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인간이 합리적 동물이라면, 합리적 능력의 발휘는 유사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집단적 실천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합리적 능력은 인간의 한계와 항상 공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 주는 체계적 방법론의 개발, 그러한 방법론을 뒷받침해 주는 이론적 시도를 도외시한 그 어떤 담론도 현실 속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이시무레 미치코의 서사 구조 비판
1.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U. Beck)은 현대 사회를 ‘위험 사회(risky society)’로 규정한다(Beck 1999). 지그문트 바우만(Z. Bauman)에게 위험 사회는 후기 근대화를 규정하는 성격이다(Bauman 2000). 간단히 말해, 위험 사회란 산업화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재난, 지구 온난화 등이 인류 문명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도달한 상태의 사회를 지칭한다. 또한 사람들과 제도들 사이의 연결성을 약화시키는 개인주의가 더 이상 공동체의 도덕적 기반일 수 없다는 인식의 정당성이 확보된 사회 상태를 지칭한다. 어떻게 현 사회 체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벡, 바우만에 동조하는 사회학자들 대부분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 답변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현 사회 체계의 구체적 문제점과 변화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대신에 ‘산업화=근대화=사람을 공동체에서 고립시키는 개인주의’와 같은 공식을 내세우고 변형 및 해체의 필요성을 강조한 후, 문명 대안론자 흉내를 낸다. 개쓰레기 출판 문화로 인해 술자리에서 바우만 정도는 언급해야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착각하는 멍청이들, 즉, 자신에게 비판적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누구누구를 가지고 이 땅의 현실을 진단하려는 멍청이들이 이 땅에 유독 많은데, 이 멍청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벡이든 바우만이든 이들은 ‘정책적 무능력자’들이다. 하나의 실례를 살펴보자.
후쿠시마 원전 사고 발생 후, 독일에서는 ‘안전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윤리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벡은 그 조직의 중요한 구성원 중 하나였다. 아직까지 ‘친환경적 에너지’라는 것은 기술적으로 실현할 수 없는 상태인데, 그 위원회의 ‘안전한 에너지’는 국내에서는 ‘친환경 에너지’로 소개되고 있다. 어쨌거나 독일에서 원전을 점차 없애겠다는 그 위원회의 핵심 근거 중 하나는 다음이다(Ethics Commission for a Safe Energy Supply 2011).
(*) 인류는 자연에 대한 특별한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의무는 기독교의 전통과 유럽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안전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윤리 위원회에서 벡을 포함한 사회학자, 인문학자들의 역할은 원전 축소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었는데, 그 핵심 근거가 고작 위와 같다. 위 근거 (*)를 마련하려고 위원회 참가를 요구받았다면, 나 같으면 그 요구를 거절한다. (*)를 볼 때마다 ‘비참하다’, ‘유치하다’라는 표현이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위원회 의사 결정 과정과 관련된 논문들은 많은데, 그러한 논문들을 보면 이 나라 사람들이 추앙하는 한나 아렌트, 하버마스 등 인물들도 등장한다. 또 산업화 혹은 근대화를 자체 모순적이며 붕괴적인 계획으로 묘사하는 논문들도 많다. 그것이 자체 모순적이며 붕괴적이라면, 뭐하러 위원회를 여나? 그냥 망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순리가 아니겠는가! 도대체 기독교 전통의 어느 부분 혹은 유럽 문화의 어느 부분이 자연에 대한 인류의 특별한 의무를 전제하고 있단 말인가? 기독교 교리는 한때 인간의 이용 대상으로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해석되기도 했는데 말이다.
