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삼국지정사(역사서)로 바라본 삼국지연의(소설)의 허구

작성일 작성자 화성인 mars

소설에서는 유비, 조조, 손권이 영웅들로 묘사 되었지만 중국의 三國時代는 세계사 교과서에서 단지 한 단락 정도만 차지하는 아주 보잘 것 없던 시기였습니다.  사실 역사 속에 한번 정도 등장하는 어느 왕조의 창업자들도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만큼 국가를 창업 하는데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 소설의 영향으로 과대 평가되어 영웅시 된 삼국시대의 호걸들 ]  

 

그런데 일국을 창업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별처럼 역사에 등장한 국가들 중 역사에 길이 남을 제국이 되느냐 아니면 그냥 사라지느냐는 창업자를 승계한 똑똑한 통치자가 나와야 가능한 일 입니다.  앞에 예를 든 유비, 조조, 손권의 경우는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어 그들이 만든 왕국은 결국 단명의 왕조로 막을 내립니다.

 

[ 소설과 달리 삼국시대는 중국사에서 보잘것 없던 시기였습니다 ]

 

 

정사 삼국지로 바라본 삼국지연의의 허구 1 

 

1. 도원결의는 정말로 있었는가 ?

 

- 정사 <관우전> 과 <장비전> <유엽전> 에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해 약간의 기술이 있다.

" 은혜는 형제와 같다 " " 의리에 있어 임금과 신하였다 " 등의 일반적 서술만 있을 뿐이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위로 미루어 도원결의는 작가 나관중의 허구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2. 유비 삼형제의 진정한 맏형은 누구인가 ?

 

- 실제 세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나이는 관우 25세, 유비 24세, 장비 20세였다.

삼국지연의에서와 달리 실제 가장 맏형은 유비가 아닌 관우였다.

 

3. 장비는 연의에서처럼 우락부락한 추남이었는가 ?

 

- 실제 장비의 용모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여러 관련 자료를 분석해 보았을 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연의에 그려진 것과 같이 험상�은 추남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4.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는가 ?

 

- 관우가 활약하던 삼국시대에는 아직 긴 자루가 달린 도는 출현하지 않았다.

당시에 가장 많이 사용되던 장병기는 극이었고 다음이 모였다.

중국에서 창이나 대도가 장병기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약 400년 후인 당대부터다.

삼국지연의에서 관우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인 청룡언월도는 작품 속 허구이다.

 

5. 부패관리 독우를 채찍질 한 것은 장비였는가 ?

 

- 정사와 배송지의 주를 인용한 '전략' 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 유비가 만나러 갔지만 독우는 꾀병을 핑계로 만나 주지 않았다.

화가 난 유비는 관청으로 돌아가 부하들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숙사로 쳐들어가

독우를 붙들어 묶고 채찍으로 이백 번이나 쳤다 ... '

 

이와 같이 실제 독우를 채찍질 한 것은 장비가 아니라 유비였다.

 

6. 조조는 정말로 동탁을 암살하려 했는가 ?

 

- 이 이야기는 완전한 가공의 이야기라 보아도 좋다.

당시의 최고권력자 동탁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이 어마어마한 사건은

그러나 실제 당대의 사서 어디에도 그 기록이 없다. 또한 연의에서 암살미수 당시

조조의 직위로 기록되어 있는 효기교위 자리에 실제 조조가 임명된 적은 없었다.

 

7. 진궁이 도망치는 조조를 붙잡은 것은 사실인가 ?

 

- 이 역시 나관중의 허구에 불과하다.

조조가 동탁의 실패를 예견하고 낙양에서 벗어나다 중묘현리아는 곳에서

어느 정장의 의심을 받아 붙잡힌 후, 관청에 호송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을사람 중 마침 조조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의 힘으로

석방되었다. 이것은 확실히 중평 6년 (189년) 에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도망치는 조조를 붙잡았다 그의 말에 감복해 풀어주고,

여백사의 집까지 함께 했다는 진궁이 실제 조조를 처음 따른 것은 초평 2년 (191년) 이다.

애시당초 조조가 붙잡혔던 시점과는 2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조조를 깍아내리기 위해 힘썼던 나관중의 허구 중 하나이다.

 

8. 조조는 여백사까지 죽였는가 ?

 

- 작품 속에서 진궁의 도움을 받아 여백사의 집까지 도망왔던 조조는 하나의 오해로

여백사의 가족들은 물론 술을 사 돌아오던 여백사마저 죽여버리게 된다.

 

이 부분은 일부의 진실, 일부의 허구이다.

즉, 조조가 여백사의 가족을 죽인 것은 사실이고 그 경위에 대해서는 사서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당시 여백사는 외출로 인한 부재 중이었다.

여백사마저 조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작품 속 과장이며 허구이다.

 

다만 " 내가 상대를 배반하는 일은 있어도 상대의 배반은 절대로 용서할수 없다 " 는

조조의 말은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는 부분으로 확실하다.

 

9. 화타의 죽음

 

- 한말의 명의 화타는 외과 수술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조조가 화타를 죽인 것은 사실이며, 그로 인해 조조는 오랫동안 이를 후회했다.

다만 연의에 나타난 조조의 살인극은 기본 근거는 있되 지나치게 과장.왜곡되었다.

 

화타는 의술에 뛰어나 조조의 명으로 시의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고향이 그리워 처의 병을 핑계로 고향에 돌아간 후, 조조의 부름에도 불응했다.

결국 이로 인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연의에서 화타의 죽음을 잔인한 살인극으로 그린 것은

기본적으로 조조의 이미지를 나쁘게 깍아내리려던 나관중의 의도가 서려 있는 것이다.

 

10. 관우가 따뜻한 술이 식기도 전, 화웅의 목을 벤 것은 사실인가 ?

 

- 유비.관우.장비 삼형제가 동탁토벌 전투에 참가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관우가 화웅을 베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나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화웅의 죽음은 정사 <손견전> 에 언급된다.

" 손견은 병사들을 맡아 사수관에서 화웅과 싸웠는데 처음에는 패했지만

마지막에는 동탁의 군사를 대파하여, 도독 화웅을 죽이고 그 목을 옥문에 매달았다 "

 

관우는 당시 유비를 따라 공손찬의 휘하에 있었으며, 애시당초 화웅과의 전투에는

참가조차 할 수 없었다. 화웅을 죽인 것은 손견 혹은 손견의 장수 중 하나였던 것이다.

더구나 술이 식기도 전 베었다는 부분은 작가의 과장에 지나지 않는다.

 

11. 관우가 원소의 명장 안량과 문추의 목을 모두 벤 것은 사실인가 ?

 

- 이것은 하나의 진실, 하나의 허구이다.

정사의 촉서 <관우전>을 보면 건안 5년, 관우가 말을 채찍질해 대군이 보는 앞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목을 베어 돌아온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사실로 보아도 좋다.

 

그러나 문추를 죽인 것은 관우가 아니라 조조 휘하의 다른 장수였다.

정사의 위서 <무제기> 에 기록된 장면은 조조가 문추의 부대를 유인하여 분산시킨 후,

일제히 병사들을 돌격시켜 그 가운데 문추를 베어버린 모습이 나타난다.

 

12. 관우가 조조를 떠나 유비에게로 가던 중, 오관의 육장을 벤 것은 사실인가 ?

 

- 관우에 관한 작품 속 허구 중 하나이다.

관우가 조조의 곁을 하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장이 너무 심하다.

 

루트상으로 관우는 직접 허창에서 여남으로 간 것이며, 낙양과 영양 등을 거쳐 갔다는

장면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실제상황과 맞지 않는 루트뿐만이 아니다.

 

관우에게 죽음을 당한 동령관의 공수, 낙양의 맹탄과 한복, 사수관의 변희, 영양의 왕기,

황하 나루터의 진기 등은 모두 정사 그 어디에도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13. 유비 삼형제가 여포와 맞붙은 것은 사실인가 ?

 

- 역시 허구이다.

희대의 영웅 여포와 당대의 호걸들이었던 유비 삼형제의 대결은

역사적 사실이라면 그 어느 것보다 가장 먼저 주목을 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대와 후대의 사서 어디에도 이들의 대결에 관한 기록은 없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없었을 뿐더러 연의 속의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14. 유비 삼형제가 조조에 패한 후, 다시 고성에서 화합한 것은 사실인가 ?

 

- 허구이다.

사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성에서 회합한 일은 결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유비와 장비가 서로 떨어졌다거나 장비가 고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또 관우가 장비와 충돌했다거나 유비 삼형제가 고성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이야기 역시

모두 허구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5. 손권의 " 인재를 등용하여 재능에 맡긴다 " 는 정책은 끝까지 관철되었는가 ?

 

- 결론적으로 아니다.

229년 손권은 스스로를 황제로 칭한다. 그러나 이후 그는 문신과 무장을 신뢰하지 않고

점차 독단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삼국지 정사의 저자 진수는 " 손권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어서 가차없이 사람을 죽였는데,

그러한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심해졌다 " 는 평을 하였다.

그는 국경을 지키는 장수를 신뢰하지 않아 처자를 인질로 잡아두었고,

교사, 찰전 등의 감시직을 설치하여 문무 백관을 감찰하였다.

기회만 있으면 마구 잡아들였으며 죄없는 사람을 함정에 빠뜨려 죽였다.

 

결국 손권의 인사정책은 초기에는 매우 좋았지만, 결코 유종의 미를 거두지는 못했다.

 

16. 최초의 천하삼분 계책을 내놓은 것은 제갈량인가 ?

 

- 사실과 다르다.

최초의 천하삼분계는 오나라의 걸출한 모략가 노숙에게서 나왔다.

건안 5년 (200년) 노숙은 손권과 천하대세를 논의하던 중 이와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물론 노숙의 천하삼분계는 제갈량의 구상과 비교해 보았을 때 기본적으로 일치해도

그 내용에 있어 상당히 조잡하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내용을 제시한 시점과 배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17. 제갈량의 박망파 화공은 사실인가 ?

 

- 허구이다.

연의에서 제갈량이 유비의 휘하에 들어간 후, 처음 활약한 전투로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 박망파의 전투와 그 승리는 유비의 작품이며 무엇보다 중용한 것은

이 전투가 제갈량 출사 이전에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스스로 진지에 불을 붙이고 일부러 퇴각할 것일뿐, 적에게 화공을 한 것은 아니다.

 

18. 제갈량의 우선은 사실인가 ?

 

- 연의에서 제갈량의 상징으로 나오는 우선. ( 까마귀의 깃털로 만든 부채)

하지만 한말에서 남북조에 걸쳐 문사들은 취미, 학문, 예술을 논할 때 주미를 들었다.

모선은 주미의 별칭이며 우선과 같은 부채가 아니라 먼지떨이개였다.

 

한말의 명사이자 종실의 신하를 겸했던 제갈량 역시 작품 속 우선보다는

당시의 시류에 걸맞는 모선을 쥐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19. 조운이 단기로 아두를 구한 것은 근거가 있는가 ?

 

- 조운이 장판파에서 아두를 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정사의 기술은 매우 간략하다. <조운전> 에 그 장면이 언급되어 있다.

 

" (유비가) 처자를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을 때, 조운은 갓난아기를 가슴에 안고

그 생모인 감부인을 보호하여, 같이 난을 피하였다."

 

조운이 직접 주인을 구한 것과 관련된 부분은 원문에 열 네자 정도가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행동이나 결과를 나타내는 말은 ' 안고 '  '보호하고 '  ' 모두 피할수 있었다 ' 정도에

불과하다.  

 

조운이 유선을 안고 감부인을 보호하며 재빨리 물러난 곳은 관산이다.

처음부터 적군 속에서 종횡무진하는 행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조운의 이러한 영웅적 행동을 사실로 믿었다.

 

20. 장비가 장판교를 크게 시끄럽게 한 이야기는 사실인가 ?

 

- 연의에서 유비가 조조군을 피해 도주할 때, 장비의 활약이 크게 묘사된다.

조운이 아두를 구하겠다 뛰어갈 때 장비는 장판파에 홀로 버티며 큰 호통만으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것으로 등장한다. 실로 일세의 영웅호걸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정사를 보면 확실히 유비군이 도주할 때 장비가 이십 여기의 부하들과 함께 후미에 서서 다리를 잘라놓은 뒤, 강을 방패삼아 분기탱천하여 소리치는 모습이 나온다.

 

다만 조운을 도와 주인을 구하게 했다는 사실은 사서에 기록된바 없으며,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은 확실하지만 조조와 부장들의 다리 부근에서

장비의 호통에 놀라 물러났다는 기록 역시 없다.

 

또 장비의 호통에 놀라 너무 두려운 나머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는

하후걸이라는 인물은 애시당초 존재하지도 않은 가공의 인물에 불과한 것이다.

 

장비가 장판교를 크게 시끄럽게 하여 조조군을 물리친 것이 완전한 허구는 아닐지라도

상당히 많은 과장이 들어간 것임에는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정사 삼국지로 바라본 삼국지연의의 허구 2

 

1. 제갈량은 오의 군유와 설전을 벌였는가 ?

 

- 제갈량이 사신으로 오에 가서, 오와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한 것은

사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은 손권에게 우선 관망의 태도를 포기하라고

설득하며 한편으로 격장법 (사람의 성을 돋구어 분발시키는 계책) 을 통하여

손권으로 하여금 조조에게 대항할 결의를 굳혀주기도 한다.

 

하지만 유.손 연합의 전과정을 통해 제갈량이 오나라의 유학자들과

무리한 설전을 벌이느 장면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제갈량의 인물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작가의 문학적 각색에 지나지 않는다.

 

2. 주유는 연의에서처럼 속이 좁은 인물이었는가 ?

 

-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정사 <주유전> 을 보면 " 성격은 너그럽고 도량이 넓어 누구에게나 호감을 받았다 " 라고

기록하고 있다. 손권 역시 주유를 평가할 때 " 영웅의 기개와 담략을 겸비하고 있다 " 고

평하며 매우 높게 바라보았다. 여몽은 더욱 그를 숭배하여 " 주유와 노숙은 독자적인

견해로써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방침을 제안했다. 실로 기재라 할 것이다 " 라고 하였다.

 

주유가 도량이 좁았다는 등 그의 인품이나 기량에 관해 부정적으로 언급한 자료는

삼국시대 사서 중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북송시대 '자치통감' 의 저자 사마광은 적벽대전을 서술하며 특히 주유를 높이 평가했다.

강적에 직면하여 의연한 태도와 결단력 있는 지휘, 다른 사람을 능가하는 담력으로써

적은 병력으로 강적인 조조를 크게 이겼다고 서술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주유가 뛰어난 군사 지휘관으로서 인품과 기지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상 실제 주유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처럼 도량이 좁은 인물이 아닐 뿐더러,

지혜와 용맹을 겸비하고 기지가 뛰어난 걸출한 군략가였던 것이다.

연의 속 주유의 모습이 실제와 크게 다른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주유와 제갈량의 대결을 통해 제갈량의 비범함을 돋보이기 위한 작가의 의도이다.

 

3. 장간은 주유의 반간계에 빠졌는가 ?

 

- 사실이 아니다.

연의에서는 주유의 반간계에 빠진 장간으로 인해 조조가 부하장수 채모와 장윤의

목을 베어버리는 장면이 나타난다. 위의 수군도독을 제거하기 위한 주유의 계략에

장간이 넘어가 위의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유비.손권 연합군에 힘을 실어준 모습이다.

 

하지만 연의에서처럼 애초 장간이 주유로 하여금 조조에게 투항하라는 설득을 위해

오의 진영을 찾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적벽대전 이년 후의 일이지 적벽대전 이전의

일은 아니다. 주유가 장간을 위해 연회를 베푼 것도 사실이지만 주유의 계략대로

편지를 훔쳐 조조진영으로 달아난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주유가 장간에게 반간계를

사용한 일은 없으며, 당연히 장간이 계략에 넘어간 일도 없었다.

 

4. 기모를 이용하여 화살을 빌린 것은 과연 제갈량인가 ?

 

- 연의 46회를 보면 주유가 제갈량의 지모가 뛰어남을 보고 장차 오의 큰 재앙이 될 것이라

여겨, 또 그의 재능을 시기하여 제거하려는 모습이 나온다. 어느 날 주유가 열흘 안에

십만 개의 화살을 요청하자 제갈량은 삼일이면 충분하다 장담했다.

 

주유는 내심 기뻐하며 제갈량에게 군령장을 내리는 한편, 군 내에 있는 장인에게

일부러 시간을 끌어 납기일에 맞추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구실로 제갈량을 죽이려는 의도였다.

 

삼일 째 되는 날 새벽, 장강은 짙은 안개에 둘러싸였다.

그 때 배의 양측에 볏단을 천 개씩 세운 이십 척의 배가 밧줄로 서로 연결한 채 북상했다.

날이 샐 무렵 제갈량이 지휘하는 배는 조조의 진영에 가까이 다가가 일렬로 나란히 섰고,

곧이어 모든 병사들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혹 복병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여 만 여명의 사수를 동원하여

활을 쏘게하였다. 이윽고 제갈량은 뱃머리를 반대로 돌리게하고 또 화살을 받아냈다.

