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淸白吏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 백비白碑











금호그룹 창립자 고 박인천 회장을 비롯, 노강 선생의 공적비에 이르기까지...


































金精玉栗, 畜內制外, 約奉卑牧, 不交于害, 榮窮祖先, 數異身後, 勗哉承慶, 勿替永久


금빛처럼 아름답고 옥처럼 단아한 자태
안으로는 학문을 쌓고 밖으로는 행동을 자제했네.
몸가짐은 검약하고 낮춰 남을 받드니 사귀임에 해로움이 없었네.
영화가 조상에까지 미쳤고 공이 죽은 후에 특이한 은총이 미쳤으니
이 경사 이어받아 길이길이 변함없이 보전하세,


- 울산후인 김인후 -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시 諡 정혜박공 휘 諱 수량지묘, 정부인 무송유씨 부좌



상지 25년 무자 3월, 자헌대부 행 사헌부대사헌 김만식 서” 라는 마무리로 보아

이 비는 1888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겠다.


비석의 한 면에 비의 내력을 적어놓았다.


“조정에 시호도 신청하지 말고 묘 앞에 비석도 세우지 말라.”는 것은

아곡 선조께서 남기신 유명 遺命이므로 십대를 내려오기 까지 감히 유명을 어기지 않았다.

순조 임금 을축년(1805년)에 비로소 시호가 내리니

 자손으로서는 이제야 소원이 풀어진 셈이다.


- 십일대손 동수, 추가하여 기록하다 - 



 







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朴公墓誌銘 【幷序 ○別】

公諱守良, 字君遂, 莪谷 號也 泰山縣人. 少受學於鄕先生金學士漑, 沈潛勤敏, 未嘗一字放過, 出入場屋, 不挾一卷書. 爲文詞, 有法度, 選正德八年進士, 九年, 中乙科第二名, 入成均館, 分敎廣州州學, 金公世弼, 牧于州, 嘗與爲國學師生, 特愛公專精好問, 及是論文講學, 亹亹不倦, 越明年移入承文院, 自副正字, 至博士, 階宣務, 轉成均典籍禮曹佐郞司諫院正言, 出爲湖西都事, 兼春秋記注官, 佐孫公仲暾, 秩滿, 遷刑曹正郞, 兼館職如故, 拜司憲持平, 往來秋官者三, 移郞于兵, 以 親老乞養, 得守古阜郡之命, 乃嘉靖四年也. 居三歲, 喪考, 終制, 拜獻納,

歷掌令奉常僉正司諫司䆃副正, 十年, 以司成爲母夫人又辭歸, 守寶城郡, 踰年而以司藝還朝, 又爲司成及內贍軍器寺正, 十五年, 判校承文院, 兼春秋館編修, 特陞通政大夫兵曹參知, 拜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春秋修撰等官, 次遷左承旨, 又命加嘉善, 拜戶曹參判, 事在十六年, 出按咸鏡道, 三移病, 改軍職, 尋爲漢城右尹同知中樞府工曹參判, 又移戶曹, 十八年, 由都摠府副摠管, 復參判于禮曹, 又乞養, 拜潭陽府使, 盡三年, 仍留侍, 二十一年, 大夫人終, 服除朝命累下, 而病偏頭重聽, 不克仕, 實上卽位之明年. 二十五年, 始以上護軍拜命, 進階資憲, 知中樞府事, 賞淸德也, 歷漢城判尹刑曹判書, 二十九年, 拜議政府右參贊兼知經筵義禁春秋事五衛都摠管,

