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blog.naver.com/k092000/

 

역사스페셜 130회 북한 문화유산 시리즈1 - 고구려 평양성

 

1. 주요내용
 
분단의 반세기를 넘어 드디어 역사스페셜팀이 북녘땅을 밟았다. 남북방송교류협력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준비된 이번 <역사스페셜 - 북한문화유산시리즈>에서는 상대적으로 북한 지역에 집중되어 그 동안 연구성과가 적었던 고조선, 고구려, 고려시대의 유적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총 8편에 달하는 <역사스페셜 - 북한문화유산시리즈>
그 첫 번째 시간, 북한 보물 유적 제 1호인 평양성을 소개한다.
 
역사스페셜팀은 1500년전 당대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평양성, 그 견고한 축성술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각자성석(刻字城石: 글자를 새긴 성돌)을 통해 평양성 축조과정의 비밀을 파헤쳤다. 뿐만 아니라 평양성으로 왕성을 옮기기 이전 머물렀던 안학궁의 생생한 현장을 한다.
2. 세부내용
 
1) 세계 최대 규모의 고구려 평양성
 
1500년전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 그곳에서 정교하게 쌓아올린 전형적인 고구려식의 성벽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평양성의 흔적이다. 평양성 전체 모습을 알아보기 위해 북한 사회과학원에 소장된 지도를 살폈다. 평양성은 평양외곽을 두른 성과 내부를 가로지르는 3개의 성에 의해 내성, 북성, 중성, 외성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총 길이가 무려 23km에 달했다. 당시 23km에 달하는 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평양성은 세계 최대 규모의 성이었던 것이다.
 
2) 42년의 대역사, 평양성은 어떻게 축조됐나?
 
취재진이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을 들렀을 때 평양성 유물 하나가 주의를 끌었다. 각자성석(刻字城石: 글자를 새긴 성돌) 성벽을 이루고 있는 돌 중 글자가 새겨진 돌을 말한다. 현재 실물로 전하는 각자성석은 내성 것 2개와 외성 것 1개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성이 어떤 과정으로 누구에 의해 축조되었는지 알 수 있다. 책임 구획을 정한 것이다. 이런 비슷한 유물은 경주 관문성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경주 남산신성비에는 실제로 공사 책임자에게 죄를 묻겠다는 일종의 서약도 있다. 평양성이 그토록 견고하게 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실명제 공사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3) 왜 안학궁을 버렸을까?
 
고구려가 집안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427년. 그러나 평양성은 552년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평양성이 지어지기 전, 고구려의 왕들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대성산성에서 내려다보면 광할한 평지가 보이는데 그 곳에 남아있는 주춧돌이 답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고구려의 또 다른 왕궁인 안학궁의 주춧돌이다.
 
주춧돌로 추정해 본 결과 안학궁의 규모는 실로 웅장했다. 이런 안학궁을 버리고 왜 평양성으로 옮겼을까? 그것은 성과 산성이 분리된 짝성체계 때문이었다. 평지에 안학궁이 있고 뒤로 펼쳐진 산에 대성산성이 있다. 적이 쳐들어 왔을 경우 왕이 산성에서 버티면 산성을 공격하지 못한 적이 왕궁을 불지를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안학궁을 버리면서까지 택한 평양성은 과연 어떤 성이었을까?
 
4) 고구려 평양성은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평양성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구릉을 따라 성을 쌓은 전형적인 산성축조술을 활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을밀대다. 을밀대는 아래에는 큰돌을 쌓고 위로 갈수록 조금씩 안쪽으로 들여쌓는 사다리꼴 형태를 취한다.
이는 과학적으로 가장 안정된 구조이다. 또한 지반이 암반층인 경우 그 암반을 기초로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성벽은 더욱 견고하였다. 평양성은 축성술 뿐만 아니라 지반상태까지 십분 활용하는 고구려인들의 지혜로 태어난 찬란한 유물인 것이다.
 
5) 평양 외성은 바둑판처럼 정렬된 계획 도시였다.
 
실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조선 중기의 학자 한백겸. 그가 쓴 구암유고를 보면 일반 서민들이 거주했던 평양 외성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하게 짜여져있다. 그런데 이런 체계적인 도시구획이 고구려 때에도 있었을까?
일제시대부터 지난 50년초까지 몇차례에 걸쳐 발굴된 고구려 유적의 도로가 평양 외성이 일정한 도시구획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도로구획을 표시하기 위해 세우는 법수의 발견 또한 이 같은 사실을 더욱 확실히 해 주었다.
 
