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한 터전을 찾아 온 고아의 믿음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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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터전을 찾아 온 고아의 믿음 밭

사랑천사(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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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터전에 찾아온 믿음 밭 성남제일교회

                                                     글 : 윤 희 완 집사의 삶이야기

 

【빌립보서 : 4장 6~7절 의 말씀으로 아무것도 염려 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라는 말씀을 알게 되었으므로 77년간을 오로지 자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능력이라고 자부와 긍지로 공적을 자랑하며 살아온 죄인이었습니다.

이제 뒤늦게나마 하나님을 알게 되고 깨닫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반성하면서 새로운 기쁨과 성령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겠습니다.



◆. 유년기와 고아의 삶

                1세~16세의 삶

 

  저는 6,25전쟁 이전에는 38선 이북인 강원도 양구군 동면 임당리 에서 11대 독자의 귀한 가정에서 손위 누님 두 분을 둔 다음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윤

씨 가정에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전통적인 농가들이 옹기종기 15여 채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 귀한 옥동자가 태어났다고 동래 어르신들의 축하를 받았다고 할머님의 자랑을 들으며 3살 때 8,15해방 이 되었다고 어르신들이 태극기를 들고 골목골목을 뛰어나와 함성을 지를 때 할머님의 등에 업혀 양손을 들고 뛰었던 기억이 선합니다. 작은 누님과 싸움을 할 때도 할머님의 든든한 빽 이 있어 내가 잘못하고도 누님을 억 두르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7살 때 뜻하지 안 앗던 6,25전쟁이 났으므로 초반에는 이북 쪽으로 피난을 가기도 하였습니다.

수불 트럭에 실리어 가다가 둔덕길에서는 힘이 딸 리 면 내려서 사람들이 밀어서 올라가서 내리막길에 서는 다시 타고 가는 기억도 납니다. 어느 탄광지역에서는 유엔군 비행기가 폭격을 할 때면 탄광 속으로 뛰어 들어가 피신하기도 하고 그곳 사람들이 집을 비우고 피난 간 빈집에서 거주하기도 하면서 뒤 산에 올라가면 자연산 팔 둑 같은 더덕을 캐다가 망치로 두 둘 겨 고추장을 발라 수불에 구어 먹던 그 맛을 지금도 생각하면 침이 넘어가기도 합니다.

 

   당시 피난을 다닐 때 이불 보따리를 나보다 크게 싸서 내 등에 붓 잡아 매어주면 뒤 퉁 대며 어른들의 걸음을 못 따라가서 울었든 기억도 납니다. 또한 아침을 먹다가도 정찰비행기가 한 바퀴 돌아가면 전투기(쌕쌕이)4대가 달려와 번갈라 가며 한바탕 폭격을 하고 나면 마을이고 인민군들이 주둔하고 있던 곳이 불바다가 되기도 하고 혹은 곡사포에 맞은 비행기가 불덩어리가 되어 빙글 빙글 돌아가다가 산 기슬에 떨어지는 광경도 눈에 선합니다. 어느 날엔가는 작은 누님과 같이 비행기 폭격이 시작되기 전에 집 앞 냇가에 뛰어가 숨었을 때 기관 단 총알이 옆에 우두둑 떨어져 물에서 치르륵 하고 소름 끼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산골짜기에 방공호를 파고 피난 생활을 할 때 큰 누님이 나물을 뜯으러 산에 갔다가 폭탄의 파편이 종아리에 파고들어 다리를 다쳤을 때 유엔군이 들어와 아군 의무병이 와서 치료를 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에는 유엔군들이 와서 어른들을 모두 데리고 가면서 당시 아버지께서는 병에 들어 있었는데(당시 유엔군에서 비행기로 세균을 살포하여)옘 병 이라는 병명에 걸리셨습니다. 유엔군들이 치료를 해준다며 데려 가야 한다고 어른들을 모두 데리고 갔습니다. 몇 일후에는 우리들도 데려가야 한다며 유엔군 들이 우리를 데리고 방공호에서 내려와 군용 트럭에 실어 남쪽으로 남으로 달려 원주에다 실어다 놓았습니다. 피난민들이 너무나 많아 집도 없이 땅을 파고 우에다 그늘 막을 얹어 놓아 그 밑에 누웠는데 어디선가 오셨는지 아버지께서 오셨는데 많이 아파하셨고 할머니와 어머님 누님 온가족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창고 같은 곳에 우선 있었는데 거기서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고 나도 많이 아팠습니다.

