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수한 漢族은 없다,

          허구의 종족 짱골라 ☆☆☆

 

 

 

# 이제 한걸음을 떼기 시작한 한국역사

 

일부 고고학적 발굴로 '신화' 통설 반박… 청동기 문화 한반도 전래시기도 앞당겨

강원도 속초 조양동 유적
강원도 정선 청동기 유적
그동안 신화 형태로 기술돼 온 고조선 건국 과정이 공식 역사로 편입됐다. 또 한반도 청동기 도입 시기도 최대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7학년도 역사 교과서를 이처럼 수정해 일선 학교에 보급하기로 했다.
따라서 고조선 건국과 관련, 기존의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고 기술한 대목은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됐다. ‘~한다’라는 말이 있고 없음의 차이는 엄청나다.
국사편찬위원회 장득진 실장은 "그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또 기존 교과서는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5세기∼기원전 13세기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새 교과서는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랴오닝(遼寧),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기술해 청동기 시대를 500∼1000년 앞당겼다.
이 부분을 집필한 최몽룡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강원도 정선과 춘천.홍천, 경기도 가평, 인천시 계양구 등지에서 최근 출토된 유물 등을 근거로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에 전래한 시기를 앞당겼다"고 말했다.
올해 국사 교과서를 수정하게 한 가장 큰 동인은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과 과학적 연대 측정의 결과다. 그동안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세기쯤이라는 한국 고고학계 통설은 이 시대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대 측정으로 흔들리게 됐다.
최몽룡 교수에 따르면 강원도 춘천시 신매리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기원전 1510년쯤으로 추정됐다. (최몽룡 외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연구>, 주류성 발간, 2004)
진주 남강 수몰지구에서 확인된 각종 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은 연대가 BC 10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BC 15세기 무렵으로 조사됐다.
남강 수몰지구 중 선문대 이형구 교수(역사학과) 조사팀이 발굴한 옥방 유적의 경우 집자리터에서 나온 목탄 2점에 대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각각 BC 1590-1310년과 BC 1620-BC 1400년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당시 이 교수는 “남강지역의 유적 연대는 대략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으나 기원전 14∼기원전 13세기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지적했다.
건국대 박물관이 다른 남강 수몰지구에서 발굴한 청동기 시대 주거지 출토 목탄 2점을 측정한 결과에서도 BC 1420-BC 1100년, BC 1400-BC 1100년으로 나타났고 경남대 박물관 역시 서울대와 캐나다 토론토대에 시료측정을 의뢰한 결과 기원전 10세기를 뛰어넘은 것으로 드러났다.
강원 지역의 경우 청동기 시대가 남강 유역보다 더욱 올라가고 있다.
강릉 교동 주거지 1호의 경우 그 연대가 무려 BC 1878- BC 1521년으로 나왔고 다른 두 곳의 주거지도 중심 연대가 BC 15세기 무렵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청동 도끼가 출토된 속초 조양동 청동기 시대 유적 또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연대 측정 결과 BC 1206-BC 830으로 나왔다.
 
진주 옥방5지구 각목돌대문토기 / 진주 옥방5지구 장방형집자리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왼쪽부터)
 
뿐만 아니라 조선대 박물관이 발굴한 전남 순천 죽내리 청동기 시대 주거지도 외국 연구소에 탄소 연대 측정을 의뢰한 결과 BC 16세기- BC 15세기라는 결과가 나왔다.
춘천시 신매리 유적, 강릉 교동 주거지,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지에서는 청동기 전기의 유물인 공열토기와 이중구연토기, 단사선문토기 등이 공통적으로 출토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양평 양수리의 두물머리고인돌의 덮개돌 밑 15cm 되는 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숯의 연대측정은 3,900±200B.P(MASCA 계산법으로는 4,140~4,240B.P)라는 절대연대를 보였다.
고고학자인 조유전 한국토지박물관장은 "남강 선사 유적만 해도 탄소 연대 측정치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연대를 BC 400- BC 500년쯤이라고 추정했다"면서 " 청동기 시대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과학적인 탄소연대 측정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교과서 수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기술에 대해 이견도 적지 않다. 한국교원대 송호정 교수(역사교육과)는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이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며 종래의 통설을 고수했다.
이에 대해 이형구 교수는 “기존의 교과서에 있는 청동기 시대 역사는 중국, 일본 사람들이 쓴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며 "고조선 영역이었던 한반도 서북지역의 청동기 시대 개막은 여러 가지 과학적인 증거로 보아 기원전 15세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윤내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은 “청동기 유물이 극소수 장신구이기 때문에 시대를 수정할 근거가 못 된다는 주장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청동기의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과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무시하는 견해”라고 반박했다.
이강승 충남대 교수(문화재위원)가 ‘청동기 있는 청동기 시대’와 ‘청동기 없는 청동기 시대’를 구분해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를 BC 10세기 아래로 본 데 대해 윤내현 소장은 “청동기 시대를 말해주는 유적(유물)은 청동기 말고도 얼마든지 있으며 과학적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나 중국의 청동기 시대와도 비교한 데이터 등을 종합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는 BC 15세기를 넘어선다”고 주장했다.
윤 소장은 특히 “중국 랴오녕성 북부와 내몽고 자치주 경계에 있는 훙산(紅山) 지역의 하가점(夏家店)’에서는 기원전 2400여 년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었다”면서 “한반도의 고인돌, 청동기 유물을 만주지역의 그것들과 비교 분석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BC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증거들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고조선은 수정된 교과서에 역사로 기술됐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신화’라는 통설에 갇혀 있다. 또한 고조선의 실체를 둘러싼 강단 사학계와 재야 사학계의 이견도 여전하다. 고조선이 명실상부한 ‘역사’로 자리잡기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허구의 종족 짱골라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2007년 02월 16일 |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중국근대간사’(中國近代簡史, 1954년)에 실린 중국의 실지(失地) 1949년 건국한 중국이 그 무렵부터 한국을 되찾아야 할 잃어버린 땅으로 여기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교과서의 일종.

 

 

중화삼조당 왼쪽부터 치우, 헌원, 신농. 신화의 세계에서 판천대전의 패배로 볼모로 잡힌 신농과 탁록벌판에서 잡아 죽여 그 시신까지 사방에 흩뜨렸다는 치우천황까지 졸지에 헌원과 함께 중화의 조상으로 둔갑했다.

 

중화삼조당 치우와 탁록대전 벽화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며 한족도 인정했던 철기문화의 선구자 치우천황을 졸지에 돌도끼를 든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등 억지를 부리다 곳곳에 논리의 허점을 노출했다.

 

 

 

 

 

칭기즈칸 유물, 한국이 찾는다

조선일보 / 입력 : 2006.07.24 00:34 34' / 수정 : 2006.07.24 00:36 23'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성과
몽골정부 “혈통 같은 나라를 파트너로 선택”
한국학자들, 칸의 직계 여인 유해발굴 개가

 

 
▲ ‘황금씨족’여인의 유해와 함께 발굴된 반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동북쪽의 타반 톨고이. 이 인적 드문 시골에서 지난해 무덤 한 기(基)가 발굴됐다. 그 안에서 목관(木棺)에 담긴 여성의 유골과 황동반지 하나가 나왔다. 이 소식은 대초원(大草原)으로 바람처럼 퍼졌고 고고학자들을 흥분시켰다.

여성의 유골 일부와 목관 조각, 황동반지는 곧바로 고려대 한국학연구소로 넘겨졌다. 발굴이 이뤄지기 한 해 전, “모든 칭기즈칸 관련 연구는 한국과 함께 진행한다”는 몽골 내각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출토물에 대한 탄소연대 측정 등 과학적 연구를 벌인 결과 주목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 목관은 칭기즈칸 생존기인 12세기말부터 13세기 초쯤 제작된 것이었다. 연구진을 더 흥분시킨 것은 목관의 재질이 버드나무였다는 점이다.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朱蒙)의 어머니가 ‘유화(柳花)부인’이고, 일각에서 몽골제국의 전신(前身)인 흉노 일족이 신라를 건국했다는 설의 근거로 제시되는 ‘버드나무를 닮은 신라금관’에서 알 수 있듯 버드나무는 북방 유목민들이 중히 여기는 4대 신목(神木) 중 하나다.

반지에서는 백색 매(白鷹)의 문양이 있었다. 이는 칭기즈칸의 직계 혈족을 이루는 ‘황금씨족’의 상징 문양이다. 그렇다면 여인이 칭기즈칸의 직계란 뜻인가? 왜 황금씨족의 일원은 중앙이나 서부가 아닌 동쪽을 유택(幽宅)으로 삼았는가?

김재열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교수(철학)는 “원래 칭기즈칸의 선조들은 돌궐, 유연 등에 억눌려 만주 부근에 거주하다 중앙으로 이동했다”며 “이 발굴은 칭기즈칸 연구에서 그간 베일에 싸여 있었던 동몽골에 대한 가치를 재인식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칭기즈칸 연구에 미국, 러시아, 중국·일본도 아닌 한국이 주도권을 행사하며 몽골 내각은 몽골사회과학원과 몽골국립대에 한국을 파트너로 하라고 지시했을까.

박원길 고려대 연구교수는 “칭기즈칸 ‘붐’에 편승해 최근 몽골 각지에서 각종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며 “그런데 땅만 팠다 하면 칭기즈칸 아니면 옹칸의 유물이 나온다”고 말했다. 개중에는 발굴자 집에서 목격됐던 것이 유물로 둔갑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옹칸은 칭기즈칸의 양(養)아버지다.

 
▲ 몽골제국 건국 800주년을 맞아 지난 10일 울란바토르에서 개막된 나담 축제. 칭기즈칸 시대의 행렬이 스타디움을 돌고 있다. /문갑식기자
몽골정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의 경우 과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유물을 약탈한 ‘전력(前歷)’이 있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혈통이 같은 한국을 파트너로 선택했다는 게 유영대 단장(국립창극단장·고려대 국문과 교수)의 말이다.

이런 ‘인연’을 바탕으로 고려대 한국학연구소팀은 지난 9일부터 8일간 동몽골에 대한 2차 답사를 진행했다. ‘황금씨족’ 관련 연구 성과를 전달하고 아브라가발가스~허더아랄~알탄오보~사르가골~고르반노프~델리운볼독~하조볼락~빈데르오보~아라샹하드~어글럭칭헤렘~허흐노르를 답사했다.

이 지역은 칭기즈칸이 라이벌 자무카와 결별한 ‘배신의 땅’, 칭기즈칸이 대칸에 취임한 ‘언약의 호수’ 등이 있는 곳으로 접근하기 힘든 험지(險地)다. 탐사는 러시아제 20인승 헬기를 동원해 총 비행거리만 4000여㎞를 넘는 대장정이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고려대 외에 서울대·한양대·건국대 교수들도 가세했다.