 

이후 안개가 걷히자 즉시 물러났다.

이 때 이십척의 배 양측에 나란히 놓아둔 볏단에는 화살이 가득 꽂혀 있었고,

십만 개의 화살은 간단히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건안 18년 (213년) 에 손권과 조조는 유수에서 대치했다.

어느 날 손권이 큰 배를 타고 적의 정세를 시찰하러 가니, 조조의 군사들이 활과 쇠뇌를

마구 쏘았다. 그 때문에 배에 꽂힌 화살의 무게로 배가 전복될 지경이었다.

그래서 배를 돌려 반대쪽으로 화살을 맞으니, 화살의 무게가 골고루 분산되어 안정되었다.

 

기모로써 화살을 빌린 이야기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적벽대전 이후의 이야기이며, 실행자 역시 제갈량이 아닌 손권이었다.

 

5. 황개는 정말로 고육지계를 썼는가 ?

 

- 황개가 거짓으로 조조에게 항복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역사자료나 적벽대전에 관계한 사람들의 전기를 훑어보아도

주유와 황개가 고육지계를 꾸민 흔적은 없으며, 황개가 매를 맞은 사실도 없다.

결국 황개의 거짓 투항은 고육지계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작가가 황개의 거짓 투항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고육지계라는 허구를 덧붙인 것은

제갈량에 의한 적벽화공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6. 방통이 조조에게 연환계를 가르쳐준 것은 사실인가 ?

 

- 연의의 적벽대전을 살펴보면 방통에게 배운 연환계를 실행한 조조가

이후 상대의 화공에 크게 화를 입고 결국 대패를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방통의 간단한 경력 중, 그가 적벽대전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다.

적벽대전에 참가조차 하지 않은 그가, 싸움의 과정에서 조조에게 교모히 연환계를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은 작가의 허구에 다름아니다.

 

7. 적벽대전에서 화공의 계략을 꾸민 것은 제갈량인가 ?

 

- 사실과 다르다.

정사의 <주유전>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주유의 부장 황개가 진언했다.

" 지금 적은 다수이고 아군은 세력이 약하므로 대항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조조의 군선을 보니 선수와 선미를 연결해 두었습니다.

화공을 쓰면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

 

<주유전> 과 <강표전> 에는 이에 덧붙여,

황개가 투항을 가장하여 적벽을 화공한 전과정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결국 적벽대전 화공 계획의 입안자는 황개였으며, 주유가 이를 허락한 뒤

다시 황개가 실행에 옮긴 것이다. 제갈량은 주유의 참모도 아니었을 뿐더러,

화공의 계획에 참가하여 상담에 응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8. 제갈량은 적벽대전의 지휘자였는가 ?

 

- 연의에서 제갈량은 적벽대전의 사실상 지휘자였던 반면, 주유는 조역의 한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사서를 살펴보면 사실은 이와 다르다.

 

모든 사서들이 하나같이 확실히 하고 있는 부분 한가지,

그것은 바로 적벽대전의 한쪽 당사자는 조조였고, 또 한쪽의 주역은 주유라는 사실이다.

 

실제 역사에서 주유는 흔들리지 않는 주전파였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스스로 정예병력 삼만을 이끌고 하구에 나아가 조조군을 물리쳤다.

즉 주유는 주전파였을뿐 아니라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활을 한 사람이다.

 

요컨데 적벽대전의 지휘자는 제갈량이 아닌 오의 대도독 주유라는 사실이다.

제갈량이 구체적으로 전투를 지휘했다는 기록은 사서에 보이지 않으며,

머리를 흩뜨리고 검을 받쳐든 채 단에 올라 바람을 가른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제갈량은 매우 긴급한 시기에 비교적 정확하게 정세를 분석했고,

오의 결의를 굳건히하여 손.유 연합을 이끌어 냈으며 그리하여 국면을 반전시킨 후,

조조군을 대패시키고 적벽대전의 승리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활을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9. 관우가 화용도에서 패퇴하는 조조와 마주치고도 그냥 보내준 것은 사실인가 ?

 

-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조조는 확실히 군사를 정리하여 화용도에서 도보로 후퇴하였고,

큰 비로 진흙탕이 된 길을 큰 대가를 치르고 간신히 지나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관우가 이 곳에서 조조를 만나고도 옛정에 사로잡혀 눈감아 주었다는 것,

이것은 연의의 작가 나관중이 만들어낸 완전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수백 년간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특히 의를 중시하는 봉건시대의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비난 대신 커다란 찬사를 보내게한 요인이 되었다.

 

10. 제갈량은 주유를 분사시켰는가 ?

 

- 연의에서는 적벽대전 이후, 형주의 귀속문제를 놓고 제갈량과 주유가 다투는 장면이

나오고 제갈량이 세 번이나 주유를 화나게해 끝내 분사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따른 것인가 ?

역시 전혀 사실과 다른 작품 속 허구에 불과하다.

 

손권과 유비는 적벽대전 이후 모두 서천을 손에 넣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히 손권은 주유에게서 서천을 뺏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확실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주유는 서천을 차지하기 위해 출병하는 도중 파구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파구는 파릉이라고도 하며, 형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동정호 동쪽에 위치한 곳이다.

 

결국 주유는 파구에서 병사한 것이지, 연의에서처럼 형주성 밑에서 분사한 것이 아니다.

 

11. 관우는 의로써 황충을 놓아주었는가 ?

 

- 연의 53회에서는 제갈량이 장사를 차지하기 위해 관우를 파견해 싸우게한다.

장사태수 한현의 장수 황충이 나타나 관우와 대적하고, 오륙십합이 넘도록 싸우지만

승부는 나지 않는다.  이 때 황충을 유인하고자  갑자기 퇴각하는 관우의 계략에 빠져

뒤쫓던 황충의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그는 낙마하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이 때 상대의 실수로 승리하는 것을 더럽게 여긴 관우로 인해 황충은 목숨을 구하고,

이후 삼일째 승부에서 신궁의 솜씨로 관우의 투구끈만 맞히며 은혜에 보답한다.

 

사서의 기록을 보면 황충은 장사태수 한현의 부장이었고, 유비가 남방의 여러 군을

정벌할 때 유비에게 귀순했다. 그러나 황충이 유비에게 귀순한 경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관우가 의로써 황충을 놓아주었다거나 황충이 은의에 감동하여 유비에게 귀순했다는

기록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역사상 실제 관우는 황충을 노병이라 부르며 자신이 황충과 동렬로 취급되는 것을

싫어했다. 관우가 이런 황충과 교전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확실한 것은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을 나관중이 허구로 붙였다는 것이다.

 

12. 조조가 수염을 자르고 옷을 버림으로써 겨우 위기를 모면한 것은 사실인가 ?

 

- 연의 58회에는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마등의 아들 마초.한수 연합군과 조조군의

전투가 그려져있다. 이 전투에서 마초는 몸소 진두지휘하며 조조군의 부장들을

연달아 물리치고 적군을 교란시킨 후 조조를 겨냥하여 돌진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후 서량군에서 잇달아 붉은 장포, 긴 수염 등 조조의 특성을 외치며 지목할 때마다

조조는 장포를 벗어 던지고 수염을 칼로 자르며 깃발 끝으로 머리를 감싸는 등,

온갖 수모를 겪고 급기야 마초의 추격에 놀라 말채찍까지 떨어뜨리는 치욕 끝에

간신히 조홍과 하후연 등의 장수들이 달려와 위기를 벗어난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허구 중의 허구이다.

 

실제 211년 7월, 조조와 마초의 관서 연합군은 동관에서 대치하였다.

조조군은 정면 작전에서 마초군에게 시종 압도당하였다. 그러나 측면 공격으로 전환하여

연합군의 추격을 피했을뿐 아니라, 신속하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여 마초의 공격과 방어

모두를 교란하였다. 결국 연합군은 어쩔 수 없이 동관을 포기하고 위남으로 철수하였다.

 

위남에서 승부를 결정지으려한 마초였지만 조조는 적을 깊숙히 유인한 후,

허를 찔러 위남을 들이쳐서 마초를 패배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조조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간파한 마초가 강화를 제의했지만 거절당했고,

조조는 짐짓 강화에 응하는척 하며 마초와 한수를 이간질시켰다.

 

두 사람이 서로 의심하는 것을 본 조조는 돌연 공격으로 돌아섰고,

결국 마초와 한수는 서량으로 도망쳐 관중의 태반은 조조에게 넘어간 것이다.

 

조조는 관서를 차지한 위남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자신의 걸출한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다. 나관중의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조조의 이미지에 흠집내기

위한 차원에서 완전히 실제와 반대로 뒤집어 버린 것이다.

 

정사 삼국지로 바라본 삼국지연의의 허구 3

 

1. 장송이 조조를 비웃은 것은 사실인가 ?

 

- 연의 60회에는 서천 유장 휘하의 장송이 허창에서 조조를 비웃는 장면이 나온다.

장로의 공격에 대비해 유장이 보낸 장송이었지만 장송은 유장이 가망없다고 생각하여

조조에게 서천지도를 바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정작 조조에게는 푸대접을 받기만 했다.

 

이에 분노한 장송은 조조의 재능에 관해 비판을 퍼붓고 조조의 저서 ' 맹덕신서 ' 를

훑어본 뒤 전국시대 무명인의 표절이라 말하며 촉의 어린아이들도 암송하는 수준으로

비하한다. 이에 발끈한 조조가 다음 날, 휘황찬란한 호위군을 집합시킨 가운데

장송에게 그것을 보여주며 으름장을 놓자 조조의 패배한 전투만을 열거하며 화를 돋운다.

결국 조조가 장송을 목베려하자 양수, 순욱 등이 말려 간신히 목숨만 건진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장송이 조조를 만난 장소는 허창이 아닌 형주였으며 208년, 조조가 형주에 입성했을 때다.

또 장송은 조조의 맹덕신서를 두고 양수와 언쟁한 적이 없으며 조조를 비웃지도 않았다.

사서에서 장송이 조조를 앞에 두고 비웃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조조가 장송을 죽이려한

적도 없었다. 더욱이 몇 번이나 조조를 비웃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 언급이 없다.

 

이상의 예에서 보듯 장송이 조조를 비웃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나관중이 조조를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의 하나라 할 수 있다.

 

2. 관우는 과연 칼 한 자루만 가지고 술자리에 참석한 것인가 ?

 

- 연의에서는 형주반환 문제를 두고 노숙과 관우가 담판을 짓는 장면이 나온다.

노숙은 육구 임강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관우를 초대하여 형주를 돌려받고자 하였다.

여의치 않을 때는 잠복시켜놓은 도부수를 이용 관우를 죽일 작정이었다.

 

관우는 대도 한 자루와 주창만을 곁에 두고 담판에 응했다.

여몽과 감녕이 강가에 군사들과 함께 숨어있고, 임강정 뒷편에 도부수들이 매복해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결국 관우의 기지로 위기를 탈출하는 것이 주내용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

손권은 유비가 적벽대전 이후 빌려간 형주를 반환할 마음이 없음을 잘 알았다.

제갈근 등을 보내 반환을 요구했지만 유비는 다른 이유를 대며 반환을 미루었다.

결국 장사.영릉.계양 세 군에 관원을 임명해 부임시켰지만, 모두 관우에게 쫓겨났다.

 

정사 <주유전> <노숙전> 을 보면 당시 유비와 관우의 태도가 강경하여기에

노숙은 익양에 진입하여 관우와 대치함과 동시에 관우와 회담을 갖기로 하였다.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 서로 병사와 말을 백 보 떨어진 곳에 머무르게 하고, 장군만이 대도 한 자루를 차고 

회견에 임한다 '

 

두 사람의 익양 회견은 관우 혼자 대도 한 자루를 차고 회담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쌍방 모두 대도 한 자루씩 차고 회담에 나온 것이다.

 

이 밖에도 두 사람의 회담에서 노숙은 당당한 언사로 유비의 신의 없음을 비난했지만,

관우는 말이 궁핍하여 회피하기만 하였다. 연의에서처럼 관우는 정기가 가득하고,

노숙은 횡설수설하는 수동적 자세가 전혀 아니었다.

더구나 노숙이 덫을 놓아 관우를 살해하려 했다는 근거는 사서 그 어디에도 없다.

 

3. 노숙은 과연 평범한 사나이였는가 ?

 

- 연의에서 노숙은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으며 무게감도 상당히 떨어진다.

성실하고 정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소심한 인물로, 조연 정도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의 노숙 역시 그토록 평범하고 무능했을까?

정답은 전혀 아니오이다. 역사에 등장하는 노숙은 오의 명장으로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며

중국 고대의 인물 중 몇 손가락 안에 들만큼 걸출한 영웅호걸의 한 사람이었다.

연의에서와 같이 절대 평범한 모습의 사나이는 아니었다.

 

정사의 <노숙전> 을 인용한 <오서>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노숙은 난세에 처하여 젊은 시절부터 뜻이 커서, 종종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를 일을 했다.

일찍부터 전란을 수습하여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원대한 뜻을 세우고 있었다. '

 

또한 그는 천하의 호걸과 교류하며, 병법에 능통하고 담론에 뛰어났으며,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려 깊은 인물이었다.

 

조조에 대항하기 위한 손.유 연합의 제창자 역시 노숙이었으며 제갈량이 오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노숙의 지지와 동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의에서 노숙이 평범하게 그려진 것은 제갈량의 인의와 지혜를 돋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4. 제갈량은 한중공략에 관여했는가 ?

 

- 연의 72회와 73회에서는 유비와 조조가 서로에게 매우 중요했던 한중을 차지하기 위해

격렬히 싸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갈량이 의심 많은 조조의 성격을 간파하여

의병 (거짓 복병) 을 사용하여 승리를 거두고 한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서를 살펴보면 실제 역사는 이와 다르다.

건안 20년 (215년) 조조는 관중을 차지하고 대군을 투입해 한중의 장로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낸다. 조조의 세력은 한중까지 넓어져 삼파 깊숙한 곳에 이르렀다.

 

불안해진 유비는 황권에게 조조가 임명한 삼파의 수령을 공격하게 하고,

그 결과 삼파지역을 제압하였다. 조조는 장합을 보내 대항하게 하였지만 장비에게 패한다.

 

조조가 한중 주둔시, 사마의와 유엽 등이 서천으로의 진격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리고 하후연에게 한중의 수비를 맡긴 후, 자신은 중원으로 돌아갔다.

 

당시 법정은 조조의 심정을 간파하고 유비에게 한중진격을 건의한 뒤,

그 당위성을 역설했다. 결국 유비는 건안 24년 (219년) 대군을 이끌고 정군산에 출진했다.

조조군에서는 하후연이 전력을 다해 방어했고, 유비는 황충까지 투입한 끝에

조조군을 무찌른 뒤 대장 하후연의 목까지 벨 수 있었다.

조조군은 장합의 통솔 아래 양평관으로 퇴각하였다.

결국 유비는 한중을 점령하고 7월에 스스로 한중왕에 오른 것이다.

 

이와 같이 한중에서 전투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유비와 법정의 지휘하에

행해진 것일뿐, 제갈량과는 직접 관계가 없었다. 제갈량의 지혜에 의한 승리가 아니었다.

 

제갈량은 당시 성도유수로 식량과 군사의 보급을 맡았고, 일년 넘게 지속된 한중전투에서

군수품보급과 장병 동원은 매우 중대한 역활이었기에 그 공은 아주 크다 할 수 있다.

 

5. 화타가 관우의 뼈를 깍아 독을 치료한 것은 사실인가 ?

 

- 연의 75회에서는 건안 24년 (219년) 관우가 조조의 칠군을 수공한 후,

군사를 이끌고 번성을 공격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때 오른팔에 독화살을 맞고,

거무튀튀하게 부어올라 더이상 움직일수 없었다. 결국 당대의 명의 화타가 나섰다.

 

장교에게 큰 쟁반을 들게하고 팔 밑으로 흐르는 피를 받게 하였다.

작은 칼로 살을 자르고 쓱쓱 뼈를 깍아냈다.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정작 당사자인 관우는 마량과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눌뿐, 조금도 고통스런

기색을 비추지 않아 모두의 감탄을 자아냈다.

이 것은 과연 사실인가?

 

정사의 <관우전>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관우는 예전에 화살에 맞아 왼팔에 관통상을 당했다. 나중에 그 상처는 치료했지만,

비가 오거나 구름이 낀 날에는 항상 상처가 쑤시고 아팠다. 상처를 치료한 의사가

화살 끝에 묻어 있던 독이 뼈에 스며 들었으니, 팔의 상처를 찢어 뼈를 깍아 독을 제거하면

이 아픔은 없어진다 라고 하였다 '

 

관우가 뼈를 깍아 독을 치료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나관중의 이야기도

기본은 사실에 틀림없다. 다만 연의는 역사적 사실을 몇 가지 고쳤다.

 

우선 뼈를 깍아 독을 치료한 것은 관우가 조조의 칠군을 수공하기 전이었다.

번성을 공격했을 때 화살에 맞은 사실은 없다.

