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환한 한낮인데도 마음이 가라앉거나, 사람 틈에 부대끼는 것이 막막하거나, 

오가는 말들이 덧없게 여겨지질 때가 있다. 

살기 위해 당연히 팽팽해야할 것들이 맥이 풀어질 때면 

어김없이 음악을 듣고 싶어지는데 특히 흘러간 옛 노래들이 듣고 싶어진다.

먹고 사느라 마음에도 없는 모진 말을 내뱉고, 

내 몫의 잇속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기 위해 칼날 같은 말을 

남의 턱 밑에 들이대었던 날이면 더욱 그러하다. 

오늘이야 늘 피곤하고 덧없는 법이며 보내 놓고, 

어깨 너머로 돌아보면 뿌연 풍경과 함께 부드러워지고, 그립고, 

아름다워지는가 보다.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답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꽃같이 서러워라.

그런 것이었다, 사람살이는.

무그올갠 전주가 지금도 생생한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이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려 퍼지던 

육십 년대 끄트머리나, 배성의 ‘사나이 부르스'나 '기적소리만'이 유행하던 칠십 년 초, 

아마도 흘러간 노래가 가져다주는 회상의 힘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흘러간 노래에 

오늘이 이렇게 휘둘리는 것은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다.


제 몸통보다 더 큰 로케트 배터리를 검정 고무줄로 친친 감고 

높은 곳에 모셔져있던 금성 라디오는 온갖 상상으로 가슴을 설레게 했던 마술단지였다. 

붉은 왕관 마크와 그 아래에 적힌 Gold Star 라는 로고는 또 얼마나 멋졌던가!

세월이 흐른 후에 전위적인 음악을 연주했던 그룹 ‘크라프트 베르크’의 ‘Radio Activity’를 듣다가 

돌연 가슴에 덜컥 내려앉은 적이 있었다. 

그 음악의 시작 부분에 마치 그 옛날 라디오의 다이얼을 맞출 때 나던 소리가 

‘비유…, 뷰…’, 하고 들려왔던 까닭이었다.

방사능 계측기 같은 곳에서도 그런 소리가 나는지 모르겠지만 그 옛날, 

검정 고무줄에 묶인 금성라디오로 다이얼을 이리 저리 맞출 때 듣던 그 소리와 같아서 

크라프트 베르크의 'Radio Activity’를 턴테이블에 얹을 때마다 옛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간간이 알아듣지 못할 외국 방송이며 일본 방송들, 어쩌다 이북 방송이 잡힐라치면 

행여 간첩으로 잡아갈세라 황급히 다른 곳으로 돌리며 가슴 두근거리던 시절이었다.


이래저래 소리를 좋아하는 원형질이 형성되는 데는 아마 그 때 

그 ‘금성라디오’도 단단히 한 몫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원래 미색이었으나 

흐르는 세월에 누렇게 빛은 바랬어도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특별한 물건이라는 기억과 함께 

내 가슴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토록 구성지게 꺾어 넘기던 이미자의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도, 

섬 처녀도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겠지만 얼굴도 모르는 

총각선생님과 섬 처녀의 얼굴을 떠올려 보고는 했었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머나 먼 그 서울을' … 

서울을 가보고 싶어도 그저 라디오 너머로 상상만 해야 했던 누나와 형들뿐인 

그 때 그 시골마을도 이제 몇 집이나 살고 있을까마는 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금성라디오를, 일천구백육십 년대 그 끝자락을…….


어른들이 들일 나가신 한낮이면 대청마루에 누워서 12시 55분이면 

어김없이 '어이타 북녘 땅은 핏빛으로 물들었나.

' 탄식 소리에 가슴이 아릿하던 '김삿갓 북한방랑기'를 들으며 

긴 손톱과 무서운 이빨을 한 공산당을 떠올리기도 하고, 

따라 부르던 이미자며 조미미, 패티김, 하춘화, 김상진, 펄시스터즈, 김추자, 장미화, 

바니걸스, 김상희, 남진, 나훈아의 노래들과 함께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고 

그 가슴 두근거림은 아득히 멀어져 갔다.