三十年, 朝廷擬本道觀察使, 推崇秩可鎭服者, 卽命公帶京職以兼之, 一年, 入兼都摠管, 再以判尹, 還右參贊, 改戶曹判書, 又爲判尹. 三十三年正月庚申, 以知中樞府事, 病卒. 享年六十四, 訃聞, 上爲之輟朝二日, 辛未, 遣禮官諭祭. 其文有內實有餘, 外似不足, 家無餘粟, 益用嘉惜語, 命有司特 以禮葬, 又下監司, 厚恤其家. 蓋經筵官, 服其淸貧, 因進講以啓也. 公簡重愼密, 以禮律自居, 自勝愈强, 而退然如不勝衣, 有文而不露, 酒無定量, 剛制不亂, 與人不爲翕翕交, 居鄕惟謹, 常以止足爲戒, 其在潭陽, 母夫人患痢且劇, 躬自湯藥, 衣不解帶者, 數十日, 取嘗糞甜苦, 疾因以瘳, 服喪勤禮, 步不出墓廬之外, 旣免, 猶切切不已, 以有宗兄, 奉魂帛自隨, 朔望齋祭, 極其誠敬, 爲全羅監司也, 直抵齋廬, 瞻掃封塋, 上下周省, 卒無惰容, 行成政修, 而移治于官, 所在無不擧其職, 非其義也, 人不敢以一毫及之, 立朝三十有八年, 以至卿相, 無數椽之宅. 壬子冬, 上又褒廉謹臣僚, 錫宴于闕庭, 給物有差, 酒樂皆用一等, 且命從容醉罷, 至暮歸以宮燭, 有天災邊警, 恒以爲憂, 常語二子曰, “我自草澤, 濫陞八命, 榮幸踰分, 我死愼勿爲請諡立碑.” 二月丙申, 發還于長城縣, 以五月庚申, 葬于狐丘先塋之左丑首未趾之穴. 曾祖禦侮將軍虎賁衛大護軍諱文雅. 贈通政大夫左承旨兼經筵修撰官, 祖宣略將軍諱賢孫. 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考諱宗元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 妣李氏. 贈貞夫人. 公娶通政大夫前行副司 直庾玉輅之女, 亦封貞夫人. 生二子, 長思愚進士, 行義禁府都事. 次思魯, 豐儲倉奉事. 孫二, 尙敬尙謹 公之姪孫甥吳大朴, 以都事之言. 托銘於族人金麟厚, 麟厚病且拙於辭, 無以發揚德美, 然義有所不得辭也. 敢作銘曰, 金精玉栗, 畜內制外, 約奉卑牧, 不交于害, 榮窮祖先, 數異身後, 勗哉承慶, 勿替永久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박공(朴公) 묘지명(墓誌銘) 


공의 이름은 수량 守良이요, 자는 군수 君遂이고 아곡 莪谷은 호이며 본관은 태산현 泰山縣이다. 어려서 향리에서 김개로부터 글을

배울 때 어찌나 침착하고 영특한지 글자 한 자 한 자를 놓치지 않고 금방 배워 장옥을 드나들 때 쯤에는 한 권의 책도 끼고 다니지 않았다.

지으신 글과 문장마다 법도가 담겨 있었으므로 1513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다음 해에는 문과 을과에 차석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분교인 광주주학 廣州 州學에 근무하였다.

그때 김세필이 광주목사에 부임함으로 일찍이 서로가 뜻이 맞아 학문을 강론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었다.

김세필은 공의 진지하고 정중한 학문하는 자세에 감동한 나머지 그를 특별히 사랑했다.

이 때 공은 문학을 강론하는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 다음해인 1515년에 승문원으로 옮겨 부정자에서 박사가 되어 선무랑에 올랐다.

이어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에 전보 또는 승진되었다. 또 춘추기주관을 겸하여 호서도사가 되어 손중돈을 보좌했고

임기를 마친 후에는 형조정랑으로 옮겼으나 겸직은 그대로였다.그 후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니 세 번째 법관이 된 셈이다.
병조정랑으로 자리를 옮긴 공은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부군수로 발령을 받으니 이때가 1525년이다.

 3년 후에 아버지 상을 당하고 상제 喪制를 마친 후 다시 헌납으로 부임했다.

장령·봉상첨정· 사간·사도부정을 역임한 공은 1531년에 사성이 되었는데 이때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또 사직하고

보성군수로 내려와 1년을 지내다가 사예로 조정에 돌아와 또 사성 및 내섬 군기시정이 되었다.
1536년에는 판교승문원 겸 춘추관편수와 통정대부 병조참지로 승진하였다.

 그 후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 · 춘추관 수찬 등의 일을 보다가, 좌승지로 옮기었으며,

 또 다시 가선대부 호조참판의 일을 맡았다.

1537년에는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군직의 세 가지 병폐를 시정했고, 얼마 후 한성부 우윤과 동지중추부· 공조참판을 역임했다.

잠시 호조일을 맡은 공은 1539년에 도총부부총관을 맡았다가 이내 예조참판이 되었다.

공은 또 다시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담양부사로 발령받아 삼년을 눌러 앉아 모친을 봉양하였다.

1542년에 모친상을 당하니 삼년간 복제를 치렀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입시하라는 어명이 내렸으나, 편두통이 심하여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여 출사하지 아니하였다.

 공은 명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546년에 상호군(上護軍)에 제수되었고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니,

 이는 공께서 청빈과 덕행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한성판윤과 형조판서를 역임한 공은 1550년에는 의정부 우참찬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판사와 오위도총관에 이르렀다.

1551년에 조정에서 전라도 관찰사를 제수할 때 품계가 높은 대신이라야 포악한 민심을 감복시킬 수 있다 하여 공을 발령하였는데

 내직을 겸임하게 하였다. 부임한지 일 년 후에 공은 내직으로 들어와 도총관을 겸하고 한성판윤, 우참찬이 되었다가

 호조판서로 발령받고 또 판윤이 되었다.

