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약탈 (455년) by 반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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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약탈 (455년) by 반달족

마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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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 요 ]
로마약탈(455년)은 반달왕국의 국왕 게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이 로마를 약탈한 사건을 말한다. 반달족이 지중해를 건너 해상으로 쳐들왔기에 로마인들이 더욱 놀랄수밖에 없었다. 야만족은 말을 타고 육상을 통해 습격한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이 깨어졌으며 해적에 의한 약탈이 내륙 깊숙한 곳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당시 서로마는 전군 총사령관 아이티우스가 암살당한후 두명의 황제가 연이어 살해 당하며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교황 레오 1세가 약탈을 막아보려고 게이세리크(생몰 389-477)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으며 약탈은 15일간 자행되었다.


[ 목 차 ]
1 배 경
  1.1 반달족의 북아프리카 집단이주
  1.2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반달족
  1.3 암살당하는 아이티우스
  1.4 아이티우스가 암살당한 이유
2 약탈
  2.1 골아픈 서로마의 상황
  2.2 연이어 살해당하는 신임황제
  2.3 본격적인 약탈
3.약탈의 원인
  3.1 역사의 교훈의 무시한 로마인
  3.2 이민족 정책의 실패
  3.3 지나친 낙관론
  3.4 세습제의 폐헤
  3.5 내분과 권력 공백
  3.6 평화조약의 파기
4.영향
  4.1 교황의 위상 상승
  4.2 서로마의 멸망
  4.3 반달리즘
5.기타
  5.1 철없는 호노리아 공주
  5.2 게이세리크
  5.3 아틸라와 담판(452년)
  5.4 게이세리크와 담판(455년)
  5.5 잔인하고 전투력이 뛰어났던 훈족
6.참고 자료



[ 배 경 ]
반달족의 북아프리카 집단이주
훈족의 침공으로 이동을 시작한 반달족은 5세기 초반에 이베리아 반도의 남부에 정착하는듯 했으나 주변의 다른 야만족들과 관계가 원만치 못했다. 이런 상황중에 서로마 제국에서 파견한 북아프리카 총독 보니파기우스로부터 군사지원을 요청받는다. 반달족의 왕 게이세리크는 429년에 8만명에 달하는 자신의 부족 전부를 이끌고 지브롤타 해협을 넘어 북아프리카로 이주한다. 보니파키우스가 군사지원의 댓가로 거주지 제공을 약속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다.
     
보니파키우스가 군사지원을 요청한 이유는 반달족의 힘을 빌려 서로마 제국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였다. 당시 보니파기우스는 정치적 최대 라이벌인 아이티우스의 농간으로 인해 서로마 황실과 오해가 빚어졌고, 황실에서 보낸 토벌군과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전투직전에 황실과의 오해가 극적으로 풀리면서 반달족에게 보냈던 군사지원 요청을 철회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북아프리카로 이주한 반달족은 지브롤터 해협에서 북아프리카를 동쪽으로 가로질러 이동하면서 파괴와 약탈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반달족
보니파키우스는 침략군으로 돌변한 반달족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연패하다가 430년에 서로마로 퇴각하고 말았다. 서로마에 불만이 많던 북아프리카 토착민족들은 반달족에게 협조적이였기에 전투은 게이세리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지브롤타 해협을 건넌지 10년만인 439년 10월 19일 드디어 반달족이 카르타고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서로마 세력을 몰아내고 반달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로인해 곡창지대였던 북아프리카를 빼앗긴 서로마는 심한 타격을 입었다.
    
반달족은 442년 로마와 평화협정을 맺어 아프리카, 비자케나, 누미디아 일부 지방의 지배자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대륙의 야만족 출신 답지 않게 카르타고를 기점으로 하여 해양강국이 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으로 반달족 함대는 지중해 서쪽의 많은 부분을 정복하고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의 일부지역을 병합하며 지중해내에 세력을 넓혀갔다. 이런 노력으로 제해권은 해적질을 일삼기 시작한 반달족들에게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했다.