 

그리고 뼈를 깍아 독을 치료한 것은 화살에 의한 상처가 치료된 후의 일일뿐,

화살에 맞았을 때는 아니다. 또 사서에서는 왼팔을 관통당했다고 썼는데,

연의에서는 오른팔로 나타나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우를 수술한 의사가 화타라는 사실이다.

실제 화타는 208년 조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관우가 조조의 칠군을 수공한 것은

219년의 일이다. 11년 전 죽은 화타가 다시 살아나 관우를 치료한다 ?

애시당초 이 의사는 화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6. 형주습격의 계략은 누가 세웠는가 ?

 

-  연의 75회를 보면  육손의 계략으로 오나라가 형주를 차지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몽은 관우가 번성 원정에 나간 틈을 타 형주를 차지할 것은 손권에 진언한다.

그러나 관우가 이미 장강연안에 엄중한 경계태세를 쌓자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손권이 육손을 보내 여몽의 상태를 알아보게 하니, 과연 병든 기색이 아니었다.

육손은 여몽에게 한자기 계략을 제안한다. 병든 여몽을 대신하여 오나라의 병권을

자신에게 물려주라는 것이다. 육손의 계략대로 여몽의 병권을 육손에게 물려주자,

관우는 그 때까지 별 이름없던 육손을 경시하여 드디어 경계를 느슨히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를 탐지한 육손이 손권에게 급히 보고했고, 손권은 여몽을 대도독에 임명하여

강동의 군사력을 총지휘하게 하였다. 결국 쾌속선 팔십척에 배 안에는 병사들을 숨겨놓고,

배 위에는 상인으로 위장한 병사들을 올려놓은 뒤, 봉화대의 수비군까지 매수하여

정박을 허락받았다.

 

밤이 되어 배안에 숨어있던 정예병을 풀어놓고, 장강 연안의 봉화대를 모두 점령한 뒤,

경보를 받지못한 형주성의 봉화대 수비병마저 포섭하여 성문을 열게하고 순식간에

형주를 점령한 것이다.

 

하지만 정사의 <여몽전> 과 <육손전> 그 밖의 사서를 살펴보면 형주탈환 작전의

입안자도 실행자도 모두 여몽이다. 이 계획의 일등공신은 단연 여몽인 것이다.

 

여몽은 처음부터 적벽대전 이후 유비를 삼켜버려야한다는 강경론자였고,

수차례 주유 이후 병권을 쥐고있던 노숙과 손권에게 이를 건의했다.

217년 노숙을 대신하여 병권을 통솔한 이후 계속 형주를 습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손권에게 여몽 자신의 병을 치료할 구실로 수도 건업으로 불러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하면 관우는 반드시 이를 진짜로 여겨 후방의 군대를 번성전투에 투입할 것이며

그 때 장강을 북상하여 급습하면 남부를 손에 넣고 관우도 생포할 것이라 주장한다.

 

결국 건의대로 여몽은 건업에 불려왔고, 마침 여몽을 문병온 육손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과 손권의 비밀이므로 발설치 않았다.

다만 자신과 생각이 같음을 확인한 육손을 자신의 후임으로 육구에 주둔시킨다.

 

육구에 주둔한 육손은 크게 과장하여 관우의 용기와 지략을 칭찬하였다.

이에 관우는 육손을 일개 풋나기로 과소평가하고 대단치 않게 여겼다.

완전히 방심한 관우는 결국 후방의 부대를 이동하여 전선에 증원하였다.

 

그 즉시 손권은 여몽을 총사령관에 임여하고 형주의 남부로 급파했다.

그리고 백의로 속여 장강을 건넌 후, 연안 초소를 함락시키고 군대를 형주성으로 향했다.

강릉과 공안의 수비를 맡았던 미방과 부사인은 평소 관우에게 불만을 갖고 있던터라

손쉽게 여몽에게 투항해버렸다. 고립된 관우는 상용에 있던 유봉과 맹달에게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다. 당시 양양과 번성의 전투상황으로 볼 때, 조인의 추격태세

는 갖추어지지 않았다.

 

결국 고립된 관우는 어쩔수 없이 군사를 이끌고 서쪽의 맥성으로 후퇴할수 밖에 없었고,

곧 생포됨과 동시에 형주를 빼앗기고 말았다.

 

실제 육손은 여몽과 같은 계략을 갖고 있었다기보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었다.

미리 여몽을 위한 계략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형주를 탈환하는 계획은 여몽과 손권이

생각하고 실행한 것이며, 육손은 국외자에 지나지 않았다.

 

삼국지정사의 저자 진수는 여몽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 용감하고 작전의 결단력이 뛰어났다. 형주를 빼앗고 관우를 생포한 것은 가장 큰 공이다 '

 

연의에서 여몽을 용기는 있되 계략이 부족한 평범한 인물로 그린 것은

육손의 비범한 지혜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7. 손권은 진심으로 관우를 귀순시키려 하였는가 ?

 

- 연의 76회에서는 맥성에 갇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관우에게 손권이 제갈근을 보내

투항을 권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관우는 이를 단번에 거절하고 제갈근은 소득없이 물러난다. 결국 관우는 아들 관평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다 생포당하고 이후 죽임을 당한다.

 

정사 <여몽전> <관우전> <손권전> <주연전> <반장전> 등의 기록을 보면,

관우가 맥성으로 패퇴한 뒤 손권에게 생포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관우 부자가 맥성으로 후퇴한 뒤 임저에서 처형당할 때까지,

그 사이 손권이 제갈근을 보내 귀순을 권유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삼국지연의가 널리 퍼진 후, 관우의 맥성 패퇴를 둘러싼 이야기는

대중들 속에 깊이 침투되어 오랫동안 진실로 신봉되었다.

 

사람들은 관우를 믿고, 관우의 마지막 미치광이 같았던 전투를 믿고,

관우가 제갈근에게 말한 정의감 넘치는 교훈을 믿고, 죽음에도 굴하지 않는

일생의 충의를 굳게 믿은 것이다.

 

8. 관흥과 장포는 유비의 동정에 참가하였는가 ?

 

- 연의 81회는 관우.장비가 죽임을 당한 후 분노한 유비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는 군사를 일으켜 원수를 갚을 것을 결의하였다.

결국 칠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오반을 선봉으로 삼고 관흥, 장포에게 친위대를 맡기고

몸소 군사를 지휘하여 동진하였다.

 

촉한의 군사가 이르는 곳마다 오병은 소문을 들은 것만으로 투항하였다.

촉한의 대군은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의도에 이르렀다.

그 동안 관흥.장포는 오의 좌도독 손환과 이이 등을 해치우고, 사정을 찔러 죽이고,

마충을 물리치고, 효정을 공격하여 빼앗아 오군을 대파하였다.

 

이렇듯 관흥. 장포는 오군과 교전하며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원한과 분노를 씻어

충의의 정신을 발휘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

 

정사 <관우전> 에 의하면 관우에게는 확실히 관흥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어릴 적부터 좋은 평판이 있어 제갈량이 중히 여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약관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따라서 요절한 관흥이 특별한 군공을 세울리 만무하고,

유비의 동정에 참가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장포 역시 마찬가지다.

정사 <장비전>에 의하면 장비에게 확실히 장포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장비가 죽기 전에 이미 요절했다. 때문에 장포 역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유비의 동정에 참가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두 명 모두 동정에 참가한 일도 없고, 참가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관우.장비의 사후 이미 요절한 두 아들이 부활하여 오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황충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어려움 속에 반장을 베고, 관우를 배반한 미방과 부사인을

죽이고, 관우를 살해한 마충의 목을 베고, 손권을 협박하여 장비를 살해한 범강. 장달

두 배반자를 송환시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영웅적 행위를 허구화시켜 만든 것은

그만큼 두 영웅의 죽음을 크게 아쉬워하고 그들의 위대성을 관철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진하게 베어 있는 것이다.

 

9. 황충은 어떻게 죽었는가 ?

 

- 연의 83회에는 유비의 동정에 참가한 황충의 모습이 그려진다.

노장은 도움이 안된다는 유비의 말에 오기가 난 황충은 칼을 차고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오의 장수 사적을 죽이고, 반장을 쫓아내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관흥.장포의 진영으로 돌아오라는 충고도 무시하고 다음 날 다시 반장에게

싸움을 걸었다. 하지만 반장의 계략에 속아 후퇴하던 그를 쫓다 마충이 쏜 화살에

어깨를 맞고 그날 밤 죽음을 맞이한다.

 

사서를 살펴보면 황충의 이 죽음은 전면적으로 허구화된 것이다.

정사의 <황충전> 에는 건안 25년 (220년) 그가 성도에서 병사했음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사후 일년 뒤, 다시 부활하여 유비의 동정에 참가해 오를 정벌하고

사적을 벤 뒤, 반장까지 혼내주고 전장에서 전사했다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10. 육손은 팔진도에 갇혀 고생하였는가 ?

 

- 연의 84회에는 제갈량이 교묘히 팔진도를 설치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제갈량은 서천에 들어가면서 봉절의 어복포에 오군의 침공을 막기 위한

석진 (팔진도) 을 펼쳐놓았다. 언젠가 오의 대장이 이 곳에서 헤맬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유비가 이릉에서 대패하여 퇴각하자, 육손은 기문관까지 추격하였다.

살펴보니 전방의 장강 연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경솔하게 나아가지 않고,

서둘러 정찰병을 보냄과 동시에 군사를 후퇴시켜 적에게 대비시켰다.

이윽고 정찰병이 돌아와 보고하였다.

 

"전방에 촉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복포 일대에 돌산만 팔구십개 흩어져 있습니다 "

 

육손이 수십 기의 부하들을 끌고 전방에 위치한 산의 경사면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 팔방 돌산이 흩어져 있고 각 방위마다 입구가 있어 통행할수 있게 되어있다.

 

의문을 가진 육손이 몇 기를 이끌고 석진으로 들어가 보았다.

특별한 의문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한 부장이 날이 저문다는 것을 알렸다.

육손이 진을 나오려하자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고 모래와 돌이 천지를 뒤덮듯 날렸다.

괴석은 검처럼 우뚝 솟고, 모래나 흙이 산처럼 겹겹이 쌓이고, 성난 파도가 으르렁대며

천군만마와 같이 습격해왔다. 육손은 너무 놀라 비명만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이 때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이 나타나 길을 안내하여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육손은 그제서야 이것이 팔진도라는 것을 알고 황승언에게 예를 올린 뒤 물러났다.

 

육손은 정말로 제갈량의 팔진도로 곤경에 처했던 것인가 ?

정사의 <유비전> <유손전> 에 의하면 유비가 백제성으로 도망치자,

오군의 장수 서성, 반장, 송겸 등은 추격하여 유비를 생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육손은 이이, 유아의 소부대로 한동안 추격하게 하였을뿐,

대부대는 위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 재빨리 후퇴시켰다.

애초에 육손이 유비를 추격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제갈량의 팔진도에 혼나는 따위의

일은 있을 수 없었다.

 

11. 사마의는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칠 계략을 세웠는가 ?

 

- 연의 85회에 처음 등장하는 사마의는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칠 계략을 올린다.

조비는 유비가 죽고 유선이 뒤를 이었다는 소식을 듣고 춤을 추며 기뻐하였다.

여러 신하가 연달아 계략을 진언할 때, 사마의도 이 기회에 촉을 치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위의 군사력만으로 촉을 치면 즉각적인 승리를 거둘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은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치는 계략을 진언했다.

 

첫째, 선비족의 왕인 가비능에게 십만의 군사를 요청하여, 서평관을 공략하게 한다.

둘째, 만왕 맹획에게 십만의 군사를 요청하여, 익주.영창 등을 공략하게 한다.

셋째, 오의 손권에게 십만군사를 요청하여, 서천협을 공략하게 한다.

넷째, 항복한 장수 맹달에게 십만의 군사를 요청하여, 상용에서 한중으로 진격하게 한다.

다섯째, 대장 조진에게 십만의 군사를 맡겨, 양평관에서 서천을 공략하게 한다.

 

사마의는 이 다섯 방면의 협공이라면 제아무리 제갈량이 태공망 여상의 재주가 있다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촉의 멸망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후주 유선이 새파랗게 질렸음에도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던

제갈량은 이미 몰래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첫째, 마초에게 명해 서평관을 지키게하여 가비능을 막는다.

둘째, 위연에게 명하여 복병을 설치하여 맹획을 막는다.

셋째, 이엄의 자필을 가장한 서신을 보내 맹달의 마음을 부추긴다.

넷째, 조운에게 명해 양평관을 지키게하여 조진을 막는다.

다섯째, 등지를 사신으로 오에 보내 양국의 관계를 수복한다.

 

이러한 계획은 모두 그대로 시행되었고, 사마의의 계략 역시 조용히 깨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사마의는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칠 계획을 세웠는가?

삼국지 정사를 비롯 진서 등 사서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는 허구이다.

또 사마의의 계략이나 제갈량의 대책이라는 것 역시 진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첫째, 건흥 원년 (223년) 오와 위는 대치상태였다. 연합해 촉을 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둘째, 건흥 원년에 맹획은 익주군의 실력자 옹개의 부하에 지나지 않았다.

          위가 옹개에게 아무 인사도 없이 맹획에게 출병을 요청하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셋째, 정사를 보면 마초는 장무 2년 (222년) 에 죽었다.

           223년에 군사를 맡아 서평관을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넷째, 등지가 수교의 사신으로 오에 건너간 일은 사실이다.

           그는 오.촉 동맹을 재건한 공신의 한 사람이다.

           동맹 수복 후 오는 위와 관계를 단절했다.

 

결론적으로 사마의는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칠 계획을 세운 적도, 실행한 적도 없었다.

 

정사 삼국지로 바라본 삼국지연의의 허구 4

 

1. 맹획은 일곱 번 붙잡아 일곱 번 놓아준 이야기는 사실인가 ?

 

- 연의에서는 87회부터 90회까지 제갈량의 남만정벌에 대폭 지면을 할애하여 그리고 있다.

건안 3년 (225년) 당시 남중을 장악하고 있던 실력자 옹개가 촉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소수민족의 수령 맹획, 월준이왕 고정, 장가군승 주포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몸소 대군을 이끌고 남정에 나선 제갈량은 만왕 맹획에 대하여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전략을 폈다. 전후로 일곱 번에 걸쳐 맹획을 생포하고는 석방했다.

 

첫 번째, 출격한 왕평과 관색이 일부러 진 척하며 맹획에거 추격하게 하고,

조운과 위연 등에게 후방을 습격하게 하여 맹획을 생포했다.

 

두 번째, 제갈량의 은혜를 입어 석방된 맹획의 부장 동도나가 싸우지도 않고

후퇴하였다는 이유로 맹획에게 채찍질을 당한 것을 이용하였다.

동도나는 각 부족의 추장들과 함께 맹획을 붙들어 제갈량에게 넘겼다.

 

세 번째, 맹획이 동생인 맹우를 거짓 항복시켜 안팎으로 호응하여 촉군을 공격하려

했지만, 제갈량은 맹우를 취해 뻗게 하고 맹획이 공격해 오는 것을 기다려 대패시켰다.

맹획은 단기로 도망쳤지만, 만병으로 변장한 마대에게 붙잡혔다.

 

네 번째, 제갈량이 후퇴하는 척하자 맹획이 추격하였다. 이 때 조운에게 명해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대패환 맹획은 십여 기를 끌고 도망치다가 제갈량과 맞닥뜨리자

무턱대고 덤볐다. 그러나 결국 함정에 빠져 붙잡혔다.

 

다섯 번째, 계속 촉군에게 대항하는 맹획에 반감을 가진 은야동주 양봉이

다섯 명의 아들과 함께 삼만 군사를 이끌고 맹획을 도와준다며 갔다.

환영하는 연회가 벌어지자 양봉은 다섯 아들에게 명하여 맹획을 사로잡아서

제갈량에게 인도하였다.

 

여섯 번째, 맹획이 목록대왕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제갈량이 나무로 만든 화려하고

현란한 색채의 큰 짐승으로 진짜 맹수를 쫓아 보내서 적을 크게 이겼다. 그 후에 맹획의

처남 대래동주가 맹획을 꽁꽁 묶고 나타나 거짓 항복하여 제갈량을 찔러 죽이려고 하지만,

제갈량에게 들켜 전원 생포되었다.

 

일곱 번째, 제갈량이 올돌골이 이끄는 등갑병에게 화공을 퍼붓고, 맹획을 기다렸다가

공격해 패주시킨다. 맹획은 단기로 포위를 뚫고 도망쳤지만 다시 마대에게 붙잡혔다.

맹획은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어서 마음으로 복종마혀 이렇게 말했다.

" 승상 전하는 하늘의 위엄을 받으신 분입니다.

남만에 사는 것들은 두 번 다시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러면 역사상 정말로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 ?

예부터 지금까지 긍정론자와 부정론자로 나뉘어 있다.

 

긍정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예시를 근거로 사실임을 주장한다.

 

첫째, 배송지의 주에서 인용한 ' 한진춘추 ' 에 다음의 글이 씌여 있다.