공은 1554년 1월19일에 지중추부사로서 재직하다가 돌아가시니 향년 64세이었다. 부음을 들은 명종임금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이틀 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1월 30일에 예관을 보내어 조문하도록 하였는데, 그 제문에 「경은 안으로는 많은 학덕을 지녔으면서도

겉으로는 항상 부족한 것처럼 하였으며 집에는 한 줌의 곡식도 없었으니 경의 죽음이 더욱 아깝고 애석하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임금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특별히 예장 禮葬하게 하였으며, 또 감사에게 명을 내려 그 집을 후하게 돌보게 하였다.

이는 아마도 조강에서 경연관이 그의 청빈에 감복되어 임금에게 주청한 때문인 것 같다.

공은 평생을 통해 몸가짐이 간결하고 엄중하였으며 조심하고 빈틈이 없었으며 모든 행동을 예법에 맞게 하되 자신을 극복하는 데

 더욱 힘썼다. 공의 성품은 겸퇴(謙退)하여 행동에 근신하였고, 체질은 약하여 마치 의복 무게를 이기지 못할 듯 보였다.

문장이 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아니하고, 주량은 정량이 없었지만 자제하여 지나치지 않았다.
사람과 사귀되 정도에 지나친 친분은 쌓지 않았으며, 고향에 있을 적에도 오직 삼가서 늘 지족(止足)으로써 경계를 하였다.

그가 담양에 있을 적에 모친이 이질병에 걸려 중태에 이르자, 몸소 탕약을 달이며 옷에 띠를 풀지 않고 수십 일을 지냈고,

 대변의 곱똥까지도 달고 쓴 맛을 보아 병의 차도를 알아보았다. 모친상을 당하자 예를 지켜 한 걸음도 묘려(墓廬) 밖을 나가지 않았고

 상복을 벗고서도 슬픔이 오히려 더 했다. 모친의 혼백을 모시고 맏형의 뒤를 따랐고 초하루 보름날 마다 제사를 모실 때는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전라감사로 있을 적에도 직접 묘막을 세우고 몸소 청소하는 데 태만함이 없었다. 자신이 갈고 닦은 학덕을 정사에 옮겨 부임하는 곳마다

 직책을 다하였으며 적재적소에 인재를 천거하였지만, 그릇된 것을 고쳐나가는 데는 어느 누구도 감히 털끝 하나라도 간섭하지 못하였다.

 조정에 벼슬한 삼십 팔년 동안에 그는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으나 두어 칸의 집도 없었다.

1552년 겨울에 임금께서 염근한 신하들을 포상하고 대궐 안에 서 가장 좋은 술과 음악으로 잔치를 베풀고 또 즐겁게 취하도록 한 일이

있었는데, 그날 날이 저물어 돌아갈 적에는 궁중의 등촉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공께서는 천재지변이나 변방수호에도 남달리 마음을 썼다.

평소 두 아들에게 이르기를,「나는 초야에서 태어나 외람되이 팔명(八命)에까지 이르렀으니, 그것은 분수에 넘치는 광영이다.

그러니 내가 죽으면 절대로 시호를 청하거나 비를 세우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해 2월25일에 공의 상여는 장성 고을에 돌아와서, 5월21일에 금호산 선영의 왼편 축좌미향(丑坐未向)의 혈에 장사하였다.

공의 증조는 어모장군 호분위대호군로 휘는 문아인데, 증 통정대부 좌승지 겸 경연수찬관이요, 할아버지는 선략장군으로 휘는 현손인데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요, 아버지의 이름은 종원인데,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의금부사요,

 어머니는 이씨인데 정부인 가자가 내렸다.

공은 통정대부 행 부사직을 역임한 유옥로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 역시 정부인으로 봉해졌다. 두 분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사우(思愚)이고 진사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요, 차남은 사로(思魯)인데 풍저창봉사를 하였다. 손자는 둘인데 상경, 상근이다.

공의 조카사위인 오대박이 공의 큰 아들 도사와 의논하여 나 김인후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으나 나는 병석에 몸져 누워있는 몸 일뿐

 더러 글 솜씨 또한 부족하여 공의 미덕을 표출할 수가 없으나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어 감히 묘지명을 다음과 같이 짓는다.



금빛처럼 아름답고 옥처럼 단아한 자태
안으로는 학문을 쌓고 밖으로는 행동을 자제했네.
몸가짐은 검약하고 낮춰 남을 받드니 사귀임에 해로움이 없었네.
영화가 조상에까지 미쳤고 공이 죽은 후에 특이한 은총이 미쳤으니
이 경사 이어받아 길이길이 변함없이 보전하세,



- 울산후인 김인후 짓다 -












마주보는 석상 두 기 모두 문신석이다.


































































Tender Moment - Cathy Mart

멀티미디어는 표시되지 않습니다.



맨위로
통합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