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반공, 반북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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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반공, 반북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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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반공, 반북의 역사 ]



1.전두환 신군부의 5.18 용공조작 음모
2.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3.‘연좌제 폐지’ 사기극
4.제자가 스승을 고발하는 세상
5.전두환 정권의 ‘간첩 만들기'
6.‘간첩’을 대량 생산한 국가보안법
7.빨갱이로 몰리지 않기 위한 몸부림


< 전두환 신군부의 5.18 용공조작 음모 - 1980년대의 반공, 반북의 역사 1 >


“1980년 5.18 광주항쟁은 신군부의 우두머리들이 적어도 ‘미필적 고의’에 의해 대량 학살을 유도한 사건이었다.
당시 시민군에게 붙잡힌 공수부대원은 광주에 배치받기 전 3일 동안이나 식량배급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투입되기 직전에는 소주를 공급받았다고 증언했다. 
가장 중요한 건 이들이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투입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최영진 <한국 지역주의와 정체성의 정치> 1999]

그 어떤 잔인한 전쟁에서도 ‘상부’는 적의 살해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하지는 않는 법이다.
광주에서 저질러진 만행은 적어도 정황상 상부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전두환 일당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광주 학살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흘 간에 걸쳐 자행되었다는데, 신군부 우두머리들이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걸 몰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대로 내버려뒀다고 한다면, 그게 실질적인 지시가 아니고 뭐냐는 것이다.

붙잡혀온 사람들에 대해 신군부의 병사들이 저지른 악행은 문자 그대로 ‘지상의 지옥’이었다. 
사람을 죽인 건 순간 미쳤기 때문이라고나 하루 수 있겠지만, 붙잡혀온 시민들을 대상으로 1)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2)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털이 만들기’ 3)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 요리’ 4) 사람이 가득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5) 두 사람을 마주 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6)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7)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 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8) 송곳으로 맨살 후려파기 9)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10)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등과 같은 악행들을 저질렀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걸까?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1990]

또 공수부대 장교들이 “전라도 새끼 40만은 전부 없애버려도 끄떡 업사”는 말을 내뱉었다거나, 붙잡혀온 사람들을 고문하면서 한결같이 김대중의 지령을 받았다고 하라고 강요하거나, “김대중이가 네 애비냐?” “김대중이가 밥 먹여주냐?” “김대중이가 빨갱이인 줄 몰랐냐?” 따위의 말을 수없이 퍼부었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어떻게 해서든 광주항쟁을 김대중의 음모와 공작으로 만들겠다는 발악이 상부의 지시가 없는데도 나왔겠느냐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1990]

신군부는 국민을 사대로 한 간첩조작 사건마저 저질렀다.
간첩이 군중에게 먹일 환각제를 소지하고 목포로 잠입하려다가 잡혔다는 거짓 보도를 발표해 광주항쟁을 북한 및 불순분자들의 조종에 의해 일어난 폭동인 양 새빨간 거짓말을 해대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수법까지 동원했던 것이다. [임철우 <치유되지 않는 5월> 2000]

신군부가 단지 억압적인 언론 통제만으로 여론을 조작한 건 아니었다.
신군부는 언론을 위협하는 동시에 포섭했다. 광주에서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지고 있던 5월 22일 전두환은 서울 지역의 주요 언론사 사장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겁을 주었다.
“그동안 언론과 대학의 내막은 몰론, 누가 선동하고 있는지도 샅샅이 알고 있다. 경영권자가 권한 행사를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이들을 선동한 사람들을 파악해서 체포할 것이다. 그러한 사태가 없도록 사장들이 수습하고 책임을 지기 바란다.” [김주언 <80년대 언론탄압 : 사회비평> 1998]

그런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삼고 있던 신군부는 심지어 광주 학살에 대한 여론 조작을 해달라고 두툼한 촌지까지 뿌렸다. 5.18 항쟁이 정말 북한과 관련이 있거나 용공성이 있었다면 언론에게 촌지까지 뿌릴 필요가 있었을까? 이와 관련, 윤덕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광주에서 유혈극이 절정에 달하고 있던 5월 22일 전두환은 각 언론사 발행인을 불러 계엄 확대 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언론계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어 사태 보도이 실질적인 책임자인 사회부장들을 요정으로 불러내 똑같은 당부를 하고 1인당 1백만 원씩 촌지를 돌렸다. 당시 중앙 일간지의 부장급 월급이 45만원 내외였으므로 1백만원은 촌지의 수준을 넘는 거금이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일부 사회부장들은 전두환으로부터 촌지를 받은 부끄럽고 괴로워 부원들과 통음을 하는 것으로 그 돈을 다 써버렸다고 하지만 상당수는 입을 씻고 너스레를 떨어 기자들로부터 눈총과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윤덕한 <한국언론 바로보기> 2000]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문부식은 “1980년 5월 계엄군에 맞서 싸우던 광주 시민군들의 차량에 휘날리던 태극기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자신을 총과 탱크로 짓밟으려는 국가권력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애국가와 ‘진짜사나이’를 부르면서 저항하려 했다.”고 말한다.
문부식은 그런 국가주의적 발상이 잘못된 것이었다며 ‘집단적 참회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광주 학살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던 국가주의의 주술로부터 벗어나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시민적 자유와 이성을 회복하는 길을 함께 찾아나서자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 안의 폭력’ 또는 ‘우리 안의 파시즘’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문부식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당대비평> 1999]

그러나 문부식이 지적한 ‘태극기’ ‘애국가’ ‘진짜사나이’의 문제를 사람들이 국가주의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라고만 보는 건 ‘반공 국가 폭력’의 가공할 위협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닐까?
모든 저항에 대해 ‘빨갱이’ 딱지를 붙이려들었던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의 안전을 꾀하면서 효과를 높이기 위해 ‘태극기’와 ‘애국가’가 동원되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한 평가가 아닐까? 특히 광주 시민군들의 차량에 휘날리던 태극기에서 국가주의의 망령을 읽어내는 건 당시 광주항쟁이 신군부의 그 주구 노릇을 한 언론에 의해 간첩들의 사중에 의한 폭도들의 난동으로 몰리는 등 광주 시민들이 처해 있던 상황에 비추어 볼 때에 너무 잔인한 게 아닐까?” (p.206~210)

: 강준만, 김환표 저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제5장 ‘1980년대의 반공’ 중에서…

○ 전두환 노태우 일당이 군사쿠테타로 헌정을 파괴하고 국민주권을 능멸한 것은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킨 1960년대와 여러가지로 비슷한 조건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 땅 민중들의 정치적 각성 정도와 사회운동 세력의 조직적 역량이 부족한 상황, 야당의 미약한 수준, 주한미군을 비롯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지배, 수구반동 정치군인들에 대한 미국의 전폭적 지지/후원… 

○ 윗글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언론인 등 군사독재를 떠받쳤던 각종 부역자들에 대한 청산은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 단죄와 청산이 없으니 전두환 쿠테타 30년이 지나도, 박정희 쿠테타 50년이 지나도, 경술국치 100년이 지나도 부역자들이 심판받지 않은 채 오히려 역사를 뒤집으려 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유신군사독재로 영구집권을 구가하던 박정희를 사살한 김재규를 영웅화하는 주장을 가끔 접하지만 저는 그런 주장에 쉽게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박정희의 죽음 -> 비상계엄 -> 12.12 쿠테타 -> 5.17 쿠테타 -> 광주학살 -> 전두환의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민주주의와 평화, 민중주권을 추구하는 운동세력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한 독재자 1인의 죽음이 독재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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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 1980년대 반공, 반북의 역사 2 > 

