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 수목(樹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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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천연기념물 수목(樹木) 2

茶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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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 회화나무

천연기념물 제472호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자마자 왼쪽 금호문으로 이어지는 행각 건물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4그루 회화나무가 눈에 들어 온다. 15~16m 쯤의 수고에 흉고 둘레는 90~180cm에 이른다.

19세기 초에 그려진 '동궐도(東闕圖)'를 보면 지금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는데 금호문 쪽 회화나무는 3m 남짓한 담장 높이보다 

낮게 그려져 있다. 사실화라고는 하지만 비례로 따지면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실제 나이는 2백년을 조금 넘긴 듯 보인다.







금천교 동쪽의 회화나무


서편의 4그루, 동편의 4그루를 합쳐 모두 8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동궐도'에는 여러 그루의 능수버들 사이에 주위를 압도하는 크기로 그려져 있어 금호문 쪽 회화나무보다는 나이를 더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나무 굵기와 동궐도의 그림으로 추정한 나이는 대략 400~600년 정도. 아마도 임란으로 불타버린 창덕궁을 신축할 때

심었거나, 아니면 1405년 창덕궁 창건 당시에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덕궁에는 이곳 말고도 낙선재 입구 언덕 및 신선원전 들어가는

길에도 큰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경복궁은 임란 이후 폐궁으로 방치한 탓에 큰 회화나무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경복궁 후원이었던

지금의 청와대 안에 몇 그루의 굵은 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경복궁에도 여기저기 회화나무를 심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궁궐과 서원 등에 굵은 회화나무가 존재하는 이유는 『주례(周禮)』에 의거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면삼삼괴삼공위언(面三三槐三公位焉)'을 원칙으로, 궁궐의 외조(外朝)는 왕이 삼공과 고경대부 및 여러 관료와 귀족들을 만나는

장소로서 회화나무를 심어 특별석임을 나타내는 표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돈화문 안은 바로 외조에 해당하는 곳이다.

회화나무는 꼭 외조의 장소만이 아니라 차츰 관아의 앞뜰, 고관대작의 사저를 비롯 다양하게 심어졌다. 경주 안강서원의 노거수

회화나무를 비롯, 주로 전통을 자랑하는 경상도 일대 양반촌을 가면 어김없이 회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회화목은 이 곳 창덕궁 말고도 4곳이 더 있고 전국적으로 보호수는 2백여 그루에 이른다.






봉모당 향나무

천연기념물 제194호


궁궐을 통틀어 가장 오래 살아남은 창덕궁의 터줏대감 격 향나무다.

 정조가 선대 임금들의 유훈(遺訓)을 보관키 위해 지은 봉모당(奉謨堂) 뜨락에 가지를 펼치고 있는데, 현재 창덕궁 관람 순서 중

해설사들에 의해 마지막 볼거리로 소개되고 있다. 수령은 약 7백년으로 짐작되는데, 성장 속도가 워낙 더딘 나무이다 보니 창덕궁

창건 당시 심을 때 어린 나무는 아닌 제법 굵은 일백년 이상 수령의 나무를 옮겨 심었다고 보면 틀림 없다. 온갖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지켜 보았을 창덕궁 향나무.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당시의 키가 6m 남짓으로 세월로 환산하자면

1년에 1cm도 자라지 않은 셈. 동궐도에도 이 향나무가 그려져 있다. 6개의 받침목이 동서 긴 타원형으로 뻗은 가지들을 지탱하고

있는 단아한 모습이다. 지금처럼 위로 솟구친 가지는 없고 옆으로만 펼쳐져 있는 모습이다. 동궐도에는 이 향나무 외에 인정전 옆의

선원전 후원과 앞뜰에도 거의 비슷한 크기의 향나무가 두 그루 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몸체인 줄기가 마치 용트림 하듯 뒤틀리고 동서로 난 2개의 큰 가지는 거의 땅에 닿을 듯한 모습으로,

지금의 키는 12m에 이른다. 목질부 내부는 거의 썩어 텅 빈 모습이어서인지 향을 만드는 소재로 잘려나가지 않고 살아 남았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이다. 이제는 국가의 보살핌을 받으니 나무가 잘려나갈 일이야 없을테고, 안내 받지 않고선 나무에 접근 조차 어려울 정도니

하늘이 내리신 천수(天壽)를 누릴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디 세세년년 오래 살아 이 나라의 역사를 증언하시길 心告







대보단 다래나무

천연기념물 제251호


이 다래나무는 창덕궁 돈화문 서쪽 담을 따라 신선원전을 지나 커브길을 돌아올라 대보단(大報壇) 터를 지나쳐

숲 속으로 조금 들어간 작은 개울가에 자리하고 있다. 2~3m의 간격을 두고 대체로 3군데서 뿌리를 내렸다.

승천하려는 용의 기상인 듯, 구불구불 얼기설기 얽혀있는데, 가장 긴 덩굴의 길이는 약 20m가 넘어 보인다.

줄기의 굵은 부분의 둘레가 72cm, 지름이 거의 한 뼘이나 되는 다래나무로서는 어마어마한 굵기를 자랑한다.

