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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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문학/작가이야기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금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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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盧天命, 1912~1957)

 

 

어려서 홍역을 앓아 죽다가 살아났다고 하늘이 내린 命이라고..본명인 노기선을 어려서 "天命'으로 改名한 女人. 후에 시인이 되리라 예감하고 지은 듯한 시인의 호같은 이름을 가진 女人.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었던 특이한 이름을 가진 女人. - 盧 天 命 -

 

 

봉건사회와 침략의 암울한 시대에 잘못 태어난 기구한 운명의 女人. 진명여고와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엘리트 新女姓. 최정희, 모윤숙과 함께 여성 삼인방을 이루며 자유분방한 화려한 愛情觀을 가졌던 女人 묘하게도 유부남을 모두 사랑했고 끝없이 유부남을 쟁취 하려한 처녀들...

 

 

사랑과 배신, 변신을 거듭한 이 女人들과 우정과 애증을 주고받은 女人. 침탈시대의 여러 신문사의 신문 기자생활을 하며 등단한 詩人인 명성도 한 몫 한 女人. 그런 그녀가 왜? 왜 '이름 없는 女人'이 되고 싶어 했을까? 왜? 어느 조그만 시골로 들어가 초가집에서 부엉이 우는 밤에 수수엿이나 녹여 먹으며 살고 싶어 했을까?

 

 

오늘은 이 詩가 쓰여 진 상황에 대해 이리 저리 주워들은 것들과 자료들을 엮어 거기에 개인적 의견을 덧붙여 주섬주섬 나불거려 보렵니다. 노천명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정신여고 영어선생과 조선일보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우리들 국어 교과서에도 올려 져 시험 볼 때 골치 아프게 했던 모가지가 길어서 슬프다고 한 '사슴'으로 이미 유명 시인이 되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녀가 '이름 없는 여인' 이 되고 싶었던 것은 훗날 부산의 감옥에서입니다

 

 

玄民 유진오선생 아시지요? 고려대 총장, 신민당 당수, 헌법 기초위원..이렇게들 주로 아시죠? 이양반 유명한 文學人입니다. 시인이자 수필-소설가. 제일 유명한 소설은 '김강사와 T교수'로 생각되며, 그외 수많은 작품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법대생들은 대부분 유진오 교수의 헌법이론과 실제라는 책으로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우리나라의 대표적 '친일파'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양반의 신상에 대해 얘기하려는 게 아니고 '노천명 처녀'의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유진오 선생 얘기를 꺼냈습니다. 노천명 처녀와 고려대 교수 김광진 유부남과의 사랑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여 당시 서울 한복판이 스캔들로 들썩거렸다고 할 정도였답니다.

 

 

이 사랑 이야기는 현민 유진오 선생에 의하여 소설로 쓰여 지는데 그 소설이 혹시 아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혼"이라는 소설이며, 내용은 간단히 말하자면 新 女姓을 얻기 위해 처자식을 냉혹하게 버리는 줄거리이니 그들의 연애행각이 어떠했는지는 가히 짐작 할 수 있겠지요? 소설이 아닌 실제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들로 나름대로 쉽게 꾸며보겠습니다.

 

 

모윤숙은 춘원 이광수를, 최정희는 '국경의 밤'을 쓴 파인 김동환을 사랑하고, 노천명은 김광진 교수를 사랑하는데, 이들이 모두 유부남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이 사랑한 세 놈들은 이 처자들을 홀로 남겨두고 모두 월북 하였으니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여인 셋은 아시다시피 무척 깊은 우정을 가진 친한 친구들이었습니다. 모윤숙은 호수돈 여고와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왔고, 최정희는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유치진, 김동원등이 주도한 '학생극예술좌'에 참여하며, 이미 언급 했듯이 노천명은 진명여고와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와 문학과 인생과 사랑을 함께한 평생 동지였습니다.

