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관, <고사한일도>, 조선시대, 22.7× 27cm,






-1-

음 용 일 격 묘 난 추    삼 재 광 음 편 몽 의

音容一隔杳難追  ○載光陰片夢疑

당신 모습 한 번 멀어지자 추억마저 아득하고 삼십 년 세월도 한바탕 꿈인 듯만 하구려

차 일 상 심 무 한 사    하 유 보 여 구 천 지

此日傷心無限事  何由報與九泉知

오늘 이 아픈 마음은 끝도 없을 것만 같은데 무슨 수로 저승의 당신이 알게 할 수 있을까



-2-

평 시 소 별 유 관 념    단 찰 빈 빈 권 조 회

平時小別○關念  短札頻頻勸早廻

평소에 잠깐만 헤어져도 그리 연연하셔서 자꾸만 편지 보내 빨리 오라 하더니만

산 사 표 령 금 이 삭    여 하 불 견 일 서 래

山寺飄零今二朔  如何不見一書來

산사에 떠돈 지 두 달이나 되었어도 어찌해서 편지 한 통 볼 수도 없는가요



-3-

정 치 쟁 추 침 면 재    신 변 유 착 석 친 재

精緻爭推針綿才  身邊猶着昔親裁

꼼꼼한 바느질 솜씨 따를 이 없었으니 지금 입은 내 옷도 당신이 해주었지요

루 흔 쌍 수 반 여 허    차 일 빙 수 한 탁 래

淚痕雙袖班如許  此日憑誰澣濯來

소매 가득 눈물 자국 얼룩짐 이 같아도 오늘은 누구에게 빨아달라 해야 하나



-4-

려 귀 침 릉 무 시    창 황 제 자 각 분 리

厲鬼侵陵無歇時  蒼黃諸子各分離

잠시도 쉬질 않고 병마는 침범하고 자식들은 황급히 제각각 흩어졌지요

일 관 적 적 공 방 리    인 상 고 혼 구 뇌 이

一棺寂寂空房裏  忍想孤魂久餒而

텅빈 방 안엔 관 하나만 적막한데 외론 혼 오래 주릴까 차마 생각이나 하리까




-5-

매도삼아효출천  신근봉양최감련

每道三兒孝出天  辛勤奉養最敢憐

셋째 아이 효성이 지극하다고 매양 말했고 고생하며 부모봉양한다고 그렇게 예뻐했는데

수지사병능소활  독체가중수궤연

誰知死病能穌活  獨滯家中守几筵

누가 알았겠소, 죽을 병에서 다시 살아났건만 홀로 집에 남아서 제 어미 빈소 지킬 줄을




-6-

제 이 아 금 년 십 팔    상 차 빈 구 관 혼

第二兒今年十八  常蹉貧窶冠婚遲

둘째 아이는 올해로 열여덟 살이나 되었건만 가난해서 혼례마저 늦어짐이 늘 한탄스럽소

여 금 생 사 수 심 념    원 병 황 촌 병 경 위

今生死誰深念  遠屛荒村病更危

오늘 같은 삶과 죽음 누가 깊이 생각이나 했겠소만 이 먼 궁벽한 시골에 묻혀 병들고 위태롭기만 하오



-7-

잔 구 표 전 고 무 의   경 견 제 고 저 처 귀

孱軀飄轉苦無依  更遣諸孤這處歸

쇠잔한 몸 떠돌다 의지할 곳 없어 괴로워 다시 여러 자식 보내고 이곳에 돌아왔지요

서 자 명 연 진 가 선   자 련 신 세 첩 점 의

逝者冥然眞可羨  自憐身世輙霑衣

가버린 당신은 아득하니 참으로 부럽소만 이내 신세는 가련하여 눈물만 옷을 적실 뿐이오



-8-

미 지 구 송 천 회   빈 천 부 처 백 사 애

微之口誦千回  貧賤夫妻百事哀

원진의 옛 시구 수천 번을 외워보지만 가난한 우리 부부 모든 일이 슬프구려

빈 천 경 겸 정 애 독   촌 심 쟁 견 불 성 재

貧賤更兼情愛篤  寸心爭遣不成○

가난했지만 그래도 우리 금실 도타웠으니 일편단심 보내노니 재는 되지 않으리라 


- 「죽은 아내를 슬퍼하며 시 여덟 수를 짓다 」 『표암유고豹菴遺稿』권1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18세기를 대표하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은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기도 하다.