암살당하는 아이티우스
금번 약탈이 발생하게된 근본원인이자 결정적인 계기는 454년에 아이티우스가 암살당한 사건이다. 그가 바로 서로마 군사력의 핵심이자 버팀목인 전군 사령관이였기 때문이다. 아이티우스가 죽자 서로마의 방위력은 완전히 붕괴 되어버렸다. 이런 여러 상황은 과거 410년에 있었던 서고트족의 로마약탈 직전 상태와 비슷하게 된것이다. 408년에 전군 사령관이였던 스틸리코(생몰365-408)가 암살당하여 제국의 방위력이 무너지자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무참하게 약탈당했던 적이 있었다.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재위 425-455)가 아이티우스를 직접 암살하였다. 물론 암살은 환관과 황제의 측근들이 모의한후 황제를 부축였다. 그들은 또한 암살에도 동참하였다. 황제가 칼로 아이티우스를 찌르자 이를 신호로 삼아 환관과 측근들이 단검을 빼어들어 함께 아이티우스(생몰 396-454)를 찔렀다. 아이티우스는 라벤나 궁정에서 황제를 알현하여 재무보고를 행하던차라 갑옷도 입지않았으며 비무장상태에서 기습을 당하였다. 
    
당시 실권은 아이티우스가 쥐고 있었고 그 누구도 함부로 그에게 대적할 생각조차 못할정도로 권세가 당당했었다. 아이티우스의 측근들이 정치와 군사 방면에 넓게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평소 황제의 성품으로 보아 기습암살등을 할 위인은 못된다고 판단하여 방심했던것으로 보인다. 408년에 스틸리코가 일방적으로 숙청되어 처형당했던 전례를 알고 있었을것인데 경솔했던것이 화를 부른것 같다. 


아이티우스가 암살당한 이유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직접 암살에 가담한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평소에 황제의 권위에 대해 은근히 도전하는듯한 아이티우스의 처세가 이어지자 황제가 이에 대해 감정이 곱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황제를 위시한 황실과 아이티우는 매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티우스는 유능한 장수이자 정치인으로 실권을 쥐고 있었다. 권신(權臣)의 출현은 역모의 근본원인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주는 이를 심하게 경계하는 바인데 아이티우스는 가끔 황제를 무시하듯 들어내놓고 도전적인 언행을 보여왔었다. 너무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를 경계한 측근과 환관들이 강한 견제도 있었다.
    
암살당하던 당일도 아이티우스는 군신(君臣)의 관계를 넘어서 황제와 거의 대등한 동맹자 차원에서 자신의 아들과 황제의 딸에 대한 혼인을 신속히 추진하자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아이티우스가 가진 명성과 능력은 역심을 품고도 남을 정도였다. 혼인을 서두르는 이유는 혼인후 아이티우스의 아들을 제위에 올리려는 것일수도 있어 매우 위협적이기도 했다. 그의 권력은 황제조차 두려움을 느낄정도로 이미 신하의 반열에서 한단계 올라서 있었으므로 아이티우스의 무례한 언사는 기회만 엿보던 황제를 격분시키기 충분했다.
   
두번째 이유는 훈족의 왕 아틸라가 453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한것이다. 아틸라는 '신의 채찍' 이라 불리울 정도로 유럽대륙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인물이다. 아틸라는 천재적인 군주로 뛰어난 훈족군사를 이끌며 동서로마와 모든 게르만 민족들이 상대하기 싫어서 피할정도로 전하무적에 가까웠다. 그런 아틸라가 453년에 복상사(腹上死) 한후 훈족들은 내분에 휩싸여 세력이 급격히 쇠퇴해버렸다. 아틸라와 훈족이라는 앓던이가 빠져나갔는데 눈에 가시같은 아이티우스 정도는 없어도 된다는 판단을 내린것이다.


     
세번째 이유는, 아이티우스가 과거 423년에 호노리우스 황제(395-423) 사후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제등극을 반대했었던 구원(久怨)이 있었다. 당시 아이티우스는 참칭자 요한네스 옹립에 앞장섰었다. 아이티우스는 훈족병사 6만명을 빌려와서 4살이였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대적을 하였던 전력이 있다. 이런 소동으로 인해 황제는 423년에 즉위하지 못하고 2년후인 425년이 되어서야 황제에 자리에 오를수 있었다. 또한 이에 대해 사죄하고 용서를 빌지 않았으며 훈족병사들을 내세워 갈리아 지역의 군사령관직을 요구하였고 황실에서는 어쩔수 없이 수락했었다.
    
