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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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 오늘, 4월/4월 13일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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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4 13,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공화국 마지막 해인 1987, 국민들은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대학가 역시 1987 1 14일 발생한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위의 열기가 절정에 달해있었다. 그러나 5공 정권은 민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한술 더 떠 1987 413일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통해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한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 시민항쟁에 맞섰다. 이날 전두환은 그동안 여야 합의에 의해 개헌이 성사되도록 기다려왔으나 전망이 절망적이어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임기 중에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후,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이 같은 발표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평화적 정부이양과 서울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개헌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했다.

 

 

전두환 정부는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선거를 계기로 야당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자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유로 호헌론을 주장하다가, 1986년 제1야당인 신한민주당이 1천만 개헌서명운동을 전개하며 압박하자 내각제 개헌으로 물러섰었다. 따라서 4.13 호헌조치는 전두환 정부가 다시 호헌론으로 복귀했다는 의미가 있었다. 4.13 호헌조치는 당시 국민들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곧 저항에 직면했다.

 

4.13 호헌조치가 발표된 1987 4 13일은 통일민주당의 창당 발기인 대회가 있던 날이었다. 이날 발기인대회에서 창당준비위원장으로 추대된 김영삼은 4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4.13 호헌조치는 전두환 정권이 영구집권 음모를 드러낸 반민주적 반국가적 폭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연말까지 9개월 중 국민투표에 필요한 기간은 넉넉잡아 2달 정도이므로 개헌협상 기간은 충분하다며, 개헌하는 데 시간부족을 내세우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민주개헌과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는 분리될 수 없는 과제이므로 민주개헌의 성취 없이는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사회단체와 종교계, 학계, 문화계 등 각계각층에서도 4.13 호헌조치를 반대하고 나섰다. 1987 4 13일 대한변호사회를 시작으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이 4.13 호헌조치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서울대를 비롯해 전국의 많은 대학교수와 연극인 미술인 출판인 등도 4.13 호헌조치를 반대하는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전국에서 많은 대학생이 4.13 호헌조치를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특히 천주교 광주교구의 일부 신부들이 4.13 호헌조치를 반대하는 단식농성을 시작하면서 전국의 각 교구로 확산됐고, 일부 정치인과 재야단체 회원도 한때 단식 농성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1987 5 18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조작 사실이 폭로돼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러던 6 9일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교문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 6월 시민항쟁의 불을 댕겼다. 6 10일 마침내박종철군 고문살인 및 은폐 규탄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이것이 바로 도시 중산층과 샐러리맨들까지 가세, 한국 근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위에 참여하지 않던 일반 시민들까지 대거 길거리로 몰려나온 이 시위로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독재정권 연장을 꾀하던 5공 정권으로 하여금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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