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힘, 신화의 땅 제주


유요한



신화의 본보기를 따르지 않으면 풍요와 안전이 위협받을 것


신화를 설명하는 다양한 진술이 있지만, 종교학 관점에서 정의하자면 "어떤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그 중요한 의미를 공유하며

성스럽게 여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성스러운 이야기'는 꾸며낸 거짓 이야기와 구별되는 '참된 이야기'다.

물론 모든 신화가 성스럽고 참된 이야기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현실 속에 있을 법하지 않은 내용조차 참으로 받아들여졌던 성스러운 이야기들이 사회와 문화가 바뀌면서

진실로서의 힘을 잃곤 한다. 이런 신홛르은 생명력을 잃은 "과거의 신화"가 되어버린다.

특히 특정 지역의 토착 신앙 및 의례와 관련된 신화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유입되면

미신으로 치부되어 주민들의 현실적인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제주도에는 토착 종교의 신화들을 '참'으로 믿고 이를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기반으로 삼는 주민들이 적지 않다.

이 신화들은 마을 공동체 및 가정 단위의 의례와 연결되어 주민들의 종교적 삶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살아 있는 신화'다.

물론 최근에는 이런 힘이 예전만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신화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




「영주산대총도」104.5×59.5cnm 18세기, 국립고궁박물관.

독립된 제주 지도로, 제주의 3읍과 9개 진성, 10개의 목마장, 주요 마을과 도로, 주변 섬들이 상세하게 표현되었다.



제주 신화는 이를 참으로 받아들이는 주민들에게 신관, 자연관, 인간관, 영혼관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

마을 밎 가정 단위 의레를 집전하는 제주 무속인 '심방'들에게 특정한 종교 행위를 물어보면 종종 신화를 구송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한다.

의례에 참여하는 주민들 역시 신화는 공식적인 의례의 근거와 방법을 제시할 뿐 아니라 의미 있는 모든 인간 행위의

모델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탐라지초본」이원조, 30.2×18.3cm, 조선시대, 한국국학진흥원.

이원조가 제주목사로 재임하던 때에 집필한 읍지 초본이다. 『고려사』와 『고기古記』에 나온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탐라의 개벽 설화를 시작으로 세 신인과 세 처녀의 결혼 및 정착생활, 농경사회의 형성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 사람들이 중요한 의미를 공유하며 진실로 받아들이는 성스러운 이야기"를 제주 신화라고 한다면,

흔히 '전설'로 분류되어온 이야기 중에서도 신화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적지 않다. 제주도의 신화와 의레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현용준은

제주 신화를 도민들이 "그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을 뿐 아니라 신성한 이야기라고 관념"하는 것이라 말하고, 덧붙여 제주 신화는 "심방이

굿을 할때 노랫조로 부르는 것"이라며 그 범위를 제한했다. 반면 "특이한 자연이나 역사적인 특수한 인물 및 사건, 신앙 · 관습 등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도민들이 언제 어디서나 사실이라고 믿어 이야기하고 또한 듣는 이도 그렇게 믿어서 듣는"다고 하더라도

의례의 장에서 구송되었던 많은 종교적 이야기가 시간이 흐르면서 의례의 맥락과 분리되기도 하고, 나중에 다시 의례에 채용되기도

하는 점을 고려하면, 의례와 연관지어 신화와 전설을 구분하는 것은 모호할 수 밖에 없다.




제주시 용담동에 있었던 신당인 내왓당의 무신도로 왼쪽은 상사대왕, 오른쪽은 제석천왕마노라,

지본채색, 62.0×38.0cm, 중요민속자료 제240호, 조선시대, 국립제주박물관.



게다가 대부분의 학자가 기원 신화나 영웅 신화와 같은 신화의 하위 범부에 포함시킬 이야기를 전설로 분류하면

범주상 혼동이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주 주민들이 성스럽게 여겨 사실로 믿는 이야기는

모두 신화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토착 무속 신화에서 두드러지는 불교적 요소

외부 신들이 건너와 이야기로 탄생하다.


