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빈전투(Battle of Bouvines,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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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國史

부빈전투(Battle of Bouvines, 1214)

마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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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존왕이 잉글랜드-신성로마제국-플랑드르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침공하여 프랑스 필립 2세의 군대와 프랑스 북부 릴시(市)의 부빈(Bouvines)평야에서 1214년 7월 27일 일요일에 맞붙은 전투이다.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이 대패하며 잉글랜드의 존왕으로 하여금 귀국후 귀족들이 제시한 대헌장에 서명을 하게 만든 전투이다. 이 전투는 봉건적인 이유로 일어났으며, 중갑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주축이 된 고전적인 중세의 전투였다. 또한 이 전투는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대승을 거둔 필립 2세(1165-80-1223)는 카페왕조의 권위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왕권 신장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투후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에 맺은 휴전 협정을 통해 노르망디,앙주,브리타뉴에 대한 프랑스 왕의 주권을 분영히 함으로 헨리 2세(1154-89) 이후 이어져온 양국간의 오랜 영토분규에 종지부를 찍게되었다. 이로서 잉글랜드가 노르망디와 앙주,브리타뉴를 회복하는 것을 막았으며, 플랑드르의 독립과 독일 황제가 로타링기아 지역을 확보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즉 많은 역사가들이 평가하듯이 후대 ‘프랑스’라고 불리게 되는 지역은 이 전투를 통해서 기본적인 영토의 윤곽을 확보하였다. 이 전투를 통해 프랑스가 만들어 졌다는 평가를 할정도로 큰 의미가 있는 전투였다. 반대로 잉글랜드는 유럽대륙에 기엔(가스고뉴)을 제외한 모든 영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1199년 형 리처드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 존이 잉글랜드 국왕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존왕은 즉위후 이어진 연이은 실정(失政)으로 대륙에 있던 많은 영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를 실지왕(失地王)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1200년 5월에 프랑스 필립 2세와 르굴레 조약을 맺으며 부족한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 귀족들과 상의도 없이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지들을 서슴없이 넘겨주었다. 그리고 뤼지냥 가문의 위그 9세와 약혼상태에 있던 이사벨라와 정략결혼을 하며 다시 필립 2세의 분노를 사고 전쟁의 명분을 주게 된다. 이로인해 벌어진 전쟁에서 1203년잉글랜드가 패하며 노르망을 비롯한 많은 영지를 잃어버려 실지왕 다운 처신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국왕으로서 권위가 크게 실추되고 궁지에 몰려 있었다. 

무언가 타계책을 찾고 있던중에 플랑드르(Flandre) 영주였던 페르디낭 백작(포르투칼 왕자)으로 부터 자신의 영지를 되찾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그의 영지였던 플랑드르가 프랑스 국왕인 필립 2세의 직영지로 넘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플랑드르(영어로는 플랜다스)는 북해 연안에 위치한 저지대 지역으로 중계무역과 상공업이 발달하였고 특히 10세기경부터 모직공업이 번성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한 지역이다. 라인강과 대서양이 만나는 하류지역으로 자연발생적으로 운하와 항만시설이 발달되어 있어서 북유럽과 내륙,지중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며 전략적으로도 요충지였다. 그래서 플랑드르에 자신의 세력을 뻗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당대에 유럽의 군주는 없었다.

존왕은 필립 2세에 대한 복수를 위해 원정을 결심하며 연합군을 구성하려고 여러 귀족들과 군주들을 접촉하였는데 특히 그의 조카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오토 4세에게 합류를 권유하였다. 오토 4세는 존왕의 누나인 마틸다(헨리 2세의 딸)와 벨프 왕가의 하인리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잉글랜드 왕인 외삼촌 리처드 1세의 궁정에서 자랐으며, 황제 선출에 있어서 경쟁자인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싸울때 리처드 1세와 존왕으로부터 외교적·재정적으로 많이 도움을 받았었다. 1209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후 그의 경쟁자인 시칠리아의 왕 프리드리히를 프랑스의 필립 2세가 지원하자 연합군에 합류하였다. 잉글랜드 존왕은 오토 4세와 플랑드르 병사들로 구성된 연합군 2만 5천명을 이끌고 프랑스 필립 2세의 1만 5천명의 병력과 부빈에서 대치했다. 그리고 7월 27일 일요일 연합군이 선제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그 유명한 부빈전투가 시작되었다. 

