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극락암







혜암스님이 경봉스님과 선문답을 나누었던 삼소굴








혜암스님이 경봉스님 회상에서 정진했던 극락암






경봉스님이 계실 때는 통도사 극락암 가는 길이 아주 불편했던 것 같다.

 1965년도만 해도 경부선 물금역에서 내려 양산 신평행 버스를 타고 갔다가

거기서부터 10여 리 되는 극락암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이때 혜암은 경봉스님의 다음과 같은 하안거 해제법문을 듣고 크게 공감했다고 한다.

 출가한 이후 부처님법 하나만 믿고 치열하게 정진해왔던 자신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 오늘 우리 선원의 여름 안거 결제법문을 하자니 아무리 천언만담을 하고 팔만사천 경전을 입으로 설교하더라도 말이요 문자이다.

이 도리는 입을 열면 어긋나고, 입을 열지 않으면 잃게 되고, 그렇다고 입을 열지도 다물지도 않으면 십만팔천 리나 멀어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도리를 알려고 하여 이 도리를 마음이다 혹은 성리(性理)다 혹은 불성자리다 혹은 한 물건이다,
 라고 하지만 다만 대명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그림을 잘 그리는 이가 그려낼 수도 없고, 소진(蘇秦) 장의(張儀)와 같은 구변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오고 가고 앉고 눕고 말하고 고요하고 시끄러운 일상생활에서 항상 이 자리를 쓰고 있고,
화화초초(花花草草) 두두물물(頭頭物物)에도 이 자리가 온통 그대로인 것을 따로 찾고 있다. 오늘 묵묵히 앉아 있다가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 법상을 쳤는데 눈으로 주장자를 역력히 봤고, 귀로 법상 치는 소리를 역력히 들었다.

역력히 보고 들은 여기서 알아야지 그밖에 따로 현묘한 것을 보고 듣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주장자를 들어 보인 뒤 법상을 치고는
‘산은 은은하고 물은 잔잔히 흐르는데 산꽃은 웃고 들새는 노래해 지금 저 나무 위에서 새가 호르르 호르르 하네’ 라고 읊조렸다.

산꽃 웃는 것과 새 우짖는 소리에 법문이 다 들어 있다. 안개는 새벽하늘에 피어오르고 비는 청산을 지나가나니
모든 만물이 비로자나부처님이요, 온갖 것이 그대로 연화장세계로다. 법상을 치고 억! 하고 할을 했을 때,
 눈 꿈쩍하는 사이에 법문을 알아들어야 한다. 여러분이 나를 볼 때 법상과 내 몸의 전체가 여러분의 눈에 다 들어갔고
, 내가 여러분을 볼 때에 여러분이 내 눈에 다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는 곳에 도가 있다. 이 도리를 알면 눈만 꿈쩍해도 알고 손을 들어도 알고 발을 쑥 내밀어도 알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라야 멋들어지게 법문하고 들을 수 있는 것이다
. 아는 이는 이렇지만 모르는 이는 천리만리만큼이나 아득한 것이다. 부싯돌에서 불이 번쩍하는데,
그 불빛에 바늘귀를 꿰더라도 오히려 둔한 것이다. 그보다 빠르니 그렇다.
 
 지지부진 진취가 없거든 산에 가서 발을 쭉 뻗고 실컷 울어라. 뼈에 사무치는 울음을 울어야 한다.
 이 공부는 철저하게 생명을 걸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서 돈 버는 것도
 10여 년간 풍풍우우(風風雨雨) 피땀 흘려야 가능한데, 하물며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무가보인
 자기보장(自己寶藏: 마음부처)을 찾는 수행은 생명을 걸고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저 간단없이 오나가나 앉으나 누우나 일여해져서 전에는 그렇지 않던 것이 그저 밥을 먹을 때에도 들리고
가도 들리고 대소변을 보든지 이야기를 해도 목전에 역력히 드러남은 물론 꿈 가운데서도 일여해서 화두가 독로해야 한다.
 
 
흘러가는 시냇물 가의 물소리를 많이 듣고 자란 대를 베서 퉁소나 젓대를 만들면 그 소리가 여느 대밭의 대보다
소리가 배나 곱다. 오동나무도 보통 산중에서 자란 것보다 물가에서 물소리를 듣고 자란 것을 베서 거문고나 가야금을 만들면
 소리가 배나 곱다.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이라도 귀를 지나가면 누구에게나 있는 여래장(如來藏)으로
 통하게 되는데, 이 여래장을 통해서 지나가게 되면 언제든지 나오게 된다.>







혜암스님이 선방 대중들에게 절을 받았던 극락암 법당 뒷모습





혜암이 경봉스님을 다시 찾은 것은 5년 뒤 늦가을이었다.

1970년 51세 때의 동안거로 이때가 경봉스님 회상에서 마지막 정진이었다. 마지막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동안거를 마치면서 경봉스님이 선원의 모든 대중을 불러모아놓고 선문답을 한 뒤, 혜암에게 큰절을 올리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혜암은 게송을 지어 경봉스님에게 보였다.




