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조선 '도시'에 녹아들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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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격동의 조선 '도시'에 녹아들다 2

茶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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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엮어낸 『도시로 읽는 조선』을 옮겨 본 것이다.


<3장>


고을을 누빈 관찰사 전주 감영에 깃든 역사


 김경숙


「전라도」,『지도,』 채색필사본, 32.3×38.5cm, 19세기, 서울역사박물관

전주는 감영이 설치된 도시였다.



감영監營은 감사監司의 본영本營으로 조선시대 8도에 파견된 관찰사가 업무를 보는 관청이다.

감영 고을은 각도의 중심이 되는 거점 고을 중에서 정했는데, 읍세邑勢뿐만 아니라 서울과의 지리적 위치도 고려했다.

세종대에 경상도 감영을 논의할 때, "왕명을 받든자가 반드시 상주로 먼저 길을 떠나서 뒤에 경주에 이르기 때문에

왕화王化의 흐름은 상주에서 남쪽으로 내려갔지 경주에서 북쪽으로 향한 적은 없었다"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주 또한 전라도의 계수관 고을인 전주, 나주, 광주 가운데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고을이라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감영은 관찰사가 정무를 보는 관청일 뿐만 아니라 관찰사가 거처 하면서 생활하는 주거공간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감영은 관찰사의 역할과 업무 방식에 따라 위상과 역할이 달라졌다.

15, 16세기 행영제行營制 하에서는 관찰사가 임기 내내 도내를 순행巡行하다가 잠시 머무는 공간이었다면,

유영제留營制가 정착되고서는 지방 통치의 중심지로 위상이 한층 강화되었던 것이다.


전라도의 감영 도시는 전주는 이러한 조선시대 감영의 역할과 위상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특히 16세기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와 19세기 초반 전라도 관찰사에 부임한

서유구의 『완영일록完營日錄』이 전하고 있다. 이들 일기를 중심으로 수백 년 시간의 격차 속에서

관찰사와 감영의 변화상을 추적해본다.




「전주부지도」


관찰사, 일원화된 지방 행정의 실현


관찰사는 고려 말 군현 고을을 안찰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안찰사按察使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안철사는 임기가 6개월 뿐인데다 지위도 낮아 한 도의 책임자 역할과 위상을 갖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 왕조는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를 지향해 지방 제도 또한 중앙 - 8도 관찰사 - 주부군현 수령으로 연결되는 일원화된 시스템을

구축했다.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토호 향리 등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지방관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했다.

이와 동시에 백성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지방관의 근무를 평가하고 비리를 방지하기 위해 관찰사제를 강화했다.


그 실행 작업은 1388년(창왕 즉위) 위화도 회군 후에 이미 시작 되었다.

안찰사란 명칭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겸兼 감창監倉 · 안집安集 · 전수轉輸 · 권농勸農 · 권학사權學事 · 제조형옥提調刑獄 ·

병마공사兵馬公事'로 명칭이 길었다. 여기에는 관찰사의 임무 범위와 내용이 모두 담겨 있다. 도내 정사를 일절 관찰하여 관내 수령을

출척하고, 겸하여 도내의 창고의 곡식을 총감독하며, 민새의 안정과 유민의 안집, 조세와 공부貢賦의 수송, 농상 수리 등을 권장하며,

인재 양성과 지방 교육을 권장하고, 형옥과 군정은 왕명과 정부의 지시에 따라 제거提擧한다는 것이다.


이후 잠시 안렴사로 돌아갔다가 관찰사로 복원되는 등 몇 차례의  변동을 거친 끝에 태종대에 8도 관찰사제를 확립한다.

전국을 8도로 편성하고 이들 지방에 일괄적으로 도관찰출척사를 파견함으로써 단일한 지방 행정 조직을 갖추었다.

세조대에 이르러서는 도관찰출척사에서 관찰사로 명칭을 바꿔 관찰사제를 완비했다.

이후 관찰사는 조선 왕조의 지방 행정의 근간으로 수백 년 역사를 이어오며 1910년 일제가 강제 합병할 때까지 존속되었다.




『창선고淸選考』필사본, 33.9×22.8cm, 1906,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시대 관원에 대한 인명사서人名辭書로,

8도의 관찰사의 성명, 자, 급제년, 나이, 과종科種, 도임 연도, 전관前官, 본관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관찰사는 종2품 관직으로, 한 도를 책임지는 일도지주一道之主로서 직임을 감당할 능력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문무 중신文武重臣을 선임하여 파견했다. 주요 업무로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외관外官, 즉 목민관인 지방관들을 규찰하는 역할이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관찰사의 고유한 기능이다.

이를 위하여 관찰사는 도내를 순력하며 1년에 두 차례, 6월과 12월에 도내의 모든 지방관의 근무 성적을 평가해 중앙에 보고했다.

둘째는 지방 행정 수반으로서의 역할이다. 관찰사는 도내의 모든 외관의 상급 기관으로 행정, 군사, 사법을 포괄하는

도정道政 전반을 지휘 통제하고, 일정 부분 독자적인 처결을 할 수 있는 직단권直斷權을 보유했다.


이러한 관찰사의 역할은 감영의 형태와도 밀접한 관련성을 지녔다. 15, 16세기에는 안렴사 이래의 고유 기능이 상대적으로 우세했다.