제주 토착 종교 의례 때 심방이 구송하는 신화를 '본풀이'라고 하는데,

대개 신화의 주인공인 신이 모셔진 내력을 풀어낸 이야기다. 옥황상제에 해당되는 천지왕, 산육신産育神 삼승할망,

무신巫祖神 초공 잿부기 삼형제, 아전 출신 저승 차사 강님, 마을 일 전반을 담당하며 특히 호적과 장적帳籍을 맡은 본향당신,

문이나 부엌, 변소 등 집의 주요 장소에 좌정한 가신家神, 변덕스런 도깨비 등 수많은 신이 각 본풀이의 주인공이다.

의례가 진행되는 동안 심방은 천지창조 신화부터 시작해 의례의 장소 및 목적과 관련된 신화까지 여러 본풀이를 구송하는데,

이들 이야기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 주요 자연현상 및 인문 현상을 나름 설득력 있게 설명해낸다. 그런 까닭에

제주도의 신화는 우리나라 다른 어떤 지역의 신화보다 더 탄탄한 체계를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신칼, 길이 22.0cm, 20세기,

제의에서 점구 혹은 춤을 추는 도구로 사용되며 무당과 제신들의 위엄을 나타낸다.



본풀이는 제주 토착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제주 사람들에 의해, 제주 사람들을 위해, 제주에서 사용되는 말로 전해진 신화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심방이 굿ㅇ하는 본풀이를 알아듣기 힘들다. 1만 8000이나 된다고 하는 수많은 신이 낮설뿐더러 별도로

공부하지 않고는 제주 방언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아래 아'와 '순경음 비읍'과 같이 다른 지역에서는 상실된 발음도 여전히 쓰인다.

처음 본풀이 구송을 듣는 사람이라면 '동해 와당'을 '동해 바다'라고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천자또, 백주또, 궤노깃또,

 개로육서또, 바람웃또, 하로산또 등 신들의 이름에 'ㅡ또' (혹은 'ㅡ도')가 붙은 것도 웬지 어색하고, '심방'이라는 단어가

 '신의 형방刑房'에서 왔고 명부 사자 명관冥官이 '멩감'이 되었다는 것도 미리 공부하지 않으면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큰 관점에서 보면 제주 주민들의 신화는 곧 인간이 일반적으로 공유해온 신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신들이 제주 본풀이의 주인공으로 전면에 부각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결국 신들을 통해 우 주가 생성된 과정,

삶과 죽음의 문제, 세상과 인간의 속성 등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질문하고 답변해온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

 인간은 문화의 장벽을 초월하는 공통적인 유대와 생각을 간직해왔고 이것이 여러 신화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 여러 문화에서 제주 신화에 담긴 인간읠 근본적인 물음 및 답변과 유사한 형태를 찾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제주 신화는 한국의 신화이기도 하다. 많은 학자는 제주 신화에는 한반도 육지에서 온 내용이 주를 이룬다고 설명한다.


우리나라 전 지역의 무속은 같은 뿌리에서 유래했으며, 제주 신화와 의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불교와 유교가 사람들의 종교생활을 압도적으로 지배했던 육지에 비해, 제주도는 문화 변동이 적어서 예부터 전해온 무속 신화와

의례의 형태가 큰 변화 없이 오히려 더 잘 유지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제주도에 파견된 첫 한국인 가톨릭 신부 김원영은 가톨릭의

우월성을 나타낼 목적으로 1900년에 『수신영약修身靈藥』을 집필했는데, 이 책에 쓰인 약 120년 전의 토착 종교 신앙과 행위의 모습이

오늘날과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재주도 토착 신화와 의례는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그 옛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김영철 심방 자택에 있는 당주, 신칼, 요령, 산판으로 구성된 삼멩두가 신의 위치에자리하고 있다.

멩두가 무구巫具로 사용되는 동시에 신 자신으로 모셔지는 근거는 무조신 신화인 『초공본풀이』에서 찾을 수 있다.



(…)

제주 신화의 중요한 일부가 된 외부 요소들 중에서 불교에서 유입된 내용이 가장 두드러진다.

불교는 아주 아래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토착적인 사고 및 행위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기 때문에 나라 전역의 토착 무속 신화들에

불교적 요소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초공본풀이」 「칠성본풀이」 「한동본향당신본풀이」 등 몇몇 제주 신화의 주인공 신의

조상은 부처님이다. 그중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초공본풀이」에 포함된 초공의 계보로, 초공의 할아버지는 석가여래, 할머니는 석가모니

라고 소개된다. 동일한 존재의 다른 두 이름이 구별된 남녀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보아, 불교적 요소는 제주 신화의 형성 과정에서

부리콜라주의 재료처럼 목적에 따라 편리하게 수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외부에서 유입된 성스러운 존재인 부처님이

토착신의 지위를 정당화하고자 토착신의 조상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건축 의례인 성주풀이를 위해 새로 건축된 집 방 안에 차려진 제물.



