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의 3명에 자녀들(엘리자베스 1세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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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國史

헨리 8세의 3명에 자녀들(엘리자베스 1세外)

마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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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를 빼놓고 영국 역사를 논할 수 없다. 이 인간은 참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간이였다. 아무튼 장성한 자녀가 3명 있었는데 훗날 3명 모두 잉글랜드 군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헨리 8세는 모두 6명의 정식 부인을 얻었는데 그중 3명의 왕비로 부터 각기 한명씩의 장성한 자녀를 얻게 된다. 그래서 1남2녀, 자녀 3명은 모두 이복 남매였다. 또한 헨리 8세는 유독 아들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라는 무리수를 두면서 까지 6명의 왕비를 두었다. 


헨리 8세는 새장가를 가기 위해 1533년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 유럽의 정신적인 질서였던 카톨릭의 교리상 기본적으로 이혼은 불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헨리 8세가 첫째 왕비 캐서린과 합법적으로 이혼을 하기위해 교황청에 이혼 허락을 요청하였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허락하지 않았다. 두번째 왕비 앤블린의 경우처럼 누명을 씌워 처형할 수도 없었다. 캐서린은 당대 초 강대국이였던 스페인의 공주출신이였기에 외교적인 마찰이 빚어질수 있었다. 종교가 정치위에 존재하던 시대였기에 합법적으로 이혼을 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을 할수 밖에 없었다.


헨리 8세가 내세운 이혼사유는 에스파냐와의 외교전략상 부득히 죽은 형의 부인인 형수와 정략결혼을 한것인데 이는 성서 레위기 20장 21절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리 공주를 제외하고 왕비 캐서린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죽은 것은 부정한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라는 이유를 댔다. 따라서 신 앞에서 떳떳하기 위해서는 부정한 결혼생활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황에게 자신의 결혼을 취소해주도록 호소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에 교황들은 대개 왕의 손을 들어 줘 은혜를 베풀어 왔었다. 그러나 교황은 허락할 수 없었다. 형수였던 캐서린과의 결혼 자체가 본래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1503년에 교황청에서 이를 허락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뒤늦게 그 결혼이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혼인을 무효로 한다는것은 서로 모순되는 일이였다. 이혼을 허락하게 되면 과거의 결정이 잘못된 판단이라는 증거가 되므로 교황청으로서 권위가 실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초 강대국이였던 스페인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에 대항하여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주도하여 일으킨 코냑동맹전쟁(1526-1530)에서 크게 참패하여 교황은 정치적인 입지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였다. 교황청을 비롯한 교황령 성도(聖都) 로마가 흥분한 제국군에 의한 살인,강간,파괴,약탈로 초토화되는 로마 대약탈사건(1527)이 발생했었고 교황 역시 간신히 산탄젤로성으로 도피하여 사실상 수개월간 감금되어 있었다. 


그래서 코냑전쟁이후 카를 5세가 기침만 하여도 벌벌 떨정도로 황제의 위세에 눌려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였다. 이런 카를 5세가 캐서린 왕비의 조카였으니 감히 이혼을 허락할 수 없었다. 자기 코가 석자이므로 황제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만일 잉글랜드가 프랑스 처럼 신성로마제국에 대적할 만한 강대국이였다면 제국군을 이탈리아에서 축출하여 카를 5세의 등쌀에 눈치밥을 먹고 있는 자신을 구원해준다는 조건하에 이혼을 허락해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는 서유럽의 끝에 위치한 힘없는 섬나라에 불과했다.


당시 잉글랜드 대중은 교황청의 과도한 간섭과 수도원의 부패에 이미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영어로 된 기도서와 성경을 직접 읽기를 원하였고, 루터파의 개인성을 중시하는 신앙에 호의적이었다. 또한 잉글랜드의 신학자들은 애초에 성경 레위기에 금지된 바와 같이 형수와의 혼인은 무효이고 교황은 이 문제를 결정할 권한이 없다고 하며 헨리 8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헨리 8세는 명분이 충분하였기에 무늬만 종교개혁이긴 하지만 과감하게 수장령(首長令)을 발표하고 교황과 작별을 한후 새장가에 골인을 할 수 있었다.


건강한 아들을 생산하는 것은 왕비가 가지는 역사적인 사명으로 평범한 아낙의 삶에 경우와는 매우 다른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건강한 왕자를 통해 적통을 이어 감으로 세습군주제 국가에서 국정을 안정화시키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할 수 있다. 헨리 8세의 평생의 소원은 건강한 아들을 얻는 것이였다. 그의 아버지 헨리 7세는 장미전쟁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튜터 왕조를 열었으나 치세기간 내내  반란과 역모가 있었다. 반란과 정통성 시비가 끓이지 않았던 근본 이유는 헨리 7세가 모계혈통을 통해 즉위하였기 때문아였다. 이것 때문에 고심하는 부왕을 지켜보며 자란 헨리 8세는 건강한 왕자에게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는것이 곧 국가와 백성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에 대한 집착이 대단히 강했던것이다.

