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ne are the days

문재인 촛불정권의 3.1운동 100주년 남북공동행사 북한 거부로 엿됐다: 친문 나팔수 언론은 왜 조용하냐?

작성일 작성자 lilyofthevalley

북한은 왜 남북공동선언을 어기고 3.1운동 100주년 남북공동 행사 거부했나?

"3.1운동 100주년 함께 경축하자"고? 처음부터 뭘 몰라도 한 참 모른 코미디였다.

북이 문재인 정권의 3.1운동 100주년 남북공동 행사 제의를 무산시킨 배경

촛불정권의 3.1절 공동개최 구상계획은 애초부터 헛발 불발 소지

북은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라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이 3.1운동 주도했다고 역사 날조, 처음부터 남과 공동행사 생각없었다

발원지도 서울 탑골공원 아닌 평양 숭덕여학교에서 시작, 전국 확산됐다고 조작

성격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계급투쟁, 명칭도 3.1인민봉기로 규정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을 일제에 투항한 부르주아 상층분자로 매도

상하이 임시정부 정통성도 부정, ‘임정요인을 부패타락한 사대주의자로 폄훼

공동개최 자체가 헌법위반소지, 호국영령 포함한 독립운동가들과 애국 시민 모독하는 처사인데도 문 대통령이 밀어부친 것 큰 문제

그많은 친문 나팔수 언론들 다 어디에 숨었길래 이 문제에 조용하냐?


  허우 올인코리아 기자

   


191931일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 모여 기미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 북한의 문헌들은  33인이 약속을 어기며 독립선언식 장소를 당초 예정된 파고다공원에서 요리집인 태화관으로 변경한 것은 청년학생들과 애국적인 인민들의 투쟁기세가 고조되자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라면서 태화관에 모인 뒤에도 그날 오후 2시 주지육림 먹자판을 벌여놓고 독립선언서도 낭독하지 않은채 불교대표 한용운의 짤막한 연설에 이어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스스로 전화를 걸어 자수, 대부분 투항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북한은 3.1운동을 주도했던 민족 지도자 33인을 철두철미 반민족적이며 반인민적인 비굴한 투항자로 평가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던 3.1운동 100주년 기념 남북공동 행사가 무산됐다.

통일부는 22“3.1운동 100주년 기념 남북공동 행사개최와 관련해 북측이 공식적으로 어렵겠다고 통보해왔다고 밝혔다. 통일부는 북한의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21


만세운동 중인 조선인들(대한적십자사 팜플렛, 1919)


일 우리측 조명균 통일부 장관 앞으로 전통문을 보내 그같은 입장을 전해왔으며, 이유는 시기적으로 공동 행사를 준비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9.19 평양 남북공동선언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남북이 공동으로 기념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실무적인 방안을 협의해나가기로 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우리측은 대통령 직속으로 ‘3.1절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난해 12월부터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북측에 공동 기념행사와 음악회 등 관련 사업 개최를 제시하는 한편 행사 개최지로 서울, 개성, 평양 중 한 곳을 택해 줄 것을 제안했으나 결국 무산된 것이다.

 

통일부 측은 3.1운동 100주년 기념 남북공동 행사 불발이 북한의 평양 남북공동선언 불이행을 의미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당장 공동행사가 열리지 않는 것은 아쉽지만, 100주년 기념 공동사업은 추후 협의를 통해 추진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3.1절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든 지난해 7월부터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2019년 들어서까지 ‘3.1100주년 기념 남북 공동행사를 열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위원회 위원장은 한완상 전 통일·교육부총리, 위원으로는 김명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김주영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등 문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이른바 진보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문대통령의 그 같은 구상과 계획은 처음부터 헛발을 짚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의 역사서와 교과서, 사전, 보도선전물의 3.1절에 대한 왜곡, 조작, 날조, 허위 기술 등을 분석해온 서옥식 박사(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 전 연합뉴스 북한부장-편집국장)북한은 3.1운동에 대해 손병희 선생 등 33인이나 유관순 열사 등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이 평양에서 주도하고 7세의 김일성이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고 모든 문헌에 기록하고 가르침으로써, 3.1운동을 비롯한 우리의 근현대사를 김일성 가계의 혁명역사로 왜곡·날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북한과 공동기념행사를 거행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난센스라고 잘라 말했다  


