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대수롭지 않다. 사실 삶도 그렇다.

죽는 것, 잠드는 것, 무위로 돌아가는 것, 무엇이 대수로운가?

모든 게 신기루다."


- 마타 하리의 마지막 말 -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여성 가운데 몇몇이 발레리의 카메라 앞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러나 그 가운데 마타 하리만큼 렌즈―혹은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은 없었다. 관능적인 무희이자 서커스 공연자이며

코르티잔이던 그녀의 실제 이름은 마가레타 거트루이다 젤러였다. 그러나 그녀의 무대 이름은 세련된 신비로움과 성적 매력을

발산하며 파리에서 그녀를 무대의 스타로 만들었고 뱅센에 있는 어느 성의 안마당으로 인도했다. 그녀는 결국 그곳에서 12명의

프랑스 보병들의 총격을 받았고 그들의 지휘관은 권총으로 그녀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1876년 8월 7일에 네덜란드의 레이우아르던에서 태어난 젤러가 1906년 파리 로드르가의 발레리 스튜디오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그녀의 나이 29, 30살 무렵이었다. 마타 하리와 마찬가지로 발레리도 오스트로로그 백작, 스타니스와프 줄리앙 이그나치의 예명

이었다. 그는 이투아니아 출신의 아버지로부터 작위와 이름, 초상 사진의 재능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프랑스의 매춘부부터

페르시아 왕까지 많은 사람들을 촬영했다.


그가 촬영한 인물들에게는 모두 한 편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마타 하리만큼 극적인 이야기를 지닌 인물은 없었다.

그녀는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고, 교사로 일하다가 그만두었으며 루돌프 맥레오드라는 이름의 네덜란드 군인과 결혼한

상태였다. 그녀의 남편은 주정뱅이에, 매독에 걸렸으며 학대를 일삼았다. 마타 하리는 남편과 사이에 두 아이를 두었지만 아이

하나를 잃고 나서 남편 곁을 떠났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삶에서 흥미진진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궁륭형의 동양식 건물인 파리의 소피스티케에서 정기적으로 자극적인 춤을 추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무용에 흠뻑 빠진 힌두 공주라고 주장했다. 사실 그녀는 고급 스트리퍼였지만 그녀의 연기는 훌륭

했다. ('태양' 혹은 글자 그대로 한다면 '낮은 눈'으 의미하는) '마타 하리'라는 인도풍 이름에 보석이 박힌 머리 장식을 하고 몸매가

훤히 비치는 내의를 걸치거나 혹은 그것조차 입지 않으면서 부유한 많은 남성들을 매료시켰다. 그녀의 활동 초기에 그렇게 이끌린

사람 중에는 에밀 에티엔 기메가 있었ㄷ고 그녀는 처음에 그의 박물관에서 공연을 했다. 나중에 그녀는 유럽 전역의 정치인과 장교

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의 연기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힘 있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염탐하는 일에 고용할 수

있는 팜므 파탈로서 그녀의 잠재력을 눈여겨 본 사람들도 있었다.


발레리가 촬영한 이 사진은 마타 하리의 가장 매혹적이고 유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그녀에게 남은 생은 11년이었다.

1900년대가 끝나가며 '벨 에포크'의 흥분과 활기도 함께 저물기 시작했을 때, 마타 하리의 인기 역시 저물어갔다. 같은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녀는 조만간 제1차 세계대전의 총구 앞에 스러지게 될 것이었다. 여러 국적의 군 장교들과 위태로운

 연애를 이어간 끝에 마타 하리는 1917년 파리에서 체포되어 성적인 유혹으로 독일을 위해 프랑스인을 상대로 간첩활동을 했다는

반역 혐의로 기소되었다. 증거가 희박했음에도 유죄가 인정되어 10월 15일에 처형되었다.