현재 몽골은 1206년 몽골제국 창립 800주년을 맞아 거의 ‘칭기즈칸 공화국화(化)’하고 있다. 1991년 민주화 이전 사회주의 치하에서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금기시됐던 것과 영 딴판이다. 몽골 정부는 올 3월 공항 이름을 ‘칭기즈칸 국제공항’으로 바꿨으며 전통 축제 ‘나담’도 지난 10일부터 최대 규모로 개최하고 있다.

간속 몽골국립대 총장은 “2010년 모든 연구가 종료될 때쯤이면 솔롱고스는 칭기즈칸 연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솔롱고스는 무지개 나라라는 뜻. 김한겸 고려대 교수는 “무지개는 비가 뜸한 몽골에서 신비한 현상으로, 먼 옛날 헤어진 형제의 나라 한국을 말한다”고 말했다.

 

동[東]몽골=문갑식기자 gsmo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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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인 거주 ‘할힌골’ 동몽골의 지명?

 

동몽골 지역은 부여, 선비 등 유목기마국가가 기반했던 곳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곳이 한동안 우리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몽골 국립대학에서 한국관계를 가르치는 바투르 국제관계학과 교수도 “이 지역은 삼국유사에서도 거론될 정도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삼국유사에 백제인들은 ‘할힌골’에 살았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할힌골이 동몽골 안에 있는 지명이라는 것이다. 할힌골은 1939년 일본이 러시아-몽골 연합군에게 패퇴해,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꾼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야생마늘과 쑥이 자생하며, 고려성이라는 유적도 남아 있다.

 

 

 

 

 

 

 

[홍산의 여신묘]

 

홍산문화는 요하강에서 만날 수 있다
여지껏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에서 우리의 문화는 항상 중국의 영향하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들어 발굴되는 이 유적들은 그런 관점을 완전히 반박한다

 

 

이 유물들을 보면 두 군데 유물들이 아주 유사한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홍산문화의 유물이 상(은)나라의 유물들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증거인 것이다

 

 

 

또 다른 사해유적 또한 마찬가지이다

 

 

 

적석총, 돌널 무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단군조선국의 영토에서 발견]

 

 

 

이런 자료는 우리 문화와의 유사성을 밝혀준다

 

 

고구려의 삼족오는 어떤 형태로 전해왔을까?

 

 

[민간의 부적]

 

조선시대에는 삼족오의 모습이 이런 형태로 바뀌기도 했다
우리 문화에서는 숫자 3이 가지는 의미를 알아야한다
보아라 다리 또는 머리가 3이지 않는가?

 

 

한웅배달국 홍산문화의 주류는 몽골, 만주, 연해주, 한반도, 왜열도, 중원 등 동아시아 대륙의 전역으로 퍼져 나가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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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들이 기억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태준 클릭참조>>   <<몽골쥬신 클릭참조>>

 

<<MBC 2부작, '곡옥의 비밀' 클릭참조>>   <<삼족오, 고대 한류를 밝히다! 클릭참조>>

 

▲  황제헌원이 사로잡혀 치우천왕 앞에 무릎을 꿇고있는 그림. 김산호화백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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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역사공정` [중앙일보]

 

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중국이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랴오허(遼河)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자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선사(先史)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기존 학계가 주장해온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유역에서 여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이른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에 따른 것이다.

17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문물국은 랴오닝(遼寧)성 뉴허량(牛河梁) 신석기 유적 등 35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할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에 포함했다.

국가문물국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예비 목록을 수정해 제출하도록 한 '세계문화.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1996년에 이어 이번에 목록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뉴허량 유적을 랴오허 유역에 분포한 북방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로 분류해 왔다. 랴오허 일대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이번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이들 문화의 원류인 랴오허 일대의 북방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사학계는 황허와 창장 유역을 중국문명권으로 분류하고 랴오허 일대는 중국문명과 뿌리가 다른 북방문명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올해 선양(瀋陽) 박물관에서 '랴오허 문명전'을 여는 등 일련의 역사 왜곡을 진행하면서 북방문명을 중화문명권에 편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새로 작성한 예비 목록에는 뉴허량 유적 외에도 ▶대운하(大運河)▶실크로드▶장경동(藏經洞)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에 있는 옛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목록에서 빠져 당분간 신청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비 목록에 오른 유산 중에서 2008년 32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 등재 신청할 유산이 최종 선정된다.

장세정 기자

◆ 뉴허량 유적=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 젠핑(建平)현 근교에서 1981년에 발굴된 신석기 유적. 북방 신석기 문명(기원전 7000년)의 하나인 훙산(紅山)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황허 유역의 중원 신석기 문명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랴오허강 일대에 기원전 3500년 무렵에 형성됐다. 섬세한 옥기(玉器)와 돌무지무덤(적석총)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의 두상(頭像)은 전형적인 몽골 계통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중원문명과 확연히 구별된다.

◆ 탐원공정=상고사를 고쳐 써서 선사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확대할 목적으로 중국 당국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에서 황허문명(기원전 3000년)보다 더 일찍 발생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당국이 이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를 편입하면 중국문명이 기원전 1만 년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정치 사정에 맞춰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6.12.18 04:26 입력 / 2006.12.18 0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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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세계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중국의 방해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서기전 4천500년~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玉(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초기(고조선 중기 이후는 철기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신석기 시대의 배달국 초기(한웅배달국 후기는 청동기시대)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즉 홍산문화는 단군조선 건국의 토대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라는 말이다.

◇2006년에 중국이 뉴허량 유적 등 35개를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遼河(요하)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探源工程(탐원공정)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 학자들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30년 전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앙소문화에서 하모도문화로 바꿔 재설정한 중국은 뉴허량 유적 발견 이후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 3대 문명의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漢族(한족)의 것과 엄연히 다른 동이족 문화인데도 과거 일제가 한 것처럼 한민족의 뿌리마저 잘라버리려는 역사왜곡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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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타종족명이 아니라 당나라에선 만주지역 거주인들을 범칭으로

        고구려에선 지방민을 비칭으로 부른데서 기원

한규철 교수

발해 병사의 무덤-발해토기, 고구려토기, 말갈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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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데게족-발해의 후예,사냥과 낚시 만주 비긴강 상류 거주

나나이족- 발해의 후예 사냥, 어로 연해주 해안가 거주

만주지역 소수민족들의 축제- 곰 토템, 생활 문화가 우리와 흡사.

유전자 검사와 비교

말갈인, 우데게인,만주거주 소수민족- 현대 한 민족의 구성에 참여한 친연성이 있는 고대 우리민족의 후예로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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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정체, 이태백도 "발해는 외국"

연합뉴스|기사입력 2006-09-18 08:48 |최종수정2006-09-18 08:48

발해가 새로 창제한 문자
동북공정 근거사료도 "대조영은 고구려 별종"

(홍콩=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 홍콩의 발해사 학자인 김광석(金光錫.62) 홍콩 능인(能仁)서원 한국학과 교수는 중국의 발해사 편입 시도는 중화 패권주의에 다름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교수는 지난 91년 홍콩에서 `발해족의 형성과 그 사회형태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해외 학계에서 처음 발해사 연구로 인정받은 한국학자다.

김 교수는 18일 그간 한국에 공개되지 않았던 이 논문을 토대로 그간의 남.북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발해 사료 및 연구결과를 집대성해 발해사가 중국사가 아니라는 근거를 조목조목 짚었다.

◇말갈은 고대 한민족 = 말갈족은 북방 이민족이 아닌 우리 한민족의 일원으로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를 건국한 주도세력이었다.

발해가 건국되던 6세기말 7세기초 시기에 지린(吉林)성 등 동북지방에 7개 말갈족 부족이 있었다. 한민족의 원류인 북방 예맥계가 3개 부족, 고아시아 숙신계가 4개 부족이었고 숙신계 흑수말갈을 제외한 6개 부족이 발해에 흡수됐다.

김 교수는 "`말갈(靺鞨)'이라는 부족명은 중국이 이민족을 경시해 붙여준 명칭"이라며 "우리에겐 백제와 신라를 침략한, 문화수준도 낮고 야만적인 이미지를 풍기고 있지만 사실은 고대 한민족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말갈족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었던 예맥계 속말말갈이 발해 건국의 주체가 됐는데 속말수(粟末水.지금의 제2쑹화강)에서 유래된 속말말갈은 부여 계통으로 고구려와 혈연, 지역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수한 철기문화를 자랑했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는 오히려 말갈부족과 연합해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고구려 멸망후엔 고구려 유민들이 속말말갈 사회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속말말갈 외에 동옥저, 남옥저의 후예인 백산(白山) 말갈도 역시 예맥계로 발해 건국에 참여했다.

헤이룽장(黑龍江) 일대에 근거지를 둔 흑수말갈은 발해에 복속되지 않은채 발해와 군신관계를 유지하다 여진족에게 흡수돼 후에 여진족의 나라 금, 청나라의 주도세력이 됐다.

◇대조영도 고구려계 =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속말말갈 부족장 걸걸중상(乞乞仲象)의 아들로 당시 고구려 영토에서 살던 고구려 유장이었다.

중국이 발해사에 대한 동북공정의 근거사료로 쓰는 구당서(舊唐書)에도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별종(大祚榮者, 本高麗別種)"으로, 신당서(新唐書)엔 "고구려에 붙어있던 속말말갈 사람으로 성은 대씨이다(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로 기술돼 있다.

고구려 멸망후 영주(營州.지금의 랴오닝 차오양(朝陽) 일대)에 강제 이주된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은 거란족과 함께 도독의 잔혹한 통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당의 여제 무즉천은 이들 반당(反唐) 세력을 이간질시키기 위해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봉했다. 속말말갈은 이전부터 자신을 진국으로 칭해왔다.

책봉을 거부하고 당군과 맞서 싸우던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가 전사하고 걸걸중상도 사망하자 걸걸중상의 태자 대조영은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 당군의 추격을 물리치고 고구려, 말갈 세력을 규합해가며 실력을 키웠다.

697년 대조영은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 됐으며 713년엔 발해로 개칭했다.

발해 나라명에 `國' 사용은 자주독립 공동체 뜻

독자적 신문자 사용.고구려 풍속 그대로 이어


◇발해 지배층 예맥계가 주류 = 발해 건국 초기의 인구는 78만명에 불과했으나 고구려 유민을 지속적으로 흡수하고 거란족 190만명과 여진족 60만명을 직접 통치하게 됨에 따라 전성기 시절 인구는 300만명으로 늘어났다.

발해사회 지배계급의 주체는 예맥계 속말말갈 대 씨 왕족과 고구려 귀족관료 출신인 고 씨, 말갈 각 부족 추장, 일부 한족 지주들이었다. 중국 학자가 쓴 발해국지장편(渤海國誌長編)엔 발해 지배계급은 모두 317명이었는데 대 씨 90명, 고 씨 56명, 장 씨 30명, 왕 씨 22명, 리 씨 18명 등으로 속말말갈과 고구려가 주축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드물게 눈에 띄는 박 씨와 최 씨도 신라계나 고구려계일 가능성이 있다.

