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층시하를 살아온 반백년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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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안주인이 들려주는 고택 살이

층층시하를 살아온 반백년의 세월

렌즈로 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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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인이 들려주는 고택 살이

                              - 다섯 번째 이야기 -

 

 

 

안동에 오시는 손님들과 함께 하회마을을 가다보면 안동시 풍산읍에 있는 풍산한지공장을 지나고 나서

바로 오른 쪽에 기와집이 즐비한 동네가 보이면

"저기가 어디예요?" 하고 묻는다.

"안동김씨 집성촌인 소산마을입니다." 라고 답하면 바로 돌아오는 말이

"아! 세도정치 한 안동김씨요?"

 

그렇다 사람들은 안동김씨 하면 세도정치를 생각하는데

어디 임금의 사돈이 되어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안동김씨 모두 일까?

안동 김씨지만 세도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 벼슬에 뜻을 버리고 소산마을에서 삼소재(三素齋)란 당호(堂號)를 쓰며

 (삼소는 ‘소산(素山)’에 살며, 깨끗한 행실을 하고, 검소한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이다.) 살아간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

익원공 24대 종손부부(김석교(77세) 유기(80세))이시다.

 

 

삼소재 어른들을 뵐 때면 언제나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아마 세상과 부대끼는 것을 조심하며 살아오셨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온화한 인상의 안어른은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4월의 끝자락이지만 일찍 온 더위로 시원한 안방바닥이 그리워지는 날에 소산마을을 친정집 가듯 편안한 마음으로 찾았다.

 골기와 집 그득한 동네 골목을 지나 마을 뒤 맨 윗 집인 삼소재는 예나 지금이나 한적하니 평화롭다.

찾아뵙기로 전화를 드렸더니 마당의 인기척만 듣고도 벌써 문을 열고 들어오라신다.

 안어른이 쉬고 계시던 사랑방으로 들어 인사를 드리고 전화로 말씀드린 내용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니

"아아들이 보면 등신같이 살았다고 할라. 뭐할라꼬 쓸라카니껴?" 하시면서

조르는 자식을 이길 수 없다는 듯이 옛날이야기를 두런두런 들려주셨다.

 

 

 

 삼소재 전경

 

 

 

층층시하를 살아온 반백년의 세월

                                                          유기(80세 . 익원공 24세 종부)구술

  

 

나는 안동댐이 생기기전에는 월곡면이었다가 지금은 예안면인 삼산동에서

성자 희자 아배와 의성김씨(학봉종택의 시인씨가 육촌) 어매 사이에서 1남 2녀중 장녀로 태어났어요.

우리 큰아배(할아버지)가 상처를 하여 전후취를 두시는 바람에 우리 아배는 13남매중 장남이었어요.

 형제분이 오형제고 고모들이 여덟 자매였어요. 우리 큰아배는 서른 여덟에 상처하시고 처녀장가를 갔어요.

친조모가 7남매를 두고 돌아가시고 작은할매가 또 6남매를 두니 13남매였제요.

작은 할매가 큰아배보다 스무살 적고 어매보다 일곱살 많으이 넷 째 삼촌이 오빠하고 동갑이라꼬요.

옛날에 양반집에서는 재취를 얻어도 처녀를 얻어야 되거든 그래 노으이 젊은 시어머니들이 수두룩했어요.

 

 

오형제분 중 셋 째 삼촌은 일본에 가시고 삼산 사시던 어른들은 온 집안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그래요.

증조부님은 필자 영자를 쓰셨는데 독립운동하시다 옥사를 하셨고,

둘 째 삼촌은 독립운동 하시다가 붙잡혀가서 2년동안 옥살이 하다 돌아가셨고, 독립운동 하면 모르는 이가 없는동산 유인식 선생도 종조부고요.

그 때는 일본늠들 한테 들킬까봐 가만가마이 독립운동을 해서 웃대 어른들 중 누가 독립운동을 했는지도 몰랬는데,

얼매전에 천전에 있는 독립운동기념관 가서 보이 우리집에 10촌 안짝에 독립운동 하신 어른이 10분이 넘었디더왜요.

 

우리 어매는 16살에 시집을 왔는데 오던 다음 달에 삼촌 태어나고,

 신행오고 사흘만에 외조부 돌아가셨다꼬 부고가 왔는데 어른들은 가라고 하셨지만 금방 신행왔는데 갈 수 없다꼬 가지 않으이

집안에서 나이 어린 새색시가 생각이 깊다꼬  떠들썩 했다이더.

