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백석 시 모음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여승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

 

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

 

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

 

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

 

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정주성(定州城)

 

산(山)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려 조을던 무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팔원(八院) - 서행 시초(西行詩抄) 3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흰 밤

 

 

옛 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어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여우난골족(族)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려(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엄매 사춘누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 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 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 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 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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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우난골족 : 여우난 골 부근에 사는 일가 친척들.

 

*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 아버지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 포족족하니 : 빛깔이 고르지 않고 파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 매감탕 : 엿을 고거나 메주를 쑨 솥을 씻은 물로 진한 갈색.

 

* 토방돌 : 집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 오리치 : 평북 지방에서 오리 사냥에 쓰이는 특별한 사냥 용구.

 

* 반디젓 : 밴댕이젓.

 

* 저녁술 :저녁 숟가락 또는 저녁밥.

 

* 숨굴막질 : 숨바꼭질.

 

* 아르간 : 아랫간. 아랫방.

 

* 조아질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 아이들의 놀이 이름들.

 

* 화디 : 등장을 얹는 기구. 나무나 놋쇠로 만듦.

 

* 홍게닭 : 새벽닭.

 

* 텅납새 : 처마의 안쪽 지붕.

 

* 무이징게 국 : 민물새우에 무를 넣고 끓인 국.

 

 

 

 

 

 

국 수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

 

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기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기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

 

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루?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친한 것

 

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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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치가재미: 북쪽 지역의 김치를 넣어 두는 창고, 헛간

* 양지귀: 햇살 바른 가장자리

* 은댕이: 가장자리

* 예대가리밭: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 산멍에: 이무기의 평안도의 말

* 분틀: 국수 뽑아내는 틀이라 한다.

* 큰마니: 할머니의 평안도의 말

* 집등색이: 짚등석, 짚이나 칡덩쿨로 짜서 만든 자리

* 자채기: 재치기

* 댕추가루: 고추가루

* 탄수: 석탄수

* 삿방: 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를 깐 방 // 아르?: 아랫목 //

* 고담(枯淡): (글, 그림, 글씨, 인품 따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아취가 있음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

 

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

 

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거

 

랑닢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짖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갖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장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

 

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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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신창 : 부서진 갓에서 나온, 말총으로 된 질긴 끈의 한 종류.

 

* 개니빠디 : 개의 이빨.

 

* 너울쪽 : 널빤지쪽.

 

* 짖 : 깃.

 

* 개터럭 : 개의 털.

 

* 재당 : 재종(再從). 육촌.

 

* 문장 : 한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인 사람.

 

* 몽둥발이 : 딸려 붙었던 것이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남은 물건.

 

 

 

 

 

가즈랑집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짐승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

 

려 오는 집

 

닭 개 짐승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촌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에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아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산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몇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아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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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즈랑집 : '가즈랑'은 고개 이름.'가즈랑집'은 할머니의 택호를 뜻함.

 

* 쇠메 : 쇠로 된 메. 묵직한 쇠토막에 구멍을 뚫고 자루를 박음.

 

* 깽제미 : 꽹과리.

 

* 막써레기 : 거칠게 썬 엽연초.

 

* 구신집 : 무당집.

 

* 구신간시렁 : 걸립(乞粒) 귀신을 모셔놓은 시렁. 집집마다 대청 도리 위 한 구석에 조그마

 

한 널빤지로 선반을 매고 위하였음.

 

* 당즈깨 : 당세기. 고리버들이나 대오리를 길고 둥글게 결은 작은 고리짝.

 

* 수영 : 수양(收養). 데려다 기른 딸이나 아들.

 

* 아르대즘퍼리 : '아래쪽에 있는 진창으로 된 펄'이라는 뜻의 평안도식 지명.

 

* 제비꼬리 - 회순 : 식용 산나물의 이름.

 

* 물구지우림 : 물구지(무릇)의 알뿌리를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 둥굴레우림 : 둥굴레풀의 어린 잎을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 광살구 : 너무 익어 저절로 떨어지게 된 살구.

 

* 당세 : 당수. 곡식가루에 술을 쳐서 미음처럼 쑨 음식.

 

* 집오래 : 집의 울 안팎.

 

 

 

 

 

 

백석 白石 (1912.7.1~1995) 본명 백기행(夔行)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출생하였다.

 

오산(五山)중학과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일보사 출판부를 근무하였으며,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자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http://limaho.hihome.com/

 

(백석 시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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