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지가람 실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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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實相寺)


828년(흥덕왕 3)에 홍척(洪陟)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開山) 한다.

홍척은 도의(道義)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禪法)을 깨우친 뒤 귀국한 인물이다.

 도의는 장흥 가지산에 들어가서 보림사(寶林寺)를 세웠고, 홍척은 이곳 실상사를 세운 뒤 선종(禪宗)을 전파하였다.






실상사 서삼층석탑 (實相寺 西三層石塔)  보물 37호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실상사 동삼층석탑 (實相寺 東三層石塔)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정도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실상사 석등 (實相寺 石燈)  보물 35호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다.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석등의 규모가 큰지라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본다고.






전문설명


경내(境內) 대광명전(大光明殿) 앞 원위치(原位置)를 고수(固守)한 이 석등(石燈)은

전형적(典型的)인 양식(樣式)에서 벗어난 고복형계(鼓腹形系)이다.

이는 전부재(全部材)를 완전히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등계(燈階)까지 구비(具備)하고 있다.

8각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폭좁은 기대석(基臺石)을 안치(安置)하고 각 측면에 안상(眼象)을 조식하였다.

귀꽃을 갖춘 하대연화석(下臺蓮華石)은 폭(幅)이 넓으며 판(瓣)안의 자엽(子葉)은 단형(短形)으로 선각(線刻)하였다.

고복형(鼓腹形) 간주석(竿柱石)의 중간고형(中間鼓形) 표면(表面) 중앙(中央)에는 3조(三條)의 대(帶)를 두르고

8곳에 4엽문장식(四葉紋裝飾)을 한 고견(鼓肩)에 16판(瓣)의 앙·복련(仰·覆蓮)을 장식하였다.

상·하(上·下) 양고(兩鼓)의 표면장식도 동일하다.


 이 석등은 보림사석등(寶林寺石燈)(국보 제44호)과 담양(潭陽) 개선사지석등(開仙寺址石燈)(보물 제11호)의

장단점(長短點)을 뽑아 절충한 양식이며 조성시기(造成時期)는 9세기말로 추정(推定)된다.







동서삼층쌍탑과 석등






석등과 동삼층석탑







약사전






약사전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實相寺鐵造如來坐像) 통일신라, 보물 제41호, 높이 266cm,


이 불상의 대좌와 광배는 전하지 않으며 두 발을 양 무릎 위에 올려놓은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는 나발이고 육계가 낮다. 크고 둥그스름한 얼굴은 살찐 편이며 눈이 옆으로 길게 찢어지고 입술이 작고 두툼하여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 불신은 건장한 편이며 통견의 법의가 밀착되어 몸의 굴곡이 드러나 보인다.


이 불상은 신라하대인 9세기 때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활발히 만들기 시작한 철불상 가운데

그 최초의 예란 점에서 크게 주목되고 있다. . 큼직한 육계(肉계), 촘촘한 나발(螺髮), 근엄하면서도 박력있는 얼굴,

당당한 가슴과 잘쑥한 허리 등은 신라중엽 불상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통견(通肩)의 불의(佛衣)도 얇고 탄력있게 표현하여 불상의 격을 잘 높여주고 있다.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내린 9품인 두 손은 새로 찾아낸 원래 철제손 그대로 1986년도에 복원한 것이다.

무릎 아래부분 역시 원래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철불 후면부에 큰 손상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복장 내부의 유물을 노린 자들의 소행으로 보인다.



















돌솟대






주춧돌의 규모를 보아 엄청난 크기의 높이와 면적의 구층목탑 내지는 전각이 서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복원을 거친다면,

 산내면과 지리산 일원이 한 눈에 조망되는 명소가 될 게 분명!






정 중앙에는 목탑 건물의 심초석과 심주목이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약사전·명부전·칠성각·선리수도원·누각·천왕문·화엄학림강당과 학사,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극락전과 부속 건물이 있다. 당우 가운데 보광전 안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베트남에서 이운해 왔다는 종이로 만든 보살입상이 있고, 범종이 걸려 있다.






남원 실상사 동종


실상사 동종(實相寺銅鐘 )

높이 28∼99㎝, 입지름 96∼99.5㎝,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7호


1967년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이미 상반부를 잃어서

파종(破鐘)으로 남아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유곽(乳廓)·비천상(飛天像)·당좌(撞座) 등이지만 우수한 수법을 볼 수 있다.