 

 

◀(노천명)마흔 여섯에 노처녀로 죽었으니 아마 말년에 찍은 사진인듯

 

 

노천명은 조선일보 기자시절에 연극배우도 했으며 요즘말로 하자면 노천명은 '커리어 우먼'이었습니다. 노천명과 김광진 교수와의 운명적 만남은 당시 명동에 있던 국립 극장에서 였답니다. 체호프 원작 ‘앵화원’이라는 연극이 공연되고 있었는데 이 연극의 여주인공인 '라프네 스카야'역이 다름 아닌 모윤숙이었고 모윤숙의 딸 역인 '아냐'역으로 노천명이 출연하고 있었는데, 구경 왔던 김광진 경제학교수의 눈에 노천명은 사랑의 화신으로 다가 왔다고 합니다.

 

 

유진오선생의 소설 '이혼'에서는 노천명이 자유분방한 신여성으로 표현되어 노천명이 먼저 김광진에게 꼬리를 친 것으로 꾸미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유진오와 김광진교수가 같은 고려대 동료교수였기에 김광진에게서 들은 얘기를 기초로 김광진의 입장에서 소설을 썼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김광진이 먼저 꼬셨다는 설도 있으니 이런 건 여러분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유진오 선생의 소설 '이혼'에서는 홍윤희라는 여학교 교사인 영문학 전공의 27세 노처녀 여주인공과, 조혼으로 아내를 외면한 채 여급, 유한마담 등과 빈번한 관계를 가진 상사회사 회계주임인 38세의 박재신이 열애에 빠진 사건을 다루며, 당시로서는 어려운 '이혼'을 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홍윤희는 노천명이고, 박재신은 김광진 입니다. 노천명은 조선일보 기자 이전에 서울 정신여고 영어선생도 한적이 있습니다. 또한 아시다시피 당시 27세는 노처녀였습니다. 요즘은 서른이 넘어도 노처녀라는 말 붙이면 듣는 노처녀 매우 기분 나빠 하지요?ㅎㅎ

 

 

박재신은 조강지처와 이혼을 위해 논 열 마지기를 위자료로 떼어 주고, 세 명의 자식들까지 버리고 체면이고 명예고 나발이고 모두 날려 보내며 홍윤희 치마 폭 속으로 들어갑니다. 노천명은 당시 표현으로는 깡마르고 키가 큰 편이라 하니, 요즘 느낌으로는 요즘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확실히 깡마른 날씬한 미인이었나 봅니다.

 

 

거기다 시인이니 말 빨은 얼마나 유창했겠습니까? 해방 후 이혼하고 자기 곁으로 곧 온다고 하던 김광진 은 또 다른 여자를 만나 도망(?)가 버립니다. 노처녀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그녀의 연인 김광진이 기생 출신의 가수 ‘왕수복’을 데리고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너 월북하고 맙니다. 오호~ 통재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이 유명한 이야기 -

 

 

‘왕수복’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을 수가 없군요. 남인수의 연인기도 했으며 국민가수이기도 했던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을 비롯해 당시의 최고 인기 가수 였던 선우일선, 전옥 보다도 더 인기 있었던 가수가 누구 인지 아십니까?

 

 

1935년에 종합연예잡지 '삼천리'가 실시한 인기투표에서 당당히 일등을 한 가수가 다름 아닌 ‘왕수복’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기억 속에 없는 이유는 이 미모의 기생 출신 여가수가 노천명의 꿈속의 사랑 김광진과 조선인민 민주주의 국으로 월북했기에 이 여가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까지도 금기시 되 왔으므로 ‘왕수복’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그래도 왕수복의 일생은 또 하나의 다시 쓰기 힘든 드라마였으니 꼭 이 여인의 일생을 최근 알려진 것들을 합쳐서 제 플래닛 애독자들에게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왕수복은 평남 강동에서 1917년에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라며 '명륜여자보통공립학교'를 다니다 3학년 때 '평양기생학교'에 입학하여 소리와 거문고를 배워 기생이 되었습니다.