필립 2세가 전투중에 낙마한후 보병과 함께 싸울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결과는 연합군이 대패 하였다. 존왕과 오토 4세 그리고 몇몇 귀족들만 간신히 도주했고 플랑드르 귀족들의 대부분과 약 9천명의 연합군이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몸값을 낼수 없었던 귀족들은 대부분 참수당하였다. 1214년 9월 18일 필립 2세는 존왕과 영토 구획을 결정하는 협정을 맺었다. 존왕은 필립 2세가 정복한 지역에 대해 모두 인정해야만 했으며 모후 알리에노르(1122-1204)로부터 물려받은 아키텐 일부(키엔)를 제외하고는 프랑스 왕국 내 다른 모든 영토에 대한 권리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부빈전투 이후 상황...
이 전투에서 승리하며 프랑스 육군이 유럽 최고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게 되었고 필립 2세는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위상를 드높였다. 신이 정한 휴일인 일요일에 싸움을 시작한 존 1세와 오토 4세는 명백히 당시 교회에서 강조하고 있던 ‘신의 휴전‘ 운동에 대한 도발이었다. 이들은 곧 단순한 적이 아니라 반기독교적인 악마로 묘사되었다. 두 군주의 연합군은 영원한 분열과 악을 상징하는 숫자인 ’2‘와 결부되어 머리 둘 달린 괴물로 묘사되고 프랑스군은 필리프 2세 한 명을 중심으로 프랑스인들로만 조직된 천상의 군대와 같이 묘사되었다. 하지만 필리프 2세에게 이러한 명칭을 부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도 부빈전투 전후로 전개되었던 알비주아 십자군이었다.

필립 2세는  알비주아 십자군을 일으켜 프랑스 남부지역의 이단세력을 섬멸하며 아직 자신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은 남부 프랑스 제후들과 귀족들을 복속시키는 정복 작업을 진행했다. 국왕의 직영지를 점차 넓혀갔으며 프랑스 전역에 걸쳐 필립 2세의 왕권은 감히 도전할 세력이 없을 정도로 급격히 성장했다. 결국 13세기 초에 이르러 프랑스 전 지역을 장악하고 이곳 제후와 귀족들에 대해 왕권의 압도적 우위를 확립했다. 이전 카페 왕들을 괴롭히던 지방분권적 권력파편화를 일거에 극복하고 전 왕국에 걸쳐 모든 제후들이 프랑스 왕 아래 복종할 수밖에 없는 중앙집권화된 봉건 질서를 이루어냈다.


간신히 도망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오토 4세는 이듬해 1215년에 폐위되었고 3년후 죽었다. 초라하게 귀국한 잉글랜드의 존왕을 기다리고 있는것은 연이은 실정과 전쟁 패배에 대해 불만을 품은 귀족들과의 내전이였다. 국왕군과 반란군간에 전투가 치열해지며 한해를 넘긴 1215년에 내전은 더욱 확대되었고 귀족,성직자,국민 모두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지면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된 존왕은 협상에 나설수밖에 없었다. 협상끝에 1215년 6월 19일, 템스 강변의 러니미드 목장에서 귀족들의 요구사항이 적힌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에 서명을 하게 된다. 

그러나 위기에서 벗어나자, 존은 교황 인노켄티우스에게 협박에 의해 서명할수 밖에 없었다고 호소하여 교황청으로부터 무효선언을 얻어냈다. 이에 힘을 얻은 존은 대헌장에 주동적으로 참여했던 귀족들이 있는 로체스터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면서 내전이 재발하였다. 귀족들은 잉글랜드의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프랑스의 루이 왕자(훗날 루이 8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프랑스는 즉각 반란 귀족들의 편에 서서 1216년에 잉글랜드 정복전쟁을 진행했다. 국내 문제로 시작된 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된 것이다. 루이 왕자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잉글랜드의 반란 귀족들은 연승을 거두며 그해 6월에 윈체스터까지 함락시켜 잉글랜드의 반을 통제하기에 까지 이르었다.

국왕의 자리에 오른 이후, 줄곧 프랑스와 싸움으로 세월을 보냈던 존 왕은 마지막 역시 프랑스와의 전쟁터에서 맞이하였다. 내전이 한창 진행중이던 1216년 10월 18일, 뉴워크 타운 근처에서 급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존 왕이 죽자, 잉글랜드의 귀족들이 약속을 뒤집고 루이 왕자를 배신하며 9살의 나이 어린 헨리 3세(1216-72)를 즉위 시켰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간에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고 1217년 잉글랜드의 위대한 기사 윌리엄 마샬과의 링컨 전투와 샌드위치 해전에서 루이왕자가 지면서 킹스턴에서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조약에서 잉글랜드 반란 귀족들은 루이 왕자에게 왕위를 준다는 약속을 백지화하는 대신 몰래 1만 마르크를 지불하는 것으로 프랑스군의 철수에 대한 동의를 받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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