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에 관한 한국 사료




이사부異斯夫 『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

한국 / 김부식 편 / 1145(인종 23) / 21.2×32.2cm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우산국을 점령하여 독도를 신라의 영토로 편입시킨 이사부 장군의 개인 역사를 적은 기록.






우산국 점령 『삼국사기』

한국 / 김부식 편 / 1145(인종 23) / 21.2×32.2cm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512년(지증왕 13)에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점령하여 신라에 복속시킨 사실을 적은 것이다.

우산국은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를 지배하였던 해상왕국이었는데 이사부 장군이 나무 사자를 만들어 배에 싣고

울릉도에 도착하여 그곳 주민들을 위협하여 항복을 받았다.






지증왕 편 『삼국유사』

한국 / 일연(一然) / 1285(충렬왕 11) / 22×34.6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고조선 · 삼국 · 가락 · 후삼국에 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항들과 불교 관계 등 찬자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 · 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로 지증왕(지철로 대왕) 때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점령하고 신라의 영토로 복속시킨 사실을 기록하였다.







울릉도 조공기사 『고려사高麗史

한국 / 정인지 / 1451년 / 19×29.5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정인지 등이 1451년(문종 1)에 기전체로 편찬한 고려의 정사로, 울릉도에서 백길과 토두를 보내 조공을 바친

내용이 태조실록에 실려 있다. 울릉도와 우산국이 고려의 행정구역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울릉도 행정구역 설치 검토 『고려사』

한국 / 정인지 / 1451년 / 19×29.5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234년(고종 30)에 최이가 울릉도에 사람을 파견하여 행정구역을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바닷길이 험하여 사람이 많이 죽자 중지하였다.






울릉도 안무사 『고려사』

한국 / 정인지 / 1451년 / 19×29.5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246년(고종 33)에 국학(國學)의 학유(學諭)인 권형윤(權衡允)과 급제(及第) 사정순(史挺純)을

울릉도 안무사로 삼아 행정구역 설치 여부를 조사시켰다.






울릉도인이 내조 내조來朝 『고려사』

한국 / 정인지 / 19×29.5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346년(충목왕 2)에 동계東界 울릉도인이 고려 조정에 내조來朝 하였다.






김인후 우산무릉등처 안무사 『태종실록』

한국 / 춘추관 / 1454년 / 30.2×55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417년(태종 17)에 울릉도와 우산도의 주민들을 쇄출할지 여부를 조정에서 의논하였다.

이때 대부분 쇄출을 반대하였으나 황희黃喜만이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는데 태종은 황희의 의견을 좇아

김인우를 우산 무릉등처의 안무사로 삼아 그곳 주민들을 쇄출하도록 조치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필사본)

한국 / 춘추관 / 1454년 / 23.0×36.5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세종의 명에 의하여 맹사성등이 편찬한 「신찬팔도지리지」를 보완하여 1454년(단종 2)에 세종실록을

편찬하면서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전국의 인문지리적 내용을 수록하였는데 권 153의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 무릉 두 섬은 울진현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가히 서로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 우산국이었다." 라고 기록하여 우산도가 독도임을 분명히 하고 우리 땅임을 밝혔다.




독도에서 바라본 울릉도                                                    울릉도에서 바라본 독도

한국 / 김태환 촬영







삼봉 三峰島 찾기 『성종실록成宗實錄

한국 / 춘추관 / 1499년 / 34.6×65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472년(성종 3)에 강원도 바다 가운데에 삼봉도가 있다는 소문이 전해져 조정에서는 초마선 4척에 각각 40명식의

군대를 태우고 삼봉도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이전에 삼봉도(三峰島)를 다녀왔다는 김한경(金漢京)을 앞장

세우기로 하였다. 삼봉도는 울릉도와 다른 섬인 독도라고 추정한다.





 


김자주 삼봉도 발견 『성종실록成宗實錄

한국 / 춘추관 / 1499년 / 34.6×65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746년(성종 7)에 영흥 사람 김자주(金自周)가 삼봉도를 다녀와서 그곳 지도를 바쳤다. 삼봉도의 형편을 말하며

조선옷을 입은 30여 명의 사람을 보았는데 잡힐까봐 겁이 나서 그 섬에 상륙하지는 못하고 돌아왔음을 보고하였다.

삼봉도는 울릉도와 다른 섬인 독도라고 추정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국 / 이행(李荇) 등 / 1530년 / 22.1×36.7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조선시대 최대의 인문지리서로 총 55책이다. 전국 8도의 각 군현별로 지리지를 수록하였고 첫 머리에는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강원도 첫머리에 있는 지도에는 울릉도와 우산도가 잘 그려져 있으며, 울진현조에서는

 울릉도와 우산도에 관한 설명이 상세하여 두 섬이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혔다.