 

  그 후 문 막 쪽으로 가는 곳 밤나무가 많은 곳에 밤나무 수용소라는 집착 촌을 만들어 그곳에 일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할머님도 돌아가셨고 누님 두 분과 저와 남동생과 어머님 다섯 식구가 살게 되었는데, 배급이 너무 적어 작은 누님과 나를 고아원에 보내야 우리 몫으로 나오는 배급의 양식으로 남은 식구들이 살아야 한다며 우리 둘을 고아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고아원에서 어머님의 이야기만 하면 왜 그리 슬 푼 지 눈물이 흘러 계속 울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아원에 지원이 끊겨다며 입는 옷도 없고 음식도 부족하여 보리쌀에다 우유로 죽을 쑤어 하루 2끼도 반 그릇 정도만 주어 너무나 배가 고파 들판에 나가 풀 씨앗을 따다가 불에 복아서 먹기도 하였고 민가에 가서 널어놓은 빨래를 훔쳐가지고 시장에 가서 꿀꿀이죽과 바꾸어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너무 배가 고파 못 살겠다고 생각하고 수용소에 살고 있는 큰누님에게 가서 하소연을 하고 고아원에서 나와 누님한데 가서 살게 되었지만, 거기서도 부족한 식량 때문에 배불리 먹을 수가 없어서 집을 나와 방황하다가 당시 깡패들의 모임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기 위해 형들이 식히는 대로 물건 흠 쳐오는 것과 돈을 빼앗아 오는 것 등을 하면서 나날을 보내다 어느 날 엔가 패싸움이 있었는데 상대방에게 칼로 명치끝을 찔리어 죽었었는데 명이 붙어있어서 어느 시민께서 병원에 옴 겨 주었지만, 치료비를 부담할 사람이 없다보니 치료가 안 되어 중환자실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어느 의사 선생님께서 자기가 지난 당직 날에 들어온 환자인데 다시금 당직이 되어왔는데 아직 치료가 안 되었으면 죽었지 않았겠느냐며 살펴 보았드니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 의사 선생님께서 스스로 수술과 치료를 해 주시어 당시 그 수술 자국이 지금은 배꼽이 둘인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수술과 치료를 받아 어느 정도 낳아서 병원에서는 퇴원을 당했지만 갈 곳이 없어서 어느

시골로 가서 심부름을 해 줄 것을 제안하고 밥이나 얻어먹고 잠이나 재워주면 좋겠다고 간청을 하여 조실부모를 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착실히 살면서 같은 동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매형께서 법무부에 다니고 계셨기에 법무부에서 발행하는 갱생 이라는 월간지를 친구의 매형이 보내 주면 그 친구가 저에게 전해 주어 그 책이 나의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한 달 동안 주경야독으로 읽고 쓰고 하여 그 책의 내용을 완전히 내 것으로 인식토록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조실부모님 댁에서 저를 초등학교(당시국민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하여 주셨기에 10KM가량 되는 원당국민학교에 스스로 찾아가서 4학년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월사금이 월 200환이 있었는데, 그것 을 제대로 못 내었지요. 당시 제가 전교 어린이회 총무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토요일에는 어린이 회의가 있었고 그 회에서 의결된 내용으로 첫째 : 월사금을 제때에 납부하자와 둘째 : 몸을 깨끗이 하자 였는데, 월요일 전교 조회에서 제가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두 조항에 모두 위반되어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호되게 꾸중을 듣고 기합으로 운동장 3바퀴를 뛰어 돌고 교실로 들어가는데 어느 여선생님께서 저를 이리오라고 하면서 저를 교정 뒤편으로 데리고 가서 2,000환을 주시면서 “밀린 월사금을 내고 머리도 깎고 등교 하라” 면서 주시기에 어리벙벙하였지만, 선생님의 호의에 거절 못하고 받아서 담임선생님에게 밀린 월사금을 모두 내니 단임 선생님께서는 “너 이돈 어디서 난 것이냐? 너 누구의 돈을 훔친 것이 아니냐?” 하시면서 똑바로 대라면서 호통을 치셨습니다.

 

 저는 “훔친 것이 아니라 어느 여선생님께서 아침에 주셨습니다.” 단임 선생님께서는 “그 여선생님이 누구냐?”라고 올바른 말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선생님이었고 여선생님이기에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여드니 “그 여선생님을 보면 알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글쎄요.” 단임 선생님께서는 저를 데리고 교무실에 계시는 여선생님들을 돌며 그 여선생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마침 아침에 저에게 돈을 주신 여 선생님인 것 같으신 분이계서서 “저 선생님인 것 같습니다.”라고 해드니 그 선생님에게 가서 “아침에 우리전교 어린이회 총무인 윤희완 학생에게 월사금을 내라고 돈을 주셨나요?”라고 물으니 그 여선생님께서 “예 제가총무인 그 학생에게 2,000환을 주었습니다.” 그 후 단임 선생님께서 월사금을 면제해주시게 되었습니다.

  6학년이 되였을 때 전교운동회에서는 운동회비와 운동복으로 흰 바지와 흰 런닝셔스을 입게 되었는데 저는 그 조건을 갖출 수 없어서 운동회를 포기하였습니다. 월사금을 내주셨던 여선생님께서 운동회 전날 같은 동래 일 년 후배인 여학생에게 심부름을 시켜 “내일 아침에 박춘수 선생님께서 집으로 꼭 오라고 하셨어, 안 오면 안 된다고 하셨어.”라는 전갈을 듣고 무슨 일일까 하고 생각을 하면서 운동회 날 아침에 부지런히 여선생님인 박춘수 선생님께서 자취하고 계시는 집으로 찾아뵈어드니 “너에게는 마지막 운동회인데 왜 운동회를 포기하고 연습에 참여를 하지 않았느냐?”하시면서 꾸지 럼을 하시는 것이 엇습니다. “너희 단임 선생님에게 다 이야기를 했으니 오늘 운동회에 참여하도록 하여라.” 하시면서 선생님의 흰 추리닝과 런닝쎠스를 주시면서 갈아입고 아침을 같이 먹고 학교로 같이 가자고 하셔서(원당국민학교)로 갔습니다. 단임 선생님께서는 저를 “잘 왔다.”라고 하시면서 제 자리위치에 넣어주시어 연습했던 친구가 한사람씩 뒤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연습도 안 하였지만 달리기를 두 번 하였는데 2등과 3등을 하여 상품을 탔는데 보호자가 없어서 상품을 맞길 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선생님에게 보관토록 했습니다. 그리고 손님 찾기를 할 때는 선생님이라는 표어를 찾았기에 그 여선생님을 찾아서 손을 잡고 달려갔습니다. 많은 사람들께서 박수를 쳐주기도 하였습니다.