 

 

노래에 천재적 소질을 보이던 왕수복은 1933년 열여섯 살의 나이에 당시 최고의 콜럼비아 레코드사에 스카웃되어 '울지 말아요'와 '한탄'을 취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로 탄생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이난영 보다 더 인기를 누리는 '유행가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을 때에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기 위해서 '서양 음악 - 성악'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메조소프라노 성악가로 변신하여 돌아 온 왕수복은 주로 우리나라 민요를 성악으로 불렀답니다. 북한뿐만 아니라 남북한을 통 털어 최고의 민족혼 무용가로 지목되는 최승희'가 민족 무용을 살리는 것과 같이 우리나라 민요를 위해 몸 바치겠다고 한 '왕수복' 北으로 간 그녀는 공훈배우라는 최고의 칭호를 받으며 북한의 국민가수가 되었으며 1997년 여든의 나이에 리사이틀 공연을 하고, 김정일로부터 생일상을 받은 것이 국내 신문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 2003년 여든여섯의 나이로 저 세상으로 갔고 북한 애국열사능에 묻혔다고 합니다. 그녀가 北으로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원래 왕수복은 '메밀꽃 필 무렵'을 쓴 이 효석의 마지막 애인이었습니다. 강원도 평창 출신의 천재, 경기고와 서울대 영문과를 나온 수재 '이효석'우리나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이효석선생의 문학세계를 엄청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만...

 

 

애인이 많았던 이 효석의 마지막 애인 '왕수복' - 기생출신의 국민 여가수와의 애정 행각 짧게 살다 간 이효석의 청춘 시절의 애정행각을 생각해 보면 '메밀꽃 필 무렵'은 물레방앗간에서 몰래 맺은 성서방네 처녀와의 정사에 대한 추억을 먹고 사는 장똘뱅이 허생원과 이 효석-왕수복 애정행각과 뭐가 다른지...

 

 

연애를 많이 한 이 효석의 소설은 아마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겠지요. 이효석은 왕수복과의 애정관계를 별도로 다시 그린 자전적 단편소설 "풀잎"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유명한 국민가수 왕수복이 엘리트 출신 유명작가 이효석을 떠나 노천명의 연인 고려대 김광진 경제학과교수를 빼앗아 가버리는 물고 물리는 애정 행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사실 이 당시 한국 문학을 이끈 상당수 文人들의 물고 물리는 애정행각은 그 정도를 넘어 유행처럼 스와핑 수준이었으니 언제 시간 나면 이 당시의 물고 물리는 애정행각을 파헤쳐드리고 싶군요. 김광진에 대해 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02년생인 김광진도 천재였지요. 일본으로 유학을 가 동경제국대학교 상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젊은 나이에 지금의 고려대인 당시 보성전문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됩니다. 그는 공산주의 경제학인 마르크시즘을 전공하였고, 해방과 함께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가 되고 북한의 권력의 핵심부에서 경제정책을 폈다고 합니다.

 

 

그 해 그러니까 1945년에 왕수복과 북한에서 정식으로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1981년에 예쁜 여자들 두고 저 세상으로 먼저 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노천명의 꿈속의 연인 김광진이 기생 출신 인기 가수 왕수복과 1945년 해방과 함께 정식 결혼을 하자 노처녀 노천명은 충격 그 이상이었겠지요.

 

 

가히 짐작이 가시죠? 그 토록 사랑했던 남성으로부터의 배신은 이 섬세한 여성시인에게 실의를 안겨 주었습니다. 거기에 해방과 더불어 시국은 '반민특위'가 구성 되 친일파 처단 문제가 세간의 관심사로 떠오르며 조금만 똑똑하다고 자칭하는 년놈들이 親日行爲를 앞장서서 했지만 시대가 바뀌었다고 이제는 빠져 나가려고 자신을 숨기며 애국자인 척하는 세태 속에서 親日詩를 많이 쓴 노천명은 親日派라고 쏟아져 오는 비난의 화살들을 피하지 않고 몸으로 받아드립니다.