경주왕경 발굴조사를 토대로 평양 외성에 살았을 인구를 추정해 보면 약 20만. 1500년전 평양 외성은 20만에 달하는 서민들이 살 정도로 반듯한 도시구획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역사스페셜은 특별한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저희 역사스페셜팀은 지난 여름 20여일
동안 북한에 머물면서 그곳의 역사유적들을 직접 취재하고 돌아왔습니다.서산대사의 자취
가 남아있는 보현사, 천년전의 국제도시 개성과 왕건이 세운 고려왕궁 만월대 그리고 한반
도 최초의 문명인 검은모루구석기유적등.그동안 남쪽에선 볼 수 없었던 우리의 소중한 문
화유산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역사스페셜은 오늘부터 8회에 걸쳐 이런 북한의
문화유산들을 만나보는 시간을 마련해보겠습니다.오늘 처음으로 만나볼 북한의 문화유산
은 고구려 평양성입니다.평양은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전 고구려의 수도였습니다.그래서
평양에선 여러 가지 고구려인들이 남긴 흔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요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평양성입니다.현재 북한에서도 이 평양성을 국보유적 제 1호로 지정해놓고 있는데요 그만
큼 중요하다는 이야길겁니다. 자 그럼 고구려 평양성을 직접 만나보겠습니다.

 

 

 

 

평양성은 당대 세계 최대였다.


평양시내...한 가운데에 자리한 주체탑..외국인은 물론 평양을 찾는 외지인들은 누구나 들
르는 곳이다. 이곳을 오르면 평양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인터뷰 평양성에 이렇게 죽 보이는 이게 대동강 아닙니까..대동강으로 해서 저
아래 합수부 보이는데 주-욱 보통강 줄기를 따라서 보통강 줄기가 만수대 뒤로까지 해자
를 이루고 거기서부터 모란봉까지는 그냥 산을 타고 올라간다.이 넓은 전체 부지와 모란봉
일대가 평양성에 들어간다.

대동강과 보통강을 끼고 섬처럼 떠있는 평양시.이곳은 1500년전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다.
취재팀은 우선 평양시내에 남아있는 평양성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대동강을 따라 올
라가자 그 중심부 즈음에서 대동문을 만나게 된다.대동문앞 500미터가량 이어져있는 성벽.
잘 다듬은 장방형의 돌을 가지런히 쌓아올린 고구려의 전형적인 성벽이다.
인터뷰 저밑에 물에서 여기까지 1960년대 공사할 때 한 현대건축..여기부터
여기까지 고구려성벽인데..이거 다 없고 여기 밑에서부터 보면 못해도 5-6미터..그러니까
성벽이 상당히 높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고려,조선,그리고 최근까지 많은 개축을 해온 대동문... 그러나 그 기초는 고구려 평양성이
었다. 성문옆에는 아직도 고구려의 성벽이 고스란이 남아있다.평양 시내 한가운데를 흐르
는 보통강..대동강이 평양성의 동쪽해자라면 이 보통강은 평양성의 서쪽해자이다. 서울의
남대문처럼 도로의 가장자리에 세워져있는 보통문.원래는 강 바로 옆에 있던 것을 이곳으
로 옮겼다고 한다. 대동문이 고구려 평양성의 동문이라면 이 보통문은 서대문인 셈이다.평
양냉면으로 잘 알려진 옥류관을 시작으로 북쪽지역은 산으로 이어진다.을밀대 역시 고구려
평양성의 일부다.

 

을밀대위에 서있는 두사람 인터뷰 이 쪽은 대동강에 면하고 있으니까 남쪽으로
쳐들어오는 적을 막아내기위해 가장 중요한 군사지휘터다..네 면을 훤하게 볼 수 있다고
해서 사성이다.


성의 동쪽과 서쪽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자연해자로 하고 북쪽엔 금수산의 험준한 절벽으로
이뤄진 서평양..이 넓은 땅을 둘렀던 16키로미터의 거대한 성이 바로 고구려 평양성이다.
그런데 평양성은 이것만이 아니다.남쪽의 취재팀에게는 최초로 공개되는 성...평양시내 한
가운데에 마치 자그마한 산봉우리처럼 우뚝 솟아있는 성, 또다른 평양성의 흔적이었다.

두사람 걸어가며 고구려 평양성 외성텁니다. 이 높이는? 이건 지금 약 7내지 9미터정도...
성의 높이는 무려 7내지9미터정도.겉으로 보기엔 토성으로 보이지만 돌로 된 성위에 흙을
쌓은 혼축성이었다. 이렇듯 도시내부에도 거대한 성을 쌓아올린..평양성...그 전체 모습은
어떠했을까? 북한 역사학의 최고권위기관인 사회과학원에는 1917년에 제작된 평양지도
가 보관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많은 성의 흔적이 남아있었다.그러나
이 지도만으로는 평양성의 전체모습을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그동안 북한에서 이뤄졌던
여러차례 발굴조사를 통해....성의 전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뷰 동쪽으로는 대동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보통강이 흐른다.우리가 잘 아는
옥류교가 여기있고 대동문 여기있고 보통문 여기 있고 이렇게 되어있는데 보통문이 있는
이 구역이 중성이다.