(…)

제주 신화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이야기도 여럿 포함되어 있다.

「천지왕본풀이」에서 대별왕이 이승에 내려와 두 개씩 떠 있던 해와 달에 화살을 날려 이들이 하나씩만 뜨도록 한 이야기는

 중국 신화에서 하늘의 궁수 예羿가 천제의 철없는 열 아들인 태양이 한꺼번에 뜬 것을 화살로 쏘아 떨어뜨린 이야기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차사본풀이」와「성주풀이」에는 '서목시'라는 별명을 지닌 강태공이 등장한다.

 (…)

제주도에 유교 사상과 의례가 퍼진 것은 조선 후기의 일로, 신화에 유교이 영향이 아주 많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

「송당본풀이」계열로 분류되는 여러 당본풀이에는 제주 당에서 솟아난 신이 바다 건너 타지에서 들어온 여신과 결혼하는 이야기가

줄거리의 중심을 이룬다. 이러한 모티프는 고 · 양 · 부 3성姓의 시조 신화로 알려진 「삼을나신화」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세 개의 구멍, 즉 삼성혈三姓穴에서 세 신인이 솟아났는데, 이들에게 배필이 없던 터에 다른 나라 왕의 세 딸이 석함을 타고 오곡의

씨앗을 가져와 이들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다.




「제주도」35.7×42.0cm, 조선시대, 국립제주박물관.

민화풍의 제주지도로 1702년에 건립된 삼성묘가 동문 안쪽에 있고 삼사석의 위치도 확인된다.



신이 땅에서 솟아나는 이야기나 외부의 신이 상자나 배를 타고 들어오는 이야기가 한반도 육지와 북방 지역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반면, 오키나와, 타이완, 베트남, 필리핀, 대마도 등에서 종종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제주 신화는 남방의 해양 문화권 영향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와흘본향당 신목.

본풀이에 따르면 와흘 본향당시 백조도령은 송당 본향신 부부의 열한 번째 아들이다.



(…)


'참'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의 종류


제주 토착 종교 제의 과정에서 구송되는 본풀이는 주민들의 신앙의 대상이자 내용으로,

오랜 세월 제주에서 '참'으로 여겨져 온 이야기들이다.

본풀이에 등장하는 신의 속성과 신봉되는 범위를 기준으로 대개 세 유형으로 분류된다.

먼저 '일반신본풀이'는 모든 인간과 자연 현상을 주재하는 신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로, 제주 전역의 의례 절차에서 구송된다.

(…)







(…)




칠머리당 영등굿 중 영감놀이.

선왕船王 도깨비를 대접하여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이다.



( …)




『남사일록』에 실린 '한라산제문' 이증, 영인본, 조선시대, 국립제주박물관.

삼가 탐라 지역은 상서로운 기운이 모여들고 신기함이 쌓이며 신령이 축적되는 곳으로,

신명께 경배하며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사 비는 내용이다.






「제주도도」중 '산방山房', 61.0×40.5cm, 조선후기, 국립민속박물관.

대정현 동쪽 10리 거리에 우뚝 솟아 있는 산방은 전설상 옛날 사냥꾼이 한라산에 올라가

 활을 쏘아 하늘의 배 가까이에 이르자 상제가 노하여 주봉柱峯을 꺾어 여기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영웅의 신화


신화학자들은 세계 각지의 신화들에 공통되게 나타나는 주제나 내용에 따라 몇몇 신화의 범주를 설정해왔다.

그중에서도 '천지창조 신화' '기원 신화' '영웅 신화' 등이 자주 언급되는데, 이는 제주 신화에서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천지왕본풀이」에는 우주 만물이 생겨나는 과정을 설명하는 '천지창조 신화'가 포함되어 있다.

「천지왕본풀이」의 맨 앞 부분을 살펴보자.