靈山會上靈鷲峰 萬里無雲萬里通 
 영산회상의 영축봉이여 구름 한 점 없으니 만리에 통했도다
 
世尊拈花一枝花 歷千劫而長今紅 
 세존께서 들어 보이신 한 송이 꽃은 미래세계가 다하도록 길이 붉으리
 
拈花當時吾見參 一棒打殺投火中 
 꽃을 들 때 내가 참석하여 보았다면 한 방망이로 때려죽여 불속에 던졌으리라
 
本來無物萬言語 天眞自性空不空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언어마저 끊겼는데 진실한 본래성품은 공하되 공하지 아니하도다



수행자로서 자기세계를 확실하게 보여준 게송이었다. 세존의 가르침이 영원하겠지만

역사 속의 인간세존을 때려죽이고 불 속에 던진다는 것은 자신의 본래성품을 확철하게 깨닫고 보았다는 선언이었다.

아무튼 혜암이 대중의 절을 받고 이와 같은 게송을 읊조린 것은 큰 사건이었다. 전국의 선방에 선승 혜암을 알리는 분기점이 되었다.

실제로 이후부터 혜암을 따르는 무리가 나타나 어디를 가든 혜암 회상이 생겼던 것이다. 극락암을 떠난 지 2년 만이었다.

배를 타고 가야만 하는 남해 용문사로 숨어들어 갔지만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선객이 40여 명이나 됐던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




세 달 만에 다시 가야산 해인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혜암스님께서 수행했던 곳을 순례하는 동안 나는 스님께서 정진하셨던 산을 중심으로 돌았던 것이다.

 오대산, 지리산, 태백산이 그곳이다. 나는 스님이 출가했던 가야산 해인사에서 출발하여 세 달 동안 오대산 오대와

지리산의 상무주암과 도솔암 등의 암자와 태백산 동암을 거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스님께서 말년에 대중법문을 하고 열반한 곳이 가야산 해인사였기 때문이다.


해인사까지는 승용차로 내 산방에서 3시간 30여 분의 거리다.

 아침 7시 32분에 내 산방을 떠난 나는 11시가 못 되어 해인사 산문을 통과하고 있다.

 세 달 전 가야산은 태풍의 상처가 역력했는데 지금은 말끔하게 치유돼 산과 계곡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낙락장송들도 의젓하고 계곡물도 힘차게 흐르고 있다. 어느 새 12월의 문턱에서 만추의 흔적도 다 씻겨나간 듯하다.

 나는 습관처럼 최치원의 둔세비가 있는 홍류동에서 멈춘다.


여태까지는 최치원의 입산을 정치적 좌절에서 그 이유를 찾았는데, 오늘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몸은 세속에 있었지만 생각은 늘 가야산에 두고 살았던 것 같다. 친형이 해인사 승려였던 것이다.

그는 세속에서 백일몽 같은 행복을 찾기보다는 입산해서 영원한 행복을 구하고자 몸에 맞지 않은 관복을 벗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그러고 보니 최치원이야말로 신라의 유마거사였다는 생각이 든다. 다 알다시피 『유마경』의 주인공인 인도의 유마거사는

 부처님 당시 출가하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은 거사였던 것이다. 출가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무엇에도

걸림 없이 자신의 인생을 주인공으로 사는 것. 이를 일러 해탈이라 하고 자유라고 하는 것일 터이다.


혹시라도 입산을 도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이 잘못 돌아갈 때는 분연히 세상 속으로 발걸음 하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이다.

 말세가 되면 진승(眞僧)은 하산하고 가승(假僧)은 입산한다는 금언이 있다. 혜암스님도 조계종단이 흔들릴 때 원로회의 의장으로서

 하산한 뒤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힌 뒤 개혁종단을 탄생시켰던 역사가 있다.







성철스님과 혜암스님이 선객들을 지도했던 해인사 소림원





해인사 선방은 소림원이다. 해제 기간이어선지 소림원은 텅 비어 있다.

그러나 며칠 후(음력 10월 15일)면 방부를 들인 선객들로 꽉 찰 터이다. 혜암스님의 진면목은 정진력에 있다고 본다.

방장이 되고 종정이 되었다고 해서 선방 좌복을 떠나 본 적이 없는 분이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선객들은 혜암스님 법문을 사무치게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육조단경을 강의할 때, 외람되게 육조단경을 버릴 때 견성하는 것이요, 육조스님의 종노릇은 할 수 있지만

언제 견성 성불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비법(秘法)이라는 것이 육조스님이나 부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몰라 무슨 공부를 하겠습니까? 개개인에게 비밀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강의를 받아야 하는가? 참말로 구경각의 노정기를 다 알았다면 필요 없는 것이지만, 노정기를 모르니까 알아야 하고,

또 병통에 걸릴 수 있으니 병을 고치려고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조사 말씀을 배워야 할 뿐입니다. 허물이 없는 사람은 공부하는데

이런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 들을 때 이리 흔들리고, 저런 말 들을 때 저리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를 딱 세워놓고 공부해야 합니다.

힘없는 숲처럼 동쪽에서 바람이 불면 동쪽으로 넘어지고 서쪽에서 불면 서쪽으로 넘어지듯 하면 언제 성불합니까?