마치 긴 자루처럼 생긴 평양..그 전체를 성으로 둘렀다.그리고 그 내부를 네 개의 구획으로
나누었는데 중심엔 왕궁이 위치한 내성을 두고.그 주변에 왕궁을 보호하는 북성,관청이 들
어선 중성 그리고 일반서민들이 사는 외성을 두었다.이러한 평양성의 전체규모는 어느 정
도일까? 평양북쪽에 자리한 금수산.을밀대를 지나면 가장 높은 봉우리인 모란봉이 나타난
다.바로 평양성 북성의 장대인 최승대다..최승대는 평양성의 최북단에 위치해있는 것이다.
인터뷰 주-욱 보이는 대동강과 이쪽에 보통강이 합수하는 전체가 평양성으로 되어있다.

평양성이 둘레성이 16km이고 그 안에 여러겹으로 막은 성길이까지 총 합하면 23키로미터
가 된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이 말하길 중국의 장안성이 크다고 하는데 그 길이는 16km밖
에는 되지않는다. 그러나 평양성은 그보다 더욱 큰 23km로서 당시로선 가장 큰 도시였고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남쪽은 강과 평지로 이뤄져있고 북쪽은 금수산이 솟아있는 도시 평양.고구려시대, 이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성이었다. 도시 외곽뿐만아니라 내부에도 여러겹의 성을 쌓았던
평양성은 당대 최대규모의 성이었다.

 

 

을밀대

 

제가 서 있는 이곳은 우리에게도 그 이름이 익숙한 을밀댑니다.어떻습니까..아래에서 올려
다보면 그 웅장함과 견고함에 감탄이 절로 나오지않습니까.그런데 이러한 성이 무려 23km
나 이어져있었다니 참 대단한 일입니다.1500여년전 어떻게 이런 거대한 성을 쌓아올릴 수
있었을까요? 평양성 축조과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은 단 두 줄밖에 남아있지않습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 기록으로 양원왕 8년인 552년의 기록인데요...축장안성...여기서 장안성은
지금의 평양성을 의미합니다.그러니까 552년.평양성을 쌓기 시작했다는 의밉니다.그리고
이 옆의 기록은 평양속지에 나오는 기록인데 본성사십이년필역 즉 평양성역사를 마치는데
42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42년이라, 거의 반세기동안 고구려는 평양성을 쌓는 일에 매달
렸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전 국가적으로 총력을 기울인 대역사였던 셈인데요..그러나 기록
으로는 공사과정에 대한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가 없습니다.과연 고구려는 어떻
게 평양성을 쌓아올렸을까요?

 

 

 

각자성석의 비밀 ...

평양성의 축조과정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인민대학습당 바로 옆에 자리한 구 소련식
건물. 북한이 자랑하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엔 평양성에서 발견된 두 개의
돌이 보관되어 있다.1500년전엔 평양성의 일부였던 돌.그런데 이 성돌엔 다른 성돌들과는
달리 글씨가 새겨져있다.

인터뷰 어느때 그 성을 쌓기시작했다는 시기와 그리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공사구획으로 설정해서 공사를 진행했다는 내용..그리고 그 구간의 공사책임을 누가 졌다
는 내용...축성 공사 진행 과정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내용이 여기 담겨있다.

이것이 고구려의 성돌이라는 사실은 소형문달이라는 글씨를 통해 알 수 있다. 소형문달은
소형벼슬을 가진 사람인 문달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소형은 고구려의 관직이다. 현재 평양
성에서 확인된 성돌은 모두 6개..이 성돌들의 내용을 분석하면 평양성축조과정을 알 수 있
다. 우선 내성에서 발견된 성돌을 보면 병술12월이라고 기록되어있다.여기서 병술년은 바
로 562년이다.그럼 이번엔 외성의 성돌을 보자..이 성돌엔 기유3월8일 시역이라고 되어있
다.즉 기유년 3월8일에 공사를 시작했다는 의미로 기유년은 바로 589년이다.기존의 북성
에 이어 내성공사가 마무리 되고 그리고 외성공사가 시작되었으며 그 뒤 외성과 중성을 가
로지르는 성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성돌은 성축조과정에 대한 또한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현재 6개의 평양성 성돌 중 세 개는 기록으로 전해지고 나머지 세 개만이 실물로
남아있는데 그 중 하나가 현재 이화여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처음 입수 당시에 깨져있
던 성돌을 박물관에서는 석고로 고정시켜놓았다.