" 제갈량이 일곱 번 사로잡아 일곱 번 풀어주려 하자, 맹획은 깊이 심복하여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 승상 전하는 하늘의 위엄을 받는 분이십니다. 남만에 사는 것들은

두 번 다시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 라고 하였다 "

 

둘째, ' 화양국지 ' 에도 이렇게 씌여있다.

" 남정에 나선 제갈량이 맹획을 생포하여 ...... 일곱 번 사로잡아 일곱 번 풀어주었더니,

맹획은 완전히 심복하여 ' 승상 전하는 하늘의 위엄을 받는 분이십니다.

변경의 백성은 두 번 다시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 라 하였다 "

 

셋째, ' 삼국지집해 ' 에는 장약기의 ' 전운기략 ' 을 인용하여,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은

각각의 장소를 고증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길르 바탕으로 나관중의 연의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한 까닭에, 사람들은

모두 이 이야기를 진실로 믿게 되었다. 이 이야기와 관련된 전설, 고사는 지금도

서남 소수민족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

 

한편 부정론자들은 다음을 근거로 이 이야기는 믿을수 없다고 말한다.

 

첫째, 진수의 정사는 삼국지의 역사를 기록한 가장 권위있는 사서이며,

거기에는 칠금칠종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뿐더러 맹획이란 인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둘째, 청대의 ' 통감집람 ' 은 이렇게 보고 있다.

' 칠금칠종은 이야기로서는 재미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갈량의 남정은 원래부터

만이를 심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번 사로잡고 여러 번 풀어주었다는 것은

마치 아동극과 비슷하다. 더구나 당시 제갈량이 가장 서두르던 것은 북쪽의 위를 치는

일이었다. 누차 풀어 주었다가 다시 사로잡을 정도로 시간을 헛되이 보낼 여유는 없었다. 

정세는 절박하여 서둘러 군을 되돌려 북벌에 나서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런 일에

얽매여있을 여유는 없었다. '

 

셋째, 정사의 <장의전> 에 의하면, 남정 후의 남중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남이가 다시 한 번 배반하고 수장을 살해했다고 쓰여있다. 때문에 제갈량의 '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 ' 이라는 전략이나 칠금칠종의 이야기는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견해는 제갈량이 맹획을 심복시켰다거나 붙잡아서 죽이지 않고 놓아주었다는

이야기는 있을수 있어도, 일곱 번 사로잡아 일곱 번 풀어주었다는 것은 신빙성이 크게

떨어진다. 당시의 급한 일은 북벌이었고, 아무리 한정된 시간일지라도 이렇게 시간을

끄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현재는 제갈량이 맹획을 사로잡아 다시 놓아주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풀어주었다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이 심하다는 것이 다수의 견해다.

 

2. 관색은 실존인물인가 ?

 

- 결론적으로 나관중의 연의에서 등장한 화관색은 완전한 가공의 인물이다.

 

연의 87회에 처음 등장한 관색은 관우의 셋째 아들로 형주 함락 후, 포가장에 숨어 있다

병을 치료하고 서천으로 들어가던 도중 제갈량의 남정군을 만나 특별히 접견을 청하였다.

관색의 이야기를 들은 제갈량은 감탄해 마지 않으며 바로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그를 전부선봉에 임명하여 함께 남정길에 올랐다. 이후 남중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관색은 눈부신 전공을 올렸다.

 

그러나 ' 삼국지 ' ' 후한서 ' ' 화양국지 ' 등 그 어느 사서에도 화관색 또는 관색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당대와 송대부터 이미 관색과 관련된

설화나 민간전설이 떠돌고 있었고 사당등도 세워졌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민간전설

차원에서 내려온 것일뿐이며 연의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관색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실제 역사속 관색이라는 인물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허구의 인물에 불과한 것이다.

 

3. 옹개와 주포는 제갈량의 반간계에 죽었는가 ?

 

- 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지략에 의해, 남정에서 반란을 일으킨 옹개와 주포, 고정 가운데

옹개와 주포가 고정에게 죽임을 당하고 고정은 제갈량에 투항한 후,

익주태수에 임명되어 삼군을 다스렸으며 부장 악환은 아장에 임명되었다.

 

실제는 어떠했을까 ?

 

사서에는 남중의 호족 옹개와 주포의 죽음에 관한 확실한 기록이 있다.

촉서 <여개전> 에 의하면 옹개는 유비가 영안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권에게

투항하였다. 손권은 그를 영창태수에 임명했다. 그러나 옹개는 제갈량이 남만 땅에

이르렀을 때 고정의 친위병에게 살해되었다.

 

주포의 죽음 역시 <마충전> 과 ' 화양국지 ' <남중지> 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마충이 장가군을 격파한 후에 죽었다고 확실히 쓰여있다.

 

결국 옹개가 죽은 것은 제갈량의 남정 중에 일어난 일이고,

주포의 죽음 역시 촉장 마충이 장가를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제갈량이 반간계를 쓴 일은 전혀 없으며, 그 경위도 연의에서와는 전혀 다르다.

 

고정 역시 사서에서는 옹개와의 내분을 통해 옹개를 죽인 후, 얼마 뒤 촉군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 반간계의 도구가 된 적도 없고, 익주태수가 된 행운도 없었다.

 

4. 제갈량은 왜 자오곡의 계책을 사용하지 않았는가 ?

 

- 연의 92회에서 북벌에 나선 제갈량에게 위주 조예의 부마 하후무가 관중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대항하려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위연은 이 말을 듣고 제갈량의 진영을 방문하여

대책을 바쳤다.

 

" 하후무는 계략도 패기도 없습니다. 저에게 정예병 오천을 주십시오.

포중에서 진령을 따라 동으로 올라가 자오곡에서 북으로 쳐들어가면 열흘 안에 장안을

습격할 수 있습니다. 하후무는 제가 군사를 이끌고 갑자기 나타났다는 말을 들으면,

성을 버리고 저각 횡문으로 도망칠 것입니다. 이 때 제가 동쪽에서 공격하고 승상 전하께서

대군을 이끌고 야곡에서 진격한다면, 함양의 서쪽지역을 일거에 평정할 것입니다. "

 

제갈량이 웃으며 말했다.

 

" 그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귀공은 중원에 인재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

만약 진언하는 사람이 있어 산간 지역을 막는다면, 오천의 정예병을 잃을 뿐더러

우리 군의 사기마저 꺽이게 된다. 이 계책은 절대로 쓸 수 없다. "

 

" 승상 전하께서 큰 길을 따라 진격하시면, 적은 관중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큰 길에서

막아설 것입니다. 그러면 쌍방 모두 서로 물러서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서로 대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중원평정은 언젠가 될지 모릅니다. " 

 

" 내가 먼저 농우를 뺏고, 병법에 따라 평평한 길로 군사를 몰아간다면 승리를 거두지

않을 리가 없다 "

 

결국 이러한 이유로 위연의 계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위연의 계책은 ' 자오곡의 계책 ' 으로 알려져 있다. 나관중은 연의에서 이 장면을

다소 과장하였지만,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자오곡의 계책이 어떠한 효과를 가져왔을지는 실제 시행되지 않았기에 알 수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한 후세인의 평론과 분석은 제갈량이 끝내 북벌에 성공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는 마음과 위연의 계책이 어쩌면 성공했을지 모른다는 요행심리가 깔려있다.

 

삼국지 정사의 저자 진수를 비롯 ' 제갈충무후평전 ' 의 저자 왕치진 등도

제갈량이 모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며 그를 비꼬는 사람들이 있기도하다.

그렇다면 과연 위연의 계책을 물리친 것은 제갈량이 겁쟁이여서일까 ?

 

사실 제갈량이 이 계책을 쓰지 않은데는 이유가 없던 것이 아니다.

당시 제갈량의 말을 빌리자면, 이 계책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보다 전에 맹달이 경솔하여 사마의에게 생포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여파로 제갈량이 위 내부에서 반역을 일으키게 하려던 공작이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위연의 계략은 상대를 업신여기는 것이었다.

만약 하후무가 관문을 닫아건 채 싸우려 하지 않고,

촉군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작전으로 나왔다면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

 

후세인들 가운데 제갈량 이 계책을 쓰지 않은데 비난하는 이가 많은 것도 이유가 있다.

군사가 반드시 백 퍼센트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실행하는 것은 아니다.

육십 퍼센트의 희망한 있어도 해볼 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평생 신중히 생각하고 작전을 실행한 제갈량에 있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촉은 소국이고 병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큰 손실을 견딜 수 없었다.

신중하지 않을 수 없는 제갈량으로서는 전망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병사들을 헛되이

희생할 수 없었다. 병사를 아끼고 전쟁을 신중히 한 것은 정치가이자 군사가로서

제갈량의 귀중한 자질이었다. 제갈량이 위연의 자오곡계책을 쓰지 않은 것은

겁쟁이여서가 아닌 바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제갈량의 행동에 관한 합리성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촉은 소국이었고 병력은 부족해 위와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되도록 피해야했다.

서로 양보하지 않고 장기간 대치하는 것은 병력이 많고 물자가 풍부한 상태에서 가능했고

이러한 점은 촉한에 절대 불리한 것이었다.

 

따라서 촉한이 북벌에 성공하여 한실을 부흥시키고자 했다면,

전쟁에서 속고 속이는 것을 사양하지 말고 기병기모를 많이 써야만 했다.

 

5. 강유는 어떠한 경위로 촉을 따르게 되었는가 ?

 

- 연의 93회에서 강유는 북벌에 나선 촉군의 조운부대를 격퇴하고, 제갈량을 야습하는 등

  크게 활약했지만 결국 그의 어머니를 이용한 제갈량의 계책에 당해 촉에 투항하게 되고,

  훗날 제갈량의 후계자로 촉한이 멸망하는 그 날까지 북벌에 매진한다.

 

그렇다면 실제 강유가 투항한 경위는 무엇이었을까 ?

 

정사 <강유전> 과 ' 위략 ' 등의 기술에 의하면 건흥 6년 (228년) 제갈량의 북벌군이

기산으로 진격하였다. 천수군 태수 마준은 촉군이 오자 여러 현이 촉군에 호응했다는

소식을 듣고, 휘하의 강유 등을 의심하여 상영으로 도망쳤다.

 

강유 일행은 이유도 모른 채 상영까지 쫓아갔지만, 어찌된 일인지 익현에서도

강유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행은 어쩔수 없이 제갈량에게 투항하였다.

 

그러므로 강유 등이 의심을 받은 것은 제갈량의 계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궁지에 몰려 어쩔수 없이 투항한 것 뿐이었다.

 

나관중은 이 역사적 사실을 각색해 제갈량의 인재를 아끼고 후계자를 찾는

전략적 착안을 칭송함과 동시에 강유의 비범한 재주를 돋보이게 한 것이다.

 

6. 왕랑이 진영 앞에서 제갈량의 호통을 듣고 죽은 것은 사실인가 ?

 

- 연의 93회에서 제갈량의 첫 북벌 당시 기산에서 위와 촉이 대치하는 모습이 나온다.

위의 지휘관은 대도독 조진이었고 사도 왕랑이 군사로 보좌했다.

군사회의 석상에서 왕랑은 자기가 단 한마디로 제갈량을 투항시켜보겠다 큰소리 쳤다.

 

양군의 대치 도중 왕랑은 이렇게 소리쳤다.

" 하늘이 정한 운수는 변하게 마련이다. 지금은 위가 정통이니 무장을 풀고 예를 갖추어

투항하여라. "

 

제갈량이 이를 듣고 껄껄 웃으며 대답하였다.

" 너희는 한실을 배반하고 역적의 짐을 짊어진 놈들이다. 그 죄는 무겁다 아니할 수 없으니,  저승에서 무슨 면목으로 한실의 스물네분 황제를 뵈려 하느냐 ? "

 

왕랑은 그 순간, 분노와 수치로 가슴이 막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바보스럽기까지 한 이 일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 ?

 

정사의 <왕랑전> 을 보면 왕랑은 위 명제 태화 2년 (228년) 낙양에서 병사했다.

그는 한 번도 조진의 군사에 임명된 적이 없으며, 더욱이 방위군에 종군하여

제갈량과 싸운 적은 없다. 제갈량의 호통에 분노하여 죽는 일은 애시당초 있을 수 없었다.

 

한편 유선 즉위 초기 당시, 유선이 어렸기에 실제 촉의 대소사는 제갈량이 결재하였다.

이 때 촉은 내정과 외교에 다소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였는데 이 때를 틈 타 위의 대신들,

사도 화흠과 사공 왕랑, 상서령 진군, 태사령 허지, 알자복야 제갈장 등이 앞다투어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냈다. 시대의 추세를 알고 천명과 인심에 따라서

거국적으로 위에 항복하도록 권유하는 문서들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유인에 넘어가지 않고 경전 등을 인용하여 역사적 사례를 열거하며

정의편을 써서 반론을 가함과 동시에, 투항할 마음이 전혀 없고 약으로 강을 제압하여

천하를 통일할 결의와 자신감을 나타내었다.

 

결국 나관중은 왕랑이 228년에 죽었다는 사실과 제갈량이 투항권유를 받았다는 사실을

결합시켜 제갈량이 왕랑을 호통쳐 죽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정사 삼국지로 바라본 삼국지연의의 허구 5

 

1. 가정전투 위군의 총지휘관은 누구였는가 ?

 

- 연의 95회와 96회에 이 전투가 일부 그려져있다.

사마의가 맹달을 죽이자 명제는 그를 도독으로 삼고, 장합을 선봉에 임명하여 가정으로

출병하도록 명했다. 한편 제갈량은 참군 마속을 주장으로 삼고 왕평을 부장으로 삼아,

이만 오천의 군사를 이끌고 가정을 지키게 하였다.

 

사마의는 가정에 도착하여, 장합에게 명해 왕평의 군사를 막게하고,

대군으로 산을 포위하여 샘물을 막았다. 물을 마실 수 없게 된 마속의 병사들 중에

산을 내려와 투항하는 자가 속출했다. 이때 사마의가 산에 불을 질렀다.

마속은 도리 없이 패잔병을 이끌고 산을 내려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왕평의 병력은 많지 않았기에 구원할 수 없었다. 결국 가정은 위에 점령되었다.

 

연의에서 그려진 내용처럼 가정 전투의 총수가 사마의라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는가 ?

 

그렇지 않다.

정사의 <마속전> <제갈량전> <장합전> 을 보면, 위군의 총사령관은 사마의가 아닌

장합이다. <마속전> 에 ' 위장 장합과 가정에서 싸우다 ' 라는 기록이 있고,

<제갈량전> 에는 ' 위의 명제가 서쪽으로 장안을 진압하고, 장합에게 명해 제갈량을 막게

하였다. 제갈량은 마속에게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가정에서 장합과 싸우게 하였다 ' 라고

쓰여있다.

 

이 전투를 기록한 관련 역사 자료에는 사마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사마의는 맹달을 쳐부순 다음에 어디로 갔는가 ?

진서 <선제기>  를 보면 사마의는 완성에서 배도겸행하여 신성으로 가 맹달을 멸망시킨 후에 완성으로 돌아갔다. 그는 촉군과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아마 나관중은 장합에게 제갈량을 격퇴하는 역활을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제갈량의 이미지가 손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군의 총수역활을 사마의에게 주고,

장합을 선봉으로 격하했을 것이다. 그 목적은 물론 제갈량의 호적수를 격상시키는 것이다.

 

2. 사마의는 제갈량의 공성지계에 당했는가 ?

 

- 연의 95회를 보면 가정에서 패퇴한 제갈량이 대군을 이끌고 퇴각하는 한편,

스스로 오천의 군사를 이끌고 서성으로 가서 식량 운반에 힘쓰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돌연 사마의의 십오만 대군이 서성으로 몰려온다는 비보를 접하게된다.

 

마침 제갈량 주변에는 문관뿐이고 대장은 한 명도 없었다.

인솔해온 병사 오천명 가운데 절반은 식량을 운반하러 떠났고, 성내의 주둔병력은

이천 오백명 뿐이었다.  제갈량은 군기와 군고를 치우게 하고, 성문을 열어두게 하고,

각 성문에 이백팔 명의 병사를 남기되 평민의 옷차림을 하게하고, 길을 깨끗이 하라고

명했다. 제갈량 자신은 도포를 걸치고 두건을 쓰더니 망루의 난간 앞에 편안히 앉아

향을 피우고,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옆에는  두 명의 동자가 각각 보검과 불진을 들고

서 있었다.

 

성 밑에 물밀듯 밀려든 위군은 이 모습을 보고 아무도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 제갈량은 평소 신중하여 모험을 한 적이 없없다. 아마 복명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

사마의는 이렇게 말하고 바로 군사를 후퇴시켰다. 이렇게 해서 제갈량은 간신히 난을

모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연의가 그리는 공성지계에 대해 삼국 시대에 관련된 수많은 사서들은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마의가 제갈량의 공성지계에 빠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삼국시대에 공성지계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배송지 주의 <조운별전> 과 정사 <문빙전>  의 배송지 주에는 촉의 조운과 위의 문빙이

공성지계를 사용하여 각각 조조군과 손권군을 물리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나관중은 조운과 문빙의 공성지계를 자료로 제갈량의 공성지계를 창작하여,

감쪽같이 사마의가 당한 것처럼 만들었다. 그리하여 제갈량의 큰 지혜와 용기를 그리고,

사마의의 신중하지만 소심한 모습과 대비시킨 것이다.