태초에 천지는 혼돈으로 있었다. 하늘과 당이 금이 없이 서로 맞붙고, 암흑과 혼합으로 휩싸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하늘의 머리가 자방으로 열리고 을축년 을축월 을축시에 땅의 머리가 축방으로 열려

하늘과 땅 사이에는 금이 생겨났다. (…) 이 금이 점점 벌어지면서 땅덩어리에 산이 솟아 오르고 물이 흘러내리곤 해서

하늘과 땅의 경계는 점점 분명해져갔다. 이때 하늘에서 청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흑이슬이 솟아나,

서로 합수되어 음양상통으로 만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생겨난 것은 별이었다.


(…)



신화를 삶으로 살기


서두에서 밝혔듯이, 제주도가 살아 있는 신화의 땅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주 사람들이 신화를 삶으로 살아내기 때문이다.

제주 주민들은 신화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끊임없이 상기하며, 삶의 과정마다 반복하면서 삶으로 재현한다.

모든 시간, 장소, 환경에서 신화와 관련된 삶을 영위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주민들은 한 해 내내 신들과 교류하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새해를 맞이할 때, 어업 · 농업 · 수렵 · 목축 등 모든 생업의 풍요를 기원할 때, 장마가 이어질 때, 추수를 마쳤을 때 등

특정한 시기를 정해 정기적으로 신에게 문안드리고 기원한다. 또한 개인, 가정, 마을 공동체에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에는

언제고 신을 찾아간다. 제주 본풀이는 줌니들이 신과 교류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신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신과 관계를 맺는 본보기를 보여준다. 신화는 사람들이 성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근거와 방법을 담은 지침인 셈이다.


삼사석비, 높이 149.0cm, 1735, 제주도기념룰 제4호.

탐라의 시조가 배필을 맞아 살 곳을 정하고자 화살을 쐈다는 전설이 깃든 비다.

제주시 화북동에 위치하며, 1735녀 제주 사람 양종창이 세웠다.




*      *      *




제주 사람들은 놀라거나 사고를 당하면 넋의 일부가 빠져나간다고 믿고,

빠져나간 넋을 다시 불러들이는'넋들임' 의례를 치른다.

 사진은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굿당에 넋들임을 위해 차려진 제물이다.




최근에는 제주도 열풍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국내외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제주를 찾고 있으며, 그중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제주에 정착한다. 이들은 제주의 신화와 의례에 대해 알지 못한다. 제주 토착 주민들 중에서도 신화를 삶의 원리이자

 지침으로 받아들이는 이의 비붇은 점점 줄고 있다. 제주도가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 있는 신화의 땅'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섣불리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화에 근거한 사고와 행위 방식들이 약화되는 현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공동체 차원의 신화와 의례는 어떤 형태로든 당분간 보존될 테지만, 가정을

중심으로 전해내려온 신화의 생명력은 더 급속히 사라져갈 것으로 예상된다. 제주 신화에는 인간과 자연, 영혼과 죽음,

그리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제주 주민들의 관점이 생생히 담겨 있으며,

 나아가 지금은 소실된 우리나라 다른 지역 사람들의 관점도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살아 있는' 제주 신화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것이다.





<6장>


평양이란 도시에서 감사는 어떻게 탐관오리의 대명사가 되었나


이은주



(…)


호화찬란하고 황홀한 평양


평안감사가 나오는 소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평안감사의 도임이다.

도임 장면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는 성대한 행렬과 아름다운 산수, 행렬을 맞는 풍악, 미색으로 유명한 평양 기생이다.



이날 청명 삼토 끝에 발행하여 경성을 떠날 적에 기구도 찬란하고 위엄도 엄숙하다

얼른 걷는 백마 등에 쌍교 독교 별련이며 좌우 청총마 썩 떠들며 호기 있게 내려갈 제, 전배 수배 책방 비장 맵시 있게 치장하고,

차례로 늘어서서 장식한 백마 등에 호피 도듬 높이 타고 소상반죽 쇄금선으로 햇빛을 가리고 평양으로 내려갈 제, 어지 아니 좋을런고.