 ‘이 뭣고?’ 하는 당처가 부처님 자리이고 성불하는 자리입니다. 흔들리면 안 됩니다. 경전 백 권을 외워도 성불 못 합니다.


-문자에 의지해서 법을 설해도 삼세제불의 원수요, 경을 한 글자라도 여의고 정법을 설한다 하더라도 마구니 설이라.


그럼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주먹을 폈다 오므렸다 해야 산 주먹이 되는 것입니다. 쥐고만 있어도 병신, 펴고만 있어도 병신 아닙니까?

모든 법이 방편이므로 그때그때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것과 같이 버리기도 하고 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일정한 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귀중한 부처님이나 조사의 말씀에 있어서도 말입니다. 거기에 가서 속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운수객입니다. 동서남북에 집착하지 않고 앞으로 뒤로 좌로 마음대로 자유스러워야 합니다.

우리 운수납자는 걸림이 없습니다. 하물며 화두도 망상입니다. 할 수 없어서 화두 공부하는 것이지 화두가 무슨 도입니까?

비밀법입니다. 도이면서도 도가 아닙니다. 도는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수행자가 되어 머리 깎고 목욕하고 옷 벗고 입고,

해제하고 결제만 하면 누가 공부시켜 준다고 했습니까? 신실히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처소가 따로 없습니다.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할 줄 몰라도 딱 결정한 마음을 세워야 합니다.

할 줄 모르면서 밤낮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려서야 되겠습니까? 부처도 내 공부를 해주지 않습니다.


죽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수좌입니다. 생명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출가해서 나올 때 벌써 조사입니다.

죽기로 결사해 모든 난행, 고행을 이겨내는 군인과 같습니다.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해서 성취한 사람 있습니까?

수월하게 한 사람도 있고, 뼈가 저리게 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차별이 있기는 하나 이 공부는 내 목숨과 바꾸는 공부입니다.

 죽기로 결정해 강직한 마음으로 본래 마음을 찾는 것이 운수객입니다. 수좌의 생명은 도입니다.


그런데 부끄럽게 집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사회에서 배운 시비를 여기서도 합니다.

 그것은 수좌가 아니고 선객이 아닙니다. 나는 시비를 꿈에라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어느 절에서도 죽을 주든지 썩은 콩을 주든지 그런 시비는 하지 않았습니다.


(·····)


사람에게 비법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공부하면 시절인연이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서울 가는데 서울이 안 나올 턱이 있습니까? 글을 읽다 깨칠지 바람 불 때 깨칠지 모릅니다.

신짝이 벗겨지는 것에 놀라 깨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화두 하나만 놓치지 않고 공부하면 됩니다. 비법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재미없다고, 해보니 별 수 없더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꼭 믿고 해나가면 천상천하 보물이 내게 있는데

남부러울 것이 뭐가 있습니까? 속세에 사는 어느 처사가 화두를 받아 행주좌와어묵동정으로 애를 쓰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어느 날 화장실에 가 간절히 ‘이 뭣고?’ 하는데, 개구리가 개골개골 하는 소리에 탁 깨쳐버렸습니다.

 깨달아 오도송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봄 하늘 달 밝은 밤에 개구리 우는 소리가
온 누리를 꿰뚫으니 한 집안이 되더라.

(·····)

기승전결의 얘기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두서없이 전개되는 법문에 어리둥절해하겠지만 그래도 곱씹어보면
 ‘부처도 내 공부해주지 않는다’는 스님만의 분명한 기운이 느껴진다. 내가 공부해 부처가 되어야지 부처가 내 공부 해준다는
 환상을 버리라는 말씀이 죽비처럼 다가온다. 주체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라는 간절한 당부이시다.
‘서울 가는데 서울이 안 나올 턱이 있습니까?’ 목적이 달성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공부해야
한다는 스님의 절절함이 법문 곳곳에 묻어 있다.







원당암 만추의 그늘에서 묵언중인 미소굴




원당암에 오를 때마다 나는 늘 보광전보다 혜암스님의 영정사진이 있는 미소굴로 먼저 올라간다.
미소굴 입구 기둥에 쓰인 ‘공부하다 죽어라’가 오늘 따라 더 가슴을 친다. 세 달 전에 보았던 ‘공부하다 죽어라’가 아니다.
 세 달 전 나는 그것이 참선공부하는 스님들만의 문법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저잣거리에 사는 우리들 모두에게 던지는 화두인 것이다.
장사하는 하는 장사꾼은 장사하다 죽어야 할 것이고, 기술자는 기술을 연마하다 죽을 것이고,
 나는 글을 쓰다 죽어야 할 거라는 법구(法句)이다.

그렇다고 정말 죽는 것일까? 미소굴 문을 열고 들어가 스님 영정사진 앞에 엎드리고 일어나니 스님이 미소 지으며 답하신다.
 
‘공부하다가 죽으면 안 죽어요. 옳은 마음으로 옳은 일 하다가 죽으면 안 죽어요.’
 