“'언론을 완전히 장악한 신군부’는 요술방망이를 가진 것과 같았다. 무엇이든 소설을 마음대로 쓰면 그게 사실로 둔갑하여 언론에 그대로 보도됐다. 1980년 7월 4일 계엄사가 발표한 이른바 ‘김대중 일당의 내란 음모사건’도 바로 그런 픽션이었다.
그러나 그 픽션은 잔인했다. 픽션을 사실로 둔갑시키기 위해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에게 인간적 모욕과 모진 고문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구속자 가족들이 나중에 작성한 <우리가 당했고, 당하고 있는 부당 불법 잔혹한 처우>라는 자료는 그 시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김대중 : 한 줄기 햇빛도 없는 지하실에서 하루 18시간씩 조사를 받았으며 몇 차례나 옷을 발가벗기운 채 ‘고문하겠다’는 협박을 당했음.
문익환 : 날조된 혐의 사실을 시인하지 않자 ‘젊은 군인들에게 넘기겠다’며 옆방의 참혹한 고문소리를 들려주었음.
이문영 : 군 침대 각목으로 무수히 맞았으며 그 여파로 1심 판결 때까지 왼쪽 팔을 들지 못했음.
예춘호 : 고문 때문에 음성이 변했음.
이신범 : 손톱 발톱을 구둣발로 밟았으며 다리 사이에 각목을 끼고 비틀었음.
조성우 : 연행되자마자 거꾸러 매달려 물 두 양동이를 마시고 몇 차례나 졸도를 했으며 매달린 채 수없이 맞았음.
설훈 : 너무 많이 맞아 다리 전체에 피멍이 들었음. 수사관이 ‘다리가 끊어지겠다’고 걱정을 할 정도였음.
이해동 : 피멍을 빼기 위해 날 쇠고기를 썰어 엉덩이에 붙인 채 사흘이나 인사불성이 돼 엎드려 있었음.
이호철 : 심한 고문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한동안 수사관에게 ‘엄마’라고 불렀음.”

그건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세뇌를 위한 고문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즉, 육체적 고문을 가해 없는 사실을 있는 사실로 말하게 하고 그걸 그대로 믿게 하고자 했던, 그런 참극이었던 것이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당시 김대중이 계획한 국민연합 중심으로의 민주화추진 국민운동계획에 전두환이 내란음모라는 올가미를 씌운 사건이었다. '애초 발표문에서 거론된 혐의 내용이 대법원의 최종판결에 이르는 과정에서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준비된 음모였다.
1980년 9월 17일 1심 군사재판은 이미 짜여진 각복에 따라 김대중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신군부는 왜 그런 무리한 날조극을 획책했던 걸까? 광중에서의 상황이 예상 밖으로 악화되어가자 전두환은 몹시 당황했다. 그러자 소위 ‘3허’로 일컬어지는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가 전두환에게 “호랑이 꼬리를 잡고 있다가 놓치면 모두 잡아먹힌다”는 상황극복론을 펼쳤고, 이에 따라 광주의 상황을 김대중과 연계시키려는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도성 <남산의 부장들> 1993]

이 작전에는 보안사 수사총책인 대령 이학봉을 비롯하여 중정 안정국장 김근수, 검사 이종남과 정경식 등이 동원되었다. 이 작전의 첫번 째 재물은 38세의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이었다. 정동년은 계엄 확대 조치에 따른 예비검속 대상으로서 1980년 5월 17일에 광주보안사 지하실로 연행된 상태였고, 그의 이름이 그 해 4월 13일 동교동 김대중 자택을 방문했었다는 방명록ㅇ에서 발견되자 신군부의 시나리오에 엮이게 된 것이다.
정동년은 서울합동수사본부에서 광주까지 내려온 수사관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결국 5월 31일 수사관들이 써준 시나리오대로 진술서를 작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나리오는 5월 5ㅇ일 김상현의 안내로 김대중 집으로 가 300만 원을 받았고, 5월 8일에는 김상현으로부터 200만 원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김대중이 정동년에게 거사자금으로 돈을 건네주어 광주에서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는 픽션이었다.

자신이 고문을 이기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으로 자살을 기도한 정동년은, 철제 숟가락을 뾰족하게 갈아 동맥을 끊고 배를 10여 군데나 찔렀으나 감시원들에게 발각되어 자살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 진술서를 들고 수사관들은 6월 3일부터 김상현에게도 혹독한 고문을 가해 6월 15일에 진술서 내용에 서명하게끔 만들었다.
같은 날 수사관들은 정동년과 김상현을 거친 진술서를 김대중에게 제시했다. 김대중의 옷을 군복으로 갈아입힌 후 욕설과 폭언까지 서가며 정신적인 고문을 가해 진술서를 수용하게끔 만들었다. 이때 중앙정보부 지하실의 바로 위층에서 당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모니터를 통해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이도성 <남산의 부장들> 1993]
그런 각복에 의해 김대중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질 무렵,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김대중을 세 번이나 찾아와 김대중의 구명을 조건으로 신군부에 협조할 것을 요청했지만 김대중은 그걸 거절하고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이 조작해낸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는 완전한 뼈대를 갖게 되어 이후에도 수많은 국민들이 김대중에 대한 혐오와 증오감마저 갖게 되었다. 
당시 언론이 권력의 탄압에 못 이겨 조작된 사실이나마 ‘사실’ 보도에만 임했다 하더라도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모든 열성을 다했듯이,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 만들기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KBS는 8월 2일 <김대중과 한민통>이라는 특집 프로그램까지 내보냈는데, 이 프로그램은 김대중을 거의 간첩 수준으로 묘사했다. 차라리 간첩 수준이기만 했더라면 좋았겠지만(나중에 진실이 규명될 수 있으므로) 그것만도 아니었다. 원색적인 표현을 동원해 김대중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서운 인간이며 이중 인격자라는 인신공격까지 가했다. [KBS 노동조합 <5공까지 KBS 방송기록> 1989]

방송에 뒤질 신문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일보>와 더불어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경향신문>의 9월 11일자 특집 기사는 ‘선동,권모술수로 얼룩진 변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라는 제목과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서 친북괴 활동까지’라는 제목을 달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김대중, 그는 어떤 인물인가. 달변과 간교한 지략을 내세워 한국의 케네디라는 허상 속에 철저히 가려졌던 그의 참모습은 어떤 것일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밸리즘의 화신’ 바로 그것이었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이중인격과 위선에 가득 찬 그의 인생 결로는 급기야 자신을 환상적 사이비 지도자로 착각토록 하는 망상증에 사로잡히게 했던 것이다.”

정도의 차이일 뿐 당시 모든 언론이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 조작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 김대중을 향해 쏟아진 별명은 무수히 많았다. ‘공산주의자’ ‘불순사상자’ ‘위험인물’ ‘정치술수의 화신’ 약소 잘 뒤집는 거짓말쟁이’ ‘계략, 선동의 명수’ ‘무자비한 강경론자’ ‘대통령병 환자’ ‘한의 정치인’ 등등. 굳이 김대중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김대중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올가미를 씌운 전둔환을 예찬하는 것이 곧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 조작의 효과를 냈을 것이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신군부의 무수히 많은 거짓말들을 그대로 믿었을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적어도 광주학살을 겪은 호남인들은 신군부의 그런 일련의 조작에 결코 넘어갈 수 없었다. 이와 관련, 고려대 교수 최장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호남지방의 심화된 집단적 소외의식과 김대중의 수난이 절연되기 어려운 감정의 끈으로 얽매이게 된 것은 차라리 양자의 필연적 유대의 형성이라기보다는 집권세력이 광주민중항쟁을 다루었던 방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광주민중항쟁이 김대중에 의해 계획된 반국가적 폭동으로 규정되었을 때 호남지방민들에게 김대중이란 정치인은 그들의 집단적 수난을 상징하는 인물로 마음 속 깊이 각이되었고, 그들의 수난과 그의 수난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최장집 <지역감정 연구> 1991]