겨울에 보면 회갈색의 나무껍질은 두꺼운 종이처럼 벗겨지면서 나무 살갗을 드러내 놓고 있다. 너무 연로해서인지

옷을 채 갖춰 입지도 못한 상태로 눈 속에서 맨살이 들어난 것처럼 보여 안쓰러울 정도다.







그러나 여름날에 가보면 짙푸른 잎사귀를 매단 가지 뻗음이 자못 왕성해 보인다.

원래 바로 옆에 있는 커다란 말채나무를 타고 올라가며 자랐으나 바람에 넘어질 우려 때문인지

 지금은 2단으로 된 계단을 설치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다래나무의 수령은 약 600년 쯤으로 추정한다는데

이는 창덕궁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고 계산한 것이라고.







연산군 9년(1503) 9월 27일 '서리 맞은 머루와 다래를 따서 들이도록 하라' 는 기록이 나온다.

전후 사정으로 보아 멀리 갈 필요 없이 가까운 후원에서 따오라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창덕궁 부근에 일찍부터

다래가 많이 자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의 이 다래나무는 열매가 달리지 않는 수나무이다.

본디 암수나무가 함께 어울려 자랐을 터인데, 열매로 인한 시달림을 받지 않아서인지 이 수나무만 지금껏 살아 남았다.








관람지 뽕나무

천연기념물 제471호


창덕궁 부용지를 지나 후원 뒷길로 들어서면 관람지 앞, 창경궁 담장과 거의 붙은 채 굵은 뽕나무 한그루가 자란다.

창덕궁 다래나무와 마찬가지로 일반 관람코스에는 들어있지 않다. 수고 12m, 흉고둘레 2.2m로 한아름 반 정도의 굵기다.

주위로는 서어나무, 굴참나무, 밤나무 등의 나무와 햇빛 경쟁을 하느라 나무갓이 거의 다른 나무에 묻힌 형편이다.

수령은 17세기 초에 심었다고 봐서 400년으로 추정 한다고. 일찌감치 문화재로 지정된 성선읍의 강원도 기념물 7호

뽕나무와 상주시 은척면의 경북 기념물 1호 뽕나무보다 약간 작은 편으로, 그럼에도 천연기념물이라는 타이틀을

보유한데는 궁궐에 자란다는 특수 신분 때문이라고.


양잠(養蠶)은 일반 농사와 더불어 옛 농본사회의 최고 산업이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삼국지』위지 동이전(東夷傳) 마한조에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서 옷을 해 입었다' 했으니 삼한시대 이전에 이미 양잠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가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기틀을 잡아갈 즈음인 태종 9년(1409) 임금은 궁궐 안에

뽕나무를 심으라는 명을 내린다. 10년 뒤인 세종 5년(1423) 잠실을 담당하는 관리가 임금께 올린 공문에 '경복궁 안의 뽕나무

3,590주와 창덕궁 안의 뽕나무 천여주, 밤섬의 뽕나무 8,280주로 누에 종자 2근 10냥을 먹일 수 있습니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기록을 보아 조선 전기의 정식 궁궐인 경복궁은 물론 별궁으로 이용되던 창덕궁에 이르기까지 궁궐이 온통 뽕밭이었을 것이다.


양잠의 신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는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할 정도였다면 양잠에 대한 시대적 대접이 읽혀진다.

창덕궁의 뽕나무는 왕비가 아끼고 가꾸던 수많은 궁궐의 뽕나무 중에 지금껏 살아남은 가장 큰 개체이다.

 이 뽕나무야 말로 조선조 왕궁 여인네들의 희로애락이 내재되어 있을 터이다.








서울 문묘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59호


서울 문묘는 성균관대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다.

임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말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정전9正殿)인 대성전, 유생들의 공간인 명륜당 등이 있다.

명륜당 넓은 앞마당에 몇 아름이 되는 커다란 은행나무 2그루가 서로 맞닿는 거리에 자라고 있다. 대성전 안에도 2그루가

더 있어 총 4그루의 은행나무가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그 외에도 회화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 말채나무, 단풍나무, 팥배나무,

 떡갈나무 등이 마당의 가장자리를 둘러 싸고 있다. 그중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명륜당 입구 쪽의 나무지만

나머지 은행나무도 그에 못지 않게 크고 웅장한 자태를 보인다.


『증보문헌비고』에 중종 14년(1519) 대사성 윤탁이 명륜당 아래에 은행나무 2그루를 마주 보게 심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기초가 튼튼해야 학문을 크게 이루듯, 나무는 뿌리가 무성해야 가지가 잘 자라므로 유생들도 이를 본받기 바란다는 의미다.

같은 책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하나 더 있다. '옛사람들이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행단(杏壇)의 제도를 본 따서 문묘의 뜰에다

은행나무 2그루를 마주 심었더니, 열매가 맺을 때마다  땅에 떨어져 구린내가 진동했다.


노비들이 줄을 서서 이를 주워감으로

앞마당이 시끌벅적해 엄숙해야할 문묘의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성균관의 한 관리가 제사를 지내면서

열매 때문임을 문묘에 아뢰었더니 다음 해부터 다시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는 것이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따로 있는 나무이니

암나무가 수나무로 바뀌었다는 얘기다. 아마 암나무가 열매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자 베어내고 수나무를 다시 심었을 터.