변례집요 變例集要

한국 / 1598-1841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598년(선조 31)부터 1841년(헌종 7)까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기록한 문서이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과 일본의

외교 교섭 경위가 항목별로 분류되어 있다. 을릉도와 독도를 지키기 위하여 활약한 안용복의 활동상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며 쓰시마 도주가 독도를 조선의 땅으로 인정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비변사등록 備邊司謄錄

한국 / 비변사 / 1617-1829 / 31.4×44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국정의 최고 기관인 비변사에서 매일매일의 회의 내용을 수록한 280여 년간의 기록이다.

이 기사는 안용복이 1차로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일본일들과 충돌한 후에 귀국하여 보고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삼척첨사 장한상(長漢相)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수토시킨 내용이다.






장한상일기

한국 / 장한상 / 1694년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693년(숙종 19)에 안용복이 울릉도에 입도한 사건이 발생한 후에 조정에서는 울릉도를 오랫동안 비워두었기

때문에일본 어부들의 불법 고기잡이가 행하여 진다고 보고 이를 막기 위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수토(搜討)시켰다.

처음 수토관은1694년(숙종 20)에 파견된 삼척첨사 장한상이었다. 그는 6척의 배로 울릉도를 한 달간 수토하고

 돌아와 그곳 지형을 그린 지도와 특산물을 바쳤다. 이 과정을 적은 것이 장한상 일기이다.







안용복의 제2차 울릉도 수호 『숙종실록 肅宗實錄

한국 / 춘추관 / 1696년 / 30.4×48.8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674년 8월부터 1720년 6월까지 숙종 재위년간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다. 이 기사는 안용복이 제2차로 울릉도에

들어가 왜인들을 쫓아내고 시마네현에 가서 왜인들로부터 다시는 출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온 내용이다.






울릉 자산 양도 김세장 鬱陵子山兩島監稅將 『숙종실록肅宗實錄

한국 / 춘추관 / 1696년 / 30.4×48.8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안용복이 제2차로 울릉도에 들어갔을 때 왜인들을 보고 "왜 우리나라 땅을 침범하였는가? 라고 따지자 왜인들은 송도

에서 왔는데 곧 돌아가겠다고 말하였다. 안용복이 거듭 말하기를 송도는 자산도(子山島)이고 그곳도 우리의 영토라고

왜인들을 나무랐다. 안용복이 왜인들을 쫓아 배를 타고 곧장 호키주로 가서 울릉 사산 양도 감세장(鬱陵子山兩島監稅將)

이라고 칭하고 도주와 담판하였다. 도주로부터는 "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뒤에 혹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으면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라는 약속을 받고 귀국하였다.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확실한 약속을 시마네현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수토관搜討官  파견 『숙종실록肅宗實錄

한국 / 춘추관 / 1696년 / 30.4×48.8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안용복의 울릉도 지키기가 있은 후에 조정에서는 울릉도를 비워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3년마다 1회씩 수토관을

파견하여 살펴보기로 정하였다. 1699년(숙종 25)에 강원도 월송 만호 전회일(田會一)을 파견하여 울릉도를 수토(搜討)

시켰는데 그는 돌아와 울릉도를 그린 지도를 바쳤다. 정부에서는 이와 같이 울릉도와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계속하였다.






가지도可支島  『정조실록正祖實錄

한국 / 춘추관 / 1794년 / 32.2×51.4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794년(정조 8) 울릉도를 수토하러 갔던 월송 만호(越松萬戶) 한창국(韓昌國)의 보고서이다.

그는 울릉도에 있는 방패도(防牌島), 죽도(竹島), 옹도(瓮島)를 살피고 그 다음날 가지도(可支島)에 가서

가지어(可支魚)를 보았는데 가지어의 모양이 물소와 같다고 하였다. 가지어가 살고 있는 가지도는 오늘날의 독도를 말한다.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

한국 / 안정복 / 18세기 / 19.5×31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성호 이익의 제자인 안정복이 『성호사설』의 중복되고 번잡한 것을 삭제하고 다시 유별로 편차를 엮어 원래이 3분의 1

정도로 줄여 엮은 책이다. 울도도 기사에서 울릉도가 예전에는 우산국이었는데 신라 때 복속되었으며 후에 공도정책을

써서 그 섬을 비워두었더니 왜인 어부들이 불법적으로 출어하므로 안용복과 충돌한 사실과 안용복이 일본에 들어가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다짐을 받고 돌아온 사실들을 적고 있다.