최장집의 견해는 이후 전라도 사람들이 선거 때마다 김대중과 그의 후광을 업은 후보들에게 몰표를 던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지만, 그런 ‘감정의 끈’이 없는 다른 지역 사람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p.211~218)

: 강준만, 김환표 저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제5장 ‘1980년대의 반공’ 중에서…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내란음모 무죄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인터넷에 많은 정보가 있으니 생략하기로 합니다. 저는 이번 단락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21세기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남권 등 일부 지역과 60~70대 이상 노인계층에게 여전히 ‘빨갱이’ ‘종북’ ‘간첩’ ‘대통령병 환자’ ‘거짓말쟁이’로 모욕당하는 원인과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저자들이 잘 지적했듯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금까지 왜곡된 이미지에 휩쌓여 있고 근거없는 모욕을 당하는 이유는 바로 언론과 방송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 이하의 패악질을 거듭해온 방송국과 언론 관계자가 스스로 참회하고 공개적으로 반성하기는 커녕 처벌받지도 않았고 퇴출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두환 일당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할 수 있었던 배경 중의 하나가 바로 ‘언론장악’과 ‘언론사 부역’인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중 내란음모에 얽혀들지 않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정치세력, 심지어 호남인들에 대해 비슷한 논리를 가지고 공격하고 음해하고 조작된 정보를 전달한 수많은 야권인사와 시민단체 관계자들, 정치인들, 개인들이 존재했다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족함과 실책에 비해 너무 많은 비난과 조롱과 폄하와 배제를 진행했습니다.

○ 1970년대 박정희 일당이 시작하고 1980년대에 전두환 일당이 끊임없이 유포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근거없는 모략과 박해, 이미지 조작의 폐해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낀다면, 21세기에 들어서도 권력에 의해 장악된 ‘언론’과 부역하는 ‘언론’에 의해 마찬가지로 이미지 조작을 당하고 모욕과 음해를 당하는 개인과 집단이 있습니다. 바로 이석기 전 의원과 이정희 전 대표, 그리고 소위 ‘경기동부연합’과 통합진보당입니다.
그들 역시 김대중 전 대통령 및 그의 정치세력처럼 ‘어용언론’ ‘부역언론’뿐 아니라 야권인사들과 야권언론, 그리고 수많은 개인과 집단으로부터 색칠을 당하고 매도되고 부정되고 배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 물론, 그토록 ‘빨갱이’로 몰렸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정치동지들이 이후의 정치사회적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 조금씩 정치력과 조직력, 지지도를 늘려 결국 집권에 성공했다는 것도 역사적 진실이기에, 이석기 전 의원과 이정희 대표, 그리고 경기동부연합과 통합진보당 역시 스스로부터 출발하여 각종 음해와 조작을 뜷고 신뢰를 넓히고 지지도를 올리면 언제가 되든 집권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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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좌제 폐지’ 사기극 - 1980년대 반공, 반북의 역사 3 >


“1981년 연좌제는 공식 폐지됐지만, 실질적 차별은 여전했다. 연좌제 폐지는 일종의 사기극이었던 것이다. 연좌제에 의해 인생을 차압당한 한 사람은 초등학교 동창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하소연했다.

“신원조최로 직업 선택의 자유도 제한혀. 승진에도 불이익을 주고 하다못해 해외여행 때도 불편을 줘. 공권력을 동원해서 알게 모르게 내 생활을 구석구석 사찰허고 감시허다가 나라에 무신 일만 생겼다 허면 오너라가거라 구찮게 굴어. 공동체 안에서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맨들고. 결혼 문제 같은 인생대사에서도 피눈물 나는 설움을 맛보게 맨들어. 어디 그뿐인가? 나 혼자만 그 따우 갑갑수를 당한다면 말도 않겄어. 우리 친척집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내 외갓집이나 처갓집 식구들까장 꼼짝없이 같은 불이익을 당허는 판국이여. 나는 대관절 무슨 죄고 그 사람들은 또 무슨 죄여? 부역자허고 핏줄리 같다는 죄? 그렇다면 단군할아버지 자손들 몽땅 다 연좌제로 묶어서 삼족을 멸혀야지! 폐일언허고 연좌제란 것은 인간으로서, 문명국 국민으로서 차마 헐 짓이 아니여!”
이런 그의 말에 한 친구가 반공교육 헛 받은 것 아니냐고 핀잔을 주자 그는 “천만에! 반공교육을 그만침 많이 받았으니께 이 정도지. 만일 그나마도 안 받았다면 아매 입에 기버큼을 물고 피를 토할 만큼 비판혔을 거여”라고 말했다. [윤흥길 <소라단 가는길> 2000]

연좌제에 묶여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이렇듯 연좌제에 한이 맺혔다. 연좌제에 걸린 사람들이 치러야 할 비용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연좌제로 인해 고통을 당한 사람들의 처지오 ㅏ비극적 삶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동정하면서도 “어느 난봉꾼 애비씨를 받아서 태어난 사생아맨치로 불행한 역사가 맨들어낸 필요악”으로 인식했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가 납북되었다는 이유로 한 청년은 80년대에 중동 진출을 하려다가 번번히 신원조회에 걸려 해외출국길이 막혀버리게 되는데, 그의 어머니는 시동생 앞에서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는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서방님도 아시다시피 형님이 공산당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납북되었다는 것, 이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상수가 해외에 나가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 상수만큼 반공의식이 강한 청년도 드물 거에요. 걔는 국민학교나 중고등학교 작문시간 때 아버지를 납치해간 공산당을 저주하는 글만 썼으니까요. 그런 상수가 왜 해외에 갈 수 없는지 정말 모를 일이에요. 이제까지 참고 살아온 보람이 일시에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허무한 기분이에요”

이후 이 청년의 어머니는 여러 관계 기관에 찾아가 그동안 살아온 내력이며 아들이 학교 때 글짓기대회에서 특선한 애기며 공산당 증오하는 데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애라는 등의 말을 하며 회사에서 30명이 단체로 나가는데 자기 아들만 신원이 불확실하다 하여 탈락된다면 친구들 볼 면독도 면목이지만 앞으로 살아가는 데도 회의를 느낄 것 아니냐, 또 회사에서도 국민으로서 자격이 없는 이런 사람을 계속 근무시키겠는댜, 그러니 국민된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선처해달라구 눈물로 애원했다. 그러나 아들은 결국 출국하지 못했다. [정구창 <못 가는 사우디 : 정통한국 문학대계 53> 1994]

국민으로서 인정받지 못했으니, 결혼도 어려웠다. 80년대에도 좌익 2세는 결혼당사자로서 부적격자였다. 좌익 2세들은 패배의식과 피해의식에 시달렸는데, 맞선을 보러 나온 중학교 선생은 상대에게 자신의 신세를 이렇게 한탄한다.

“제 아버지는 육이오 때 돌아가셨습니다. 보안서장을 했다더군요. 상당히 악질스러워서 주위사람들을 두드려 패고, 죽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대요. 덕분에 우리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답니다. 작은아버지까지 월북을 했으니까요. 제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이렇게 누구하고 있는 줄을 모릅니다. … 역시 수석으로 대학으로 마쳤습니다. 쉽게 모 건설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 그 회사에서는 저를 외국엘 내보내야만 되는데 제가 그럴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신원조회 때문이죠. … 결국 이렇게 머물러 앉아 안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결혼 상대 선택의 요건이 될 테니까 말씀드립니다. 제게 남겨진 아버지의 유산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는 오직 이 몸뚱이 하나뿐입니다.” [한승원 <꿈에도 소원은 : 정통한국 문학대계 53> 1994]

이런 말을 듣고 맞선 상대방이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맞선장에 나왔던 이 여인의 오빠와 아내가 나누는 대화의 한 대목이다.