 

3. 조운의 이미지는 관우, 장비를 넘어서고 있는가 ?

 

- 연의에서 조운의 이미지는 때로 관우와 장비마저 넘어서고 있다.

이것은 작가 나관중이 연의에서 조운의 이미지 만들기에 크게 성공했기 때문이다.

연의에 등장하는 조운은 실제 역사상의 조운과 많이 다른 모습으로 비친다.

 

7회에서 97회까지 총 91회에 걸쳐, 나관중은 사실에 근거한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픽션의 세계를 펼쳐, 조운을 발군의 호장군으로 만들고 있다.

 

7회에 등장하자마자 그는 용맹한 문추와 대여섯 차례나 겨루어 무승부를 거둔다.

이 당시의 조운은 아직 연소한 장군에 지나지 않았다. 이리하여 조운의 데뷔 무대는

훌륭한 솜씨를 피력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공손찬과 원소에게 투신하지만 뜻에 맞지 않아 각지를 헤맨 끝에

결국 유비군에 가담하게 된다. 여기서 겨우 소원을 이루어,

일신을 바쳐 유비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그의 미덕은 유비 휘하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홀로 어린 주인을 구하다), 명예와 이익에 동요되지 않고

(가정에서 상을 거부하고 계양에서 형후와의 결혼을 거부한다), 깊은 충의에 간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에 납치된 아두를 장강에서 다시 빼앗고, 유비에게 간언하여

공신에게 성도의 백성이 소유한 전답과 집을 주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조운이 병사했다는 소식이 제갈량과 후주에게 도달했을 때,

두 사람 모두 나라의 동량을 잃었다고 탄식한 것도 본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실제 역사상 조운은 한말에 활약한 용장들 중에 특히 두드러진 편은 아니었다.

무용에 있어서 유비도 ' 일신에 담력이 가득찼다 ' 고 평하였고 조운 스스로도 호위장군을

자청했지만, 무예와 명성 면에서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 등에 미치지 못하였고

공적 면에서도 위 네 명이나 위연 등을 따르지 못했다.

 

유비는 조운을 그다지 중용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부하로 두고는 있었지만,

단독으로 일을 맡긴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공적도 눈에 띄지 않는다.

 

경요 3년 (260년) 에 후주 유선은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에게 후의 작위를 수여하였지만, 조운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다음 해에 강유 등이 불공평하다고 진언하자, 유선은 겨우 순평후에 봉했다. 정사에서 조운에 대한 기술은 채 삼백 자가 되지 않는다.

 

물론 역사상의 조운은 확실히 빛나는 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책략에 뛰어났던 것, 뛰어난 판단력과 견식을 가지고 있어던 것,

충의로써 간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외곬으로 아첨하지 않았던 것, 공평무사로

겸허했던 것등이다.

 

물론 이에 반박하는 의견도 있지만 무엇보다 조운의 이미지가 실제 역사 속의 활약이나

평가보다 좋은 것은 리얼리티와 오리지날리티가 일치된 선명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며 독자의 미의식이 변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적 충의관에 사로잡혀있던 명.청대의 독자들에게 가장 멋진 인물은 관우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경제적 기반이나 정치 제도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과

미의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용맹하고 지혜로운 조운의 미덕이 점점 오늘 날의

독자에게 이해와 칭찬을 얻은 것이다.

 

4. 제갈량은 진창을 습격하였는가 ?

 

- 연의 98회에서 위장 학소가 중병에 걸린 것을 안 제갈량은 위연과 강유에게 삼일 내에

진창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라 명함과 동시에 관흥, 장포에게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없이 행군케하여 진창을 급슥하도록 한다. 

 

학소는 즉시 방비를 서둘렀지만 촉의 첩자가 성내에 잠입해 불을 질렀기 때문에

성내는 대혼란에 빠졌고, 학소는 그 충격으로 급사했다.

위연, 강유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진창은 촉군의 수중에 있었다.

 

역사상 제갈량이 제2차 북벌에서 진창을 포위하고 전투를 치른 것은 확실하다.

다만 연의에서 묘사된 결과와는 전혀 다르다. 정사의 <제갈량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지만, 조진이 이것을 막아냈다. 량은 군량미가 다하여 돌아갔다. '

 

제갈량은 진창을 공격했지만, 위의 조진이 사전에 학소를 수장으로 보냈기 때문에,

몇 번의 공격에도 함락시키지 못한 채, 군량미가  바닥나고 위의 원군이 들이닥쳐

어쩔수 없이 한중으로 후퇴했다.

 

명제는 학소가 진창을 사수한 것을 칭송하며 열후의 작위를 주었다.

학소는 병사했지만 그것은 진창전투 이후의 일이다.

 

요컨데 역사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나관중의 픽션이다.

이것은 물론 제갈량의 비범한 군재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의 하나였다.

 

5. 조진은 제갈량의 편지를 보고 분사하였는가 ?

 

- 연의 100회에는 위의 대도독 조진의 죽음이 나온다.

제4차 북벌에서 제갈량은 위군도독 조진의 진영을 공격하였다. 촉군의 공격은 없다며,

사마의와 내기를 하였던 조진은 그 때문에 너무 창피한 나머지, 병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즉시 제갈량은 편지를 써서 투항한 위군의 병사를 통해 조진에게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조진을 배우지 못한 후배라 칭하며, ' 무슨 낯으로 고향의 부로를 대하며,

무슨 뱃심으로 고향집의 대청에 오르랴 ' 라고 하는 모진 야유가 적혀 있었다.   

조진은 이것을 읽자마자 분함으로 가슴이 막혀 그날 밤 진중에서 죽었다.

 

실제 역사는 어떠했을까 ?

230년 7월, 위군은 대사마 조진의 주장에 의해 사차 북벌을 준비하던 제갈량의 촉군에

대항하고자 세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사마의, 조진 등의 통솔 하에 한중으로 몰려갔다.

조진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북쪽의 자오곡으로부터 한중으로 쳐들어간다는 작전이었다.

 

조진은 8월에 장안을 출발해서 자오곡에 들어갔다. 그런에 이 곳에서 한 달이 퍼붓는

폭우를 만난다. 한 달이 넘도록 계곡에서 나오지 못했다. 게다가 다리가 끊기는 바람에

더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더구나 제갈량은 삼엄한 경계태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마침 명제가 화흠 등의 진언을 받아들여 조진에게 후퇴를 명했기에, 어찌되었든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갈수 있었다.

 

다음 해, 즉 건흥 9년 (231년) 2월에 제갈량은 다시 한 번 기산으로 출격하였다.

제4차 북벌이 시작된 것이다.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였을 때, 명제는 대사마 조진의

병이 중하다는 것을 알고 대장군 사마의를 형주에서 장안으로 불렀다.

그리고 장합, 비요, 곽희 등의 장수를 이끌고 제갈량에게 대항하도록 명령했다.

그 후 머지않아 제갈량은 기산공격에 성공하였고, 조진은 낙양에서 병사했다.

 

결국 조진의 사망은 제갈량의 제4차 북벌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며,

더욱이 제갈량이 진영을 습격하고 서신을 보내 분사시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진은 확실히 촉을 공격했지만, 이것은 제4차 북벌 이전이었고 그나마 비로 퇴각했기에

제갈량과 싸운 적은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상의 조진은 낙양에서 병사한 것이다. 연의에서 제갈량의 조진을 분사시켰다는

부분은 나관중이 제갈량을 우상화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6. 장합은 제갈량의 계략에 빠져 죽은 것인가 ?

 

- 연의 101회에는 위의 대장 장합의 죽음이 그려져있다.

건흥 9년 (231년) 봄에 제갈량은 제4차 북벌에 나서 사마의를 연달아 격파하였다.

하지만 군량미를 조달할 수 없었기에 도호 이엄은 제갈량에게

급히 오가 촉을 공격하려 한다는 거짓 보고를 하였다.

 

제갈량은 양의, 마충에게 사수 일만을 이끌고 검각의 목문도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자신은 대군을 지휘하여 차례로 후퇴시키며 위연과 관흥에게 후방을 맡겼다.

위의 선봉 장합은 사마의의 충고를 듣지 않고 추격에 나섰다.

위연과 관흥이 연달아 나타나서 장합의 앞길을 막았지만 짐짓 당할수 없다는듯

연달아 후퇴하였다. 방심한 장합은 그대로 목문도 입구까지 추격하였다.

 

위연이 되돌아와 다시 공격하고 후퇴하는척 하자, 장합은 기세등등하여 말을 달려

목문도의 중간까지 추격하였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돌연 포성이 울리며 촉군이

나타나 나무와 바위로 퇴로를 막았다.

양쪽에서 비오듯 화살이 날아와 장합과 백여 기의 부하들은 모두 사살되었다.

 

정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건흥 9년 3월에 제갈량은 다시 한 번 기산에 출병하였고, 위는 사마의와 장합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대항하게 하였다. 제갈량은 기산을 공략한 후에 왕평에게 수비를 맡기고,

몸소 주력부대를 이끌어 연달아 위군을 격파했다.

 

사마의는 더이상 싸워봤자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고,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수비를 강화했다. 그러나 부하에게 ' 촉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한다 ' 는 조소를 당하고 공세에 나섰지만

대패하고 말았다. 마침 그 때 촉군의 군량미조달에 문제가 생겼고, 더구나 수송을 담당한

이엄이 제갈량을 교묘히 속여 군사를 후퇴시켰다.

 

위군에서는 장합이 뒤를 쫓았다. 그러나 청봉까지 쫓아와 제갈량과 일전을 벌이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군량미가 떨어져 후퇴하게 되어 촉군은 또 한 번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 때문에 나중에 제갈량은 이엄의 관직을 박탈하고 서민으로 강등했다.

 

실제의 역사에서 장합은 제갈량의 계략에 의해 의해 사살된 것은 아니었으며,

장합이 제갈량을 추격한 것은 사마의가 명했기 때문이었다.

장합이 사마의의 충고를 무시하고 추격하다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장합은 ' 성을 포위하면 반드시 한쪽을 열어라. 도망치는 적은 쫓지말라 ' 는

병법을 준수하여 사마의에게 추격을 그만둘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장합의

의견을 무시하고 추격하게 하여 결국 그의 목숨을 빼앗은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7. 제갈량은 목우류마의 계략으로 군량미를 빼앗았는가 ?

 

- 연의 102회에 목우류마 이야기가 등장한다.

북벌을 추진하던 제갈량은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인을 시켜 몰래 목우류마를

제작하게 하였다. 목우류마가 완성되자 고상에게 명하여, 천 명의 병사에게 이것으로

검각에서 기산의 본영까지 군량미를 운반하게 하였다.

 

이것을 안 사마의는 장호와 악침에게 명해 목우류마  몇 두를 빼앗게 하고,

숙력된 장인을 불러 이것과 비슷하게 삼천 두를 만들게했다. 이어 목우류마를 이용하여

잠위 등에게 끊임 없이 농서의 군량미를 운송시켰다. 제갈량은 이에 목우류마 탈취계획을

세운다. 왕평에게 위군으로 가장한 병사 천 명을 주어, 잠위의 수송부대를 급습한 뒤

목우류마의 혀를 모두 비틀어버렸다.

 

곽희가 이끄는 대군이 다시 탈환했지만 아무리 해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 때 위연과 강유가 습격하여 곽희의 군사를 패퇴시켰다.

왕평은 군사에게 명하여 목우류마의 혀를 원래대로 돌려놓았고 당당히 가지고 돌아갔다.

 

곽희군이 추격했지만 제갈량이 배치한 장의군의 귀면수신 오백 신병에게 막혀 도주했다.

군량미를 탈취당하고 곽희군마저 대패했다는 소식에 사마의가 직접 구원에 나섰지만,

그 역시 요화에 쫓겨 숲속을 빙빙 돌며 도망친 끝에 투구를 떨어뜨리고 간신히 목숨만

살려 도망치고 말았다.

 

정사의 <제갈량전> 을 보면 건흥 9년과 11년에 북벌에서 촉군은 식량 문제의 해결책으로

목우류마를 만들어 전선으로 군량미를 보내고 있다. 확실히 제갈량은 목우류마로 군량미

를 수송하였다. 하지만 위와 촉의 전쟁사료를 아무리 조사해 보아도,

제갈량이 목우류마의 계략으로 사마의군의 군량미를 빼앗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8. 사마의는 상방곡에서 제갈량에게 화공을 당했는가 ?

 

- 연의 103회 마지막 북벌에서 제갈량은 사마의와 대결하였다.

사마의는 패배를 하자 수비를 견고히하며 나오지 않았다. 제갈량은 마대에게 명하여

상방곡 (호로곡) 에 깊은 도랑을 파고, 불타기 쉬운 마른 장작을 쌓고, 주위의 산에는

띠집을 짓고 지뢰를 묻게 하였다. 그리고 고상에게 명하여, 목우류마를 급히 몰게 하여

군량미를 수송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한편 사마의는 부하에게 명하여 목우류마를 약탈하고, 수송대 병사 수십 명을 붙잡아

문초하였다. 그리하여 제갈량이 상방곡에 군량미를 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몸소 두 아들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상방곡을 습격하여 저그이 군량미를 태워

크나큰 타격을 입히고자 하였다.

 

제갈량은 위연으로 하여금 사마의를 유인하게 하였다.

사마의가 두 아들과 상방곡에 들어오자마자 정상에서 횃불을 던지고, 계곡의 입구를 막고,

불화살을 쏘아대고, 지뢰를 폭파시켰기 때문에 온 계곡이 순식간에 불구덩이에 휩싸여

하늘을 불태울듯 했다. 사마의는 말에서 내려 두 아들을 껴안고 울며 외쳤다.

그러자 갑자기 강풍이 불며 분지를 뒤엎는듯한 큰 비가 내려 맹렬히 타오르던 불이 꺼져버렸다. 사마의는 그 기회에 군사를 지휘하여 도망쳤다.

 

마침 장호, 악침의 부대가 구원을 왔고 마대의 군사가 열세였던 탓에

사마의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연의에서 이 이야기는 아주 자세히 그려져있고, 만일 천우신조가 없었다면

제갈량의 최대 라이벌 사마의는 두 아들과 함께 상방곡에서 그 생을 마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다.

 

정사 <제갈량전> 이나 관련 자료를 보면, 건흥 12년 (234년) 2월에 제갈량은 3년 가까운

준비를 마치고 십만 대군을 이끌어 야곡에서 출격하여 마지막 북벌을 개시하였다.

북벌군은 무공을 점거하고, 위수 남안의 오장원에 본영을 두었다.

 

위의 사마의도 대군을 이끌고 강을 등진 채 진지를 구축하여 위수의 남쪽에서 대치했다.

사마의는 촉군이 원정으로 지쳤고, 군량미 수송에 고심하고 있다는 두 가지 약점을 포착하여 지구전으로 나아갔다.

 

제갈량은 단기전이 주목적이었지만, 전투가 지구전이 될 것이라 내다보고 각 지역에서

병사들에게 농사를 짓게하여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양군의 대치는 백 여일이나 계속되었지만 제갈량은 시종 사마의와 싸울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머지않아 제갈량은 진중에서 맥없이 죽어버렸다.

 

역사적으로 사마의는 마지막 북벌에서 그 때까지의 교훈을 살려 제갈량과 직접 싸우지

않고 수비에만 치중했다. 제갈량이 병사할 때까지 전투가 없었기에 이 시기에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화공을 가했다는 것은 애시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사마의는 제갈량과의 지구전을 계획하였기에 두 아들을 신변에 두었을리 없었다.

사서 역시 사마의의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가 이 전투에 참가했다는 기록은 없다.

 

현재 섬서성 오장원 북쪽에 위치한 고당진에는 확실히 입구가 좁고 내부가 넓은

호로곡이라는 표주박형의 계곡이 존재한다. 그러나 후한과 삼국시대에는 이 곳에

상방곡이라는 지명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상방곡에서 사마의가 포위되었다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는 제갈량을 우상화하기 위한 픽션에 불과한 것이다.

 

정사 삼국지로 바라본 삼국지연의의 허구 6

 

1.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 것은 사실인가 ?

 

- 연의 104회에서 제갈량은 한중의 오장원에서 죽기 전에, 후퇴하는 일을 교묘히 준비했다.

그의 사후 촉군의 후퇴를 알아챈 위군 도독 사마의는 두 아들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오장원으로 쳐들어갔다. 사마의는 스스로 선두에 서서 산기슭까지 쫓아갔다.

 

촉군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좋아서 추격했다. 그러자 즉시 산 그늘에서 포성이 울려

퍼지며 흔들리는 중군의 큰 깃발에는 ' 한승상무향후제갈량 ' 이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사마의는 갑자기 얼굴색이 변해 적을 바라보았다. 중군에 속한 수십 명의 대장이 한 대의

사륜거를 둘러싸고 나타났다. 수레에 단정히 앉아 있는, 윤건을 쓰고 우선을 들고 학창흑대의 복장을 한 제갈량이었다.