만기요람 萬機要覽

한국 / 심상규 · 서영보 / 19세기 초 / 22×35.4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808년 5월 심상규 등에게 재용과 군정에 관련된 전국의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참고하기 좋도록 편한하라는 순조의

명령에 의하여 편찬되었다. 총 11책으로 제10책에는 관방과 해방에 관련된 사항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울릉도와

관련된 기사도 수록되어 있다. 가지어(可支魚)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다.






수도제강水道提綱

중국 / 제소남(齊召南) / 18세기 중반 / 10.1×17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청대(淸代)에 개인이 편찬한 중국 전역과 인근 여러 지역에 관한 수계(水系)를 정리한 지리서이다.

저자인 제소남은 「청일통지」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총 28권으로 제26권에 「조선국제수朝鮮國諸水」에 대하여

기술한 것에는 동해 가운데 두 섬이 있는데 그 섬 이름을 천산도(千山島)와 울릉도(菀陵島)로 기록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이 청나라 때 선교사 레지가 만든 「조선왕국도」에 반영되어 울릉도는 Fanlingtao,

 독도는 천산도로 읽어 Chianxantao로 표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해동역사속 海東繹史續

한국 / 한진서(韓鎭書) / 1823년 / 15×21.7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조선 순조 때 편찬된 우리나라 역대 지리서로 『해동역사지리고海東繹史地理考』라고도 한다.

1814년(순조 14) 한치윤이 『해동역사』의 「지리고」부분망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그의 유탁(遺託)으로

조카 한진서가 초고를 정리하고 자료를 새로 수집하여 1823년(순조 23)에 완성했다. 우산도(독도)를

『수도제강』에서 천산도로 잘못 읽은 점을 바로 잡았다.







동래항보첩 東萊港報牒

한국 / 외부 / 1896-1905년 / 18.3×30cm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896년(건양 원년)에서 1905년(광무 9)까지 동래감리서와 외부대신 간에 오고간 7책의 보고서와 3책의 훈령이다.

주요한 내용은 동래감리서의 업무상황으로서 수세액과 그 세목보고, 관리의 부임 파견, 봉급 지급 상황과

그 비용 등이다. 당시의 개항장의 무역상황과 실태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이 자료는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활동상을 보고한 내용이다.







울릉도 『중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한국 / 홍문관 / 1903-1906년 / ×17.7cm / 26.7cm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903년(광무 7)-1906년에 걸쳐 고종의 명에 따라 홍문관에서 문헌비고를 바탕으로 상고이래 대한제국까지의

우리나라 문물제도의 전고를 총망라하여 수록한 책이다. 「여지고(輿地考)」편에서 우산도와 울릉도의 연혁과

역사적 사실 등을 총망라하여 기록하였다. 우산국 점령, 고려 때의 울릉도 관리, 조선 초기의 공도정책,

안용복의 할동, 울릉도의 수토 등을 빠짐없이 수록하였다.






계하서계책 啓下書契冊

한국 / 승문원 편 / 1882 / 24.4×33.2cm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876년(고종 13) 4월부터 1882(고종 19) 8월까지 예조에서 일본 외무성에 발송한 서계(書契)를 승문원에서 묶은

공문서철이다.서명에서 '계하(啓下)'라고 한 것은 관청의 상계(上啓)에 의하여 의정부에서 관련사항을 논의하여 국왕에게

계문(啓聞)하면 국왕은 계자인(啓字印)을 찍어서 문서를 하달하는데 이것을 '계하(啓下)'라고 하므로 이같이 붙인 것이다.

년월순으로 서계를 편집하였고, 각 서계에는 제목, 본문, 년월 및 작성자의 직함, 성명과 계하일자를 기록하였다.

우리나라의 예조판서가 일본 외무대신인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의 삼림벌목을

금지해달라고 요구하는 외교문서가 수록되어 있다.






강원감영관첩江原監營官帖

한국 / 비변사 / 1859-1884년 / 31.6×48cm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859년(철종 10)-1884년(고종 21) 사이 비변사에서 강원도 감영(監營)에 보낸 관문(關文)을 모은 공문서로

총 6책이며 제6책에 1882년부터 시작된 울릉도 개척에 관한 관문이 수록되어 있다.






울릉도개척시선격량미잡물용입가량성책 鬱陵島開拓試船格糧米雜物容入假量成冊

한국/ 강원감영 / 1883년 / 24.8×31.3cm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883년(고종 20) 4월 강원감영에서 울릉도 개척단을 파견할 때 개척에 소요될 인원 및 물자에 대한 예상 명세서이다.

