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용문사 마의태자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호


이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목 은행나무로

  거의 14층 아파트에 버금가는 41m 정도이고,  나무 둘레는 자그만치 11.2m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다.

이는 우리나라에 자라는 모든 나무 중 최대 크기에 해당한다. 마의태자의 전설을 품고 있거니와 전설 이외에도 여러 신비스런

얘기들을 내재하고 있는 은행나무이다. 암은행나무로 일천 년을 지난 지금도 은행이 수 없이 매달린다.

가까이서 보면 그 위엄에 자못 주눅이 들 정도로 엄청난 덩치에 압도 당할 수 밖에 없다.








예산 추사 김정희 백송

천연기념물 제106호


현재 우리나라에 자라는 백송은 대부분 조선시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온 사람들이 가져와서 심은 것이다.

 추사는 어린 시절 백송을 보며 자란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사위가 되면서

지금의 통의동 정부종합청사 뒤편의 '월성위궁'이란 대 저택을 하사 받는다.


이곳은 원래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곳으로 정원 한 구석에 숙종때 심어진 백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호 지정되었던 것인데 1990년 7월 불어닥친 돌풍에 맥없이 쓰러져버렸다.

이 나무의 나이테를 조사한 결과 1690년쯤에 식재된 것으로 밝혀졌다.


추사는 돌아오자마자 예산의 본가 고조할아버지 김홍경의 묘를 참배하고, 북경에서 가져온  백송을 심는다.

머나먼 길에 묘목을 가져왔을리 만무하고 솔씨를 가져다 심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몇 개체 심었을테지만

지금은 딱 한 그루 살아 남은 것. 이 백송의 나이는 200년인데 사진에 보는바와 같이 비쩍 말랐다.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65호 


 보석사(寶石寺)로 들어가는 입구 산 비탈에 서 있으며 나무의 나이는 1,000년으로 추정된다.

 높이 40m, 가슴높이 둘레 10.4m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서 25m, 남북 29m.

조구대사가 보석사 창건(886년) 무렵 제자와 함께 심었다고 전해오는데,

노거목의 위용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나라에 변고가 있거나 마을에 재앙이 닥칠 때, 울음소리를 내어 재난을 알려주는 신목이라 해서

 매년 경칩에는 나무 앞에서 다신제를 지낸다.







천안 광덕사 류청신 호두나무

천연기념물 제398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호두나무로 천안 광덕사에 자란다.

고려 말 원나라와 고려의 외교관계가 어수선할 때 몽골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역관 유청신(柳淸臣)이란 문신이

원나라에서 이 호두나무 묘목과 열매를 가져왔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그때 심었다는 나무가

광덕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보화루 앞을 비롯하여 절 안에 몇 그루 자라고 있다

그리하여 이 일대는 호두나무를 처음 심은 곳이라 해서 '유청신 호도 서식지'라 칭한다.





 

호두 시배지 표지석








삼척 공양왕 음나무

천연기념물 제363호


삼척에서 울진쪽으로 20여km 내려간 근덕면 궁촌리(宮村里) 마을 뒤편 작은 실개천 가에 가슴높이 둘레 5.4m,

거의 네 아름에 달하고 키는 20m에 이르는 엄청나게 큰 음나무로 나무 나이는 족히 700년을 넘는 것으로 본다.

이 음나무 앞이 공양왕이 잠시 머문 집의 마당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벽사의 의미가 큰 음나무에 공양왕은 삶의 마지막 희망을 걸어 보았으리라는 추정이다.


그러나 그는 음나무의 효험을 보지 못한 채 474년 34대를 이어오던 고려왕조의 마지막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실록에 이성계가 보낸 저승사자가 '교살(絞殺)시켰다' 라고 했다. 혹 이 음나무에 밧줄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죽임을 당한 장소에 묘소를 만든것이 지금의 공양왕릉이라는데 또 하나의 공양왕릉이 경기도 고양시에도 있다.

아무튼 음나무와 궁촌리라는 지명에다 공양왕릉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역사적 비극의 현장임엔 틀림 없다.