도내의 지방관을 규찰하기 위해서는관찰사가임기중 도내를 순행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감영은 관찰사의순행 행차가 곧 감영이되는

행영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후17세기를 거치면서 관찰사가 감영에 머물며 업무를 처리하는 유영제로 전환되어

조선 후기관찰사는 도내 행정 수장으로서 그 역할을 확대해갔다.




머무는 것은 잠깐

길에서 업무가 이뤄진 노관찰사의 기록


선조대에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미암 유희춘柳希春(1513~1577)이 남긴 일기에 이런 상황이 녹아있다.

"유희춘은16세기 사림계 인물로1538년 문과에 급제해 중앙 관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명종대에 을사사화의 연장이었던 양재역良才驛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함경도 종성,충청도 은진을 거치며 

19년 동안 유배살이를 했다. 오랜 유배살이 끝에 선조가 즉위한 후 정계에 복귀하고, 1571년 2월4일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7개월의 재임 기간에 그는 도내 각 고을을 순행하면서 하루하루를 기록으로 남겼다. 미암일기眉巖日記』에는

그가 관찰사로서 했던 생활과 행영의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미암집』, 유희춘, 1869, 유희춘의 문집으로 권 5~18에는 미암일기가 포함되어 있다.



일기에 의하면 그는 관찰사에 임명될 당시 해남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감영에서 보낸 영리營吏가 2월 11일 해남으로

찾아와 소식을 전했다.서울로 올라온그는 한 달여 뒤인 3월 13일 국왕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하고 곧장 부임길에 올랐다.

 대궐에서 광화문으로 나와 전임 관찰사 이우민李友閔의  집에 들러 잠시 대화를 나눈 다음 남대문을 통해 한강으로 향했다.

지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한강을 건너 과천에서 하룻밤  묵고 수원,  진위振威(오늘날 평택), 공주,  은진을 거쳐

출발한 지 8일 만인 3월 21일에 전라도의 경계인 여산현廬山縣에 들어섰다.


조선시대 관찰사는 도에 들어가는 경계, 즉 도계道界에서 신구임 인수인계를 하고 직무에 돌입했다.

유희춘도 은진에서 출발해 전라도 여산 경계에 당도하니 전라도인이 큰 기를 들고 마중 나왔고, 여산 오리정五里程에는 관원 및

관속 70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여산 관아에 들어가 도내 각 고을 수령, 찰방 및 관속들과 공식적인 상견례를 했다.


여산 관아에서 하루 묵은 그는 이튿날 감영이 있는 전주에 입성했다. 경기전慶基殿에 알현하고 감영에 들어가 업무에 착수해

하루 종일 공사公事를 처리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부첩簿牒, 즉 장부와 보고서가 쏟아질 듯 많았다고 한다.

전날 여산에서도 상견례 후 소지所志와 조장報狀 200~300 장을 퍈결했다고 기록했다. 신구임이 교체되는 동안 적체된 일이

한꺼번에 몰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전주 도착 직후부터 순행을 위한 준비 작업이 시작되었다.

일기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제 일행의 짐말이 너무 많아서 감영의 이방 등을 시켜 줄일 것은 줄이고 남겨둘 것은 남겨두게 했다.

전보다 일곱 마리를 줄여 일행의 말이 48필이니 비용을 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찰방이 변고에 대비하기 위해

 예비해둔 말은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미암일기』, 1571년 3월 25일)




「조경묘경기전도형」종이에 채색, 55.7×46.0cm, 1899년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



어제는 3월 24일로, 그는 전주에 입성한 지 이틀 만에 행차 구성을 점검하고 조정했던 것이다.

최종 확정된 짐말 48필 규모의 행차는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행렬의 선두에는 중요한 문서와 장부를 넣은 가죽상자 및 관찰사가 공식 업무를 할 때 갈아입을 관복을 넣은 사모갑을 앞세웠다.

귀이어 의장 깃발이 따르고, 관찰사의 관인과 군대를 동원하는 병부, 국왕의 교서와 유서, 관찰사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장용 깃발인

 절과 도끼인 부월이 따르며 취라치, 나팔, 태평소 등 악대 행렬도 이어졌다. 그리고 행차의 주인공인 관찰사가 타고 있는 마교를

중심으로 앞에서는 군관 및 종자들이 인도하고 뒤에서는 도사, 찰방, 심약, 검률, 중방 등 감영의 관원과 영리 등의 관속들이 따랐다.


이는 관찰사의 행차 구성으로 유희춘의 순행 행차도 이와 비슷한 구성이었을 것이다.

조선 전기 관찰사의 순행 행차 규모는 유희춘에게서 보듯이 말 40~50필 정도였다. 대규모 행렬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중앙 정부의 권위를 세우고 지방 민심을 진복鎭服 시키기 위해서는 관찰사의 지위에 상응하는

위엄과 의식儀式을 갖춰야 한다는 의도가 반영되었다.


행렬 준비와 함께 감영에서는 순행할 고을에 행로와 체류 일정을 미리 통지하는 선문先文을 발송했다.

언로의 각 고을은 순행 행차의 숙박 및 식사 등을 지원해야 했다. 선문을 받은 고을은 관찰사의 행로와 일정을 공유하고 준비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억울한 사정이나 민원이 있는 백성이라면 관찰사에게 호소할 청원서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순행 준비를 닷새 만에 마치고 유희춘은 3월 26일 첫 순행길에 올랐다.