 


검은 교복과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던 시절, '

이런 날에는 왠지 … 라는 대사와 으레 들어가는 진한 커피며,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던 이종환의 팝 프로에서 차분하게 나를 가라앉게 만들던 

맷 먼로의 '웬즈데이 차일드', 혹은 가난하지만 뜨겁고 비장했던 사랑 이야기, 

레이 피터슨의 '텔 로라 아이 럽 허', 멋진 베이스 인트로가 지금도 가슴을 두드리는 벤쳐스의 ‘파이프라인', 

김치나 된장찌개로 저녁을 때운 놈이 듣는 그 먼 나라의 유행음악들은 

또 얼마나 나를 들뜨고 가슴 설레게 했는지? 이불 속에서, 

혹은 밤늦게 책상 앞에서 듣던 그 노래들은 지금은 어느 오래된 고물상 

야적장이나 쓰레기 더미에 깔린 채 잊혀져 가고 있겠지.


아직은 추억할 나이는 아니지만 가끔 사는 것이 팍팍하다 느껴지면 

문득 문득 고무줄에 친친 로케트 배터리와 함께 묶여 있던 금성라디오가 

생각나고  김영운, 고춘자, 장소팔의 만담, 재치문답, 

아침이면 온 동네를 울리던 시그널 뮤직과 함께 햇살처럼 환하게 쏟아져 내리던 

명랑한 우리집',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으로 시작되던 임택근 아나운서의 비장한 목소리에 

절로 쥔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가던 권투중계, 

지금도 좋아하는 최병호의 '아주까리 등불'', '삼각산 손님', 음, 채규엽과 백년설도 빼 놓을 수 없다.

이네들은 지금도 내게 있어 카루소요, 질리요, 탈리아비니인 것은 

그네들의 노래솜씨도 절창인 탓도 있겠지만 오직 라디오 

하나로 채워지던 내 영토에 찾아온 최고의 절창이요, 가객이었던 탓 일거다.

 

세월이 이만치 흘러 가끔 그 검정고무줄에 묶인 라디오 소리가 그리워지면 

인터넷을 떠돌며 옛 노래들을 찾아 나서는데 어떻게 간직하고 있었는지 

벌써 폐반이 되었을 어제의 노래들이 오늘 마구 흘러나온다.

까맣게 잊혀졌던 세월들과 돌아보면 비릿하고 찝찔한 눈물빛깔로, 

살아온 굽이굽이 그립고 아쉽던 세월을 돌려놓는다. 요즘이야 몇천만원 하는 

오디오들이 지천으로 널렸고 해상력과 정위감, 하이엔드적인 음질을 운운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정말 맛없고 멋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게 인터넷에서 건져 올린 옛 노래들 AIFF 파일로 변환하여 

CD로 구워 오디오에 불을 지피고 고물 소리통으로 들으면 

어느 새 육십 년 끄트머리나, 칠십 년 새마을 운동의 노래가 울려 퍼지던 때로 돌아간다.


I'd sit alone and watch your light

My only friend through teenage nights

And everything I had to know

I heard it on my radio  Radio .


Radio!  You made 'em laugh -- you made 'em cry

 You made us feel like we could fly.

Radio, someone still loves you!

Radio ga ga Radio goo goo 


 Radio what's new?

Radio, someone still loves you!

(그룹 Queen의 radio gaga 中)


나, 돌아가고 싶어...

검정 고무줄로 로케트 배터리를 친친 묶어서 장롱 높은 곳에 얹어 둔 

금성라디오를 듣던 어린 날 아무 것도 염려할 것 없던 대청마루로, 

혹은 밤늦게 이불 속에서 라디오 하날 껴 앉고 막연한 앞날에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까까머리 시절로…….

출처 : 가자 안동으로 | 글쓴이 : 미루나무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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