네번째 이유는, 452년에 아틸라가 훈족을 이끌고 북이탈리아를 유린하며 로마로 진격했지만 아이티우스는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갈리아에 주둔할뿐 군대를 파병치 않았었다. 침공의 명분은 서로마 제국의 호노리아 공주가 자신에게 청혼하자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청혼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서로마 황실에서는 당연히 혼인을 거부하였고, 아틸라는 이를 무력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황궁이 있는 라벤나와 로마는 함락당할 위급한 상황이였었다. 물론 교황 레오 1세등이 나서서 협상을 통해 아틸라와 훈족의 퇴각을 유도하여 잘 해결되었다 하지만 황제로서는 서고트족등 아먄족으로 구성된 갈리아 군대가 원정을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출병하지 않은점은 용서하기 힘든 일이였다. 

아이티우스는 항상 훈족등 야만족과 내통하여 역심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받곤했다. 그런 이유는 그가 10대시절 서고트족과 훈족진영에서 볼모로 장기간 생활했던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티우스는 야만족의 언어에 능통했고 그들의 문화에 대해 이해도 역시 높았다. 아틸라 하고는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고 귀국후에도 가급 연락을 주고 받기도 했었다. 결정적으로 의심을 사게 된것은 451년에 있었던 샹파뉴 회전(會戰)에서 로마군이 대승하며 궁지에 몰려 숨어있는 아틸라를 죽이지 않은 일 때문이다. 훈족은 대패하여 후퇴중에 포위된체 숨어있었기에 마음만 먹었다면 아틸라의 숨통를 끓어놓을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티우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차원에서 아틸라는 살려보냈었다.

이밖에도 아이티우스는 황실과 가까웠던 보니파키우스를 축출하여 사망케 하였다. 아이티우스나 보니파키우스는 모두 유능한 장수였으나 상호 정치적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며 사이가 좋치 못했다. 그러던 차에 432년에 두 장수간에 무력충돌이 빚어졌다. 같은 서로마 군대가 격돌한 결과 아이티우스가 승리하고 보니타키우스는 죽고 말았다. 황실에서는 보니파키우스를 은근히 지원했다. 수년전 모후 풀라키디아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동로마로 망명길에 오르던 시절부터 보니파키우스는 모후와 황태자를 지지원조하였기 때문이다.

서로마의 곡창지대였던 북아프리카를 반달족에게 빼앗긴것도 그 근본원인은 아이티우스가 제공한것이라 할수 있다. 그가 황실과 북아프리카 총독 보니파키우스 사이를 이간질 시켜서 서로 전투가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전세가 불리했던 보니파키우스가 반달족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던것이며 이것이 반달족이 북아프리카 진출을 유도했던것이다. 아이티우스는 이래저래 황실에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 약 탈 ]
골아픈 서로마의 상황
아이티우스는 100군데가 넘는 자상(刺傷)을 입고 황제의 면전에서 즉사하였다. 특별한 대책없이 아이티우스를 죽인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원로원 의원인 페트로니우스의 부인을 강간하는 파렴치한 일도 저지르고 만다. 분개한 페트로니우스는 복수를 위해 아이티우스의 부하였던 훈족 옵틸라(Optila)와 트라우스틸라(Thraustila) 에게 황제 암살을 사주하였다. 455년 3월 16일에 두 사람은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마르스 벌판에서 벌어진 군사 경기를 보고 즐기고 있을때 암살하였다. 황제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아이티우스의 옛 부하들이었기 때문에 황제를 도우러 나서지 않았다.

연이어 살해당하는 신임황제
황제 발렌티니나누스 3세의 암살을 사주했던 페트로니우스가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 황제에 즉위하지만 무능함에 극치를 보여주고 말았다. 반달족의 침공소식이 전해지자 원로원 의원들에게 도망치라고 한후에 자신도 도망을 치다가 백성들이 던진 돌 세례를 맞고 죽고 말았다. 황제 페트로니우스는 죽기전까지 약 3개월 가량 재위에 있었는데 무능하였을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치졸한 행동을 일삼았다. 
    
정통성 보강 차원에서 전임 황제의 미망인과 강제로 혼인을 하였는데 황후를 복수차원에서 폭행 하였다. 그러자 증오심에 불탄 황후 에우독시아는 반달족 게이세리크에게 남몰래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한것은 지난 450년에 시누이였던 호노리아 공주가 훈족 아틸라에게 청혼하며 탈출구를 찾고자 했던 선례를 따라 취한 방법이였다.