전주를 떠나 임실 →  남원 → 옥과 → 담양 → 옥과 → 순천 → 낙안 → 흥양 → 보성 → 장흥 → 강진 → 해남 → 영암 →

나주 → 광주 → 진원 → 장성 → 태인 → 금구를 거쳐 5월 69일에 전주로 돌아왔다. 39박 40일 동안

 19개 고을을 섭렵하며 총 1340리 길을 다닌 대장정이었다.





1차 순행로  2차 순행로   3차 순행로  4차 순행로


행차는 연로의 찰방이 인도했고, 순행 고을에 들어서면 해당 수령이 고을 경계에 나와서 맞이했다.

관아에 오른 후 수령 및 관원, 재향품관, 유생, 관속들과 상견례를 하고 곧바로 공사 처리에 들어갔다.

부세賦稅, 형옥刑獄과 소송訴訟, 권농勸農, 백성 안집安集 등이 주요 점검 대상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수령의 근무 성적을 평가했다.


40일 동안의 장거리 순행에서 돌아온 그는 감영에서 열흘 남짓 머문 뒤 다시 2차 순행길에 올랐다.

5월 17일에 출발해 48일 동안 고을 열여덟 곳을 경유하고 7월 5일 감영에 돌아왔다. 3차 순행 때는 감영에서 겨우 사흘 머물 뿐이었다.

나를 만인 7월 9일 순행길에 올라 56일 동안 26개 고을을 돌았다. 4차 순행 때는 감영에서 열흘 정도 머물고 9월 16일에 다시

길에 올라 무안, 함평, 영광, 등 서해안 고을을 살폈다. 10월 14일 무장에 이르러 대사헌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순행을 멈출 때까지 그는 29일 동안 열 두 곳을 돌고 있었다.


유희춘은 7개월의 재임 기간에 네 차례의 순행으로 총 173일 동안 4370리를 순행하며 고을 일흔다섯 곳을 경유했다.

전라도의 57개 고을 중에서 약 열 곳을 제외한 44개를 섭렵했다. 나주와 광주는 네 차례 경유했고, 두 번 이상 경유한 곳도

스물다섯 군데에 달했다. 순행길은 정해진 일정이 있고 선문을 보내 해당 고을에 이미 통지한 상태였으므로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었다.

한 곳에 지체하면 고을의 비용 부담이 느는 탓에 힘들다고 마냥 한 고을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순행길은 정해진 일정에 따라 계속 진행되었고

장맛비와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폭우에 다리가 끊겨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한여름에는 무더위를 피해 꼭두새벽에 출발해야 했다.

그는 결국 피로가 누적되어 3차 순행에서는 건강이 악화되고 순행 도중에 일정을 변경해야 하는 상황에도 처했다.


유희춘에게서 보듯이 조선 전기에 관찰사는 재임 기간을 길에서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업무는 대개 순행 행차 즉 행영에서 이뤄졌고, 전주 감영은 늘 비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관찰사의 업무는 연로한 대신이 감당하기에는 녹록치 않았음을 유희춘이 보여준다.



감영에서 각종 사건과 문서 처리를 하다

『완영일기』를 통해 본 관찰사 역할의 변화


순행 중심의 관찰사는 그 자체로 몇 가지 난제를 안고 있었다.

안정적인 업무 수행을 하려면 임기가 충분해야 했는데, 1년 가지고는 부족했다.

한편 가족과 떨어져 홀로 부임해 임기 내내 순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임기를 늘리면 연로한 중신이 감당하기에는 무리라고 여겨졌다.

게다가 관찰사는 늘 순행 중이었으므로 감영 소재 고을의 업무는 판관에게 위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순행을 바라보는 시선도 엇갈렸다.

한편에서는 감사가 순찰巡察을 게을리하면 민간의 병폐를 두루 살피지 못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수령이 민간을 토색질하여 감사를 접대한다는 순행의 폐단을 지적했다.




「서유구의 초상」종이에 채색, 76.0×38cm, 개인 소장.



조선 초기부터 관찰사의 운영 방식을 두고 여러 방안이 모색되면서, 주요 논제는 관찰사가 감영 고을의 읍관을

 겸임하는 문제兼牧(겸목), 가족을 동반하는 문제 率眷(솔권), 임기를 2년으로 늘리는 문제(久任)로 집중되었다.

결국 18세기 전반까지도 겸목, 솔권, 구임은 치폐를 반복한 끝에 현종대에 솔권, 구임 부임이 확립되고

영조대 『속대전』에 겸목제가 규정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 과정에서 관찰사의 업무는 순행 중심에서

감영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유영제로 전환되어갔다. 순행은 1년에 두 차례 봄가을로 축소되고

점차 형식화 되었으며, 잦은 순력은 오히려 폐단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유영제 전환으로 감영은 관찰사가 잠시 쉬는 곳에서 명실상부한 도내 행정의 중심지로 위상이 강화되었다.

관찰사는 감영에 근무하면서 도정을 처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고을 수령들이 관찰사를 만나려면 감영으로 출장을 가야 했다.

관찰사는 고을 수령들의 근무 평정과 함께 한 도의 수장으로서 일체의 통치 행정 및 군사 업무를 수행하는 방백方伯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19세기 초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풍석楓石 서유구(1764~1845)가 남긴 『완영일록完營日錄』은 유영제 아래서 관찰사의

업무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에는 그가 1833년 4월 전라도 관찰사에 부임해 교체되기 직전인

1834년 12월 말까지의 기록과 공문서가 정리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그의 부임길은 유희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833년 4월 10일 대궐에 들어가 국왕에게 사은숙배하고 교유서와 밀부密符를 받은 뒤 그날로 부임길에 올랐다.