독일이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는 실제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이며 정치적이다. 독일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화력 발전이 담당하고 있다. 독일은 화력 발전에서 발생하는 매연을 걸러내는 필터 기술이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화력 발전에 비해 원전 기술은 상당 부분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등 주변 국가에 의존하고 있다. 화력 발전 종사자 수는 원전 종사자 수보다 앞도적으로 많다. 대체 에너지, 특히 핵융합 기술 투자를 확대시키는 동시에 원전의 주변국 의존도를 낮추려고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원전 관련 경제 활동 인구수가 워낙 적다보니, 원전의 부정적 측면도 시민들에게 더 부각된 유럽 국가가 독일이다. 독일의 탈원전 정책은 주변 국가들에게는 경제적 압력으로 작용한다.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 등 핵 발전이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들은 당장 큰 고객 하나를 잃어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이들 주변 국가 사람들은 독일의 탈원전 정책이 사실은 유럽 연합에서 독일의 경제적 헤게모니를 강화시키려는 술수라고 투덜댄다. 핵폐기물 문제 등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 독일의 공기질은 현재 더 악화되었다. 독일의 탈원전 정책이 정말 계획대로 실현될런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한다.
2.
독일의 과감한 핵융합 기술 투자가 성공할 수도 있다. 상용화 가능한 핵융합 발전이 가능해지면, 이것은 진정한 ‘4차 혁명’을 의미한다.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사회의 생산 방식 자체가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탈원전 정책에 대한 결과 예측은 현재 쉽지 않은 상황이다. 독일 에너지 정책이 이 글의 핵심은 아니기 때문에, 이제 다음 물음을 던져보자.
•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직접 목격한 일본의 지식인들은 (*)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일본의 지식인들 상당수는 아직까지 ‘서양 모방 대 극복’이라는 제국주의 담론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포스트모던, 후기 구조주의, 해체 등을 지껄이는 일본 사회학자들조차 정착 현실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부분에서는 그 담론에 기대곤 한다. 당연히 어떤 ‘일본적인 것’을 가정하거나 찾아내어 그것을 서양의 기독교 전통이나 문화와 경쟁시키려는 시도가 나올 수밖에 없다. 다음과 같은 책 말이다.
Yoneyama, S.(2019), Animism in Contemporary Japan: Voices for the Anthropocene from Post-Fukushima Japan, Routledge.
요네야마의 책은 일본의 애니미즘(animism)이 현대 위기 사회의 윤리적 토대로 기능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종류의 책들이 많이 나올 것인데, 상당수는 국내 출판사, 특히 녹색평론에서 번역할 가능성이 크며, 몇 권은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오를지 모른다. 애니미즘을 환경 철학으로 구체화한 것이 현대 위기 사회의 윤리적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일정 부분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특정 지역의 과거에서 찾아낸 특정 사고방식을 가지고 현실 문제를 진단하고, 그것을 보편화시켜 ‘따라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하는 발상은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적 발상이다. 그나마 요네야마의 책에서 건질 것이 있다면, 애니미즘을 현대 문명 대안론으로 제시하는 사고방식이 일본 문학이나 농민 운동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례로 국내에서도 많이 회자되는 이시무레 미치코(Ishimure Michiko)의 환경 르뽀 형식의 작품들을 들 수 있다.