“막내 욕심이 어느 정도인 줄 알아요? 당신은 코앞 일만 생각지 말고 멀리 내다볼 줄도 조금 알으세요. 우리 ㅅ대는 그렁저렁 늙어 죽어간다고 하지마는, 막내네 아들 딸이나 우리 아들 딸들은 외국 유학도 가고, 높은 공무원도 해먹고, 군대에 가서는 별도 달고, 판사도 검사도 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외교관도 하고 해야 쓸 것 아니겠소? 그러는디, 하는 일마다 신원조회란 것이 제꺽제꺽 걸리면 어쩔 것이요?”  [한승원 <꿈에도 소원은 : 정통한국 문학대계 53> 1994]” (p.219~222)

: 강준만, 김환표 저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제5장 ‘1980년대의 반공’ 중에서…

○ 불과 30년 전까지 이 땅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실질적으로 연좌제가 없어진 것은 87년 6월항쟁과 뒤이은 개헌으로 이루어졌죠. 물론 현재도 군 장교 등 특수직 임용에 있어서 국가보안법 위반 등 소위 '반체제 범죄(?)'에 관하여는 신원조회 등을 통한 연좌제 성격의 제한이 유지되고 있다고 봅니다.

○ 하지만 민주정부 10년을 거치고도 연좌제에 준하는 제도가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바로 보안관찰법입니다. 
또한 경찰과 검찰, 국정원 등 공안기관은 사이버사찰을 통해 불법적으로 감청,도청 대상자의 지인들의 정보를 뒤지는 연좌제식 먼지털이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대대적인 카톡 탈퇴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죠.

"창살 없는 감옥 보안관찰법... 폐지하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18065
사이버 연좌제…친구가 털리면 나도 털린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581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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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가 스승을 고발하는 세상 - 1980년대 반공, 반북의 역사 4 >

“80년대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일상적 감시체제가 완성 단계에 들어간 시대였다.
이웃간의 친목이나 주민불편사항 건의 및 정보교환 등을 목적으로 76년부터 시작된 반상회는 일상적 감시체제의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사실상 반상회는 애초의 명분과는 반대로 주민들을 서로 감시하는 수단으로, 불신을 조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반상회는 일제 시대 조선총독부가 일제의 침략전쟁인 ‘대동아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보국반상회에서 유래되었다. <한겨레신문> 1989년 7월)

일상적 감시체제의 살풍경은 곳곳에서 발생했다.
택시를 탔던 한 여인은 택시 사납금을 맞추기도 힘들고 고등학교 3학년인 큰아이를 비롯해 애들이 3명이나 된다는 푸념을 듣고 자신이 미장원에 한 번 덜 간다는 생각에 운전수에게 돈 1천 원을 더 주며 “참고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마했다가 이 일이 빌미가 되어 간첩으로 오인되어 경찰서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게 된다. [윤정모 <신발 : 실천문학> 1985년 봄호]
이후, 이 여인은 유언비어 날조죄로 구류 10일을 살게 되고, 이 여인을 신고한 택시 기사는 투철한 반공의식과 신고정신의 댓가로 표창장을 받게 된다.

85년 5월과 9월 남북적십자사 회담이 서울과 평양에서 열려 대표단이 오고갔는데, 이때 남측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해 찍은 평양 거리의 모습과 사람들의 모습이 텔레비젼과 신문을 통해 대서특필되었다.
전쟁 후, ‘은둔의 왕국’이던 북한의 모습이 처음으로 공개되자 사람들의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이런 가운데 서울에서 스탠드바를 경영하던 한 사람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언론을 통해 보도된 지하 100미터 가까이에 반들어진 평양의 지하철 관련 기사를 보고 “야, 북한의 지하철은 참 굉장해”라고 말했는데, 옆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손님이 북한을 찬양하는 것으로 생각해 안기부에 신고해 국가보안법 위반 용의자로 체포되기도 했다. [이나바, 조순 <서울구치소유학> 1988]

제자로 하여금 스승을 감시하게 하는 일도 벌어졌다. 80년대에 양심 선언을 했던 한 현직 교사의 증언이다.
“담임을 맡았던 반에서 학생들이 생일 자축연을 열어 서로 축하노래는 불러주며 마음의 선물로 급우간의 사랑을 주고받는 시간을 가졌고 담임으로서 책을 선물했는데 ‘지나친 친절을 베풀며 학생들과 가까워지는 것이 문제’였다며 책을 수거하고 '책 내용이 불온하다며 매도’하는 일, 수업시간의 교과운영이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이 대부분이어서 학생들의 자유로운 사고력 향상을 위해서 5분간 이야기 시간을 마련하여 자유롭게 발표시간을 가진 것이 ‘좌경의식화 공작을 하기 위한 목적교육’이라고 몰아붙이며 학생들을 일일이 불러 조사하여 이간시키던 일, 젊은 교사 10여 명이 군 입대 송별회와 신임교사 부임 환영회 등을 한 것이 ‘좌경사회주의적 조직공작을 위해 모임을 주도한’ 것처럼 꾸며 '의식화에 오염될 위험이 있다'며 본인과의 관계를 조사하던 일… 수업시간을 일일이 감시하여 순진한 학생들을 통하여 보고케 하는 등에 이르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감한 심정으로 가슴을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원순 <국가보안법 연구 1> 1989]

81년에 발생한 이른바 ‘아람회’ 사건도 바로 그런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와 투철한 신고의식이 잘 드러난 사건이었다.
아람회 사건이란 82년 김난수 충남대 학군단 교관의 딸인 아람이의 백일 잔치를 반국가단체 결성 모임으로 몰아붙인 것을 말한다. 당시 교사들이 “전두환은 살인마"라는 애기를 하는 것을 들은 한 고교생이 이를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경찰이 사건으로 엮은 것이다. 당시 이들을 신고한 당사자는 “반공교육을 너무 철저하게 받은 탓에 신고를 했고,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아왔다”고 증언했다. [조연현 <레드 콤플렉스의 실상과 극복 : 한겨레> 1999. 8]”(p.223~225)

: 강준만, 김환표 저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제5장 ‘1980년대의 반공’ 중에서…

-관련기사 : 아람회 무죄 선고는 국가폭력에 대한 심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37523

○ 국가보안법부터 보안관찰법까지, 학도호국단에서 교련, 교복, 반상회까지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제도가 한국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이런 제도들은 해방 후 남한에서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언론의 상층부를 장악한 것과 일본군 장교가 쿠테타로 정권을 찬탈하고 친일부역자들이 친미반공으로 변신하여 정치인, 관료, 법조인, 학자로 한국사회를 부정부패로 물들였기 때문일 겁니다.

○ "급우간의 사랑을 주고받는 시간을 가졌고 담임으로서 책을 선물”한 것과 "학생들의 자유로운 사고력 향상을 위해서 5분간 이야기 시간을 마련하여 자유롭게 발표시간을 가진 것”을 ‘좌경의식화 공작을 하기 위한 목적교육’이라고 매도하면서 학생들을 제도교육으로 세뇌시켜 ‘시키는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강제하려는 극우세력과 교육관료들의 사고방식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이명박근혜 정권들어 ‘부활’하면서 유신독재 시대의 교과서와 교육방식으로 회귀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친일과 독재에 부역했던 자들이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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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정권의 ‘간첩 만들기' - 1980년대 반공, 반북의 역사 5 >

"남파간첩은 50년대와 60년대에 가장 많았고, 70년대 이후, 구체적으로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북한이 직접 간첩을 남파하는 전략을 폐기하면서 크게 줄어들었다. [김창금 <되짚어본 ‘조작의혹’ 간첩사건 : 한겨레> 1995. 7.31]
그러나 80년 이후에도 검거 간첩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전두환은 정치적 위기 때마다 간첩 사건을 터뜨리며 국민들을 불안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80년 광주항쟁 이후인 10월 전남 보성군 회천면에서 이 지역 주민인 정종회와 정추낭, 정길상이 간첩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들은 중앙정보부에서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집안 친척인 정해진과이 연락 여부를 추궁받았고, 이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 끝에 간첩으로 몰렸다.
워낙 살벌했던 시절이라 변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정춘상은 사형을 언도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정종희와 정길상은 88년 12월에 석방되었다.