닷새 뒤인 15일에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들어가는 도계인 여산의 황화정皇華亭에 도착해 도내 각 고을 수령의 공예장公禮狀을 받았다.

바로 여산 관아로 들어가 전임 관찰사 이규현과 인수인계를 하고 국왕에게 도계 장계到界 狀啓를 올렸다. 이튿날 전주에 도착해

조경묘와 경기전에 숙배를 드리고 봉심奉審한 뒤 감영의 선화당으로 들어가 제읍 수령들과 상견례를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업무에 착수해서는 유희춘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서유구는 부임 사를째인 4월 17일부터 각 고을에서 올라온 문서를 본격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17일에는 박자선이라는 자가

익사한 사건에 대해 만경현에서 올린 검안檢案에 처분을을 내렸다. 18일에는 주막에서 싸움을 말리고 집에 돌아가 열흘 뒤 사망한

오소남 사건에 대하여 남원부에서 올린 검안을 검토했다. 관찰사 업무가 순행보다는 감영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가 첫 수행길에 오른 것은 부임한 지 4개월 만인 가을날이었다.

그는 8월 16일 길을  떠나 열흘 동안 전라 좌도의 산협 고을을 따라 돌고 그달 25일 감영으로 돌아왔다.

그 스스로 순행의 목적을 농사 형편을 살피기 위해서라고 기록했듯이, 감영에 오자마자 그는 국왕에게 각 고을의 농형을 보고하는

장계를 올렸다. 관찰사로서 이러한 행보는 16세기 유희춘이 감영에 도착한 즉시 순행 준지에 착수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같은 직분이지만 임기 내내 길에서 지내야 했던 유희춘의 업무 방식과는 격세지상隔世之像을 보여준다.





유영제 아래서 관찰사의 업무가 감영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감영의 인적 조직 및 공간 구성 또한 이에 걸맞게 확대되어갔다.

18세기 후반 『전라감영지全羅監營誌』관직조에 보이는 감영의 인적 구성은 총 1000여 명에 달하는 거대한 조직이었다.






인적 구성의 확대는 감영 시설의 확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라도 감영은 1388년에 관찰사 최유경이 전주성을 창건하고 4대문을 설치했다고 한다.

주요 시설로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신 객사客舍, 관찰사의 청사인 선화당宣化堂, 진람루鎭南樓, 판관의 청사인

 풍락헌豊樂軒 등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관찰사는 거의 언제나 순행 중이었으므로 감영은 비어 있었고

그 시설들은 또한 단출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영제가 확립되면서 감영의 인적 구성도 확대됨에 따라 시설 또한 이에 걸맞게 갖춰졌다.

18세기에 제작된 「전주지도」(보물 제1586호)를 보면, 조선 후기 감영의 공간 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전주부성 내에 객사를 중심으로 서족으로 선화당, 관풍각, 연신당, 응청각 등 감영 건물과 가족들의 처소인 내아內衙가 보이고,

동쪽으로 전주부 관청인 풍락헌이 보인다. 동남쪽으로는 진전眞殿이라고 쓰인 경기전도 자리 잡고 있다.

특히 감영 주변으로 민가가 밀집되어 있는 모습은 감영 도시의 위상과 활기를 짐작케 한다.




「전주지도『1872년 지방지도』, 1872,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기록에 의하면, 전주 감영은 1767년 화재가 발생해 서문과 남문을 비롯해 관아 100여 동과 민가 1000여 호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이는 18세기 중반 당시 감영 시설이 이미 100여 동에 이르는 대규모 시설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767년 화재 이후 100여 년이 지난 뒤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  「전주지도」와 「완산십곡병풍도」에서는

화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19세기 감영 도시 전주의 번성한 모습을 담고 있다.


조선 후기 전주는 감영으로서의 위상을 바탕으로 대도시로 성장했다.

성 안의 읍내장을 비롯해 동서남북 문 밖으로도 대규모 장시가 번성했다. 특히 감영에서는 중앙 정부의 요청으로 국용 및 관용 서적을

간행했는데, 관련 업무를 담당한 도타방搗打房, 지침紙砧, 인방印房 등이 감영 시설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라 감영을 중심으로

종이 생산과 출판 인쇄가 발달했다. 1936년 당시 전국 한지 생산량의 75퍼센트가 전라도와 경상도 감영 도시에 집중되었으며

 전주 한지는 오늘날까지 명성을 날리고 있다. 전주 감영에서 출판한 서적들은 완영판完營板으로 불리며,

민간에서 판매 목적으로 간행된 완판完板 방각본坊刻本들도 전주 시장을 중심으로 유통되었다.

선자방扇子房에서 단오절 부채를 제작해 진상하던 데서 발달한 전주 합죽선, 통인通引들의

 놀이 문화에서 유래한 전주대사습 또한 감영 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완산십곡병풍도』종이에 엷은 색, 170.0×529.0cm, 국립전주박물관



근래들어 전주는 감영 도시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전통문화 도시로 인식되고 있다.

한옥마을의 문화유산 산업이 개발되면서 한옥마을 - 경기전 - 풍남문으로 이어지는 전통문화벨트가 형성되면서 많은 사람이

찾는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역사문화적 관점에서 도시의 역동성을 재발견해 구도심을 재발견하고 활성화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4장>


변산, 조선의 혁신 사상이 자라난 땅

정호훈


변산은 전라북도 부안에 자리한 작은 반도다. 보통 변산반도라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부안현扶安縣에 속했다. 서해로 돌출한 이 지역은 규모가 아담함에도 불구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자연 풍광이 뛰어난 데다 오랜 내력을 지닌 역사 공간이 곳곳에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도 사람 살기에 참 좋은 곳이었다.