인터뷰 우리나라에서 오세창선생이 소장하던 것이다.고구려성벽은 세점 남아
잇는데 남한엔 유일한거다.
외성에서 발견된 이 돌은 외성축조과정을 알려준다. "자차하향 동십이리", 즉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12리의 공사구간을 맡았다는 의미다.같은 지점에서 발견된 또하나의 성돌기록.
"자차하향서십이리"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12리라는 의미다.즉 같은 지점에서 동서로 나누
어 공사를 시작했음을 알려준다.내성의 성돌을 보면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만
수대부근에서 발굴된 성돌엔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돌아 성을 쌓았다"고 적고 있다.그 방
향으로 돌아 2.1km 되는 지점에서 또 하나의 성돌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여기서
부터 서북쪽으로 성을 쌓는다."라고 되어있다. 바로 그 2.1키로미터 되는 지점에 칠성문이
있다.이렇게 나뉘어진 세구간은 모두 정확하게 2.1km였다. 외성의 공사구간은 내성의 2배
인 4.2km다.내외성 모두 세구역으로 크게 나눠 공사를 한 것이다.그렇다면 하나의 대공사
구획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공사가 진행되었을까? 지금도 글이 새겨진 돌이 성벽에 그
대로 박혀있는 경주 관문성에 그 해답이 있다. "골고 남계 수지 사보오척일촌.여기는 웅 북
계" 관문성에서는 이런 성돌이 10미터 간격으로 박혀있다. 공사구간이 세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뿐만아니라 성돌엔 인력을 동원한 지역이 표기되어있다.마을 또는 지역단위로 공
사를 맡겼다.

인터뷰 이 고구려 평양성같은 경우에는 아주 넓게 잡아서 길이가 10여리 뻗어있는
걸로 되어이다 그러나 사실 기록상으로 그 명문성돌이 거기 새겨진것일 뿐이지 그 10여리
되는 구간안에는 작은 공간으로 축성도지않았나 생각한다.

성돌에 글을 새긴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있는 경주 남산비,이
비석은 신라시대 남산산성을 쌓을 때 세운 것으로 "삼년내에 성이 무너지면 죄를 내린다"
는 글귀가 새겨져있다.즉 공사책임을 묻기위한 것이다.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그 책임이
얼마나 엄격했는지 알 수 있다.성벽이 무너지면 중한 형벌과 함께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
게 했다.공사 책임자를 성돌에 새겨놓은 고구려사람들.이 고구려성돌은 1500년전 고구려
평양성의 축조과정과 함께 고구려의 힘을 말해주고 있다.

차용걸인터뷰 철저한 주민동원 또는 노동력을 수취하는 그런 제도가 실시되었다는
걸 말하기대문에 그당시 고구려의 왕권은 피라미드식으로 전 밑의 백성가지 하나의 일원
적 체제하에 동원되고 사역도는 고대국가의 철저한 지배질서를 말해주고 있다.
연인원 400만명. 42년동안 이뤄진 국가적인 대역사.평양성은 고구려의 체계적인 국가
시스템의 승리였다.

 

 

 

 

(뒤에 평양사진 걸려있고..)


고대 도성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왕궁입니다.그렇다면 평양성에서 왕궁은 어디였을
까요? 바로 이 즈음에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지금 보이는 이 건물이 우리의 국
회의사당에 해당하는 만수대구요.우리에게 자주 소개된 김일성동상이 이곳에 있습니다.
이렇게 지금도 이곳엔 북한의 중요한 시설들이 많이 모여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이곳에선
이쪽으로는 모란봉과 최승대가 있는 북성이 보이고 또 반대쪽으로는 외성이 잘 내려다보
여 한눈에도 좋은 터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엔 아무런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왕궁의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다만 왕궁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한가지 단서가 있
습니다.고구려는 수도를 세 번 옮기는데..그 중에 집안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건 장수
왕 15년인 427년입니다.그런데 이때 장수왕이 찾아온 곳은 지금의 이 평양성이 아닙니다.
이 평양성을 축조한 건 552년.즉 장수왕이 평양으로 내려온 427년 당시엔 이 평양성은 존
재하지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평양엔 장수왕이 머물렀던 또 다른 궁이 있었다는 이야긴데
요.만일 장수왕이 머물렀던 왕궁의 흔적이 남아있다면 평양성 왕궁의 모습을 추정해볼 수
있지않을까요

 

 

 

 

왜 화려한 안학궁을 버리고 평양성으로 옮겼을까?...


평양성에서 대동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올라가면 또 하나의 고구려산성을 만나게된다.바로
대성산성이다. 산능선을 따라 쌓은 성이 전체 9키로미터.지금도 1500년전의 그 웅장함이
그대로 남아있다. 산성안은 지금 평양시민의 유원지로 쓸만큼 넓을 뿐만아니라 곳곳에
자연연못이 있다.