 

사마의는 놀라며 외쳤다.

" 제갈량이 아직 살아있었던가 ? 계략에 빠졌구나 ! "

그는 서둘러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위군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마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앞다투어 도망쳤다. 도망치다 서로 부딪혀 죽는 사람도 많았다.

 

이틀 후에야 그 지방 사람으로부터 수레에 있던 제갈량이 사실은 나무상이었음을

전해들은 사마의. 그는 한탄하며 말했다.

"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계략을 걸 수 있겠지만, 죽은 사람이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

 

이러한 이유로 촉에서는 '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다 ' 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이것은 역사적 사실인가 ?

 

정사의 기술에 따르면 제갈량의 사후, 대장 강유와 양의는 고인의 분부대로 죽음을 숨겨

상을 공표하지 않고, 전군을 침착하게 후퇴시켰다. 사마의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자,

양의는 군사를 되돌려 위군에 공격을 가하며 반격하는척 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의

함정에 걸릴 것을 두려워하며 그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촉군은 침착하게

후퇴하여, 야곡에 들어간 후 비로소 죽음을 공표하고 발상하였다.

 

배송지 주에는 사마의가 제갈량의 사후 촉군이 후퇴했다는 소식을 그 지방 사람에게서

입수했다는 기록도 나타나있다. 결국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제갈량이 죽어 촉군이 후퇴할 때 사마의는 추격했다.

그리고 도중에 군사를 수습하여 물러났지만, 그것은 사마의가 행군에 있어

세심하고 신중했기 때문이며, 나무로 깍은 제갈량의 상에 놀란 일은 전혀 없었다.

 

둘째, 연의에서 사소한 역사적 사실을 과장되게 부풀려 이야기한 것은

제갈량을 우상화하고, 사마의를 악역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아냈다는 속담은 제갈량에 대한 경의와 동경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구에 다름아닌 것이다.

 

2. 제갈량의 북벌은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 ?

 

- 제갈량의 북벌은 왜 실패했는가 ?

  이 전쟁은 반드시 실행해야만 했고, 그에게 그러한 재능은 있었는가 ?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현재도 일치된 결론에 이르지 못한

진행형 과제이다. 제갈량의 북벌 실패에 관한 대표적 견해 몇 가지만 들어보자.

 

첫째, 제갈량은 용병이나 전쟁에 뛰어나지 않았다.

군대를 통솔하는 것은 뛰어나도 계책이 모자랐다는 삼국지정사의 저자 진수의 평가가

이 견해의 대표이다. 진수는 정사 <제갈량전> 에서 ' 해마다 출병하면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것은 생각컨데, 임기응변의 책략이 서툴렀기 때문은 아닌가 ' 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고 있다.

우선 위연이 제창한 자오곡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으며, 전략상 대군만을 움직여

승리를 거두려 하였기에 그 외의 방법과 조건을 고려하지 못하였다.

또 전술상 적군과의 정면 작전만을 고집하여 응변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진수는 오늘날까지 우수한 사관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의 제갈량에 대한 평가는

숨김없는 본심이며 정곡을 찌른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그의 본심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는데 촉 태생이면서도 진을 섬겨야했던 그였기에

우회적 표현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아버지가 가정 함락의 책임을 진 마속과의

관계로 인하여 제갈량에게 처형되었기에 평가에 악의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촉은 약소국이어서 북벌에 성공하여 중국을 통일할 조건이 결여되어 있었다.

제갈량은 명확히 자신의 군대는 약하고 적군은 강대하여, 북벌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출병한 것은 공격은 최대의 방어라는 전략을

취한 것이었다. 즉 ' 취옹의 뜻은 술에 있지 않다 ' 는 격이다.

 

적지 않은 학자들 역시 약소국인 촉이 북벌에 성공한다는 것은 망상이며,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셋째, 오와 연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몇 번이나 북벌을 했지만, 기본적으로 한 방면에서의 전공으로 시종일관하였고

사전에 오와 연합하여 밀접하게 호응하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융중대책을 제기하여 삼국 정립의 상황을 만들기는 하였지만, 국력이 약소한 촉이 강대한 위에 승리하려면

오와 연합하여 출병했어야한 했다.

 

넷째, 정세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갈량은 시종 융중대책에 입각하여 노력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전략으로 만들어진 객관적 정세에 역전 불가능한 변화가 생기고 말았다.

 

하나는 형주를 잃은 것이다. 이것에 의해 융중대책의 전략은 좌절되었다.

또 하나는 이릉의 싸움에서 대패한 것이다. 이것에 의해 촉군의 사기는 꺽이고,

군사력은 약화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태는 제갈량이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었고,

만회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 일정한 이치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역사의 발전은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에

다각도에서의 분석과 구분이 계속 요구되는 것이다.

 

3. 위연은 과연 반역자였는가 ?

 

- 연의 104회와 105회에는 제갈량의 사후, 위연이 승상의 자리를 양의가 물려받고

군사에 관한 일은 모두 강유가 물려받았다는 비의에 말에 격분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비의로부터 위연의 말을 전해들은 양의는 역시 승상의 예언이 틀리지 않았다며

자신의 후미를 강유에게 맡기고 이 사실을 안 위연은 다시 한 번 분노를 터뜨린다.

 

105회에서 위연은 절벽에 놓인 다리에서 양의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양의는 제갈량이 남긴 금낭의 묘계를 숨기고 한중으로 물러나 위연을 맞았다.

양의는 하평에게 명하여 싸우게 하였지만, 위연과 마대는 이를 물리쳤다.

양의와 강유가 치고 나왔고, 양의는 위연에게 소리쳤다.

 

" 승상께서 생전에 네가 언젠가는 반역할 것이라고 하시며, 내게 준비케 하시더니

이제 정말로 그렇게 되었구나. 너는 말 위에서 누가 감히 나를 죽일 것인가 라고 세 번만

외쳐 보아라. 그 용기가 있다면 진짜 대장부다. 그러면 나는 한중의 성지를 네게 바치겠다 "

위연이 칼을 든 채 소리쳤다.

" 누가 감히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 "

위연의 그 첫 마디가 끝나기도 전, 등 뒤에서 한 사람이 나서며 그 말을 받았다.

" 내가 죽여주겠다. "

그는 말뿐만 아니라 단칼에 위연을 베어버렸다. 모두가 깜짝 놀라 바라보니 그 사람은

다름아닌 마대였다. 실은 모두 제갈량이 임종 때에 준비해두었던 것이다.

 

실제 역사상의 위연은 어떤 인물이었는가 ?

정사 등의 사서를 보면 그는 삼군의 우두머리인 촉군의 맹장이며, 촉에 충성을 다하여

많은 전공을 올린 인물이다. 한중을 공략한 후에 유비는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중 수비의 대임을 위연에게 주었다. 제갈량의 제1차 북벌에서는 자오곡의 기습을

헌상하였다. 그의 계책은 수용되지 않았지만, 시종 분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정사의 <후주전> 과 <위연전> 의 주를 인용한 ' 위략 ' 에 의하면 양의와 위연은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 뜻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위연이 제갈량을 대신해 군사를 지휘하게 되자 양의는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 위연은 군사를 데리고 위로 투항할 생각이다 ' 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수하의 군사를 이끌어 위연을 공격했다. 위연은 원래 위로 투항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쫓기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사망광의 ' 자치통감 ' 에는 ' 위연은 위에 투항하지 않고 남으로 돌아가 양의를 공격했지만, 실은 역모 따위는 없었다 ' 고 쓰여있다. 위연에게는 원래 촉에 반역할 의지가 없었고,

그가 죽은 것은 오로지 양의 때문이었다.

 

다만 연의에서 억센 기질의 소유자로 묘사되었고, 반역의 악명을 뒤집어 썼기 때문에

후대의 독자들은 그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럼 위연은 억울하며 그의 명예를 회복해야만 하는가 ?

 

현재 많은 학자는 위연의 죽음은 억울한 것이므로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논지는, 촉에 있어 위연은 유일한 일기당천의 장군이며 얻기 힘든 인재였다고

말한다. 그의 촉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 없었고, 머리에 반골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소설가의 터무니 없는 과장에 지나지 않으며, 위연의 거병은 양의 때문이었을 뿐,

결코 반역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도 있다.

역사적 인물로 위연의 행실에는 확실히 나쁜 점이 있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그는 

풍운을 질타한 촉의 대장이었고, 촉한 정권을 위해서 힘을 발휘했다. 그의 사소한 못된 

짓을 꼬투리 잡아 꾸며진 문학적 이미지는 시종 악인이지만, 이것은 역사상의 사실과는

크게 다르다. 문학상의 이미지가 역사인물의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제갈량 사후 양의와 싸운 것은 확실히 위연의 큰 잘못이다.

그가 군사를 일으켜 소동을 벌인 것은 위에 투항할 목적은 아니었지만,

소동의 성질과 결과는 분명히 촉에 대한 역모이자 적대행위이다.

따라서 그가 죽은 것은 자업자득이며, 억울한 죄 때문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이것이 판정을 뒤엎을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오랫동안 위영니 억울한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정사의 <양의전> 에 의하면, 양의는 승상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받은 데다 반역자 위연을 죽였기 때문에 스스로 공적이 아주 크고, 따라서 제갈량을 대신하여 정무를 맡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승상의 직위는 장완이 대신하게 되었다.

 

장완이 실권을 잡게 되자, 양의의 직권은 크게 줄어들었다. 중군사에 임명되었지만,

아무런 직무도 없이 빈둥빈둥 놀기만 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양의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비의가 방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투덜댔다.

 

" 먼저 승상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만일 군사를 이끌고 위에 항복했다면 이렇게 영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

 

깜짝 놀란 비의가 이 사실을 후주에게 밀고했다. 양의는 옥에 갇혔고 얼마 후 자살했다.  

 

양의는 위연과 대립한 한 쪽의 주역이었다. 위의 기술에 따르면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위연과 양의의 다툼은 평소의 모순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위연에게는 애시당초

역모의 마음은 없었고, 오히려 양의야말로 생각이 깊지 못했다.

둘째, 후주 유선과 승상 장완이 양의의 직권을 줄이고 옥에 가둔 것은,

촉한 당국이  위연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을 의미한다.

양의를 처단한 것은 아마도 조정이 위연의 명예를  회복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위연은 억울하니 그 동안의 판결을 뒤엎어야만 할 것인가 ?

위연이 죽은 얼마 후에 조정이 그의 명예를 회복하였으니 그를 둘러싼 재판은

종결되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

 

하지만 여전히 신뢰할만한 역사 기록을 찾아내어 의견을 보강하기 전에는

더욱더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 강유가 여덟 번 중원을 정벌한 것은 사실인가 ?

 

- 연의에서는 107회부터 115회까지 많은 지면과 넓은 장면을 이용하여,

제갈량의 후계자 강유의 팔벌중원을 정열적으로 그리고 있다.

 

강유가 제갈량의 후계자라는 점 때문에, 나관중은 제갈량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강유를 묘사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다면 연의 속의 팔벌중원과 실제 역사속 강유의 북벌은 일치하는가 ?

그렇지 않다. 

 

첫째, 연의에서 승리를 거둔 제6차 북벌과 승리 직전까지 갔던 제7차 북벌은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픽션이다.

둘째, 연의에서는 이기지 못하고 물러난 제2차 북벌과 제4차 북벌이 나오지 않는다.

셋째, 연의에서는 강유의 이미지를 지키려고 한 나머지, 다른 북벌에서도 취사선택한 것이 많고 픽션과 과장이 눈에 띈다.

 

이것에서 볼 수 있듯, 연의에 그려진 강유의 북벌 이야기는 진위가 뒤섞여 있고,

모두가 사실도 아니며 모두가 허구도 아니다.

 

어찌되었든 '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 는 여러 차례의 기록에서 보여지듯,

해마다 실행되었던 강유의 북벌은 그다지 좋은 성적이 아니었고, 패한 일이 훨씬 많았다.

 

더구나 위에 비해 눈에 띄게 약소했던 촉이 해마다 출병한 것은 한실 부흥과 천하 통일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에 도움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국력을 크게 약화시켜

촉한정권의 멸망을 앞당긴 것이라 볼 수 있다.

 

 집필자 asteka81

출처 : [기타] <고증학 삼국지 , 이전원 . 이소선> 참조

 

짱골라들의 세 왕조인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의 역사서들은 목적 자체가

짱골라들의, 짱골라들에 의한, 짱골라들을 위한 것으로

처음부터 조작,날조에 두고 있어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연의(소설)보다는 낫겠죠.

 

 참           고 1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진수삼국지(陳壽三國志)』

1. 위서(30권)
무제기(조조의 전기), 문제기, 명제기, 후비전, 동탁전, 원소전, 유표전, 가후전,
여포전, 순욱전 등..
2. 촉서(15권)
선주전(유비의 전기), 후주전(유선의 전기), 제갈량전, 관우전, 장비전, 마초전,
조운전, 황충전 등..
3. 오서(20권)
손견전, 오주전(손권의 전기), 비빈전, 주유전, 노숙전, 황개전 등..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는 진(晉)의 신하인 진수가 집필한 역사서이다.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는 조조의 위를 계승하였기에 역사의 정통은 위나라로 보고 있다.


0 저자 진수(陳壽)는 누구인가?

진수(陳壽)는 촉의 파서 안한(현재 사천성 남충시)사람으로 제갈공명이 오장원에서 병사하기 일년 전에 태어났다. 진수(陳壽)의 아버지는 촉의 마속의 부하였는데, 공명이 첫 번째 북벌을 할 때 마속의 실수하여 가정에서 위군에게 대패하자 공명은 울면서 마속의 목울 베었으며, 마속의 부하인 진수(陳壽)의 아버지도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후세 사람들은 진수(陳壽)가 제갈공명의 보복으로 <제갈량전>에서 제갈량을 비판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진수(陳壽)는 촉의 뛰어난 인재였으며, 그의 스승은 초주라는 사람으로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우니라에 항복할 것을 권해 평화롭게 촉을 위에게 이양한 인물이었다. 진수(陳壽)는 위.촉.오가 모두 망한 뒤 진(晉)에서 자작랑이란 벼슬을 지냈으며, 이때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를 집필하였다.


0 동아대백과사전에서의 정사삼국지

중국의 위(魏) ·촉(蜀) ·오(吳) 3국의 정사(正史).
구분 : 정사서
저자 : 진수(陳壽)
시대 : 위(魏) ·촉(蜀) ·오(吳) 3국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것으로,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린다.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 합계 65권으로 되어 있으나 표(表)나 지(志)는 포함되지 않았다.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보고 위서에만 <제기(帝紀)>를 세우고, 촉서와 오서는 <열전(列傳)>의 체제를 취했으므로 후세의 사가(史家)들로부터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촉한(蜀漢)에서 벼슬을 하다가 촉한이 멸망한 뒤 위나라의 조(祚)를 이은 진나라로 가서 저작랑(著作郞)이 되었으므로 자연 위나라의 역사를 중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때문에 후에 촉한을 정통으로 한 사서(史書)도 나타났다. 그러나 찬술한 내용은 매우 근엄하고 간결하여 정사 중의 명저(名著)라 일컬어진다. 다만 기사(記事)가 간략하고 인용한 사료(史料)도 지나치게 절략(節略)하여 누락된 것이 많았으므로 남송(南宋) 429년에 문제(文帝)는 배송지(裵松之)에게 명하여 주(註)를 달게 하였다.

《삼국지》에 합각(合刻)되어 있는 배송지주(裵松之註:裵註)가 그것이다. 이 배송지의 주는 본문의 말뜻을 주해하기보다는 누락된 사실을 수록하는 데 힘을 기울여, 어환(魚)의 《위략(魏略)》을 비롯한 하후담(夏侯湛)의 《위서(魏書)》 이하 당시의 사서와 제가(諸家)의 계보(系譜) ·별전(別傳) ·문집(文集) 등 140여 종의 인용문이 기재되어 있다. 이 제서(諸書)는 그 후 태반이 산일(散逸)되었는데, 여기에 인용된 글들이 당시의 사실을 고증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된다. 그 중에서도 어환의 《위략》은 특히 귀중한 사료가 많이 있어, 이것을 배송지가 인용한 주를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다른 일문(逸文)을 추가하여, 청(淸)나라 때 장붕일(張鵬一)이 《위략집본(魏略輯本)》 25권을 편찬하였다.