◇이태백도 "발해는 외국" = 당나라 사람들은 당시 발해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발해는 당시 나라명에 `국(國)'을 사용했다. 이는 자주독립 공동체였다는 의미이다. 당시 발해문자에 능통해 발해 외교문서의 번역을 맡기도 했던 시선(詩仙) 이백(李白)도 발해를 고려(고구려의 의미)나 백제로 부르며 외국으로 취급했다는 기록이 이백의 시문집 옥록총담(玉록<鹿+土>叢談)에 기록돼 있다.

이백의 혁만서(하<口+赫>蠻書)에선 또 당나라 사람들이 발해를 습관적으로 고려, 백제로 칭했다는 말이 나온다.

특히 발해가 독자적인 신문자를 사용했다는 점은 어느 나라에도 예속되지 않은 자주성을 갖춘 국가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발해가 한자를 사용하긴 했지만 한글의 원형이라는 알려진 가림다(加臨多)와 유사한 글자를 별도로 만들어 사용했을 정도로 문자 사용에선 중원왕조와는 이질적이었다. 단군 고조선 시대의 석각도 발해문자 창제에 참고가 됐을 것이라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이와 함께 지배계급인 예맥계 고구려와 속말말갈은 북방 몽골어계통 언어를 사용, 의사소통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김 교수는 또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발해의 토장(土葬) 매장방식이나 제사, 전설, 가무 등을 비춰볼 때 고구려의 풍속을 그대로 이어받은 자주국이었다고 논박했다.

독자적 연호 사용..당도 결국 `國'으로 인정

◇당나라와 전쟁도 불사 = 고왕 대조영에 이어 2대 무왕 대무운(大武芸)은 인근 부족을 정벌, 인안(仁安)을 독자연호로 채택하고 정권을 공고히 한 다음 당 현종이 아직까지 복속치 않았던 흑수말갈 지역에 흑수도독부를 두자 즉각 토벌에 나섰다.

발해가 출격에 나서자 당은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토록 했고 이로인해 신라와는 줄곧 긴장관계에 놓이게 됐다. 대무운은 당으로 망명 투항한 형 대문운(大門芸)을 살해하려 낙양에 자객을 보내는 등 당과는 갈등 관계에 있었다. .

대흠무(大欽茂)가 3대 문왕으로 등극하면서 발해는 당시의 최강국 당과의 화평외교에 힘쓰면서 내치 개혁에 주력했다. 762년 당은 발해를 나라(國)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김 교수는 "발해는 계속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고 34차례에 걸쳐 일본에 외교사절을 파견했으며 또 당나라와 자주 전쟁을 벌인 점은 독립 주권국가라는 사실을 말해주기에 족하다"고 말했다.

책봉, 조공, 수작(受爵)은 당시 강대국에 대한 외교방식의 하나였고 당나라식 행정제도 도입은 중원의 선진문화를 흡수한 것일 뿐 이를 당나라에 예속된 일개 지방정권으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라는 것이다.

◇`동거란'이 발해 계승 = 10세기초 발해는 귀족 권력투쟁과 국정 불안으로 사회모순이 커지면서 925년 거란의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의 침략을 초래한다.

1년만에 홀한성(忽汗城)이 함락되고 애왕(哀王)이 투항함으로써 발해는 229년만에 역사에 종언을 고했다. 고구려계인 고영창(高永昌) 등에 의한 발해 부흥운동이 세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아보기는 그러나 곧바로 발해국 영토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태자를 인황왕(仁皇王)으로 앉히며 발해국 계승을 선언했다.

당시 발해 유민 300만명중 190만명은 동단국에서 거란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나머지 110만명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중 10만여명은 고려로 넘어갔고 60만명은 여진으로 도피했으며 1만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왕족 2명, 귀족 25명을 포함 발해 유민이 대거 고려로 들어오자 고려는 이들을 후대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는 본래 우리의 친척 국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동단국은 이후 동거란으로 국명을 바꾸면서도 발해의 행정체제와 규모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사실상 동단국은 발해국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발해는 거란 이후 동북지방의 주도세력이 된 여진과도 특수관계를 맺고 있었다. 흑수말갈이 합류한 여진의 금나라는 당시 동북지구에서 최고 문명을 자랑하던 발해를 대거 포섭해 끌어들였다. 금나라의 역대 황제 가운데 발해족을 생모로 둔 황제는 해릉왕, 세종, 위소왕 등 3명에 이른다.

jooho@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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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을 침략한 쥐나의 점령군은 티베트의 봉건적인 잔재를 일소하고 학교, 병원, 철도, 그리고 영화 산업 등의 광범위한 현대화를 약속하면서 대중을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쥐나공산국 라디오와 신문, 광고, 영화를 통하여 쥐나는 달라이 라마를 공격하였으며 티베트의 불교를 격하시켰고 티베트의 전통 문화가 구태의연하다고 비방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티베트인들의 적의를 바라보기만 했던 짱골라들은 차츰 그들이 자신들의 선전에 동조하지 않고 공산주의를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마침내 분노를 터드리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선동이 실패하였음을 깨달은 쥐나는 협박과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존경받는 종교·정치가들을 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범죄자로 몰아 폭행하거나 고문하고 마침내는 사형시켰습니다. 수도자, 여성, 무력한 시민이 고통받고 있는 것을 참다 못한 티베트인들은 산발적인 저항을 하였는데 이는 티베트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수천만 티베트 인들이 체포되고 보복을 당했습니다.  
1959년 3월 10일 시위에 참여한 약 1만5천 명의 티베트인들이 사살되었으며 그들의 시신이 라사 거리에 나뒹굴었습니다. 쥐나가 저지르는 폭력과 살인을 목격한 달라이 라마는 쥐나와의 조약이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도로 피신했습니다. 3월 28일 쥐나 수상 주은래(저우언라이)는 티베트 정부의 해체를 발표하였습니다.  
친절을 가장한 그들의 속셈이 드러나자 쥐나 군대는 티베트인들에게 폭력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년이 지나지 않아 중앙 티베트에서 약 8만7천 명의 티베트인이 사살되었습니다. 포탈라 궁과 노르불링카 궁은 모두 공격을 받았고 신성한 간덴 수도원과 라모체(小初寺) 사원은 파괴되었습니다.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티베트를 지배하려는 쥐나의 의중에는 티베트의 불교를 탄압하려는 속셈도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와 불교는 공존할 수 없었죠. 쥐나 점령군은 사원의 체계와 학교, 사원, 성지 그리고 티베트인들의 순수한 신앙까지도 탄압하였습니다. 1976년까지 6,259개에 달하던 티베트의 사원 중에서 몇 개만이 그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백만명에 이르던 수도승과 여승의 사분의 일이 자신의 종교를 포기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폭행당하고 살해되었습니다. 성스러운 긴 역사의 교본들이 불에 태워지거나 군대의 뒷간에서 사라져갔습니다. 신성한 사원의 금, 귀한 보석류들은 사원이 폭파되기 정에 강탈되었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티베트인의 문화재인 도자기, 불상, 벽화, 세공품들이 쥐나로 실려갔습니다. 이렇게 실려간 것을 녹여서 쥐나는 메달을 만들거나 국제 골동품 시장에 내다 팔아서 외화를 벌여들였습니다.  
수천 명의 억류자를 수용하고 점령 초기의 재건축 사업을 위한 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쥐나는 여러 개의 감옥과 노동 수용소를 지었습니다. 감옥에 수감된 이들은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거나 굶어죽었습니다. 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은 티베트의 천연자원을 체계적으로 수탈하는 일에 노예처럼 부려졌습니다.  
이런 일련의 모든사태의 심각성은 탄압에 반기를 들던 1959년보다 나아질 바가 없었으며 1966년이 되어서는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죠. 이때 티베트는 가장 급진적인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쥐나 사회를 대규모 재편성시켰던 문화혁명의 회오리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10년 간의 광적인 공포 정치가 실시되었으며 그러는 동안 수천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강탈범들이 전역을 돌며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였죠.  
사원에 딸린 대학의 교육 과정에 심각한 규제가 가해졌으며, 쥐나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학생들만 입학이 허가되었습니다. 교본과 지도자 그리고 그 외의 교육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였죠.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불교 의식만이 허가되었으며 수도승들은 쥐나 당국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조금만 그들의 체제에 위반되어도 체포나 고문을 받았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1984년 티베트 봉기 25주년 기념식에서 발표한 성명서에서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파괴된 사원을 복구함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는 것처럼 선전을 하였지만 종교 단체에 가입하거나 불법(佛法)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장애가 뒤따랐다. 인상적인 구호를 사용하여 종교와 국가 자치의 자유를 보장하였다는 것은 단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했다.  
종교개혁이 환상에 그치고 말았듯이 쥐나의 경제자유화정책도 인권 신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티베트에서의 정치적 자유는 실천되지 않았다."  
1980년 전반에 걸쳐 정치 활동을 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은 체포되거나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쥐나 경찰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향한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티베트의 시위자들은 결속하였고, 쥐나 보안 당국의 탄압에 강하게 맞섰습니다. 1988년 북경 정부는 모든 불평불만자들을 엄단하겠다고 공포하였고 1989년 3월 7일 라사에 게엄령을 발표함으로써 두 민족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수백 명이 살해되었으며 수천 명이 체포되었는데 이것은 그 해 말 북경 정부에 의해 자행된 천안문 광장에서의 대학살을 알리는 서곡에 불과하였습니다.  
1990년 5월 계엄령이 철폐되었으나 티베트의 보안군은 여전히 쥐나 통치에 대항하거나 의심이 가는 사람을 체포하고 구금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1992년 쥐나는 체제 전복을 도모한 사람들과 연관된 자료를 찾아내기 위하여 가택 수사를 실시하였습니다. 불교 관련 책자를 비롯하여 달라이 라마와 연관있는 것, 그의 연설, 녹음 테이프, 기도문, 저서 등이 검열 대상에 포함되었습니다. 3년 후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보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공포되었죠.  
북경 군부에 의해 수행되는 현대화 과정은 전국적으로 환경에 대한 심각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티벳은 이러한 충격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죠. 그러므로 티벳의 생태적 황폐는 舊蘇聯이 비러시아지역에서 자행했던 환경 파괴처럼 쥐나의 티벳환경 파괴는 또다른 민족적 저항을 유발시키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습니다. 티벳에서 表層土의 잠식을 가중화시키는 짱골라들의 고대 삼림에 대한 벌목 행위 특히 극심한 환경 파괴였습니다. 쥐나의 삼림정책 결과로 한때 티벳의 풍부했던 삼림은 황폐화되고 총 25만km2가 넘는 지역이 철저히 벌거숭이가 되었습니다. 이 숫자는 티벳 총면적의 1/6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입니다.  
환경 평가를 완전히 무시한 티벳 지하자원의 채굴은 철저히 생태계를 황폐화시켰습니다. 우라늄 광산들은 특히 티벳에서 환경 파괴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1993년 20여년 동안 쥐나는 티벳을 핵폐기물의 저장소로 사용해 왔습니다. 특히 서북지역 핵무기연구소는 1960대부터 많은 핵폐기물을 생산했으며 이곳의 핵폐기물들은 모두 티벳 지역에 저장했습니다. 쥐나가 방사선 물질에 대한 안전 기준을 강화하는데 실패했다는 의심은 핵폐기물 저장 시설 주변 지역에서 암환자가 급증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환경문제의 무관심 때문에 수많은 티벳인들은 방사선 오염 물질에 노출된 육류를 먹은 후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경제적 현대화문제와 완전히 상관이 없는 또다른 행동에서 쥐나는 티벳을 핵무기뿐만 아니라 강력한 재래식 무기의 저장 기지로 만들었습니다. 최근 티벳에는 인도를 겨냥한 3개 미사일 기지의 존재가 보고되었습니다.  
1988년과 1989년의 폭동에 뒤이어 쥐나당국은 티벳의 정정 불안에 대한 복잡하고 특별한 반응이 쥐나의 목적이 결핍되는 곳에서 쥐나는 일반적인 독재자들이 사용하는 직접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티벳인들을 억압하기를 결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1994년까지 라사에만 6개 감옥소가 있어서 언제든지 수백명의 정치범을 투옥시킬 수 있죠. 인권운동가들에 의하면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라사의 6개 감옥소에 구속된 정치범의 숫자는 3~40%나 증가했습니다. 수많은 정치범들은 외부와 통신은 단절 상태에 있으며 끝없는 심문과 구타 행위를 당하고 있습니다. 타지역에 있는 감옥소 숫자는 불분명하지만, 엄청난 政治犯들을 수용할 시설일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근 신강성(신강 위구르 자치구)와 청해성에 있는 악명 높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수천 혹은 수만명의 티벳인들이 죽어 간다는 발표도 있었습니다.  
이번 2008년 티벳독립시위대의 불만 표출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짱골라의 경제적 지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짱골라는 티베트 인구에서 겨우 3.3%를 차지할 뿐이지만, 티베트 상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습니다. 반면, 인구의 96%를 차지하는 티베트인들은 주로 농촌에서 농업이나 목축으로 생계를 꾸립니다.  
한 티베트 문제 전문가는 <에이피>(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문제는 쥐나가 티베트인을 배제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티베트는 쥐나에서도 소득 수준이 낮은 곳에 속합니다. 2005년 티베트 도시의 1인당 가처분소득은 9431위안으로, 쥐나 평균인 1만494위안에 많이 못미친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소득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주는 엥겔계수도 44.5로, 쥐나 평균인 36.7보다 높습니다. 농촌에선 격차가 더욱 큽니다. 1인당 순소득은 2077위안으로, 쥐나 평균인 3254위안보다 떨어집니다.  
쥐나의 티베트 자치구 라사와 주변 성에 이어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에서도 22008년 3월 23일과 24일 대규모 시위가 연이어 발생했다고 홍콩 동방일보(東方日報)가 지난달 31일 보도했습니다. 신문은 신장 자치구 호탄에서 일어난 시위에는 약 1000명이 참가했으며 출동한 진압경찰에 의해 500명 이상이 강제 연행됐다고 전했습니다.  
쥐나에서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소수민족 위구르족의 활동가들로 이뤄진 '세계위구르대표대회' 대변인은 이번 시위 참가자의 80%가 여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위대는 지방 정부가 미혼여성을 저임금을 받고 일하도록 강요하는데 항의하는 한편 수감된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죠.  
쥐나당국은 다른 신장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위 관련 정보가 퍼지지 않게 강력히 단속하고 있는 것으로 신문은 지적했습니다.  
 