 

 

노천명의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때에 노천명은 남쪽으로 진주, 구미포, 합천 해인사, 백천(白川)온천 등지를 홀로 여행하며 여행 중간 중간에 친구인 최정희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 "편지" 때문에 그녀의 마음속의 생각과 처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최정희씨가 죽고, 그 유족들이 조건 없이 이 편지를 우리나라 문단에 공개해 주어 연구가 되며 노처녀로 짧게 살다간 노천명 詩人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외로운 노천명은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고, 그래도 북으로 가지 않고 6.25는 터지고 서울을 수복한 남한 정부는 ‘반동 문학인’체포에 협조한 혐의로 노천명을 체포하고, 세상의 이념의 벽을 넘지 못하고 20년형을 선고받고 부산에서 복역생활을 합니다.

 

 

친인척이라곤 언니 노기용씨와 언니의 딸, 딸랑 셋이 이 세상 핏줄 전부로 남고, 사랑도 잃고, 명예도 잃고, 육신 뿐 아니라 정신까지 짖밟히는 감옥, 여기 부산의 감옥에서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를 씁니다. 엘리트 新女姓으로서 커리어 우먼으로서 신문기자로서 詩人으로서 배우로서 처녀와 유부남과의 사랑 이야기로서 세간의 눈길과 입방아를 함께 받으며 유명세를 타던 노천명. 그녀는 이제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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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노천명이 감옥 생활을 하는 중 이헌구. 김광섭. 모윤숙 등 문인들의 석방운동으로 1951년 4월 출옥한 그녀는 고독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재생불능 빈혈등 약해진 육신을 행려병자들의 마지막 이별지 - 서울시립병원에서 포근한 하늘나라에 맡겼다. 그것이 1957년 12월 10일 겨울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던 날 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유일한 핏줄인 언니 노기용씨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 벽제에 있는 천주교 묘지에 안장 되 있지만 그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없고 안내 표지판도 없어 찾아 가지도 못한다지만 조선일보 기사에 난 사진이 있어 볼 수 있다.

 

 

◀노천명 시인의 묘(오른쪽)는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천주교 묘지에 언니 노기용씨와 함께 있으며 묘비 뒷면에는 서예가 김충현씨의 글씨로 시인의 시 ‘고별’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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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 - 노천명

 

 

어제 나에게 찬사와 꽃다발을 던지고

 

우뢰 같은 박수를 보내주던 인사들

 

오늘은 멸시의 눈초리로 혹은 무심히

 

내 앞을 지나쳐 버린다

 

 

청춘을 바친 이 땅

 

오늘 내 머리에는 용수가 씌여졌다

 

 

고도(孤島)에라도 좋으니 차라리 머언 곳으로 - 나를 보내다오

 

뱃사공은 나와 방언이 달라도 좋다

 

 

내가 떠나면

 

정든 책상은 고물상이 업어갈 것이고

 

애끼던 책들은 천덕구니가 되어 장터로 나갈 게다

 

 

나와 친하던 이들 또 나를 시기하던 이들

 

잔을 들어라 그대와 나 사이에

 

마지막인 작별의 잔을 높이 들자

 

 

우정이라는 것 또 신의라는 것

 

이것은 다 어디 있는 것이냐

 

생쥐에게나 뜯어먹게 던져 주어라

 

 

온갖 화근이었던 이름 석 자를

 

갈기갈기 찢어서 바다에 던져 버리련다

 

나를 어디 떨어진 섬으로 멀리 멀리 보내다오

 

 

눈물 어린 얼굴을 돌이키고

 

나는 이 곳을 떠나련다

 

개 짖는 마을들아

 

닭이 새벽을 알리는 촌가들아

 

잘 있거라

 

 

별이 있고

 

하늘이 보이고

 

거기 자유가 닫혀지지 않는 곳이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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