공부하되 ‘옳은 마음’으로 할 것을 경책하신다. 스님의 말씀은 늘 단순하고 명쾌하시다.
 옳은 마음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진짜 죽는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무엇을 하되 대의(大義: 옳은 마음)를 잃어서는 안 된다.
수좌의 공부 끝은 중생제도로 돌아가야 하고, 세상 우리들의 공부 끝은 나보다는 남을 이롭게 하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혜암스님의 법문 한 구절에 발걸음을 멈추다





스님께서는 수행을 시작할 때와 입적할 때가 같았다고 전해진다. 똑같이 정진하는 자세였다고 한다.
등을 방바닥에 대지 않는 장좌불와 수행 모습이 그것이다. 2001년 12월 31일 이곳에서 입적하실 때도 의자에 앉은 채
가야산을 바라보는 자세로 돌아가셨던 것이다. 스님의 세상나이 82세 때였다.
 
미소굴 마당으로 나서니 해인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편으로는 가야산 정상이 성큼 다가와 서 있다.
가야산이 늘 바쁜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는 듯하다. 문득 초의선사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청산이 바삐 가는 흰 구름을 보고 웃는다.
靑山應笑白雲忙
 
 
그러나 이곳 가야산에서는 구름이 바쁘지 않다. 청산처럼 묵묵한 모습으로 허공에 떠 있다.
이런 구름을 와운(臥雲)이라고 한다. 또다시 까마귀 한 마리가 나타났다가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가야산 산자락을 넘어간다.
와운도 곧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 인생도 조각구름과 같이 생멸하는 것이니
더 늦기 전에 내 목숨과 바꿀 그 무엇에 온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혜암스님 어록




참선은 살길을 찾는 공부다


나의 본래면목
우리 중생은 환幻으로 왔다가 환을 따라 모두 가버립니다. 가고 오는 것이 다 환 가운데의 일입니다.
환 속에 환 아닌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나의 본래면목이요, 본래의 몸입니다.


산 부처님, 죽은 부처님
벌레를 도와주는 것이 나무토막이나 돌멩이, 쇠를 녹여서 만든 법당의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것보다 공덕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법당의 부처님 앞에서는 겁을 내고 죄 지을 마음을 안 내는데,
보잘것없는 벌레는 부처님이 아닌 줄 알고 함부로 해하려고 합니다.

미물들도 천한 것이 아닙니다. 쥐 속에도 부처님이 있어요. 이 시간만 쥐 몸으로 받았지 실제로는 털끝만치도
모자라지 않은 산 부처님이예요. 닭 모이 주듯이 쥐에게도 밥 먹으라고 놔두면 구멍도 안뚫고 그래요,
쥐를 잡으려고 하니까 쥐도 사람 마음을 용케 알고 책도 찢어놓고 농 속의 비단 치마도 물어뜯는 거지요.
내 집에 온 쥐를 잡으면 다른 데 있는 쥐가 부고를 받고 조문 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만이 제일이 아닙니다.


마음은 하나
바다에 파도가 천 개가 날 때도 있고, 만 개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를 떠나서는 파도가 없듯 여기에 이렇게 사람의 수가 많아도 마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네 마음, 내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뚱이만 네 몸뚱이, 내 몸뚱이가 따로 있지
마음은 바다가 하나밖에 없듯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참불공
복 짓는 것도 잘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나한데 복 지어라 하고 가르쳐준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거룩해서 공양한다고요? 시방 부처님한테 여러 가지 다 갖다 바치더라도 고통받는 한 중생을 도와주는 공덕만
못하다고 합니다. 남을 마음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돕는 것이 언제 어디서든지 불공을 하는 법입니다.


부처님 생일에

석가세존이 이 세상에 나오지 않고
달마가 인도에서 아니 왔어도
불법은 온 누리에 두루하여
봄바람의 꽃은 활짝 피어 있도다.



부처님 거울, 중생의 거울
부처님의 거울도 거울이고, 우리 범부의 거울도 똑같은 원료의 거울인데, 부처님 거울은 때가 없으니까
모듯 것을 다 비추어 볼 수 있는데, 우리 범부의 거울에는 때가 끼어 있어 모든 것이 안 보일 뿐입니다.


자성으로 보는 능력
허공 속에 만물이 다 들어 있는 것처럼 우리 본마음만 알면 배우지 않아도 그냥 한목에 다 알아집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마음에 물든 바가 없어 무심이 되고 망념이 나지 아니하여 주관과 객관의 마음이 없어지면
일체가 다 때가 없어져서 청정무구한 까닭에 능히 자성으로 보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공空

해는 천년 전에도, 천년 후에도 그 해지 다른 해가 아닙니다.

물은 만년 전에도 밑으로 내려가지 위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법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옛 사람이 있고 오늘날 사람이 있지 법은 예와 이제가 없습니다. 사람이 어리석고 지혜가 있을지언정

도는 성하고 망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도인데 불법이 망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우리 마음이 어떻게 망하겠습니까?



법신法身

이 육신은 눈으로 보이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참나, 법신은 육안으로, 고기 눈으로는 억만년 공을 들여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 눈은 개똥불과 같이 어리석고 둔합니다. 법신은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 부자

참선해서 나를 알면 천지가 다 내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도 닦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내가 공부만 하면 천지가 내 주먹 안에 다 들어오는데 그 누구를 부러워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복福

사람이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집 식구만 생각하면 어찌 지옥에 안 가겠습니까?