티벳과 위구르에서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립운동중입니다. 티벳, 위구르는 망명정부가 존재합니다.  
다른 소수민족으로 어떨까... 쥐나공산국이 탄생할때 모택동이 약속한게 바로 소수민족독립이었습니다.  
국민당과 전쟁중에는 쥐나가 한개성 단위로 쪼개져도 좋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모택동입니다. 그래서 쥐나공의 성립후 자치구가 등장하죠.  
쥐나에 56개 이상의 민족들이 있습니다. 쥐나정부가 크게 나눈 민족이 56개이고, 자잘한 민족은 훨씬 많습니다.  
쥐나인민공화국 탄생시 짱골라 한족 비율은 50% 이하였습니다. 50년만에 나머지 소수민족들 4~50%가 우주로 이민갔습니까? 아니죠. 무늬만 한족입니다.  
짱골라 한족은 어떨까? 후진타오가 공식석상에서 이런 말을 했죠.  
" 현재 삼민주의가 대세니 뭐니하고, 자치권을 요구하는 무리가 많다. 이런 분열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  
삼민주의, 자치권을 소수민족이 부르짖을까? 아니죠. 저기 상해, 절강성같은 잘사는 연해 동네에서 부르짖는 겁니다.  
자신들을 상해인이니 홍콩인이니 하면서 타지역과 다르다고 주장하죠~  
순수 짱골라들도 이러는 판국입니다. 쥐나가 제일처음 분열하는 곳은 소수민족자치구가 아니라 홍콩, 상해, 심천, 광주 같은 잘사는 지역부터 떨어져 나간다고 하죠.  
 
짱골라들이 원나라, 청나라 때부터 티벳을 차지했다고 새빨간 저짓말을 하는데 정말 어이 없습니다.  
원나라는 배달 흉노계 몽골족의 역사이고,  
금나라와 청나라(후금)은 고구려,발해 후예 배달 부여계 말갈(여진)족의 역사입니다.  

 

쥐나의 행태와 그들의 흑심에 대해 더욱 현명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나무와 숲 둘다 다 봐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이의 미묘한 상호간의 흐름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짱골라에 대해 거짓과 진실을 더욱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값싼 동정에 앞서 차가운 이성으로 판단하고 잘 가려낸 후에야 비로소 뜨거운 감성으로 포용할 수 있는 겁니다.

사기꾼에게 도움을 주려 노력하는 것은 착한 짓이 아니라 어리석은 겁니다.

왜냐? 속아서 사기를 당하는데 그것이 어찌 선행이 됩니까...
도움을 줄 여력은 한정되어 있는데 아무 판단없이 손을 내밀다가는 사기꾼에게 사기만 당하고 진정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는 못 돕는 꼴이 될 겁니다.

  

<<“후진타오가 동북공정 지시·승인” 클릭참조>>   <<동북공정 역사왜곡 현장에 가다. 클릭참조>> 

 

<<쥐나인민군, 北체제 붕괴시 북한에 파병 추진 클릭참조>>  

 

<<쥐나의 흑심 '이어도' (SBS뉴스추적 요약) 클릭참조>>  

 

<<짱골라들, 있지도 않은 암초 이어도해역에 표시 클릭참조>>   <<왜놈과 짱골라의 만행 클릭참조>>

 

<<짱골라들의 억지 각각에 대해 파헤쳐보자! 클릭참조>>

 

<<“독립운동가의 손녀라고? 반골의 피는 어쩔 수 없군.”... 클릭참조>>

 

 

 

 

허구의 종족 쥐나 짱골라의 왕조는 한, 송, 명 3왕조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동이계, 흉노계, 융족계 등의 배달겨레 왕조들이다.

 

즉 우리 배달겨레 형제들의 발견, 발명 등의 업적이자 역사이다.

 

쥐나 짱골라족의 역사탐원(동북, 서북, 서남)공정의 목적은

 

배달 한민족(동이계, 흉노계, 융족계 등 수많은 배달겨레)으로부터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 그리고 그 갈래왕조들의 모든 업적을 노리는 야욕이다!

 

 

 

  

 

 

중국사료에 나타난 동이 고조선의 실체

 

동방문화의 뿌리는 漢族이 아니라 韓族  최초 확인(신동아.2004.2)


● 우리의 조상 동이는 개벽이래 중국에 살았다.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민족의 뿌리, 동양문화의 주역이다

●강태공, 맹자, 묵자도 동이족.

●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

●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는 동일 민족이다.

사고전서’에서 단군과 동이족의    

실체를 확인한 심백강 원장 ▼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여러 ‘고기(古記)’ 등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적지 않은 역사서적들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일제 36년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런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동이는 고조선의 열쇠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위시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하지 않고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 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시대적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중의 동이사료’ 등 4 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은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로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淸)나라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가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사고전서’ 중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해당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의 길이 열리는 것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 보기로 한다.

 


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게 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냥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嵎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등이 그것이다. 이자(夷字)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러한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융적(戎狄)이 존재한 것이 그 유래가 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어서 이들 이적(夷狄)들은 사실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개벽(開闢)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또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전 중국에 걸쳐 사방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兗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로부터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사고전서-사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柢)이다(夷者柢也).”

 

여기서 이(夷)를 저(柢)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柢)란 과연 무엇인가. 저(柢)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柢)’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柢),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柢)의 의미를 다시 저지(柢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柢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그 뿌리를 두고서 움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柢地)의 저(柢)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柢)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 동안 알아 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뿌리 이자, 즉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 이자로 변질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고전서’에는,

“맹자가 추나라 사람으로,
추나라는 춘추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동이국가”라고 기록돼 있다

 


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고 하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보이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 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지인(東夷之人)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의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라 하였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맹자가 말했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에 의해 건립된 은은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까지도 모두 동이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 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지게 된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書經’의 ‘우이’가 바로 고조선

‘사고전서-경부’ ‘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嵎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다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도군(玄?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嵎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도,낙낭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도,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우리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가 묻혀버렸을 수도 있는 일로서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러나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밝힌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하는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 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 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나라 ‘구이’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 자료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은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한 분으로 자칭 군자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본다면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고구려,부여,삼한의 기원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馯=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말한 것이다. 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이들이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漢唐) 이전 우리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16)에 건국된 것으로 기술하여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서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가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널리 섭렵할 수 없다보니 어쩔 수 없는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이상 잘못 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다 보니,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인양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한 동이이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동이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도,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인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문헌상 최초의 동이인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모두 동이족 출신이었다.

 

넷째, 부여(夫餘)의 뿌리가 부유(鳧臾)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鳧山)이 발원지이며, 고구려가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고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출발점이 없는 한국사

오늘날 중국에는 몽고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 양대민족으로부터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한족의 시조는 황제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황(炎黃)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 온 우리 역사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모습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두파 세파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역사의 단절로 인한 민족 얼의 상실에 있다.