헨리 8세는 그의 평생의 소원대로 세번째 부인을 통해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바램과 달리 아들 애드워드 6세는 어려서부터 신체허약했고 10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16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어서 왕위에 오른 장녀 메리 1세 역시 자식을 낳치 못한체로 재위 6년만에 건강이 악화되어 고생하다 죽고 말았다. 다행인것은 차녀인 엘리자베스 1세가 45년간 즉위하며 훌륭한 정치를 펼쳤다는 점이다.




에드워드 6세(재위 1547-1553)

헨리 8세의 세번째 부인인 제인 시모어 왕비가 1537년에 낳은 왕자이다. 헨리 8세의 장성한 자녀중에 셋째로 위로는 이복누나인 메리와 엘리자베스 공주가 있었다. 아버지 헨리 8세는 그토록 원했던 아들이 태어났기에 매우 기뻐하였으며 아들을 과잉보호라고 할 정도로 귀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생모인 제인 시모어는 에드워드를 출산후 산욕열로 사망하고 만다. 그래서 실제적인 양육은 헨리 8세의 여섯번째 부인인 캐서린 파의 몫이였다. 캐서린 파 왕비는 자상한 성품의 소유자로 자신이 낳지 않은 자식이지만 정성껏 보살피는 훌륭한 양모였다. 

열살때 선친이 작고하자 왕위에 올랐고 큰 외숙의 섭정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에 통치 기간 내내 외숙들과 다른 귀족 세력간의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렸다. 신학에 대한 조예와 신앙심이 깊었으며 아버지가 단행한 종교개혁을 좀더 발전시켜서 탈 로마 카톨릭화가 진행되도록 하였다. 그래서 잉글랜드 교회는 개신교적 방향의 종교개혁 노선을 걷게 되었다. 

1549년 종교 통일법을 선포하고 영문 '성공회 기도서'를 발표하여 모든 교회에 대해서 사용과 통일된 의식 행사의 준수를 명령 했는데, 이것이 바로 영국식 카톨릭인 성공회(聖公會)의 정식 선포였다. 기도서란 예배시 꼭 읽게 되는 기도문이 기록된 책인데 기존의 기도서는 라틴어로 되어 있어서 라틴어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영어로 된 기도서를 만든것이다. 아울러 예배시에 라틴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열다섯살이 되던 1552년에 발병하여 몸이 쇠약했으나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보기 위해 전국 순례를 감행하였다. 이로인해 체력이 너무 많이 소진되어 병세가 더욱 심하게 악화되면서 1553년 열여섯살이 되던해에 재위 6년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훌륭한 군왕이였던 조부와 선친을 존경하며 닮고자 하였으나 선천적으로 허약하였기에 항상 마음뿐이였고 한계를 들어낼수 밖에 없었다. 어린 왕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숙하고 냉정하며 책임감이 강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메리 1세 (재위 1553-1558)
핸리 8세의 첫번째 왕비 캐서린의 유일한 소생인 메리 공주는 양친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머니 캐서린이 에스파냐(스페인)로 부터 훌륭한 스승들을 초빙하여 수준 높은 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사춘기 시절(1533년 17세)에 생모가 강제로 이혼을 당한후에 양친간에 결혼자체가 원천무효라는 선언이 이루어지게 되어 공주의 신분이 박탈되었으며 사생아가 되고 말았다. 또한 이복 여동생인 엘리자베스가 태어나자 계모인 앤 블린은 메리를 시녀 신분으로 하여 이복 동생인 엘리자베스의 시중을 들도록하는 수모를 겪게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평생 엘리자베스를 미워하기도 했다. 헨리 8세의 여섯번째 부인인 캐서린 파의 노력으로 공주의 신분이 회복되기는 하였으나 그녀의 고단한 삶은 친부인 헨리 8세와 이복동생인 에드워드 6세의 치세기간 동안인 20년간 지속되었다. 헨리 8세 치하에서는 어미니 캐서린의 결혼무효 불인정,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는 카톨릭 신앙고수, 통일령과 성공회 기도서의 거부로 박해를 받았다. 