인터뷰 그런데 특징적인 건 어떻게 된건지 순 자연적인 물이다.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가물어도 이 물은 마르지않고 사시사철 꽉 차있다.그러니까 고구려사람들이 산성건설에서
지형조건을 얼마나 잘 이용하는가 또 물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는 이걸 봐도 알 수있다.
현재 확인된 연못만 170개.대성산성은 산성으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대성산성에
서 내려다보면 넓은 터가 펼쳐진다. 바로 안학궁터다.안학궁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장
수왕이 있던 왕궁이다.장수왕은 평소엔 이곳 안학궁에 있다가 전시엔 궁을 떠나 대성산성
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렇다면 1500년전 이곳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터 걸어가는 두사람 인터뷰 네 그렇다 이런 기초자리가 확연히 알려온 것이 이 안에
2200개 나타나다. 그렇게 하고 요렇게 잘 남아있지는 않지만 문자리라고 인정되는게
1040개 그래서 다 합쳐서 5개가 이 안에서 발굴되다.
안학궁에서 발견된 주춧돌은 모두 3240개.그 주춧돌로 추정해볼 수 있는 건물지는 모두
51채다. 주춧돌은 일정한 간격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인터뷰 발굴자들이 다음에 가서 꼭 대면 곤란한 위치에 기둥자리..또 나타나고 또
나타나고 이렇게해서 아주 재미있게 발굴했다고 한다.
현재 주춧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안학궁. 일직선으로 편전과 침전을 비롯한 남궁,중궁,
북궁이 있고 북궁 바로옆엔 서궁,그리고 동쪽엔 세자가 머무는 동궁이 배치되어 있다.그렇
다면 안학궁의 건물 모습은 어땠을까? 현재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엔 안학궁에서 출토된 유
물들이 전시되어있다.안학궁에서 발굴된 유물은 주로 기와종류로 독특하고 화려한 문양을
가지고 있다.안학궁유물중 취재팀의 눈길을 끄는 건 치미였다.치미의 높이가 무려 210cm.
동양최대의 사찰이었다는 신라 황룡사의 치미보다도 큰 크기다.그러나 이러한 유물만으로
안학궁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볼 수는 없다.주춧돌만으로도 지붕의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이병건교수를 찾았다.

인터뷰 저는 이 건물은 팔작지붕 가능성 제일 많다고.지금 보면 이 주춧돌과 이
주춧돌의 간격과 이거와 이거의 간격이 동일 이런 경우는 팔작지붕이나 우진각지붕의 형
태.그런데 이 간격이 이 간격과 다르면 팔작지붕..

주춧돌로 지붕의 모양을 추정하는 열쇠는 지붕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기하학적 원리에 있
다.건물 귀퉁이의 주춧돌이 정사각형으로 되어있는 건 추녀를 단 가장 무거운 지붕인 팔작
지붕을 올리기위한 구조라는 것이다. 팔작지붕은 가장 발달된 형태의 지붕이다.지붕을 받
치는 기둥은 어떤 모양일까 벽화속에 그 해답이 있다.조형적으로 가장 안정된 배흘림기둥
이다.건축물에서 가장 어려운 기술로 기둥과 지붕을 이어주는 것이 공포다.공포 중에서도
가장 발달된 형태인 다층구조의 공포가 이미 고구려고분벽화에 보인다.

인터뷰 당시 고구려시대에 일본에서는 이러한 발달된 공포양식이 보이지않는다.
근데 벽화무덤에서 보면 원초적인 공포가 보이기도 합니다.이런 걸로 볼 때 고구려시대 건
축물들은 상당히 발달되고 규모가 큰 게 지어지자않았겠는가...?

안학궁의 모습은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화려한 공포를 단 배흘림기둥이 촘촘이 세워지
고..그 위에 팔작지붕을 비롯한 다양한 모양의 지붕이 올려졌을 것이다.그리고 무려 210
센티미터에 달하는 거대하고 화려한 치미가 건물 맨 윗지붕에 올려졌을 것이다.전체 38만
평방미터의 면적위에 이러한 화려한 건물이 모두 51채. 장수왕이 머물렀던 안학궁은 이렇
듯 웅장하고 화려했다.안학궁 뒤에 축조한 대성산성은 전시를 위해 마련한 비상궁이었다.
인터뷰 안학궁과 대성산성이 항상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있지만 여기에도 결함이 있다.
 
결함이라면 일단 유사시에 외적이 쳐들어오면 왕이 대성산성에 옮겨간다.적이 대성
산성을 함락하지 못하면 이 평지에 있는 왕궁 불태워버린다.그런 실례는 국내성에서 들다.
국내성은 불타버린 실례있다.

전통적으로 전시와 평시를 분리하여 평지성과 산성을 따로 두었던 고구려의 도성체계는
6세기 들어 새로운 도전을 맞는다. 6세기 중엽 고구려는 위기를 맞는다. 북쪽에선 돌궐의
잦은 침입이 있었다.남쪽에선 백제와 신라가 연합해 고구려의 영토인 한강지역을 빼앗았
다. 평양성을 쌓기 바로 한해전의 사건이었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고구려는 새로운
도성구조의 필요성을 느꼈다. 좀 더 효과적으로 적을 막고 궁을 보호하기위해 선택한 새
로운 구조의 성. 그것이 바로 평양성이다.