국사교과서 새로써야

우리 국사교과서는 출발부터 기형이다. 왜냐하면 단군 조선 1000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하고, 기자조선은 ‘기자동래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되어 침략자 신분인 연나라 사람(燕人) 위만(衛滿)의 위만조선으로부터 우리의 실제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이런 역사교육이 국민에게 민족적 긍지와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줄 리 없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도(東京) 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고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이후 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앞으로 만일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심백강 沈伯綱


1956년 경기 파주 출생
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연구직 전문위원,중국연변대 객원교수
월간 ‘한배달’ 편집인
저서: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조선왕조실록중의 단군사료’

        ‘조선왕조실록중의 기자사료’ ‘이이 왕안석 경제개혁사상 비교연구’ 등

 

 

[펌]중국 사료에 나타난 동이 고조선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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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역사와 뿌리
  

누가 단군조선을 신화라 말하는가
심백강 박사, 중국 ‘사고전서’에 기록된 역사 밝혀내 … 역사학계 능력부족으로 실체규명 외면

”요(堯) 임금 때인 무진년(B.C. 2333년)에 신인(神人·성인보다 한 단계 위의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조선인(朝鮮人)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단군(檀君)이라 칭했다. 이것이 조선이 나라를 세운 시초다.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략’(通志 )에 이르기를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했는데, 한(漢) 시기의 낙랑군이 그곳이다. 모씨(茅氏)의 ‘상서록’(象胥錄)에 의하면 단군과 아울러 기자(箕子)도 왕양(王壤)에 도읍을 정했다. 역사에서는 위만도 왕험에 도읍을 정했는데, 곧 평양이다. (하략)”

단군의 실존에 관한 중국측 역사 기록 중 한 대목이다. 굴 속에서 21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어 여인으로 변신한 곰과 사람(환웅) 사이에서 단군이 태어났다는 식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도 청나라 때의 유명한 역사학자 오임신(吳任臣)이 지은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라는 정통 사서에 등장하는 글이다. 중국 진(晋)나라 학자 곽박이 지은 ‘산해경주’를 바탕으로, 오임신이 그 주석을 널리 보완하는 형식을 취하며 지은 ‘산해경광주’. 현재 전체 18권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돼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과연 ‘사고전서’란 어떤 책인가. 중국 청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총서로, 선진(先秦) 시대에서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주요 전적들을 가려 수록한 책만 무려 7만9000여권. 연인원 3000여명이 동원돼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는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도 사고전서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다.

 

 

단군역사 언급 9종류 확인

 

바로 그 ‘사고전서’를 일일이 뒤져 단군에 대해 기술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밝혀낸 한국인 학자가 있다. 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강동민) 원장인 심백강 박사(47·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그 주인공.

“사고전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된 체제입니다. 이중 단군의 역사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자부에 3개, 사부에 4개, 집부에 2개 등 모두 9종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이 외면하는 단군 역사를 중국 정통 역사서가 뒷받침해 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최근 심박사는 중국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찾아낸 것들을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민족문화연구원 학술총서 제7집)라는 자료집으로 엮어냈다. 원서 그대로 수록한 이 책은 대중서라기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자료 성격이 짙은데, 단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대목을 네모꼴 모양으로 굵게 표시해 두었다. 그중 한 대목을 찾아 띄엄띄엄 읽어보니 매우 충격적이다. “전부(錢溥)가 지은 ‘조선국지’에 의하면 세 종류의 조선이 있다. 하나는 단군조선이요, 또 하나는 기자조선이요, 나머지 하나는 위만조선이다….”(‘산해경광주’ 18권)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가 단군이 B.C. 2333년에 조선(고조선)을 세웠다는 정도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과는 달리, 이 중국측 기록은 고조선이 하나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 세 단계의 역사를 밟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심박사는 더 흥미로운 사실도 지적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인정받던 단군의 실체가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은폐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던 명나라도 단군 역사를 교묘하게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고전서 집부(集部) 편에 역대의 부(賦)를 모은 ‘어정역대부휘’(御定歷代賦彙·청나라 때 편찬됨)라는 책이 있어요. 이중 단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것이 조선부(朝鮮賦)라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명나라 효종 때의 동월(董越)이라는 사람인데,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또 관련 자료를 참고해 조선부를 지었다고 하지요. 아마 중국인의 입으로 단군조선을 직접 언급한 현존 자료 중 가장 시기가 앞선 기록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고전서 사부(史部) 편에도 똑같이 실린 원래의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쏙 빠져 있어요.”

 

 

“고조선은 하나 아닌 3단계 역사”

 

그러니까 명나라 때 처음 씌어진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빠져 있는 대신, 그 후인 청나라 때 편집한 ‘어정역대부휘’ 안의 조선부에서는 똑같은 저자의 이름으로 단군조선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객관성과 권위를 따져볼 때 어정역대부휘가 단연 앞섬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심박사는 이를 두고 “명나라에서 우리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려 했던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는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동이족보다 그 역사가 짧은 한족(漢族)이 주도적으로 세운 명나라는 대국의 자존심상 동이의 후손인 조선을 깎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단군과 고조선 관련 사료는 명나라의 직접적 간섭을 받던 조선조 때 많이 인멸됐고, 이후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의 말살됐다는 게 심박사의 해석. 그러다 보니 강단 사학계 일각에서는 단군 역사를 실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해 신화로 취급하거나, 심지어는 고려 때 항몽전쟁이나 일제 때 항일민족주의 감정의 소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는 중국의 문헌을 근거로 단군의 실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심박사는 이 자료집 외에도 16∼17세기 문헌인 ‘조선세기’(朝鮮世紀)를 처음으로 발견한 학자로 유명하다. 명나라의 오명제(吳明濟)가 지은 이 책은 조선 영조 때 편찬됐다가 고종 때 중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역대서적’조에 제목만 전해져 오던 것이다. 지어진 지 4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본 ‘조선세기’는 특히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등 삼조선의 역사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는데, 위만조선부터 다룬 사마천의 ‘사기’나 기자조선 이후만 인정하는 대부분의 중국 사서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또 단군왕조의 시작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신화적 내용 대신 “가화합(假化合)을 이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우리나라 학자들은 광복 5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고전 문헌에 산재한 단군 및 고조선 사료를 왜 찾아보지 못했을까. 심박사의 해석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는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자주적 사관이 없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한문 해독능력 문제를 꼽을 수 있을 거예요. 중국 원전을 해석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 그런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이렇게 단언하는 심박사는 한학자 집안에서 자라 5세 때 천자문을 독파하고 16세 이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수재. 19세 나이에는 당대의 유명한 학승 탄허 스님을 만나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는 등 뛰어난 한학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1983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연구하다가 10년 만에 교수직을 그만둔 그는 현재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사학자들의 단군 및 고조선 연구를 돕기 위해 주로 중국측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고 있다.   

< 안영배 기자 > ojong@donga.com
발행일 : 2002 년 08 월 29 일 (349 호)
쪽수 : 66 ~ 67 쪽

 

 

 

 

 

 

‘역사왜곡 바로잡기’ 또 하나의 밑거름 [중앙일보]

 

 

동북공정·임나일본부 등 동북아시아의 ‘뜨거운 감자’인 ‘역사 전쟁’을 풀기 위한 한국 측 관계자들의 노력이 잇따라 결실을 거두고 있다. 중국과 일본 측이 입맛에 따라 내놓는 ‘일방적’ 주장에 맞서기 위해 우리 쪽에선 사료적 근거를 찾는 데 집중해 왔다. 역사서에 남은 기록보다 더 객관적인 자료는 없기 때문이다.

올 초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유영렬)가 펴낸 『한국고대사료집성-중국편』(전7권)과 2003년 민족문화연구원(원장 심백강)이 펴낸 『사고전서(四庫全書) 중의 동이(東夷) 사료』(전4권) 등은 그 같은 노력의 일환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동아삼국관계사료전집(東亞三國關係史料全輯)』(전5권·이하 『사료전집』)이 중국 옌볜(延邊)대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중국의 정사(正史)인 『이십육사(二十六史)』와 『명실록(明實錄)』 『청실록(淸實錄)』 등에 실린 한·중·일 3국 관련 사료를 발췌해 수록했다. 무엇보다 기존 자료집보다 수록된 자료가 방대하다.

이번 『사료전집』이 다루는 시기는 기록이 남아 있는 요순시대부터 1912년까지다. 옌볜대·지린대·랴오닝대 등 9개 단체의 중국측 전문가 60여 명이 참여했다. 1999년 시작해 올해까지 8년이 걸렸다. 총 7500쪽 분량이며, CD롬으로도 제작했다. 남겨진 숙제는 역주(譯注) 작업이다. 중국 학자들이 중국 역사책을 저본으로 옌볜대출판사에서 출간했지만, 제작 전 과정을 한국 관계자들이 책임졌다. 후암미래연구소장이자 한국불교신문 사장인 차길진(60·사진)씨가 기획·출간 등을 총괄했다. 제작비 5억여원은 이재욱 한국노키아 명예회장이 후원했다.

중국 역사서에서 한·중·일 3국 관련 사료를 발췌해 만든 『동아삼국관계사료전집 』이 최근 출간됐다. 우리 역사의 숨겨진 부분을 새롭게 밝혀낼지 주목된다. 사진은 당나라 시대의 수도였던 시안의 대상(실크로드를 오가던 낙타 상인 집단) 조각. 고구려 후예인 고선지 장군도 시안 일대에서 활약했다.[중앙포토]
차 소장은 “더 많은 인력과 비용을 들인다 해도 앞으론 이런 일을 해내기 힘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북공정 여파로 최근 중국 측의 견제가 심해져 사료를 수집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570여 만여 자의 한자를 CD로 만드는 작업도 어려웠다고 한다. 잘 쓰지 않는 한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차 소장은 “이번 『사료전집』의 목차를 후암미래연구소 홈페이지(www.hooam.com)를 통해 공개해, 원하는 이들에게 복사비만 받고 내용을 제공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민덕식 교육연구관은 “학자 개개인이 엄청난 규모의 사료를 혼자서 다 찾아볼 수는 없기 때문에, 필요한 자료를 바로 선택해 볼 수 있게 한 이 같은 사료집의 편찬은 중요한 작업”이라며 “지금까지 학계에서 확인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이들 사료집을 통해 새롭게 밝혀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배영대 기자

2007.07.31 05:08 입력 / 2007.07.31 05:56 수정

 

 

 

 

 

 

# 중국사서에 나타난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이 자료는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에 대한 종족, 영토, 문화상으로의 역사적 증거들을 중국의 사료를 바탕으로 증명한 자료로써 우리의 시각이 아닌 옛 중국인의 시각을 포함해 그 실재를 풀어갔므로 동북공정의 주체인 중국인들 역시 이에 숙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한자가 많은 관계로 읽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괄호를 만들어 한글로 독음을 달아봤습니다. 중복되는 한자는 독음을 달지 않은것도 있으니 이는 윗부분의 독음을 참고하시면 되겠고, 역사 사료를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료의 출처에만 독음을 달았고, 내용부분은 사료의 독음보다 한자 자체가 글의 내용들을 풀어가는 열쇄가 되는 관계로 자료의 고유성을 살리기 위해 부러 독음을 달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이 자료에서는 '예족'을 언급함에 있어 '예'라는 한자어를 '濊'와 '穢'두가지를 혼용하였는데 이는 두 '예'자 모두 맞게 쓰였음을 알려드립니다.
濊는 본래 '예족'을 가리키는 종족이름으로 쓰인 것이었으며, 穢자는 禾자가 부수로 붙은것을 보아 벼농사문화를 영위하는 민족이었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나 추론해 봅니다.
일전에 충북 청원에서 1만5000년전의 벼농사의 흔적인 볍씨가 발견되었다는 글을 올린적이 있었는데 이와 맥을 같이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중국 사서에 나타난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

심백강 역사학박사 / 민족문화연구원장


1. 머리말

 

최근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서 우리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며 일찍이 유례가 없는 역사침략을 강행하고 있다. 고대 중국인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와 다른 한국사라고 史料로써 증명한 것을 현대 중국인이 고구려사는 중국사라고 억지를 부리며 역사침략을 시도하는 의도가 무엇일까?