이 세상은 나 혼자 나올 수도 없고, 나 혼자 살 수도 없는 곳입니다. 모두가 남의 혜택으로 날마다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도 남을 도와주는 실천을 하십시오. 남을 좋게 해주면 복을 안 받으려고 해도 저절로 복이 받아집니다.

옛날에는 도인들이 전부 채소밭 가꾸는 데서 나오고, 부엌에서 나오고, 머슴살이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바다 같은 불법

부처님은 "네가 성인이고, 네 마음을 닦으면 네가 부처다" 라고 가르쳤는데 다른 종교는 구원받고, 도움은 받을 수 있지만

성인은 되지 못한다고 하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사람들이 다른 종교를 고생고생하며 믿어라도 강물이 바다로 들어오듯이

내생에는 불법으로 그 사람들이 들어올 겁니다. 냇물, 강물이 바다로 가지 갈 데가 없는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불법은 사람이 들어오는 바다이므로 어떤 종교든지 불법으로 다 돌아옵니다. 몇 생이 지난 뒤에는

 다른 종교를 믿어도 수지맞지 않으니까 돌아다니다가 다 들어옵니다.




관세음보살

자성을 깨달으면 바로 부처이고, 자비심이 관세음보살이니 관세음보살 보고 나 도와달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관세음보살 노릇을 해야지요. 남을 도와주는 사람은 관세음보살입니다. 남을 도와주면 기도를 안 해도 복을 받게 됩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남을 도와줬다고 거지 될 것 같습니까? 남을 도와주면 참말로 내가 살아날 일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자비심은 관세음보살이고, 내 마음을 버리고 양보하는 희사심喜捨心은 극락세계 대세지보살입니다.




불법은 인간 혁명

참선이란 인간 본래면목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깨달음의 길이요, 인간 혁명의 길입니다.

불교는 인간에게 최상의 혁명입니다. 본래의 길에서 탈선된 채 죽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안 죽는 길, 살길로 혁명해서 찾아가는 길이 바로 불법이고 참선입니다.



마음은 유아독존

중생들은 낮에는 밝은 것에 의지하고 밤에는 어두운 것에 의지해 살지만 우리 마음은 이 세상의 차별적인 법하고

상대가 끊어졌기 때문에 짝이 없습니다. 내 본래 마음은 성인도 아니고 범부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복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고 아무것도 붙을 수가 없습니다. 뭉칠 때는 전부 하나가 되지만 유아독존입니다.



회광반조廻光返照

"아무개야" 하면 "예" 합니다. 그때 입이 "예" 하지 않을진대 "예"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를 회광반조, 돌이켜 비춰봐야 합니다.

그런데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병입니다. "예" 하는 것이 이 뭣고? 하고 찾아보면 바로 그것이 주인이고 부처입니다.

회광반조, 바깥으로 따라가지 말고 다시 말해서 죽으로 가는 길에 따라가지 말고 안으로 돌이키면 다 살길이 생겨납니다.










참선은 살길을 찾는 공부

참선하는 길은 격외선格外禪이라 하여 팔만대장경을 떠나서 따로 있습니다. 길이 다릅니다.

그런데 참선도 안 하는 복 없는 사람들이 팔만대장경을 뒤적거리고 거기서 배워 알려고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개가 날아가버리고 없는 꿩 잡으려고 헤매는 것과 같은 거예요.

이미 꿩은 도망질해버렸는데 거기서 몇십 년을, 백 년을 뒤진다고 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속지 말고 바른 길, 살길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참선은 부처되는 공부

시방세계에 죽어가는 사람을 한몫에 살려줘도 공덕이 안 됩니다.

그런 죽어가는 송장들 살려주는 공덕도 눈 깜짝할 시간에 "이 뭣고?" 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참선하는 값이 비쌉니다.

복 없는 사람은 참선을 못합니다. 재미도 없고, 공부해봐야 안 되는 것 같지만 비쌉니다.

 아무리 천하에 없는 좋은 일을 다 하더라도 부처는 못 됩니다. 그러니 말귀를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는 전생에 무슨 복을 지어 가지고 이런 법을 만났는가?"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참선은 자성공양自性供養

참선은 자성공양입니다. 자성공양 하는 사람의 공덕을 입으로 칭찬하는 것은

 백천 제불諸佛이라도 감히 꿈꿀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칭찬할 수 없습니다.



처음으로 참선하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참선하는 사람에게 부탁할 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원력을 세워야 됩니다. 원력은 자동차의 핸들과 같습니다. 자동차가 새것이라도 핸들이 고장나면 소용이 없듯이

'내가 백 번을 죽더라도 이 참선을 해서 도인이 돼야겠다'는 원력을 세우십시오. 죽더라도 참선을 해서 도인이 돼야겠다'는

원력을 세우십시오. 두 번째는 나 혼자는 공부 못하니 가르쳐주는 사람을 찾아가야 됩니다.

세 번째는 언제든지 좌선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일할 때나 일 없을 때나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누웠을 때나

 걸어갈 때나 참선하는 마음을, 화두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화두를 놓치면 송장입니다.