재일동표였던 이헌치는 81년 귀국해 삼정전자 과장으로 근무하던 81년, 임신중이던 아내와 함게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되었다.
이헌치의 아내는 구속 상태에서 육군통합병원에서 아들을 출산했는데, 천주교인권위원회와의 면담에서 이헌치는 “당시 보안사가 작성한 진술서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아내와 아들을 없애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았다”고 말했다.

간첩조작사건 가운데는 60년대와 70년대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남북 어부들을 희생양으로 한 것도 적지 않았다.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어부들에게는 대개 “납북되어 북한 체제시 지도원으로부터 세뇌되어 간첩교육을 받고 귀환한 후 국가기밀을 탐지하고 이를 북한에 전달하려했다”는 혐의가 씌어졌다. 물론 구체적인 혐의 사실은 거의 없었다.

김남주의 시 <함정>이다.
“아부지/ 오야, 인자 핵교 갔다 오냐/ 어떻게 생겼을까 북한 사람들은/ 가금없이 먼 소리를 한다냐/ 얼른 집에 들어가 밥묵고 염소금겨야제/ 성샌님이 그려갖고 오락했당게 북한 사람 얼굴을/ 아부지 어무니나 언니 오빠한티 물어갖고/ 머시라고야 시킬 것도 없었능갑다 느그 선상은/ 벨 것을 다 그려 갖고락 하게/ 너한티만 그러더냐 딴 학상들한티도 그러더냐?/ 나하고 순임이한티만 그랬당께/ 아부지 증말 북한 사람들은 머리에 뿔났을까?/ 그 사람들은 맨당 깡냉이죽만 묵는다는디 증말 그러까?/ 아부지는 가봤다 왔을께 알 꺼 아녀/ 황씨는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생겼제 으떻게 생겼으까/ 이렇게 말해줄까 하다가 그것도 삼켜버렸다/ 납북되었다가 달포 만에 고향인 갯마을에 돌아온/ 황씨는 그후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순임이 삼촌이 지서에 불려간 것은 다음날 밤이었고/ 그날 밤 항씨는 묻지 않았다/ 아들에게/ 북한 사람들을 어떻게 그려다 바쳤느냐고”

사적인 원한 관계에 의해 간첩으로 몰리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간첩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은 이성국의 가족들은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경찰의 친지를 간통으로 고소한 것밖에는 없다”고 말했으며, 정삼환의 가족들은 정삼환이 “유부녀를 겁탈한 새마을 지도자 ㅂ씨의 고소장에 증인으로 서명한 일이 있는데, ㅂ씨는 평소 보안대 사람들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문정우 <보안법 그물에 걸린 납북어부들의 한 : 시사저널> 1993. 3]

간첩으로 몰렸을 경우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서승은 “빨갱이라고 낙인이 찍히기만 하면 사회적 차별과 배제를 받았다”고 말한다. 연좌제는 81년에 법적으로 없어졌지만, “가족 구성원 중에 간첩이 나왔다고 하면 가족과 친척 모두 끌려가 두들겨 맞은 끝에 몇 명은 연좌해서 투옥되고 가정은 풍비박산” 되었고, “남은 가족들은 훗날까지도 요시찰자로 찍혀 소관 경찰 정보과의 정기적인 사찰을 받”았다. 연좌제 때문에 가족들은 “공무원이나 회사원도 될 수 없”었고, 결국 “식모나 행상, 날품팔이 등을 하며 목숨을 부지”했다.
기세문의 아들의 경우 전남대 의과대학에 합격햇지만 빈곤과 사회적 박해로 끝내 자살하고 말았는데, 이런 비극이 적지 않았다. [서승 <서승의 옥중 19년> 역사와비평사 1999]

간첩으로 찍히면 죽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납북 어부 정삼환의 동생 정남도는 첫 면회에서 “형보고 죽으라고 할 만큼 증오했었다”고 술회했다.  [문정우 <보안법 그물에 걸린 납북어부들의 한 : 시사저널> 1993. 3]
실형을 산 사람들의 상당수는 아내가 집을 나가 집안이 풍비박산 나거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간첩 자식’이라는 눈초리를 받아 아이들이 비뚤어지게 자라기도 했다. 85년 납북 어부 안정호의 형은 동생의 일로 인해 이혼을 당했으며, 어머니는 “친척마저 피하는 통에 몇 번이고 자살하려 했다”고 말했다. [최진섭 <납북 귀환어부 간첩 만들기 : 월간 말> 1989. 9]

정삼환의 경우, 그가 출소한 후에 가족들은 집 안에 칼을 두지 않았는데 “정씨의 한이 깊어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성학은 납북되었다 돌아온 어부들 가운데 힘든 법정 투쟁 끝에 유일하게 무죄 선고를 받았는데, 무죄 선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미 그는 간첩으로 낙인찍힌 상태였고, 그의 가족들은 간첩 가족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친지가 3공화국 말기에서 5공 초기에 걸쳐 약 1년여 동안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는 것을 지켜본 전태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만큼 우리 국민은 ‘간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정도로 투철한 반공의식으로 무장돼 있음도 이때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사건에 휘말린 당사자가 무죄로 밝혀지더라도 명예회복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엔 죽 끓듯 하던 여론도 결과엔 누구 하나 관심 조차 기울이려 하지 않아 치명적인 상처만 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간첩 조사나 발표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불충분한 조사나 발표는 국민에게 불화만 조성하여 북한이 노리는 또다른 목적을 이루게 하는 행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전태수 <간첩단 사건 발표 시중을… : 동아일보> 1992. 11]”(p.226~230)

: 강준만, 김환표 저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제5장 ‘1980년대의 반공’ 중에서…

○ 부정하게, 불법적으로 정치권력을 찬탈한 정권의 공통점은 여론조작과 이슈조작이죠. 한국에서 정치권력이 가장 손쉽게 이용해먹을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이북(북한)입니다. 분단체제의 필연적인 결과이자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적 통일로 진행하려는 데 가장 암적인 존재는 바로 '분단체제의 수혜자’이 부정한 정치권력입니다. 이승만부터 박정희, 전두환에게 이르기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공통점이죠.

○ 부정한 정치권력이 간첩조작에 맛을 들이는 이유는 간첩을 조작하여 도모하고자 하는 의도, 즉 야권이나 지식인, 국민들에 대한 공포정치와 협박정치가 통하기 때문입니다. 진보진영뿐 아니라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지식인과 언론,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권의 간첩사건 바표, 종북몰이, 북한 이용 행위에 대해 섣불리 동조하지 않고 의혹과 진실규명이라는 잣대를 분명하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효과가 없으면, 줄어들면 저들이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오히려 저들에게 부메랑이 되는 겁니다. 작년에 드러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처럼요…

○ 여기에서 안타까운 점은 야권 내에서 정치적 이해관계, 정파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저들의 간첩조작이나 종북몰이, 여론조작에 편승하는 개인 또는 세력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정치적 경쟁자(세력)에 대한 근거 없는 마타도어보다 실체 없는 종북몰이가 더욱 위험합니다. 전자는 당사자들끼리 갈등하고 상처를 입으면 그만이지만, 후자는 야권전체에 진보진영 전체에 색깔론이 입혀지고 뿌리 깊은 불신과 분열이 조장되기 때문입니다. 2013년 이석기 의원 등에 대한 내란음모 여론조작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간첩 수준으로 이미지를 덧씌운 후 야권의 분열이 정점에 달했고, 이에 편승하여 헌법재판소는 정당해산을, 대법원은 내란선동을 판결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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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첩’을 대량 생산한 국가보안법 - 1980년대 반공, 반북의 역사 6 >