본격적인 약탈
반달족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고위관리부터 시민에 이르기 까지 대부분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바빴다. 오스티항(港)에 도착후 테베레 강을 거슬러올라 반달족이 로마성벽앞에 도달하자 교황 레오 1세가 담대하게 나섰다. 교황은 로마약탈을 막아보려고 게이세리크와 담판을 시도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비록 교황 레오 1세(재위 440-461)가 약탈을 막지는 못했으나 담판을 통해 세가지 정도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졌다.  
    
1.교회와 그 관련 시설은 약탈 대상에서 제외한다.
2.저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
3.방화하지 않는다.

약속한 사항이 그다지 성실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으나 약탈이 진행되는 동안 강간,살인,방화등은 적게 발생하여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일수 있었다. 약탈치고는 비교적 차분한 가운데 일부 시민들의 협조하에 6월 15일 부터 보름동안 이어졌다. 반달족들은 테베레 강변에 배를 대어놓고 체계적으로 차곡차곡 약탈물을 실어갔다. 게이세리크는 급할것이 없었다. 교황과 합의가 이루어진 약탈이기 때문이였다.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는 물건은 무엇이든 뜯어내서 배에 실었다. 금은보화, 각종 장식품, 청동상과 구리에 조각을 새긴 다리 난간과 문짝도 떼어서 가져갔다. 카피톨리아 언덕위에 유피테르 신전의 지붕은 금을 입힌 구리 기와였는데 이것마저 모조리 벗겨내어 배에 실었다. 15일간 로마는 벌거숭이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약탈치고는 파괴,방화,살인이 적게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황후 에우독시아는 그녀의 딸들 그리고 몸값을 받아낼수 있을것 같은 사람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 북아프리카로 끌려갔다. 반달족이 이번 약탈로 제법 짭짤한 수입을 올릴수 있었던 것은 410년에 있었던 로마 약탈 이후 45년이라는 세월속에 많은 부분이 옛 로마의 상황에 버금가게 복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관례상 약 사흘정도의 약탈 기간을 훌쩍 넘어선 보름간에 약탈이 종료된후 반달족들은 오스티아 항에서 배를 끌고 유유히 카르타고로 귀항을 하였다.




[ 약탈의 원인 ]
역사의 교훈을 무시한 로마인
BC 390년에 발생한 약탈로 도시 로마는 폐허로 변했다. 설상가상으로 라틴동맹에서 탈퇴한 주변국들의 추가 침략도 있었다. 재건사업은 힘겹게 진행되었지만 철저한 반성과 원인분석을 통하여 제 살을 도려내는 개혁적 수준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것은 '팍스 로마나'였다. 45년전인 AD 410년 로마약탈이후 재건사업은 BC 390년과는 사뭇 달랐다. 방화와 파괴된 건물을 다시 세우고 마비된 도시기능을 되살리고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보강공사도 진행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자기반성과 개혁을 없었다. 
      
BC 390년의 재건사업은 이후 800년간 도시 로마를 외침으로 부터 지켜주었음으로 로마인들은 BC 390년을 제2의 로마 건국으로 본다. 그러나 AD 410년의 재건 사업의 결과는 45년만에 금번 반달족에 의한 약탈로 이어졌다.(455년) 세르비우스 성벽보다도 더 튼튼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약탈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서 로마인들은 애써 왜면 하였다. 476년에 이르러서는 서로마 제국이 드디어 폭망하고 말았다.

이민족 정책의 실패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은 거스를수 없는 운명이자 이민족과의 공존공생은 시대적 소명이였다. 이민족 대이동은 생계형을 넘어서 생사를 건 대량 이주이고 대세였다. 그들은 잔인한 훈족의 침략으로 생명의 위험을 느끼며 어쩔수 없이 국경을 넘어왔다. 이들에 대한 합리적인 정책은 부재했고 야만족이라 하며 차별과 멸시 그리고 실무 관리들의 부패가 이민족들의 분노로 이어졌다. 기원전 8세기 건국초기 왕정시대나 공화정 시기에 로마인들이 보여주었던 개방성과 문화적 포용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이미 폐쇄적으로 변하여 있었다.