  운동회가 끝이 났는데 선생님께서는 먼저 가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이 엇습니다. 마무리를 마친 선생님께서 나오셨는데 상품을 주다가 남은 것이라며 노트와 연필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오셔서 저에게 주시었습니다. 그리고 같이 집으로 와서는 두 여선생님이 같이 자취생활을 하시는데 저를 도와주신 분은 박춘수 선생님이시고 다른 분은 이용해 선생님이셨습니다. 이분들이 사범학교를 같이 졸업하시고 우리학교에 처음으로 발령을 받고 오신 선생님들이 섰습니다.

  그 후 그 여선생님께서는 다른 학교로 전근되어 가셨습니다. 저도 국민 학교를 졸업 하고는 그 선생님이 정근해 가신 곳을 알아내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너를 중학교에 보낼 여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우리 오빠가 하시던 사업이 어려워져서 너를 중학교에 못 보내게 되었으니 기다리면 다음해라도 중학교에 보내주도록 할 것이니 그동안이라도 낙심 하지 말고 독학으로라도 열심히 자습토록 하라”고 하시면서 양구읍에까지 가셔서 중학생 교복을 한 벌 사주시면서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 청년시절 의 삶

               17세~28세의 삶

 

중학교에는 못가고 마을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어 그곳에 가서 마당 청소도 하고 심부름도하면서 어깨너머로 다른 친구들이 배우는 것을 훔쳐보면서 따라 하기도 하였고, 친구의 배우는 책을 빌려 옴 겨 써놓고 자습으로 읽고 쓰고 하면서 주경야독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새기며 친구들과 힘을 합하여 4-H 클럽과 농어촌 개선클럽을 조직하여 강원도에서 실시하는 각종 교육에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서 운영하는 유 섬 이라는 재단이 있었습니다.

  그 유 섬에서 년 2명의 청년들을 데려다가 6개월간 유축농업 교육을 시켜 지도자로 배출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대상자에 선발되어 미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 젖는데 당시 가는 비행기 값은 자부담으로 되어있어서 그 비행기 값을 낼 수가 없어서 포기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아쉽고 안타까운 심정에서 회원들 앞에서 손가락을 돌로 찌어 혈서를 쓰기까지 했었습니다.

 

  19살 때 제가 조실부모로 모시고 계시는 댁의 어른께서는 대종회와 조상들의 시제에 참여를 하시는 것을 보고 저에게는 그런 씨족 관렴이 없어서 부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그 마을에 윤 씨 할아버님이 계시는데 침도 잘 놓으셔서 동래 의원 역할을 하시는 어르신이 계셔서 하루는 “우리 윤 씨들은 대종회가 왜 없습니까?”라고 여쭈어 보아드니 우리 윤 씨들도 가을에 양구 남면에서 하신다고 알려 주셨기에 그 때 같이 데려가 달라고 애원을 하여 그렇게 하시겠다고 확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음력 10월 3일에 그 어르신을 따라 대종회에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한분도 없으셨고 그래서 할아버지들이 계시는 방에 들어가서 무좋건 인사를 드리고 고모님에게서 들었던 할아버지 성함과 아버지 성함을 대면서 “제가 동면 임당리에 사시던 윤 태봉님의 손자이고 윤 현상님의 맛 아들 윤희완입니다.”라고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중 할아버지 한분께서 “자네가 윤 태봉 통정대부님의 손자란 말인가?” “예저는 8살 때 원주에 피난을 가서 부모님께서는 다 돌아가셔서 잘 모르고 있었는데, 고모님 되시는 분께서 저의 할아버지의 성함(윤 태봉)과 아버지의 성함(윤 현상)을 알려주셨고 양구군 동면 임당리 부엉 골에서 살았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그 어르신께서는 “맜다 자네의 할아버지께서 그곳에 사셨고 윤 태봉 통정대부님이셨고 내가 몇 차례 만나 뵌 적이 있었어.” 라고 하시며 “윤 태봉 통정대부님의 손자가 이렇게 성장하고 살아 있었군, 참으로 반갑네,”라고하시면서 반겨 주셨습니다.

 

  매년 군 대종회에서 2명을 선발하여 모든 경비를 군 대종회에서 부담하여 중앙 대종회에 참여하는 제도가 있는데 금년에는 우리 양구군에서는 젊은이 윤희완 을 대표로 선발하여 보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됨으로 군 대종회에서 의결되어 저와 다른 한분과 함께 선발 되었습니다.