 육십하나에 이르러서야 영조의 배려로 영릉참봉英陵參奉 벼슬에 봉해졌으나 생애 대부분을 빈궁하게 살았다.

표암과 동갑이었던 진주 류씨 부인은 1727년 3월 15세로 강세황과 혼인하여 아들 넷을 두고 30년을 함께 살다가

1756년 5월 1일 44세로 세상을 뜬다. 표암은 제문에서 가족들의 가난함을 이렇게 술회한다.


가난은 날로 더욱 심해져가 5, 6년 이래로 죽도 잇지 못해 주렸고, 집안 식구도 너무 많아 10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가

당신만을 바라 볼 뿐이었지요. 내 성격이 우둔하여 생업엔 어두워 당신이 이를 홀로 감당해내면서 온갖 것들을 다 지탱

해나갔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빚은 쌓여만 가고 관아에서 빌려 먹은 곡식도 다 바닥이 나 올해엔 그 궁핍함이

극심하게 되었소.(·····)


위의 도망시 중 다섯째 수는 아들에 대해 말한 것이다. 즉 죽을 것만 같았던 아들이 어머니가 죽고 나서야 겨우 살아나

염병으로 식구들이 다 피신하고 난 빈집에 홀로 남아 어머니의 빈소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 아들은 어머니의 목숨을

대신해서인지 몰라도 훗날 영조 때 음도사陰道事를 거쳐 첨중추僉中樞 벼슬을 지내며 물경 82세의 장수를 누렸다.

또 둘째 아들 완은 당시 열여덟 살이나 되었지만 가난해서 혼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표암은 이를 도망시 여섯번째

수에서 읊으며 한탄한다. 당시 관습으로 14, 15세면 이미 장가를 갔어야만 했으니 가히 노총각이었던 셈. 류씨 부인은

죽는 마당에도 이 아들을 장가들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고. 이것 또한 가난 때문이라는 사실은

모두에게 다 같이 뼈저리게 아픈 고통이었을 것이다,


강세황은 이렇게 착한 아내가 병들어 죽게 된 것이 모두 자신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통탄한다.

'뼈에 사무치는 가난'이 결국 아내를 일찍 죽게 만들었다는 심한 자책감에 괴로워 한다. 그는 제문을 쓰면서도 너무도 감정이

격한 나머니 "말을 하고 싶어도 목이 메이고 가슴이 막히며, 침묵하고자 하나 차마 침묵하지도 못하겠소" 라고 하였다.

표암이 그 지독했던 가난에서 겨우 벗어난 것은 아내가 죽고 7년 정도 지나 아들들이 출사出仕하면서 부터다. 또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1773년 그의 나이 61세 때 영조가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처음으로 벼슬자리를 내렸고, 64세 때에는

기로과耆老科에서 장원을 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66세 때에는 가선嘉善에 오르며 76세의 장수를 누린다.







김홍도, 《단원절세보첩》 <춘작보희도>, 1796, 종이에 수묵담채, 26.7×31.6cm, 리움미술관 소장.