이국적이고 위험하며 재앙으로 치닫는 마타 하리의 낮선 이야기는 1900년대의 분위기에 대한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옛 세계는 누구도 잘 알지 못하는 것들에게 길을 내어주고 있었다. 옛 제국은 본국과 식민지의 반란으로 시련을 겪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고 그녀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영국 왕실의 친척 중에는 점점 더 변덕스럽고 호전적으로

변해가던 독일의 카이저도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는 여전히 차르가 통치하고 있었지만 일본과의 전쟁과 거리 혁명으로 차르의

통치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미국에서는 무법자들이 판을 쳤고 지진과 세 번째 대통령 암살로 흔들리는 나라에 예기치 않은

 이민자들의 물결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치명적인 수단을 동원해 민간인들을 가두고 위협하면서 태평양의 섬부터 아프리카의 뿔까지 폭력이 난무하고

군대가 충돌했다.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업들이 달성되었다. 인간의 비행, 전 대륙을 가로지른 철도와

운하, 뉴턴 물리학의 근본적인 재정리까지, 그러나 그 진보적 기술들은 전쟁을 일으키거나 끔찍할 정도로 효율적인 전투 방식을

제공하며 새로운 위협을 안겼다. 인류는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것들은 가까이서 볼 수록 매력이 없어졌다.







장례 열차


1901년 1월 22일 어둠이 내린 후 한두 시간이 지났을 때 빅토리아 여왕은 숨을 거둔 채 화이트섬 오즈본 저택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반려견과 가족들에 둘러싸여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아들이자 와우이 계승자인 앨버트 에드워드의 이름, '버티'를 부르고

숨을 거뒀다. 왕자는 정식으로 에드워드 7세로 즉위했고 '에드워드' 시대(이미 벨 에포크의 끝자락으로 여겨지는 시대였지만

영국인들은 이런 이름을 붙였다) 의 문을 열었다.


세상을 떠난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영국에서 군주의 장례가 치러지는 것은 64년 만의 일이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흰색

과 황금색의 특별한 색채 구도로 꾸민 군 기념식에 관해 명확한 지침을 남겼다. 그녀는 와이트섬에서 145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윈저가의

프로그모어 영지에 어머니와 남편 앨버트 공 곁에서 영면했다.


그곳까지 가는 여정은 빅토리아 시대다운 행사였다. 웅장한 예스러움과 늠름한 새로움이 뒤섞였다. 마차, 왕실 요트, 기관차가 오크나무

 납으로 만들어진 관을 운반했고, 화려하게 장식한 강인한 영국군 대표단이 줄곧 호송했으며 길을 따라 늘어선 군중들이 갈채를 보냈다.

그들은 대부분 빅토리아 여왕 말고는 다른 왕이나 여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진은 여왕의 관을 기다리고 있는

장레 열차의 내부를 보여 준다.


해외의 많은 귀족들이 2월 2일 윈저성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했다. 참석자 중에는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도 있었다. 10년 안에 그들이 그곳에 다시 모이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윌리엄 매킨리


1901년 국가원수의 장례를 치른 나라는 영국만이 아니었다. 9월 6일에 미국의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뉴욕주 버펄로에서 개최된

전미 박람회에 참석했다. 워싱턴의 유명 사진가 프랜시스 벤저민 존스턴이 이 사진을 찰영하고 난 뒤 단 몇 시간 만에 메킨리 대통령은

근접 거리에서 복부에 두 번이나 총격을 받았다. 암살범은 폴란드게 미국인 무정부주의자 리언 촐고츠였다. 한 해 전에 이탈리아

국왕 움베르토 1세가 피격된 사실을 전해들은 후 그는 대통령을 암살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지자들과 나란히 서서 기다리던 촐고츠는 권총을 손수건에 감싼 채 가까운 거리엣 매킨리에게 총격을 가했다. 매킨리 대통령은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8일 뒤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대통령직은 부통령 이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승계되었고 촐고츠는 전기의자