서 박사는 북한은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임정 요인을 부패타락한 사대주의자로 매도, 폄훼함으로써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옥식 박사에 따르면 북한은 1919년의 3.1운동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1926)의 주도로 그가 혁명의 씨앗을 뿌린 평양 숭실중학교 청년학생들이 주동했으며 3.1운동 발원지도 서울의 탑골(파고다)공원이 아니라 평양의 숭덕여학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서울 등 전국으로 확산됐다고 교과서를 비롯한 모든 역사서에 날조해 기록하고 있으며, 3.1운동의 성격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계급투쟁으로 규정하고 명칭도 3.1인민봉기로 부르고 있다.

북한은 3.1운동에 대해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이 이끌어 전국으로 확산시킨 계급투쟁이며 인민봉기였다고 역사를 날조하고 있다. 사진은 3.1운동 이후 우리의 근현대사를 김일성혁명역사로 바꿔 가르치는 북한의 고등학교 2학년용 역사교과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 혁명력사' 표지  


서박사는 따라서 문재인 정부가 주권회복 등 국가의 독립과 자유 · 평등 · 행복 추구권과 함께 인간의 생명 및 인권 존중을 바탕으로 한 3.1정신을 거역한 북한 민족반역자들과 기념행사를 같이 한다면 그 자체가 헌법위반 소지가 있을 뿐 아니라 수많은 호국영령을 포함한 독립운동가들과 애국 시민을 모독하는 처사가 될 수 있는 데도 이런 사실을 간과하고 밀어부쳤다고 말했다.

 

서박사는 문재인 정부가 공동행사를 하려면 먼저 북한에 대해 날조한 역사 시정부터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형직은 평양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 시골에서 잠시 교편을 잡은 이력은 있으나 그와 3.1운동을 연결시킬 아무런 근거나 자료가 없다. 김형직은 소위 조선국민회가입사건으로 191710월 평안남도 일경(日警)에 체포됐다가 191810월경 풀려난 직후 평안북도 중강진으로 이사를 했고, 거기서 19193.1운동을 맞았다. 따라서 김형직이 숭실중학교 학생들에게 혁명의 씨앗을 뿌리고 3.1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은 허구이자 날조다. 김형직은 3.1운동 당시 평양에 없었기 때문에 평양 시위를 주도하지도, 참가하지도 못했다.

 

조선국민회란 3.1운동 직전 숭실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이 주축이 돼 설립한 기독교 반일 지하독립운동단체로 숭실학교 출신인 장일환(張日煥)이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Korean Military Corporation)을 조직한 박용만의 지도에 따라 귀국, 1917323일 평양에서 조직한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교과서와 역사서, 선전 문서들은 조선국민회를 김형직이 결성했다고 허위 기록을 하고 있다. 김형직은 다만 25명 정도로 구성된 이 조직의 회원으로 잠시 가입했을 뿐이다.

 

북한 교과서는 또 손병희 선생 등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은 채 이들을 외세에 의존하고 부패타락한 부르주아 상층분자, 일제에 투항한 비겁분자, 변절자 등으로 매도하면서 따라서 이들이 외세에 의존했기 때문에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주장한다. 3.1운동 직후 411일 수립한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저희들끼리 자치파독립파로 나뉘어 서로 지도적 자리를 차지하려고 추악한 파벌싸움과 내각개편놀음을 끊임없이 벌였다고 아주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정부안의 일부 숭미사대주의자들은 임시정부 직속기관으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라는 것을 두고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에 빌붙어 조선독립을 구걸하기 위한 청원운동까지 벌였다면서 남조선 당국자들이 그 무슨 법통이요, 정통성 계승이요 하고 떠들어대는 것은 저들의 범죄적 죄악을 가리고 역사를 날조, 왜곡하는 뻔뻔스러운 기만술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광복 70주년을 맞은 2015911일 박근혜 대통령의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재개관식 참석을 반역적 정체를 미화분식하는 행태라고 비난하면서 상하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정통성을 폄훼한 바 있다.