그 외에도 강원도 주문진의 천연기념물 166호 은행나무 및 강화도 전등사 은행나무도 암수가 바뀌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연유야 어쨌든 오늘날 문묘의 4그루 은행나무는 모두 열매가 열리지 않는 수나무다. 

수고가 12.1m에 이르고 가지 뻗음새도 사방으로 고루 발달해 주위 건물과 조화로우면서도 웅장하다.

남쪽으로 뻗은 굵은 가지에는 유주(乳柱)라고 부르는 기다란 혹이 아래로 달려 있다. 

'유주' 세포 안에는 많은 전분을 포함하고 있는데, 일종의 공기뿌리로써 양분을 저장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그 정체가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모양새가 젖 처럼 생겼다고 일본인들이 유주라 이름 붙였다지만,

기실 남근 모양에더 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유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더 굵어지고 길어진다.

유주가 달린 은행나무는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원주 반계리 167호, 김천 조룡리 300호, 의령 세간리 302호,

화순 야사리 303호, 강화 불음도 304호, 청도 적천사 402호 등이 있다.







서울 영휘원 산사나무

천연기념물 제506호


동대문 밖 청량리에 홍릉(洪陵)이 있다. 정확히는 '홍릉터'가 맞는 말이다.

원래 이곳의 명성왕후 묘를 홍릉이라 했으나,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지금의 남양주시 금곡에 왕릉을 만들면서 명성왕후의

묘를 옮겨가 합장하고 새로 홍릉이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홍릉터는 산림과학원 홍릉수목원이 들어서 있다.

그 앞쪽 세종대왕기념관과 영휘원(永徽園)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적한 무덤을 만날 수 있다.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영휘원의 제실 앞을 약간 비켜서서 동그랗게 돌 둘림을 하고 비스듬히 서 있는

늙은 산사나무 한 그루가 옆에 자식나무 둘을 거느린 채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 아름이 조금 넘는 이 나무가 가장 최근에 나무나라 최고의 영예인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제까지 문화재청에서 지정하는 천연기념물 나무는 나이가 많고 덩치가 큰 은행나무와 소나무, 느티나무 등 주로 당산목 위주였다.

반면에 옛 사람들의 실제 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는 다양한 종류의 전통나무들은 오히려 소외되고 있었던 형편.

다행히 앞으로는선조들의 생활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전통나무 중 수종을 대표할만한 나무들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한다고 한다.

산사나무는 전통나무의 일종으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나무였으나 대부분 없어지고 이 나무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산사나무로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이다. 나이는 대략 150~200년 정도로 본다고.


영휘원은 고종의 두 번째 왕비 순헌황귀비 엄씨의 무덤이다. 본디 상궁으로 있다가 고종의 눈에 들어 성은(聖恩)을 입자

시기한명성왕후에 의해 쫒겨난다. 1895년 왕후가 무참치 시해되자 고종은 엄상궁을 불러 자기 곁에 두었고, 1897년 영친왕 이은이

태어난다. 엄귀비는 나이 44에 얻은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했으나 1907년 불과 11살에 유학이란 이름으로 일본에 보내야만 했다.

아들과 헤어지고 4년 남짓 1911년, 58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이곳 영휘원에 묻힌다.






산사나무의 열매인 산사자(山査子)는 감기와 기침은 물론 소화불량에 이르기까지 약으로 널리 쓰였으며,

산사떡, 산사정과로 만들어 먹을만큼 다양한 쓰임새의 나무인 것이다. 이런 나무이기에 묘역의 지킴이로 살아 남은 듯.

역사는 흘러 일본에 간 영친왕은 1920년 일본 왕족인 이방자 여사와 강제 결혼을 하고 다음해인 1921년 8월 18일

 첫 아들 이진(李晉)을낳는다. 하지만 불과 6개월 만인 1922년 5월 11일 원인도 모른 채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순종은 이를 불쌍히 여겨 영휘원 옆 자리에조촐한 무덤을 만들어 주고 숭인원이라 했다.

영위원 출입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 쪽에 규모가 좀 작은 무덤이다.


결국 엄귀비는 어린 손자와 같이 뭍혀있는 셈이다. 오늘날 이 산사나무는 고목으로선 보기 드물게

 나무 전체가 온통 열매로 뒤덮혀 있다.줄기도 다른 산사나무와는 달리 굵은 주름이 깊게 패여 있다.

마치 굴곡 많고 처연한 조선왕조 마지막의 기구한 운명을 보는 듯 하다.







서울 선농단 향나무

천연기념물 제240호


서민들의 음식 설렁탕의 유래를 간직한 선농단(先農壇).

지하철 1호선 제기역 1번 출구를 나와 안암동 쪽으로 잠시 걸어 올라가면 종암초등학교다.

어린이 놀이터와 붙어 있는 작은 숲이 선동단으로 성북동의 잠업 신을 모신 선잠단지(先蠶壇址)와 함께

우리나라 옛 농경문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지로 유명하다.

선농단은 성종 7년(1476)경에 만들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사방 4m의 4각형 제단만 남아있다.

조선왕조 내내 이어져 오던 친경례 행사는 마지막 황제 순종 3년(1909)에 폐지되고 말았다.







오늘날 유서깊은 이 유적지는 선농단을 중심으로 작은 숲이 겨우 보존되어 있다.