지나친 낙관론
카톨릭이 국교화 되면서 긍정적인 영향도 있었지만 다양성 존중의 문화가 사리지고 획일적인 사상에 주입등 여러 문제점들이 들어났다.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의 본산인 도시 로마를 신께서 지켜주시겠지 하는 안일함에 사로 잡혀 있었다. 410년에 로마를 약탈한 알라리크가 그 해에 사망했으며 452년에 북이탈리아를 유린하며 남침한 아틸라도 다음해인 453년에 급사하였다. 이를 신의 심판과 저주가 임했다고 해석한것으로 보인다. 성도 로마를 약탈하면 신의 저주를 받는다는 논리가 신은 우리편이며 우리를 항상 지켜주신다는 황당함과 지나친 낙관론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두번씩이나 신의 진노가 임하는 행위를 되풀이할 만큼 간이 배 밖으로 나온자들은 없을것으로 본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도울뿐이다.

세습제의 폐해
약탈이 발생한 원인은 통치자와 지배계층의 무능함이다. 이로인해 간신이 득세하고 내분이 벌어지며 로마는 스스로 이민족의 침공과 약탈을 초래했다. 황제위에 대한 세습제의 폐해가 이번에도 극렬하게 들어난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무능한 통치자로 인하여 벌어진 약탈인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많은 시민들에게 돌아간것이다. 거대한 제국을 4분할하여 정제와 부제를 통한 사두정치(四頭政治)는 그 의도와 달리 권력투쟁을 불러왔다. 이런 폐해를 바로 잡고자 황제 콘스탄티니우스 1세가 세습제를 도입했으나 이 역시 문제가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습으로 인해 무능한 통치자가 출현하였고 그가 가진 권력은 막강하나 책임을 물을수는 없는 제도의 부작용이 큰 사단을 벌인것이다.

내분과 권력 공백
아이티우스가 암살당하며 서로마의 국방력이 무너졌다. 408년에 호노리우스 황제가 스틸리코를 처형한것이 410년에 서고트족의 로마약탈을 초래했듯이 454년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가 아이티우스를 암살한 것이 455년에 반달족의 로마 약탈을 초래한것이다. 또한 연이어 3개월 간격으로 황제가 암살당하며 서로마는 권력공백으로 무정부상태에 빠졌다. 위기관리나 지휘계통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다. 공권력이 부재하다 할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였고 반달족의 침입에 대항할만한 군인조차 없었다. 덕분(?)에 반달족들은 저항없이 로마시내로 진입할수 있었다.

평화조약의 파기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암살당하자 게이세리크는 서로마와 맺은 평화조약이 자동파기 되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침공했다. 424년에 조약을 채결하면서 게이세리크의 아들과 서로마 황제의 딸이 약혼을 하였다. 그런데 황제 사망과 동시에 약혼이 무산 되면서 자신의 아들이 서로마 황제가 될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것이다. 황후 에우독시아의 구원요청은 게이세리크의 약탈결정에 큰 영향은 못 미쳤던 같다. 명분으로 삼을만은 하지만 이미 게이세리크는 서로마의 정치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반달족 출신 해적들과 로마와 거래하는 상인들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영 향 ]
교황의 위상 상승
교황 레오 1세는 452년 훈족이 로마 침공하자 아틸라(생몰 406-453)와 담판을 지어 로마가 약탈당하는것을 막아낸적이 있다. 또한 이번에도 약탈 자체는 막아내지 못했으나 게이세리크와 협상을 통해 약탈피해를 줄이고 로마시민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이로서 로마 교구의 대주교가 아니라 로마의 보호자이자 이탈리아의 구원자인 교황으로서 위상도 크게 부각되었다. 이로인해 다른 교구의 대주교보다 우위권과 중세 유럽에서 교회의 지도권을 확립하는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로마 시민들은 교황 레오 1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게 되었으며 후대에 들어 그에게 ‘위대한 교황’ 혹은 ‘대 교황’이라는 별호를 부여했다.

서로마의 멸망
반달족이 서로마의 곡창지대였던 북아프리카를 점령하자 서로마는 밀과 곡물등 농산물 수급에 어려움이 발생하며 크게 혼란을 겪게 된다. 이런상황에서 발생한 약탈은 쇠망해가는 서로마에 쐐기를 박아 버린 꼴이 되었다. 숨이 막혀 켁켁거리고 비실비실하며 간신히 걸어가는 서로마를 발길로 걷어차서 쓰러트린 격이다. 남은일은 숨통이 끓어지는것 뿐이였다. 반달족이 퇴각한후 서로마는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으며 약탈발생후 21년만인 476년에 드디어 멸망하고 말았다.