「전라도」 『조선지도』, 채색필사본, 39.3×25.7cm, 19세기 전반, 서울역사박물관.


변산반도는자연환경이 안팎으로 크게 달라 내변산內邊山과 외변산으로 구분된다.

내변산은 산지 지대로, 300~400미터의 험산이 이루는 산악미 · 계곡미가 빼어난 데다 수림이 울창했으며 산중 곳곳에는 사찰이

자리 잡았다. 그중 백제 때 세운 내소사來蘇寺가 대표적이다. 외변산은 바닷가 지역으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에서 철철이

해산물을 얻고 소금을 구울 수 있었다. 다수의 인구가 거주할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해도 사람 살기 그리 나쁜 환경도 아니었다.

반도 밖 환경 또한 풍요로워 내륙으로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 반도를 벗어나면 농지도 흔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이곳의 산천 지리와 삶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다.

먹는 물만 빼면 이만한 땅이 없다는 묘사다.




『택리지』이중환, 18.3×29.7cm, 1751, 국립중앙도서관


노령蘆嶺(전남 장성과 전북 정읍 사이의 고개로 갈재라고도 부름)에서 산 줄기 하나가 북쪽으로 부안에 와서 서해 가운데로 쑥 들어갔다.

서쪽, 남쪽, 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고, 산속에는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있는데, 이것이 '변산'이다. 높은 봉우리와 산마루, 평지나

깎아지른 벼랑 할 것 없이 낙락장송이 하늘 높이 해를 가리고 있다. 계곡 바깥에는 모두 소금 굽고 고기 잡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산중에는 좋고 기름진 밭이 많다. 주민은 산에 오르면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것을 생업으로 삼으니,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값을 치르고 사지 않아도 될 정도로 풍족하다. 다만 샘물에 장기가 있는 점이 안타깝다. (『택리지』「산수」)


이곳의 특성을 결정하는 요소는 아무래도 바다였다. 사람들은 밖으로 드넓은 서해 바다에서 철마다 갖가지 고기를 잡았고,

바닷길로 먼 지역을 오갔다. 반도 곳곳에 바다로 가는 작은 항구가 자리 잡았는데 그중에서도 남쪽의 곰소항이 유명했다.

이 항구는 현재 소형 어선만 접안할 수 있을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과거에는 늘 배가 모여들고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변산반도의 지형이나 지리는 한편으로는 숨어서 도적질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관군이 추적해오면 서해로 나서서 곳속에 흩어져 있는 섬으로 숨기만 해도 찾아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나라 사정이 어려워 도적떼가 생겨나면 이곳은 여지없이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1728년 이인좌가 일으킨 반란 때, 이곳 변산반도에 있던 도적떼의 우두머리 청룡장군도 참가 했다고 한다.




주류적 질서와 충돌하던 이들의 근거지 변산 땅에 들어온 인물 허균


변산반도는 원래 인문人文의 향이 풍부한 땅은 아니었다.

사대부가 깃들고 학자를 키워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자연환경이었던 것이다.

사대부 가운데 풍광 좋은 곳을 골라 집을 짓고 고요히 지내는 이도 있었지만, 삶의 근거지로 이곳을 택하지는 않았다.

그런 와중에 흥미롭게도 17세기에 이르러 학술계의 문제적 인물들이 이곳에 스며 인연의 실을 풀어놓은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특히 변산반도 초입에 있는 우반동愚磻洞이 그런 곳이었다. 우반곡愚磻谷이라고도 불린 이 땅은 만경평야에서 반도로 들어가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현재 지명은 우동이다. 지형은 호리병같이 생겨, 한 면은 넓게 바다로 열려 있고, 나머지 3면은 산으로 둘러쳐져 있는데다

가운데 지역에는 들이 제법 넓게 펼쳐져 있어. 사람 살기에 적합하면서도 호젓하고 풍광이 빼어난 곳이었다.




우반동 선계폭포



17세기 전반 이곳으로 먼저 찾아온 이는 허균許筠(1569~1618)이었다.

허균은 40세 되던 해 이곳 숲속에 집을 지었다. 1608년이었다. 젊었을 적 전운판관轉運判官으로 호남에서 조운漕運을 감독하며

바닷길을 왕래하다가 이곳 소문을 듣고 거처를 옮긴 터였다. 부안 기생 매창과의 아름다운 인연이 시작된 것도 조운판관 시절이었다.

허균은 그녀와 10여 년간 알고 지냈는데, 1610년 매창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애도시를 짓는다.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그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아오려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이 무렵 허균은 관료, 유자儒者들과 충돌을 일으키며 그들로부터 배척받고 있었다. 공맹孔孟을 익힌 유자이면서도 자유분방하고

감정에 충실한 데다 불교와 도교를 넘나들던 그였기에 몸과 마음, 행동을 늘 검속하며 살려던 이들의 눈에는 거슬리는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허균을 비난하고, 심지어는 처벌하려고까지 했다. 세상사에 절망햇던 허균은 기회가 되면

그 세계를 떠나 이곳으로 들어와 살 생각을 했다. 마침 공주목사로 있다가 파직되자 가족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허균이 묘사하는 우반동의 풍경은 이렇다.