그래서 15일간의 대종시양에 참여를 하게 되어 파 평 윤 씨 중앙대종회에 참석을 하게 되어 양주에 계시는 중앙 대종회 사무총장님 댁에 머무르며 기미년에 제작된 족보에서 아버지 까지 등재된 것을 찾아내어 저의 전래된 가계부를 알게 되었고 파 평 윤 씨 백람 전을 구입하고 배워서 저의 뿌리와 윤 씨의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장하였지만 병역의무에 면제가 안 되어 대한민국의 국민의4대의무인 국방의무를 하기위하여 해군에 지원을 하였지만, 명치끝에 받은 칼침의 수술 자국이 배꼼같이 남아있어 배꼽이 둘인 사나이라 신체검사에서 불합격되어 해군에는 못가고 육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에서는 공부를 못했기에 군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스스로 부관 주특기를 자청하여 부여 받고 춘천 고등학교를 졸업 했다고 거짓 학력을 기재하였는데, 1963년 당시에는 통과 되었습니다.

  훈련소에서는 중대장님께서 어느 날 내무반에 오셔서 “내일 내가 서울에 가게 되는데 여러 제군들은 다 내 동생들인데 집에 보낼 편지 중 검열을 받지 않고 보낼 편지가 있으면 나에게 주면 서울에 가서 우체통에 넣어 부쳐 줄 것이니 그런 편지도 주고 교통비를 보태어 줄 아우들이 있으면 달라”고 하시기에 부지런히 저의 사정을 대충 쓰고 입대당시 마을 주민들이 후원해주신 돈이 30,000원이 있었는데 안 쓰려고 팬티 속에 숨겨 놓았던 것을 화장실에 가서 5,000원을 꺼내어 급히 쓴 편지와 함께 넣어서 가시는 중대장님을 연병장 까지 따라가서 “형님 서울 출장 가시는데 여비에 보태여 쓰시도록 저의 성의로 조금 넣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사정 이야기의 편지를 썼습니다.”라고 하면서 드렸습니다.

  일주일 후 중대본부에서 호출 연락이 와서 중대장님에게 호출을 받고 서로의 사정 이야기를 토로한 인년이 잘 이루어져 형님 동생으로 대외훈련을 받고 내무반에 돌아오면 중대본부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중대장님의 식사 중 일부를 제가 먹게 되어 배고픈 것을 면하게 되었고 내무반에 제몫의 식사는 다른 동료에게 나누어 주게 되었습니다.

  중대장님의 덕분에 훈련소의 생활은 별로 어려움 없이 4주의훈련을 마치고 부관주특기를 자청하여 받았기에 행정학교에를 가겠다고 하여드니 중대장 형님께서 부관학교에 안가도 괜 찬 으니 바로 기성부대로 가라는 것이 엇습니다. 중대장형님의 권고대로 행정학교로 갈 것을 포기하고, 훈련소 소장님의 표창장을 받게 되어 특정부여를 받아 희망지로 배출 될 것이라 하여 서울, 부산, 대구를 지망하였던바 대구에 있는 2군 직 활 부대인 장통 단으로 배속되었다가 다시금 서울 이태원동에 위치한 독립중대본부로 배속되어 서무계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등병으로 전입되어 서무계엄무를 보게 되니 서무계사수인 병장께서 제대가 3개월밖에 안남아 있어 이등병으로서는 서무계 역할이 어려울 것이니 상병계급장을 마이 가리 하여 달아주므로 입대한지 2개월 만에 상병이 되어 2주의 출장 증을 발행해서 휴가를 보내주므로 조실부모했던 대로 가니 군에 다녀온 선배들이 깜짝 놀라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모두들 놀라는 것이 엇습니다.

이태원동에서 편한 군 생활로 행정병으로서 3년간의 병력의무를 마치고 제대 특명을 받았을 때, 김신조 무장 공비남파 사건으로 그 때 5분대기조도 생겼고 예비군도 창설되고 군에서는 제대가 무기한 연기 되었습니다.

 

  그래서 화 김에 월남전에 지원하여 파월되어 베트남 퀴논6후송병원 4 과에 배속되어 재산 계 엄무를 맡아 1년 이상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파월부대에서 사상처음으로 지휘정비 보급 검열을 받게 되었는데, 주야로 일주일 이상 검열준비를 하여 내 나름대로 군에서는 요령이라는 것을 터득하였기에 재산 대장상에 숫자 맞춤을 하여 각 예하부대 검열 준비를 직접 내가 해놓았고 지휘보급검열단의 검열을 받게 된 결과 나의 검열 준비가 적중하여 다른 과에서는 일주일 이상 검열을 받게 되는데, 우리 4과에서는 2~3시간 만에 검열 끝이라는 통보를 받고 편히 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4과장 김 대위님 계서는 걱정과 근심 끝에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한 달 후에 베트남 파월 군 전체에서 검열결과 발표가 났는데 우리 6후송병원 4 과가 특등이라는 통보와 함께 일 계급특진 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달간의 특별휴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군에서는 사회에서 가 진 고생과 어려운 생활을 하였지만 군 생활 5년간은 편하고 사회에서 배우지 못한 행정엄무와 여러 경험을 체험하게 되였습니다. 그 후 귀국하여 제대를 하고 청년기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5년 후배인 아가씨(하 영숙 23세)가 자청하여 청혼해 옴으로 결혼해서 2남1여를 낳고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시켜 현대구릅 연구소와 금융계에 취직되어 현재 각자 제집들도 마련하여 아들딸을 낳고 중역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 사회생활 의 삶