 한 뼘 굵기의 측백나무 40여 그루가 쓸쓸히 유적지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 숲의 남서쪽 구석에 있는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 아름 반 굵기의 향나무 한 그루가 500년 세월을 증언하고 있을 뿐. 수고 13.1m, 가슴높이 둘레 2.3m에 가지 펼침은

 동서 13.4m, 남북 14.2m 정도이다. 땅에서 약 3m 높이에서 가지를 옆으로 뻗기 시작해 위로 가면서 차츰 원뿔모양을 이룬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의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과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만났을 이 나무의 상징성은 결코 작은 게 아니다.

그러나 어린이 공원과는 亞자 철제 울타리 하나로 갈라진 게 전부인지라 무심히 들락거리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지 오래다.

대개 오래된 향나무는 구불구불 비틀어져 자라는 것과 달리 이 나무는 곧게 자란 모습이다. 아마도 여러 나무들과 같이 심어졌다가

키 키우기 경쟁에서 이긴 이 향나무만 살아남은 것으로 보이는데, 수 많은 수종 중 향나무를 선택한 것은 제사의식과 관련이 있다.

천지신명을 부르는 제사의식엔 반드시 향을 사르게 되어 있다. 그 재료가 바로 향나무이니 제단과는 궁합이 찰떡인 셈.


엄숙한 왕가의 행사와는 달리 선농단에서의 제사는 축제의 성격이 강했던 듯. 제수품을 넉넉히 준비하여 푸짐한 잔치가 되도록

배려한 것이다. 소를 잡아 큰 가마솥에 넣어 국을 끓이고,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지어 제사에 참여한 노인들은 물론 구경나온

농부들에게도 대접했다고 한다. 선농단에서 끓인 국은 잠시나마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어서 인기가 높다보니 자연스레 선농탕

(先農湯)이라 불렀으며, 부르기 쉽게 설롱탕이 됐다가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설렁탕으로 전개되었다는 전언이다.







여주 효종왕릉 회양목

천연기념물 제459호


여주 효종대왕의 능인 영릉 재실에 선 회양목 한 그루.

키 4.7m, 가슴높이 둘러ㅔ 63cm에 불과한 자그마한 회양목으로 나이는 300년, 지름을 나이로 나누어 계산해 보면

한 해에 불과 0.32mm의 몸 불림을 했을 따름이다. 회양목의 옛 이름은 황양목(黃楊木), 재질이 노르스름하여 붙은 이름이다.

아무리 오래 자라도 사람 키 두세 배 정도에, 손톱크기 남짓한 도톰한 잎사귀가 사시사철 달려있는 자그마한 나무다.

그러나 생명력이 왕성해 사람들이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 이리저리 잘라대어도 금세 가지를 뻗어내는 특성을 지닌다.


이 작은 나무가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등장한다.

까닭인 즉, 왕조시대의 회양목은 우리가 문화민족임을 만천하에 자랑할 수 있는 인쇄문화를 이끌어온 나무이기 때문이다.

회양목은 독특한 세포 구조를 갖고 있다. 세포의 크기가 가작 작고, 물관과 섬유의 지름이 거의 같은 유일한 나무라고 한다.

나무질이 곱고 균일하며 치밀하고 단단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고급 나무활자를 만드는 데는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었던 것.

구하기 쉽고 가공하기 쉬우면서 마치 상아나 옥에다 글자를 새겨둔 것과 다를 바 없는 품격 높은 재료이니 만큼,

왕의 옥새에서 부터 선비들의 낙관까지도 대부분 이 나무로 만들었다. 조선시대 회양목은 일반 백성들은 함부로 만져보기 어려운

 지체 높은나무였던 셈. 우리나라의 인쇄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도 바로 이 자그마한 회양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면 되겠다.


이 회양목은 재실의 앞마당 중문을 들어선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다.

땅 위 한 뼘 정도에서 둘로 갈라지고, 남쪽 줄기는 가슴높이에서 다시 둘로 갈라져 나무는 세 개의 줄기로 이뤄져 있다.

썩은 부분은 전혀 없고 가지가 사방에 고루 펴져 모양이 아름답고 고목답지 않게 잎사귀가 짙푸르고 싱싱하다.

이곳 재실에는 회양목 이외에 한아름 낮시한 향나무 한 그루와 에 아름에 달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같이 자라고 있다.

크기는 제 각각이지만 재실을 만들 당시 한꺼번에 심었을 것으로 보이니 모두 약 300년 정도로 짐작된다.







강화 갑곶돈대 탱자나무

천연기념물 제78호


. 역사관과 돈대 사이, 옛 성터로 추정되는 경사지 가장자리에

수백 년 풍상을 온 몸으로 견뎌낸 탱자나무 고목 한 그루를 만날 수 있다.

4.2m의 자그마한 키에 뿌리목 둘레 1m, 가지 펼침은 동서 7.9m, 남북 8.3m로 거의 둥그스름한 형태를 하고 있다.