: 국가보안법은 전두환 쿠테타 세력의 독재 수단

“1980년 12월 30일 국가보위입법회의는 반공법을 폐지하고 국가보안법을 전면 개정하면서 반공법상의 찬양고무 조항을 국가보안법에 흡수했다. 각 조항별 형량도 상향 조정되었으며, 처벌 범위도 확대되었다. 
이렇게 해서 국가보안법의 전성시대가 개막했다. 전두환 정권은 사소한 민주화운동마저 국가보안법으로 엮어 감옥에 집어넣었다. 84년 7월부터 87년 6월까지 3년 동안 매일 0.9명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김현식 <색깔논쟁> 2003]

김남주의 시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는’이다.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는/ 하루에도 골백번 잡았다 놓았다/ 모든 것이 제 좆 꼴린 대로다/ 저놈 좌경이다 저녁에 잡아넣었다가/ 아침에 내놓는다 이놈은 우경이라며/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는/ 하루에도 골백번 엎었다 뒤집었다/ 모든 것이 제 좆 꼴린 대로다/ 아닌 밤중에 시민들을 떼죽음으로 눕혀놓고/ 수백 명 수천 명 무차별로 싹슬이해 놓고/ 저놈 빨갱이다 해버리면 그걸로 만사 오케이다/ 저놈 폭도다 해버림ㄴ 그걸로 만사형통이다/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는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총만 잡았다 하면 게나 공동이나 내가 대통령이다.”

85년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구속된 윤재철의 말이다.
“푸른 수의에 왼쪽 가슴에 빨간 번호표를 단 사람도 그게 드물어야 저게 바로 ‘국보’야 하며 쑤근대기도 했겠지만 너무도 흔하고 보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다. 그러니 국가보안법도 이데올로기의 그 서슬 푸르던 칼날은 이미 꺾엊고 한낱 정치범 양심수들을 옭아매기 위한 도식적이고 편의적인 분류표에 불과했던 것이다. 내가 있던 사동에도 이른바 ‘막걸비 국보’가 한 사람 있었는데, 바디 빌딩 선수에 멍청하다 싶게 순진한 사람이 취중에 북한의 수력발전소 애기를 과장되게 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들어와 가슴에 붉은 번호표를 달고 있어 사람들의 동정을 받았다.” [윤재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 : 실천문학> 1999]

박원순에 따르면, “제5공화국의 폭압적인 통치 아래에서 ‘간첩’과는 거리가 먼 일반 ‘시국사범’까지 엄청난 고문과 조작 속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이 되어가는 것을 계속 목격하면서 ‘간첩’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오게 되었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장기형을 복역하고 있는 이들에게 접근이 가능했던 것은 민주화운동으로 투옥된 상당수 학생, 재야인사 등 지식인이었다. 이 지식인들의 목격과 체험이 ‘간첩’의 실태를 외부에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역사적 아이러니였다.” [박원순 <국가보안법 연구 2> 1992]

85년 9월 김근태 민청련 의장이 가혹한 고문에 의해 보안법으로 기소되자 이에 대응해 재야에서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면서 국가보안법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 더불어 간첩에 대한 인식의 전환도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85년 12월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 발족했다. 이후, 간첩 자식을 두었다는 이유로 주위의 따가운 손가락질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을 때 그 억울함을 풀어주는 유일한 곳으로 기능하게 되는 민간협이었지만, 발족식 당시만 하더라도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된 가족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가족들들 만날 때 부담감을 가져야 했다.
납북어부로 귀환 뒤 간첩으로 몰려 옥에 갇힌 정영의 딸 정상숙은 이렇게 토로한다.

"아버지가 감옥에 있을 때도 저는 텔레비전에서 데모하는 장면이 나오면 왜들 저라나 하고 욕을 했어요. 처음 민가협을 찾아올 때는 사실 겁도 났어요. 이상한 데 온 게 아닌가 하고. 다니다보니 조금씩 알게 됐지요. 우리 같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이때까지는 마음만 아파했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누가 조언해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친척들도 완전히 발길을 끊어버렸어요.” [남규선 <양심수 가족들의 겨울나기 : 월간 말> 12]

87년 6월 항쟁 이후 구성된 ‘조작된 간첩사건 가족모임’은 “간첩으로 발표가 되고 나면 그 간첩에게는 제대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으며 간첩으로 조작당하여 정상적인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중형을 선고받은 본인은 물론이려니와 가족들도 간첩가족으로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눈초리가 무서워 친지와의 연락을 끊고 숨어 사는 것이 보통이었고, 대부분은 가장이 구속되었기 때문에 가정생활이 파탄에 빠졌다. 더욱이 생계유지 때문에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여유조차 없었다. 다른 한편 자녀들은 간첩 부모를 둔 가닭에 끊임없는 피해읫기에 시달려야 했다.” [박원순 <국가보안법 연구 2> 1992]

간첩으로 몰린 사람들은 예외 없이 영장도 없이 불법으로 연행되었고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 혹독한 고문을 ㅂ다아야 했다. 증거능력이 없는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도 못했다.
89년 6월 민가협은 7년 이상의 장기형을 선고받은 양심수를 장기 복역 양심수로 규정했는데, 이들을 사건별로 분류하면 월북자 및 행방불명자 가족 사건, 납북어부 사건, 월남자 사건, 재일동포 사건, 국내민주화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고 의심받는 해외유학생 사건 등이었다.
이들의 가족 가운데 민가협 산하 ‘장기수 가족협의회’의 정식 회원은 40명 안팎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 수치는 ‘간첩’으로 몰린 가족들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재야 사람들로부터도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수치였다. [서준식 <국가보안법의 희생자들 : 월간중앙> 1989]

‘간첩 가족’의 피폐한 삶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가 바로 87년 발생한 수지 김 사건이었다.
87년 1월 8일 유통회사의 홍콩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윤태식이 북한이 자신의 부인인 수지 김을 통해 자신을 납치하려 했다고 주장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안기부는 윤태식이 수지 김을 살해했다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납북미수극으로 몰고 갔고, 결국 수지 김의 가족은 ‘간첩 가족’으로 몰렸다.

간첩 가족으로 몰린 뒤 수지 김의 가족들은 필설로 다하기 힘든 고통이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머니를 비롯한 6남매는 모두 안기부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은 뒤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며 피폐한 삶을 살아야 했다. 수지 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주위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과 경계의 눈빛 속에 시달리다 실어증을 얻었고 97년 세상을 끈을 놓았다.
수지 김의 큰언니는 뜬금없이 ‘간첩가족’으로 몰려 당시 다니고 있던 전매청에서 해고를 당했고, 이 후유증으로 정신이상까지 생겨 그해 겨울 사망했다. 큰언니의 남편 역시 부인이 숨진 이후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88년 교통사고로 뇌수술까지 받았으며 폐인생황를 하고 있다.

수지 김의 오빠 역시 ‘간첩 가족’으로 몰린 후, 주변으로부터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자 술에 의지한 채 살다가 2000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수지 김의 여동생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여동생은 간첩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남편과 함게 시작했던 이발소의 문을 닫았고,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을 했고, 울화병과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으며, 다른 여동생은 결혼 이후 수지 김의 동생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쫒겨났다. 
한 여동생은 결혼 후 뒤늦게 수지 김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남편의 폭행에 시달리다가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오햇동안 세상을 등지고 산중 생황를 했다.

