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기의 패션의 제국

화가의 옷장-미국 회화의 거장 조지아 오키프의 패션을 엿보다

작성일 작성자 패션 큐레이터



조지아 오키프의 전시가 뉴욕 브룩클린 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Georgia O’Keeffe: Living Modern> 전시에서는 화가 한 명의 생을 조명하기 위해 다양한 작품과 생의 소품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그녀의 드레스를 통해, 작가로서 독립적인 생을 살아왔던 그녀의 면모를 조금씩 엿볼 수 있도록 기획했다. 미니멀한 패션을 사랑했던 화가는, 주얼리를 비롯한 액세서리, 패션에서 '자연'에서 영감을 얻으며 추상화 과정을 거쳤던 자신의 모습에서 미니멀한 패션 스타일을 즐겼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진작가였던 남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위해 포즈를 취했던 방식, 제스처, 그녀의 옷장을 통해 한 개인의 정체성을 훓어본다는 취지를 갖고 있다. 사진작가의 아내로, 자신만의 스타일로 인테리어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항상 남편 주변의 많은 사진 작가들이 모델이기도 했다. 안셀 아담스나 유섭 칼쉬, 세실 비튼, 앤디 워홀, 브루스 웨버처럼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작업을 했다. 

뉴욕의 브룩클린 미술관은 그녀의 작업과 패션 스타일링의 어떤 관계들을 풀어내고 싶었던 것일까? ‘꽃’과 ‘누드’는 미술의 전통을 통해 ‘여성적’인 주제로 받아들여져 왔다. 오키프의 꽃 그림은 여성의 신체를 상징하는 주요한 모티브로 사용되었다. 꽃잎의 다양한 층위들, 그 어우러짐을 여성성과 연결시키려고 애를 썼던 작가답지 않게 그녀의 옷차림은 너무나도 이성적이고, 양성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  

그녀가 꽃그림에 빠진 데는 사진작가 스티글리츠도 한 몫을 했다. 남성들 중심의 뉴욕 미술계에서 여성을 대표한 '전형성'을 다루는 작가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20세기 미국미술을 통해 꽃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다룬 작가들은 이외에도 주디 시카고와 로버트 메이플소프다. 하나같이 꽃의 이미지는 자연의 꽃 이미지를 넘어, 여성신체의 특정 부위를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작품이 속칭 잘 팔렸다. 미술품 컬렉터 대부분이 실제로는 돈많은 상류층 남성이라는 점, 혹 여성들이 남성을 대변해 미술품을 구매하게 되더라도, 남성중심적 가치관이 침윤된 그들의 틀 속에서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 

 조지아 오키프는 1918년 부터 30년까지 12년간, 200여점이 넘는 꽃  그림을 그렸다. 거대한 꽃잎의 층들이 하나씩 펼쳐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작가는 양귀비나 붗꽃, 무엇보다 꽃의 내면적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꽃수술이 자리한 공간을 마치 현미경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에 빠지도록 그렸다. 


여성성이란 가치에 천착한 작가의 이미지에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이미지는, 의외로 그녀가 즐겨입고 정작 대중앞에 설 때 연출했던 패션 스타일링과는 매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머리 스카프를 한 모습도 매우 견고하고 단단한 양성적인 이미지가 물씬 배어있다. 

오키프에게 반해, 이혼을 감행하며 그녀와 결혼한 사진작가이자 당시 최고의 비평가로, 갤러리 소유주였던 스티글리츠는 사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한 남성중심주의적 사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었다. 갤러리 소유주로서, 기존의 컬렉터 층에게 호소력을 갖는 작품을 만들도록 작가를 추인하는 것인 당연했다. 

그는 오키프의 그림 속 여성성을 강력하게 밀어부치고, 뉴욕의 미술계에 마케팅했다. 그림으로 표방하는 가치와, 그녀의 실제 라이프스타일이 묻어나는 옷의 이중성이 드러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남성의 이분법의 가치에서 한터럭도 벗어나지 못한, 그래서인지 당시 미국사회에 처음으로 번역되며 확산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비롯, 여성의 성욕을 특정한 사물과 연결시키는 억지스러움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옷장 속 인문학>을 쓰면서 한 인간의 옷장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반영하는가에 대해 썼었다. 옷장 속의 개별 옷들이 인간을 설명하는 어휘라고 강력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선별되어야 하고,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고 가르쳐왔던 나였다. 


화가의 옷장에 유독 눈길이 가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한 시대의 정신을 시각적 환영과 구체적인 물질성을 통해 선보이고 풀어내야 하는 작가에게, 한 인간의 옷차림은 그림과 연결된 한 측면, 혹은 표방가치와 실제 내적 가치의 충돌이 일어나는 전투의 장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3월에 시작된 전시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들러보고 싶다. 패션전시도 일종의 문법체계와 어휘의 성좌를 만들어가야 할 때가 왔다. 



패션전시라고 하면 지겨운 콜라보레이션과 기업체의 후원으로 이뤄진 디자이너 자랑질과 브랜드의 날조된 역사 추켜세우기를 넘어, 패션이 우리 모두의 언어임을, 이를 위해 어떤 부분들을 드러내고, 조율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할 때가 오는 것 같다. 요즘 패션 큐레이션이란 단어도 따라하는 자들이 생겼다. 항상 그래왔듯, 따라하는 이들이 생긴다는 건 한 마디로 이 아이디어가 돈이 된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때 긴 호흡으로 내면을 닦아온 이들과, 그저 아이디어만 훔쳐다 표방해온 이들의 결과값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패션전시기획자로서 항상 이렇게 토해내는 말에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지아 오키프의 전시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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