 

나는 어릴적 크게 부자는 아이래도  생각이 깊은 어매와 점잖은 아배 밑에서 별 어려움은 모르고 자랐어요.

 살림도 크게 부자는 아이래도 농토가 한 탯줄에 논 다섯 마지기하고 밭 여섯마지기가 있어 동네서는 괜찮게 사는 집이라고 했제.

큰아배와 아배가 글 하시고 출입하시는 어른들이라 손님들이 항상 들락거렸으이 내가 자라면서 접빈객은 잘하지는 못해도 하는 척은 하고 시집왔제.

 

그 때 여덟 살 맏이 오빠가 성균관대학에 다녔어요.

우리집에서는 서울로 유학 보낼 처지는 안됐는데 머리가 하도 좋아 거의 고학하다시피했다꼬 그래요.

그래 다니는데 일본놈들이 학병보내라꼬 해가지고 외동아들 안보낼려고숨어서 도망다니고 하는데

그놈들이 안보내면 삼족을 멸한다꼬 하니 할 수 없이 보냈어요.

군을 가서 일본 대판까지 갔는데, 거기 간지 2주일 만에 오빠가 밤에 꿈을 꾸는데 증조부가 조부보고

" 여가 어딘데 아아를 갔다놨노?" 카면서 불호령을 치드라네

그래서 깨어보니 몸에 열이  불덩거리 같이 나면서 아프니까 옆에 있는 군인이 신고해서

의사를 불러와서 보이니 아주 나쁜 열병이라꼬 하면서 집으로 갔다가 다 낳으면 다시 오라케서

집으로 돌아 왔는데 집에 오이 글쎄 병이 언제 아팠노 싶게 깨끗이 낳았다 그래요.

거짓말로  아파서 요양한다고 하면서 숨어다니는데 삼년 있다가 해방이 되었어요.

 

그 오빠가 해방되고 서울서 기아전기 다녔는데  6.25 사변통에 북으로 갔뿌랬어요.

오빠 오면 날 시집 보낸다꼬 기다리다가 내가 그 때 시절에는 노처녀로 24살에 시집을 왔어요.

동사댁(오라버니의 아내)은 신씨로 대구 사람인데 경북고녀를 나온 신식 여성이었제요.

오빠가 이북으로 가고 우리와 같이 살다가 7년 후에 일본을 거쳐 오빠한테 갔어요.

그리고 한 번도못봤어. 죽기전에 꼭 한 번 만나봐야 할껜데. . . .

아직도 결혼을  한 이야기만 나오면 부끄러운 할머니

 

그 때 세월은 남자는 갈케도 여자는 안 갈케는 세월이라 나는 학교도 못가고 여남은 살은 되었을 때 야학에서 글을 배웠어요.

 요새 같이 동갑들이 같이 다니는게 아니고 나가 여남은 살씩 차이나는 데도 같이 공부를 했제.

그 때는 일제시대라 우리 글은 못배우게 해서 가마이 숨어서 하다가 일본순사가 칼차고 총미고 저벅거리고 오면 흩어져 집으로 가고 그랬어.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 그래. 그 때 내가 급장도 하고 참 재미있었는데 한 오육년 하다가 해방되어 그만 뒀어.

그래도 그 때 배와서 한글이나 한자를 까막눈은 면했어.그 때 이런 노래도 가만가마이 불렀어

"낙숫가 벽수산 밑 적은 마을은

옛부터 이름 높은 우리의 삼산

우뢰같은 소리가 들리는 구나

나아가자 배움터로 앞으로 가자"

 

그래도 그 때 공부한 것이 얼매나 좋은동.

내가 한자나 언문(한글) 잘 읽는 것을 보고 며느리들이 "어머님 공부 안했다 그디 그만하면되지요."카고,

손녀도 내 일본 말 하는 것을 보고"할머니 공부 안했다더니 일어도 잘 한다 마는." 케.

  

 

내 중매는 큰아배의 친구이고 넷 째 고모의 시외삼촌인 검제 김씨어른이 했어요.

동사댁의 부친, 그르이 우리 사장어른이 대구에 있는 대학 나오고 직장도 좋은 총각을 중매를 해줬는데

큰아배가 이 집이 양반 좋다꼬 그 말은 듣지도 안했제요.

그래도 나는 그 대구 총각한테 마음이 있었든동 꿈에 그 총각하고 참 재미있게 지냈어. 얼굴도 잘생기게 보였고.

지금 우리 집 어른도 꿈을 꿨는데 신랑이 왔다고 그래가주고 문구멍을 뚫고 봤드이만은 그쿠 좋은 줄은 모르겠더라꼬.