개척단 인원은 30여 명으로 잡고 이들이 사용할 일상의 생필품과 농경을 위한 각종 종자와 경작에 필요한

두 마리의 소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는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강원도 관초 江原道關草

한국 / 의정부 기록국 / 1886-1895년 / 21.2×33.8cm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886년(고종 23)에서 1895년 사이에 강원도 각 지방과 의정부에 오가던 관문(關文)을 초록(抄錄)한 공문서이다.

제3책에 울릉도를 개척한 지가 오래되지 않아 부세와 요역을 감면하였는데 평해군에서 관리들을 울릉도에 상주시키고

수개 읍에서 호마다 보리와 콩을 거두고 해당 관리들이 자기들에게 필요한 각종 잡비를 도민에게서 징수하여

 섬을 보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경계하여 엄하게 금지시키라는 공문이다.







이규원 李奎遠  울릉도검찰사 『고종실록』

한국 / 이왕직(李王職) 편 / 1882년 / 20×27.8cm / 국립중앙도서관

조선에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3년마다 1회씩 수토관을 파견하여 관리하였는데 19세기 말경에 이르면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입도하여 삼림을 남벌하는 등 피해가 많았다. 조정에서는 1882년에 이규원을 울릉도검찰사로 임명하여

울릉도의 실태를 파악하고 행정구역을 설치할 수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규원 李奎遠 의 울릉도 검찰일기 檢察日記 

한국 / 이규원 / 1882년 / 제주도국립박물관 소장

일본 어부들의 불법 어로와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벌채 행위가 울릉도에서 계속되었고, 일본 군함의 불법활동이 증가하므로

조선 정부는 이규원을 검찰사로 보내 공도정책의 폐기와 울릉도 재개척 여부를 조사시켰다. 그는 1882년 4월 29일부터

 6일간 울릉도를 자세히 조사하였는데 본국인이 모두 140명 살고 있으며, 나리동을 비롯하여 6-7곳에 주민을 상주시킬 수

있는 거주지가 있으므로 울릉도에 행정구역을 설치하자고 건의하였다. 그의 건의대로 1900년에 울도군을 설치하였다.

이와함께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송도, 죽도, 우산도 등을 모두 근방의 작은 섬이라고 당연시하고 있다. 청명한 날에 높은

곳에 올라 우산도를 살펴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고 독도를 찾을 수 없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편서풍이 불어 해무가

사라지는 11월에는 독도가 보이지만 그가 울릉도를 조사하던 4월에는 해무로 인해 독도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용정울도기

한국 / 우용정 / 1899년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882년에 이규원을 울릉도에 파견하여 울릉도 개척 여부를 조사시켰는데 이규원은 우리나라 주민이 140여 명 살고 토지가

비옥하여 주민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으므로 울릉도를 개척하자고 건의하였고 그의 건의에 따라 조정에서는 울릉도에 도감(島監)을

두어 주민들의 생활을 보살폈다. 1899년에는 내부에서 우용정을 파견하여 울릉도의 사정을 살펴보도록 지시하였다.

그는 울릉도 살펴보고 돌아와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1900년에 칙령 제41호로

울도군을 설치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행정적으로 관할하게 되었다.






칙령勅令 제41호

한국 / 의정부 / 1900년 / 27.5×33.4cm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894년(고종 31) 11월부터 1910년 8월까지의 모든 칙령을 의정부에서 모아 만든 책이다.

칙령 제41호는 제9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제목은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 건'이다. 그 내용은

제1조는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다는 것이고, 제2조는 울도군이 관할하는 행정구역은 울릉전도

(鬱陵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하다는 것이다. 죽도는 오늘날의 죽서도이고 석도는 독도를 말한다.

독도는 바위섬이기 때문에 '독섬'이라고 불러왔는데 음역하면 '독도(獨島)'이고 의역하면 '석도(石島)'이다.

황제의 칙령으로 독도를 울릉군의 행정구역에 편입시켰다.






각부청의서존안各部 請議書存案

한국 / 의정부 / 19세기 말-20세기 초 / 19×38.8cm /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896년(건양 1)1904년(광무 8) 사이에 각 부(各部)에서 의정부로 들어온 모든 청의서를 묶은 정부 문서철이다.