 

 

 

 

 

이 웅장한 평양성의 성문은 단 한번도 외부의 적에 의해 열린 적이 없습니다.고구려가 멸망
하는 순간에도 평양성의 성문을 연 사람은 외부의 적이 아닌 평양성안에 있던 고구려인이
었습니다.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연개소문이 죽자 평양성안에선 내분이 일어났고 그 틈
을 타 고구려의 승려였던 도선이란 사람이 나당연합군이 들어올 수 있도록 성문을 열어주
었던 것입니다.이렇듯 고구려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단 한번도 외부의 적에게 내어주지
않았던 평양성, 그 난공불락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난공불락의 비결...


외부의 적이 평양성을 넘지못햇던 비결은 평양성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 비밀은
고구려의 성돌에 있었다.
인터뷰 이 고구려성들은 성벽디 대체로 이렇게 정교하게 잘 쌓았다.돌을 보면 잘
다듬어서 특히 정교하게 쌓은 성은 든든하게 하기위해 뿌리를 깊이 썼다.뿌리를 깊이 해서
든든하게 해서 빠지지 않게 하다.

고구려성돌의 가장 큰 특징은 성돌을 쐐기골로 길게 다듬었다는 것이다.이러한 모양의 성
돌을 한치의 틈도 없이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그런데 돌을 쌓을 때는 그저 네귀만 맞춰서
쌓는 것이 아니다. 성축조의 비밀은 6합쌓기.즉 하나의 돌이 6개의 돌에 둘러쌓이도록 쌓
는다.그래야만 돌이 하나 빠지더라도 주변의 돌이 무너져 내리지않는다. 이러한 6합쌓기
가 가능하다는 것은 바로 규격화된 돌을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다.이렇
게 성벽을 쌓은 뒤 안쪽면엔 또다시 여러 겹의 성을 쌓게되는데 마름모 모양의 돌을 꼼꼼
하게 끼워넣는다. 성돌의 뿌리를 길게 다듬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쐐기모양의 성돌. 6합
쌓기의 원칙.그것은 고구려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 비결이었다.모서리부분은 통돌을 이용
해 들여쌓기를 하고 있다.윗칸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들여쌓는 것이다.그러나 여기에서
도 6합의 원칙을 지켜지고 있다.

인터뷰 모서리 좀 더 견고하게 하기위해서 통돌을 지그재그로 싸다.그래서 이게
이렇게 나왔다면 이렇게 들어가고 절대 이게 이 칸이 절대 한 직선상에 놓이지않게끔 해서
절대로 무너지지 않게끔 견고하게 해서 고구려축성술을 최대한 보여줬다.

성이 튼튼하게 유지되려면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지반이다.평양감사였던 윤휴가 쓴 평양
속지엔 지반을 튼튼히 하기위해 흙을 쪘다는 기록이 나온다.평양성의 대부분은 강변을 따
라 성을 쌓아 올렸다. 물가에 어떻게 성을 쌓을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이 암반에
있다.

인터뷰 대동강을 면한 이쪽..특히 내성쪽은 주-욱 대동강바닥이 이런 바윗돌이
주욱 깔려있다 그래서 바�돌밑에 기초해서 성벽을 쌓아서 성벽이 상당히 튼튼했고 웬만
한 이런 피해를 입지않다 그래서 성벽이 오늘까지 이렇게 남아있다.

 

 

 

 

바닥의 암반층을 이용해 그 위에 성을 쌓아올렸다.최대한 자연지형을 살려 성을 쌓는 것은
고구려 축성술의 기본이었다. 평양성에서 가장 공사가 어려운 구간은 대동강과 보통강이
만나는 습지대다.지반이 약한 습지대에 어떻게 성을 쌓았을까? 그런데 발굴당시 이곳에서
는 통나무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백제의 사비성은 습지대에 쌓은 대표적인 성이
다.그런데 재미있게도 그곳에서도 발굴현장에서 통나무와 나뭇가지들이 발견되었다.그렇
다면 사비성과 비슷한 공법으로 평양성도 쌓았을 것이다.
인터뷰 통나무만 있는 건 아니고 통나무가 사이사이 들어가면서 그것이 일종의
힘을 받는 역할을 하면서 그 사이에 유기물을 깔았을 듯 잔 가지나 나뭇잎을 깔아서 아래
에서 내려오는 수분 위에서 내려오는 수분을 차단. 수분을 일정하게 유지해 부분침하를
방지한다.
습지대에 모래기둥을 박아 물을 빼내는 현대 샌드드레인 공법처럼 통나무를 이용해 성이
무너지는 걸 방지하는 공법이다. 평양성은 축성술만 뛰어난 것이 아니다. 이런 축성술을
기반으로 방어시설도 전략적으로 갖추고 있다. 평양성의 뛰어난 방어시설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칠성문. 문입구에 둥그렇게 튀어나온 것은 치다. 치는 고구려 산성 곳곳에서 보이
는 대표적인 방어시설로 이렇게 둥글거나 사각의 형태로 튀어나온 부분을 말한다.치는 성
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세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하기위한 방어시설이다. 옹성은 성문
을 보호하기위한 방어시설로 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한곳으로 몰아 공격하기위한 것이다.
칠성문은 인공의 치와 자연의 지형을 완벽하게 조화해 성문을 보호하는 독특한 형식의
옹성구조를 이루고 있다.