그래 중매해가주고 선도 안보고 시집왔제.

 

시월 초엿셋날 혼례를 치루고 신랑은 삼일 있다가 가고 나는 신행을 일주일 만에 왔어.

첫날 밤에 신랑이 내손을 만져보고 '밥 해먹었나?" 하고 묻길레 별로 안해 먹었다고 했제.

나는 들일이나 심한 집안일은 안하고 커노이 손이 백옥 같앴어.

 "손이 고운데 우리 집에 오면 아무거나 막해야 한다."고 말했어.

그 때는 막하는 게 뭔줄 몰랬는데 시집 와보고 알았어. 살림이 어려운 종가의 안주인이면 뭐든 다해야 된다는 그말이었제.

 

시집 오이께 시증조부 내외분(68.73), 시조부 내외분(54.58), 시어머니(40), 시아버지는 세상버리고 안계시고.

미성(결혼하지않은) 시고모 1분, 시동생 하나 그리고 우리 내외 아홉 식구만 해도 많은데

 어느 날 식구끼리 밥 먹는 날이 없었어.

식구끼리만 해도 외상을 다섯 상이나 차렸어.

웃대 어른들은 모두 따로 외상 차리면 네상이제.

 신랑하고 시동생은 겸상으로 차리고, 그래도 시어머니는 시고모님과 나하고 한 상에 먹었어.

 

신행오이 주변에서 안밖으로 일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첫 근친 갔다오이 해방되어 다 제 갈길로 갔뿌고 그 때부터 내혼자 일을 했어요.

일도 별로 안해보고 시집와서 층층시하 종가살림 쳐내자니 언제나 손이 틀어 있었어.

시종조부(5촌 당숙)님이 와룡가구에서 술도가를 하셔서 괜찮게 사셨어요.

그 종조부님이 내손에 바르라고 맨소래담이나 칠이칠구리무를 오실 때 마다 사다주시더라꼬. 얼매나 고마운지 내 죽을 때까지 못잊제.

나는 일은 많아도 안밖으로 어른분들게 사랑은 원없이 받았어.

내가 이런말 하면 우리 며느리들이 "어머님 사랑이 뭐 최고이껴 몸도 좀 편해야되제요."하니더왜요.

 

첫 근친 갔다오니 시증조모님 돌아가셔서 9일 장 치렀는데 손님이 항정도 없었어요.

 동짓달 스무 닷셋날이니 춥기는 얼매나 춥든동 장사 치루는 동안 치매를 몇 개나 꾸워먹었어.

추운 날에 손님들 밥해대느라 정신 없이 바뿌게 쏘대느라꼬 치매가 타도 모르고 일했어.

삼년상을 치뤘는데 나는 증손부라 복을 다섯 달만 입었어요.

 

몇 년 있다가 시조부님 돌아가셔서 또 삼년상 치루고, 내와서 22년만에 시증조모님이 돌아가셨으나 그 때는 세월이 변해 1년 탈상하고,

시조모님은 한 30년 있다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는 44년 만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몸이 마이 아프이 시동생이 "상주 질 하다 형수님 돌아가시겠다."며

백일 탈상 하자고 해서 100일 탈상했제.

끝에 시종조부(5촌 당숙)님도 우리 시증조부님이 부친이니 어른계시는 우리집에서 환갑을 하고,

시종조모(5촌 당숙모)님이 먼저 돌아가시니 장사도 우리집에서 치르고, 홀로 되신 시종조부님이 우리집에 2년 동안 사시다 돌아가셨어.

평생 조상모시고 어른들 받들어 모시고 돌아가시면 장례치르고 하다보니 나는 다 늙었뿌랬어.

 평생 어른들만 섬기다보니 우리 내외는 서로 위해준다는 습관이 안들어서

내 생일에도 아아들이 뭘 해주지. 주인은 매꼬기(멸치) 한 마리도 사가지고 올 줄 몰래.

생신 때 멸치 한 마리도 얻어 먹어본 적 없지만 할머니는 가문을 나타 낼 때는 언제나  할아버지를 앞세우신다

 

 

나는 아들 둘 딸 둘 사남매를 두었어요.

층층시하에 4년 가까이 태기가 없으이 어른들 걱정이 이만저마이 아이랬는데 4년 만에 태기가 있으니 어른들이고 집안이고 난리가 났제.

우리 집 주인은 "우리 집에는 첫 아들 놓는 게 내림인데 첫 아들 못 놓으면 소박 맞을 생각 하라."고 농담을 했제요.

