 보면 휘게나 컴포트나 별 차이가 없다. 그만큼 안락함은 도덕을 지키는 인간의 연대가 만들어낸 정신적 지원이란 의미가 컸다. 



하지만 이 개념은 이후 재화를 구매해서 얻을 수 있는 물질적 감각‘을 뜻하는 말로 뒤바뀐다. 산업혁명 이후 안락함의 개념은 인간관계의 질이 배제된 말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소비재산업은 인간이 이전 시대 누릴 수 있었던 인간과 인간 사이, 따스한 격려와 친밀감의 영역을 상품으로 대체해버렸다. 이때부터 우리는 안락함이란 상태를 상품과 서비스를 통해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최근 휘게란 키워드가 유행하면서 별별 상품이 쏟아진다. 휘게 스타일의 케이터링에서, 휘게 스타일을 표방한 입욕제, 마사지 서비스 등 보다 보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들도 많다. 휘게 이전에는 미국식 킨포크(Kinfork)가, 최근에는 일본식의 ’최소한의 삶‘을 뜻하는 단샤리가 있었다. 이 생활양식이 가진 핵심적 가치들은 엇비슷하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유대감을 갖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오늘에 감사할 것, 소유보다 체험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할 것 등이다. 삶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결코 어느 한 때만 풍미하고 말 것이 아니다. 인간이 안락함이란 상태를 누리기 위해 가장 필요한 보편적인 요건들이다. 우리 사회 내부에서 자꾸 안락함의 본질을 묻는 단어들이 트렌드란 이름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의 질이, 희망을 품어야 할 인간의 연대가 현저하게 낮아지고 훼손되었다는 뜻은 아닐까? 휘게 이후에는 또 어떤 다른 단어가 등장할까? 


언제까지 동어반복의 세계 속에 묶여 살아야 할까? 호박이란 보석을 만드는 나무수지 역할을 해야 할 국가가, 스스로 정체성의 근간을 허물어뜨리고 그 속의 인간들을 한없이 비루하게 만든 지금, 과연 우리가 찾아야 할 안락함의 조건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 스스로 이런 조건을 찾아가는 장대한 여정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또 어디선가 수입해온 누군가의 '안락함의 조건'을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내면화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삶은 너무나도 비참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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