 

북한은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3.1운동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수십만 명의 서울시민이 반일투쟁을 시작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기술해 왔으나, 1980년대를 거치면서 역사적인 3.1 인민봉기는 평양에서 김형직의 혁명적 영향을 받은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의 대중적인 시위투쟁을 첫 봉화로 해서 타오르기 시작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당시 김일성이 만 7살의 나이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평양의 3.1운동 시위에 참가했다고 기술함으로써 김형직과 김일성을 3.1운동의 선도자로 치켜세우는 등 3.1운동을 김일성 가계의 혁명역사로 바꿔버렸다. 북한 교과서는 3.1인민봉기 때 김일성이 어른들의 발걸음을 따라잡지 못해 짚신까지 벗어들고 뜀박질로 시위 대열을 따라갔다고 적고 있다.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20093.1일 열린 북한의 3.190돌 평양시 기념보고회 모습. 3.1절 평양시 기념 보고회는 지난 199980돌 보고회에 이후 10년 만에 열린 것이다.(사진=연합뉴스 캡쳐) 



조작과 허구로 가득한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도 김형직이 3.1인민봉기 이전 추운 겨울날 집을 떠나 의주, 창성, 벽동, 초산, 중강을 비롯한 평안북도일대와 만주지방에서 조선국민회 조직을 복구하고 동지들을 모아 광범한 군중을 결속하기 위한 활동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평양시위를 주도했다는 언급은 없다. 집필자(김일성)불찰인 듯 회고록과 교과서가 상호 모순되게 기술하고 있는 꼴이 돼버렸다.  

북한이 3.1운동을 3.1인민봉기로 이름을 바꾼 것은 이 운동이 노동자, 농민, 학생 등 소위 프롤레타리아가 주체가 되어 일으킨 계급투쟁이란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 평양의 백과사전출판사가 2000년에 펴낸 조선대백과사전’ 13458쪽을 보면 3.1인민봉기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하여 청년학생, 지식인 소자산계급 등 각계각층 애국적인 인민들의 희생적인 투쟁이었으나 평화적 시위가 폭동적 시위로 변하자 이에 놀란 부르주아 민족운동상층분자들이 시위를 막아보려고 책동했다고 적고 있다.

 

북한의 3.190(1999) 기념우표.(사진=연합뉴스 캡쳐) 



이 사전은 특히 408쪽에서 손병희 등 33인 민족대표를 부르주아 민족운동상층인물로 규정하면서 스스로 민족대표를 자처하여 나선 이들은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헛된 기대를 걸고 청탁과 구걸의 방법으로 조선독립을 이룩해 보려는 투항주의 분자들이라고 매도했다. 이와 관련, 북한 역사서 근대조선력사3.1인민봉기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아니라 1917년 마르크스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블라디미르 레닌의 주도하에 단행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혁명인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조선대백과사전은 33인이 약속을 어기며 독립선언식 장소를 당초 예정된 파고다공원에서 요리집인 태화관으로 변경한 것은 청년학생들과 애국적인 인민들의 투쟁기세가 고조되자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라면서 태화관에 모인 뒤에도 그날 오후 2시 먹자판을 벌여놓고 독립선언서도 낭독하지 않은채 불교대표 한용운의 짤막한 연설에 이어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스스로 전화를 걸어 자수, 대부분 투항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전은 이어 3.1운동을 주도했던 민족 지도자 33인은 철두철미 반민족적이며 반인민적인 비굴한 투항자로 평가하고 있다.