미 건 배 권 루    잉 적  점 상 진

未乾㤳捲淚  㭁積簟牀塵

술잔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살평상엔 먼지만 가득히 쌓였소

경 인 중 문 입    가 거 역 외 인

更忍中門入  家居亦外人

다시 차마 중문으로 들어가보지만 내 집에 살아도 손님만 같구려



하 상 망 작 군    초 이 식 거 향

何嘗望作郡  梢已識居鄕

내 어찌 일찍 벼슬하기만을 바랐겠소만 이제야 조금 알아 고향으로 돌아왔건만

소 복 난 소 수    문 전  자 도 향

小福難消受  門前紫慆香

박복한 당신 향수를 누리지 못했는데 지금 문 앞에는 햅쌀 향기만 그득하구려



아 소 부 지 곡    곡 성 사 독 서

兒小不知哭  哭聲似讀書

아이는 어려서 곡을 할 줄 몰라서 곡성이 글 읽는 소리와도 같다가

홀 연 제 부 주    책 책 루 연 주

忽然啼不住  ○○淚連珠

갑자기 엉엉 울며 멈추지 않더니 하염엾는 눈물만 구슬같이 흘렀소


- 「죽은 아내를 슬퍼하여 悼亡」 『明美堂集』권4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1852~1898)이 쓴 것이다. 모두 여섯 수를 썼지만 여기서는 그중 둘째, 넷째, 다섯째 수만을

들었다. 한말의 대문장가 김택영이 우리나라 역대 최고 문장가 아홉 명을 선발하면서 최후의 문장가로 영재를 꼽았.

1866년(고종 3) 겨우 15세의 나이로 별시문과別時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나라에서 너무 일찍 등과했대서 19세가

되어서야 홍문관직 벼슬을 주었을 정도. 현재 그에게는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최연소 과거급제자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다.


이건창의 아내는 달성 서씨로 그와 동갑이었으며, 12살에 시집와서 10년을 함께 살다가 1873년 22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첫번째 시에서는 아내가 죽고 난 뒤 영전에 눈물로 술잔을 올린 것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살평상엔

먼지만 가득히 쌓였다고 했다. 아내의 거처였더 중문 안은 들어가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신을 외인이라 했다.

두번째 시에서는 마지막 구가 가슴을 친다. 집 문 앞에 펼쳐진 누런 벼이삭이 나락 향내를 풍긴다. 그 광경에서 갑자기 죽은

아내를 떠올린다.  세번째 시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통하여 아내 잃은 비통함을 나타냈다. 아내는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세상을

떴던 것이다. 이 시 속의 아이는 양자였던 것이다. 이건창이 불과 22살에 썼다고는 하지만 아내 잃은 자가 지닌 슬픔의 농도를

한층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내의 사후 1년이 지나서 쓴 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아직도 글을 쓰지 못한 채 당신을 곡하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 붓을 들기를 폐해버린 까닭입니다.

비록 몇 글자라도 엮어보려고 하였으나 괴로워서 쉽지가 않습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 평생을 다해도

못 다할 슬픔이 있으니, 세월이 간다고 그칠 일도 아니랍니다. 슬픔은 마음에 그대로 있는데,

어찌 글로써 나타낼 수 있을까요?







장대천, ,금박 위의 심홍색 연꽃>, 1975, 비단에 채색.