        28세~40세의 삶

  

  학력도 없고 사회 인연의 연줄도 없고 재산도 없어 오로지 패기와 젊음만 가지고 수저 2개와 양은 그릇 네 개에 철제 캐 비 넷으로 서울 성동구 송정동에 전셋집 방한 칸을 얻어 23살 된 아리따운 아가씨와 1968년 10월 결혼하고 사랑이라는 전제조건 하나와 하면 된다는 의욕으로 범보다도 더 무섭다는 신접살림을 차렸습니다.

  짐 싣는 자전거 한 대를 사서 자신의 체력을 시험해 보기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춘천까지 왕복을 계획하고 출발하여서 춘천에 가서 점심을 먹고 되돌아오니 통행금지 직전에 140분경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체력으로는 자신감을 갖게 되어 마포 대흥동에 위치한 삼광빵 공장에 가서 자전거에 빵을 15,000원을 보증금으로 예치하고 싣고 와서 화양리, 자양동, 광장동 일대에 다니며 상점에 5~6원에 가져온 빵을 7원에 도매로 팔아 이익을 남기곤 하였지요. 한해 겨울동안 그렇게 장사를 하여 점포를 얻어 가계를 차리게 되었고 삼립 빵과 롯데라면, 삼양소고기라면, 오렌지 환타 주수를 화양리 대리점을 획득하여 상업으로 위치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무리하였던지 몸에 병을 얻게 되어 장사를 정리하고 1973년에 성남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성남에 와서 하는 사업마다 뜻대로 안되어 매우 어렵게 되어 다시금 서울로 출퇴근 하며 화양리 에서 중소기업으로 앵글 선반제조공장을 차려 2년 만에 전국에서 최고의 매출을 자랑하는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80년대 장영자, 이철희 부도사건에 의해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극복하기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는데 또다시 혜 어 날 수 없는 참사가 닥쳤습니다. 공장에서 가스 폭발로 7명의 사상자와 공장건물도 폭탄을 맞은 것과 같이 풍기박살 나는 대형 사고를 당해 크게 부도를 맟게 되어 회사를 접고 1983년부터는 처자식을 위해 다시금 어려움을 극복하기위해 성남에서 택시 운전자로 다시금 바닥 인생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택시운전자로 서 하루에 만나는 손님들에게 친절하고 평안하게 택시를 이용하시도록 하기위하여 꽃다발을 장치하고 좋은 글을 쪽지에 써서 택시에 부착하여놓고 목적지 까지 가시는 동안 잠간이라도 좋은 글을 읽어 보시도록하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양친 회 소망재활원의 장애인 시설에 자원봉사를 하러 갔다가 원아들을 보는 순간 나의 과거 어렸을 때의 시절을 돌이켜 보게 되어 이어린장애인들을 도울 수 있을 방법을 연구 하던 끝에 저의직업인 택시운전자로서 택시를 이용하시는 손님들에게 성금 모금 운동을 전개해야 하겠다고 하고 모금함을 만들어 부착하고 양친 회 소망재활원 장애어린아이들을 돕겠다는 취지 문안을 써서 붙이고 껌과 사탕을 비취 했더니 당시 택시기본요금이 650원 이였는데 4km를 가야 50원이 올라가다보니 웬만한 거리는 기본요금으로 가다보니 천원을 내시고 거스름돈을 안 받아 가시며 좋은 일하는데 보태여 쓰라고 하시므로 모금운동이 잘되어 양친 회 소망재활원에 지원 사업이 잘 이루어져 김형모 원장님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 까지 되었습니다.

 