 

우리는 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장황하게 설명하기 앞서 먼저 중국이 왜 오늘 이 시점에서 동북공정을 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과 배경부터 규명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원인과 배경이 정확히 규명될 때만이 거기에 대한 정확한 대안의 수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 강단사학계는 한국 고대사연구에서 고조선을 부정해 왔고 고구려사 연구도 대륙에 있던 고구려를 소홀히 한 채 한반도를 중심으로 진행해 왔다. 즉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사 침탈을 강행하기 전에 우리자신이 먼저 우리 역사의 단절과 축소를 자행 했던 것이다.

 

우리 강단사학 일각의 자주성이 결여된 이런 연구결과가 오늘 중국의 동북공정을 초래하는데 직간접의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서둘러 단절된 고조선사를 복원하고 한반도 중심의 삼국사연구를 대륙 중심으로 탈바꿈 하는 역사인식, 역사연구 방법론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 강단사학은 이런 시대적 요구를 외면한채 여전히 타성에 젖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최근 고구려연구재단에서 출판된 『고조선,단군,부여』라는 저술을 통해서 볼 때 종래 고조선,단군,부여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한걸음도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를 올바로 정립하여 중국의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응 하라는 국민적 열망을 안고 출범한 단체가 국민의 세금으로 이런 연구결과물을 내놓은데 대하여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솔직히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이등박문은 우리입장에서는 역적이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영웅이다. 그래서 그의 동상을 일본 중의원 대청마루에 세워두고 민족의 영웅으로서 기린다. 마찬가지로 동북공정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역사침략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중국 중심의 역사를 새로 쓰는 작업이다.

 

이제 우리도 중국 중심의 사대사관, 일본 중심의 식민사관을 버리고 한국 중심의 자주사관의 바탕 위에서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새로 써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동북공정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우리 강단사학,실증사학에 내재된 단절사관이고 축소사관이다.

 

역사학의 혁명 없이는 동북공정을 뛰어 넘을 묘안은 없다. 新史學(신사학),新史觀(신사학)으로 역사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것만이 역사 지키기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유일한 대안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일시적으로 사료를 왜곡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자기 조상들이 써놓은 수천년 전해 내려온 원사료를 말살할 수는 없을 것이며 원사료가 파괴 되지 않고 존재하는 한 왜곡된 역사는 언제든지 시정이 가능한 것이다.

 

본 연구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을 민족적,영토적,문화적 각 방면에서 주로 중국의 사서들을 중심으로 고찰함으로써 고구려사가 중국사가 아니고 고조선을 계승한 한국사라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2. 종족상에서 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일반적으로 民族(민족)과 種族(종족)은 본질상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본래 하나의 종족이 나누어져서 여러개 종족으로 된다. 예컨대 부여족이 백제족과 고구려족으로 분파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또 하나의 민족이 그 안에 무수한 종족을 포함하기도 한다. 오늘날 중국민족 안에 56개 종족이 내포되어 있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종족이 혈통상의 관련성을 의미한다면 민족은 문화상의 동질성을 가리킨다고 말 할 수 있다. 즉 종족이라고 할 때는 생물상& #8228;체질상의 명사인 것이고 민족이라고 하면 정치상& #8228;문화상의 명사인 것이다. 그러면 고조선족과 고구려족은 종족상에서 상호 어떤 계승성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인들은 고조선족을 穢族(예족), 고구려족을 貊族(맥족)으로 인식하였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가. 『漢書(한서)』王莽傳(왕망전)에 보면 고구려를 다음과 같이 貊人(맥인)으로 호칭하고 있다. “先是莽發高句麗兵 當伐胡 不欲行 郡强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遼西 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句麗侯騶 嚴尤秦言 貊人犯法 不從騶起 正有& #23427;心 宜令州郡且尉安之……莽不尉安 穢貊遂反……於是貊人愈犯邊”
그리고 『後漢書(후한서)』東夷列傳(동이열전) 고구려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句麗一名貊耳 有別種依小水爲居 因名小水貊 出好弓 所謂貊弓是也”.
우리는 이런 기록을 통해서 중국인들이 고구려인을 貊族(맥족)으로 이해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陳壽(진수)의 『三國志(삼국지)』東夷傳 濊條(동이전 예조)에서는 箕子朝鮮(기자조선)과 衛滿朝鮮(위만조선)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고조선문제를 고조선조가 아닌 濊條(예조)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은 濊(예)를 고조선과 동일시하고 濊族(예족)을 고조선족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면 穢族(예족)과 貊族(맥족)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동일민족인가 다른 민족인가. 예족과 맥족은 기본적으로 東夷(동이)계열에 속하는 동일 민족이다. 예족이든 맥족이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東夷族(동이족)에서 출발된 민족인 것이다. 그러면 굳이 예와 맥으로 구분하여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司馬遷(사마천) 『史記(사기)』索隱(색은)과 『漢書(한서)』武帝紀(무제기)에 모두 “東夷濊君(동이예군)”이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濊族(예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가지 않고 주로 동방의 원거주지에 그대로 거주하던 夷族(이족)을 가리킨 것으로 파악된다. 『史記』索隱 “姚察以武帝時 東夷濊君降 爲倉海郡”.
『史記』正義 “漢書武帝紀云 元年東夷濊君南閭等降 爲倉海郡”.

그리고 貊族은 같은 東夷族이지만 나중에 동북방으로 이주해가서 살던 동이족으로서 이들을 원래 동방에 거주하던 東夷와 구별하여 貊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본다. 『周禮秋官注』 “夷隸 征東夷所穫”. “貊隸 征東北夷所穫”.


엄격히 말하면 예와 맥은 명칭은 다르지만 뿌리가 같은 동일민족인 것이다. 따라서 史書상에서는 “예”와 “맥”을 분리해서 쓴 경우가 있지만 이 양자를 “濊貊(예맥)”으로 합칭한 경우도 허다하다. 『後漢書』東夷 高句麗傳 “濊貊 連年寇秒……濊貊率服”.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三國志』고구려조에는 東濊(동예), 三韓條(삼한조)에는 韓濊(한예)가 보이고 광개토왕비문과 『北史』신라조에도 韓濊(한예)라는 기록이 있으며 『隋書(수서)』에는 遼濊(요예)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漢書(한서)』의 天文志(천문지)에는 胡貊(호맥), 『後漢書(후한서)』東夷列傳(동이열전)에는 大水貊(대수맥),小水貊(소수맥) 楊雄(양웅)『百官箴(백관잠)』에는 東貊(동맥)& #8228;奚貊(계맥) 『三國史記』에는 梁貊(양맥)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穢(예)는 東方夷(동방이)의 통칭이고 貊(맥)은 東北夷(동북이)의 통칭이며 그것을 다시 세분하면 거주지역에 따라서 그와 같이 구별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중국인들은 西周(서주)이래 자기들과 다른 異民族(이민족)을 호칭할 때 통상 夷(이) 또는 東夷(동이)라고 하였다.

 

『서경』禹貢(우공)편에 鳥夷(도이),& #23886;夷(우이),萊夷(내이),淮夷(회이)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夷族(이족)들은 西周(서주) 이전부터 토착민으로서 중국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夷族들은 중국의 토착민족으로서 중국의 동방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중국의 전 지역에 걸쳐서 널리 분포되어 살았으며 여기서 四夷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고조선은 동이 계열에 속하는 여러 부족 들이 모여서 최초로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고조선민족은 중국의 동방, 동남방, 동북방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활동하던 동이계열의 부족들이 다양하게 포함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고조선 국가 구성의 기본성분은 濊族(예족)이고 주요성분은 맥족이었다고 본다. 東北夷(동죽이)인 貊族(맥족)은 결국 東夷인 濊族(예족)에서 분파된 것이라고 할 때 貊族은 혈통상에서 濊族을 계승한 것이 자명하다. 또 고구려는 고조선 멸망이후 고조선의 옛 터전에서 그 유민인 穢族과 貊族을 중심으로 건국했으므로 고구려는 민족상에서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


 

3. 영토상에서 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고조선과 고구려가 영토상에서 어떤 계승성이 있는지 밝히기 위해서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가 과연 오늘의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우선 그것부터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山海經(산해경)』18권 海內經(해내경)에서는 고조선의 위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 名曰朝鮮”. 여기서 北海(북해)는 渤海(발해)를 가리킨다. 『산해경』해내경에서 고조선국의 위치로 설명된 “발해의 모통이”를 오늘 그 해당하는 지점을 찾아본다면 중국의 산동성,하북성& #8228;요녕성 그리고 한반도 일대가 여기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동해의 안쪽이라”고 말한 만큼 절강성,강소성까지를 포함하는 보다 광범한 지역으로 비정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해의 안쪽 발해의 모통이에 고조선국이 있다”는 『山海經』海內經의 표현은 너무 추상적인 감이 없지 않다.

 

『산해경』12권 海內北經(해내북경)을 보면 거기에는 고조선의 위치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조선은 列陽(열양)의 동쪽에 있다 바다의 북쪽이고 산의 남쪽이다. 列陽(열양)은 연나라에 속해 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산해경』해내북경에 말한 고조선의 위치는 오늘의 河北省 秦皇島市 盧龍縣(하북성 진황도시 농용현) 일대라고 필자는 추정한다.