에서 처형되었다. 10월 29일에 뉴욕주 오번의 교정 시설에서 집행된 촐고츠의 사형 장면은 토머스 에디슨의 영화 스튜디오가 재연해

무성영화로 제작했고 일주일 안에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공화당 대통령 매킨리의 재임 시절은 상당한 변화의 시기였다. 미국-스페인 전쟁과 하와이 합병이 성공적으로 해결되었고 경제성장이

수반되었다. 그는 남북 전쟁에 참전한 마지막 대통령이었고 36년 사이 에이브러햄 링컨과 앤드루 가필드에 이어 세 번째로 총격으로

사망한 대통령이었다. 그의 재임 시절은 미국 정치에서 '진보의 시대' 라는 새로운 국면의 시작으로 일컬어진다.








라이트 형제


키티 호크 부근 킬데블힐스는 인간이 최초로 비행한 장소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노스캐롤라이나의 바람 부는 언덕이

미국인 형제 오빌 라이트와 윌버 라이트가 700변 넘게 글라이더 비행을 한 곳이다. 그리고 1903년 12월 17일에 그들은

동력 장치를 갖추고, 공기보다 무거운 기계를 시험 운행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했다.


그들은 그 기계에 '라리트 플라이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가문비나무 목재로 만든 복엽기로 비행사는 앞을 향해 엎드린다.

골조가 드러난 그 비행기의 조종은 어려웠고 네 차례의 짧은 비행 뒤에 강한 바람에 히말리나 수리할 수 없게 망가졌다.

그래도 그 기계는 '날았다'.


라이트 형제는 기념비적인 첫 비행을 마친뒤 비행 기계를 개선하는 일에 착수했고 1908년 1시간 이상 떠 있을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었다. 라이트 형제는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시험비행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두 사람은 오하이오 허프먼 프레리에

비행 조종사 학교를 열었고 미군을 포함한 고객들에게 공장에서 생산한 플라이어를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0년대가 끝나갈 무렵 다른 사람들이 두 사람을 따라잡았고, 라이트 형제는 그들의 디자인을 보호하기 위해 특허를

출원한뒤 법적 분쟁에 매달렸다. 1912년 윌버 라이트가 장티푸스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항공학에 몸 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항공기들은 이미 대서양을 횡단했고 음속의 벽을 깼다. 또한 원자폭탄을 투하해

 한 번에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도 벌어졌다.








마리 퀴리


마리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는 바르샤바의 이른바 '비행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비행사는 아니었다.

그녀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였다. 방사능 연구로 두 차례나 노벨상을 수상했으며 결혼 후 얻은 '마리 퀴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1867년에 태어난 마리 퀴리는 24세에 폴란드를 떠났고 파리에서 남편과 함께 대부분의 연구를 수행했다.

1910년 그녀는 라듐 분리에 성공했고 1911년에 두 번째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마리는 방사선학을 적용한 이동식 엑스레이 장치로 부상병들을 치료하며 적십자사와 함께 활동했다.

전쟁 전에 퀴리는 여성이자 외국인이며 유대인이 의심된다는 이윺로 늘 멸시와 방해를 받았다. 그녀는 위대한 과학적 공헌으로

칭송받고 명성을 얻어 과학계 거물이 되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890년 마리리 퀴리가 첫 번째 노벨상을 수상하고 나서 2년 뒤 스위스 베른에서 일하던 26세의 독일 특허청 조사관은

우주의 기초단위를 이해하는 과학자들의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느라 분주했다. 시간, 공간, 에너지와 질량에 관해

300년 동안 유지되어온 뉴턴적 사고를 전복하려는 무명의 후보자였다.


1905년에 쓴 논문 가운데 하나인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관하여」에서 아인슈타인은 그의 가장 유명한 이론인

'특수상대성이론'을 주장했다. 이 이론은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상충하는 관념들을 일치시켰으며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이는 물체의 이상한 작용을 해명했다. 특수상대성이론에는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를 설명하는 등식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등식은 언제나 가장 쉽게 인용되는 과학적 약호가 되었다.