네 번째는 모든 일을 할 때에라도 "이 뭣고"를 생각해가면서 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참선하는 사람들은, 나는 살길을 찾아가니까 내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돈 없다고 얼굴 찡그리고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제일 높은 사람이 되었으니 못난이처럼

찡그린 표정을 하고 다녀서는 안 됩니다. 참선하는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입니다.

부처님은 항상 밝고 쾌활한 표정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삼킨 사람이 바로 참선하는

사람입니다. 달을 집어 삼킨 사람이 참선하는 사람입니다. "이 뭣고>"를 하면 해나 달덩이보다 더 밝은 것이 나오니까

그런 표정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얼굴을 활짝 펴고 다녀야 합니다. 그래야 도와줄 사람도 생기고

좋은 귀신도 따라다닙니다. 어두운 표정을 하는 것은 운명이 나빠지니까 근심 걱정하는 표정을 하지 말고

 '내가 제일이다' 하는 마음을 가지면 얼굴에 제일이라는 왕王 자가 붙습니다.

여덟 번째는 참선하는 사람은 적어도 기초적인 가르침을 이해해야 합니다. 가르침을 이해할 때 비로소 길이 바르게 되고

진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는 말도 또 까먹어버리니까 언제든지 듣고 또 듣고 날마다 밥 먹듯이 자꾸 들어야 합니다.



성성적적惺惺寂寂

꺼진 불과 같이하여 마음이 벽처럼 되어 화두가 성성적적하여야 합니다.

화두가 분명하니 의심이 분명한 것을 성성이라 하고, 망상이 하나도 없는 것을 적적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성성적적이라고도 하지만 적적성성이라고도 합니다. 화두가 분명히 들리면 망상이 안 나오고, 망상이 하나도 없이

조용해져버리면 화두가 잘 들리기 때문에 이렇게 붙여도 맞고 저렇게 붙여도 맞습니다.



선禪의 삼매

선은 가끔 삼매의 경계를 이룹니다. 그러나 시나 음악이나 미술에서 이루어지는 삼매와는 다릅니다.

선에서의 삼매는 자기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삼매는 무기無記에 떨어집니다.



공부하는 사람

공부는 양심을 속이지 않고 진실해야 되는데 어중간한 사람이 제일 공부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알려면 확실하게 알든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시키는 대로 소금 지고 물에 들어가라 하면

물에 들어가는 그런 사람이 도를 빨리 깨닫습니다.



도 닦는 공부

세상 공부는 오늘 배우면 요만치 한 권씩 배워 내일이면 두 권 알아지고 한 달 후면 열 권 알아지는 것같이

쌓아가는 공부인데 도 닦는 공부는 한 번에 다 알아버리는 공부인 줄 알아야 합니다.



참선은 업장소멸

참선을 하다 보면 분별 망상의 업장이 소멸되고,

소멸되면 화두가 타파되어 법계의 생명이 터져버려서 견성성불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와 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으로 서게 됩니다.



화두는 삼팔선

도란 이 세상의 허망한 법하고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딱 붙어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두는 성불의 방으로 가는 문고리와 같은 것입니다. '화두 당처가 부처님 마음자리다' 그런 대목이 나오는데

한 생각만 뒤집어보면 바로 부처님이 되어버립니다. 도 자리하고 딱 붙어 있는 삼팔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화두는 전쟁 무기

허망한 것을 모조리 소탕해서 참마음, 참나를 찾아야 성불하게 되고, 부처를 이루어 일체 구속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 우리 불자들의 구영究竟 목적입니다. 허망한 것을 소탕하는 전쟁은 맨손으로 할 수 없고

무기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 공부하는 사람에게 총과 칼이 되어 전쟁에 이기고 우리를 살리는 무기는 화두입니다.

화두에는 천칠백 가지 이상이 있는데 각자가 하나씩만 들고 싸우면 됩니다.



절은 전쟁터

화두를 놓쳐 마음에 틈이 생기면 귀신이 들어와버립니다. 화두만 들고 있으면 귀신이 꼼짝 못합니다.

참선하는 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잡신들하고 바른 내 주인하고 전쟁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혁명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절을 놀고먹는덴 줄 알고, 고요하고 편안한 데가 절인 줄 알지요. 절은 전쟁터이고

내가 죽나 귀신이 죽나 하고 싸움을 하는 곳입니다.



참선하는 이유

불교는 마음을 쓰기 이전의 본래면목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근본 마음을 깨닫는 이가 부처요,

 한 생각 나오기 전 소식을 알려고 하는 것, 한 생각 일어나기 전 일을 알라고 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팔만대장경은 글자입니다. 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알려면 글로 된 팔만대장경에서는 못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화두 드는 법

"이 뭣고?" 하는 화두는 늙은 쥐가 쌀궤를 한 구멍만 뚫듯 해야 합니다.

미련한 쥐나 어린 쥐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쌀궤를 뚫을 적에 이짝에 뚫었다 저 짝에 뚫었다 하는데

늙은 쥐는 쌀궤를 많이 뚫어 봤기 때문에 쌀이 나오든 말든 죽어라고 한 구멍만 뚫으면서 오늘 못다 뚫으면

또 내일 뚫고 내일도 못 뚫으면 또 모레······ 고금씩 뚫더라도 자꾸 애써 뚫으면 뚫어지는 것입니다.