♥. 봉사활동을 하게 된 경위

41세~65세의 삶

어렵게 생활하다보니 먹고 사는데 취우 쳐서 저의과거 어렸을 때 생명을 살려주신 어느 시민이나 춘천의 어느 병원 의사선생님에게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들이고 제가 운영하던 회사에서 희생된 사망자나 부상당한 모든 분들에게 100분의 1이라도 사죄와 은혜를 갚아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봉사활동을 하기위해 모법운전자회에 응모하여 합격된 후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입회한지 얼마 안 되어 임원으로 발탁되어 임원으로서 군에서 배운 행정능력을 발휘 하였든 결과 후생복지 부장과 총무부장에 발탁되어 어려웠던 모범운전자회를 정상괴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회원 중의 아들이 심장병으로 인해 성장이 안 되고 수술을 요하는 실정에 있으나 경제적 여건이 안 되어 수술을 못해주므로 저에게 수술해줄 수 없겠느냐는 제안이 있어서 당시 326명의 모범회원이 있었기에 우리가 뜻을 다함께 하여 저와 같이 차안에 모금운동을 전개한다면 능히 회원의 자 심장병 수술을 해 줄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고 계획서를 세워 임원회에 상정을 하였든 결과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진행 작업을 해가는 중 회장께서 회의에서 의결된 사안을 부결하고 방해를 함으로 모법운전자회에서는 뜻을 이룰 수 업 게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모법운전자회에서 사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2개월 만에 1989년 4월20일[사랑 실은 교통봉사대]를 창립하여 심장병어린이 수술을 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택시 내에서 껌 판매 모금도하고, ‘사랑의 편지’ 발행도 하고, 수진역과 신흥역 지하상가에서 사랑의 동전 있기를 하여 기네스북에 오르기까지 해서 심장병 어린이 돕기 모금운동도 하고, 모란 장터에서 심장병 어린이 돕기 성금모금도 하고, 고속도로에서 동전 모우기 을 사랑의 열매 공동모금운동본부와 함께 진행도 하고, 권투 세계 참피 온 유명우 선수와 함께 심장병 어린이 돕기 권투시합도하고, 유명 연예인들과 수와 진 과도함께 심장병 어린이 돕기 공연도 하고, 벤드 부을 구성하여 순회 공연도하고, 각종 이벤트를 진행하여 기금조성을 하여서 2006년까지 140여명의 어린이 심장병, 백혈병, 만성신부전증 어린이 수술을 해주게 되었습니다.

택시운전을 하는 직업에 종사 하면서 “새 생명 살리기”봉사 활동을 제대로 하기란 말과 같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몇 백 명의 회원들을 통솔하고, 봉사활동을 하여 공적을 받아 지자체장의 표창장을 받으면 개인택시 받을 때 점수의 혜택을 받도록 되어있어 그 목적을 가지고 봉사에 참여를 하는 택시 기사분들이 대다수이기에 표창장 받을 욕심으로 봉사를 하기에 다툼도 유발되어 그 사안들을 판가름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사안들이었습니다.

때문에 도지사의 표창장을 받으면 개인택시 받을 때1년의 혜택을 받기에 택시 기사들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큰 기대치입니다. 그래서 경기도지사 실에 올라가 당시 부도지사로 계시던 김 병량 님 에게 부탁을 하여 분기별로 3~5명의 도지사 표창장을 받아오기까지 하였고 정부에는 장관상장을 상정하여 받기까지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또한 국무총리 표창장을 받기란 하늘에 별 따기 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도 온갖 노력과 인맥을 총출동시켜 겨우 받게 되어 축하를 받으며 상장을 받아 주면, 그 뒤부터는 봉사활동을 하지 않으시는 경우에는 배신감을 당한 듯싶기도 하고 다른 봉사자들에게 원망을 듣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명감이라 생각을 하면서 한명의 불치병 어린이의 새 생명을 살려낼 때에는 보람과 희열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가정에서는 가장의 역할은 제대로 못하여 3자녀의 아버지로서 충족한 역할을 못했으리라 사료 되지만 자식들에게는 중 고등학교 생활에서 너희들이 어떻게 공부를 해야 어떤 대학교를 갈 수 있으며 어떤 대학을 가야 아버지와 같이 어려운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고

교육을 시킨 결과 스스로 제 역할을 잘 해주어 대한민국의 최고학부인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 합격을 하여주었을 때에는 자부와 긍지를 갖게 되였습니다.

그러다 2006년 6월에 뇌출혈로 머리 수술을 받게 되어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머리 수술을 받게 되고 보니 그동안 봉사를 하여 심장병, 백혈병, 만성 신부전증 어린이들의 생명을 살려내는 일은 잘 했지만, 내 자신의 가정에는 부족한 가장이 되지 안 아나 반성 해 보기도 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 후 의사선생님의 권고에 의해 신경을 쓰지 말라는 뜻에 따라 봉사회 대표직을 사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 신앙을 선택하고 교회에 나가게 된 동기

                                  66세 ~ 78세 현재의 삶

 