11년 뒤인 1916년에 아인슈타인은 두 번째 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을 제시하고 자신의 기존 주장을 확대해 중력을 시공간

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했다. 그는 1922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고 1930년대 유럽이 전쟁으로 빠져들 때 미국으로 이주했다.

1955년에 사망할 때까지도 여전히 우주의 개념을 재구성하고 있었다. 이 사진은 중년에 찍은 것으로 젊은 시절부터

즐겨 기르던 검은 콧수염과 빗질하지 않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여전히 자랑한다.








축음기


천재적 과학자들과 야심찬 발명가들이 인간의 지식을 확장시키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는 기술도 진보했다.

1877년에 토머스 에디슨은 축음기를 발명했다. 25년 뒤 그라모폰(본래는 축음기 전체를 총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브랜드 이름이었다)

이 생산되었다. 독일 태생의 사업ㅁ가 에밀 베를리너가 만든 그 장치는 평평한 압축 원판을 재생했으며 1909년부터 주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니퍼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등장시켜 유명해진 상표로 등록되었다.


이 범상치 않은 사진에서는 사자가 니퍼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이 사진을 촬영한 독일의 사진가 필립 케스터는 낙타, 얼룩말,

코끼리, 불곰, 라마, 수사슴을 향해 재생되는 축음기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1900녀대에 소비자들을 열광시킨 신기하고 새로운

장치는 축음기만이 아니었다. 가정마다 벤츠나 다임러가 만든 석유를 사용하는 자동차, 제너럴 일렉트릭사에서 나온 토스터, 질레트

세이프티 레이저사의 면도기, 윌리엄 켈로그의 ㅂ매틀크리크 토스티드 콘플레이크사가 내놓은 콘플레이크나

코닥사의 부라우니 카메라를 구입할 수 있었다.


진공청소기, 거짓말 탐지기, 유리창 청소기, 에어컨, 베이클라이트와 셀로판이 모두 이 시기에 발명되었다.

그리고 뒤이은 몇 해 사이에 그것들은 서서히 일상생활 속으로 파고들었다. 특히 미국에서 그랬다.

 세계 곳곳의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고 싶어 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엘리스섬


1907년에 미국 역사에 수립된 한 가지 기록은 이후 90년 가까이 깨지지 않았다. 바로 제임스타운 정착지가 만들어진

 때부터 1812년 전쟁까지 200년이 넘는 기간 1,285,349명의 이주민이 미국에 도착한 기록이다.


이 사진에는 엘리스섬에서 일상적인 의학 검진을 받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질병 검사에는 호흡기 질환,

티푸스 같은 박테리아성 질병, 세균 감염과 정신 질환 등이 포함되는데 입국 절차에서 핵심으로 다루는 문제였다.

질병이 발견된 사람들은 근처에 위치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부치 캐시디


범죄자 부치 캐시디(오른쪽 끝)는 이민자의 아들이었다. 그의 부모는 19세기 중반 모르몬교 목장 노동자로 영국을 떠나

유타주에 정착햇다. 캐시디는 13명이나 되는 그들의 자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1866년 로버트 르로이 파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캐시디는 도살장에서 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약어 '부치'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키시디는 1889년 콜로라도에서

은행을 털고 난 후 와이오밍을 근거지로 한 조직을 결성해 악명을 떨쳤다. 말을 타고 가축 떼를 훔치는 도적 떼였던

그들은 와일드 번치, 홀인더월 등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졌다,


1900년에 촬영된 이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은(뒷줄 왼쪽부터) 빌 카버와 키드 커리, (앞줄 왼쪽부터) 해리 롱거버

(일명 '선댄스 키드'), 벤킬패트릭, 그리고 캐시디 자신이다. 이 사진이 촬영된 시기에 이들과 이들의 공모자들은 은행과

열차 강도로 몇몇 주에서 수배령이 내려졌다. 보안관이 이끄는 수색대와 그 유명한 핑커턴 탐정사 요원들을

교묘히 피해 다녔고 때로는 그들을 조롱하기도 했다.