당장 화두가 잘 안들리더라도 그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니 의심하지 말고 한 근을 못 들 사람은 한 근을 들려고 애쓰고

두 근을 못 들 사람은 두 근을 들려고 애쓰는 것이 공부입니다. 사람 얼굴도 처음 봤을 때는 잘 모르지만

두 번 보고 열 번을 보고 하면 그 사람 얼굴 안 봐도 그냥 이름만 부르면얼굴이 내 마음에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것과 같이 화두 공부도 자꾸 애를 쓰면 밤에 자면서도, 꿈을 꾸면서도 공부를 하게 됩니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은 죄

밖에서 부처를 찾으니 찾을수록 더욱 잃게 됩니다. 내 마음을 떠나서 도를 구하고, 법당에 와서 쇠로 만든 부처님,

나무토막으로 만든 부처님만을 믿고 다닌 사람은 부처님을 비방하는 죄보다도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선만 잘하면

참선 하나만 잘하면 종정스님보다 어른이고, 방장스님보다 낫고, 무슨 벼슬하는 사람보다 높은 사람인데

이런 도리를 모르니까 밤낮 감투 쓰고 돈 벌려고 그럽니다. 숨어서 거지가 되더라도 참선만 잘하면 부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도 닦다가 죽을지언정 도를 떠나서 오래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좌선

대저 좌선이라 함은 여러분의 몸이 앉아 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앉아 잇는 것을 좌선이라 합니다.



마음병 고치는 참선

일어나는 내 마음을 없애는 것이 도 닦는 공부입니다.

여러분은 밤낮 그 부질없는 번뇌 망상이 일어나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까?

누가 나를 괴롭히는 것보다도 내 마음에서 나쁜 마음이, 그 부질없는 허망한 마음이 일어나 나를 괴롭게 합니다.

그 병을 고치려고 참선을 하는 것입니다.



숙명통

욕심만 없으면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일을 다 알게 되는 숙명통을 얻는다고 합니다.

참말로 욕심이 아주 털끝만큼도 없으면 숙명통이라는 신통을 공부 안 해도 다 가지게 됩니다.



결제와 헤제

헤제라 하면 자유롭게 쉬라는 뜻이 아닙니다. 선지식을 찾고, 좋은 도반 찾고, 좋은 처소를 찾아가서

보다 공부를 잘하기 위한 것이 해제입니다. 참된 결제는 화두 탈 때이고, 해제는 견성할 때입니다.

절에서는 금방 결제와 해제가 돌아오고 하지만 그것은 껍데기 결제이고 해제입니다.



도둑놈과 부처님

결제라는 것은 눈 도둑놈, 귀 도둑놈, 토 도둑놈, 혀 도둑놈, 몸 도둑놈, 분별 망상 도둑놈을 막고 금지해버리는 일입니다.

해제라는 은 이 여섯 도둑놈의 알음알이로 일어나는 일체 망상을 깨달아서 없애버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여섯 도둑놈이지만

깨쳐놓고 보면 눈 부처님, 귀 부처님, 코 부처님, 혀 부처님, 몸 부처님 등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목숨찾는 공부

이 고깃덩어리의 목숨은 내 목숨이 아니고 진짜 내 목숨을 찾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공부하다가 죽어버리면 수지맞는 겁니다. 산다고 다행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










용맹정진

조사어록에 보면 용맹정진이 해태굴懈怠窟이란 말이 나옵니다.

용맹정진을 잘못하면 용맹정진 자체가 반대로 게으름을 부리는 굴속이 되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용맹정진한 것을 자꾸 살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들이 용맹정진해놓고서는

 피로하다고 게으른 생각을 내어서는 않된다는 뜻입니다.

용맹정진을 쉬지 않고 계속해서 해나가면 피로한 것도 잊고 단련이 되어 힘을 얻게 됩니다.

용맹정진할 때는 사람만 힘든 것이 아니라 마구니도 힘들다고 합니다.



동중공부動中工夫

조용하니 앉아서 하는 공부는 분주한 데서 지어가는 공부를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10년 공부라도 일하면서 익히는 36년 공부를 못 당합니다. 화장실에 가서나 밥 먹을 때나

어느 시간, 으느 곳에서든 하는 공부가 가만히 앉아 하는 공부보다 백천만 배 더 뛰어나다는 얘기입니다.



대중의 힘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천이백 제자를 모아놓고 물으시기를

 "개개인의 공부를 대중이 얼마나 시켜주느냐"고 하니

아난존자가 일어나서 "대중이 반을 제 공부 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내가 알지 못했다. 대중이 네 공부 전부를 시켜주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힘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여기 좋은 스님이 살고 있으면 저 윗방에서 공부해도 공부가 저절로 되어버립니다.



크게 숨는 법

불법은 자비가 위주가 되고 대중생활은 화합이 근본이 되기 때문에 수련자의 기본자세는 하심과 은거생활입니다.

은거법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으니, 하나는 무인지경으로 보이지 않게 몸을 숨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게 숨는 것입니다.