선계폭포 위에서 내려다본 우반동 일대.


금년에 공주에서 파직당하자 남쪽 지방으로 돌아가서 장차 소위 우반愚磻이란 곳에 집 짓고 살 결심을 했다.

해변을 따라서 좁다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 골짜기에 들어서니 시내가 있어 그 물소리가 옥 부딪는 듯하여

졸졸 수풀 속으로 흘러나왔다. 시내를 따라 몇 리 안가서 산이 열리고 육지가 트였는데, 좌우의 가파른 봉우리는 마치 봉황과 난새가

나는 듯 높이를 헤아리기 어려웠고, 동쪽 산기슭에는 소나무 일만 그루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나는 곧장 거처할 곳으로 나아가니

동서로 언덕 셋이 있는데 가운데가 가장 반반하게 감아 돌고 대나무 수백 그루가 있어 울창하고 푸르러 상기도 인가의 폐허임을

알 수 있었다. 남으로는 드넓은 대해가 바라다 보이는데 금수도金水島가 그 가운데 있으며, 서쪽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그곳에

서림사西琳寺란 절이 있는데 승려 몇이 살고 있었다.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허균, 1611, 규장각한국학연구소





허균이 거처하며 『홍길동전』을 집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계폭포 위쪽 분지 일대



새집을 짓고 가족과 어울려 살던 이곳을 허균은 "욕계慾界의 신선이 사는 곳" 하늘 위의 멀리 떨어진 땅"이라고 불렀다.

둘째 형님 허봉許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곳을 '소나무 · 대나무가 울창하고 시내와 계곡이 요조窈窕하여 실제로 은자隱者가

살만한 곳"이라고도 했다. 모진 세상 풍파, 없는 듯 막으며 거처할 수 있는 곳이니 오래 살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조정에서는 반년도 못 되어 그에게 다시 벼슬을 내리고 북쪽 지방의 일을 맡겼다.

마음속에 오래 새겨두었다가 천 리 먼 타향에 살자고 했던 마음이 오래가지는 못한 셈이다.

그의 탄식대로 그의 의지와 다르게 이곳에 살 수 없음은 "천명!"이었다.




『홍길동전』허균, 규장각한국학연구소



짧은 시간밖에 머무르지 못했지만 허균은 이곳에서 많은 일을 했던 모양이다.

이때 『홍길동전』도 썼다고 알려져 있다. 적서 차별의 세상에 분노하다가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 그곳에서 새 세계를 연다는

『홍길동전』의 이야기는 조선의 위정자, 지배질서를 옹호하는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무신란이 일어난 후에는 허균이 이곳 사람들에게 『수호지』를 가르쳤다는 풍문도 돌았던 모양이다. 국왕 영조의 입에서

이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면 허균이 얼마나 문제시되는 인물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무뢰배들이 모여들어 양산박을 만들고

그곳을 근거리로 무장활동을 했듯이, 허균이 이곳 변산에 숨어들어 도적들에게 『수호지』의 내용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1728년의 반란 때 이곳이 도적들의 소굴 중 하나로 꼽혔다는 사실을 두고 이런 소문이 퍼졌던 듯 하다.


도적떼와 허균을 연결하는 조선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어찌 보면 허균에 대한 그들의 평가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허균이란 사람 자체에서 그런 면이 분명히 발견된다. 그가 쓴 『호민론豪民論』은 이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글이다.

「호민론」은  나라가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호민을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이 주된 줄거리라. 허균은 호민에 대해,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마음을 품고서, 천지간天地間을 흘겨보다가 혹시 시대적인 변고라도 있다면 자기 소원을 실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규정한다. 읻르은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세가 편승한 만한가를 노리다가 한순간에 나라에 원망을 품은

백성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불러모아 반란을 일으키는데, 중국에서는 진秦나라의 진승陳勝 · 오광吳廣, 한漢나라의 황건적,

당唐나라의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 같은 사람이 이 부류에 속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견훤과 궁예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했다.

『호민론』은 표면적으로는 나라의 안정을 걱정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글에는 백성을 중심에 두는 사고, 정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 깔려 있다. 현재의 정치에 대한 준열한 경고의 목소리가 『호민론』이었다.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 표범보다 훨씬 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이들을 항상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인가?(···) 대저 하늘이 사목司牧(임금)을

세운 것은 양민養民하기 위함이고,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 메워도 채워지지 않는 구렁 같은 욕심을 채우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저들 진나라 한나라 이래의 화란은 당연한 결과이지 불행한 일이 아니었다. (…) 백성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엽보다 훨씬 심하다. 그러나 위에 있는 사람은 태평스러운 듯 두려워할 줄 모르니 우리나라에는 호민이 없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견훤 · 궁예 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조장할 것인가.