사진 촬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캐시디아 롱거버는 약탈물을 사용해 파타고니아 목장을 사들이면서 은퇴를 암시했지만

얼마 안 가 다시 강도 행각을 벌였고 1908년과 1911년 사이에 그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나중에 회람된 보고서에 따르면

귿르은 ㅂ몰리비아 기병대에 총살되었지만, 캐시디의 누이는 캐시디가 미국에 돌아와 신분을 감추고 1937년까지 살다가

자연사 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실제 운명이 어떠했든 그의 삶은 미국 서부의 독특한 이야기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지진


킬리포니아주 밑에 위치한 1,200킬로미커 길이의 샌 앤드리어스 단층은 두 개의 지층이 불안정하게 결합되었다는 특징을 지녔다,

단층 때문에 몇 차례 대규모 지진이 있기는 했지만 1906년 4월 18일 오전 5시 13분 진동을 시작으로 476킬로미터에 이르는 단층을

따라 베이 지역 주변과 주거지를 포함한 샌프란시스코의 대부분 지역을 파괴한 지진만큼 엄청난 것은 없었다. 지진은 42초 동안

지속되었다. 최대 진동은 대략 리히터 규모 7.9를 기록했다. 진앙은 대규모 인구 밀집 지역 바로 밑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고

 이는 그지진이 치명적이었음을 의미했다.


대부분의 피해는 최초의 지진의 진동 때문이 아니라 3일 뒤 발생한 화재 때문이었다.

단기적으로 화재의 영향은 치명적이었지만 장기적으로 그 지진은 샌프란시스코의 도시 재생 기회를 제공했다.








파나마 운하


샌프란시스코 재건이 굉장한 사업이었다고는 해도 12900년대 미국 공학자들이 직면한 최대 난제는 아니었다.

그곳에서 남동쪽으로 6,4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근대 세계이 불가사의 할 만한 일이 준비되고 있었다. 바로 파나마 운하의

 건설이었다. 운하 건설의 가능성은 콩키스타도르(15세기부터 17세기 사이 아메리카 대륙에 침입한 스페인인을 일컫는다) 시절부터

거듭 고려되었고, 1880년대에는 수에즈 운하 건설을 지휘했던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지휘 아래 노동자들이 첫 삽을 뜨기도 했다.

그러나 높은 습도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상황에다 해수면보다 25미터나 높은 운하 건설에 드는 막대한 비용은 레셉스를 좌절케 했다.


미국의 대통령은 교활한 술책으로 그 사업을 넘겨받았다. 파나마가 컬럼비아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는 1903년 파나마 반군들을

자극해 자금을 지원하고 무장을 제공하며 파나마를 컬럼비아에서 분리시키려는 도박을 벌였고 성공을 거두었다.

이 사진은 3개의 육중한 수문 가운데 하나가 건설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당시 파나마 운하는 미국이 이룬 최고의 공학적 위업이

었으며 1914년 8월 15일에 개통되었으며 이제 막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세계 최강대국의 대담한 상징이 되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고 있을 때, 태평양 건너편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야심 차고 경이로운 근대적 기간시설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러시아제국의 동쪽 끝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를 잇는 단선 철도가 1904년 7월 21일에 완성되었다.

9,000킬로미터에 이르는 철도는 바이칼호에서 단 한 번 끊겼을 뿐이다. 그곳에서 승객과 화물은 여객선으로 갈아타고 호수를 건넜다.

6주 걸리던 여행이 1914년에 이르면 10일 안에 끝낼 수 있게 되었다. 큰 폭으로 증가한 철도의 수용 능력은 러시아의 산업을 자극

했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니즈니노브 고로드의 소르모보 제철소 같은 공장들은 수천대의 증기기관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러일 전쟁


1905년에 러시아의 철도는 전쟁을 촉발하는 데 작용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부설될 때 차르 정부는 중국 북부의 만주 지방에도

철도를 만들고 있었다. 아서항(현재의 뤼순커우구)에는 러시아의 전초기지가 있었다. 청 왕조로부터 조차한 부동항이었다.1897년부터

러시아 함태가 아서항에 주둔했고 1899년부터 1901년까지 의화단 운동이 끝난 후 러시아군 수만 명이 만주에 주둔해 있었다.