제17책에 울릉도의 호수가 400여 가로 늘고 개간한 땅이 만여 두락에 이르며 농작물도 충분히 늘어나서 육지에 있는

행정군청과 비교하여 그 규모가 비슷하게 되었고, 외국인이 왕래하여 교역하고 있으므로 종래의 도감(島監)을 군수로

개정하고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는 것이 타당하므로 해당 칙령안을 회의에 제출한다는 청의서이다.

부록에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다는 칙령 제41호가 수록되어 있다.







관보 제1716호 울도군 설치

한국 / 1900년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울릉도에 울도군을 설치하고 울도군의 관할 구역을 울릉도 전역과 죽도 석도로 규정한 것인데 석도는 바위섬을

'독섬'이라고 부르고 음역하면 '독도'이고 의역하면 '석도'이기 때문에 석도는 분명히 독도를 지칭한다

칙령과 관보에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분명히 규정한 것이다.






울릉군수 심흥택

한국 / 1906년 / 개인소장

일본은 1905년 2월에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독도를 불법적으로 시마네현에 편입한 후에 독도를 시찰하고자 하였으나

선박 사정과 거센 풍랑으로 몇 차례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그 이듬해인 1906년 3월에 비로소 50여 명의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이 조사단은 독도 조사를 마치고 돌아라려 하였으나 풍랑이 심하여 울릉도에 기착하고 군수 심홍택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 보고서에서 심군수는 '독도/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사진에서 심군수는 시마네현의 대표인 진자이 유타로 사무관과 나란히 찍지 않고 그 뒤쪽에 당당히 버티어 서있으며,

대형 태극기를 두 명의 아동들에게 펼쳐 들게 하여 독도가 우리 땅임을 과시하고 있다.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 보고서 江原道觀察使李明來報告書

한국 / 이명래 / 1906년 / 28×18.5cm / 독도박물관 소장

이 보고를 받은 참정대신은 "독도가 일본인의 영토라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것이므로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의 행동을 잘 살펴서 다시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대한매일신보

한국 / 1906년 5월 1일 / 경인문화사 소장

1906년 3월 28일에 일본 관리 일행이 울릉도에 기착하여 울릉군수 심홍택과 대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독도는 자기들의 영지(領地)" 라고 주장하자 심군수는 깜짝 놀라 그 이튿날인 3월 29일에 강원도 관찰사에게 즉각 보고하고

강원도 관찰사는 내부대신에게 긴급보고 하였다. 내부에서는 바로 참정대신에게 보고하고 강원도에 지시하기를 "일본인들이

놀러와서 땅의 크기나 인구 등을 조사할 수는 있으나 독도를 일본의 속지(屬地)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일이다."

라고 지시하였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대한매일신보』가 보도하면서 독도를 빼앗으려는 일본의 의도를 비판하고 있다.






황성신문

한국 / 1906년 5월 9일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본은 독도를 불법적으로 시마네현에 편입한 후에 대규모 조사단을 독도에 파견하여 조사하였다.

조사단은 곧바로 오키섬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풍랑이 심하여 울릉도에 기착하고 울릉군수 심홍택과 면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강점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 다음날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고하였고

강원도 관찰사는 중앙정부에 보고하였다. 이 사실을 『황성신문』이 보도하면서 일본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다.






매천야록

한국 / 황현 / 1864-1910년 /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황매천이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전반에 걸친 사건을 기록한 야사이다.

전반기는 보고 들은 사실들을 적었지만 후반기에는 본인이 체험한 사실 중심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독도가 울릉도에 귀속되어 있었는데 일본이 불법적으로 강점하였음을 기록하였다.

황현은 1910년 한일병탄 때 국치를 통분하며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동해략도 東海略圖  『사해 死海

한국 / 조선사연구회 / 1948년 15× 21cm / 독도박물관 소장

1948년에 창립한 조선사연구회는 창간호에서 독도문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신석호는

「독도 소속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썼는데 마지막에 한글로 맥아더선(MacAthur Line)이라고 그려진 지도를 소개하였다.

이 지도는 1946년 6월 22일 연합군총사령부가 각서 제1033호로 정한 일본어선의 조업 구역을 표시한 지도인데

독도가 한국 땅임을 밝히고 있다.







울릉도 독도 조사보문 鬱陵島 獨島 調査報文

한국 / 옥승식 / 1948년 / 17.5×26cm / 독도박물관 소장

미 군정청 상무부 지질광산연구소에서는 1948년에 울릉도독도학술조사를 추진하였다.

옥승식은 그 조사단으로 참여하여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 ·  지형 · 지질 등에 관하여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는 미 군청청이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인용서적 : 이상태 著 『사료가 증명하는 독도는 한국 땅






Fields Of Gold - Kevin K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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