1553년, 메리 공주가 37세 되던해에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였는데 그의 치세하에 권력자였던 존 더들리 백작에 의해 조부(祖父)인 헨리 7세의 외증손녀, 제인 시모어가 여왕으로 옹립된다. 그러나 메리 공주는 자신이 선친인 헨리 8세의 장녀로서 적법한 왕위계승자임을 내세우며 반대세력을 결집시켰다. 이것이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으며 이에 힘입어 스스로 국왕임을 선언하고 군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수세에 몰린 존 더들리 백작은 결국 체포후 처형되었고 메리 1세는 런던에 입성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후에 본인과 생모가 겪은 불명예스러운 삶에 대한 복수를 단행한다. 우선 어머니의 종교인 로마 카톨릭 복고를 추친하였다. 부왕 헨리 8세때부터 제정된 교회법을 모두 폐지하고 교황권을 부활시키는 입법 조치를 통과시켰다. 1555년에는 이단 단속령을 복원시켜 성공회(聖公會)와 개신교도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결과 재위 5년 5개월동안 무려 300명의 프로테스탄트를 화형에 처하였다. 그래서 메리 1세는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다. 참고로, 칵테일의 일종인 '블러디 메리'는 메리 1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녀는 경제개혁과 해상무역 확장을 추진하는등 경제정책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558년 남편 펠리페 2세의 왕국인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제8차 이탈리아 전쟁(1551-1559)에 참전했으나 프랑스에 패하여 대륙에 남아있던 마지막 잉글랜드 영토이던 칼레를 잃는 실정도 있었다. 말년에는 후세를 간절히 원했으나 이를 이루지 못하자, 극심한 우울증과 건강 악화에 시달리다가 치세 5년 5개월 만인 1558년 42세에 사망하였다. 튜더 왕조의 네 번째 왕이자 잉글랜드의 첫 여왕이였다.

메리 1세는 영국의 역대 국왕들 중 가장 저평가된 군주 중 하나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메리 1세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그녀의 사후에 잉글랜드가 개신교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개신교 사가들이 남긴 역사서에 기반을 두고 평가된 결과론적인 착오라는 것이다. 현재 영국 학계에서는 메리 1세의 국왕으로서의 자질과, 그녀의 치세에 대한 전혀 새로운 평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 (재위 1558-1603)  
튜터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존경하는 역대왕중에 한명이다. 그녀는 16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의 후진국이였던 잉글랜드를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를 마련했다. 종교갈등 해소, 화폐개혁을 통한 경제안정,구빈법과 도제법 실행,인클로저 규제,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는 당대 유럽 최강의 국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것으로 국가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크게 올라갔다. 또한 이를 계기로 영국인들은 대양진출에 자신감을 갖게 만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성공회가 정착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전임자인 이복 언니 메리 1세때 있었던 잔인한 종교 탄압으로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은바가 있었다. 그래서 영국 사회에서 더이상 종교로 인한 갈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성공회를 카톨릭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일부 교리만 개신교로 바꾸는 식의 중도적 교회로 만들었다. 물론 종교갈등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온건 중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극우반동 카톨릭 교도나 급진적인 개신교도들을 모두 만족 시킬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을 고집하였다. 그런 이유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 헨리 8세가 보여준 생모와 계모에 대한 폭압적이고 권위적인 행위들로 인한 충격과 그녀에게 청혼을 하였던 시모어 제독이 정부의 허가 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을 당한것이 크게 영향을 준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평소에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을 자주하여 국민들을 기쁘게 하고 많은 인기를 얻기도 하였다. 

이렇하듯이 당대에 국민적 사랑과 후대의 존경을 받는 여왕이였으나 그녀의 어린시절과 성장기는 매우 불우하였다. 세살되던해에 생모가 불륜과 반역등의 혐의를 받아 억울하게 사형당하게 되면서 그녀의 생존 자체가 위험해졌기 때문이였다. 생모가 참수되자 사생아가 되어 공주의 칭호가 박탈되었고 왕위계승 서열에서도 제외되었다. 

어린시절 부터 국왕에 오르기 전까지는 늘 불안하고 위험하기 까지 했다. 부왕인 헨리8세 마저 그녀를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냉대했다. 또한 나이가 17살이나 많은 이복 언니 메리 공주가 항상 그녀를 감시하고 견제하였다. 메리공주의 불행한 삶이 시작된 원인 제공자가 자신의 생모인 앤블린이라는 사실을 엘리자베스도 잘 알고 있었다. 메리 1세의 재위기간 동안에는 성공회에 대한 탄압을 피해 카톨릭 신도로 위장하였으며 때로는 죄수로 몰려 런던탑에 갇히기도 하였다.

1558년, 스물다섯살이 되던해에 이복 언니 메리 1세가 사망하자 국왕에 자리에 올랐다. 이후 45년간 통치하며 업적을 많이 남겼는데 이는 후대의 빅토리아 여왕과 더불어 여왕이 치세하면 영국이 번영한다는 좋은 선례를 남긴 훌륭한 군주였다. 또한 평균수명이 45세 전후였던 당시에 70세라는 장수까지 누린 왕이였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에 빼놓을 수없는 인물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있다.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 극작가로서, 희·비극을 포함한 38편의 희곡과 여러 권의 시집 및 소네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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