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이 만나는 오직 한 곳! 드넓은 '지평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바탕 축제의 현장!
5개분야 66개 농경문화 중심 프로그램! 제21회 김제 지평선축제!!
"웃음가득, 오감만족" 연인에겐 특별한 순간을! 아이들에겐 소중한 추억을! 어른들에겐 추억의 향수를!
웃음이 가득! 체험이 가득!
제21회 김제지평선 축제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9월 27일(금)  ~10월06일(일)

문화체육관광부지정   대한민국 글로벌축제

벽골제 碧骨堤 김제읍에서 남으로 15리쯤 되는 곳에 큰 방죽이 있는데 이곳을 벽골제라한다. 김제의 옛 이름이

벽골이므로 그에 따라 명칭을 붙인 것이요. 현재'군의 명칭도 이방죽으로 인하여 고쳐진 것이다.

과거의 기록에 의하면 방죽의 길이는 60,843 ()이요. 방죽 안의 둘레가 77,406 (). 5개소의 도랑을

만들어서 물을 대는 논은 모두 9,840() 95짐 이라 하였다.


첫째가 수여 도랑 하천 하나를 넘어서 만경현 남쪽까지 흐른다. 둘째는 장생 도랑 개천 두 곳을 넘어서 만경현

서쪽 부륜강의 근원으로 흐른다. 세째는 중심도랑 하천 하나를 넘어서 고부의 북쪽과 부령의 동쪽지역으로

흐른다.

네째는 경장 도랑 다섯째는 유통 도랑 모두 하천 하나씩을 넘어서 인의현의 서쪽으로 흐른다. 이들 다섯 곳의

도랑이 닿는 토지는 모두 비옥하다. 이 방죽은 백제와 신라 때부터 있었던 곳으로 농민에게 주는 혜택이

많아 고려 현종때에 다시 옛 제도에 따라 완전 보수하였다고합니다

인종 21(1143)에 이르러 다시 수축하였으나 마침내 폐기된 채 버려 두어 지식있는 사람들의 통탄을 금할 수 없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래 임금들은 농업 행정에 대한 관심을 크게 기울였다. 1415 년 봄에 판상주의 이발을 도안무사에 임명하였다.

이 공이 처음에 이 벽골제를 수축하려 했으나 워낙 공사가 거창하고 복잡함으로 이루지 못하고 도관찰 출척사

박습이 경력 권 전, 경차관 박희중과 함께 현지를 답사하고 공사의 난이도를 검토하여 계획서를 올렸더니

마침내 인가를 내리었다.


각 군에서 인부 1만명과 사무원 3백명을 동원하여 옥구진 병마사 김 훈과 지김제군사, 김방에게 전체를 감독하게 하였다. 이 해 920일에 착공하여 1013일에 준공되었다. 방죽 북쪽에 위치한 대극포는 밀물의 충격이

심하고 남쪽에 있는 양지교는 밑에 물이 깊게 괴어 있어서 공사를 수행하기가 곤란한 곳이었다.


이번에는 밀물이 들이미는 대극포에 먼저 둑을 쌓아 물살을 타고 다음에 양지교의 밑에 있는 물이 차는 곳에

아름드리 기둥을 세우고 보를 걸치고 비계를 매서 다섯개의 목책을 설치하고 거기에다 흙을 다져 넣었다.

또 방축이 허무러진 곳에는 모두 홈을 올려 쌓았고 방주 안팔에는 버들을 다섯줄로 심어서 기반을 튼튼하게

하였다. 방죽 밑은 넓이가 70척 위는 30척 높이는 17척이요 도랑의 수문은 바라보기에 높은 둔덕과 같았다.

또 장생 중심 경장 등 세 도랑의 문은 과거부터 있던 돌기둥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수여와 유통의 두 도랑 문은

돌을 깍아서 주초를 놓고 괴목기둥을 세우고 또 양옆에 세운 돌기둥 중간 홈에는 가로 과목판을 설치하고

안팎에다 쇠사슬을 연결시켜서 이를 들어올려서 물을 내보내도록 장치하였다.

모든 도랑문의 넓이는 13척 돌기둥의 높이는 15척 땅에 묻인 것이 5척인데 하면에는 돌틈에 쇠를 녹여 부어서 고

정시켰고,내면에는 또 물막이 둑을 쌓았다. 수여와 유통 두 도랑의 수문은 모두 내버려 두기로하고 물막이

둑을 설치하지 않았다.

도랑문은 양쪽에 돌을 다듬어서 기초를 만들고 위에 괴목판을 걸쳐서 사람이 통행하게 하였다.

이상이 시공의 개요다. 이때는 1415 년이다. 원비 조선 태종 151415

지은이와 쓴이는 알수 없음 198012 문화재위원 임창순 역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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