아 자 지 리 차 소 류    부 인 염 세 백 무 우

我自支離且小留  夫人厭世百無憂

나는 지루한 이 세상 잠시 더 머물겠지만 당신은 싫은 세상 이제 걱정 하나 없겠소

  치 정 백 발 교 전 비   상 식 이 시 곡 미 휴

癡情白髮轎前婢  上食○詩哭未休

아직도 아이 같은 마음의 백발 여종은 상식 올릴 때마다 곡을 그치지 않는구려




종 부 영 관 일 일 신    사 량 판 작 우 량 신

縱復榮觀日日新  思量判作○凉身

비록 세상 영화 날로 더 새로워진다 해도 이 몸은 분명 쓸쓸한 신세가 될 것 같소

비 무 권 속 감 오 로    불 견 당 년 결 발 인

非無眷屬堪娛老  不見當年結髮人

늙은 나를 기쁘게 할 식구도 없지 않지만 그날 혼인했던 그 사람은  보이질 않으니




신 부 초 래 흡 십 삼    종 쇠 득 로 노 난 참

新婦初來恰十三  從衰得老老鸞黪

새색시 시집올 때 나이 꼭 열셋이었는데 쇠해지고 늙어서는 늙은 난새를 타셨구려

귀 정 막 이 참 치 한    율 주 종 동 왕 일 감

歸程莫以參差恨  栗主終同往日龕

돌아가는 길 제각각이라 한탄하지 마시게 우리 신주 끝내 함께한 감실로 갈 터이니




석 곡 등 광 냉 구 방    음 충 즉 즉 향 추 량

夕哭燈光冷舊房  陰○○○向秋凉

등불 빛에 저녁 곡소리 차가운 예전 방엔 벌레 소리 찍찍대며 찬 가을이 되어가오

생 시 절 물 금 유 재    훤 초 화 함 봉 취 황

生時節物今猶在  萱草花含鳳嘴黃

생시의 사철 만물 오늘도 변함이 없어서 원추리 꽃은 노오란 봉황부리 머금었구려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시 여섯 수를 짓다 」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13책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가 쓴 이 도망시는 애절함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터다. 모두 여섯 수이나 여기서는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수만 들었다. 1784년 16살의 나이로 자신보다 두 살 아래였던 창녕 조씨와 결혼하여 조씨가 57세로 죽기까지

43 년을 함께 살았고  4남 2녀를 두었다. 그러나 큰 딸만 조씨의 소생일 뿐 나머지는 신위가 30세가 넘어 다시 맞이한 조씨 부인

에게서 낳은 자녀들이다.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한 첫째 부인 조씨의 마음이야 미루어 짐작이 간다. 신위는 죽은 아내를 위해

모두 열네 편의 시를 남겼다. 그만큼 첫 번째 아내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듯. 신위는 아내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그 소생이었던

큰딸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는 애착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딸을 혼인시키고도 함께 살았다. 하지만 얼마 후 부득이한 사정으로

충청도의 시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도 「딸아이를 홍양으로 보내면서 80운의 시를 짓다」라는 장편시를 남겼다.


시 속에 나오는 원추리는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며 금침화衾枕花라 불리우며 아들 낳는다는 속설의 의남화宜男花라 부르기도 한다.

신위는 자신의 아픈 마음을 다시 다섯 수의 시로 녹여냈는데, 그중 마지막 수는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한다.



제 루 이 금 야 불 난    차 생 열 력 기 비 환

制淚而今也不難  此生閱歷畿悲歡

눈물을 참는 것이야 이젠 어렵지 않소만 이 인생 몇 번이나 기쁨과 슬픔 겪을런지

중 강 유 사 청 매 자    괴 저 장 상 일 미 산

中腔有似靑梅子  怪底長常一味酸

가슴속엔 푸른 매실이라도 들은 것처럼 이상하게 오래도록 시큰해져오는구려


『경수당전고警修堂全』17책







임득명, 《옥계십이승첩》<가교보월>, 1786, 지본담채, 24.2×18.9cm,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교 교 백 저 백 여 설    운 시 가 인 재 시 물

皎皎白紵白如雪  云是家人在時物

밝고 맑은 흰 모시옷 백설과도 같은데 당신이 살았을 적 간수하던 것이라고 했소

가 인 신 근 위 랑 조    요 극 미 료 인 선 몰

家人辛勤爲郞厝  要襋未了人先歿

당신이 고생하며 낭군 위해 마련했건만 바느질도 다 못 한 채 사람만 먼저 갔구려



구 협 중 개 노 모 읍    수 기 대 착 수 수 졸

舊篋重開老姆泣  誰其代斲○手拙

옷감 상자 열더니 할멈이 울며 하는 말 "누가 이 솜씨를 대신한단 말인가요"