백성 다스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두려워할 만한 형세를 명확히 알아서 전철前轍을 고친다면 그런대로 유지할 수 있으리라.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호민론」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호민론」규장각한국학연구원



허균은 참 특이한 존재였다. 그는 오랜 전통을 지니고 명망있는 사람을 많이 배출했던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나 유복한 생활을 했다.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에게 배운 인물로, 문장에 능했고 동서 분당기에는 동인의 영수 역할을 했ㄷ가. 형 허성許筬과 허봉, 누나 허난설헌

許蘭雪軒 또한 시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둘째 형 허봉은 아버지를 따라 동인의 맹장으로 활동했다. 허균 또한 천재적인 기억력에 시문으

잘 지었다. 『성소부부고』 『국조시산國朝詩刪』등의 저술은 그의 재주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허균이 살았던 17세기 초는 당쟁이 격화되던 시점이었고, 그는 북인으로 활동했다. 광해군대에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움직임을

이이첨과 함께 주도했다. 강성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활동은 길게 못 가 광해군 10년에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뭇사람을 앞서는

출중한 재주를 지녔지만. 당대 사람의 감정과 사유를 뛰어넘어 살았기에 무수한 적을 만들었고, 결국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역모를 저질렀는지의 여부는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지만, 「호민론」과 같은 글에서나 예법적 질서를 무시하는

그의 행동을 본다면 그는 당대의 주류적 질서와 충돌하는 인물임이 분명했다. 변산반도는 불꽃처럼 살다 간 17세기의

 반항아가 깃들어 살고 싶어했고, 그래서 이곳에는 적잖은 시간 동안 그가 뿜은 숨결이 남아 맴돌았다




변산반도에 들어와 기거한 유형원


변산반도와 인연을 맺은 또 다른 인물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이다.

유형원은 서른두 살 되던 해 이곳에 들어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서울 · 경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공부하고 결혼하고 살던 젊은이가 친지 하나 없는 이곳에 터를 잡앗던 것이다.


그는 전형적인 서울 · 경기 지역 명가의 자손이었다. 그의 친가와 외가, 인척 모두 내력깊은 명문가로, 사회적 지위나 경제상으로

무엇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그의 친가는 공신의 후예였다. 윗대 조상 유관柳寬이 조선 건국 후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책봉 된 뒤 후손들은 그 후광을 누렸다. 유관은 세종대에 우의정까지 지내고, 황희 등과 함께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다.

유형원의 친가에서 증조부, 조부는 큰 벼슬을 하지 못했으며, 아버지 유흠은 문과에 급제했으나 단명했다.

그렇지만 공신의 후예란 사실은 이 집이 버티게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듯하다.


외가는 여주 이씨 가문이었다. 유형원의 외증조할아버지는 광해조 북인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이상의李尙毅였으며,

외할아버지는 이지완李志完이었다. 이지완은 이이첨과 사돈을 맺어 그의 아들을 사위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유형원에게 외삼촌 되는 이지완의 큰 아들 이원진은 유형원의 성장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유형원의 가문은 허엽許曄,

김효원金孝元 가문과도 혼맥으로 맺어져 있었다. 허엽과 김효원 둘 다 동서 분당이 일어났을 때 동인의 영수 지위에 있었는데,

그 자손도 대부분 학자나 정치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 두 집안과의 관계는 유형원의 고모가 김효원의 손자인 김세렴과 결혼하면서

맺어졌다. 고모의 남편 곧 김세렴은 훗날 유형원의 후견인이 된다. 김세렴은 또 허봉의 외손자이기도 했으므로, 유형원 집안은

양천 허씨 가문과도 인척이 되었다. 허균이 17세기 초반에 이곳 우반동에 들어와 있었던 점을 떠올린다면, 변산반도와 허균,

유형원의 인연은 묘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유형원은 이 시기 조선 최고의 환경에서 태어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623년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북인 정권이 몰락하면서 북인의 주요 일원이었던 그의 집안도 그 영향에서 비껴날 수 없었는데, 결정적으로 아버지 유흠이

 인조반정 후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인조 원년, 유몽인柳夢寅과 그의 아들들이 역모를 일으켰다고 처벌되었는데,

유흠 또한 여기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인조반정 후에는 서인 정권을 반대하는 북인들의 움직임이 여러 차례 일었다.

그중에서도 파장이 가장 컸던 사건은 유몽인의 역모사였다. 유흠은 이 일로 인해 부모님과 젊은 아내,

두 살배기 아들을 두고 서른 살도 되기 전에 잛은 생을 마감했다.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은 유형원의 삶은 불우했다.

아버지의 사랑과 훈도를 받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큰 슬픔이었고, 죄인의 아들임을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일 또한 사회생활을

하는 데 고통이었다. 그러나 성장기에 근느 할아버지, 외삼촌, 고모부 등의 지원을 받으며 비교적 착실하게 공부할 수 있었던

듯하다. 여기에 그의 타고난 재능은 여러 어른이 크게 기대할 정도로 탁월했다. 외삼촌 이원진과 고모부 김세렴의 역할은 절대적

이었다. 한문세계가 깊고 폭넓은 교류망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어린 유형원이 식견을 넓히며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이끌었다.

소년 시절 두어 차례 과거를 치르기도 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전국의 산천을 찾아다녔다.

고모부 김세렴이 관찰사로 근무하던 함경도와 평안도를 샅샅이 훑고, 영남 지역과 강원도의 금강산도 유람했다.

과거로 출세할 생각을 접은 유형원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옹골찬 설계였다.

 31세에 집필한 『반계수록』의 초고는 그 야심찬 계획의 첫발이었다.




『반계수록』유형원, 18세기,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변산반도의 우반동, 『반계수록』의 산실이 되다.


유형원이 변산으로 들어온 때는 할아버지의 3년상을 마친 뒤였다.