일본은 이런 러시아군의 집결을 우려의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게게 만주(와

인접한 한반도)를 지배하라고 부추겼다. 빌헬름 2세는 러시아만이 일본의 태평양 지배를 저지할 수 있다는 편지를 쉴 새 없이 니콜라이

2세에게 써보내며 인종주의 차원에서 그가 '황색 공포'라고 규정한 현상을 설명했다.


1904년 2월 8일에 전쟁이 터졌다. 일본군이 아서항에 정박한 러시아 함선을 어뢰 공격하며 지작된 포위 공격은 11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결국 러시아가 항구를 포기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육상에서의 전쟁은 무자비했다. 1905년 2월 20일부터 3월 10일까지 전개된 봉천

전투에서 양측의 전사자는 15만 명을 넘었다. 이 사진은 러시아의 부상병을 치료하는 적십자사 소속 일본 간호사들을 보여준다.






보어 전쟁


영제국에서 인도의 독립은 끝없는 논쟁을 촉발하는 문제였지만, 아직 세기 전환기 아프리카 남부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규모의

공개적인 충도롤 표출되지는 않았다. 보어 전쟁은 케이프 식민지에 주둔한 영국군과, 자치 공화국이던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

국이ㅡ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농부들(보어인)이 충돌한 전쟁이다. 그들의 복잡한 분쟁은 남아프리카를 하나의 연방으로 지배

하려는 영국의 열망, 금광과 다이아몬드 광산에 대한 영국의 권리 주장, 이에 저항하는 보어인들의 저항으로 귀결되었다.


1899년 10월 11일에 전쟁이 터졌다. 1년 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린 끝에 수적으로 훨씬 더 우세였던 영국군이 몇 차례 중요한

승리를 거둔 후 보어인들의 수도 블룸폰테인과 프리토리아를 장악하고 마페킹(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의 설립자 로버트

 메이든-파월이 조직한 수비대)의 포위를 풀었다. 그러나 1900년 가을부터 전쟁은 끔찍하게 변했다. 영국군의 새 사령관

키치너 경은 보어인 농장을 초토화하고(흑인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그 주진들을 사진에 등장하는 강제수용소에

몰아넣는 전략으로 보어인의 게릴라전에 대응했다.


1902년 5월 31일에 보어인의 항복으로 전쟁이 종결되었을 때 28,000명가량의 보어인과

20,000명 가량의 아프리카 흑인들이 강제수용소에서 굶어 죽거나 질병으로 사망했다.

 이 소모적인 죽음은 다가오는 세기를 특징짓게 될 끔직한 형태의 새로운 전쟁을 예고했다.






헤레로 전쟁


영국이 보어인과 아프리카 흑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몰아넣고 있는 동안 그보다 북쪽에서 또 다른 잔혹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다.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오늘날의 나미비아)의 반란과 이에 대한 식민 지배자들의 잔인한 보복이 시작되고 있었다.


서양 의복을 입은 헤레로족 여성을 미화한 이 사진은 원래 독일의 주간 소식지 《베를리너 일루스트리르테 차이퉁》에 수록되었는데

한 민족의 집단적 운명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들려주지 않는다, 독일은 2004년 이 사건이 인종학살이었음을 인정했다.