이시무레 미치코
이시무레 작품의 일반적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를 비판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내가 그녀의 서사 구조를 비판하려 할 때, 그 비판의 궁극적 대상은 이 땅의 독자들이다. 이시무레 작품들에 대한 독자들의 서평은 한결같이 칭송 일색이다. 누구의 글에나 한계, 약점, 문제점은 있게 마련인데, 독자들의 서평을 보면 이시무레는 인간계에 속하지 않은 신적인 인물과 같다. 누가 나에게 이시무레 작품들을 사람들에게 추천하겠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추천할 것이다. 먼저 그 이유를 밝히고 그녀의 서사 구조를 비판할 것이다. 그래야 이 글의 동기가 단순히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서 그녀를 사냥감으로 포착한 것은 아님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이시무레는 30년 동안 규슈 미나마타 지역에서 발생한 미나마타 병을 물고 늘어져 환경 문제를 사람들에게 환기시킨 작가이다. 미나마타 병은 산업 폐수의 유기 수은이 생선 및 어패류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체에 들어가 수은 중독을 일으킨 사건이다. 수은 중독의 위험성은 과거에도 알려져 있었으나, 산업 폐수에 오염된 음식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수은 중독에 걸린 사례는 흔치 않았다. 미나마타 사건은 산업 폐수 처리의 중요성을 전세계 사람들에게 인식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시무레는 이러한 인식 전환을 이끄는 데 기여했다. 이시무레는 전후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환경 문제를 다룰 때 희생자들의 관점에서 그 문제를 접근했다. 미나마타 병 희생자들의 증언에 바탕을 둔 그녀의 <고해정토(苦海淨土)>에는 당시 산업 폐수를 바다에 방출한 기업 치소(Chisso)와 정부가 책임을 감추려거나 회피하려 했던 시도가 잘 나타나 있다. 그런 시도는 희생자들의 삶을 더욱 망가뜨렸다. 또한 소설에는 미나마타 병을 둘러싸고 벌어진 여러 갈등들이 잘 나타나 있다. 실례로 지역의 경제적 발전을 걱정하는 주민들과 미나마타 병 희생자 가족들 사이의 갈등을 들 수 있다.
3.
환경 문제를 사람들에게 환시시킨 이시무레의 기여는 그 누구도 깍아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고해정토>에 드러난 그녀의 서사 구조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경우,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이시무레의 서사 구조의 상당 부분은 희생자들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 증언들은 자연에 대한 그녀의 이미지를 거쳐 각색된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이야기가 희생자들의 의견을 얼마나 진실하게 전달하고 있는지는 논쟁 대상이 될 수 있다.
(2) 정치적 권력을 제어하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할수록 그리고 정보 공개의 투명성 정도가 낮을수록, 특정 지역에 국한된 것처럼 나타나는 사건의 희생자 집단은 다수의 무관심 속에서 소외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근대화의 한 축인 산업화 과정의 특성만은 아니다.
(3) 이시무레의 서사 구조는 자연에 대한 그녀의 이미지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이념적이다. 또한 환경 문제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그 서사 구조에서 찾을 수 없다.
(4) 이시무라의 전체적 서술 구조는 희생자들을 둘러싼 오해를 불식시키고 집단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던 희생자들의 처지를 다시 환기시킨 과학과 기술의 역할을 부각시키지 못했다.
(1)-(4)를 살펴보기 전에, 그것들을 간략히 다룰 수밖에 없는 이유를 먼저 제시한다. 많은 신문 칼럼이나 대중서를 보면, ‘근대화’에 앞에 무시무시한 공포심을 자아내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리고 갑자기 ‘탈근대’가 등장한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현재 우리가 근대화 과정에 대해 ‘이중적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드러내지 않는다. 근대화 과정은 신분제 기반의 기존 질서를 대체시킬 여러 정치적 실험이 진행되는 맥락 속에서 진행된 것이다. 근대화의 한 축인 산업화는 계층 간 갈등을 계급 갈등으로 심화시킨 측면을 갖는 동시에, 그러한 갈등을 완화시키는 압력으로도 작용했다. ‘근대화’ 앞에 공포심을 자아내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길 즐기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중적 시선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탈근대’를 강조할 때, 그 ‘탈근대’는 단지 근대화 과정의 부정적 측면을 인류의 필연적 운명처럼 묘사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며, 현실 진단 및 대안 마련에 대한 아무런 방향성도 보여 주지 않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더욱이 일부는 근대화를 인간성 말살 과정으로 묘사하고 인본주의를 강조한다. 그런데 그 인본주의라는 것이 사실은 근대화 과정의 가장 부정적 측면 중 하나인 식민지주의의 정당화 동기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놓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축적된 문제들을 선별하고 지역적 관점에서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 주는 정치적, 제도적 고민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맥락 속에서 (1)-(4)를 분석하는 것은 많은 분량의 작업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1)-(4)에 대한 간략한 언급만 할 것이다.
