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소적개공신도상 孫昭敵愾功臣圖像

1476(세조13), 絹本彩色, 170×100cm, 寶物 제1216號, 慶州孫氏 書百堂 所藏







부분도


조선초기의 문신 손소(1433-1484)의 공신도상은 왕명으로 공신호(功臣號)와 함께 하사 받은 초상화이다.

청색 단령에 오사모를 썼으며, 소매 안에 두 손을 공수한 전신교의좌상이다. 좌안칠분면의 시점을 적용하였다.

갈색의 선묘로 윤곽을 그린 후 채색하였는데 수염 하나하나에 이르는 섬세한 묘사와

뚜렷한 이목구비는 손소의 강직한 기개와 풍모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손조적개공신교서 孫昭敵愾功臣敎書


지본묵서, 30.6×167cm,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공신에 책훈되어 받은 교서이다.

공신으로 봉해진 손소는 사후 영세토록 신위를 옮기지 않는 불천위로 모셔지게 되었다.

명문가로 회자되는 양동마을 경주손씨가의 사회적 기반이 조선 전기에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겠다.








송첨삼보 松簷三寶

경주손씨 집안에 가보로 전해 내려오는 세가지 보물, 즉 옥연적, 상아도, 산호영을 말한다

송첨은 경주손씨 종가의 당호이며, 이 삼보는 계천군 손소의 유품들이다.






손중돈문과홍패 孫仲暾文科紅牌

1849(성종20), 紙本墨書, 74.5×69.0cm,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






손중돈양산군수고신 孫仲暾梁山郡守告身

지본묵서, 48.0×81.4cm, 서백당 소장.






손중돈이조판서고신 孫仲暾吏曹判書告身

1528(중종24), 지본묵서, 52.8×85.0cm, 서백당 소장






손광서전부부사용고신 孫光曙前部剖司勇告身

1539(중종34), 지본묵서, 40.559.7cm, 서백당 소장.









이충원호성공신교서 李忠元扈聖功臣敎書

1604(선조37), 지본묵서, 36.0×298.8cm, 보물 제827호, 이충원종가 소장.

1604년 선조가 호성공신 이충원에게 내린 상훈교서이다. 명주에 두꺼운 한지를 배접하여 만든 두루마리 형태로, 붉은 선을 긋고

해서체로 쓴 1축 지본묵서이다. 글씨는 석봉 한호의 것이다. 문서의 끝 부분에 어보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 있다.







이충원호성공신도상의 부분도






이충원호성공신도상 李忠元扈聖功臣圖像

1604(선조37), 絹本彩色, 103×231cm, 전주이씨 이충원종가 소장.

이충원은 정종(定宗)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 후생의 현손으로 1556년(명종21)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수찬을 지낸 인물.

임란 당시 형조참의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서울로 돌아와서는 형조참판에 특진되었다. 17세기 초반기를 대표하는 공신도상

가운데 완숙한 화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모란과 쌍공작 흉배와 서대를 착용한 것은 당시 품계가 문관 1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린을 형상한 부분




 


학을 형상한 부분








송요화진산군수해유문서 宋堯和珍山郡守解由文書

1745(영조21), 지본묵서, 108.3×219.3cm, 대전 선비박물관 소장.

1745년 진산군수를 역임한 송요화(1682-1764)의 임무교대를 위해 작성한 해유문서로 전임관이 담당한 재정, 군정 및 각종 집물 등의

임무 전반을 후임관에게 인계함으로써 전임관의 책임을 마치는 문서이다. 송요화는 송준길의 증손으로 일찍이 출사하였으며,

진산군수로 부임하기에 앞서 청산현감과 사복시주부를 역임한 바 있다.







정경세시장[우복시장] 鄭經世諡狀

1663(현종4), 지본묵서, 60×20cm

송시열이 찬한 정경세(1563-1633)의 시장 원본이다.

본 문서는 시호가 결정되는 전 과정을 공문서를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시호행정과 관련하여 접련된 이조(吏曹)의 첩정(牒呈)과 의정부(議政府)의 계목(啓目)








이하응(李昰應)이 영흥부사 이남규(李南珪)에게 보낸 서간




흥선대원군이 그의 장남인 우석 이재면이 수당 이남규에게 보낸 간찰을 모아 성첩한 필첩으로

수당은 고종조의 문신, 학자로 또 순국의사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로, 본 필첩에 수록된 간찰 7점은 모두 시전지를 사용하고 있다.