의성 사촌리 류성룡 가로숲

천연기념물 제405호


평야를 가로지르는 말 그대로의 '기다란 가로숲'으로 방풍림이다.

명당임을 보증이라도 하듯 서애 류성룡을 비롯해 이곳 출신 50여 명이 높은 벼슬에 올랐다고 한다.

3정승이 배출되는 길지라는데 아직 한 사람의 정승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






의성 사촌리 가로숲


가로숲 가운데로 작은 개울이 흐른다.

숲의 나무는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회화나무, 근래에 심은 전나무 등 10여 종이다.

갈잎나무가 대부분이므로 사계절의 느낌이 언제나 새롭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제 분수대로 자람을 이어가는 곳이다.







대구 도동 서거정 측백나무숲

천연기념물 제1호


모두 1,150여 그루의 측백나무가 굴참나무, 느티나무, 굴피나무, 물푸레나무 등과 혼재되어 자란다.

이중 500년 이상 된 측백오 160그루나 된다고. 흙 한 점 없는 바위틈에 버티느라 천 년을 살고도

지름은 겨우 10~20cm에 이르는 나무가 대부분으로 간히신 생명만 부지한 채 긴긴 세월을 살아 온 것이다.

본디 측백은 중국에서 들어온 수입나무로 알았지만 이곳 자생지가 확인됨으로서 순수 토종 측백나무임이 밝혀진 것.

절벽 앞르로는 깊은 개울이 흐르고 대구에서 영천,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기에 길손들의 쉼터가 되기도 한다.


이곳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거정)1420~1488)의 시문집 『사가집(四佳集)』에 북벽향림(北壁香林)으로 등장한다.

고향 대구 일대의 경치가 좋은 열 곳을 대상으로 <대구 십경>을 노래했는데 제6경이 바로 북벽향림이다.

물론 그가 말한 삼나무는 바로 측백나무를 뜻한다. 이 측백수림은 일제에 의해 천연기념물 1호라는 영예가 주어졌다.


숲 아래 평지에는 관음사라는 고찰이 있고, 그 옆 절벽 가까이 구로정(九老亭)이 있다.

선비의 곧은 기품을 논할 때 흔히 쓰는 송백(松柏)의 '백'은 측백나무와 잣나무에 같이 쓰이고 있는 글자이다.

대체로 중국 사람들이 송백이라면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가리키고, 우리나라 자연을 노래한 시에 나오는 송백은

소나무와 잣나무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중국 본토에는 잣나무가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함양 상림

천연기념물 제154호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문장가 고운 최치원(857~?)은 당나라에 유학  약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황소의 난'을 토벌한 격문 한 장으로 문명(文名)을 드날리다가 헌강왕 10년(885) 28세의 나이로 귀국길에 오른다.

6두품에 불과한 그의 신분상승은 한계에 다다르고 신라 국정에 실망 외직을 자청,  태인, 정읍, 서산을 거쳐

이곳 함양태수로 봉직한다. 그가 처음 시작한 작업은 하천을 다스리는 토목공사였다고.


읍을 가로지르는 위천에 둑을 쌓아 물길을 돌리고 백성을 동원하고 직접 선두에 나서 둑을 완성한다.

허나 둑 만으로 만족할 순 없었을 터. 큰 물이 지면 버틸 재간이 없었기에 당시로서는 획기적이고 과학적인 둑 강화에 나서

하천 뒤쪽으로 나무를 심고 둑을 보완하는 호안림(護岸林)을 조성한 것이다. 현재의 상림은 그렇게 조성된 결과.


평지에 이렇게 넓은 숲이 남아있는 곳은 이곳 말고는 흔치 않다. 숲의 구성으로는 졸참나무를 비롯, 참나무 종류가 많고

개서어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등이 어울려 자란다. 작은 나무로는 산초나무, 생강나무, 작살나무, 국수나무 등이 있다.

120여 종에 2만여 그루의 나무가 나름대로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남해 대벽리 이순신 장군 왕후박나무

천연기념물 제299호


이 나무를 '이순신 나무'라 부르는 것은 임란 때 장군이 왜군과의 전투 틈틈이 병사들과 함께 쉬어갔대서이다.