또한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扶餘) ·고구려 ·동옥저(東沃沮) ·읍루(婁) ·예(濊)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왜인(倭人) 등의 전(傳)이 있어, 동방 민족에 관한 최고의 기록으로 동방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유일한 사료가 된다. 《삼국지》에 관하여는 후세에 많은 참고서가 만들어졌으며, 그 중에서도 청나라 전대소(錢大昭)가 엮은 《삼국지변의(三國志辨疑)》 3권과 양장거(梁章鉅)의 《삼국지방증(三國志旁證)》 30권 및 항세준(杭世駿)의 《삼국지보주(三國志補注)》 등이 저명하다. 최근의 것으로 1957년 베이징[北京]의 고적출판사(古籍出版社)에서 발간된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 65권, 보권(補卷) 2권이 《삼국지》의 해설서로는 가장 상세하고 완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0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註)

진수(陳壽)의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가 너무 간략하고 내용이 빈약하여 남송 사람인 배송지(裵松之)가 주(註)를 단 것이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註)이다.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註)는 전24권으로 되어 있다. <삼구지주三國志註>에는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에서 빠진 내용을 보충하고 다른 것과 비교하여 터무니 없는 내용은 정정하고 수정하였으며, 배송지(裵松之) 자신의 고증과 논변을 첨가하였다.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註)에는 과거 문헌들에서 200여 종을 발굴하여 역사 자료를 보총하였는데, 그 불량이 본문의 세 배에 달한다고 한다.


0 저자 배송지(裵松之)는 누구인가?

배송지(裵松之)의 자는 세기(世基)이며, 남송(南宋) 사람으로 중서시랑이란 벼슬을 지내다가 남송(南宋)황제 문제(文帝)의 명을 받아 <삼국지주三國志註>를 집필하였다.

 

 

 참           고 2

 

삼국지정사는 사서이고, 삼국지연의는 소설입니다. 삼국지연의 자체가 소설이니 그것이 허구에 불과할 뿐이죠.
'연의'라는 용어가 소설이란 뜻이니....
쥐나의 삼국지에 나오는 100만 어쩌고 하는 것은 사실 뻥이죠. 짱골라들의 농간에 불과합니다.
그 당시 인구 대비로 따져도 그것은 억지죠. 실제로는 1/2에서 1/3정도 즉 50만에서 30만정도의 군사력 밖에 안 됩니다.
원래 짱골라들의 허풍이 셉니다. 나관중이 지은 연의에는 장판파에서 조운이 80만의 군대 속을 홀로 유린했다고 하지만 실제 정사의 기록을 보면 조조의 군세는 8천뿐이었다고 합니다. 나관중의 허무맹랑은 상산 조자룡에만 그치지 않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관우의 청룡언월도 그것 역시 거짓입니다. 언월도란 무기 자체가 송나라 시대 이후에나 등장해 원나라때 자주 사용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즉, 후한 말기 언월도란 무기 자체가 없었습니다. 툭하면 100만 대군 하는데 이 역시 거짓이죠.  
하여튼 역사와 판타지를 구분 못 하는 사람들이 많죠. 무조건 짱골라들의 허풍은 믿으면서 반면에 우리의 역사는 외면하죠,

툭하면 한단고기 들여대며 역사왜곡 운운한다는 식으로 환빠로 몰려는 어리석은 몇몇 이들이 있는데 최근에는 과학의 발달로 서서히 역사적 진실이 드러나고 있죠. 물론 난 환빠도 아니니 괜한 오해는 안 했으면 합니다.

유물,유적 등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데는 사학자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죠. 그 유물,유적 등에서 나오는 물질을 분석하기 위해서라도 인류학자,화학자,생물학자,고고학자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분야의 여러 학자들이 함께 동원되죠. 이런 여러 관련 분야들의 학자들이 서로 연관되어 연구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딸랑 사서 하나만 연구 하지 않는 것이죠.  
또 사서 [사고전서]는 청나라 건륭 황제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로 무려 7만9천여권에 달합니다. 고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원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에서 모두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 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필적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죠. 상(은)나라나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이 모두 동이족이라는 것도 다 밝혀져 있죠. 만약 고대부터 청나라때까지 역대 중원대륙 모든 왕조들의 역사서들을 그 출처로 하여 종합편찬한 [사고전서]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그 출처였던 중원대륙의 모든 사서들마저도 부정하는 자가당착에 빠질 뿐이죠. 청나라의 [사고전서]나 후조선의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이미 디지털화되어 있어 일반인들도 확인이 가능하죠. 민족이란 말이 근대 국민국가 이후에 생겨났다고 하지만 우리는 민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훨씬 이전부터 겨레라는 순수 우리말을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요사,금사,원사,청사 등에 보면 그들이 모두 고구려나 흉노 등 배달계통 동이의 후예 또는 갈래민족이란 것을 다 밝히고 있죠.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의 금나라,청나라 모두 고구려의 후예라고까지 자처했으며, 특히 신라가 망한 후 그 신라 왕족 일부가 이들 나라들의 건국에 참여했다는 것도 얘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 증거로 말미암아 이번 2007년부터는 고조선 역사가 국사에 편입됐을 뿐만 아니라 홍산문화,요하문명 등 우리 고대의 역사가 서서히 밝혀지고 있죠. 그것을 짱골라들이 방해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더더욱 역사탐원공정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참고로 제갈량은 촉한으로 진격해오는 육손을 팔진도八陳圖라는 기묘한 술책으로 꺾었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허구입니다.
그것은 연의의 작가 나관중이 제갈량을 신격화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팔진도의 비밀은 무엇일까. 팔진도가 실제로 존재하긴 했습니다.
다만 연의(소설)에서처럼 그런 요술진이 아니라 중군을 가운데에 두고 주위 팔방으로 8개의 진을 두어 방어에 뛰어난 진형을 뜻합니다. 이 진형을 제갈량이 주로 썼는데 진형의 형태와 예리함이 실로 뛰어나 사마의가 그것을 보고 감탄했다는 구절이 정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갈량과 방통만 보더라도 제갈량은 내치內治에 강한 내신內臣형이었으며 방통은 오히려 정치보다는 병법에 강한 외신外臣이었습니다. 하물며 병법의 기재라는 사마의,주유,육손이 제갈량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밀리지 않습니다.
제갈량에 대한 환상은 제갈량을 높이기 위해 허구인 연의를 지은 나관중이 의도적으로 방통,사마의,주유,육손 등의 인물들을 폄하한 것에 있습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있는 것은 필요에 따라 조작하는 등의 여러 방식으로....    

소설에서는 유비, 조조, 손권이 영웅들로 묘사 되었지만 쥐나의 三國時代는 세계사 교과서에서 단지 한 단락 정도만 차지하는 아주 보잘 것 없던 시기였습니다.  사실 역사 속에 한번 정도 등장하는 어느 왕조의 창업자들도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만큼 국가를 창업 하는데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국을 창업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별처럼 역사에 등장한 국가들 중 역사에 길이 남을 제국이 되느냐 아니면 그냥 사라지느냐는 창업자를 승계한 똑똑한 통치자가 나와야 가능한 일 입니다.  앞에 예를 든 유비, 조조, 손권의 경우는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어 그들이 만든 왕국은 결국 단명의 왕조로 막을 내립니다. 정말이지 소설과 달리 삼국시대는 중원대륙사에서 보잘것 없던 시기였습니다.

 

 

 

 

# 이제 한걸음을 떼기 시작한 한국역사

 

일부 고고학적 발굴로 '신화' 통설 반박… 청동기 문화 한반도 전래시기도 앞당겨

강원도 속초 조양동 유적
강원도 정선 청동기 유적
그동안 신화 형태로 기술돼 온 고조선 건국 과정이 공식 역사로 편입됐다. 또 한반도 청동기 도입 시기도 최대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7학년도 역사 교과서를 이처럼 수정해 일선 학교에 보급하기로 했다.
따라서 고조선 건국과 관련, 기존의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고 기술한 대목은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됐다. ‘~한다’라는 말이 있고 없음의 차이는 엄청나다.
국사편찬위원회 장득진 실장은 "그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또 기존 교과서는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5세기∼기원전 13세기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새 교과서는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랴오닝(遼寧),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기술해 청동기 시대를 500∼1000년 앞당겼다.
이 부분을 집필한 최몽룡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강원도 정선과 춘천.홍천, 경기도 가평, 인천시 계양구 등지에서 최근 출토된 유물 등을 근거로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에 전래한 시기를 앞당겼다"고 말했다.
올해 국사 교과서를 수정하게 한 가장 큰 동인은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과 과학적 연대 측정의 결과다. 그동안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세기쯤이라는 한국 고고학계 통설은 이 시대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대 측정으로 흔들리게 됐다.
최몽룡 교수에 따르면 강원도 춘천시 신매리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기원전 1510년쯤으로 추정됐다. (최몽룡 외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연구>, 주류성 발간, 2004)
진주 남강 수몰지구에서 확인된 각종 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은 연대가 BC 10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BC 15세기 무렵으로 조사됐다.
남강 수몰지구 중 선문대 이형구 교수(역사학과) 조사팀이 발굴한 옥방 유적의 경우 집자리터에서 나온 목탄 2점에 대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각각 BC 1590-1310년과 BC 1620-BC 1400년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당시 이 교수는 “남강지역의 유적 연대는 대략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으나 기원전 14∼기원전 13세기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지적했다.
건국대 박물관이 다른 남강 수몰지구에서 발굴한 청동기 시대 주거지 출토 목탄 2점을 측정한 결과에서도 BC 1420-BC 1100년, BC 1400-BC 1100년으로 나타났고 경남대 박물관 역시 서울대와 캐나다 토론토대에 시료측정을 의뢰한 결과 기원전 10세기를 뛰어넘은 것으로 드러났다.
강원 지역의 경우 청동기 시대가 남강 유역보다 더욱 올라가고 있다.
강릉 교동 주거지 1호의 경우 그 연대가 무려 BC 1878- BC 1521년으로 나왔고 다른 두 곳의 주거지도 중심 연대가 BC 15세기 무렵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청동 도끼가 출토된 속초 조양동 청동기 시대 유적 또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연대 측정 결과 BC 1206-BC 830으로 나왔다.
 
진주 옥방5지구 각목돌대문토기 / 진주 옥방5지구 장방형집자리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왼쪽부터)
 
뿐만 아니라 조선대 박물관이 발굴한 전남 순천 죽내리 청동기 시대 주거지도 외국 연구소에 탄소 연대 측정을 의뢰한 결과 BC 16세기- BC 15세기라는 결과가 나왔다.
춘천시 신매리 유적, 강릉 교동 주거지,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지에서는 청동기 전기의 유물인 공열토기와 이중구연토기, 단사선문토기 등이 공통적으로 출토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양평 양수리의 두물머리고인돌의 덮개돌 밑 15cm 되는 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숯의 연대측정은 3,900±200B.P(MASCA 계산법으로는 4,140~4,240B.P)라는 절대연대를 보였다.
고고학자인 조유전 한국토지박물관장은 "남강 선사 유적만 해도 탄소 연대 측정치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연대를 BC 400- BC 500년쯤이라고 추정했다"면서 " 청동기 시대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과학적인 탄소연대 측정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교과서 수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기술에 대해 이견도 적지 않다. 한국교원대 송호정 교수(역사교육과)는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이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며 종래의 통설을 고수했다.
이에 대해 이형구 교수는 “기존의 교과서에 있는 청동기 시대 역사는 중국, 일본 사람들이 쓴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며 "고조선 영역이었던 한반도 서북지역의 청동기 시대 개막은 여러 가지 과학적인 증거로 보아 기원전 15세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윤내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은 “청동기 유물이 극소수 장신구이기 때문에 시대를 수정할 근거가 못 된다는 주장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청동기의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과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무시하는 견해”라고 반박했다.
이강승 충남대 교수(문화재위원)가 ‘청동기 있는 청동기 시대’와 ‘청동기 없는 청동기 시대’를 구분해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를 BC 10세기 아래로 본 데 대해 윤내현 소장은 “청동기 시대를 말해주는 유적(유물)은 청동기 말고도 얼마든지 있으며 과학적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나 중국의 청동기 시대와도 비교한 데이터 등을 종합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는 BC 15세기를 넘어선다”고 주장했다.
윤 소장은 특히 “중국 랴오녕성 북부와 내몽고 자치주 경계에 있는 훙산(紅山) 지역의 하가점(夏家店)’에서는 기원전 2400여 년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었다”면서 “한반도의 고인돌, 청동기 유물을 만주지역의 그것들과 비교 분석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BC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증거들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고조선은 수정된 교과서에 역사로 기술됐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신화’라는 통설에 갇혀 있다. 또한 고조선의 실체를 둘러싼 강단 사학계와 재야 사학계의 이견도 여전하다. 고조선이 명실상부한 ‘역사’로 자리잡기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허구의 종족 짱골라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2007년 02월 16일 |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중국근대간사’(中國近代簡史, 1954년)에 실린 중국의 실지(失地) 1949년 건국한 중국이 그 무렵부터 한국을 되찾아야 할 잃어버린 땅으로 여기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교과서의 일종.

 

 

중화삼조당 왼쪽부터 치우, 헌원, 신농. 신화의 세계에서 판천대전의 패배로 볼모로 잡힌 신농과 탁록벌판에서 잡아 죽여 그 시신까지 사방에 흩뜨렸다는 치우천황까지 졸지에 헌원과 함께 중화의 조상으로 둔갑했다.

 

중화삼조당 치우와 탁록대전 벽화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며 한족도 인정했던 철기문화의 선구자 치우천황을 졸지에 돌도끼를 든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등 억지를 부리다 곳곳에 논리의 허점을 노출했다.

 

 

 

 

 

칭기즈칸 유물, 한국이 찾는다

조선일보 / 입력 : 2006.07.24 00:34 34' / 수정 : 2006.07.24 00:36 23'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성과
몽골정부 “혈통 같은 나라를 파트너로 선택”
한국학자들, 칸의 직계 여인 유해발굴 개가

 

 
▲ ‘황금씨족’여인의 유해와 함께 발굴된 반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동북쪽의 타반 톨고이. 이 인적 드문 시골에서 지난해 무덤 한 기(基)가 발굴됐다. 그 안에서 목관(木棺)에 담긴 여성의 유골과 황동반지 하나가 나왔다. 이 소식은 대초원(大草原)으로 바람처럼 퍼졌고 고고학자들을 흥분시켰다.

여성의 유골 일부와 목관 조각, 황동반지는 곧바로 고려대 한국학연구소로 넘겨졌다. 발굴이 이뤄지기 한 해 전, “모든 칭기즈칸 관련 연구는 한국과 함께 진행한다”는 몽골 내각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출토물에 대한 탄소연대 측정 등 과학적 연구를 벌인 결과 주목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 목관은 칭기즈칸 생존기인 12세기말부터 13세기 초쯤 제작된 것이었다. 연구진을 더 흥분시킨 것은 목관의 재질이 버드나무였다는 점이다.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朱蒙)의 어머니가 ‘유화(柳花)부인’이고, 일각에서 몽골제국의 전신(前身)인 흉노 일족이 신라를 건국했다는 설의 근거로 제시되는 ‘버드나무를 닮은 신라금관’에서 알 수 있듯 버드나무는 북방 유목민들이 중히 여기는 4대 신목(神木) 중 하나다.

반지에서는 백색 매(白鷹)의 문양이 있었다. 이는 칭기즈칸의 직계 혈족을 이루는 ‘황금씨족’의 상징 문양이다. 그렇다면 여인이 칭기즈칸의 직계란 뜻인가? 왜 황금씨족의 일원은 중앙이나 서부가 아닌 동쪽을 유택(幽宅)으로 삼았는가?

김재열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교수(철학)는 “원래 칭기즈칸의 선조들은 돌궐, 유연 등에 억눌려 만주 부근에 거주하다 중앙으로 이동했다”며 “이 발굴은 칭기즈칸 연구에서 그간 베일에 싸여 있었던 동몽골에 대한 가치를 재인식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칭기즈칸 연구에 미국, 러시아, 중국·일본도 아닌 한국이 주도권을 행사하며 몽골 내각은 몽골사회과학원과 몽골국립대에 한국을 파트너로 하라고 지시했을까.

박원길 고려대 연구교수는 “칭기즈칸 ‘붐’에 편승해 최근 몽골 각지에서 각종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며 “그런데 땅만 팠다 하면 칭기즈칸 아니면 옹칸의 유물이 나온다”고 말했다. 개중에는 발굴자 집에서 목격됐던 것이 유물로 둔갑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옹칸은 칭기즈칸의 양(養)아버지다.

 
▲ 몽골제국 건국 800주년을 맞아 지난 10일 울란바토르에서 개막된 나담 축제. 칭기즈칸 시대의 행렬이 스타디움을 돌고 있다. /문갑식기자
몽골정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의 경우 과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유물을 약탈한 ‘전력(前歷)’이 있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혈통이 같은 한국을 파트너로 선택했다는 게 유영대 단장(국립창극단장·고려대 국문과 교수)의 말이다.

이런 ‘인연’을 바탕으로 고려대 한국학연구소팀은 지난 9일부터 8일간 동몽골에 대한 2차 답사를 진행했다. ‘황금씨족’ 관련 연구 성과를 전달하고 아브라가발가스~허더아랄~알탄오보~사르가골~고르반노프~델리운볼독~하조볼락~빈데르오보~아라샹하드~어글럭칭헤렘~허흐노르를 답사했다.