인동감시시관계회도 仁同監試時官契會圖

1885(선조18)~1590(선조23). 帖, 絹本彩色 · 墨書, 59.4×62cm,

경상도 인동현에서 감시를 주관한 시관들이 계회를 기념하여 제작한 계회도로

인동(仁同)은 지금의 경북 선산 · 구미 지역. 화제로 송설(宋雪)이라는 인물이 쓴 칠언율시가 적혀 있다.







좌목(座目)







기축사마동방록 己丑司馬同傍錄

1602(선조358), 帖,  絹本彩色 · 墨書, 33.8×28.5cm,







좌목(座目)





홍경신(洪慶臣)의 시고(詩稿)








청풍상춘(靑風常春)





태고정(太古亭)과 김상용(金尙容)의 제택(第宅) 전경


청풍계첩 靑風戒牒

1620(광해군12), 帖, 紙本彩色 · 墨書, 38×51cm,

인왕산 자락에서 7인의 문사들이 모여 상춘과 시회를 즐기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시회첩이다.

호조판서 김신국, 병조판서 이상의, 판돈녕부사 민형남, 예조판서 이덕형, 최희남, 형조판서 이경전, 이필영 등 7인이 참가하였다.

첩의 뒷면에 일곱 사람이 짓고 직접 쓴 칠언율시가 함께 실려 있다.







김신국의 시고





이상의의 시고







계회도 전면







임오사마방회도 壬午司馬榜會圖

1630(인조8, 帖, 絹本彩色, 46×30cm,

사마시에 합격한 동기생 12명이 계회를 갖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계회도첩이다.

시문은 모두 11수가 수록되어 있다. 앞의 4수는 이준을 송별하는 시이고, 나머지 7수는 방회를 기념한 내용으로

 이홍주가 초서로 옮겨 쓴 것이다.







계원들의 시고





정경세의 서문







오현종사시묘정참례도 (五賢從祀時廟庭參禮圖)






문묘에서의 행사 장면





좌목





정경세의 발문


성정계첩 聖庭契牒

1610년 오현의 문묘 종사 때에 집사로 참여한 인사들이 제작한 계첩이다.

성정(聖庭)은 문묘의 별칭으로, 오현이란  조선의 유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말한다.







계회장면


금오시첩 金吾詩帖

1823년 의금부에 소속된 의금부도사 10인이 계회를 갖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시화첩이다.

금오는 의금부의 별칭으로 범법자 처리를 담당한 관청으로 관아도 형식의 도상은 이미 17세기부터 금오계회도의 전형으로

그려졌으며, 19세기에 접어들면 이전 시기에 비해 급격한 형식화가 진전되며, 화격이 현저하게 퇴보하는 경향을 보인다.







좌목





이건기의 시고 





무수동도 無愁洞圖 (아래)

1729(영조5), 지본채색, 121.4×48.3cm, 안동권씨 소장.

권이진이 호조판서로 재직하던 1729년 자신의 고향마을 무두동(현 대전광역시 중구)을 화공에게 의뢰한 것이다.

본디 8폭으로 그려졌으나 세전 과정에서 한 폭을 분실하여 현재 표구 상태는 일곱 폭의 그림과 한 폭의 글씨로 되어 있다.

18세기 전반의 회화사와 역사자료로서도 의미가 있다.



2. 보문산(普文山)과  보문사                                            1. 유희당(有懷堂)





4. 장수공가(長水公家)                            3. 유회당(有懷堂) 종택






6. 버드내(柳等川)                                     5. 옥녀봉






7-1. 갑천에서 선유하는 장면                                             7. 갑천(甲川) 







경주향안 慶州鄕案

1679, 紙本彩色, 55.3×38cm, 경주최씨 소장.

1601년부터 1679년 사이의 경주 향중에 거주하는 사족들의 명단을 적은 향안.

푸른색 비단으로 표장하였으며 철권(鐵券)으로 제본하였다. 유려한 필치와 양질의 도련지를 사용하였다.