 

필자가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 “고조선이 列陽(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列陽은 燕(연)에 속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宋代 四大史書(송대 사대사서) 중의 하나인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의 河北道 平州 盧龍縣條(하북도 평주 노용현조)에 따르면 宋代(송대)의 平州(평주)가 禹貢 九州(우공 구주)에서는 冀州(기주), 周(주)나라 때는 幽州(유주)지역이고 春秋(춘추)시대에는 山戎孤竹(산융고죽),白狄肥子國(백적비자국)이며 전국 시대는 燕(연)에 소속되었다가 秦始皇(진시황)이 천하를 兼倂(겸병:통일)한 뒤 右北平(우북평) 및 遼西 2郡(요서 2군) 지역으로 되고 漢(한)나라 때는 遼西郡(요서군)의 肥如縣(비여현)으로 唐(당)나라 때 다시 平州(평주)로 변경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에 의하면 唐宋(당송)시대의 平州가 秦漢(진한)시대엔 右北平(우북평),遼西(요서)였고 전국시대에는 燕(연)나라에 소속된 지역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바꾸어 말하면 列陽(열양)은 전국시대 때 燕에 속해 있다가 秦漢(진한)시대에 右北平 遼西(우북평 요서)로 바귀고 唐宋시대엔 平州로 되었던 것인데 그 平州가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산해경』에 말한 “燕(연)에 소속된 列陽(열양)의 동쪽에 있다”는 고조선이 바로 오늘의 하북성 동쪽 秦皇島市(진황도시)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단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고조선이 海北山南(해북산남)에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다가 발해를 가리킨다는 것은 긴말을 요치 않는다. 다만 여기 말하는 山이 과연 어떤 산을 가리킨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발해를 중심으로 볼 때 산동성의 태산, 하북성의 갈석산, 요서의 의무려산, 요동의 개마대산 등 여러 명산 들이 발해부근에 포진 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여러 명산 들 중에서 고조선이 위치해 있었던 海北山南의 산은 과연 어떤 산일까. 필자는 그 산이 바로 碣石山(갈우산)이라고 비정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 河北道 盧龍縣條(하북도 노용현조)를 보면 “여기에 갈석산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갈석산은 盧龍縣(노용현) 남쪽 23리에 있는데 발해 곁에 竭然(갈연)히 우뚝 서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름을 갈석산이라 한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산해경』에 말하는 “海北山南”은 海北은 발해북쪽, 산남은 갈석산 남쪽을 의미하며 고조선은 발해 북쪽 갈석산 남쪽 즉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고 보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오늘의 河北省 秦皇島市 盧龍縣(하북도 평주 노용현조) 일대가 바로 고조선 지역임을 추단케 하는 보다 결정적인 근거는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盧龍縣條(노용현조)의 다음 기록에서 찾아진다. “朝鮮城 卽箕子受封之地 今有廢城(조선성 즉기자수봉지지 금유폐성)” 箕子(기자)가 다스리던 고조선의 옛성이 宋(송)나라 당시까지도 그 유적이 그대로 남아 보존되어 있었다는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산해경』해내북경에 말하는 고조선의 위치가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라는 확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箕子(기자)가 다스린 朝鮮城(조선성)이 盧龍縣(노용현)에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즉 발해와 갈석산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는 고조선의 수도가 위치해 있던 지역이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발해의 북쪽, 갈석산의 남쪽 연나라 열양의 동쪽 지역 즉 오늘의 하북성 요녕성 한반도의 광범한 지역에 걸쳐서 고조선의 영토가 위치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기자조선시대 발해,갈석산을 중심으로 하북성 요녕성 등 중국 동북지방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 위치해 있었던 고조선은 후일 서방 2천여리의 땅을 연나라 장군 秦開(진개)에 의해 탈취 당함으로써 그 영역이 滿潘汗(만번한)을 국경선으로 대폭 축소되게 된다. 고조선 영역의 중심지가 발해 갈석산에서 요동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위략』의 저자 魚& #35938;(어환)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王 欲興兵逆擊燕 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爲界 朝鮮遂弱”.

 

그러면 고조선이 서쪽으로 2천여리의 땅을 연나라에게 빼앗기고 국경선이 滿潘汗(만번한)으로 축소되게 된 시기가 구체적으로 언제쯤일까. 고조선을 침략한 연나라 장수 秦開(진개)는 燕昭王(연소왕 : 기원전 311-279)때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원전 4세기 말 ~3세기 초에 고조선 영역의 대폭적인 축소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서쪽 영토가 축소된 이후의 국경선으로 된 滿潘汗(만번한)을 압록강으로 보느냐 아니면 요하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오늘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滿潘汗 서쪽 즉 요동에서 북경 永平府(영평부)까지 2천여리 땅이 본래는 고조선 땅이였다는 사실은 丁茶山(정다산)도 『我邦疆域考(아방강역고)』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다.
“鏞按 今之永平府 古之北平郡也 且据魏略 潘汗以西二千餘里 在古爲箕氏之有 今自遼東而西行二千餘里 正得永平府境 一統志所言 眞有據也”.

 

고조선 영역이 기원전 3세기 이전까지는 오늘의 요녕성 및 하북성 동부를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였으나 기원전 3세기 초 서방 2천여리 땅을 연나라에게 빼앗기고 오늘의 요하 이동으로 영역이 축소 되면서 고조선은 국력이 크게 약화되게 되었는데 그 후 연나라 사람이 衛滿(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해 왔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위만조선이다.

 

그러면 위만조선은 오늘의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가 위만조선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소재를 밝히기 위해서는 『사기』조선열전에 보이는 다음 기사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衛滿& #39755;結蠻夷服 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 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사마천은 『사기』조선열전에서 위만이 동쪽으로 조선에 올 때 浿水를 건너 왔다고 썼다. 위만이 건너 온 이 패수가 어디 있었는지 그 소재가 파악되면 당시 고조선의 위치가 드러나게 된다. 이 패수에 대하여 여러 가지 異說이 있는데 대체로 1) 요동에 있었다. 2) 낙랑군에 있었다. 3) 한반도의 대동강이다. 4) 압록강이라는 네가지 설로 요약된다.

 

『사기』에 위만이 패수를 건너와서 “秦故空地上下障(진고공지상하장)”에 거주했다고 했는데 진시황이 한반도의 압록강이나 대동강에 上下障(상하장)을 설치한 일은 없다. 그리고 『사기』조선열전 索隱(색은)에 應& #21165;(응소)가 “遼東有險瀆縣 朝鮮王舊都(요동유험독횬 조선왕구도)”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필자는 요동 패수설이 비교적 설득력이 있으며 따라서 위만조선은 요동에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위만조선은 결국 그 손자대에 이르러 망하고 만다. 漢武帝(한무제)는 元封(원봉) 2년에 천하의 사형수들을 끌어모아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그 이듬해 여름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樂浪(낙랑),臨屯(임둔),玄& #33759;(현토),眞番(진번)으로 쪼개어 漢4군으로 삼았다.4)
『漢書』권6 武帝紀 “元封 2年 朝鮮王攻殺遼東都尉 & #36858;募天下死罪擊朝鮮……遣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 #24408; 將應募罪人擊朝鮮 三年……夏 朝鮮斬其王右渠降 以其地爲樂浪臨屯玄& #33759;眞番”.

 

漢武帝(한무제)가 고조선의 영토를 무력으로 침략한 뒤 그것을 넷으로 분할하여 漢四郡(한사군)을 세웠지만 몇백년도 아니고 수천년을 두고 내려 온 고조선민족이 하루아침에 없어질리 만무했다. 일부 한족에 흡수 동화되기도 하는 것이 불가피한 현상 이었겠지만 대부분의 고조선 민족은 엄연히 그대로 잔존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穢貊(예맥)을 비롯한 고조선 유민들은 곧바로 여러 나라를 세워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후한시대에 접어들자 끊임없이 상호 연대를 통해 漢族과 싸우며 고토회복운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가 바로 고구려였다는 사실이 다음의 사료에서 입증되고 있다.

『後漢書(후한서)』권 5 安帝紀 “安帝元初 五年……夏六月 高句麗與穢貊寇玄& #33759;”, “建光元年 春正月 幽州刺使馮煥 率郡太守 討高句麗穢貊不克……夏四月 穢貊復與鮮卑寇遼東 遼東太守蔡諷追擊 戰歿 冬十二月 高句麗馬韓穢貊圍玄& #33759;”.

 

따라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단합한 고조선 유민들은 후한시대를 지나 위진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잃어버린 고조선영토를 거의 회복하다시피 하였다. 『周書(주서)』에 보이는 다음의 기록이 그것을 잘 뒷받침 한다고 하겠다.
『周書』49권 異域列傳 高麗 “高句麗者……治平壤城……其外有國內城及漢城 亦別都也 復有遼東玄& #33759;等數十城”.고구려는 당시에 玄& #33759;(현토)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梁書』권 54 諸夷列傳 “高句麗者……其國 漢之玄& #33759;郡也 在遼東之東”.

 

. 漢의 四郡중 玄& #33759;郡(현토군)을 발판으로 삼은 고구려는 遼東(요동)지방에 있는 수십성을 차지하고 또 오늘의 한반도의 漢城(한성)과 平壤城(평양성)까지를 확보함으로써 고조선시대의 영토를 거의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隋煬帝(수양제)시대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아울러서 발해,갈석산 일대까지도 그 영향권아래 둠으로서 고조선 전성기시대의 영토를 거의 다 차지했다는 사실을 다음의 기록은 역력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隋書(수서)』4권 煬帝紀 “八年春正月……下午下詔曰……高句麗小醜 昏迷不恭 崇聚渤碣之間 薦食遼穢之境”.

 

周(주)시대의 朝鮮 땅이 漢의 玄& #33759;(현토),樂浪(낙랑)이고 隋(수)의 고구려라는 다음의 두 기록은 고조선과 고구려가 시대의 차이를 두고 동일한 지역에 세워진 국가라는 즉 고조선 영토에서 고구려 영토로 계승된 영토상의 계승성을 요약해서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宋史(송사)』487권 外國傳 “高麗本曰高句麗 禹別九州 屬冀州之地 周爲箕子之國 漢之玄& #33759;郡也 在遼東”.
『欽定盛京通志(흠정성경통지)』권 23 歷代建置沿革表 “蓋平,復州,寧海,岫巖,鳳凰城 則周之朝鮮 漢之玄& #33759;樂浪 隋之高句麗”. 

 

 

4. 문화상에서 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고조선과 고구려의 문화상 동질성 내지는 계승성에 대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三國志』濊傳(예전)에서 “其耆老 自謂與句麗同種……言語法俗 大抵與句麗同”이라 한 것을 볼 때 고구려는 고조선과 동일한 민족으로서 언어와 풍속이 기본적으로 서로 같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구려의 문화가 고조선의 문화와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같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고조선은 犯禁(범금)8조를 통해서 볼 때 형법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백성들이 대문을 걸지 않고 생활하는 안정된 사회를 이룩했다.
『漢書』地理志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다음의 기록에서 보면 고구려도 역시 국법을 매우 엄정하게 집행함으로서 도둑이 없는 사회를 이룩했음을 알 수 있다.
『隋書(수서)』東夷列傳 高麗條 “反逆者縛之於柱& #29191;而斬之 籍沒其家 盜則償十倍 用刑旣峻 罕有犯者” 『舊唐書(구당서)』東夷列傳 高麗條“大體用法嚴峻 少有犯者 乃至路不拾遺”.

 

그리고 고조선에서는 남녀가 혼인하는데 있어 재물을 따지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漢書』地理志 “嫁娶無所讐”.

그런데 고구려에서도 혼인은 남녀의 서로 사랑 하는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혼인에 재물이 오가는 경우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혼인문화가 있었다.
『周書』異域列傳 高麗條 “嫁娶之禮 略無財弊 若受財者 謂之賣婢 俗甚恥之”.