(…) 각기 대오를 만들어 초관들이 먼저 나오고, 전배 비장, 후배 비장, 초관, 집사, 여러 장관이 행렬을 지어 가지런히 서고,

천파총이 군문에 늘어서서 옹위하고 들어갈 제, 대장 청도기 각 한 쌍, 피리 한 쌍, 길나장 늘어서서 동서남북으로 황백청홍기를

찬란하게 벌여 세우고, 금산 형방 알현할 제, 삼현육각 악기 소리는 산천이 뒤눕는 듯 권마성 벽제 소리 육각성이 자욱하고 취타성이

진동한다. 어여쁜 미색들은 단장하고 전후좌우 갈라서서 '지화자, 지화자' 좋은 소리 반공에 높이 떳다. 전배 비장 거동 보소.

훨훨 걷는 백마 등에 등을 기울여 타고 앉아 홍주, 영주, 사마치를 휘휘 칭칭 감고, 발길사, 홍당의를 집어 매고 맵시 있게 들어간다.

숲속을 들이달아 대동강변 다다르니, 녹수청강 죽려수는 적벽강 큰 싸움에 방통의 연환계, 육지같이 모여든다. 나는듯이 건너서서

대동문 들어설제, 탓던 말을 재촉하여 선화당에 좌정하고 대포수 불러들여 방포 삼성 놓은 후에 각방 관속 대솔 군관

차례로 현신할 제 차담상 먹은 후에 백여 명 기생들을 각기 점고 끝에……. (『이춘풍전』)





「담와평생도」중 '평안감사부임' 傳 김홍도, 비단에 채색, 76.7×37.9cm, 국립중앙박물관.

영조대 재상인 홍계희洪啓禧(1703~1771)의 일생 중 여섯 장면을 그린 것으로 그중 '평안감사부임'에서는 영제교를 건너

십리 장림長林을 통과한 뒤 대동강을 건너 대동문으로 향하는 평안감사의 모습을 묘사했다. 평안감사가 타고 있는 배는

위에 있는 대루선大樓船으로 중국 사신 호의맹吳希孟이 쓴 '승벽정乘碧亭'과 중국 사신 허국許國이 쓴

 '벽한부사碧漢浮槎'라는 현판이 달려 있었다.




평안감사는 도임 행렬도 화려하고 성대하지만 감영에 도착하고 난 뒤에는 더 본격적으로 평양의 온갖 풍류를 맛볼 수 있었다.

연광정과 부벽루로 대표되는 화려한 누각, 기생을 옆에 두고 밤낮없이 열리는 흥겨운 잔치, 풍악이 울리는 사이로

아름다운 산수자연을 보며 흥취에 젖는 대동강 뱃놀이는 '평양'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그런데 이런 유락지遊樂地로서의 성격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고려와 조선에 걸쳐 의주에서 한양 도성에 이르는

의주대로가 사행로였으므로, 경유지 도처에서 사신들을 접대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감영 소재지인 평양에서 사신들은

좀더 오래 머무르면서 쉬었는데, 중국 사신들이 오기라도 하면 성대한 환영이 준비되어 있었다. 1499년에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예겸例兼이 평양에 왔을 때 환영하는 모습도 앞서 언급한 평안감사 도임 행렬처럼 성대했는데,

길 따라 온갖 놀이와 재주가 펼쳐졌다는 점에서 더 화려했다고 할 수 있다.


관찰사는 사신을 위해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거나 부벽루에서 잔치를 여는 방식으로 접대했다.

특히 명나라 사신들은 '기자箕子'가 다스렸다는 평양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러는 가운데 열흘 정도 평양에 체류하면서

 대략 20景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평양승적平壤勝迹」을 짓는 관습이 생겨났다.


「평양적」을 처음 지었던 당고唐皐가 선정한 20경은 금수산錦繡山, 모란봉牡丹峯, 대동강大同江, 덕암德巖, 주암酒巖,

능라도綾羅島, 백은탄白銀灘, 기린굴麒麟窟, 조천석朝天石, 정전유제井田遺制, 을밀대乙密臺, 연광정練光亭, 쾌재정快哉亭,

풍월루風月樓, 부벽루浮碧樓, 기자묘箕子墓, 문묘文廟, 단군사檀君祠, 기자사箕子祠, 동명왕사東明王祠였고 이후에는 덧보태고

빠지는 것이 있었지만 대체로 비슷했다.






「기성전도」국립민속박물관. 8폭으로 이루어진 회화식 지도다.