이채(李採)의 서문







양동동중완의 良洞洞中完議

1869(고종6), 지본묵서, 61.9×126.5cm, 경주손씨 소장.

완의는 종중, 가문, 동중, 계 등에서 여러가지 문제를 의논하고 그 합의된 내용을 적어 서로 지킬 것을 약속하는 문서이다.








경주부결송입안 慶州府決訟立案

1560(명종15), 지본묵서, 62×650cm,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

사돈간인 최득충과 손광현 등이 제기한 '결혼한 뒤 자녀없이 죽은 딸'의 노비상속 여부에 관해

 약 40일간에 걸쳐 소송을 진행하고 결과를 원고 화순최씨(친정 측) 및 피고 경주손씨에게 통고해 준 문서.








경주부관문 慶州府關文

1616(광해군8), 지본묵서, 42×44.7cm,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 

경주부 판관이 교동현 수령에게 노(奴) 안수(安守)를 본래 주인인 손종하에게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관문.







손시의송 孫時議送

1603(선조36), 지본묵서, 47.5×35.8cm, 서댁당 소장.

손시가 관찰사에게 사노에 대한 분쟁의 해결을 요청하는 문서이다.







양동거민수본 良洞居民手本

1889(고종26), 지본묵서, 58.2×46.5cm,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

양동 동민들이 마을의 세금을 거두는 김석숭이 도망가면서 가지고 간 세전에 대해 수령에게 해결을 요청하는 수본.







유금리거창속장갯동소지 有今里居倉屬長介同所志

1767(영조43), 지본묵서, 37.6×45.2cm,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

유금리에 사는 창속 장갯동이 자신의 토지를 입증해 줄 것을 요청하는 소지.








금산군노비매매입안 錦山郡奴婢賣買立案

1507(중종2), 지본묵서, 218×68cm,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

손중돈의 처 최씨가 최제징으로 처 이씨로부터 노(奴)를 매득하고 관으로부터 발급 받은 노비매매입안.

임진왜란 이전 노비매매관련 문서가 희소한 현실을 감안할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문서이다.







손광서노비매매명문 孫光曙奴婢賣買明文

1556(명종11), 지본묵서, 51×47.2cm,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







손중돈노이옥석토지매매명문 孫仲暾奴李玉石土地賣買明文

1520(중종21).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

노주(奴主) 박수원이 충의위 손광서에게 노를 방매하는 '노비매매명문'으로

문서 내용을 보면 외거노비에 대한 통제력 약화가 매매에 영향을 미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노비 추심의 어려움과 도망 현상은 17 · 8세기에 이르면 더욱 극심해져 노비매매도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패지


노억손패지 및 토지매매명문 奴億孫牌旨 및 土地賣買明文

1555(명종10), 지본묵서, 39×34cm (첩지) · 53×38cm (명문),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






명문







손중돈처정부인최씨금급문기 孫仲暾妻貞夫人崔氏衿給文記

1537(중종32), 지본묵서, 70×52cm,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

계모 최씨가 손경 삼남매에게 가사와 노비를 지급하는 문서로, 16세기 자녀균분상속의 분재양상이 잘 반영된 전형적 분제기이다.







손중돈오남매화회문기 孫仲暾五男妹和會文記

1548(명종3), 지본묵서, 72×98.5cm,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







손여택남매유루분화회문기

손여택 등 8인이 조부모의 재산 분재에서 누락된 노비 · 전답을 다시 분재하는 문서.






유의손형제화회문기 柳義孫兄弟和會文記

1447(세종29)~1450(세종32), 帖, 지본묵서, 83×51cm, 전주유씨 수곡종택 소장.

유빈(柳濱)의 네 아들이 부모 사후에 노비를 화회분집하는 문서로 이들 문서는 19세기 이전 어느 시점에서 배접하는 과정에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다. 분재기에는 380구 가량의 노비가 등장하고 있는 반면 전답에 대한 내용이 없다. 임란 이전의 조선전기에서는

전답보다는 노비에 대한 재산적 가치를 중시하였음을 보여 준다. 유의손 형제화회문기는 현존하는 분재기 중

두 번째로 오랜 것이며 화회문기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사료적 의미가 매우 크다.


인용서적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25주년 기념 고문서특별전』







Break Of Dawn - Amethyst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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