수지 김의 조카들도 다니던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자퇴했으며, 연좌제에 묶여 취업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심지어 ‘간첩의 씨앗’이라며 시댁 식구들에게 버림받은 아이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유족들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서로간의 연락도 끊은 채 뿔뿔이 흩어져 생활했다. 유족들은 수지 김이 간첩으로 조작되었다는 수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에도 가난 때문에 소송 인지대도 마련하지 못할 만큼 빈곤한 삶을 살았다. [정은주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는 법입니다 : 대한매일> 2003. 9]’ (p.231~237)

: 강준만, 김환표 저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제5장 ‘1980년대의 반공’ 중에서…

○ 관련기사
-살인자와 안기부의 더러운 공모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9983
-‘수지김 사건’ …10여년 뒤 남편은 수십억 로비 게이트 주인공으로 http://hooc.heraldcorp.com/weekend/view.php?ud=20121207000428&sec=01-73-01&jeh=138
-전두환처럼… '수지김 간첩조작' 손해배상 구상금 6억3천만원 뭉개는 장세동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520083010321&RIGHT_COMM=R11

○ 이승만, 박정희가 부정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비호아래) 만들었고, 전두환이 반공법까지 곁들인 국가보안법은 그 탄생부터가 ‘괴물’이자 ‘불법’입니다. 그런 국가보안법이 직선제가 이루어진 다음에도 폐지되지 않은 것은 대한민국이 여전히 친일파와 독재세력의 치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악법도 법이다”라고 붙잡고 사는 이상, 그 ‘악법’에서 그리고 그 악법이 존재하는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 이런 짓을 하고서도 전두환-노태우 정권 아래에서 떵떵거리던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관료, 지식인들이 지금도 활개를 치고 다닙니다. 새누리당,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검찰청, 국정원과 국방부, 정부부처, 금융권, 조중동, 대학과 연구소에 전두환 군사독재에 부역하던 이들이 아무런 뉘우침도 없이, 처벌도 받지 않고, 배상도 하지 않은 채 기득권을 형성하여 갑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세월호 참사 조작, 간첩조작과 내란음모 조작, 정당강제해산 등 각종 조작 사건에 깊숙하게 개입하고 여론을 조작 호도하고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양심세력을 탄압하는 것입니다.

○ 간첩 조작 사건들을 대하다보면 정치권력의 오만함에 치를 떨게 됩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정치권력이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와 간첩,종북 조작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국고를 탕진하는 사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걱정입니다. 주권자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국가권력과 기관, 공무원이 국민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과거 불문하고 엄벌에 처해야 합니다. 
언제나 가장 첫 번째로 나서는 문제는 야당, 야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국가권력에 의한 간첩조작이나 사건조작에 대한 재발방지 대책으로는 제도적으로 국가권력에 의한 범죄에는 공소시효를 두지 않도록 법을 개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헌법과 법률에 어긋난 범죄를 저지른 관료, 공무원,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전현직을 막론하고 직위를 박탈하는 것은 기본이요, 연금도 박탈하고, 관련 직업에 종사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국가배상금을 보상청구하여 동일한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부당하게 기소하고 판결한 검사나 판사들도 연금을 박탈하고 변호사 자격 역시 박탈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검찰 내에서, 법원 내에서 부당한 권력의 지시에 불응하고 저항하도록 하는 동기부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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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갱이로 몰리지 않기 위한 몸부림 - 1980년대 반공, 반북의 역사 7 >


“1991년에 탈북한 김수행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옹호하다가도 “주사파는 간첩이잖아?”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조한혜정 <탈분단시대를 열며> 2000]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의 공작 탓이 컸겠지만, 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70년대와 마찬가지로 ‘레드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누가 묻기도 전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혀야만 했다. 전두환 정권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좌경용공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범이었던 문부식은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용공,불순 세력이요, 좌경의식을 가졌다는 말은 정치권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관제빨갱이일 뿐이다. 빨갱이라는 누명만 벗겨준다면 나는 최후진술을 하지 않을 용의도 있다.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것이 어찌 빨갱이인가? 우리나라의 정치학 사전에 ‘빨갱이란 반독재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애국자를 독재자가 남용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기재해야 오해가 없을 것이다.” [박원순 <타산지석의 교훈 : 공동선> 1995]

86년 10월 28일 이른바 건국대 애학투련(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에도 학생들은 자신들이 빨갱이로 몰릴 것을 우려해 ‘6.25 노래’ ‘애국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학생들의 이런 몸조심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통해 학생들은 어느 새 ‘빨갱이’로 몰리고 있었다.
11월 3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정무2수석이던 강우혁은 건국대 사건을 “공산혁명분자 폭력난동사건”으로 명칭을 통일해서 쓸 것이며 1,274명을 구속 처리했다고 전두환에게 보고했고, 전두환은 전두환은 부상자도 병원으로 찾아가 임상심문을 계속하라고 지시하면서 학생들을 “집회시위관련 법률이 아닌 방화, 파괴, 침입 등의 죄목을 적용”하고 지시했다. 집시법을 적용하면 학생들이 정치범이 된다는 것이다. [김성익 <전두환 육성증언> 1992]
11월 4일의 검찰 발표문은 청와대 회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했다. 발표문 제목이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난동사건’이었다.

당시 날씨가 추워지자 학부모들은 외투를 준비해 경찰에게 전해줄 것을 호소했으나 경찰들로부터 “빨갱이 자식을 둔 주제에 무슨 말이 많느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에 학부모들이 “빨갱이 자식을 죄로 모두 죽자”며 도로로 뛰어들어 눕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경찰은 건국대 주변 화양리 일대를 돌며 “공산당은 망한다”는 선동을 하고 다녔다. 학생들은 주민들을 향해 “애국시민 여러분!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라고 호소했다. [박원순 <국가보안법 연구 1> 1989]

사학비리 척결투쟁도 재단 측에 의해 좌경용공세력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몰고 갔다. 86년 10월 14일 상지대학 교정에 “가자! 북의 낙원으로” “붉은 깃발 아래 하나가 되자” 김일성 수령님과 타협하여 통일하라” “붉은 피로 물들 때까지 투쟁하라” 등의 유인물이 살포되었다. 당시 이 유인물은 교내 교무처에서 있는 복사기에서 복사된 것이었다.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 때에도 횟 측에서 고용한 구사대들은 “간첩 잡아라”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고 외치며 폭행을 가했으며 농성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에 수신호기로 위험표시를 해둔 깃발을 두고 “붉은 깃발을 내걸은 것을 보니 빨갱이임에 틀임없다”고 말했다. [박원순 <국가보안법 연구 1> 1989]

민중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던 황광우가 친척 형님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너희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해온 것을 우리 국민은 존경한다. 영삼이 대중이가 민주주의를 떠들지만 그 사람들은 자기가 대통령 해먹을라고 하는 것인 반면 너희들은 진짜 국민을 위해서 제적당하고 감옥에 간 것을 사람들은 다 알아불제. 그런디 그러한 너희들이 사회주의를 주장하면 전 국민이 너희들에게 등을 싹 돌려버릴 것이다. 우리나라에센 사회주의가 안 돼야. 사회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알지만 네 호적에 붉은 줄이 그어지면 네 새끼만이 아니라 조카 새끼들까지 신세 조져버리는 줄을 명심하고 제발 사회주의는 입밖에도 내지 말어라, 잉?” [황광우 <한 남한 사회주의자의 선언 : 월간 말> 1990.6]" (p.238~241)

: 강준만, 김환표 저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제5장 ‘1980년대의 반공’ 중에서…

○ 아무리 다시 생각해보아도 빨갱이, 좌경용공, 친북, 종북, 좌파 공세는 부정부패한 독재세력과 기득권자들, 언론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공포’에 다름 아닙니다. 1~5%에 불과한 이런 부정한 자들이 ‘공포’를 이용하여 95%를 수탈하고 짓밟는 것이죠. 사실 95%가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이 종북이라면 나도 종북이다”라고 마음 먹고 들고 일어서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공포이고, 하루아침에 쫒겨날 권력과 기득권일 뿐입니다. 그 출발이 어렵고 과정이 힘들어서 그렇지... 