속가의 유서에도 '대은大隱은 시은市隱이다'라고 크게 숨은 것은 시장에서 숨는 것이라고 합니다. 참말로 위대한 사람은

사람 많은 시장판에서 숨는 법을 쓰되 인파 속에서 병신같이 보이며 공부합니다. 이것이 크게 숨는 법입니다.


사람 하나 없는 산골이라도 마음이 들뜬 사람은 서울 장바닥보다도 더 분주스러운 것이니,

분별심을 내면 물소리도 방해되고 새소리도 방해되고 바람소리도 공부에 방해가 됩니다.

그러나 서울 장안에도 분주스러운 데에 가 있어도 공부해야 된다는 결정심이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서울에 있어도 산골보다도 더 조용한 것입니다.



공부의 장애

공부가 안 되는 원인은 대체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선지식을 못 만난 것이고

, 두 번째는 나고 죽는 데에 무서운 생각이 없으니까 공부가 안 됩니다.

세 번째는 세간의 반연을 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죽이는 죄인

산목숨 죽이지 말라고 하면서도 우리는 날마다 부처님을 죽이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인을 죽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성인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를 밤낮으로 죽이고 사는 사람들이니 죄 안 짓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참선하는 사람이라야 죄를 벗어날 수 있고 참선 이외는 살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뭣고?"하는 것만이 도 닦는 비법입니다.



어두운 마음, 밝은 마음

경에 이르기를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곧 무명을 아주 끊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두운 마음이 그냥 다 없어져버리고 밝은 마음만 드러나게 됩니다.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마음은 어두운 마음이지 밝은 마음이 아닙니다.



심검당

공부가 어째서 안 되냐 하면 칼이 무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을 갈게끔 하려고 원당암에 심검당尋劍堂이라고 간판을 붙여놓은 곳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꾸 "이 뭣고?" 하면 숫돌에다 칼을 가는 식과 같습니다.

그 칼날이 서게 되면 성불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쁜 마음도 안 나오게 되면 그냥 거기가 극락입니다.

무심 공부는 배우려는 마음을 다 버리고, 마음을 쉬고 쉬어서 텅 빈 자리를 배우는 공부입니다.

그 텅 빈 자리를 알기 전에는 분별심이 나를 헤치기 때문에 자유가 없고 고생만 합니다.

 마음에 한 생각 내면 부처 죽이는 시간입니다. 사람을 살려놓고도 내가 저 사람 살렸다고 생각하면

그때 자기 부처가 죽습니다. 그저 생각만 나오면 죄가 됩니다. 그 한 생각이 나지 않으면 모든 법에 허물이 없습니다.

분별심은 생사윤회하지만 무심은 길이 나고 죽는 법을 다 해탈한다고 했으니 "이 뭣고?" 해가지고

착한 마음도, 나쁜 마음도 안 나오게 되면 그냥 거기가 극락입니다.



몸뚱이도 선방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입니다.

좌복 놓고 죽비 쳐주고 그런 선방만을 의지하지 말고 이 육신을, 자기 몸뚱이를 선방 삼으라는 겁니다.



참된 내 마음

나는 무한한 허공처럼 변함없고 죽지 않는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생명 속에 하늘땅보다도 더 큰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땅을 우리 마음이 만들어놨으나 하늘땅도 내 마음에다 대면 물거품이나 모래알만도 못한 것입니다.



시방세계가 바로 나

부처님 말씀에 조그마한 허망한 나를 버리면 시방세계가 다 나로 변해버린답니다.

내가 나를 내세우니까 네가 있고 내가 잇어 이렇게 괴로운 것이고, 이 조그마한 물건으로 변해버리는 거지,

나를 버려버리면 하늘도 나고, 땅도 나고, 하늘땅 속에 있는 만물이 다 내가 되어버립니다.

 마치 파도가 꺼져버리면 바다로 변해버리는 것같이 내가 나라는 것을 버리면 시방세계가 내 몸뚱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하늘 속도 알게 되고, 땅 속도 알게 되고, 귀신 마음도 알게 되고, 벌레 마음도 알게 됩니다.

허망한 나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가 깜깜한 것입니다.



..............


이상의 혜암스님 어록은

큰스님께서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주로 일반 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법문 가운데

소설 자료로 삼고자 가슴에 각인된 말씀을 필자가 간추린 것이라고.



● 인용서적: 정찬주 著 『공부하다 죽어라』 사진: 유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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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무염 정찬주 선생의 『공부하다 죽어라』.

지난 2013년 발행 당시 득달같이 읽어내렸던 기억이다.


언젠가 저자와의 다담 자리에서 선생께서 진한 아쉬움을 담아 피력한 내용인 즉,

이처럼 훌륭한 대선사를 배출한 출신 지자체는 당연 기념관 건립 정도는 추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다 알다시피 정찬주 선생은  불교 전문 작가라는 타이틀을 내 걸고 있다.

쌍봉사의 조석 범종소리에 글을 써내리는 이를테면 모든 일상이 수행이자 안거 그 자체라는 말씀.


선생께서 표명한 진한 아쉬움을 떠올리며

작가의 손끝을 따라 이 자리에 혜암스님을 추억해 보았다.






Reflections - Deu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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