(1) 이시무레의 서사 구조의 상당 부분은 희생자들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 증언들은 자연에 대한 그녀의 이미지를 거쳐 각색된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이야기가 희생자들의 의견을 얼마나 진실하게 전달하고 있는지는 논쟁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시무레의 서사 구조에서 산업 폐수를 바다에 흘려보낸 치소는 악당으로 등장한다. 1950년대 당시에는 산업 폐수 처리 기술도 발전하지 못했고, 그것을 다룰 체계적 법안도 없었다. 미나마타 사건 이후, 각국은 그러한 기술에 관심을 보였고. 산업 폐수를 다룰 체계적 법안도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치소가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1959년 미나마타 병의 주 원인이 치소가 방류한 산업 폐수의 유기 수은일 가능성이 논의된 후에도 치소는 산업 폐수를 모아 인근 강에 버렸고, 그 결과 미나마타 병 확산 지역은 오히려 늘어났다. 그런데 치소를 악당으로 등장시키는 방식은 미나마타나 병 희생자 및 가족들의 회상, 그리고 미나마타 지역 산업화 이 전 상태에 대한 이시무레 자신의 회상에 근거한다. <고해정토>에 등장하는 그 희생자 및 기족들의 회상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이시무레 자신의 회상에 근거한 그녀 자신의 자연에 대한 이미지 속에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희생자들의 실제 입장이 소설에 얼마나 충실히 반영되어 있는지가 논쟁거리일 수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이시무레 그녀 자신의 이미지 속에 희생자들의 기억을 투영시킨 것은 희생자들이 겪은 억울함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장점을 갖는다. 그럼에도 문제는 남는다. 희생자들의 회상을 생동감 있게 시적으로 이미지화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함께 노젓기’ 등과 같은 여러 은유를 사용한다. 그러한 은유가 산업화 이 전 상태의 공동체 의식, 즉 바다가 삶의 터진인 사람들의 유대감 및 결속력을 상징하는 것은 맞지만, 이로부터 그러한 은유 사용에 담긴 이시무레의 동기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동기에 따르면, 산업화는 미나마타 지역 사람들과 자연의 조화로운 연결성을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미나마타 병 발병 후, 희생자들은 당연히 치소를 적대시 하면서 과거 상태를 이상향으로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억이 무조건 진실된 것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다. 낙후된 미나마타 지역에 치소 공장이 건설되었을 때, 지역 주민 다수는 반대하지 않았다. 공장 덕에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면, 그들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오염 물질을 방출하는 공장이 주변에 들어서는 것을 반길 사람은 거의 없지만, 20세기 초 미나마타 주민들은 아직 지역 경계를 넘어서는 심각한 환경 오염 문제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민요 속에 등장하는 ‘함께 노젓기’와 같은 은유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집단적으로 대처하지 않고서는 삶을 유지하기 힘든 사람들의 결속력을 강화 작용을 한 것은 분명하다. 또 그러한 삶을 지탱하려고 자연과 인간을 넘나드는 초자연적 정신과 같은 것을 가정하는 것이 종교처럼 기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이시무레가 생각하는 자연의 이미지가 미나마타 지역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게 박혀 있어 그들의 삶을 지배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2) 정치적 권력을 제어하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할수록 그리고 정보 공개의 투명성 정도가 낮을수록, 특정 지역에 국한된 것처럼 나타나는 사건의 희생자 집단은 다수의 무관심 속에서 소외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근대화의 한 축인 산업화 과정의 특성만은 아니다.