전 폭 이 경 도 척 재    수 항 상 류 침 선 적

全幅已經刀尺裁  數行尙留針線跡

옷감 폭 마름질은 모두 벌써 끝나고 여러 번 바늘로 시친 자국 그대로 남았네



조 래 시 불 공 방 리    황 의 경 견 군 안 색

朝來試拂空房裏  怳疑更見君顔色

아침에 시험 삼아 빈방에서 입어보니 당신 모습 꼭 다시 보는 듯만 하구려

억 석 군 재 창 전 봉    안 지 불 견 금 조 착

憶昔君在窓前縫  安知不見今朝着

이전에 당신이 창 앞에서 바느질할 그때에 어찌 알았으리오! 오늘 아침 내가 이 옷 입을 걸 보지 못할 줄



물 미 유 위 오 소 석    차 후 나 종 군  수득

物微猶爲吾所惜  此後那從君手得

이 옷이 비록 작은 것이지만 내게는 소중한 것이라오 이제 이후로 어디 가서 당신 솜씨 얻어 입으리까

수 능 전 어 황 천 하  위 설 칭 온 낭 신 무 하 극

誰能傳語黃泉下 爲設○○郎身無罅隙

누가 저 황천에 가서 말 좀 전해주시게 "이 모시옷 낭군 몸에 빈틈없이 꼭 맞아요" 라고



- 「흰 모시옷 노래 白紵行」『번암선생집樊巖先生集』 권5




정조 때 영의정을 지냈던 명재상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쓴 시다.

그의 아내는 동복 오씨로 1751년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채제공은 1737년 18세에 동갑인 오씨와 혼인하여

15년을 함께 살았으며, 딸 둘을 두었다. 이 시는 아내가 짓다 만 흰 모시옷을 소재로 그리움을 노래 했기에 매우 독특한

도망시라 하겠다. 2구에서 '云' 이라고 한 것은 누가 그렇게 말하더라는 표현이다. 아내는 아마도 옷을 다 짓고 난 다음

남편을 놀래켜 주려고 했던 모양인데 그 옷을 다 짓기도 전에 그만 세상을 떠 더욱 애절하게 느껴진다.


채제공은 아내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했다. 당시 그는 부친의 임소任所였던 경상도 병산屛山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

그가 병산으로 내려갈 무렵 아내는 이미 병이 들어 있었던 듯, 게다가 아내는 임신 6, 7개월 상태였던 모양으로 그의

옷소매를 붙잡고서 말하길 "훗날에 내가 죽으면 꼭 당신과 합장해주세요"라고 했다는 것으로 봐서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내의 부음을 듣고 서울로 올라오기까지의 여정에서 자신의 통절한 마음을 모두 10수

의 시에 담은 것이다. 때는 정월, 눈 내리는 추위에 걸음을 재촉 선산, 문경, 영동, 용인 등을 거치며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 그리 순탄치 못했으니 어찌 마음이 조급치 않았으랴. 그는 아내를 장사 지내고서 5편의 시를 더 쓴다.

이중에서 정월 대보름의 둥근 달을 바라보며 읊은 시는 읽는 이의 마음을 더욱 처연케 한다.



매 세 가 진 상 원 야    산 처 배 월 원 생 남

每歲佳辰上元夜  山妻排月願生男

해마다 이 좋은 보름날 밤이 되면 당신은 달 보며 사내 낳길 소원했죠

가 련 인 사 잉 무 자    의 구 춘 성 월 색 함

可憐人死仍無子  依舊春城月色含

가련한 사람, 죽고 또 아들도 없는데 봄 맞은 성은 예처럼 달빛만 환하구려


-「보름날 밤에 上元夜



오씨는 딸 둘만 둔 채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 늘 아들 낳기로 소원했던 모양. 오씨가 죽을 무렵 뱃속에 있던 아이가

혹 아들이었는지도 모를 일. 그런 아내의 한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또 다음과 같은 시로 그녀의 혼을 위로한다.



공 당 반 조 애 유 진    동 궤 휴 함 적 이 진

空堂返照曖遊塵  彤几髹函跡已陳

빈방에 햇빛 비치자 먼지로 뿌옇고 붉은 안석 옻칠함은 어느새 낡았건만

세 칙 여 해 근 호 시    타 시 전 여 제 군 인

細飭女奚勤護視  他時傳與祭君人

딸애에게 잘 간수하라 가만히 일렀다오 훗날 당신에게 제사할 이에게 전하라고











전 년 아 행 서 출 관    삼 월 호 산 천 리 유

前年我行西出關  三月湖山千里遊

지난해 나는 관서지역으로 나가서 석 달 동안 강산 천 리 유람하였네

귀 래 군 병 애 역 노    행 기 하 지 류

歸來君病艾亦老  泣道行期何遲留

돌아오니 당신은 병들었고 쑥도 시들었는데 당신이 울며 하는 말 "돌아오심이 왜 그리 더디었나요?