반달리즘
반달족은 429년부터 10년간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후 해적으로 변신하였다. 이후 534년에 동로마 제국에 의해 반달왕국이 멸망할때 까지 지중해 일대에서 약탈을 일삼으면서 로마 문명을 무자비하게 파괴하였다. 그래서 인류가 창조한 문명을 무모하게 파괴하는 행동에 대한 규정어로 ‘반달리즘’ 이란 말이 나왔다.



[ 기 타 ]
철없는 호노리아 공주
호노리아 공주는 남동생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모후 갈라 플라키디아에 의해 독신을 강요받으며 힘들게 성장하였다. 황제와 모후의 생각은 불필요하게 권력이 분산되는것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함이였다. 그러나 434년, 16세가 된 호노리아 공주가 에우게니우스라는 시종관과 사랑에 빠진후 임신하는 일이 발생한다. 에우게니우스는 사형에 처해졌고 공주는 콘스탄티노폴로 추방당했다. 당시 동로마(비잔틴) 황녀들이 기거하는 황궁의 분위기는 수녀원과 비슷하였는데 이곳에서 공주는 엄중한 감시속에 수녀와 같은 생활을 10 여년 넘게 하게 된다.

450년, 호노리아 공주가 훈족 아틸라에게 밀사를 보내 청혼을 한다. 콘스탄티노폴에 지내며 훈족의 왕 아틸라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답답해진 자신의 인생에 탈출구로 삼으려 했던것이다. 측근인 환관을 통해 자신의 반지와 함께 서신을 전달하였다. 지참금으로 서로마의 절반을 가져가겠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동로마와 서로마는 경악했고 즉각적으로 호노리아 공주는 서로마로 소환되었다. 공주는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할수도 있었으나 모후 갈라 플라키디아의 간절한 요청으로 감옥에 유폐시키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아틸라는 혼인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452년에 서로마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또한 에우독시아 역시 시누이의 선례를 참고하여 반달족 게이세리크에게 구원요청을 하게 이르렀다.

게이세리크 
게이세리크(389-477)는 반달족의 왕으로 서로마 제국 말기에 내전이 벌어진 틈을 이용하여 북아프리카를 차지하였다. 이어 동로마 제국과의 전투에도 승리하고, 서로마 제국으로부터 442년에 반달 왕국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게이세리크는 북아프리카의 옛 카르타고계 로마인들을 선원으로 부리며 대규모 함대를 조직,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점령했다. 455년에 로마 약탈로 생포, 압송한 황후 에우독시아를 첩으로 삼고 그녀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혼인시켰다. 로마 약탈후에도 동서로마 제국과 싸워서 승리하며 자신의 왕국을 잘 지킨 그는 88세까지 장수하였다. 낙마사고로 한쪽다리를 저는 절름발이가 되었으나 영민하고 유능한 야만족의 왕이였다고 전해진다. 

아틸라와 담판(452年)
교황 레오 1세와 아틸라 간에 있었던 협상 내용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퇴각의 조건으로 상한한 수준의 뇌물이 제공되었다고 보여진다. 아틸라 역시 적당한 선에서 타협에 응하는게 필요했다. 갈리아(현 프랑스)에 있는 아이티우스가 남하해오면 성벽과 로마군 사이에 훈족이 고립될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급선과 퇴각로가 끓어지면 난처하게 된다. 아우렐리아우스 성벽의 규모로 보아 공성전은 장기전이 될 공산이 큰데 훈족은 이미 한해전인 451년에 샹파뉴 회전에서 대패하며 전력손실이 컸었다. 아울러 금번 남진중에 아퀼레이아에서의 공성전으로 많이 지쳐있었다. 아틸라의 퇴각 결정에 결정적인 이유중 하나가 아마도 410년에 알라리크가 로마를 약탈한후 급사한 것이 신의 저주가 임했기 때문이라는 교황 레오 1세의 구라가 찜찜 했던것 같다.

