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민 족 책 략

옛날 옛적에(4) : 카레이스키와 우즈베키스탄

작성일 작성자 한국인

옛날 옛적에(4) : 카레이스키와 우즈베키스탄

(한국인 / 2019. 02. 24)


나라가 참으로 어두운 길로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우즈베키스탄에는 지독히도 힘들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3.1절을 앞두고 그 아픈 역사를 회고해 보면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진은 2012년 여름에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찍은 것들입니다.

 

어둡게 돌아가는 현재 나라 상황을 보면

참으로 걱정이 많이 됩니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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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만 한민족의 한(恨)이 서린 타시켄트

(한국인 / 2008. 06 / 연해주와 한민족의 미래)


1930년대 연해주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구축해 가던 소련 거주 한인들에게 1937년은 가장 참혹한 역사의 시련이었다. 1937년 한인 강제이주는 매우 치밀한 준비를 통해 진행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중국국민당과 소련은 1937년 8월 21일 소중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이날 소련인민위원회와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는 당과 정부의 공동결정사항으로 「극동지역 국경부근에서 한인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이에 서명했다.

 

이 극비문서의 핵심은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강제이주를 1938년 1월 1일까지 완료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한인 강제이주의 집행 책임자인 예조프의 책임 하에 한인 강제이주는 극동지역의 국경부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1차 이주와 극동지역 전역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2차 이주라는 두 차례의 강제이주를 통해 진행되었다.


1차 이주는 결의문 채택 이후 즉각 시행에 들어가 9월 21일까지 진행되었고 2차 이주는 9월 24일부터 10월 25일까지 진행되었다. 이렇게 하고도 남아있던 700명의 한인들도 11월 15일까지 노보시비르스크에 이주 완료함으로써 극동지역에서 한인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이에 대한 공식 보고서에는 우주베크 공화국에 16,272가구 76,525명이, 카자흐 공화국에 20,170가구 95,256명이 도착하였다고 적고 있다.


강제이주 통보는 지방에 따라 마을에 따라 차이가 많았다. 일주일 전에 통보를 받은 마을도 있었고 불과 2∼3일 전에 통보를 받은 마을도 있었다. 출발 날짜만 통보받은 한인들은 왜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으며 물어볼 곳도 없었다. 소련 당국은 강제이주 통보를 한 후 한인들의 여행을 중지시켰고 마을과 마을 간의 교통을 차단했다. 한인들의 여행을 금지하기 위하여 주민증도 모두 압수해 갔다. 여행을 갔던 사람은 현지에서 떠나야 했으며 병원에 입원한 환자도 열차에 실려 갔다. 이주 당일에는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한 사람의 누락자도 없이 모조리 열차에 승차하게 하였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모두 화물차나 가축 운반차에 실려 갔다. 문이 하나인 가축 운반차의 중간에 선반을 매어 아래와 위를 각기 한 가구에게 배당하고 한 차에는 4가구가 타게 하여 한 차에 30여 명을 싣고 갔다. 바닥에는 사람들이 누울 수 있도록 짚을 깔아준 것이 고작이었다. 차 안은 짐과 사람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짐 사이에 포개어 잠을 자야 했고 그 속에서 밥을 짓고 용변을 보아야 했다.


악취와 굶주림 그리고 추위에 한 달 이상을 열차에서 시달렸으니 이는 마치 죽음과 싸우는 고통이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한 어린이와 노약자들이 많이 사망하였는데 특히 어린이의 사망률이 60%를 상회했다. 사망자는 열차가 정차하면 들에 파묻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그냥 버리고 가야 했다. 열차가 달리면 며칠을 달리고 열차가 정차하면 며칠을 벌판에 세워져 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떠밀려 와서 하차 명령을 받고 짐짝 버려지듯이 내린 곳은 연해주로부터 6,000㎞나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이었다. 이곳 중앙아시아의 반사막지대는 제정러시아 시대부터 원주민 이외에 유럽인의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카자흐 공화국에서는 알마아타 지역과 인근의 우슈토베 지역에 주로 하차하였고 우즈베크 공화국에서는 타시켄트 남부의 벌판에 주로 하차하였다.