  제가 뇌출혈로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머리 수술을 받고 회복 중에 막내아들이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는데 분당지구촌 교회에 다니며 그곳에서 결혼도 하였습니다. 그런 며느리가 병문안을 오면서 성경책을 사가지고 와서 저에게 주어 틈틈이 성경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도 못했던 성남제일교회 홍 정기 목사님께서 교인도 아니고 생면부지인 저에게 심방을 오셔서 기도를 해 주시고 하루속히 쾌유를 빌어 주셨습니다. 처음 뵙는 목사님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환한 웃음과 포근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같은 병실에는 저와 같이 머리 뇌출혈로 수술을 받은 환우 중 두 분이 깨어나지 못하시고 식물인간으로 고통을 느끼고 있는 분 중 한 분의 사모님께서 밖에서 들어오시다 목사님을 보시고는 깜짝 놀라며 “목사님께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저의 남편께서도 머리 뇌출혈 수술을 받았는데 아직 깨어나지 못하시고 3개월이 지났지만 저렇게 누워만 계십니다. 목사님! 저의 남편에게도 기도 좀 해주세요.”하시는 그 부탁에 목사님께서는 그분들에게도 하루속히 쾌유와 예수님의 능력으로 완쾌토록 기도를 해 들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제가 퇴원을 하게 되면 “목사님의 교회 성남제일교회로 나가겠습니다.”라고 약속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퇴원 후 성남 제일 교회에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모자를 쓰고 새 가족으로 입교를 하였습니다. 5주의 새 가족 훈련도 받고 세례도 받고 하나님을 만나서 그동안 교인들을 볼 때 이기적이고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 보다 더 본보기가 못되고 사회생활에서는 손가락질을 받는 죄인이 되는 것을 대할 때 나는 교회에 나가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게 해야 하게다고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주도에서 봉사해 오던 강성완지부장님의 간곡한 제안으로 건강 회복을 위해 봉사회 회장직을 사임하고 제주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3년 동안 제주도에서 생활하다 건강도 회복되고 가계 경제력을 위해 다시금 성남으로 와서 중소기업 사무실 청소와 그 회사에서 나오는 박스 및 재활용 제품들을 수거 판매하는 일을 하면서 집사람이 다니고 있는 작은 개척교회인 신한교회에 아내의 권고에 의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늘 제가 처음교회를 나가게 된 성남 제일교회 홍 정기 목사님과 제가 사회에서 제일 존경하고 저를 교회에 다닐 수 있도록 세 네 군데 교회에 추천도 해 주셨던 탁 화식 장로님! 곁으로 나가야하는데 라는 생각을 늘 하면서 아내를 설득시키며 기도한 결과 10년이 지난 2018년 1월말 까지는 다니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2월부터는 성남 제일 교회로 나가자고 아내로부터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월 첫 주부터 성남 제일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교회 정문에서 홍 정기 목사님과 맞다 드렸을 때 목사님께서는 덥석 저를 끌어안아 주시면서 “어떻게 된 것입니까? 참으로 오래 만이십니다. 반갑습니다.”라면서 얼싸안아 주시는 목사님에게 “이제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아내가 다니든 교회에 나가다가 아내와 같이 합의가 되어 오늘부터 견고한 터전을 찾아와 믿음 밭에 씨를 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자족 할 줄 알고 성숙한 삶을 지향 할 줄 알기위해 탐욕에 사로잡혀 사라가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 날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고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욕심을 버릴 줄 알아야 할 것 같은 지혜를 깨닫게 되는 성령의 은혜의 생활을 배우고 실천하는 터전을 찾았으니 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제가 생각하는 것이 나를 통한 하나님의 생각이 되도록 해 주십시오. 오늘 누군가를 바라 볼 때 주님의 눈으로 보도록 해 주십시오. 누군가와 나의 눈이 마주 쳤을 때 그 사람이 나를 통해 순수한 삶을 꿈꾸게 해 주십시오.

오늘 제가 오만 하지 않게 하시고 숨을 쉴 때 마다 하나님의 생기를 호읍하게 해 주시고 숨을 내 뱉을 때마다 내 속의 부정적인 것 들을 쫓아내게 해 주십시오. 제가 하는 말이 누군가를 살리는 말을 하게 해 주시옵소서, 오늘 제가 먹는 음식이 성찬이 되게 해 주십시오. 걷는 발걸음 마다 하나님의 은총이 새겨 지도록 해 주십시오. 만나는 사람마다 평강을 가져가는 발걸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저의 손에 따뜻함과 힘을 주어 누군가를 붙잡을 때에 나를 통하여 그의 손을 잡을 때 주님의 온기를 불어 넣어주시고 생명의 기운이 그에게 흘러가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므로 언제나 당신과 내가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항상 감사를 발견하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주십시오. 라고 오늘도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통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 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아멘-

 

  제가 성남제일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70세 이상 어르신들이 섬기는 제6남전도회에 편재되어 3부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드시고 오후예배시간까지 쉬시는 시간에 중앙동 일대와 세이브전 백화점 일대를 대상으로 전도주보와 건빵을 가지고 전도역할을 1시간씩 6명이 3개조로 나뉘어 전개하는데 일조를 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쉬시는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시간에 성경구절과 일상생활에 감사할 수 있는 글을 전달하기 위한 일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여 2018년 10월21일부터 감사의 편지라는 글을 호수를 매겨 1호부터 매주 일요일에 발행일로 정해 오늘날까지 한주도 빠짐없이 70호까지 만들게 되어 처음에는 30부를 하든 것이 40부 150부 300부에 이르기 까지 발행 하게 되고 낫 말에는 한문을 넣기 시작하여 90이 넘으신 문상우 집사님께서는 한문을 교정해 주시고 원로장로님들 정 달부 장로님과 노 용수 장로님께서는 내용면에서 수정해야 할 곳을 지적하여 편집토록 하게 하는 편집위원으로 편재되기 까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어려운 어르신들께서 찾아오시면 천 원씩 드리는 구제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데 감사의 편지와 주보를 봉투에 천원을 같이 넣어 드리면 좋을 것 가다라는 생각을 해주신 김태웅 장로님의 제안에 따라 김준목사님에게 상의한 결과 괜 찾을 것 갖다고 하시므로 그렇게 진행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에서 저의 닉네임이 천사 입니 다 .