뿌리목에서 세 갈래로 크게 갈라지고 올라가면서 또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줄기는 세로로 깊게 주름이 패어 있어서 지나온 세월의 이력이 짧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은 임란으로 왜군에게 철저히 당하고 인조 22년(1644)에는 제물진(濟物津)을 설치하는 등

뒤늦게 강화도 방위에 관심을 갖는다. 이후 목책을 치고 성을 다시 쌓아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

숙종 5년(1679)에는 강화도의 해안을 따라 이곳 갑곶돈대를 비롯하여 53개의 '돈대(墩臺)'를 설치하게 된다.

 탱자나무는 성을 튼튼히 해주는 보강 재료로 널리 쓰였다. 촘촘히 심어 가시울타리를 만들었던 것.

 가시를 뚫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일이 녹녹치 않기 때문이다.

하여 이런 성을 '탱자성'이란 뜻의 '지성(枝城)'이라 부르기도 했다.


기록은 없으나 돈대를 설치할 당시인 숙종 때 심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탱자나무의 수령은 약 330년이 되는 셈.

세월이 흘러 모두 없어지고, 아래의 천연기념물 79호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와 함께 이곳 탱자나무만 겨우 살아남았다.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

천연기념물 제79호 1962년 지정


서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막아주지 못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몇 차례 외과수술을 하였다.

썩은 부분을 완전히 제거하고 쇠약해진 곳을 보강하였으나 수관(樹冠) 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어서

 서쪽 가지는 완전히 죽고 동쪽가지는 지주로써 지탱하고 있다.

 뿌리 근처에서 돋아난 맹아(萌芽: 식물의 새로 트는 싹)가 자라기 시작하여 다시 곧추 크고 있다.







높이 4m, 밑둘레 1m, 수령은 약 400년이다.

땅 위 2.8m 높이에서 세갈래로 갈라져 용트림 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 

  4월이면 잎보다 지름 3~5cm의 흰꽃이 먼저 피고 열매를 맺는 가을이면 노랗게 탱자열매가 익는다.

이곳은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방한계선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자료에 의하면

북한 개성시 판문군 동창리에 1945년에 심은 탱자나무가 북한 천연기념물 382호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강화도가 탱자나무의 자람 터의 북방한계선이라 학설은 이제 수정되어야 할 터이다.








강릉 오죽헌 율곡매(栗谷梅)

천연기념물 제484호


오죽헌은 조선 초기 강릉 선비 최치운(1390~1440)이 창건한 건물로 손녀사위인 이사온에게 주었다가

 다시 그의 사위인 신사임당의 친정 아버지 신명화의 집이 된다. 신사임당과 셋째 아들인 율곡이 이곳에서 태어난 것이다.

신사임당이 태어난 1504년에 오죽헌 매화나무는 벌써 나이 100여 년을 헤아리고 있었고 율곡의 어린 시절 16세기 중반에는

벌써 150여 년을 헤아리는 고매(古梅)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처음 식재한 매화나무라면 지금은 물경 600년을 헤아린다.

하지만 지금의 율곡매는 그때의 매화나무가 아니고 맹아가 자라나온 아들나무나 손자나무 쯤으로 여겨진다.







연분홍 색감의 홍매(紅梅)를 피워내며, 매실의 크기가 거의 살구만 하다.

이파리도 토종 매화 보다 크며, 목질부의 형태도 상당히 다름을 볼 수 있다.

꽃의 품격 등 여러 정황상 개인적인 소견을 피력하자면.

 이 '율곡매'는 토종이라기 보다는 중국에서 들여온 당매(唐梅)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영월 청령포 관음송

천연기념물 제349호




청령포는 남한강의 상류인 서강이 자라목마냥 물 돌림을 하는 곳으로 단종의 유배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1457년 6월 28일 임금 자리에서 쫒겨난지 2년 4개월여 만에 어린 단종은 군사 십여 명과 시녀 몇 명을 대동, 이곳에 귀양을 온 것.

청령포 솔숲 서편 가장자리 쪽으로 조금 비켜서서 관음송이란 타이틀의 소나무 한 그루가 주위의 다른 소나무를 압도하는 기세로

우람하게 자라고 있다. 관음송(觀音松)은 단종의 비참한 말로를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 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소리 음(音)' 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곳에 올 때 그의 나이 17세로 그에게는 남달리 금슬 좋은 왕비가 있었다.

재위 2년째인 1454년 1월, 14살의 오션 단종은 한살 연상의 정순왕후를 맞아 혼례를 올린다. 그가 청령포에 유배되고 난 뒤 왕비는

평민으로 당등되어 원치 않는 삶이었지만 여든 두해를 더 살았다. 그러나 죽어서도 만나지 못하고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思陵) 이란 무덤에 묻히는 것으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한다.


 귀양온지 4개월 남짓, 그해 9월에 일어난

산 넘어 경상도 순흥부의 금성대군 역모사건을 핑계로 세조는 어린 조카를 영겁의 세계로 떠나 보낸다.

10월 24일, 청령포의 홍수로 영월 현청에 있던 관풍헌(觀風軒)에 머물던 단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


관음송은 키가 자그만치 30n로서 웬만한 고층아파트에 버금가는 높이다.

가슴높이 둘레 역시 5.2m로 세 아름이 넘는다. 땅위 1.5m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갈라진 줄기 둘 다 가지를 별로 매달지 않고 거침없이 더 높은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았다.