상단에 「기성전도」에 대한 시를 써놓았다. 거주지와 평양의 지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 20경의 명승지는 평양 도성에 산재해 있었기에 결국 평양 전역은 관광지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평양에는 기자 관련 유적이 있었고 참배할 여러 사당과 누각, 정자도 있었다. 배를 타고 대동강 위아래를 유람할 수도 있었고,

고대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감회에 젖을 역사 공간도 있었다. 『평양지』「교방敎坊」항목의 설명에서 강조했듯이

교방의 설립은 사신 행차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태평성세를 장식한다는 긍정적인 이유로 지속될 수 있었다.

평양의 풍류라는 것은 현실적으로경제적 풍요 위에서 현세의 즐거움을 극대화한 것으로만 보이겠지만,

조선시대 내내 사신을 접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기도 했다.



평양을 즐기는 법


보통강과 대동강, 금수산으로 둘러싸인 평양은 네 개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양부의 성 외에 다른 성도 쌓았거나 그 자취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해동지도 「평양부」에서 가장 왼쪽부터 외성外城, 중성中城, 내성內城(부성府城이라고도 함), 북성北城으로

구분되는데, 이 네 개의 성은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이 아니다. 내성은 고려 성종 때 쌓았다고 한다. 원래 동문은 장경문長慶門,

서문은 보통문普通門, 남문은 함구문含毬門, 북문은 칠성문七星門, 정동문은 대동문大同門, 정남문은 정양문正陽門으로 둘러싸인

구역이었다. 외성에는 남문 거피문車避門과 서문 다경문多景門이 있다. 기자箕子 때 만들었다는 설이 있지만 읍지에는 고려 태조 때

성을 쌓아 6년 만에 완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성을 외성으로 추측하고 있다. 외성은 지세가 평평한 저지대다.




「평양부」『해동지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병풍식으로 제작된 평양지도에 비해 평양의 지형을 비교적 잘 보여주고 있다. 17세기 이동한 감영, 18세기 초 만들어진 북성,

자취만 남은 외성과 중성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교통로를 붉은 선으로 표시했다.



그러데 1624년(인조 20에 평양성이 너무 커서 수비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고, 이에 따라 규모를 줄여 개축했다.

이때 제외된 구역이 서남쪽 일대이므로, 원래의 성문이었던 함구문과 정양문, 보통문은 모두 내성 바깥에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문 장경문, 서문 정해문靜海門, 남문 주작문朱雀門, 북문 칠성문으로 이루어진 내성이 완성되었다.

북성은 1714년에 높은 지대인 모란봉에 올라가면 내성이 보인다는 보안상의 이유로 지어졌다.

 을밀대 서북쪽 모퉁이에서 모란봉을 두르고 부벽루를 지나 내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평양성에서 무엇을 봤을까. 지도 가장 왼쪽에 있는 외성은 조선시대에 성 밖에 있었고,

행정적으로 중요한 구역은 아니었지만 중국 사신들이 평양에 오면 꼭 둘러보는 장소였다.

여기에는 네모로 구획되어서 '정전井田'으로 인식된 전답과 기자의 공간인 기자궁箕子宮 터, 기자정箕子亭 터가 남아 있다.

기자궁은 정양문 밖에 있고 기자정은 정전 안에 있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정전과 기자의 유적을 보면서 기자의 팔조목八條目을

떠올렸고, 기자가 이곳에 드리운 중화문명의 자취를 헤아렸다. 도 외성에는 평양의 사족士族들이 주로 거주했고 중성에는

인현서원仁賢書院이 있어 이 일대는 학문에 전념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평양도 십폭병풍」, 조선시대, 서울대박물관. 평양성과 그 주변을 그린 10폭 병풍이다.

평양을 그린 병풍은 적지 않게 남아 있으나 평안감사 부임 행렬이나 민간의 풍속 장면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의 세부도는 외성 그림이다. 화면 하단에 평안감사의 부임 행렬이 있고 그 뒤에는 양각도 섬이 있다. 네모진 구획 때문에 후대에

'정전'의 자취라고 인식되었으며 중간에는 기자정과 기자궁도 있었다. 병풍에서 하단은 동쪽으로, 대동강은 여기에서 서쪽으로

꺾이는데 이 일대 강물을 '구진약수九津弱水'라고 한다.