아틸라와의 협상에서 교황 레오 1세의 활약은 후대 기독교 역사가들에 의해 부풀려졌다는 설이 있다.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지는데, 이는 로마 카톨릭이 교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들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학자중에 한명은 호르스트 푸어만(1926-2011)이다. 그는 교회법과 교황사에 대한 전문가로 그의 저서 '교황의 역사'를 통해 레오 1세와 아틸라의 퇴각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레오 1세는 황제의 고위 관리가 이끄는 사절단의 일원에 불과했으며, 훈족은 레오 1세의 인품 때문이 아니라 로마군대가 그들의 배후에 있는 헝가리의 본거지를 공격했기 때문에 철수 했다" 

게이세리크와 담판(455年)
이미 언급한 3가지 사항에 합의를 했을뿐 약탈 그자체는 막지 못했다. 아마도 양자간에 상당한 설전이 오고 갔을지도 모른다. 410년 알라리크의 죽음과 453년에 아틸라의 죽음이 신의 심판과 저주의 결과라는 교황의 생구라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게이세리크는 410년 약탈은 스틸리코가 숙청되며 서로마와의 평화조약이 일방적으로 깨어지면서 벌어진 정당한 전쟁이라고 했을것 같다. 알라리크의 죽음은 돌연사일뿐 신의 저주가 임했다는 것은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게 게이세리크의 반박이였을 것이다. 453년에 아틸라가 죽은 것은 과로와 과음이 겹친것일 뿐이다. 또한 북이탈리아 침공은 호노리아 공주의 약혼자로서 정당한 행위였다. 

452년 아틸라의 경우와 달리 455년에 게이세리크는 특볋한 저항없이 지중해를 건너왔다. 그리고 아이티우스와 두명의 황제가 연이어 암살당하여 권력 공백기에 있고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서로마의 상황를 꿰뚫고 있었다. 약점을 간파하고 있였고 부유한 도시를 약탈하는것은 야만족들의 로망인데 그것을 생구라 몇마디 때문에 멈출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후에 게이세리크는 천국에 가지 못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약탈후 승승장구 했고 88세까지 장수했다. 그의 반달왕국은 향후 80년간 건재했고 먼저 망한것은 서로마 제국이였다.

잔인하고 전투력이 뛰어났던 훈족
트루크계 유목기마 민족으로 전투력이 우수하여 로마와 고대유럽 민족들을 압도하였다. 농경이나 유목보다는 약탈을 일삼으며 살인을 즐기는듯 하여 잔인하다는 평가가 있다.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고 참수로 일관했다. 승전후 패잔병과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마을이나 도시를 파괴하고 방화하여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노동집약적 산업인 농사를 위해서 노예가 많을수록 유리했던것은 정착하여 사는 농경민족에 해당하는 말이다. 유목민족은 노예가 그리 많이 필요치 않아 입을 줄이는게 필요했다. 도시를 파괴하고 불살라서 목초지를 만듬으로 인해 말이나 가축에게 먹일 풀을 길러야 했기 때문에 승전후 도시파괴와 방화는 당연했다. 

훈족 전투력의 핵심은 활과 뛰어난 기마술에 있었다. 화살이 유럽인들보다 2배나 멀리 날아갔으며 이는 화살대에 아교를 이용해 인대를 감아 부러지지 않고 강한 탄성을 가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동성이 뛰어나고 기마술이 탁월했는데 이는 어려서부터 말을 타고 생활하며 말을 잘 다루었으며 말안장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왠만하면 전투중에 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2-30 여미터를 이동할때도 말을 탈정도로 말에 의존도가 높았다. 안장은 말에 밀착,고정되었고 발을 걸칠수 있는 고리가 있어 말과 사람이 하나가 된듯 말을 탔다. 기수가 앉는 부분도 앞뒤로 움직이지 않게 만들어주는 장치가 있었다.



[ 출 처 ]
로마제국 쇠망사 5권.................294 페이지(대광서림)
로마제국 쇠망사 6권..................53 페이지(대광서림)
로마인 이야기 15권..................306 페이지(한길사)
해적의 세계사..........................51 페이지(AK triva book)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도서출판 마티
바바리안의 유럽침략.................우물이 있는 집(김성균譯)

팟캐스트'전문세'..........로마제국의 멸망
유투브 동영상..............바바리안, 훈족의 아틸라, 서로마의 몰락外
역사카페 '부흥'............바바리안 열전
두산백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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