왕후박나무는 우리나라 남부해안을 대표하는 늘푸른나무로 후박나무와 쌍둥이만큼 닮은 가까운 사이다.

둘은 너무 비슷해 잎이 조금 더 넓은 것을 '왕'이란 접두사를 붙인 것이다.


나무는 밑동에서부터 작게는 함 뼘, 굵은 것은 두 아름에 이르는 11개의 줄기가 모여 한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

이것들이 밑으로부터 올라오면서 비스듬히 사방으로 뻗어 커다란 버섯 갓 모양을 만들어 낸다.

전체 뿌리목 둘레는 11m이고 키는 8.6m이다. 나무의 나이는 임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군사들과 쉬어갈 정도였고

뿌리목의 엄청남 굵기로 보아 적어도 500~600년 이상으로 짐작된다고.







장수군청 논개 의암송(義岩松)

천연기념물 제397호


키가 9m, 가슴높이 둘레 3.2m, 가지 펼침 동서 11.5m, 남북 14.5m로 동서보다 남북이 약간 더 넓게 뻗어있는,

어째보면 그저 평범한 소나무인데 '의암송'이라는 타이틀이 말해 주듯 가슴 아린 임란의 흔적을 간직한 나무이다.

왜군들이 진주성을 함락하고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 자리에서 논개는 왜장을 유인하여 남강에 빠져죽는다.


논개의 이러한 숭고한 행적은 『어우야담』이란  책에 실림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다.

이후 논개의 바위는 '의암'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논개는 이곳 장수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망나니 삼촌에 의해백치에게 민며느리로 팔리고 만다. 이 문제로 논개는 관아에 고발을 당했지만 현감은 무죄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던 논개 모녀를 현감 부인이 거두어 살림을 돕는 드난살이를 시킨다.

그러던 중 정부인 김씨가 몸이 약한 나머지 남편 보살핌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면서

논개에개 부탁을 하면서 그의 부실(副室)로 들어간 것.








흔이들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되고, 햇볕에 바라면 역사가 된다' 고 말한다.

논개 이야기는 전설이고 최경회의 행적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기에 정확하게 맞아들어가기는

 애초부터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다.


현감의 총애를 받던 논개는 관아의 뜰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아니 애당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소나무였는지도 모른다. 전설대로라면 이 소나무의 나이는 420년을 헤아린다.

두 아름이나 되는 의암송의 줄기는 바닥부터 시계방향으로 목리가 약간 비틀어졌다가, 높이 1m쯤에서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

똬리를 틀듯했다. 진주 의암에서 연약한 허리로 왜장을 껴안고 푸른 남강에 뛰어드는 순간이 오버랩 되는 것이다.

또 줄기의 동편 가장자리에 불룩 돋아있는 굵다란 혹 역시 논개의 한이 서린 듯 범상치 않아 보인다.







담양 한재초교 이성계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제 284호


이성게는 왕위에 오르기 전 나라 이곳저곳의 유명산을 찾아 제사를 올렸다.

그의 행적을 좇다 보면 손수 심었다는 나무가 여럿 있다.  당시의 기돗빨(?) 덕인지 몰라도  어쨌던 그는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찾은 산 가운데 유일하게 광주 무등산 산신만은 소원을 거절했다고 한다. 화가 치민 그는 무등산 산신을

 멀리 지리산으로 귀양 보내고, 무정한 산이라해서 한 때 무정산(無情山)으로 이름을 바꿔버리기도 했다.


역사는 반복이라고 했다. 600년 뒤 나라의 혼란기를 틈타 권력을 탈취한

소위 5공 실세 신군부에게도 무등산을 또 한번 고개를 돌려버린다.










 돌아가는 길에 이성계는 이곳 담양 한재초등학교 뒷편 삼인산에 올라

멀리 무등산을  노려보며 산신께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리고 사진상의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은 것.

 당장이 아닌 훗날에라도 소원을 들어달라는 주문도 함께였을 터.


전설대로라면,  이 느티나무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300년대 후반일 터이고,

수령은 600년에 이른다. 나무의 크기는 키 34m, 가슴높이 둘레 8.8m로 장성 여섯 사람이 팔을 뻗쳐야 감싸 안을 수 있다.