 

북한 교과서는 3.1인민봉기가 세계 여타 식민지예속국가 인민들의 민족해방운동에 고무적인 영향을 준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면서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김일성이나 김정일 같은 탁월한 수령의 영도, 그리고 혁명적인 당()의 지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3.1인민봉기는 어떠한 혁명운동도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심각한 교훈을 조선혁명가들과 애국적 인민들에게 남겼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북한 교과서에 나타나있는 3.1운동과 임정 관련 날조, 왜곡 기록이다>(서옥식 저, ‘북한 교과서 대해부(해맞이미디어, 2015)’ 발췌)

 

3.1운동이 김형직이 뿌린 혁명의 씨앗으로 일어났다는 북한의 역사기록

3.1인민봉기의 불길은 먼저 평양과 서울에서부터 타올랐다. 평양에서는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 선생님의 혁명적영향을 받은 평양숭실중학교의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이 주동적인 역할을 놀았다. 이날 낮 12시에 울리는 종소리를 신호로하여 수천명의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장대재에 있는 녀학교 운동장에 모여 들었다. 청년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읽고 조선이 독립국가이라는 것을 엄숙히 선포하자 군중들은 조선독립 만세!,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웨치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렬(대열)이 거리로 떨쳐나오자 로동자, 학생, 사무원들과 점원, 지어(심지어) 보통학교의 어린 학생들까지 뛰쳐 나와 대렬은 삽시에 10여만명에 이르렀다.

 

그때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여덟살의 어리신 나이에 시위대렬(대열)에 참가하시여 만세를 부르시며 보통문앞까지 가시였다. 이날 우리 민족의 류혈(유혈)을 처음으로 목격하신 어리신 대원수님의 마음은 분노로 끓어 번지시였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 지자 만경대와 칠골인민들은 홰불을 들고 만경봉에 올라 가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런 투쟁이 여러날 계속되였다. 어리신 대원수님께서는 이때에도 군중들에게 마실 물과 홰불로 쓸 겨릅대를 날라 가시느라고 바쁘신 어머님을 따라 만경봉에 올라 만세를 부르시며 밤늦게까지 계시다가 내려 오군 하시였다.

 

31일 서울에서는 평양에서보다 좀 뒤늦게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이 부르죠아민족운동 상층분자들의 투항주의적 행동을 박차고 반일행쟁에 나섰다. 오후 230, 서울탑골동원에 모인 군중들앞에서 청년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읽고 조선이 자주독립국가라는 것을 선포하자 군중들은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날 고종왕의 장례식을 보려고 지방에서 올라온 농민들까지 합세하여 수만명의 군중이 결사적인 시위를 벌렸다. (출처: 조선력사,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2000, pp. 113-114.)

 

김형직의 결론: 시위나하고 만세나 불러서는 안되고 민중이 총칼로 원수와 싸워야

19076월 네데를란드(네덜란드)의 헤그(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리준을 비롯한 고종황제의 밀사들은 조선의 독립을 지지해줄 것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간계와 그와 결탁한 미영제국주의자들의 배신행위로 하여 밀사들의 노력은 걸음마다 좌절되였다. 이렇게 되자 리준은 항거의 표시로 회의장에서 자기의 배를 갈라 자결하였다.


19193.1인민봉기는 민족적량심을 가진 조선사람들은 누구나 다 참가한 전민족적인 반일투쟁이였다.

하지만 발톱까지 무장한 일제침략자들의 총칼에 7500여명의 희생자와 16000여명의 부상자를 내고 실패하였다.

몇달동안 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올리던 침략자들이 물러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있었는 데 그것은 망상이었다.

 

위대한 수령님(김일성)께서는 아버님(김형직)으로부터 물려받으신 두 자루의 권총을 통하여 무장투쟁으로써만 발톱까지 무장한 강도 일제를 때려부시고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는 아버님의 숭고한 뜻을 깊이 새기시였다.


3.1운동의 교훈이 보여주는 것처럼 시위나하고 만세나 불러서는 침략자들이 물러가지 않는다. ...민중이 총칼을 들고 일어나 원쑤와 싸워 나라도 찾고 착취와 압박이 없는 새 세상도 세워야 한다. 우리 아버지가 고심하여 찾아낸 결론은 이러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 회고록에서(출처: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의 혁명력사,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2013, pp. 27-28.)

 




맨위로
통합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