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과 정자




춘천 청평사(淸平寺) 고려 정원(高麗庭苑) 영지(影池)


오봉산 줄기로 감싸인 아늑한 분지에 위치한 청평사 원림은 산수가 빼어난 경승지로 계곡, 폭포, 영지 등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청평사 원림은 선학(禪學)에 매진한 이자현에 의해 참선의 경역으로 승화된다. 그는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올랐으나 벼슬을 사직하고 청평산에 입산하여 보현원을 문수원이라 고치고 당(堂)과 암자를 지었다.

그리고 청평식암(淸平息庵)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겨 청평사 일대를 선원의 공간으로 다듬었다.


청평사에 있는 고려 정원(高麗庭苑)은 지금까지 밝혀진 정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본 교토[京都]의 사이호사[西芳寺]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여 년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

1981년 조사단의 지표발굴 및 측량조사에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연못인 영지(影池)와

거기서 400m쯤 떨어진 청평사 계곡 하류에서 정원 조성용 암석 및 석축을 발견하였다.







청평식암(淸平息庵)


그곳에서 다시 2㎞ 떨어진 상류에서는 이 정원을 만든 이자현이 새긴 ‘청평식암(淸平息菴)’이라는

각자(刻字)가 발견되어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영지 중심의 대규모 고려 정원임이 확인되었다. 


또, 구성폭포에서 식암에 이르는 2㎞ 9,000여 평의 방대한 지역에는 계곡을 따라 주변의 자연 경관을 최대한으로 살려

수로를 만들고, 계곡의 물을 자연스럽게 정원 안으로 끌어들여 영지에 연결시켰으며 주위에 정자와 암자 등을 세우는 등,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선(禪)을 익히는 정신수양의 도량으로 짜임새 있게 가꾸어졌음이 밝혀졌다.








영지는 연지(蓮池)와 달리 연꽃을 심지 않는다.

못의 수면을 고요하게 해 수면이 가지는 투영효과에 의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는 여러 사찰에 조성된 지당의 한 종류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은 청평사 영지를 보고 “네모난 못에 천 층의 봉우리가 거꾸로 들어 있다(方塘倒揷千層峀)”고 표현했다

이 영지는 북단에 자연석을 지하에 중첩되게 깔고 석축을 쌓았는데, 계곡물이 이 석축 아래로 스며들어 영지 수면 아래에서

물이 솟아오르게 하는 특이한 입수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는 세향원터, 부도, 청평루 등도 함께 위치하고 있다.













봉화 청암정(靑巖亭)


청암정은 조선 중종 때이 문신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 1526년(중종 21)에 조성한 정자이다.

30세 되던 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 때 파직당해 닭실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7년 뒤인 병술년에 현재도 남아있는 정침을 창건하고 그 서편에 석천거사 권내 선생과 장자 권동보를 위해 이 청암정을 지는 것.

중종 28년 복직되어 밀양부사 · 한성판윤 · 지의금부사 등의 요직을 역임했으나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구

례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삭주로 옮겨져 이듬해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자 내에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 새긴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청암정은 사진 왼편의 정침에 딸린 외별당 성격의 건물로 암반에 세워졌는데, 연못 주위로 심어진 

왕버들과 단풍은 계절마다 그 풍광을 달리해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곤 한다.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 정원 경남 진양군 명석면 용산리.


중원의 영향이 명백한 '무산십이봉'이 적용된 우리네 옛 정원이 적지 않았으나,

원래의 모습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은 그리 흔치 않다. 이곳 용산리 마을 정원이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 중 하나.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의 동산 아래 자리한 고택 앞 들판에 무산십이봉이 적용된 연못이 있다.

이 무산십이봉 정원은 박삼문의 18대손인 참봉 박헌경(현 소유자 박우희 씨의 조부)이 선대부 가선공(嘉善公)의 선영 아래

묘각을 중건하면서 풍수에 따라 지형을 형성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는 땅이 꺼진 자리에 물을 끌어들여

못을 조성하고 물 가운데 정자를 짓는 한편,기화요초를 심어 아름답고 운치있는 정원을 꾸며놓았다고 한다.

 이 정원이 완성된 것은 불과 80년 전으로,당시 일제치하의 궁핍 가운데 1929년의 극심한 수해로 기근에 허덕일 때,

당시 거부였던 박헌경이 집과 땅을 주는 대신 이 무산십이봉을 조성하게 하여 이재민을 도운 게 오늘의 결과라고 한다.

용호지와 용호정도 이때 함께 조성되었으며 서쪽 산간에는 용호사(龍湖寺)도 지어졌다고.








용호지 내수면적은 600여 평이고 무산십이봉이 줄지어 이룬 제방면적도 300평에 이른다.

봉우리의 높이는 5미터 안팎이고 고분과 같은 형태를 띄며, 물 가운데의 용호정은 팔모정 형태로 꾸며졌다.

정자 지붕에는당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태극무늬를 새긴 기와를 얹었는데, 지금도 그것을 볼 수 있다.

통배를 타고 정자를 드나들었다고 하면 여름이면 연향으로 온통 가득 차곤 한다.












영천 연정 고택(永川蓮亭古宅 )


경북 영천시 임고면 선원동 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다.

영남지방 대가의 보편적 꾸밈새를 볼 수 있는데, 이 고택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안채와는 뚝 떨어진 곳의 외별당이다.

냇가 옆으로 추녀에 연정(蓮亭)이라는 당호가 걸린 건물과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연못과의 궁합이 일품이다.











 여름 날 코끝에 밀려드는 연향을 기억하는 이는 안다.

온 몸의 열기가 빠져나가고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그 느낌 말이다.