내가 태기가 있으이 어른들이 임산부가 여기 있으면 힘들어 안된다꼬

 친정에 가라꼬 해서 동짓 달에 가서 사월에 아아놓고 5월에 시댁으로 왔제.

그 때 참 좋더라꼬 나도 할 일 다했다 싶은 게.

 

큰 아 태어나고 뭐라도 우리 내외 마음 먹은데로 됐어.

 하도 없어 누구 오면 밥 주는 게 원이랬는데 아들 낳고 키우면서 그 원도 풀었고.

우리집 주인이 처음에 직장 잠깐 다니다가 집 지킨다꼬 들어와 살다보이 우리 내외는 살면서 안해본 일이 없어

나도 모도 심어보고 누애도 치고 소질도 하고 다 해봤는데 길쌈은 별로 안 했어. 이 집은 웃대부터 길쌈은 별로 안하시드라꼬.

 

아들들은 안동에 나가서 학교를 해서 별로 힘든일을 안했는데 맏 딸이 우리 농사 짓는 거 도우느라 여서 고등학교 다니면서 집안일 참 많이 거들었제.

학교 갔다오면 밥도 해먹고 저녁에는 내하고 같이 누애 뽕도 주고.

그래도 공부를 잘해서 시집가기 전에 은행에 다녀 번 돈으로 날 가전제품도 사주고 소도 한 마리 사주고 갔어.

 

아들들이 학교하고 나서 모두 직장을 안정적으로 다니고 맏아들 내외는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걸 마이 이해하고 도와줘서 고맙제.

어제도 이 집 지하들이 관광버스 한 차가 온다꼬 하이 맏며느리가 떡하고 감주, 반찬을 해가지고 올라왔어.

우리 큰 며느리는 마음 씀씀이가 넓어서 주변에 나눠먹는 걸 참 잘해.

우리 집 장손자가 한의대 다니고 장손녀가 국민학교 교사를 하고 있어.

그 손녀가 어릴 때부터 "할머니 내가 돈 벌면 비단바지 사줄께." 라고 하더니만 참말로 우리 옷도 사주고 돈도 주고 그래.

 

이제는 바쁜 일도 없으이 내가 한 달에 한 두 번 절에 기도 하러 가는데

기도 할 때마다 그저 집안이 화목하게 해달라꼬 빌제. 내가 살아보이 집안이 화목하이 모든 게 다 잘 풀리드라꼬.

나는 요즈음은 절에 가는 게 젤 행복하이더왜요.

 들에 가셨던 사랑어른이 돌아오시자

동네 뿐만 아니라 풍산들까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사랑채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시는 삼소재 어른들

 

올 봄에  하회를 다녀오다  소산마을을 지나는데 길가에서 차를 기다리는  삼소재 안어른을 만나서

안동시내에 있는 해동사 절까지 모셔다 드린 적이 있었다.

 보따리에 제법 무거워 보이는 농사 지은 쌀을 가지고 절에를 가셨다.

우리를 만나지 않았으면  할머니는  집에서  10분 정도를 그 쌀을 머리에 이고 걸어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안동시내까지 와서 다시 쌀을 이고 10여분을 걸어 절에 가셨을 것이다

 

평생을 조상 받들고 어른들 모시고 자식들 키우느라 당신은 한 번 편안하게 사실 틈이 없었으니

이제는 자녀들의 효도를 받으며 편안히 쉬셔도 되겠건만 

아직도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내가 힘든 것은 힘들다는 생각도 없이

오히려 절에 가서 기도하는 그 시간이 젤 행보하다는 할머니를 보면서

우리시대의 모든 어머니들이 떠올랐다.

 

모든 집안 일을 몸이 부서져라 하시면서도 자기 위치에 대한 불만은 크게 내색하지 않으며

다른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오신 우리의 어머니들은  

가족을 위해서는 수없이 기도를 했지만 한 번도 자길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며  인내하던 어머니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 살 수 있었을 테고 많은 종가들도 유지되었을 것인데

이제 그렇게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 세대가 돌아가시면

내가 하고 싶은 말 다하고 하고, 하고  싶은 일 다하며 남을 위해 헌신하기는 싫어하는 우리세대에는

누가 그 어머니들의 몫을 할까 하는 걱정과 함께

이제부터 나라도 그분들의 삶의 자세를 반이라도 흉내내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들었다. 

 

그리고 설령 당신 몸이 힘드셔도 그것을 하는 것이  제일 행복하시면

거기에 더 뭘 바라겠습니까.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그 행복한 일 오래오래 하시길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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