 소나무의 붉은 표피는 마치 비명에 간 단종의 원혼이 배어 나오는 듯하다.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 솔숲

천연기념물 제473호


마을의 서북쪽 강가 모래톱의 솔숲으로 조선 선조 때의 문신 류운용(1539~1601)이 강 건너 부용대 절벽의 거친 기운을 누르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해 조성하였다는 인공림이다. 소나무 일만 그루를 심고 숲속에 만송정(萬松亭)이란 정자를 함께

지었다고 전한다. 류운용은 선조 때 풍기군수를 지냈으며 동생인 서애 류성룡과 함께 하회마을의 기틀을 잡은 인물이다.

여기서 일만 그루 소나무란 숫자 일만이 아니라 많이 심었다는 의미로 실제로는 약 일천 그루 정도 심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거의 없어져 버렸으며, 지금의 솔숲은 1906년에 다시 심은 것들이다.

수령은  일백 년 전후로 보이나 몇 그루는 150년에 이르기도 한다.


해마다 음력 7월16일 한 여름밤이면 이 숲과 부용대 절벽 사이의 강에 하회마을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하회줄불놀이'를 이어왔다. 배를 띄우고 건너편 숲에서 부용대 꼭대기까지는 네 가닥의 밧줄로 잇는다.

수 백 개의 참나무 숯에다 불을 붙여 줄에 태워 내려 보매면 불빛이 강물에 어리어 일대 장관을 이룬다.

아울러 불붙인 솔가지 묶음을 절벽 아래로 내던져 불꽃이 폭포처럼 떨어지면서 모두가 '낙화야!'를 외친다.

'달걀불'이라 부르는 등불을 상류인 겸암정 앞 형제바위에서 띄워 내려 보내면

불빛이 강물에 아롱대며서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경주 독락당 조각자 나무

천연기념물 제115호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조금 윗쪽에 자리한 독락당(獨樂堂) 내부에 자라는 조각자나무 한 그루.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33)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심은 470년 수령의 나무이다.

수고 14.5m, 뿌리목 둘레 5m, 가지펼침 동서 16.4m, 남북 16m에 이른다. 조각자나무는 우리나라에 자라지 않는 중국산 수입 나무다.


특별히 이 나무를 심은 까닭은 거의 만병통치 수준의 약성을 내재한 때문이다. 회재의 이력을 보면, 50대 초반에 몸이 아파

관직을 여러 번 사양한 적이 있고, 벼슬살이 동안에도 자신이나 어머니 모두 병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낙향할 때가 41살의 장년이었지만 약으로 널리 쓰이는 조각자나무를 찾아 심을 만큼 건강에 신경 썼던 모양.

덕분에 칩거 5년 후 김안로가 죽자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20년에 걸쳐 요직을 두루 섭렵한다.





나무 밑 둥치에 우레탄 수지가 채워진 모습으로 이 나무를 어디서 구해다 심었는지에 대한 이력은 모른다.

조각자나무는 콩과 식물로 잎사귀는 언뜻 아카시나무 잎과 비슷하게 보인다.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도 나무껍질은 매끄럽고 평안하다.

그러나 줄기 아무데서나 갑자기 솟아오른 섬뜩한 가시를 보면 그 험상궂음에 크게 놀라게 된다. 가시를 한 번 내민 것으르로 성이

차지 않아 가시 자체가 두 번 세 번 가지치기를 한다. 『동의보감』에는 부스럼을 터지게 하고 문둥병에도 좋은 약이 된다고 했다.

조협(皁莢)이라는 열매 역시 '뼈마디를 잘 쓰게 하고 두통을 낫게 하며 가래를 삭이고 기침을 멈추게 하나.' 고 했다.

세종 때 명의들이 모여 저술한 『향약집성방』에는 조각자나무와 아주 닮은 나무로 우리나라 토종 주엽나무가 있으며

가시와 열매를 약재로 한 처방전이 100여 가지에 이른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이다. 


회재는 불행히도 '양재역벽서사건(1547)'에 연루되어 57세에

북한 자강도 강계로 유배되고 만다. 그리고 찬바람 드센 객지 강계 땅에서 6년을 더 살고 꿈에 그리던 독락당도,

조각자나무도 영영 만나지 못한 채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의령 곽재우 장군 생가 현고수 ·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493호


마을 앞에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서 있는 세간리 느티나무다.

현고수는 북을 매다는 나무라는 뜻으로, 평화롭게 북치고 장구치는 놀이용이 아니라 금방 적의 섬멸을 독려하는

전쟁터의 북소리가 연상된다. 북소리는 젊은이들에게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의분을 들끓게 했을 것이다.

높이 5m 남짓에서 갑자기 굵기가 가늘어 지면서 곧추서는 줄기는 동쪽으로 거의 수평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언뜻 보아 전체적인 모습은 ㄱ자 형태이다. 원래 나무줄기는 중력과 같은 방향으로 자라면서

중심을 잡기 위해 가지만 옆으로 뻗는다. 그런데 이 현고수는 자연의 이런 법칙을 따르지 않았다.

나무의 키는 20m, 가슴높이 둘레 8.4m, 가지 펼침은 동서 16n, 남북 15m 정도로 줄기의 대부분은 우레탄 수지로 채워져 있다.

나무 생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인공충전물은 고목이 품위를 떨어뜨리는 주범이다.