 하대(下帶)는 아래위에 가는 연주문대(連珠文帶)를 둘러 장식하고 그 안에는 당초문대(唐草文帶)를 정교하게 조각하였는데,

당초문 속에는 비천상과 당좌 바로 아래에 원형문(圓形文)이 있어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양식과 비슷하다.






남원 실상사 동종 비천상



종신(鐘身)에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2구의 주악비천(奏樂飛天)과 당좌가 배치되어 있다.

당좌는 중앙에서부터 연꽃·인동화문(忍冬花文)·연주(連珠)의 순으로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또, 주악상은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와 영락(瓔珞)을 위로 날리고 있는 형식이 성덕대왕신종과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을 연상하게 한다.

생황(笙簧)과 피리를 불고 있는 비천의 풍만한 모습은 신라불상의 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실상사의 창건때인 828년(헌덕왕 3) 함께 주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남은 부분의 입지름으로 보아 상원사동종보다 약간 큰 규모였으리라 추정된다고.







실상사 수철화상탑비(實相寺秀澈和尙塔碑), 보물 제34호


전체 높이 2.9m, 비신 높이 1.68m, 너비 1.12m. 비신은 푸른 돌로 되어 있으며,

 이수(螭首)와 대석(臺石)은 화강암이다. 비문의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비의 주인공인 수철(秀澈)은 신라 말기의 선승(禪僧)으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실상사의 제2조가 되었다.





 


893년(진성여왕 7) 5월 77세로 실상사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 비문에는 수철의 출생에서 입적 및 조탑(造塔) 경위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실상사에서 수철이 입적하였으나,

원래는 심원사의 승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深源寺수철화상으로 되어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글씨는 자경(字徑) 2㎝ 내외의 해서(楷書)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따랐다.







 비의 건립 연대 또한 명확하지 않으나

비문 가운데 ‘贈太師景文大王(증태사경문대왕)’ 및 ‘贈太傅獻康大王(증태부헌강대왕)’이라는

구절이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동문선』권33의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사은표(謝恩表)」 및 『동사강목』 효공왕 1년 7월조에

 위와 같이 전대왕(前代王)들을 추증(追贈: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줌)한 기록이 있으므로,

이 탑비의 건립 연대는 효공왕대(897~912)로 추정된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 달리 귀부(龜趺)가 없고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새긴 장방형의 대석 위에 비를 세웠다.

그리고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복련(覆蓮)을 둘렀다. 이수에는 구름 속에 반룡(蟠龍: 승천하지 않은 용) 두 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전액(篆額)이 음각되어 있는데,

조각 수법이 형식적이며 장엄 조식(莊嚴彫飾)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비음(碑陰)에는 일찍이 비가 쓰러져 1714년(숙종 40)에 중건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實相寺 秀澈和尙 楞伽寶月塔)

보물 33호


탑은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基壇)은 아래받침돌에 구름과 용무늬와 사자가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가 삼중으로 조각되어 둘러져 있다.

 8각의 탑몸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문(門)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얇고 경사가 완만하며, 처마부분에는 엷은 곡선을 이루고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 경사면에는 기와골을 표시하였고, 그 끝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다. 꼭대기에는 몇 층의 단이 있고,

그 위에 원형이 작은 돌에 있을 뿐 모두 없어졌다.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비 (實相寺 證覺大師 凝蓼塔碑) 보물 제39호


비몸돌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 하지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주는데,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는 비명칭을 새겨 두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의 신라 무열왕릉비와 같이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비 이수와 귀부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 (實相寺 證覺大師 凝蓼塔) 보물 38호

홍척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는 ‘증각’ 이다.  탑은 기단(基壇)은 8각형의 석재를 여러층 쌓은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들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고
윗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낮은 편이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門)을 새겼다.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실상사.






예전 실상사 모습(년도 미상)





짝을 잃고 홀로 된 실상사 다리 건너기 전 왼편의 석장승.













다리 건너 오른편 석장승.

















본디 총 네기의 석장승이 있었으나 예전 홍수 때 한기는 떠내려가 분실되었다고.


인용 : <다음백과> <실상사 홈피>






지리산(박경규 작

 Roman De Mareu Orche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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