평양의 핵심 공간인 내성은 보통 대동강을 건너 대동문大同門을 통해 들어간다.

대동문 옆에는 연광정練光亭이 있고, 그 아래에는 서해와 가까이 있어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는 감조하천感潮河川인 대동강의

물이 넘칠 때 성안으로 범람하지 않도록 강물을 막아준다고 하는 덕암德巖이 있다. 그 덕암 위 성벽에 세운 누각인 연광정은 대동강과

성안을 모두 볼 수 있는 훌륭한 조망처였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풍광에 감탄하면서 '제일강산第一江山' 네 글자를 썼던 곳도

바로 연광정이었다. 대동문을 지나 곧바로 오른쪽에는 네모난 연못인 풍월지風月池가 있고 그 안에 호젓한 분위기의 애련당愛連堂이 있다.

다시 대동문 앞길로 가면 사신을 접대하던 객관 대동관大同館이 있었고, 그 옆에는 상쾌하기 그지없어

쾌재정快哉亭이라고 이름 붙은 정자가 있었다.




외성과 중성에 해당된다.

중성 훈련원 근처에서 민속놀이를 하는 모습과 이를 둘러싸면서 구경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 이색적이다.



대동관에서 더 왼쪽으로 가면 사당이 나온다. 단군사檀君祠, 동명왕사東明王祠, 기자사箕子祠가 있어서 참배를 했고,

대동관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평안감사가 있는 감영監營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내성의 동남쪽에 있었다가 17세기 후반에 위치를 바꾸었다.

북문을 나서면 기자의 무덤이 있었고 내성의 북쪽 모퉁이에 위치한 높은 을밀대乙密臺 밖에는 기생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선연동嬋娟洞이 있어 문인들이 한때 사랑했던 평양 기생들을 추억했다.


대동문에서 배를 타고 아름다운 기암절벽으로 유명한 청류벽淸流壁을 지나면 북성에 다다른다.

북성 지역은 오래된 영명사永明寺와 동명왕이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깃든 기린굴과 부벽루가 자리한 역사적 공간이다.

 특히 이곳에는 모란봉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단처럼 알록달록한 모란봉에 올라가 봄놀이를 즐기거나

초승대最勝臺에서 평양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다.




내성을 그린 장면이다.

 감사가 대동강을 건너 대동문을 통과한 뒤에 청유막을 설치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뒤로는 대동관과 향교, 중영이 있다. 위에 보이는 누각이 있는 성문이 보통문으로, 보통문을 통해 의주대로로 나갔다.

이 그림에서 대동문 근처 애련당은 흔적만 남아 있다.



대동강 뱃놀이도 빼놓을 수 없었다. 대동문에서 강물을 따라 하류로 배를 타고 유람하면 추자도楸子島, 두로도豆老島를 볼 수

있었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버드나무로 유명한 능라도綾羅島를 거쳐 술이 나온다는 전설이 있는 주암酒巖까지 갔다가

되돌아올 수 있다. 평양팔경으로 꼽히는 명소는 평양 전체에 편재해 있다.


을밀대에서 모란봉을 바라보면서 봄날의 경치를 감상하는 '밀대상춘密臺賞春', 대동강가 부벽루에서 달밤을 맞는 '부벽완월浮碧玩月',

북성에 있는 오래된 절 영명사에 들어가 고적한 분위기에 젖는다는 '영명심승永明尋僧', 평양을 지나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보통문에서

전송하는 '보통송객普通送客', 평양 외성의 남문인 거피문 앞에서 뱃놀이를 하는 '거문범주車門汎舟', 애련당에서 청아한 빗소리를

듣는 '연당청우蓮堂聽雨', 용악산의 푸른 산색이 돋보이는 '용산만취龍山晩翠', 대동강 북쪽 여울인 마탄에

봄물이 넘치는 것이 장관인 '마탄장춘馬灘長春'이 평양을 대표하는 풍경이었다.




북성에 해당된다.

강 중간에 있는 섬 능라도에서 판소리하는 장면이 특이한데, 판소리를 하는 인물 옆에

'명창名唱 모흥갑牟興甲'이라고 쓰여 있다. 북성 안에 있는 장소도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영명사를 비롯해

기린굴, 부벽루가 있으며 성안에 있는 모란봉 밑에는 최승대가 있어 사람들이 올라가서 풍경을 감상했다.