근대화의 한 축인 산업화는 사회의 전반적 생산 방식을 변화시킨 과정이다. 산업화 이 전의 사회에서 바다, 농지 등 자연 환경 자체가 다수의 생산 기반이었다.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자연 환경 자체를 생산 기반으로 삼는 사람들은 수적 다수에서 수적 소수가 되었다. 미나마타 지역 사람들에게 산업화의 가속화 속에서도 바다는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미나마타라는 특정 지역에 국한된 것처럼 나타난 사건이 정확한 정보를 통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당시 치소 경영진과 정치권은 바라지 않았다. 더욱이 미나마타 병이 특정 지역에 국한된 소수의 문제로 다수가 인식하다 보니, 다수는 희생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데 특정 지역에 국한된 것처럼 나타나는 소수의 문제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권력의 성향은 산업화 고유의 특성인가? 이시무레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녀의 자연에 대한 선한 이미지에 대립된 방식으로 산업화를 묘사하는 서술 구조는 이 물음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도록 만든다.
그러나 특정 지역에 국한된 것처럼 나타나는 소수의 문제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권력의 성향은 과거에도 빈번하게 나타났다. 그 성향은 단순히 근대화 혹은 산업화만의 특성이 아니다. 특히 정치적 권력을 제어하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할수록 그리고 정보 공개의 투명성 정도가 낮을수록, 그 성향은 강하게 나타났다. 군주제 정치 체제에서 고도로 발달한 기술 문명을 가정해 보자. 권력이 군주를 중심으로 집중된 그러한 문명에서 미나마타 사건과 같은 것이 발생한다면, 군주는 해당 지역 사람들을 몰살시키려 할 지도 모른다. 그들이 다수의 관심에서 거리가 먼 소수라는 이유만으로도 말이다. 정치적 권력을 제어하는 제도적 장치가 잘 마련된 곳일수록, 또 정보 공개의 투명도가 높아진 사회일수록 민주화된 사회라고 한다. 미나마타 사건이 일본을 민주화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평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사건 이후 그러한 제도적 장치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소수의 문제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권력의 성향을 근대화 혹은 산업화의 고유 특성이라면, 미나마타 사건이 일본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힘들다. 일본의 현대적 정치 체제는 이 땅과 달리 일찌감치 근대화 혹은 산업화 과정 속에서 정착했기 때문이다. 만약 민주화라는 것이 이시무레가 생각하는 자연의 이미지마저 사회에 확산되는 것을 전제한다면, 이것은 다양한 의견을 무시하는 반민주적 발상이다. 민주화라는 것에 환경 문제 인식 확산을 전제한다고 하는 경우에도, 그러한 인식이 이시무레가 생각하는 자연의 이미지이어야 할 정당성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식은 환경 문제 자체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3) 이시무레의 서사 구조는 자연에 대한 그녀의 이미지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너무나 이념적이다. 또한 환경 문제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그 서사 구조에서 찾을 수 없다.
이시무레의 여러 소설 속에 함축된 자연에 대한 이미지는 애니미즘(animism)이다. 애니미즘은 자연의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 사이를 매개하거나 그것들의 주관하는 정신 혹은 영혼을 가정하여 삶을 조망하는 세계 이해 방식이다. 그녀의 애니미즘은 특히 인간과 자연의 연결성에 근거하고 있고, 인간과 자연 사이를 돌아다니는 영혼의 존재를 가정한다(Ishimure & Tsurumi 2003, Yonetyama 2019). 