○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0년 615 공동선언 이전시기에는 사실 남북관계가 긴장과 대결만 존재했던 때라 “빨갱이로 몰리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학생운동이나 시민운동가들에게 나타날 수 있다고 봅니다만, 남북 정부와 정상 사이에 615선언과 104선언을 발표하고 남북교류가 이어진지 15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종북몰이’에 쫄아 “나는 종북이 아니다”라는 활동가들, 운동가들, 정치가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무지한 것인지, 비겁한 것인지, 탐욕만 남은 것인지...

○ 황광우씨의 친척분 말대로, 80년대에 아무런 욕심도 없이 민주주의와 민생, 평화통일을 위해 두들겨 맞고, 제적당하고, 감옥에 갇히며 싸웠던 학생대중들과 시민대중들의 힘으로 6월 항쟁도 일어나고 87년 헌법도 개정했습니다. 그런데 얼굴마담에 불과했던 소위 486 정치인들과 단체 간부들은 대중들의 피땀을 이용해 뺏지를 달더니 이제는 ‘생계형 정치인’으로 전락하여 구태가 되었더군요. 학생대중들과 민중들을 배신하고 등에 칼을 꽂은 자들이야 더할 나위 없는 패륜아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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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교조 교사들의 시련 - 1980년대 반공, 반북의 역사 8 >


“1987년 6월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은 교사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쳐 87년 9월 27일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가 결성되었다.
전교협은 교육악법 개정을 위한 서명 운동을 벌여 나갔으며, 88년 11월 20일 여의도 광장에서 1만2천여 명의 교사들이 모인 가운데 전국교사대회를 개최했다. 89년 2월 19일 전교협 대의원대회는 노동3권의 보장을 요구하는 교직원노동조합의 결성을 결의했으며, 드디어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의 탄생을 보게되었다.
박정희 일당의 5.16 군사쿠테타로 교원노동조합이 해체된 지 28년 만의 결실이었다.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1990]

노태우 정권은 전교조가 탄생되기 이전부터 모진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3월 25일 국어교사모임이 <민족민주교육을 위한 개편 교과서 지침서>를 발간하자, 문교부는 이 지침서가 이른바 ‘의식화 교육’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지침서 관련 교사와 학교 현장에서 이 지침서를 학습자료로 사용하는 교사들에 대해 형사처벌까지 하려고 들었다.

도대체 무슨 책이었기에 그랬을까?
국어교사모임은 이 지침서의 책머리에 “현직교사들의 수업 경험을 기초로 한 이 책은 앞으로 부교재 및 대체교과서 개발의 좋은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발히고 “현 교과서의 문제점이 서구 편향, 국가이데올로기 강조, 봉건적 충효 이념의 지나친 강조로 인한 민주주의 이념의 유보, 도시중심적으로 중상류층 편향”이라면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그리고 민중 지향적인 교육 내용으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심성보 <80년대 한국사회 대논쟁> 1990]

노태우 정권은 4월 8일 청와대 회의에서 ‘좌경세력척결’을 결정한 이후, 본격적으로 의식화 사례 수집에 나서 ‘학부모 진정’의 형식을 빌어 일선 기자들에게 흘리기 시작했다. 물론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이효성 <언론비판> 1990]
4월 말에는 ‘의식화교사’ 31명을 내사중이라고 밝혀 교직원들의 노조 결성에 방해 공작을 펴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대부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몇몇 교사는 강제로 교단을 떠나야 했다.

89년 4월 전북의 한 중학교에서는 한 교사가 민주화교수협의회가 4.19 기념일에 마련한 ‘고등학생을 위한 민주교실’에서 “역사학자들과 정부당국마저도 그 의의를 인정하고 있는 4.19 혁명이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소홀하게 취급당하고 있다”면서 “고등학생들이 선배들을 따라서 사회 민주화와 조국통일에 앞장서자”고 말을 했다가 다른 지역으로 전출당했으며, 민정당은 이 사건을 빨갱이 교육으로 지칭했다. [김현식 <색깔논쟁> 2003]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문익환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고 해서 교사가 경위서와 반성문을 써야 했으며, 충북 제천의 한 학교에서는 신문의 사설을 이용하여 수업을 진행하다가 사표를 강요받기도 했다. 경북의 한 학교에서는 한겨레신문 사설을 가지고 수업을 진행했다고 하여 각서를 써야 했다.
경남의 한 중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교사가 “우리나라 분단은 미국과 소련에서 비롯되었고, 이 과정에서 미국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되었다.[김현식 <색깔논쟁> 2003]

전남 나주에서는 한 교사가 점심시간을 50분으로 줄이는 것은 부당하다며 “사람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움직을 수 없다”고 하자 교장이 사람을 기계로 보니 유물론자이고 빨갱이라며 평교사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뺩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현식 <색깔논쟁> 2003]

현직 교사가 쓴 시 ‘또 다른 고향’의 일부이다.
전교조 교사는 빨갱이라고/ 당국의 온정어린 설득에도 남아 있는 우리는/ 사상법이라고/ 사랑하는 아이들, 동료 교사들 앞에서/ 저들은 오늘도 미소 띤 얼굴로 매도하는데/ …/ 내일은 한가위, 고향에 가야 한다/ 저들이 빨갱이라 매도하는 것만 믿어/ 온 집안 어른들 남부끄러워하는 고향/ 고향이 날 나무라네/ 배운 놈이면 배운 값을 하라네/ 나라에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는데/ 실정법을 어겨가며 반역해서 되느냐고/ 하늘 같은 스승을 노동자가 웬말이며/ 6.15 때 우리 마을 적 치하에 들어가/ 구들장까지 파헤쳐진 것 벌써 잊었냐고/ 소 팔고 논 팔아 대학까지 시켜서/ 고등학교 선생 노릇 자랑으로 여겼는데/ 나쁜 물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며/ 막무가내 나무라는 고향에 가야 한다” [김종인 <또 다른 고향 : 실천문학> 1989] (p.242~246)

: 강준만, 김환표 저 <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제5장 ‘1980년대의 반공’ 중에서…

○ 89년 5월 연세대에서 진행된 전교조 결성대회의 기억이 생생하네요..ㅎ 당시 학생운동대오는 전교조 결성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전교죠 지도부와 협의하려 다른 몇 개 대학에서 대회가 진행되는 것처럼 가짜 잔보를 흘린 뒤, 연세대에서 기습적으로 대회를 성공시켰죠. 대학생들은 대회가 종료되고 선생님들이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경찰과 대치하여 치열하게 싸웠답니다...^^

○ 노태우 군사독재정권은 전교조 결성 뒤, 탈퇴 협박과 강요, 조합원에 대한 중징계 등 폭압적으로 탄압하여 1989년 말까지 1,524명의 조합원만을 남겨놓았습니다. 전교조 소속 1,524명의 교사들은 전교조 탈퇴 대신 강제 해직이라는 수난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죠.
1990년대에는 한총련이 김영삼 정권에게 비슷한 탄압을 받았고요.
○ 2012~14년 통합진보당에 대한 박근혜 정권의 탄압을 보면서 전교조와 한총련을 떠올리게 됩니다.








○ <1940년대 대한민국 반공, 반북의 역사> 1~10은 http://blog.daum.net/hy2oxy/8692167 을,
<1950년대 대한민국 반공, 반북의 역사> 1~17은 http://blog.daum.net/hy2oxy/8692174 을,
<1960년대 대한민국 반공, 반북의 역사> 1~8은 http://blog.daum.net/hy2oxy/8692190 을,
<1970년대 대한민국 반공, 반북의 역사> 1~8은 http://blog.daum.net/hy2oxy/8692207 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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