낮선 땅 부안으로 올 수 있었던 연유는 이곳에 그의 조상 유간이 공신이 되면서 받은 사패지賜牌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곡동 조용한 곳에 유형원은 수만 권의 장서를 갖춘 작은 집을 마련했다. 그의 6촌 동생 유재원柳載遠이 지은

『반곡선생언행록磻谷先生言行錄』에는 이곳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반곡의 한복판에는 평평한 땅이 펼쳐져 있고 한 줄기 개울물이 졸졸 흐르는데, 봉숭아꽃이 활짝 피어나고

소나무와 전나무가 하늘을 가리었다. 두어 칸의 초가집을 지었는데, 집 뒤에는 대나무 수천 그루가 우거져 있고,

집 안의 책시렁에는 수만 권의 책이 갖춰져 있었다.


이곳에서의 주된 일은 독서와 저술이었다.

조선의 지리를 탐구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주자대전』에서 주요한 시문을 간추려 엮은 『주자찬요朱子纂要』등이

이때 정리된 것이다. 특히 집중적으로 집필했던 것은 『반계수록』이었다. 49세 되던 해 유형원은 26권의 책으로 이를 마무리 했다.

이 책의 보유補遺 편으로 '군현제'를 구상했지만, 이는 미완으로 남겨졌다. 『반계수록』은 토지제도를 비롯해 정치제도, 교육제도,

군사제도, 사회신분제 등 국가 전 분야에 걸쳐 조선의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법제를 모색한 국가 전 분야에 걸쳐 조선의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법제를 모색한 국가 기획서다. 그가 이 책을 만들면서 가장 중시했던 점은 토지제 개혁이었다.

그가 보기에도 토지제도는 천하만사의 토대였다.


토지는 천하의 큰 근본이다. 큰 근본이 바로 잡히면 온갖 제도가 이를 따라 그 마땅함을 얻고, 큰 근본이 문란해지면

온갖 제도가 이를 따라 어느 것 한 가지도 그 마땅함을 얻지 못하게 된다. 진실로 정치의 요체를 깨우친 자가 아니라면

천리天理와 인사人事의 이해와 득실이 모두 이것으로 귀결되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반계수록』, 전제田制)


『반계수록』을 관통하는 기조는 변혁이었는데 그 변혁의 열망은 실상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에 두고 있었다.

공전제 개혁론도 그러했거니와, 노비제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비판은 그가 얼마만큼 당시 조선 사람의 고통을

인간의 눈으로 파악하고 아파했는지를 보여 준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노비는 재산이다. 대저 사람이란 똑같은 부류인데, 사람이 사람을 재산으로여기는 이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예전에는 나라의 부유함을 묻는다면 말의 수를 세어서 대답했다. 이것은 비록 천자 · 제후라도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임무로 하되

사람을 자신의 재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풍속은 어떤 사람의 재부를 물을 경우 반드시 노비와 토지로 대답한다.

여기서 이 법의 잘봇 풍속의 폐단을 볼 수 있다. (『반계수록』 노예奴隸)


『반계수록』에 나오는 구절이다. 노비를 토지와 같은 재물, 곧 재산으로 여기는 조선의 법제와 풍속이 잘못된 것임을 제기하며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거론했다. "노비는 결코 말과 같이 사고파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노비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통렬한 외침이 저 짧은 문장 속에 깃들어 있다. 이 주장은 아마도 노비란 존재를 여타의 존재와 동등하게 '인간'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조선 최초 발언일 것이다. 『반계수록』과 저자 유형원의 삶 그리고 사상은 어쩌면 이 한가지 생각에 모두 집약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17세기 조선 사회의 질서와 전면 배치되는 『반계수록』의 구상은 변화를 요청하는

 이 시기의 시대정신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구현했다 하겠다.




1750년 전라도 감영의 노비 명단인 『영노비관안』



『반계수록』의 새로운 기획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유형원 스스로도 그 점을 알고 있었다.

『반계수록』은 현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하나의 이상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 책이 조선의 정치계와 학술계에

미치는 파장은 적지 않았다. 사회의 변화, 국가 개혁을 꿈꾼 사람들은 한결같이 『반계수록』을 주목했다.

이 책에 깊게 빠졌던 영조대의 관료 홍계희洪啓禧는 국가에서 이 책을 간행토록 해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했고,

이익, 정약용 같은 학자는 『반계수록』의 생각을 계승하고 변형하면서 그들의 국가개혁론을 다듬었다.


이곳에서 생활하며 유형원이 일군 중요한 재산 중 하나는 제자일 것이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는 제자 여럿을 키웠다. 담계澹溪 金瑞慶(1648~1681)은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학자다.

부안 동림리에 살았던 그는 열여섯 살 무렵부터 유형원을 찾아와 배웠다고 한다. 유형원의 생각을 깊이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친 모습을 그가 작성한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찍 세상을 떠나는 통에 자기 생각을 크게 키우고 이와

연관하여 유형원의 사상을 부안 지역에서 널리 알리며 확산시키는 일을 충분히 하지 못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부안에서 훗날 유형원의 덕행을 기리는 서원을 세우고 여기에 제자 김서경,  유문원柳文遠, 김회신金懷愼을 배향했다.

지금은 사라진 동림서원이 그곳이다.



*    *    *


변산, 전라북도 부안에 자리 잡은 작은 반도는 조선 후기 어느 시점에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사람들이 깃들어 살며 천고에 다시 없는 생각을 키우고 다듬었던 곳이다.

조선 땅 어디를 간들 새로운 열망을 키우는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새로운 생각이 만들어지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이곳은 특별했다. 그 특별한 기운은 후대에도 면면히 영향을 주며적 지 않은 변화를 일으켰다.

지금도 이곳에 새로운 질서, 새로운 꿈을 구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인용서적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시로 읽는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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