가지 펼침은 동서 29.2m, 남북 25.4m에 이르는데 거대한 덩치와 어울리는 넓은 운동장이 나무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느티나무 옆으론 다소 거칠지만 소박한 형상의 석불 한 기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 땅 속에 묻혔있던 것을 마을 사람 누군가의 현몽으로 파 낸 것이라는데,

 양식 상 후백제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느티나무와 함께 불교와 토착신앙이 어우러졌음을 짐작케 한다.







진안 마이산 은수사 청실배 나무

천연기념물 제386호.


청실배나무는 산돌배나무의 변종으로 지금의 개량 배나무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네 전통 배나무였다.

청실배는 일찍 익으며 처음에는 푸른빛을 띠지만 따다 두면 차츰 노랗게 되고 즙이 많아 감칠맛이 일품이다.







서기 1380년 지리산 운봉의 넓은 들에서 이성계가 이끄는 군사들과 왜구의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이성계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백성들의 환호와 대권의 디딤돌을 마련한 그는 곧장 송도로 가지 않고

이곳 마이산으로 왔다고 한다. 그리고 다녀간 증표로 수마이산 아래 자리한 은수사 마당에 청실배나무를 심는다.

이 나무가 조선왕조 내내 극진한 보호를 받았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키 15m, 가슴높이 둘레 2.8m, 가지 펼침 동서 12.7m, 남북 13.4m에 이른다.

나무가 옆으로 퍼진 게 아니라 솟아 올랐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담양 이도령 관방제림(官防堤林)

천연기념물 제366호


관방제림은 영산강 상류인 담양천을 따라 펼쳐진다.

숲은 객사리와 남산리 일대의 읍을 감돌아 흐르는 담양천 제방을 따라 길게 조성되어 있다.

굵은 나무가  자라는 실제 숲의 길이는 1.2km 남짓으로 고쳐 쌓은 둑에 나무를 심은 것으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1648년 담양부사로 있던 성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재미있는 사실은 성부사가 바로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도령의 실제 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는 것.

아버지 성안의가 남원부사를 하던 시절 춘향과의 로맨스가 맺어진 것으로 추정한다는데...


한때 이 숲에는 700여 그루의 나무가 심어졌으나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혼란기를 틈타 크게 파괴되어 버렸다.

몇 번인가의 제방 정비와 나무 다시 심기를 통해 지금은 약 300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굵은 나무는 대부분 푸조나무다.


그런데 이곳이 관광명소가 되다 보니  많은 인파의 행렬에 제방 땅이

너무 심하게 다져져 나무의 자람에 지장을 주고 일부 사람들에 의해 고목이 조금씩 훼손되어 간다.

보존과 쉼터의 적절한 조화을 모색할 때다.







화순 야사리 김삿갓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3호


 김병연(1807~1863)은 과거시험에 적어 낸 답안이 자신의 선조를 욕보였음을 뒤늦게 알고

그 충격으로 방랑길에 올라 세상을 마음껏 조롱하다 이곳 화순땅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천재 시인이다.

천하절경 적벽으로 가는 길목, 오늘날의 화순군 이서면 소재지가 있는 야사리에 자리한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방랑시인 김삿갓을 추억케 한다.


이 은행나무는 조선 성종때 마을에 사람이 처음 들어오면서 심은 나무라고 전해지니 지금 나이는 약 500년에 이른다.

키 27m,  가슴 높이 둘레가 자그마치 여섯 아름(9.1m)에 이른다. 이런 거대한 덩치의 은행나무가 개울 가장자리 민가 앞마당의

좁디좁은 공간을 겨우 할해해서 힘겹게 살아간다. 더군다나 종자도 맺어야 하는 암나무인지라 힘이 더 부칠 게 분명.

가치 펼침은 동서 24.3m, 남북 27.7m이니 잂과 가지가 차지한 공간이 살아가는 땅 넓이 보다 훨씬 넓고 크다.








유주(乳柱) 모양이 영락없는 거시기 형상이요, 너무도 사실적인지라 다소 민망할 정도다.