시 물 여 류 부 대 인    인 생 기 간 여 부 유

時物如流不待人  人生其間如蜉蝣

쑥은 흐르는 물과 같아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인새도 그사이에 하루살이와도 같은 것이지요

아 사 명 년 애 부 생    견 애 자 능 념 아 부

我死明年艾復生  見艾子能念我不

제가 죽어도 다음해에 쑥은 다시 돋을 테니 그 쑥 보면서 저를 생각해주시겠지요?

금 일 우 종 제 부 식    반 중 유 아 홀 경 후

今日偶從弟婦食  盤中柔芽忽○喉

오늘 마침 제수씨가 밥을 차려주는데 그 상에 놓인 여린 쑥 보자 문득 목이 메이네

당 시 위 아 채 애 인    면 상 애 생 토 일 배

當時爲我採艾人  面上艾生土一坯

그때 나를 위해 쑥 캐주던 그 사람 작은 무덤 그 얼굴 위로 쑥은 돋아나는데


- 「동쪽 뜰에서 東園」 『효전산고孝田散稿』2책



효전孝田 심노숭沈魯崇(1762~1837)이 썼다. 총 34구로 이루어진 고시로 여기서는 후반부 12구만 들었다.

심노숭의 아내는 완산 이씨로 1792년 5월 27일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심노숭과 동갑으로 16세에 결혼하여

16년을 함께 살았다. 1남 3녀가 있었지만 둘째 딸만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었다. 더욱 가련한 것은 셋째 딸 아청이 어머니

이씨가죽기 한 달 전인 5월 1일 네 살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병중에 있던 이씨는 딸을 자신의 가슴에 묻고

직접 염殮을 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는 것. 심노숭은 딸과 아내를 차례로 장사 지낸 후 생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릴

만큼 격심한 고통과 슬픔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는 "아내를 잃고서 다섯 해를 지나면서 단 한순간도 기쁨이 없었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심노숭은 아내를 잃고 난 후 2년 동안 그리움과 슬픔으로 '베개맡에서 지은 글들의 모음; 이라고 명명한

『침상집枕上集』을 써내려 간다. 이렇게 아내를 생각하며 지은 시문들은 현재 50편 가까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이는 조선을 통틀어 유래가 없을 정도로 가장 많은 도망시를 남긴 것이다.


심노숭은 집요하리만치 '슬픔'에 집착했다.

그리하여 특이하게도 「누원淚原」, 즉 '눈물의 근원' 이라는 글을 썼다.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마음에 있는 것인가?

 눈물이 눈에 있다고 하면 마치 물이 웅덩이에 고여 있는 것과 같은 것인가?

마음에 있다고 한다면 마치 피가 맥을 따라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인가?

눈물이 눈에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다른 신체 부위와는 달리

오직 눈에서만 눈물이 나오니 눈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눈물이 마음에 있지 않다면

마음의 움직임도 없이 눈 그 자체로서만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으니

또한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푸바오스, <남경매화산>, 1960, 76×99cm,





유 명 상 접 묘 무 인  일 몽 은 근 미 시 진

幽相接杳無人   一夢慇懃未

이승 저승 이어진들 아득해서 인연 없으니 하룻밤 꿈 은근해도 이게 진짜는 아니겠지

엄 루 출 산 심 구 로    효 앵 제 송 독 귀 인

掩淚出山尋舊路  曉鶯啼送獨歸人

눈물 감추며 산을 나서 지난 길을 찾노라니 새벽 꾀꼬리만 울면서 홀로 가는 이 보내네


- 「양주에서 구용의 상에 곡하고 머물러 잔 뒤 다음날 날이 밝아 산을 나서며」 『석주집石洲集』



석주石洲 권필權鞸(1569~1612)이 절치한 벗이었던 구용具容(1569~1601)의 죽음을 통절해하며 지은 시다.