수령은 적어도 500년 이상으로 짐작된다. 현고수 옆에는 장군의 생가가 있었다고 하며, 아버지 곽원(郭越)이 지었다는

용연정(龍淵亭)이 근년에까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곽재우 장군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2호


현고수가 자라는 마을 반대편 뒤쪽으로 복원된 곽재우 장군 생가 널찍한 앞마당에 서 있다.

의령 세간리 마을은 명종 7년(1522) 곽재우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1592년 4월 22일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으기 시작하여 자형인 허언심과 함께 가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했다. 잘 훈련된 곽재우 장군의 의병은 왜적에 용감히 맞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수고 25m, 가슴높이 둘레가 9.1m 나 되며 가지 펼침은 동서 23m, 남북 19m 정도다 높이 2m쯤 되는 곳에서 3개의 큰 가지로

갈라지며 다시 올라가면서 6개의 가지로 갈라져 대체로 곧추선 형태인데 웅장하고 멋스럽게 다가온다.

나무 수령은 약 500~600년으로 현고수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은행나무에도 두 개의 유주(乳柱)가 달려있는데,

다른 은행나무와 달리 여인의 유방을 꼭 닮은 것으로 유명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늘어지고 나무 옆 민가에 불이 날 때

일부가 타버린 탓으로 반쪽을 합성수지로 채워 넣었는지라 이제 더 이상 옛 모습을 기대하긴 어렵다.








함양 학사루 김종직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제407호


김종직(1431~1492)은 조선 전기의 대 학자이자 개혁정치를 시도했던 인물이다.

성종 1년(1470)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임금께 청해 함양군수로 부임해 1475년까지 재임 5년 동안 새로 차밭을 만드는 등

백성을 위해 정성을 쏟았으나 개인적으론 훗날 부관참시를 당하는 불행의 씨앗을 잉태했고,

어린 아들의 주검을 맞는 가슴앓이도 겪었다.


함양군청 길 건너에 '학사루'라는 누각이 있다. 원래 동헌 앞에 있었으나 지금의 장소로 옮겨진 것이다.

조선 초기 야사를 적은 『디동야승(大東野僧)』중 '동각잡기(東閣雜記)' 상권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군수로 재직하던 어느 날, 김종직이 학사루에 올라 유자광의 시 한 수가 적힌 편액을 보는 순간 얼굴빛이 변했다.

그는 유자광의 편액을 당장 떼어내 불태워 버리라 명한다. 출신이 천하고, 남이 장군을 역모로 모함했다고 해서

김종직은 평소 유자광을 멸시하고 있던 터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유자광은 원한을 품고 세월을 기다린다.


두 사람의 이런 갈등은 훗날 연산군 때 유자광이 조의제문을 빌미로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한 원인이 된다. 함양군수 임기가

끝나갈 무렵 5살짜리 아들을 홍역으로 잃는다. 그 슬픔이 『점필재집』에 실려 있다. 다음 해인 1475년, 정3품 통훈대부로

승진하여 함양을 떠난다. 떠나면서 그는 학사루 앞에 천년을 사는 느티나무 한 그루를 정성껏 심고 시름을 달랬던 듯.


그로부터 세월은 500년을 훌쩍 넘겨버렸다. 나무의 키는 22m, 가슴높이 둘레 7.3m, 가지펼침은 동서 24.5m,

남북 25.1m에 이르는 거대한 나무가 되었다. 현재 동헌과 객사는 모두 사라져 버리고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특이한 점 하나는 뿌리목 가까이의 판근(板根)이 마치 열대지방의 나무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부산 좌수영 터 곰솔 · 푸조나무

천연기념물 제270호


 이곳은 조선시대 좌수영(左水營)이 있던 성터로서, 고종 32년(1895) 폐영될 때까지

경상좌도 해군본부가 있었던 곳이다. 성은 둘레 2.8km, 석벽 높이 4m, 3개소의 우물과 4대문 등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폐허가 되고, 성벽 일부와 남문, 홍예문, 배수구 등만 남아있다. 지금은 수영공원이란 이름으로

 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 옛 병사들의 애환이 서린 곰솔과 푸조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곰솔은 키 23.6m, 가슴높이 둘레 4.5로서 장정이 감싸 안아도 세 아름이나 된다. 가지의 펼침은 동서 23.4m,

남북 24.2m 가량이며, 주위의 다른 곰솔들과 가지뻗음 경쟁으로 키에 비해 그렇게 넓게 뻗지는 못했다.

 나무 옆으론 허름하기 짝이 없는 당집 하나가 붙어 있다








부산 좌수영지 푸조나무

천연기념물 제311호


푸조나무는 남서해안을 따라 경기도까지 올라오는 난대성 나무다.

대부분의 나무는 소금기가 섞인 바닷바람을 싫어하지만 이 푸조나무는 소금기를 잘 견디는 대표적인 수종이다.

당연히 갯냄새가 풍기는 바닷가에 서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 푸조나무는 땅에서 1.2m 높이에서 크게 둘로 갈라지는데

한 나무인지 아니면 가까이 자라던 두 나무가 서로 연리된 것인지 명확치 않다. 15.5m 남짓의 그리 크지 않은 키에

가슴높이 둘레는 6.3m나 되는 굵은 나무다. 가지펼침은 동서 15.6m, 남북 14.9m 정도이고,

나이는 약 500년으로 짐작된다.