필리핀-미국 전쟁


과거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는 장기간 이어질 또 하나의 반란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 싸움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을 종결

지은 파리 조약에 따라 필리핀을 장악한 미군과, 필리핀 제1공화국이 필리핀 제도의 합법적 독립 정부라고 주장하는 필리핀인 사이에서

벌어졌다. 1899년 2울 4일에 마닐라 인근 산타 메사 마을에서 미군 병사 하나가 총격을 가했을 때 이미 두 집단 사이에 긴장이 고조

되었다. 그 결과 이틀에 걸친 마닐라 전투에서 수백 명의 미국인이 희생된 대가로 수천 명의 필리핀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 끔직한 폭력은 19022년 7월 1일 조약 체결로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 조약으로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필리핀인에게

제한적인 자치 정부를 허용했다. 노련하고 결연한 반란군들은 '카갈로그 공화국(타갈로그는 필리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다)' 을

선포하고 1906년까지 전쟁을 이어갔다. 반란군의 마지막 전초기지들은 191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파괴되었다.







청년 튀르크당


청년 튀르크당의 목적은 혁명이었다. 이들은 1906년부터 1908년 사이 술탄 압툴 하미드 2세의 절대군주정을 전복하고 입헌정부를

다시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오스만제국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던 정치 운동을 주도했다. 1876년 왕위를 계승한 이래 30년에 이르는

압둘 하미드의 통치 기간은 결코 영광스러운 시간이 아니었다. 터키의 경제와 기간 시설들을 근대화하려는 그의 열망은 거듭된 반

란과 대외 전쟁,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내부의 적들에 대한 잔인하고 관용 없는 조치들로 손상을 입었다.


술탄은 19058년 아르메니아인들의 암살 시도를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그 대신 1908년 여름, 불만을 품은 청년 튀르크당 운동원들

(군 장교와 반대파 자유주의자들)이 지방 당국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운명이 결정 되었다. 제국 전체로 불복종의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술탄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1878년에 자신이 중지시킨 의회를 다시 조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오스만제국에서 제2차 입헌 시기가 시작되었고 장교 엔베르 파샤를 포함안 청년 튀르크당이 두각을 나타냈다.

1908년 개혁에도 불구하고 압둘 하미드는 다음 해에 폐위되었고 그의 형 무라트 5세로 슐탄이 교체되었다. 역설적인 것은 무라트의

지휘와 엔베르 파샤의 통제 아래 오스만제국의 붕괴와 불명예가 명확해졌다는 점이다. 1914년에 전쟁 장관으로 엔베르 파샤는 터키가

독일 편에 서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을 주장했고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1915년 그는 15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아르메니아

인 인종학살에 큰 책임이 있다. 엔베르 파샤는 1922년 러시아 내전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아홉명의 왕


영국에서 1900년대는 시작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끝이 났다.1910년 5월 20일에 왕실 열차가 다시 한 번 국왕의 시신을 싣고 윈저 성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68세의 에드워드 7세의 시신이었다. 쉴 새 없이 담배와 시가를 물고 지낸 탓에 허리둘레가 122센티미터였던 그는 결국

2주 전인 5울 6일에 거듭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70개국 이상에서 파견된 대표단과 수십 며의 유럽 왕실 대표들이 그를 애도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장례식 기간에 촬영된 이 사진은 한 방에 아홉 명의 왕들이 모여 있는 아주 드문 장면을 담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불가리아의 차르 페르디난트 1세, 포르투갈의 마누엘 2세,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 그리스의

요르요스 1세,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 앞줄 왼쪽부터 스페인의 왕 알폰소 13세, 에드워드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조지 5세, 덴마크 왕

프레데릭 8세 순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가까운 인척이었다. 호콘 7세는 프레데릭 8세의 아들이었고 조지 5세이 매제였다. 독일의

카이저는 조지 5세의 사촌이었다. 그들 가운데 다수가 곧 존립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이 사진이 촬영되고 10년이 자나지 않아서 페르디난트 국왕과 카이저 빌헬름이 퇴위를 강요당했고 마누엘은 폐위되었으며 요르요스 1세는

암살당했다. 독일과 포르투갈의 군주정은 폐지되었고 다른 이들의 권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군주정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있었으며

다른 많은 것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1차 세계대전의 공포로 인해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인용서적; 댄 존스, 마리나 아마랄 著 『역사의 색』






Elegy - Colors Of The 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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