평양을 상징하는 또 다른 인상적인 풍경은 대동강의 불놀이였다.

정월 대보름, 사월초파일, 소동파의 적벽 뱃놀이를 본떠 7월 보름에 이뤄졌는데, 특히 사월초파일의 관등 행사가 유명했다.

모란봉이 등블로 가득한 산으로 변하고 대동강은 방석불로 장식한 배가 강물과 어우러져 그림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까만 밤을 수많은 등불로 밝혀서 대동강이 금빛으로 일렁이는 이 장관이야말로 평양의 화려함을 극대화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온 성을 밝히는 등불과 불놀이, 누각에서 벌어지는 잔치, 술동이와 기생들을 데리고 유유자적하는 대동강의 뱃놀이는

분명 화려하고 즐거운 일이었지만, 이러한 풍류에는 막강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평양감사향연도 平壤監司饗宴圖

전 김홍도, 19세기, 지본채색, 각 71.2×196.6cm, 국립중앙박물관






"관서關西에 이렇게 금이 많은데"


19세기 후반을 살았던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평안 감사 남정철南廷哲가 민영준民泳駿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남정철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계속 뇌물을 바쳐 고종은 그가 충성스럽다 여기고 크게 기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평안감사인 민영준이 작은 송아지가 수레를 끄는 모습을 금으로 만들어 고종에게 바쳤다. 이것을 받은 고종은 관서 지방에 이렇게 금이

많은데 조정에 올려 보내지 않고 남정철이 독식했다고 여겨 더 이상 그를 총애하지 않고 대신 민영준을 중용했다는 이야기다.

이 기록은 19세기 평안도의 금광 채굴 상황과 함께 평안감사가 처리할 수 있는 경제 규모가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평안 감영에서는 어떻게 막대한 자금을 운용할 수 있었을까? 평양은 대청 무역의 거점이었기에 막대한 경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평안도는 변경 지역이었으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부담도 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차례이 전란 이후 군량미는 비축되고 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준비 비용도 계속 축적되고 있었지만,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청 사신의 왕래도 줄어들면서 이 재원은 그대로

관에서 주도하는 재정 사업의 밑천이 되었다. 또 평안도 상인들이 연행사를 따라 중국으로 가 무역에 참여하면서 큰 이익을 거둔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는 의주 상인들이 북경을 자기 집 앞마당처럼 드나들었다는 기록부터

농사일을 버리고 금을 캐러 금광으로 가는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도 실려 있다. 서유구이 『임원십육지』에서도 중국 무역에서

 얻는 이익이 국내보다 몇 곱절에 이르며 평양의 번성함은 서울을 능가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자본은

농촌 수공업이나 광산 경영에 투자되기도 하고 고리대금의 밑천이 되기도 했다.


(……)


모든 곳이 그렇겠지만, 보기에 아름답다고 해서 다 좋을 수는 없는 법이다. 평양은 사신들의 경유지였고 감영 소재지였던 까닭에

사신을 접대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평양의 수려한 산천, 곳곳에 있는 유람할 만한 누정과 유적들, 거기에 유명한 평양 기생까지,

평양은 그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곳이다. 현전하는 여러 소설이나 야담만이 아니라 읍지에서도 평안감사는 평양 주민과 밀착

되어 있지 않고 어떤 거리감을 두고 있다. 사람들이 체감할 만한 관찰사의 선정善政이 눈에 띠지 않는다는 점도 생각해볼 만하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에게 평양은 비일성적인 곳이고, 야담엣거 나오는 것처럼 중국에 넘나들면서 밀무역하는 사람들, 흥청거리는

이곳에서 돈을 벌려고 모여든 유민流民들은 다른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부자가 된 사람들이 향임이 디어 대다수인 백성을 수탈하고, 다시 지방관들이 향임을 수탈하는 이 구조는 어쩌면 평양을

낭만적으로만 보는 이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람들은 평생에 한번쯤은 평양에 가서 풍류를 누리고

싶어했지만, 달리 보면 그 이색적인 체험에서 평양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평양 사람들이나 평양의

향토적 색채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그곳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군림하는 평안감사의 모습에 자신을 겹쳐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인용서적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시로 읽는 조선』





Free Spirit - Carol C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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