서길수인터뷰 철저하게 만들고 이게 무너질까봐... 적군이 무너질 수 없도록 그걸
하나 쌓는데 상당히 많은 인력과 돈이 필요해 오른쪽은 산벽을 이용해 그와 똑같은 효과를
보도록..즉 적은 인력을 들여 큰 효과를 보도록한 성이다.
 

 

 

 

평양성엔 또한가지 특이한 방어시설이 있다. 산성이 있는 높은 지대에만 설치된 방어시설
로 산성 안쪽과 바깥쪽에 구덩이를 파놓았다.이는 황이라고 부르는 방어시설로 성벽을 접
근하기 전이나 성벽을 넘은 뒤에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커나 막는 역할을 한다.이러한 황이
설치된 부분은 내성의 서쪽부분. 자연해자인 대동강과 보통강이 없는 부분이다.이렇게 외
곽엔 자연해자를 둔 평양성. 그 해자를 건너 성안으로 들어오더라도 내성까지 접근하기위
해선 여러겹의 성들을 또다시 넘어야한다. 즉 성 내부의 쌓아놓은 여러 겹의 성들은 또 하
나의 방어시설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터뷰 나성으로 침입을 하더라도 중성에서 또 방어 최후 북성까지 가서 방어하도록
설계가 되있다. 실제 고구려가 멸망하는 전쟁때도 적군이 나성안으로 들어온 적이 잇는데
설치했다 다시 물리치는 기록이 남아있어써 철저히 4중방어막을 형성한 특수한 도성을 완
성시�다고 볼 수 있다.

자연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방어시설을 갖춘 평양성.고구려인의 지혜가 결집된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다리 복원해서....)


평양성은 적을 방어하기위한 방어성의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평시엔 한 나라의 수도
로서 그 역할을 했던 평양성.그래서 그곳엔 지금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각종 시설들도 갖
춰져 있었습니다. 이 기록을 한번 보시지요. 그러니까 이 기록으로 보면 고구려 평양성엔
여러 개의 다리가 놓여져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이번엔 이 사진을 한번 보시지요.취재팀
이 북한에서 구해온 사진인데요,바로 고구려의 다리유적입니다.나무의 중앙에 파인 이 구
멍이 교각을 세웠던 흔적이라고 합니다.이 다리유적이 발굴된 곳은 대동강근처로 평양성
보다는 조금 윗쪽지역이었습니다.그러나 이 다리유적을 통해 우리는 평양성에도 다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 그림으로 복원해놓은 고구려의 다리를 영
상으로 복원해봤는데요.어떻습니까.재질만 나무일 뿐 지금의 다리와 그 모습이 별반 다르
지않지요.평양성엔 이렇게 강 건너 외부지역과 연결하는 다리가 대동강위에 세워져있었을
것입니다.자 이제 마지막으로 평양성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평양성중에서도
대동강하류쪽인 저쪽 바로 일반서민들이 사는 외성지역인데요 저곳은 그 면적이 730평방
미터로 평양성전체면적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평양성의 네 개 성중에서 그 면
적이 가장 큰 곳이지요 자 1500여년전 고구려서민들이 살던 곳, 외성은 어떤 모습이었을
까요?

 

 

 

 

계획된 도시, 평양외성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서는 한점의 그림이 있다.비록 19세기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고구려
당시의 평양성의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산을 둘러싸고있는 북성도 완전한 모습을 갖
추고 있고 을밀대와 현무문도 보인다. 대동강변에 있는 대동문과 연광정도 자세하게 그려
져있다. 그렇다면 일반서민들의 거주공간인 외성은 어떤 모습일까? 그림에선 외성부분이
실제보다 훨씬 작게 표현되어있다.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영향인듯하다. 그런데 외성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이 있다.마을 중심으로 길게 나 있는 물길, 바로 운하다.이 운하는 고구려
당시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터뷰 적어도 50년대 후반에 조사발굴하다.그때 보니가 고구려때 축성과 동일하고
지명도 남아있어 고구려때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외성부분에서 또한가지 주목해야할 부분은 성 전체를 네모 반듯하게 구획지어놓은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직사각형의 구획들이 질서정연하게 그려져있고 그 사이로 곧은 길이
나있다.실학자 박지원은 과농소초란 책에서 "큰 도로는 줄을 낸 듯 반듯하고 가로수는 똑
바르다."고 묘사하고 있다.즉 평양성도처럼 외성지역엔 반듯한 길이 나있었다는 것이다.
외성의 모습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다.조선중기 학자인 한백겸은 1607년
당시 외성지역을 직접 조사해 그림으로 남겨놓았다.한백겸의 그림은 평양 외성지역이
계획된 도시임을 보여주고 있다.