그리고 『三國志』東夷傳 濊條(예조)에 따르면 濊族(예족)들은 항상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음주 가무하면서 즐겼는데 이를 舞天(무천)이라 했다고 한다.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謂舞天”.

그런데 고구려에도 역시 이와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중대회를 개최하는데 이름을 東盟(동맹)이라 한다”는 기록이 그것을 잘 설명한다.
『三國志』東夷傳 高句麗條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

 

고조선과 고구려는 이러한 일련의 사료들을 통해서 검토해 볼 때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혼인문화,제례문화,놀이문화 등 문화 전반에 걸쳐서 동질성과 계승성이 농후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5. 맺는말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통상 세가지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 200년~300년 전도 아니고 4000년~5000년을 흘러온 과거 역사를 연구하자면 그것을 뒷받침할 史料의 확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 손으로 기록한 고대사료가 많지 않고 주로 중국인의 손에 의해 기술된 사료에 의존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事大主義(사대주의)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근대 일제식민통치 35년을 거치면서 이때 식민통치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 놓은 植民史觀(식민사관)의 잔재가 아직도 불식되지 않고 남아 있어 그 장벽을 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지금 농경사회,산업사회를 지나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다. 정보화 사회란 문화자본 지식기반 사회를 의미한다. 세계가 바야흐로 문화중심 역사전쟁시대로 접어든 지금 고대사 연구의 3대 난관을 극복하고 우리 역사의 眞相(진상)을 復元(복원)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적 국가적 시대적 당면과제가 아닐 수 없다.

 

위에서 우리는 민족상으로나 영토상으로나 문화상으로나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가 명백하다는 사실을 중국의 여러 사료들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이 소 논문이 동북공정의 허상을 타파하고 우리역사의 진상을 복원하는데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참           고 -

 

 

지나支那란 진시황의 진나라 진(秦)’의 음 [chi’n]이 전와(轉訛)하여 서방 제국에 치나(Cina) ·틴(Thin)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지나支那란 용어에는 한민족의 갈래민족 지류란 뜻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쥐나 짱골라들의 사서를 주의깊게 들여다 보면 옛날부터 쥐나족들은 북으로는 황하의 위쪽과 동으로는 태행산맥을 경계로 결코 발을 들여놓지 못 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왜 그들의 도읍이 장안과 낙양을 벗어나지 못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황하를 경계로 한 하남에서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 시기 북경을 비롯한 그 주변의 모든 땅은 배달민족의 것이었으며 황하 위쪽은

짱골라 자신들이 말한 것처럼 서쪽은 서융과 백이 동쪽은 북융과 산융이라는 융적의 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진시황이 동으로 순행할때도 그렇고 초한의 싸움도 어디에서 주로 일어났는지 보시면 금방 알게 될 겁니다.

참고로 서융,북융,산융 등으로 불리는 융족은 사실 배달민족의 갈래입니다. 서융만 해도 한웅배달국 초기에 배달민족인 반고가 가서 세운 배달제후국의 사람들입니다. 백이의 이夷는 배달민족의 또다른 표현이니 말 안해도 우리 민족이란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한웅배달국 갈래왕조입니다. 진나라는 배달민족 그 중에서도 흉노계의 나라입니다.

배달민족은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으로 시대를 변천해가면서 여러 민족으로 나누 어지는데 북쪽은 배달계 흉노로 서쪽은 배달계 융족 등으로 동쪽은 배달계 동이로 중원대륙에는 회이, 견이, 풍이 등 여러 배달계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배달민족 말할 때 구환九桓,구이九夷 등으로 불리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갈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흉노는 돌궐,선비,몽골,거란,오환,저족 등으로 갈라지죠. 융족은 이후에 강(티벳)족과 흉노의 갈래들인 달단(타타르), 중앙아시아의 여러 부족 들로 갈라지고 합쳐지는 등 변화를 거듭합니다. 동이족 역시 예족,맥족,환족과 숙신,말갈(여진)족 등으로 갈라지고 합쳐지는 변천을 겪습니다. 서흉노는 유럽으로 진출하여 아틸라의 천하를 이루어내죠. 아틸라의 죽음 이후로 그들은 지금의 헝가리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선비족은 수나라와 당나라 북위 북연 등 여러 나라를 세우죠.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우고, 여진족은 금나라,청나라를 세우죠.

몽골족은 원나라를 일으키고, 우리는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대진국(발해) 등을 세우죠.

서돌궐(투르크)은 아랍으로 건너가 오스만투르크(터키)를 이룩하죠

요사,금사,원사,청사 등에 보면 그들이 모두 고구려나 흉노 등 배달계통 동이의 후예 또는 갈래민족이란 것을 다 밝히고 있습니다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의 금나라,청나라 모두 고구려의 후예라고까지 자처했으며, 특히 신라가 망한 후 그 신라 왕족 일부가 이들 나라들의 건국에 참여했다는 것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거란도 우리의 형제민족이죠.

근세고려시대때 서희가 요나라 소손녕과 협상할 때도 서로가 고구려의 후예라 밝혔죠. 그래서 협상이 잘 되어 강동6주도 얻었던 것이죠

 

요나라,금나라,원나라,청나라 등 수많은 북방민족왕조들하에서 짱골라 한족은 똥개와 동급인 최하층계급이었죠. 원나라치하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 몽골인,고려인이었고 다음이 티벳인 라마나 이슬람이었죠. 짱골라는 아예 사람취급 안하고 노예였죠


또 청나라 조정은 중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귀순한 한족(漢族)들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고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나 저항하는 명나라 군인들이나 한족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학살합니다.

그리고 한족들의 복종의 징표(徵標)로 치발(& #34201;髮 : 쥬신 고유의 머리양식)과 만주 옷[滿洲服]을 입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남기면 머리카락이 남지 않고, 머리카락을 남기면 머리가 남지 않는다 [留頭不留髮 留髮不留頭]."는 유명한 포고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청나라는 한족 (漢族)들의 단지 일시적으로 고개 숙이는 것일 뿐"이라는 사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치발령(& #34201;髮令)과 만주 옷의 착용을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간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타면 으레 나타나는 한족(漢族) 특유의 쥬신에 대한 욕설, 경멸적인 서술이나 패러디와 같은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장정롱(莊廷& #37992;)이 편찬한 『명사집략(明史輯略 : 1660)』에서 청 초기의 황제들을 묘호가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부르고 만주 연호 대신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자 청나라 조정은 이 책의 출판과 관련된 사람 70여명은 물론 이 책을 구입한 사람들까지 처형하였습니다


쥐나 짱골라들의 왕조는 한,송,명 셋뿐이죠. 그 외의 대부분 왕조들 삼황오제시대,하,상(은조선),주,춘추전국,진,수,당,요,금,원, 청 등과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대진국(발해) 등 모두는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의 제후국 또는 갈래왕조국가들입니다

한웅배달국과 단군 조선국이 홍산배달문명이나 요하문명 등 여러 고고학 유적지가 밝히짐에 따라 실재성이 드러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짱골라들이 지들 조상이라 억지 부리는 복희,신농,요임금,순임금 등 삼황오제마저도 모두 배달민족들이죠.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배달계통 흉노족국가죠. 그러니 짱골라들이 역사공정하려고 발악할 수 밖에......


게르만족이 서고트족,동고트족,반달족,알란족,주트족,색슨족,앵글족 등으로 나누어졌었죠. 배달 계열 훈족(서흉노)의 유럽침입으로

이들 게르만족계열이 로마(이탈리아), 브리티니아 (영국),갈리아(프랑스),이베리아반도(스페인,포르투갈) 등 서유럽으로 이동해 퍼지죠

이 사실들에 관한 학자들의 논문도 여러 편이고, 독일의 ZDF방송국에서도 훈족(서흉노)에 대해 다큐방송도 있었죠. 어차피 훈족이 흉노계라 하든 투르크(돌궐)계라 하든 어차피 배달갈래민족이죠. 배달갈래 흉노계가 나중에 선비,오환,돌궐,거란,몽골,저족 등으로 나누어진 것이니...

 

 

 

2007년 7월 4일 (수) 16:04   노컷뉴스

현직 교장 "중국 요(遼)·금(金), 만주국 한국역사

 

 

현직 고등학교 교장이 중국의 요(遼)·금(金)나라와 만주국을 한국역사에 편입하고 현대사를 '동북삼성과 북한, 대한민국'의 삼국시대로 정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 눈길을 끌고 있다.

경기도 수원 계명고 이달순 교장은 4일 수원명성교회에서 열린 '우리 역사 바로 찾자'는 강연에서 한국역사는 고조선~부여~삼국시대(신라·백제·고구려)~2국시대(발해·통일신라)와 함께 후기2국시대(요·금-고려)~정복2국시대(원·명·청-고려·조선)~침략2국시대(만주, 조선), (만주제국, 대한제국), 현대삼국시대(동북삼성, 북한, 대한민국)으로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장은 698년 말갈계 고구려인인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할 당시 고구려·신라 유민과 말갈족, 거란족, 돌궐족이 주측이 됐다고 전제한 뒤 907년 거란족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발해를 점령, 발해에 거주하고 있던 거란족과 고구려·말갈족과 함께 요나라를 건국한 것으로 고구려, 발해와 함께 요나라도 당연히 우리 역사로 편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장은 또 "여진족은 발해의 백성으로 흑수말갈에 속해 있었고 여진의 이름으로 거란족과 함께 거주하다 반요운동으로 금나라를 세운 것"이라며 "1117년 여진족 아골타(阿骨打)가 세운 금나라는 고구려 때 거란족(숙진족), 발해때 말갈족, 요의 거란족으로 발해의 백성으로 한국역사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이 교장은 "1616년 건주여진 누루하치가 명을 치고 후금을 창건한 뒤 홍타이지가 청(淸)조를 선포, 이후부터 여진족을 만주족이라고 부르게 됐다"며 "특히 청조가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간도에 조선인을 거주하도록 하고 중국인에게 만주봉금령을 내린 것은 만주지역이 고구려의 후예영토라는 특수성을 고려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장은 "지난 1935년 만주의 한 지역의 인구분포를 조사한 자료에 조선인이 74%, 만주인이 25%로 나타났다"며 "발해 창립 이후 거란과 말갈, 돌궐족 등이 한민족과 함께 어울리며 같은 백성으로 살아온 만큼 우리역사로 편입돼 재정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수원=CBS노컷뉴스 고영규 기자 midusyk@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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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자세한 것은 [몇 가지 추려본 간략한 게시물 목록들], [역사와 관련해 몇 마디 논평해본다....]를 참조하세요.  

 

이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문화재나 유적들에 관한 자료들이 많으니 직접 본 블로그의 게시물들을 둘러보면서 찾아 읽어보세요

기타 궁금한 것은 위에 언급하지 않은 자료들 중에 있으니 찾아보면 그 궁금증 대부분이 풀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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