해남 녹우당 비자나무 숲

천연기념물 제241호


녹색의 대장원 녹우당 덕음산에 서식하는 비자나무는 약 4~5백 그루에 이른다.

숲의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우나 굵기로 보아 나무의 수령은 200~300년 생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녹우당 뒷편에서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400m 쯤 올라가야 본격적인 비자나무숲을 만날 수 있다.

길목에는 근자에 심은 편백을 비롯 소나무와 곰솔이 큰 무리를 이루고, 특히 사스레피나무가 많이 자람을 볼 수 있다.

비자나무는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소나무 등 다른 나무들과 띄엄띄엄 섞여 자란다.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다.

제주에서 시작하여 전남 장성 백암산 까지가 생장 한계선으로 알고 있다. 난대림 수종이라는 얘긴데,

나무가 품어내는 독특한 향기에다 관상 가치는 물론 목재의 쓰임새에 있어서도 가히 최고로 평가 받는다.







제주 산천단 곰솔

천연기념물 제160호


제주도는 탐라국 시대부터 한라산 백록담 북쪽 기슭에서 제사를 올린 것으로 짐작되는데,

고려 고종 40년(1253)에 나라가 주관하는 제례로 발전했고, 조선왕조에 들어서는 부임하는 제주 목사마다 매년

백록담에 올라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헌데 문제는 제수용품과 많은 수행원을 데리고 백록담까지 올라가는 일이었다.

산길이 험해 날씨가 궂으면 죽는 사람까지 생겨났기 때문이다.


성종 1년(1470) 목사로 부임한 이약동(李約東)은 이런 병페를 절실하게 느끼고 제사 문화의 일대 개혁을 시도한다.

 그는 훗날 목사 자리를 떠날 때 말채찍이 관아의 물건이라 하여 성문 누각에 걸어놓고 갔을 만큼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목사 재임 3년째인 성종 3년(1472)에 세금 감세와 더불어 한라산 산신제의 폐단을 임금께 고하고 허락을 얻어낸다.

지금의 산천단에다 제단을 옮긴 것이다. 그는 진짜 청백리 목민관이었던 것이다.

그는 훗날 이조참판에 오르기도 했다.









산천단을 만들면서 자연히 주변을 가꿀 조경수가 필요했다.

선택된 나무는 바로 억센 바닷바람과 맞서서도 굳건히 살아가는 해송이라고도 불리우는 곰솔이었다.

소나무의 4촌쯤인 이 곰솔은 소금기 섞인 짠물이 들락거리는 모래사장도 아랑곳 않을 만큼 강인한 수종이다.

현재 이곳에는 그 때 심은 곰솔 중 살아남은 8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키와 굵기가 제각각이지만 8그루 모두 두 아름이 넘는다. 키 21~37m, 가슴높이 둘레 3.5~6.9이며,

8그루의 평균 둘레 4.4에 이른다. 나이는 산천단 설치 당시 심은 것으로 보면 약 540년 정도이다.

맨 안쪽에 있는 나무가 가슴높이 둘레 6.9m로 가장 굵으며, 바로 옆에 있는 나무는

 키 37m로 우리나라 소나무 종류 중에서 가장 키가 크다.






이약동 목사 기적비








제주 옛 정의현청 느티나무 · 팽나무

천연기념물 제162호


먼 옛날부터 오랫동안 탐라국이라 불리던 제주는 고려의 압박을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통합되고 만다.

이후 조선 태종 16년(1416),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한라산을 경계로 북쪽은 제주목으로 하고 남부는 동쪽에 정희현,

서쪽에 대정현을 설치한다. 성읍 민속마을은 정의현 현감이 머물던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군청 소재지쯤 된다.

본디 이곳은 울창한 숲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고목나무 8그루가 지나온 세월의 흔적을 겨우 말해주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느티나무 1그루가 띄엄띄엄 흩어진 7그루의 팽나무를 거느리고 있는 형국이다. 느티나무는

키 20.5m, 가슴높이 둘레 4.3m, 가지펼침은 동서 28m, 남북 22m 정도이다.


 팽나무는 키가 작은 것은 14.5m에서

큰 것은 23.5m에 이르고 가슴높이 둘레는 2.4~5m, 가지 펼침은 나무마다 차이가 나며 대체로 11~29m정도에 이른다.


나무마다 나이가 다를 것이나 대체로 대정현을 설치할 당시에 심은 것으로 보아 600년쯤으로 짐작한다.

비교적 습도가 높은 곳이라 밑부분은 콩짜개난으로 덮인 나무가 많고 때로는 송악이 나무를 타고 높이 올라가 있기도 하다.

아왜나무, 후박나무와 동백나무도 주변에 같이 섞여있다. 개개의 나무마다 나지막한 돌담이 둘러 쌓여있고 주변은 모두

음식점으로 쓰이는 민가이며 마을의 가운데는 2차선 도로가 나 있다. 포장도로는 수분 침투를 막는다.

생육에 지장이 있음은 당연하다. 고목나무가 삶을 이어가는 데는 최악의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인용서적 : 박상진 저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







Elegy - Jethro T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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