이 지역은 칭기즈칸이 라이벌 자무카와 결별한 ‘배신의 땅’, 칭기즈칸이 대칸에 취임한 ‘언약의 호수’ 등이 있는 곳으로 접근하기 힘든 험지(險地)다. 탐사는 러시아제 20인승 헬기를 동원해 총 비행거리만 4000여㎞를 넘는 대장정이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고려대 외에 서울대·한양대·건국대 교수들도 가세했다.

현재 몽골은 1206년 몽골제국 창립 800주년을 맞아 거의 ‘칭기즈칸 공화국화(化)’하고 있다. 1991년 민주화 이전 사회주의 치하에서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금기시됐던 것과 영 딴판이다. 몽골 정부는 올 3월 공항 이름을 ‘칭기즈칸 국제공항’으로 바꿨으며 전통 축제 ‘나담’도 지난 10일부터 최대 규모로 개최하고 있다.

간속 몽골국립대 총장은 “2010년 모든 연구가 종료될 때쯤이면 솔롱고스는 칭기즈칸 연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솔롱고스는 무지개 나라라는 뜻. 김한겸 고려대 교수는 “무지개는 비가 뜸한 몽골에서 신비한 현상으로, 먼 옛날 헤어진 형제의 나라 한국을 말한다”고 말했다.

 

동[東]몽골=문갑식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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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인 거주 ‘할힌골’ 동몽골의 지명?

 

동몽골 지역은 부여, 선비 등 유목기마국가가 기반했던 곳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곳이 한동안 우리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몽골 국립대학에서 한국관계를 가르치는 바투르 국제관계학과 교수도 “이 지역은 삼국유사에서도 거론될 정도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삼국유사에 백제인들은 ‘할힌골’에 살았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할힌골이 동몽골 안에 있는 지명이라는 것이다. 할힌골은 1939년 일본이 러시아-몽골 연합군에게 패퇴해,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꾼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야생마늘과 쑥이 자생하며, 고려성이라는 유적도 남아 있다.

 

 

 

 

 

 

 

[홍산의 여신묘]

 

홍산문화는 요하강에서 만날 수 있다
여지껏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에서 우리의 문화는 항상 중국의 영향하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들어 발굴되는 이 유적들은 그런 관점을 완전히 반박한다

 

 

이 유물들을 보면 두 군데 유물들이 아주 유사한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홍산문화의 유물이 상(은)나라의 유물들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증거인 것이다

 

 

 

또 다른 사해유적 또한 마찬가지이다

 

 

 

적석총, 돌널 무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단군조선국의 영토에서 발견]

 

 

 

이런 자료는 우리 문화와의 유사성을 밝혀준다

 

 

고구려의 삼족오는 어떤 형태로 전해왔을까?

 

 

[민간의 부적]

 

조선시대에는 삼족오의 모습이 이런 형태로 바뀌기도 했다
우리 문화에서는 숫자 3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야한다
보아라 다리 또는 머리가 3이지 않는가?

 

 

한웅배달국 홍산문화의 주류는 몽골, 만주, 연해주, 한반도, 왜열도, 중원 등 동아시아 대륙의 전역으로 퍼져 나가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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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헌원이 사로잡혀 치우천왕 앞에 무릎을 꿇고있는 그림. 김산호화백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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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역사공정` [중앙일보]

 

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중국이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랴오허(遼河)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자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선사(先史)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기존 학계가 주장해온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유역에서 여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이른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에 따른 것이다.

17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문물국은 랴오닝(遼寧)성 뉴허량(牛河梁) 신석기 유적 등 35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할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에 포함했다.

국가문물국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예비 목록을 수정해 제출하도록 한 '세계문화.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1996년에 이어 이번에 목록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뉴허량 유적을 랴오허 유역에 분포한 북방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로 분류해 왔다. 랴오허 일대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이번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이들 문화의 원류인 랴오허 일대의 북방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사학계는 황허와 창장 유역을 중국문명권으로 분류하고 랴오허 일대는 중국문명과 뿌리가 다른 북방문명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올해 선양(瀋陽) 박물관에서 '랴오허 문명전'을 여는 등 일련의 역사 왜곡을 진행하면서 북방문명을 중화문명권에 편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새로 작성한 예비 목록에는 뉴허량 유적 외에도 ▶대운하(大運河)▶실크로드▶장경동(藏經洞)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에 있는 옛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목록에서 빠져 당분간 신청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비 목록에 오른 유산 중에서 2008년 32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 등재 신청할 유산이 최종 선정된다.

장세정 기자

◆ 뉴허량 유적=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 젠핑(建平)현 근교에서 1981년에 발굴된 신석기 유적. 북방 신석기 문명(기원전 7000년)의 하나인 훙산(紅山)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황허 유역의 중원 신석기 문명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랴오허강 일대에 기원전 3500년 무렵에 형성됐다. 섬세한 옥기(玉器)와 돌무지무덤(적석총)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의 두상(頭像)은 전형적인 몽골 계통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중원문명과 확연히 구별된다.

◆ 탐원공정=상고사를 고쳐 써서 선사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확대할 목적으로 중국 당국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에서 황허문명(기원전 3000년)보다 더 일찍 발생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당국이 이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를 편입하면 중국문명이 기원전 1만 년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정치 사정에 맞춰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6.12.18 04:26 입력 / 2006.12.18 07:00 수정

 

 

<<천문학으로 알아보는 역사 클릭참조>>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클릭참조>> 

 

5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인돌별자리                  <<고려때도 ‘오로라’ 있었다 클릭참조>>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atidx=0000021716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 고인돌에 새겨진 천문도 클릭참조>>

 
세차운동으로 고인돌 연대측정 가능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클릭참조>>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atidx=0000021816

<<4대 발명품 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이 모두 쥐나 짱... 클릭참조>> 

 

<<잊혀진 땅 백제 22담로의 비밀 (동영상) 클릭참조>>   <<왜왕실에 잠들고 있는 우리 사서들 클릭참조>>    

 

<<역사스페셜 - 장보고 선단, 대양항해 어떻게 가능했나... 클릭참조>>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세계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중국의 방해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서기전 4천500년~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玉(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초기(고조선 중기 이후는 철기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신석기 시대의 배달국 초기(한웅배달국 후기는 청동기시대)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즉 홍산문화는 단군조선 건국의 토대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라는 말이다.

◇2006년에 중국이 뉴허량 유적 등 35개를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遼河(요하)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探源工程(탐원공정)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 학자들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30년 전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앙소문화에서 하모도문화로 바꿔 재설정한 중국은 뉴허량 유적 발견 이후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 3대 문명의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漢族(한족)의 것과 엄연히 다른 동이족 문화인데도 과거 일제가 한 것처럼 한민족의 뿌리마저 잘라버리려는 역사왜곡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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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타종족명이 아니라 당나라에선 만주지역 거주인들을 범칭으로

        고구려에선 지방민을 비칭으로 부른데서 기원

한규철 교수

발해 병사의 무덤-발해토기, 고구려토기, 말갈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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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데게족-발해의 후예,사냥과 낚시 만주 비긴강 상류 거주

나나이족- 발해의 후예 사냥, 어로 연해주 해안가 거주

만주지역 소수민족들의 축제- 곰 토템, 생활 문화가 우리와 흡사.

유전자 검사와 비교

말갈인, 우데게인,만주거주 소수민족- 현대 한 민족의 구성에 참여한 친연성이 있는 고대 우리민족의 후예로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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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정체, 이태백도 "발해는 외국"

연합뉴스|기사입력 2006-09-18 08:48 |최종수정2006-09-18 08:48

발해가 새로 창제한 문자
동북공정 근거사료도 "대조영은 고구려 별종"

(홍콩=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 홍콩의 발해사 학자인 김광석(金光錫.62) 홍콩 능인(能仁)서원 한국학과 교수는 중국의 발해사 편입 시도는 중화 패권주의에 다름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교수는 지난 91년 홍콩에서 `발해족의 형성과 그 사회형태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해외 학계에서 처음 발해사 연구로 인정받은 한국학자다.

김 교수는 18일 그간 한국에 공개되지 않았던 이 논문을 토대로 그간의 남.북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발해 사료 및 연구결과를 집대성해 발해사가 중국사가 아니라는 근거를 조목조목 짚었다.

◇말갈은 고대 한민족 = 말갈족은 북방 이민족이 아닌 우리 한민족의 일원으로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를 건국한 주도세력이었다.

발해가 건국되던 6세기말 7세기초 시기에 지린(吉林)성 등 동북지방에 7개 말갈족 부족이 있었다. 한민족의 원류인 북방 예맥계가 3개 부족, 고아시아 숙신계가 4개 부족이었고 숙신계 흑수말갈을 제외한 6개 부족이 발해에 흡수됐다.

김 교수는 "`말갈(靺鞨)'이라는 부족명은 중국이 이민족을 경시해 붙여준 명칭"이라며 "우리에겐 백제와 신라를 침략한, 문화수준도 낮고 야만적인 이미지를 풍기고 있지만 사실은 고대 한민족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말갈족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었던 예맥계 속말말갈이 발해 건국의 주체가 됐는데 속말수(粟末水.지금의 제2쑹화강)에서 유래된 속말말갈은 부여 계통으로 고구려와 혈연, 지역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수한 철기문화를 자랑했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는 오히려 말갈부족과 연합해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고구려 멸망후엔 고구려 유민들이 속말말갈 사회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속말말갈 외에 동옥저, 남옥저의 후예인 백산(白山) 말갈도 역시 예맥계로 발해 건국에 참여했다.

헤이룽장(黑龍江) 일대에 근거지를 둔 흑수말갈은 발해에 복속되지 않은채 발해와 군신관계를 유지하다 여진족에게 흡수돼 후에 여진족의 나라 금, 청나라의 주도세력이 됐다.

◇대조영도 고구려계 =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속말말갈 부족장 걸걸중상(乞乞仲象)의 아들로 당시 고구려 영토에서 살던 고구려 유장이었다.

중국이 발해사에 대한 동북공정의 근거사료로 쓰는 구당서(舊唐書)에도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별종(大祚榮者, 本高麗別種)"으로, 신당서(新唐書)엔 "고구려에 붙어있던 속말말갈 사람으로 성은 대씨이다(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로 기술돼 있다.

고구려 멸망후 영주(營州.지금의 랴오닝 차오양(朝陽) 일대)에 강제 이주된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은 거란족과 함께 도독의 잔혹한 통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당의 여제 무즉천은 이들 반당(反唐) 세력을 이간질시키기 위해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봉했다. 속말말갈은 이전부터 자신을 진국으로 칭해왔다.

책봉을 거부하고 당군과 맞서 싸우던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가 전사하고 걸걸중상도 사망하자 걸걸중상의 태자 대조영은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 당군의 추격을 물리치고 고구려, 말갈 세력을 규합해가며 실력을 키웠다.

697년 대조영은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 됐으며 713년엔 발해로 개칭했다.

발해 나라명에 `國' 사용은 자주독립 공동체 뜻

독자적 신문자 사용.고구려 풍속 그대로 이어


◇발해 지배층 예맥계가 주류 = 발해 건국 초기의 인구는 78만명에 불과했으나 고구려 유민을 지속적으로 흡수하고 거란족 190만명과 여진족 60만명을 직접 통치하게 됨에 따라 전성기 시절 인구는 300만명으로 늘어났다.

발해사회 지배계급의 주체는 예맥계 속말말갈 대 씨 왕족과 고구려 귀족관료 출신인 고 씨, 말갈 각 부족 추장, 일부 한족 지주들이었다. 중국 학자가 쓴 발해국지장편(渤海國誌長編)엔 발해 지배계급은 모두 317명이었는데 대 씨 90명, 고 씨 56명, 장 씨 30명, 왕 씨 22명, 리 씨 18명 등으로 속말말갈과 고구려가 주축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드물게 눈에 띄는 박 씨와 최 씨도 신라계나 고구려계일 가능성이 있다.

◇이태백도 "발해는 외국" = 당나라 사람들은 당시 발해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발해는 당시 나라명에 `국(國)'을 사용했다. 이는 자주독립 공동체였다는 의미이다. 당시 발해문자에 능통해 발해 외교문서의 번역을 맡기도 했던 시선(詩仙) 이백(李白)도 발해를 고려(고구려의 의미)나 백제로 부르며 외국으로 취급했다는 기록이 이백의 시문집 옥록총담(玉록<鹿+土>叢談)에 기록돼 있다.

이백의 혁만서(하<口+赫>蠻書)에선 또 당나라 사람들이 발해를 습관적으로 고려, 백제로 칭했다는 말이 나온다.

특히 발해가 독자적인 신문자를 사용했다는 점은 어느 나라에도 예속되지 않은 자주성을 갖춘 국가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발해가 한자를 사용하긴 했지만 한글의 원형이라는 알려진 가림다(加臨多)와 유사한 글자를 별도로 만들어 사용했을 정도로 문자 사용에선 중원왕조와는 이질적이었다. 단군 고조선 시대의 석각도 발해문자 창제에 참고가 됐을 것이라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이와 함께 지배계급인 예맥계 고구려와 속말말갈은 북방 몽골어계통 언어를 사용, 의사소통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김 교수는 또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발해의 토장(土葬) 매장방식이나 제사, 전설, 가무 등을 비춰볼 때 고구려의 풍속을 그대로 이어받은 자주국이었다고 논박했다.

독자적 연호 사용..당도 결국 `國'으로 인정

◇당나라와 전쟁도 불사 = 고왕 대조영에 이어 2대 무왕 대무운(大武芸)은 인근 부족을 정벌, 인안(仁安)을 독자연호로 채택하고 정권을 공고히 한 다음 당 현종이 아직까지 복속치 않았던 흑수말갈 지역에 흑수도독부를 두자 즉각 토벌에 나섰다.

발해가 출격에 나서자 당은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토록 했고 이로인해 신라와는 줄곧 긴장관계에 놓이게 됐다. 대무운은 당으로 망명 투항한 형 대문운(大門芸)을 살해하려 낙양에 자객을 보내는 등 당과는 갈등 관계에 있었다. .

대흠무(大欽茂)가 3대 문왕으로 등극하면서 발해는 당시의 최강국 당과의 화평외교에 힘쓰면서 내치 개혁에 주력했다. 762년 당은 발해를 나라(國)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김 교수는 "발해는 계속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고 34차례에 걸쳐 일본에 외교사절을 파견했으며 또 당나라와 자주 전쟁을 벌인 점은 독립 주권국가라는 사실을 말해주기에 족하다"고 말했다.

책봉, 조공, 수작(受爵)은 당시 강대국에 대한 외교방식의 하나였고 당나라식 행정제도 도입은 중원의 선진문화를 흡수한 것일 뿐 이를 당나라에 예속된 일개 지방정권으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라는 것이다.

◇`동거란'이 발해 계승 = 10세기초 발해는 귀족 권력투쟁과 국정 불안으로 사회모순이 커지면서 925년 거란의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의 침략을 초래한다.

1년만에 홀한성(忽汗城)이 함락되고 애왕(哀王)이 투항함으로써 발해는 229년만에 역사에 종언을 고했다. 고구려계인 고영창(高永昌) 등에 의한 발해 부흥운동이 세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아보기는 그러나 곧바로 발해국 영토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태자를 인황왕(仁皇王)으로 앉히며 발해국 계승을 선언했다.

당시 발해 유민 300만명중 190만명은 동단국에서 거란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나머지 110만명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중 10만여명은 고려로 넘어갔고 60만명은 여진으로 도피했으며 1만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왕족 2명, 귀족 25명을 포함 발해 유민이 대거 고려로 들어오자 고려는 이들을 후대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는 본래 우리의 친척 국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동단국은 이후 동거란으로 국명을 바꾸면서도 발해의 행정체제와 규모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사실상 동단국은 발해국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발해는 거란 이후 동북지방의 주도세력이 된 여진과도 특수관계를 맺고 있었다. 흑수말갈이 합류한 여진의 금나라는 당시 동북지구에서 최고 문명을 자랑하던 발해를 대거 포섭해 끌어들였다. 금나라의 역대 황제 가운데 발해족을 생모로 둔 황제는 해릉왕, 세종, 위소왕 등 3명에 이른다.

jooho@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허구의 종족 쥐나 짱골라의 왕조는 한, 송, 명 3왕조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동이계, 흉노계, 융족계 등의 배달겨레 왕조들이다.

 

즉 우리 배달겨레 형제들의 발견, 발명 등의 업적이자 역사이다.

 

쥐나 짱골라족의 역사탐원(동북, 서북, 서남)공정의 목적은

 

배달 한민족(동이계, 흉노계, 융족계 등 수많은 배달겨레)으로부터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 그리고 그 갈래왕조들의 모든 업적을 노리는 야욕이다!

 

 

 

 

 

 

 

 

보다 자세한 것은 [몇 가지 추려본 간략한 게시물 목록들]과 [역사와 관련해 몇 마디 논평해본다....]를 참고하세요. 

  

이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문화재나 유적들에 관한 자료들이 많으니 직접 본 블로그의 게시물들을 둘러보면서 찾아 읽어보세요

기타 궁금한 것은 위에 언급하지 않은 자료들 중에 있으니 찾아보면 그 궁금증 대부분이 풀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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