인간과 자연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동기는 미나마타 사건을 근대화 혹은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규정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공동체에게 미나마타 사건은 자연과 삶의 분리를, 희생자들에게는 신경계의 유기적 연결망의 파괴를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성에 대비된 애니미즘을 부각시켜 이시무레는 인간과 자연의 연결성 복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고해정토>의 숨겨진 메시지 중 하나는 인간과 자연의 연결성을 전제한 애니미즘이 현대 기술 문명의 윤리적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애니미즘의 세계 이해 방식은 주변 환경 대상들과 마주하는 가운데 누구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그것은 산업화 휴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치유제로 작용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대부분 사람에게 환경 문제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산업화는 다양한 관심사들의 충돌과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이 중요한 문화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시무레의 애니미즘이 과학 기술 기반의 현대 사회의 도덕적 토대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환경 문제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환경 문제에 대한 다수의 인식은 특정 세계 이해 방식을 전제하지 않는다. 애니미즘이 현대 사회의 도덕적 토대로 작용하려려면 인류의 신흥 종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설령 애니미즘이 인류의 신흥 종교가 되더라도 지금의 복잡한 환경 문제에 대한 구체적 대안은 될 수 없다. 복잡한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다양한 영역의 지식들의 공유와 거래 관계에 근거하며, 그러한 공유와 거래 관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념이나 종교에 의해 활성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애니미즘을 대하는 방식도 시대별로 차이를 보인다. 과거 200년 전 일본 사람들의 애니미즘 그리고 현재 일본인들의 애니미즘에 대한 동격이 사회에서 기능하는 방식은 동일하지 않다. 자연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영혼 혹은 정신의 가정이 애니미즘 이해 방식의 핵심이라고 하더라도, 애니미즘도 여러 종류이다. 실례로 미야자키 하야오(Miyazaki Hayao)의 여러 애니메이션에 함축된 애니미즘은 이시무레의 애니미즘과 성격을 달리 한다. 미야자키의 애니미즘에도 자연과 인간의 연결성이 강하게 드러나 있지만, 자연은 여전히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것이며 변덕스럽기까지 하다. 심지어 환경이 오염된 상황에서도 자연은 인간이 살 수 없는 또 다른 세계를 생성해 내는 힘을 갖고 있다. 자연과 인간은 일정 부분 긴장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고, 그러한 긴장 관계 속에서만 자연과 인간의 연결성도 의미를 획득한다. 미야자키의 애니미즘은 인류 역사가 과학 기술 문명을 포섭할 수밖에 없는 정당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에게 애니미즘은 현대 과학 기술 문명에 대한 도덕적 토대가 아니다. 그에게 애니미즘의 세계 이해 방식과 현대 과학 기술 문명은 일정 부분 갈등하면서도 상호 제한적 혹은 변증적 관계를 맺어 발달의 추진력으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그의 애니메이션 일부는 일본 제국 시대를 미화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반면에 이시무레의 애니미즘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유비시키는 경향이 강해 현대 과학 기술 문명에 대한 일방적 제어자로 등장한다. 미야자키의 애니미즘이든 이시무레의 애니미즘이든, 그것은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이어진 일본의 근대화 혹은 산업화 과정에 대한 지적 반응일 뿐이다. 그러한 지적 반응을 일반화하여 현대 문명의 보편적 대안론을 찾으려는 것은 허망한 상상에 불과하다.
(4) 이시무라의 전체적 서술 구조는 희생자들을 둘러싼 오해를 불식시키고 집단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던 희생자들의 처지를 다시 환기시킨 과학과 기술의 역할을 부각시키지 못했다.
<고해정토>에는 미나마타 병 희생자들을 돕는 여러 의사들이 등장한다. 또 미나마타 병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과정도 나온다. 하지만 이시무레의 서술 구조는 희생자들을 둘러싼 오해를 불식시키고 집단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던 희생자들의 처지를 환시킨 과학과 기술의 역할을 부각시키지는 못했다. 그 결과, 무비판적 독자들 상당수는 ‘근대화=산업화=과학 기술 문명’이라는 무지막지한 공식을 떠올리며 그 공식의 용어들 앞에 공포심을 자아내는 수식어를 사용하게 된다.
