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서민 전용 술집/그때 그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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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서민 전용 술집/그때 그시절...

사랑해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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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색주가 풍경
조선의 서민 전용 술집

 

 

조선시대 색주가(色酒家)

젊은 여자를 두고 술과 함께 몸을 파는 집. 또는 그 여자. ≒색주(色酒)·색줏집·색항(色巷).

 

술을 거르는데 쓰이는 용수에 갓을 씌워 간 장대에 꽃아 세워놓은 집은 색주가의 집이라는 표시다. 기록을 보면 남대문밖 진배와 서울 원각사뒤 동문안(수은동) 뒷골목에 가면 그 장대아래 진하게 분칠한 색주가들이 자기신세 타령을 하는 자탄가를 부르며 유객했다

 

" 내 손은 문고리인가 이놈도 잡고 저놈도 잡네 내 입은 술잔인가 이놈도 빨고 저놈도 빠네" 하는...

 

기생에게는 일패(一牌) 이패, 삼패 하는 계급이 있었다. 일패는 교방에서 시가와 서화를 익힌 품격이 있는 기생이요. 이패는 은군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숨어서 몸을 파는 타락한 일패 출신의 기생이며 삼패는 술도 몸도 더불어 파는 色酒家 이다.

 

색주가는 기둥서방을 두게 마련인데 포교 별감 사령 청지기등 무과직에 있는 중인들의 벼술덤이었다.

 

가장 대중적인 술집이 목로집이다. 돼지고기, 빈대떡 산적등 안주를 차려놓고 술한잔에 손님이 요구하는 안주를 숯불이 이글거리는 석쇠에 구워 파는 선술집이다. 기다란 젓가락을 들고 안주를 굽는 중노미의 너스레도 손님을 끌었다. 종로 이문안 목로집에서는 강화도령 철종의 입맛에 맞는 막걸리를 궁에 대어 그 공로로 연봉 1천섬을 받는 선혜청 고지기 벼슬을 얻어 한양갑부가 되기도 했다.

 

이같은 옛 조상들의 생활문화와 그것이 끼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의 영향이야말로 살아있는 학문인데도 소외당해왔고 챙기지도 않으니 자료도 소멸해 왔다

 

아까운 우리것들의 자료가 너무도 아쉬운 건 꼭 배부른 탓만은 아니다.

 

 

 

 

[김학민의 주류인생]

청와대 행정관 성매매·장자연 자살 사건으로 살펴본

술과 접대의 역사

 

인간은 왜 술을 마실까? 인간의 모든 행위는 대개 합리적이거나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 이뤄진다. 인간이 술을 찾게 되는, 또는 술에 끌리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보편적으로 인간은 기쁠 때나 슬플 때, 화날 때, 우울할 때, 스트레스를 받을 때, 죄의식을 느끼고 이 죄의식을 잊으려 할 때, 어려운 일에 부딪쳐 이를 극복하려고 할 때 등의 상황에서 술을 마시고 싶어한다. 그리고 특

수적한 예로, 제례나 의식을 주도하거나 참여할 때는 본인의 의지와 선호에 관계없이 술을 마시게 된다. 물론 술을 탐닉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알코올중독 때문에 더욱 술을 찾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적 특수성을 하나 더 보탠다면 접대 때문에 술자리가 마련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청탁· 뇌물·성매매 등이 본질을 이루고 술 자체는 부차적인 의미를 갖는다.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술을 마셨을까?

 

삼국시대 이전 부족국가 시대에는 식량이 부족해 제천의식을 거행할 때만 마을 위로 술을 빚어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 개인이 술을 빚게 된 것은 삼국시대 귀족층에서였다. 그리고 삼국시대 후기에 오면 김유신과 천관녀의 이야기, 원효대사의 이야기 등에서 보듯 전문 술집도 등장했다. 고려시대에는 술을 금지하는 불교 계율 때문에 일반 서민들은 술을 마실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원나라로부터 증류법이 전해져 왕실과 문무 귀족층은 오히려 소주 등 더 다양한 술을 즐겼다. 그리고 팔관회를 빙자해 절에서 여승들이 술을 빚어 팔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제례에 술이 필수적이었으므로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서민들에게도 술을 마실 기회가 많이 늘었다.

 

단지 술을 파는 것을 넘어 술 마시는 남자들을 시중들기 위해 여자가 술자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시대다.

 

양반층에게는 일정한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술시중을 드는 기생이 있는 기방이 있었고, 일반 서민들에게는 여자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아양을 떨며 술을 파는 색주가가 있었다. 기방은 고급 술집이었지만, 색주가는 여자만 있다뿐이지 안주도 술도 맛없는 곳으로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기 일쑤였다고 한다. 기생은 가곡이나 시조를 부르지만, 색주가의 여자는 오직 잡가만 불렀다. 기생은 일종의 연예인으로 정분이 난 특정인이 아니면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지만, 색주가의 작부는 장삼이사 취객들의 요구에 따라 성매매도 하는 신산한 삶을 살았다.

 

색주가는 한양의 홍제원(지금의 홍제동)에 집단적으로 있었고, 뒤에 남대문 밖과 파고다공원 뒤에도 생겼다고 한다. 뒤 두 지역의 색주가는 근래에까지 이어져 이른바 ‘양동’과 ‘종삼’의 집창촌이 되었다. 색주가는 밖에서 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색주가 문 앞에는 술을 거르는 도구인 용수에 갓모(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는 모자)를 씌워 긴 나무에 꽂아 세우고, 그 옆에 자그마한 등을 달아놓았다. 그러므로 밤이 되면 색주가가 있는 동네는 붉은 등으로 온통 뒤덮이게 되어 ‘홍등가’가 된다. 낮에는 나무에 용수 씌운 것으로 표시를 한다. 용수와 갓모는 각각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은유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색주가 사장님들의 홍보 마인드가 흥미롭다.

 

얼마 전 청와대 행정관 두 명과 방송통신위원회 과장이 종합유선방송사업자로부터 룸살롱에서 술접대를 받은 뒤 여종업원과 성매매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 또 기획사 사장의 협박으로 유력 인사들을 상대로 술시중을 들고 성접대를 강요당했다는 한 여배우가 자살했다. 서민 전용 조선시대 색주가와 돈과 권력으로 술과 몸을 흥정하려는 현대판 색주가가 비교되는 풍경이다.

 

글. 김학민 음식 칼럼니스트 /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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