이 나무는 오랫동안 마을의 당산목으로 섬겨왔다. 들리는 얘기론 나라에 무슨 변고가 있을 시

우는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그냥 지나가는 바람소리려니 여기는 게 적절할 생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를 일, 혹여 통한의 생을 근처에서 마감한 김삿갓의 곡 소리 일런지도...









광양 옥룡사지 도선국사 동백숲

천연기념물 제489호


『도선비기(道詵祕記)』와 풍수라...

나같은 조선의 천학비재 들을 바람 맞히고, 물까지 먹인 도선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을 터.


광양 백운산 자락 옥룡사지는 국사 도선이 35년 동안

 미련한 이 땅 중생들을 맘껏 희롱하고 극락으로 돌아간 멋진 처소이자 그야말로 수승한 길지.







지하의 도선을 끌어내어 멱살을 잡고 재차 묻고 싶다.


"증말 명당이라는 게 있기는 있는감유~~~?"







이자리에서 발굴한 석관 속 도선은 뼈다귀 채 물속에 잠겨 있었다는데,

도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이치에 맞는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 노릇.







이천 도립리 반룡송(蟠龍松)

천연기념물 제382호


반룡이란 아직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땅위를 맴도는 일종의 이무기를 뜻한다.

땅위 약 2m에서 위로 향해 마치 굵은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기묘한 모습으로 아쉬운대로 용의 이미지가 느껴진다는데.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뱀솔이 이 나무에 더 잘 어울린다는 평. 키 4.3m, 가슴높이 둘레, 1.8m정도이다.

가지 펼침은 사방 12m로 원반모양을 하고 있으며, 옆으로 뻗어있는 가지가 땅에 닿지 않도록 받침대를 괴고 있다.

언뜻 한 나무처럼 보이나 지름 10cm남짓한 작은 소나무 한그루가 같이 자라고 있다.






도선국사가 심었다고 전하는데 전설대로라면 나이는 일천 년이 훨신 넘는다.

허나 나무의 크기나 지름으로 봐서는 나이를 아무리 올려 잡아도 300년 남짓이다.

그냥 도선이 심은 소나무의 증손이나 현손 정도로 여기는 게 깊은 뜻을 엿 볼 수 있다.







강진 병영 하멜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85호


조선 효종 4년(1653)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은 동인도회사 무역선 서기로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고 있었다.

8월 중순 타이완을 출발한 배는 태풍을 만나 제주도 대정읍 해안으로 떠밀려 온다. 그는 이후 정확하게 13년 28일간

서울, 강진, 순천, 여수 등으로 끌려다니면서 억류생활을 했다. 그러다 현종 7년(1666) 9월, 여수에서 일본으로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간다. 하멜은 억류기간 밀린 월급을 받기위해 그 동안 조선 생활을 기록한 『하멜 보고서』를 쓴다.


우리에게 흔히 『하멜 표류기』라고 번역된 그의 저서는 폐쇄국가 주선을 서구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억류 기간 중 그는 전남 강진군 병영에서 7년을 살았는데, 나무 밑 고인돌에 걸터앉아

뼈에 사무치게 고향을 그리워 했다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키 32m, 가슴높이 둘레 7.2m, 가지 펼침 동서 24.9m, 남북 23.1m의 거대한 수나무이며

땅에서 5m 정도 높이부터 많은가지가 퍼져 아름다운 수형을 만들고 있다.

나무 나이는 약 600여 년 정도로 볼 수 있다.







강진 삼인리 비자나무

천연기념물 제39호.


높이 10m, 가슴 높이 둘레 5.2m이다. 가지는 동서 15.m, 남북으로 14m 정도 퍼져 있다.

 나무의 나이는 약 400년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남쪽으로 20km쯤에는 268호 푸조나무, 이어 관산읍에는 356호 효자송,

 4km쯤 더 내려와서는 482호 후박나무, 강진반도 끝에는 172호 까막섬 상록수림,

다시 강진읍으로 올라오다 청자박물관 옆 35호 푸조나무 등을 만날 수 있다.



인용도서 : 박상진 著 『우리 문화재 나무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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