중앙아시아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으로 강제이주 당한 한인들은 황량한 벌판에서 아무런 연고나 대책도 없이 버려져 도착 즉시 몰아닥친 겨울을 나면서 수많은 가족을 잃고 모진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이들은 왜 연해주에서 쫓겨나야 했는지도 알지 못했고 자신들이 당한 정신적 피해와 연해주에 버리고 온 재산에 대한 보상은 또 어디에서 받을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그저 타국에 살고 있던 힘없는 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들의 힘으로 극복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시련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면하고 성실한 한인들은 이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아 삶의 기반을 닦아 나갔던 것이다. 한인들은 대부분 사막, 강가, 마을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 분산되어 하차하였다. 중앙아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한 복판이기 때문에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가진 곳으로 여름에는 찌는 듯이 덥고 겨울에는 어는 듯이 추운 곳이다. 허허벌판에 내린 한인들은 두더지처럼 토굴을 파고 겨울을 나야 했다. 물가에 내린 사람들은 갈대로 움막을 짓고 겨울을 나야 했다. 운이 좋아 사람이 살던 곳에 내린 한인들은 폐가에 5∼6가구씩 모여 살거나 원주민의 외양간 또는 한 칸 방에 의지하며 겨울을 지냈다.


이러한 학대와 고생을 이겨내고 강제이주 첫 겨울을 넘긴 한인들은 다음해 봄이 되자 물을 찾아 강가로 모여 들었고 가져간 농기구는 물론 막대기를 들고 운하를 파고 강물을 끌어들여 논을 만들고 가져간 볍씨를 심었다. 물만 풍족하다면 중앙아시아의 충분한 일조량과 초원지대의 비옥한 토양은 벼의 생육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첫 해 농사는 대풍작을 이룰 수 있었고 둘째 해에도 풍작을 이루어 한인들은 이주한지 3년 만에 강제이주 이전의 원상을 회복하고 경제적 기반을 다지는데 성공하였다.


중앙아시아는 오래 전부터 유목생활에 적합한 곳으로서 농사는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던 곳이다. 한인들이 이러한 곳에 농업을 이식하여 옥토로 만들었고 쌀과 야채 및 과일을 경작하였으며 마침내 중앙아시아를 중요한 벼농사 지역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중앙아시아에 짐짝처럼 버려졌던 한인들이 이처럼 성공하여 재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한인들은 유목민이 사는 곳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특히 쌀을 생산하여 다른 민족에게 보급한 결과 소련 전역에서 쌀 하면 한인을 연상하고 한인하면 쌀을 연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한인의 창의력과 근면성은 소련에서 “고려인들은 바위에 올려놓아도 풀이 난다”는 속담이 나올 정도로 위대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인들은 집단농장의 조직과 운영에 성공하여 농업발전에 더욱 크게 기여하였다. 한인들이 이룩한 콜호즈는 모두 소련 전역에서 가장 모범적인 농장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김병화 농장과 포리토젤 농장이었다. 김병화는 레닌훈장을 두 번씩이나 수여받아 원래 북극성 농장이라고 하던 것을 김병화 농장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타쉬켄트시의 한 거리도 김병화 거리라고 명명하게 되었을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한인들은 말과 글로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상상도 못할 고통을 겪으면서도 위대한 생존과 성공의 역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을 내다 버리는 인간쓰레기장이라고 불리던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에 버려졌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인 거주이전의 자유마저 박탈당한 채 죄수 아닌 죄수생활을 하였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소련에서 최초로 이루어졌던 민족 전체에 대한 총체적 강제이주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이런 한인들이 참으로 용케도 살아남았고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두었다. 왜 한인들은 이토록 험한 수난을 겪어야만 했는가? 그런 고통 속에서도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던 한인들의 생존역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 한인들은 왜 또 다시 생활 터전을 잃고 유랑해야 하는가? 왜 하늘은 한인들에게 이런 수난과 고통을 계속하게 하는가? 우리는 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어야 하는가? 참으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


(이상은 본인의 저서 <연해주와 한민족의 미래>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김병화 박물관 입구입니다. 김병화 선생의 흉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김병화 박물관의 정면 모습입니다.> 

 

 <김병화 박물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선생의 사진과 집무했던 책상입니다.>  

 

<김병화 박물관 내부에는 선생의 활약상을 찍은 사진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소련의 훈장을 받은 노력영웅들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김병화 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는 할머니입니다. 성함은 잊어버렸습니다. 연세가 많이 들었을텐데 아직 살아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김병화 농장으로 들어가는 큰 문입니다.>   

 

 

<김병화 농장 주위의 대형 면화밭입니다.>  

 

<또 다른 면화밭입니다.>   

 

<우즈베키스탄은 면화가 주산물이라 도처가 면화밭 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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