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pro의 반 백년 이야기

광주 일곡동 문화유적답사기/모룡대

작성일 작성자 simpro

 

일곡동 정자 모룡대 (慕龍臺) 

 

일곡동에는 잘봉산자락의 영원정외에도 꽤 유명한 정자가 하나 있다.

숭일고등학교 등 4개의 중.고등학교가 밀집되어있는 입구 새순교회 옆에 보면 오른쪽 산자락 한길 높이에 손바닥만한 정자

가 있는데 바로 오늘 소개할 모룡대(慕龍臺)가 그것이다.

이 정자는 일제 강점기인 1934년 노종구(盧種九)가 부친 곡은(谷隱) 노훈규(盧勛奎 1844∼1915)의 유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로 2009년까지 이곳에 있지 않고 숭일고등학교 들어가는 대로변 경사진 자락에 있었지만, 길을 확장하면서 2009년 일곡동 마을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의 자리로 복원 이전했다.

당시 모룡대가 있던 곳 뒤 암반 전면에는 [谷隱盧公 勳奎之阡]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길을 넓히면서 이 마저도 사라져 버려 안타깝기 그지없다.

 

 

바로 이렇게 복원된 곳에는 [谷隱盧公 勳奎之阡]이라는 새로 만든 비석이 서 있기 때문이다.

도로를 내면서 암반을 파괴시키지 말고 그대로 옮겨 놓았다면 더 의미가 있었을 것을...

 

 

내부에는 모룡대 기문을 비롯하여 21개나 되는 많은 기문이 현액되어 있으며, 누정이 좁다 보니 바깥까지 나온 것이 특색이다.

그만큼 이 정자를 찾은 시인묵객들이 많았다는 것으로 이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광산(광주)노씨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기문에서 밝히길 모룡(慕龍)의 ‘龍’ 은 임금을 상징한 것으로 주역에 명문이 있고 이 지역의 산세가 여러 신하들이 임금을 모시고 사를 의논한 형국인 이른바 ‘군왕봉’이라는 산맥이 높이 솟아 임금의 위치로 군림하여 있고 그 밑에 조그마한 산봉이 군왕봉을 둘러 옹위하고 있다는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모룡(慕龍)이라 불렀다고 한다.

 

 

 

다음은  한국매일 문화부 김은희 기자의 남도 정자기행 중 모룡대편에서 모룡대 편액 해석의 몇 가지 옮겨본다.

자료출처 : http://ehonam.com/newshome/detail.php?number=16107&thread=21r03r06r01

 

노종구(盧種九)는 부친 곡은(谷隱) 노훈규(盧勛奎 1844∼1915)를 추모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

 

선인께서 쉬는 이곳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드니

조그마한 삼층대에 적은 기둥 열렸도다.

나라 위한 붉은 단심 물에 잠긴 별과 같고

성묘하는 깊은 정성 풀잎처럼 티끌없네

 

수운속에 옛마을에 용트림이 차가웁고

밤달 밝은 공산속에 범의 소리 애처롭다.

넉자되는 빗돌머리 슬픔느낌 많아지니

서리 이슬 밟으면서 강신 술잔 올렸도다.

 

 

그렇다면 곡은(谷隱) 노훈규(盧勛奎 1844∼1915)는 누구일까?

1924년판 광주읍지 효자란에 노훈규가 기록돼 있다고 한다. 그가 지은 시에서는

 

용바위 내린 비는 그 모습 몽몽(자욱)하고/

범골에 부는 바람 그 기운 수수(솔솔)하네

 

오랜 시간 읊조리며 솔 언덕에 기대서니 /

산은 푸르러 고요한데 물만 홀로 흘러가네

 

내 홀로 적적하여 모룡대에 올라오니 /

대(臺)는 비어 고요한데 가는 용(龍)이 아니오네

 

할일없이 오래 앉아 풍천부(風泉賦)를 송축하니 /

이 마음이 구슬퍼져 차마 잔을 못들었네  

 

 

 

 

이곳의 현판중에는 윤용구(尹用求, 1853-1939)의 '모룡대 주인을 축하함'이라는 제목의 시도 있다.

 

서석(瑞石)서석의 푸른 산은 하늘 높이 솟아 있고 /

극락강 맑은 물은 출렁이며 흘러가네.

 

아담한 모룡대가 이곳에 세워지니

산처럼 높은 기상 물처럼 오래가길.

 

충성도 장하지만 효됴도 극진하니 /

거룩한 그 정신이 일월(日月)처럼 빛났도다.

 

석실(石室)을 만들어서 사첩(史牒)을 보관하니 /

백세의 오랜 세월 그 향기 전하리라 

 

 

 

 

매설당 김희구(金熙九)의 시

 

이끼 비석 씻어 읽고 이 대臺에 올라가니 /

울창한 송백(松栢)그늘 가득히 열려있네

 

암벽위에 구름끼니 언둔 빛이 찾아 들고 /

숲풀위에 비가 자니 아침 먼지 깨끗하네

 

나무위에 모인 자오(慈烏. 까마귀) 해년마다 고마웁고 /

꽃속에서 우는 두우(杜雨.두견새) 밤중마다 슬프구나.

 

별업(別業 별장)있는 그대집에 많은 문장 모여드니 /

어림없이 자주 찾아 깊은 잔을 기울이리.

 

 

일곡동은 광산(광주)노씨 집성촌으로 오랜세월 자연마을을 이루며 살아온 곳이다.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 전에는 전형적인 촌락형태의 마을이었던 일곡동을 조사한 보고서가 있다.

향토문화개발협의회에서 발간한 『일곡동(문화유적지표조사)-1993년』이라는 보고서(동북아 지석묘연구소 소장)에는

일곡동에 수많은 샘들이 있었다고 한다.

 

 

(클릭하면 커짐)

400년을 이어 온 일곡동에는 옛날부터 샘이 많아 논농사가 수월했다고 한다.

개시암은 1993년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메워 사라졌으며, 시암근처에 가면 개소리가 난다고 해서 개시암이라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말시암은 일곡마을 뒷산 바위에 말 발자국이 있는데 그곳에 있었다고 하며, 그 외에도 구시시암, 독시암, 조개시암, 박애시암, 쌍시암, 옹질이시암, 청주시암 등 10개 이상의 시암이 있었다고 한다.

각 시암에 딸린 논들을 독시암배미, 쌍시암걸(논), 옹질이시암배미, 조개시암배미, 청주시암배미 등이라 불렀다고 하며,

 

마을 뒷산을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황소봉(황쇠봉)'이라 불렀듯이 한새봉은 내린 비를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마을 곳곳에 물을 뿜어냈다고 한다.

 

이렇듯 일곡동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지 20여 년이 다 되가지만, 그 역사는 광산노씨가 첫 발을 내 디딘 400년전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일곡동에 산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긍심을 가져도 될 듯 

하며 시간이 나는데로 일곡동 문화유적을 하나씩 탐방하는 기회를 가져보도록 한다. 

 

 

(글, 사진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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