먼저 미나마타 병을 발생시킨 독극물 규명 작업은 오랜 기간을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왜 ‘수은 중독’이 아니라 ‘미나마타 병’이라는 용어가 생겨났을까? 정확한 원인을 몰랐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십 년 동안 수은 중독 환자가 미나마타 지역에서 발생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50년대 들어 희생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여기에는 치소 공장의 특수한 상황이 한 몫을 했다. 제 2차 대전 중 치소 공장은 조선이나 중국에 많은 비료 공장을 지었다. 전쟁 후 치소 공장은 해외 자산을 박탈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치소에게 돌파구가 열렸다. 전세계 플라스틱 수요량이 늘어나면서, 치소는 플라스틱 생산에 필요한 아세트알데하이드(acetaldehyde)를 생산하여 세계 각국에 공급했다. 플라스틱 수요가 늘면 늘수록 치소는 급성장했고, 전후 일본 경제 부흥에 기여했다. 다음 그림을 보자.
위 그림을 보면, 아세트알데하이드 합성 과정에서 부산물로 유기 수은이 나온다. 그 유기 수은은 산업 폐수를 통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많은 양의 유기 수은에 오염된 생선과 어패류를 먹은 사람은 수은 중독에 걸린다. 미나마타 병의 이러한 발생 과정은 사건 당시에는 미해결 문제였다.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미나마타 병을 전염병으로 생각해 환자들과의 접촉을 꺼렸다. 환자들 중 일부는 미나마타 병의 원인을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여겼다. 미나마타 병 원인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가 1958년 일본을 방문한 다발성 경화증 권위자인 영국의 뇌신경학자 더글라스 맥알파인(D. McAlpine)은 마니마타 병 증세가 수은 중독 증세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연구자들의 관심은 수은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1959년 정부와 치소는 산업 폐수와 미나마타 병 사이의 상관관계를 인정했다. 그 상관관계가 밝혀지면서, 미나마타 병을 전염병으로 생각하고 환자들과의 접촉을 꺼리는 사람들의 수도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산업 폐수와 미나마타 병 사이의 상관관계가 밝혀졌다고 해서 미나마타 병의 원인도 규명된 것은 아니다. 그것을 규명하려면, 아세트알데하이드 합성 과정에서 유기 수은이 부산물로 얻어진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또한 생선 및 어폐류, 해안 토사에 축적된 산업 폐수에서 유기 수은을 검출해야 한다. 미나마타 병 발생의 인과 과정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치소는 아세트알데하이드 생산을 중단할 수 없었다. 1960년대는 일본이 세계의 경제 강국으로 등장하는 시대였다. 일본 시민들은 전후 급속한 경제 성장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정부와 치소에게 압력으로 작용했다. 치소는 산업 폐수를 모아 인근 강에 버렸고, 정부도 이를 묵인했다. 한편 1959년 미나마타 희생자 가족 및 지역 주민들과 치소 및 다른 지역 주민들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있었다. 미나마타 지역 주민들에게 치소의 보상금은 어업 활동을 중단한 것에 대한 대가로서는 불충분했다. 1959년 충돌 후, 미나마타 병 희생자들은 대중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졌다(허들·리치 2001). 일본 시민들 다수는 미나마타 병을 미나마타 지역에 한정된 문제로 인식했고,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의 경제 성장이었다.