♟. 천사라는 닉네임을 갖게 된 과정 봉사활동을 할 당시 장애인들과 어르신들이

수용 하고 계시는 시설에 콩나물과 야채 빵 류 등을 싣고 와서 밤중에 나누어

들여 든바 시설에서 아무도 모르게 밤에만 갓 다 놓았다. 해서 천사님이라고

별명을 부 쳐 주었기에 닉네임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내 닉네임이 천사이기에 천사라고 부르며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정말로 가슴속에 작은 사랑이라도 품고 있으며

천사답게 그 사랑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 있는지? 라고 묻습니다.

 

내 닉네임 천사를 부르며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정말로 가슴속에 작은 진리라도 품고 있으며

그 진리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지? 라고 묻습니다.

 

내 닉네임 천사를 부르며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정말로 가슴속에 작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으며

그 믿음으로 "새 생명 살리기"운동을 나 자신과 내 이웃들이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따라주고 함께 동참해 주고 있는지? 라고 묻습니다.


내 닉네임 천사를 부르며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정말로 가슴속에 작은 인내라도 품고 있으며

그 인내로 참고 기다리며 새 생명을 살려낼 때 까지

참고 있는 지? 라고 묻습니다.

 

내 닉네임 천사를 부르며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정말로 가슴속에 작은 친절과 이웃을

진정 사랑 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며 그 친절의 표현으로

작은 미소라도 얼굴에 띄우고 있는지? 라고 묻습니다.

 

내 닉네임 천사를 부르며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정말로 가슴속에 이웃의 평화와 나눔을 품고 있으며

그 평화의 나눔으로 다른 이의 마음에

평안을 전하고 있는지? 라고 묻습니다.

 

내 닉네임 천사를 부르며 나에게 묻습니다.

나는 정말로 가슴속에 진정한 새 생명을 살리려는

용기을 품고 있으며 그 용기로 날마다 새로워지며 언제나

어려운 이웃과 정의의 편에 서고 있는지? 라고 묻습니다.


주님! 오늘도 내 닉네임 천사라는 것을 잊지 말고

천사다운 삶을 사라가도록 하게 하옵소서 . . .

 

 

☺. 我의 남은 人生 後害 없이 살다 갈렵니다.

 

사랑하는 나의 닉네임 천사 이시여!

내 人生길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든 가시밭길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걸어온 人生 旅程은 왜 그리도 險難했고 눈물로 얼룩진 한(恨)많은 78년이었나요?

 

6,25 전쟁에 찢어지게 가난한 이 땅에서 살아야하는 청초하게 돋아나는 새순 같은 나이에 戰爭이 뭔지 平和가 뭔지도 모른 체 목숨 건 避難살이 서러움을 겪으며 모진 목숨 삶의 역경을 보람과 希望이라는 단어만 믿고 살아온 歲月!

 

하루 끼니조차 解決하기 어려워 감자밥, 고구마 밥, 보리밥, 시래기죽, 草根木皮로 延命하며 그 지긋지긋한 허기진 보릿고개를 미군들이 먹다 남은 음식으로 꿀꿀이죽 한 그릇에 슬픈 運命을 이끌어온 어린 시절 꽃다웠던 젊은 날들---


돌아보면 굽이굽이 눈물겨운 가시밭길 그 길고도 險難했던 苦難의 세월을 어떻게 넘어 왔는지? 이제 80대 세대를 마지하게 된 세월이지만, 지금은 無心한 세월의 파도에 밀려肉身은 이미 여기저기 성한데 하나 없고 주변의 아까운 지인들은 하나 둘씩불귀의 객으로 사라지고 있는 이때精神은 자꾸만 혼미해가는 黃昏길이지만,

 

남은여생 남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나에 몫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새 생명 살리기"운동으로 봉사도 했고 이제 남은여생에서는 영혼과 육신이 혜어질 때 남은 육신을 젊음으로 살아가야할 환우들에게 기증하고 눈은 앞 못 보는 소녀에게 광명을 주고 내 영은 하나님 나라로 갈 것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힘든 세월 잘 견디며子息들 잘 길러父母義務 다 하고 무거운 발걸음 이끌고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억 메인 삶 다 풀어 놓고 잃어버렸던 내 人生과 어린 시절 저에게 새 생명을 준 이웃에게 은혜를 갚을 길을 다시금 찾아 남은 세월 後悔없이 살다 가기위해 感謝의 便紙를 發行하여 社會에 歸勘이 되도록 하게하고 내린 마지막 나의사명이기에 후 혜 없는 삶을 살다 갈렵니다.


人生 나이 80을 넘으면 이성의 벽이 허물어지고 가는 時間 가는 順序 다 없어지니 男女 區分없이 負擔없는 좋은 친구 만나山이 부르면 山으로 가고 바다가 손짓하면 바다로 가고 하고 싶은 趣味生活과 가진 것 조금씩 나누며 마음에 후 헤 없는 삶 다 하며 남은 人生 後悔없이 즐겁게 살다 갈렵니다.

 

한(恨)많은 이 世上 어느 날 갑자기 소리 없이 훌쩍 떠날 준비를 하고 眞心으로 얘기할 수 있는 친구들 만나 남은 人生 健康하게 後悔없이 살다 갈렵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천사가 되어 어디론가 훨훨 날아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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