인터뷰 크게 세가지로 구분되어있다.하나는 조공한 작은 구역.두번빼는 전자모양을
한 작은 구역이 네 개 되어있는 중간구역 세 번째는 전자 즉 중간구영기 가로 세로 네 개
내개가 되어있는 큰구역이다. 큰구역은 중간구역이 16개가 들어있고 작은 구역이 64개가
들어있다 이것이 당시 도시유적으로서...

한백겸그림속의 외성은 마치 지금의 신도시처럼 바둑판모양으로 도로가 나있었다.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다. 한백겸은 도로의 폭까지 정확하게 기록해 놓고 있는데 가장 작은 단위
의 구획인 구자 사이엔 1묘로 즉 폭 1.4미터의 도로가 나있고 그 다음 넓은 도로는 가장
작은 도로의 3배인 3묘로 즉 4.2미터이며 그리고 도시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대로는 9묘로
즉 12.6미터다.한백겸이 그려놓은 도로 중 일부는 평양시내에 그대로 남아있다.현재 평양
역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이 외성지역이다.그 중 김책공업종합대가 있는 바로 이곳은 당시
의 평양성을 남북으로 잇는 중심대로다.그런데 이곳은 그 폭만 넓어졌을뿐 위치나 방향은
한백겸의 그림 그대로다 "여기 어디? 아니지 이건 이 아래...우리 여기 서있는데...이 즈음
되지 제일 큰 도로가 이렇게 하나 이렇게 이렇게 현재 남아있는게 이 도로유적이다."

실제 이 중심대로에서는 고구려때 도로유적이 발굴되었다.지난 1954년 김책공업종합대학
건설공사중에 14미터폭의 도로유적이 나왔는데 중앙엔 자갈과 흙으로 땅을 다졌고 양옆
으로는 배수로를 냈다.

두 사람 거리에 서서 인터뷰 일반주민들이 살던 시대 그러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에도
여기는 큰 건물이 없다.그래서 고구려때 세운 외성유적이 이조후반까지이다.그래서 우리
가 서 있는 이 유적이 현재에 와서 조금 변동은 됐지만 기본저으로 고구려시대 만든 유적
이다.

그럼 도시 전체에 도로가 나 있었을까? 외성지역에서 수백개가 출토된 이 법수는 당시에
도시정비가 잘 되어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박지원이 쓴 과농소초에 의하면 법수
는 일종의 도로의 폭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사거리마다 세워져있었다고 한다.그렇다면 평
양성 외성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한백겸이 그려놓은 가장 작은 단위의
구획은 총 면적이 3,000평이다.이 안의 인구를 안다면 외성 전체 인구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의 도시 구획을 발굴하고 있는 경주를 찾았다. 경주는 고구려 평양성과는 달
리 6,000평을 기본단위로 구획이 나뉘어져 있었다. 조사결과 6000평안엔 모두 25구획...
500명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터뷰 한 집에 20명정도가 살았을 거로 추정한다 그러면 6000평정도되는 이
광장내에 있는 25개집의 전체 인구수는 500명정도...

경주의 발굴성과를 고려할 때 평양성의 3000평 규모는 12구획으로 나뉘어져있고 그 인구
는 약 250명이었다. 이것을 기본단위로 계산해보면 평양성의 외성인구는 약 17만명이 된
다. 외성의 중앙을 가로 질러 유유히 흐르는 운하. 이 운하에 배를 띄워 고구려 사람들은
짐을 옮겼을 것이다. 마치 지금의 신도시처럼 잘 정비된 도시엔 17만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외성을 지나면 그곳엔 관청이 들어선 중성이 있다. 그리고 또다시 높은 성을 지나
야 왕이 머물렀던 왕궁을 만나게된다. 이것이 1500년전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이었다.

 

 

 

 

클로징


외성안에만 17만의 인구가 살았다는 평양성..북한학자들은 평양성주변에 살았던 사람들
까지 치면 17만명에 두세배가량되는 인구가 평양성근처에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북한이 평양성을 국보유적 제1호로 지정하고 우리 또한 평양성을 우리의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두는 건 바로 이러한 서민들이 사는 공간이 평양성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뭐 지금
 조선시대 도성에 친숙한 우리에게 성안에 서민들의 거주공간이 있었다는 것이 그다지
대단하지않은 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러나 평양성이 지어지기 이전엔 왕궁과 산
성 그리고 서민들의 거주 공간은 각기 따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그런데 이 평양성이 최
초로 성안에 모든 도시시설물들을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즉 성이 바로 한 나라의 수도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그리고 이러한 도성의 모습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이
어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성의 모습을 갖게된 것입니다.
고구려 평양성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그동안 분단의 그
늘에 가려져 만날 수 없었던 평양성의 흔적을 찾아보고 그 원래 모습을 복원해봤습니다.
당대 최대의 규모이자 우리나라의 독특한 도성구조의 첫 시발점이었던 평양성.그것은 남
북한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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