치소 공학자들은 1961년 산업 폐수의 아세트알데하이드에서 유기 수은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으나, 경영진은 이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1962년 쿠마모토 대학 연구진도 산업 폐수와 해안 토사에서 유기 수은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산업 폐수의 유기 수은이 미나마타 병의 원인이고, 미나마타 병은 사실상 수은 증독증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Hachiya 2006). 한편 치소가 주변 강에 몰래 버린 산업 폐수 때문에 1965년 니가타 지역에서도 미나마타 병 환자들이 발생했다. 여러 연구팀들이 아세트알데하이드에서 유기 수은을 분리하는 데 성공한 상황에서 정부와 치소도 더 이상 책임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미나마타 병이 미나마타 외의 지역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일본 시민들도 미나마타 병을 특정 지역에 국한시키려는 시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미나마타 병 희생자들도 본격적으로 사회적 환경 담론의 주목 대상으로 부상했다. 1967년 치소 공학자들은 공장 환경 내에서 유기 수은이 아세트알데하이드 합성 과정에서 수반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그리고 1968년 유기 수은을 수반하지 않는 새로운 생산 공정을 개발하게 된다. 또한 일본 정부도 환경 정책의 과학적 관리법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깨끗한 환경’이라는 일본의 이미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1)-(4)에서 (4)는 조금은 가혹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시무레 서사 구조가 미나마타 병 원인의 과학적 규명 과정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4)를 언급한 이유가 있다. 이시무레 서사 구조의 궁극적 목적 중 하나는 자연에 대한 그녀의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 전달 방식에는 이중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근대화의 복잡한 양상이 결여되어 있다. 근대화 과정은 신분제 기반의 기존 질서를 대체시킬 여러 정치적 실험이 진행되는 맥락 속에서 진행된 까닭에, 근대화의 한 축인 산업화는 계층 간 갈등을 계급 갈등으로 심화시킨 측면을 갖는 동시에, 그러한 갈등을 완화시키는 압력으로도 작용했다. 근대화 과정의 한 축인 산업화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의 역할도 우리는 이중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중적 시선을 도외시한 채 근대화와 산업화의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서사 구조에 빠진, 즉 그 구조를 비판적으로 대하지 못하는 독자는 ‘근대화=산업화=과학 기술 문명’라는 무지막지한 공식에 유혹당한다. 그러한 공식에 유혹당한 사람이 권력을 쥔다면 효과적인 환경 정책을 펼칠 수 없다. 현재 발생하는 복잡한 환경 문제는 과학과 기술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의 비판 대상은 이시무레가 아니라 그녀의 소설들을 읽고 맹목적으로 칭송하는 이 땅의 독자들이다. 각종 칼럼에 등장하는 인문학자들, 출판 비평가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독자들이 이 글의 비판 대상인 것이다.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는 누군가 나에게 이시무레 책을 권하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녀의 책을 적극 추천할 것이다. 미나마타 희생자들이 겪은 고통을 알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이시무레의 책은 가치가 있다. 다만, 다음 두 가지 질문은 염두에 두고 책을 대해야 할 것이다.
첫째, 이시무레가 이 나라 환경부 장관을 담당한하다면, 그녀는 훌륭한 환경 정책을 펼칠 수 있을까?
둘째, 이시무레의 책에 어떤 세계 이해 방식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환경 문제를 접근하는 데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 퀴즈 하나
어느 나라 정치가 및 관료 집단은 잦은 안전 및 환경 사고가 안전 기준의 수 및 금지 물질의 수를 대폭 늘리면 자연히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안전 기준의 수를 기존 79개에서 413개로 대폭 늘렸다. 이 번에 통과된 이 땅의 환경관리법이 그렇다. 그런데 안전 기준의 수를 대폭 늘리면, 안전 사고도 대폭 줄어들까? 또 기존의 79개는 다른 OECD 국가들의 기준에 비해 매우 적은 것일까? 과연 과학적 안전 관리라는 것이 안전 기준의 수를 무턱대고 늘리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일까?
참고 문헌
노에리 허들·마이클 리치(2001), <꿈의 섬: 일본의 환경 비극>, 박석순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Bauman, Z.(2000), Liquid Modernity, Polity.
Beck, U.(1999), World Risky Society, Polity.
Ethics Commission for a Safe Energy Supply(2011), Germany’s Energy Transition – a Collective Projects for the Future, Offices of the Ethics Commission on a Safe Energy Supply in the Federal Chancellery, Germany.
Hachiya, N.(2006), “The History and The Present of Minamata Disease: Entering the second half a century”, JMAJ, Vol.49, No.3.
Ishimure, M. & Tsurumi, K.(2003), Kotobe hatsuru tokore, Fujiwara shoten.
Yoneyama, S.(2019), Animism in Contemporary Japan: Voices for the Anthropocene from Post-Fukushima Japan, Routle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