3구의 '구로舊路' 는 자신이 어제 걸어온 실제 산길이 아닌 친구와 함께 했던 옛일들을 더듬어 본다는 의미다.

석주 권필은 각종 시화에서 빠짐없이 거론된 만큼 뛰어난 시재試才를 지닌 인물로, 평생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야인으로 살았지만

그의 나이 33살 때 예조판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추천으로 명나라 사신과 시로써 맞대결할 만한 인물로 높이 평가되어

제술관製述官이라는 직책을 부여 받는다. 당시엔 사신을 접대함에 있어 더불어 시를 지어 주고받는 일이 일종의 외교적 관례였다.

선조가 권필의 시를 청한 자리에서 친구 구용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를 즉석에서 읊었는데 이를 본 선조가 크게감탄했다고 한다.

동시에 선조는 권필의 시 전체를 올리라고 명한다. 이후 선조는 늘 권필의 시를 책상에 올려놓고 읽었다고 한다.

이는 남용익南龍翼(1627~1692)의 『호곡만필谷漫筆』이라는 시화집에 전하는 내용이다.







김홍도, <묵죽도>, 지본수묵, 23×27.4cm, 간송미술관 소장



권필은 구용이 죽은 이듬해에 그가 남긴 시 중 백여 수를 뽑아서 시집을 만들어 『죽창유고竹窓遺稿』라

이름하고 서문을 직접 썼다. 권필은 구용의 시집을 다 편찬하고 난 후 그 뒤에다 옛일들을 추억하면서

 슬픈 심회를 시 한 편으로 남겨놓았다.



부 자 거 불 반    인 간 류 차 시

夫子去不返  人間留此時

자네는 가서 돌아올 수 없는데 인간 세상에 시만 남겨놓았구려

평 생 용 심 고    풍 격 소 인 지

平生用心苦  風格少人知

평생토록 고심하며 지은 시들 그 풍격을 아는 사람은 적다네

저 도 간 화 처    성 산 청 우 시

楮島看化處  城山聽雨詩

닥섬에서 함께 꽃을 바라보았고 성산에서 비 내리는 소리를 들었지

백 년 환 희 지    궁 로 독 여 비

百年歡會地  窮老獨餘悲

오랜 세월 기쁨으로 만났던 곳 나만 홀로 남은 슬픔에 늙어만 가오


- 「구용의 시집 뒤에다 쓰다」 『석주별집石洲別集』권1




친 지 영 락 이 무 존    만 사 인 간 지 단 혼

親知零落已無存  萬事人間只斷魂

나의 벗은 이미 죽어 세상에 없으니 인간 세상 모든 일에 넋이 나갈 듯하네

위 문 여 금 풍 우 야    야 응 중 몽 구 능 원

爲問如今風雨夜  也應重夢具綾原

묻노니 오늘처럼 비바람 치는 밤에는 응당 구용이의 꿈을 다시 꾸어야겠지


- 「친구를 잃고서 정랑 이자민에게 부쳐 보이다」 『石洲集』권7



제목에서 보이듯 이 시는 구용의 죽음을 슬퍼하여 권필이 시를 지은 후 당시 예조에서 정랑 벼슬을 하던 친구 이안눌에게

부쳐 보인 것이다. 자민子敏은 곧 이안눌의 자字이다. 허균은 이 시의 1 · 2구를 두고 "정이 가득한 말이 애절하다"라고 했다.

또한 3 · 4구는 예전에 이안눌이 지은 시 가운데에 '밤비 내리고 등불은 가물대는데 구용을 꿈꾸었네' 라는 시를 언급한

것이라고 했다. 실제 이안눌은 이 시를 지을 당시의 상황과 회포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임진년 가을 왜구의 난리를 피해서 관북에 있을 때에 일찍이 구용이의 꿈을 꾸었다.

때는 밤비가 쓸쓸히 흩뿌리고 등불만 가물거려 마음에 느낌이 일어나기에 시를 적어 기록하였다.


한편 이안눌은 권필의 시를 받아 읽고는 그 또한 한 편의 시를 써서 구용의 죽음을 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