연지 옆 계류의 대안(對岸)은 가파른 비탈로서 노송과 느티나무 등이 울창하고 안채 일대는 대숲이 감싼다.

계류 일대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으며 연지 또한 간섭이 배제된 듯 자연스런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고택의 분위기를 보면 쥔장의 고고한 성품과 드높은 식견이 어우러졌음을 간취할 수 있겠다.












함안 무기연당(咸安舞沂蓮塘 )


함안 칠원면 무기리에 있다. 왼쪽이 하환정, 오른쪽이 풍속루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함안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운 의병장 주재성(周宰成)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고 산의 모양을 본떠 놓았다. 이후 주재성은 연못의 이름을

 '국담(菊潭)'이라 하고 호를 삼았으며, 연못의 섬 돌에 '양심대(養心臺)',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새긴 각서가 있다.

"양심'과 '백세청풍'은 쥔장 스스로의 마음자리일 터이고 '하환(河換)'은 자족과 유유자적은

 결코 벼슬자리와 비교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연당의 연못가에 하환정(何換亭)과 풍욕루(風浴摟),충효사(忠孝祠) 등은 후대에 세운 건물들이다.

 이 연당은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조선 후기 연못의 실례로 조경연구자들의 순례 코스이기도 하다.













예천 초간정(醴泉草澗亭)


상금곡리에서 928번 지방도를 따라 약 5㎞ 정도를 올라가면 길 좌측으로 깊게 패인 계곡이 위치한다.

계곡에는 하천이 암반지역을 굽이쳐 흐르는데 하천이 굽이도는 위치에 초간정이 자리하고 있다.

 초간정은 절벽 위에 돌을 쌓아 만든 축대에 세워졌으며, 특히 정자 후면의 마루 끝에  앉으면  

암반 위를 흐르는 계류의 모습과 함께 숲을 감상할 수 있다.






 

조선 선조 때 학자인 초간 권문해가 1582년(선조 15)에 지은 정자이다.

임란 때 소실된 것을 1612년(광해군 4)에 재건하였는데 1636년(인조 14)에 다시 붕괴되었던 것을

 권문해의 현손이 정면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으로 다시 세웠다. 후로 한 번 더 불에 타서 다시 세웠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며 퇴락했던 것을 고종 때 다시 중수한 것이 오늘 날 우리가 보는 초간정의 모습이라고.













영덕 침수정(枕漱亭)

수려한 곳을 찾아다니던 손성을이라는 인물이 이곳에 정착하여 지은 정자다.








이곳 침수정 계곡 일원(枕漱亭溪谷一圓)은 태백산 줄기의 끝자락으로 팔각산과 동대산의 기암절벽이

이루어낸 깊은 계곡이다. 인적이 없는 바위 틈 사이를 지나 오십천으로 흘러내린다.














진안 영모정(鎭安 永慕亭)


진안 백운면 노촌리에 있다. 선조 때 이곳에 살던 효자 신의연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69년 고종의 명에의해 세워진 것으로 계류 옆 암반위에 얇은 돌 조각판 너새로 지붕을 이은 소박한 자태다

비사동 골짜기로부터 흘러내리는 계류는 곳곳에 수려한 경관이 전개되어 있다.














용연정(龍淵亭)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입구에서 덕유산의 토옥동계곡을 따라 약 1km 올라가면 

 폭포가 소를 이루는 용연이 나오는데 용연정(龍淵亭)은 용연 바로 옆의 언덕에 서 있다.








용연정은 양악리에 살던 정존성이라는 이가 소요하던 곳에 그의 손자 정기수가 세운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 중앙칸에 용연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 벽면에 한말의 우국지사인 연재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지은 기문과

심석 최병심(崔秉心)이 지은 제액이 걸려 있다.







용연정 바로 옆으로는 고려 후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수 양악탑(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1호)이 서 있다.












풍기 금선정(錦仙亭)


풍기읍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밭과 논 가운데 울창한 송림이 길게 뻗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금선정은 이 송림 한 가운데 형성된 암반위에 자리하고 있다.








금선정 주위는 평탄한 농지인데, 그 한가운데를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냇물이 토층을 파헤쳐

흙 속에 깊숙히 뭍혀 있던 크고 작은 암석을 노출 시켜 가히 심산유곡의 정취를 풍긴다.







금선정을 받치고 있는 금선대(錦仙臺)













광한루원  연못가의 돌 자라. 용궁은 이상향이자 선계이지만 갈 수 없는 곳.

대신 정원 속에 상징물들을 배치하여 현실 세계에 용궁을 구현하였다.







 창방에 장식된 토끼와 거북.  '광한루'는 달 속의 궁전인 '광한전'에서 따온 것.













소쇄원 죽림(瀟灑園竹林)



















보길도 세연정






낙서재(樂書齋)












영양 서석지瑞石池














 만휴정 전경       



안동 만휴정(安東晩休亭)


조선시대의 문신 김계행(金係行)이 노년에 고향인 안동 풍산을 떠나 독서와 사색을 위해 즐기기 지은 별서이다.

내부에는 김양근의 만휴정중수기문(1790)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인들이 쓴 기문이 있으며,

 만휴정(晩休亭), 쌍청헌(雙淸軒)등의 현판이 보존되어 있다





 송암폭포 확대 이미지       




정자에서 바라보이는 계곡의 깨끗한 바위와 “보백당만휴정천석”이라고 쓴 암각, 청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시문,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가훈 등은 김계행의 청백리사상을 시대적 교훈으로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이곳이 작정자가 은일하며 자연과 벗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안빈낙도하고픈 사상이 묻어있는 곳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인용:『한국의 정원』· 다음백과








Andante Veneziano - Rondo Venez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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