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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르 말레비치 (Kasimir Malevich, 1878~1935, 러시아) -절대주의

작성일 작성자 Doldosa 김교수

 

 

 

카지미르 말레비치 (Kasimir Malevich, 1878~1935, 러시아)

 

절대주의

 

   

 

 

카지미르 세베리노비치 말레비치(러시아어: Казимир Северинович Малевич,

1878년 2월 23일 ~ 1935년 5월 15일)는 러시아의 화가이다.

 

키예프에서 출생하였고, 초기의 수업은 인상파 및 포비슴에서 출발하였으나

1912년 파리로 나와 퀴비슴을 접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913년 백지(白紙)에 검은 정방형만 그린 작품을 발표하여 화제를 일으켰고,

이 작품을 계기로 하여 감각의 궁극을 탐구하는 쉬프레마티슴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1915년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의 협력으로 '쉬프레마티슴 선언'을 발표하여,

러시아 전위미술의 기수로서 활약하였다.

 

1919년에는 모스크바 미술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1921년에는 레닌그라드 미술학교의 초청을 받았다.

 

1926년 그는 단기간 독일에 머물렀는데 귀국 후에 문화정책을 변경한 당국에 의하여 공직서 추방당하였고,

그 이후는 오직 실용미술(제도·직물·벽지)의 분야에만 종사하다가 1935년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하였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 자화상(1908 또는 1910-1911) / 종이에 과슈물감 / 27×26.8cm

카지미르 말레비치 / 자화상(1908 또는 1910-1911) / 종이에 과슈물감 / 27×26.8cm

 

러시아 순수 추상화가이자 추상미술 이론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추상화를 그린 화가 중 한 사람이다.

도형이나 선만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기하학적 추상의 선구자로 절대주의를 창시했다.

 

그는 예술이 주관성, 재현성, 가시성을 초월하여 절대적인 진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순수한 색과 형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었다.

 

추상 예술의 창작과 감상에 관한 논문과 책도 다수 발표하여 현대 추상예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에서 열네 명의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열두 살까지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배운 바가 없었지만 벽이나 난로 등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1904년 아버지 사망 후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모스크바 미술학교에서 회화, 조각, 건축을 공부했다.

이 당시 그는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상징주의와 아르 누보의 영향이 드러나는 그림을 그렸다.

 

1907년 바실리 칸딘스키의 예술 이론을 접하면서 그림 스타일이 변하기 시작한다.

1910년 훗날 광선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 화가 부부 라리오노프와 곤차로바를 만나 원시주의, 입체파, 미래파의 작품과 그들의 예술 철학을 공부했다.

 

1913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아리스타크 렌투로프의 전시회를 통해 입체파의 이론과 원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작품에 적용했다.

오페라 〈태양에 대한 승리〉에서 무대와 의상 디자인을 맡아 기하학적 형태와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15년 ‘입체파에서 절대주의로’라는 선언을 발표하고 구상적인 요소를 제거한 순수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말레비치가 추구한 절대주의를 처음으로 구현한 〈검은 사각형〉을 선보였다.

 

 하얀색 바탕 가운데에 검은 사각형이 있는 그림으로 예술은 재현이나 모방이 아니라 진정한 창조라는 것을 최초로 알린 역사적인 작품이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말레비치는 인민 계몽 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여 학생들에게 순수 추상 미술의 이념을 가르쳤다.

 

1919년 《예술의 새로운 시스템》이라는 책을 발표하여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아방가르드 미술의 방향에 대해 설파했다.

 

같은 해 마르크 샤갈의 초청으로 러시아 서쪽에 위치한 비테브스크 학교로 가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마르크 샤갈이 파리로 떠난 후에는 학교를 이끌었다.

 

 학생들을 모아 아방가르드 예술 단체를 조직하였으나 사회주의 정권 아래에서 순수 예술을 이어 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선전 포스터, 도자기, 표지판, 도로 장식 등의 작업을 맡았다.

 

1924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그의 철학은 반혁명주의 정신을 불어넣는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리고 절대주의를 버리고 사회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리얼리즘 작품을 만들라고 강요당했다.

 

1926년 공직에서 쫓겨나자 이듬해 절대주의 작품을 가지고 독일과 네덜란드, 폴란드 등 서유럽을 순회하며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순수 추상예술은 당시 서유럽 아방가르드 예술계에 큰 화제를 모았다.

 

1930년 키예프에서 연 회고전이 당국에 의해 곧바로 폐쇄되는 등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다.

1932년 소비에트 혁명 15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은 ‘반동’ 혹은 ‘반체제’라는 딱지가 붙은 채로 전시되는 수모를 겪었다.

당국의 철저한 통제 때문에 말년에 그는 풍경화나 초상화처럼 평범하고 전통적인 그림을 그렸다.

 

1933년 암 진단을 받고 2년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직접 디자인한 관에 안장되었는데, 뚜껑은 그의 작품처럼 검은 사각형으로 장식되어 있다.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그의 작품 대부분은 소비에트 미술관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고,

1988년 러시아에 개혁개방 바람이 불면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서구권에 소개된 그의 작품이 많지 않았지만 몇몇 작품과 이론만으로도 예술을 철학적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기하학적 추상과 미니멀리즘의 길을 제시한 그는 후대 추상미술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출처: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C%A7%80%EB%AF%B8%EB%A5%B4_%EB%A7%90%EB%A0%88%EB%B9%84%EC%B9%98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19XX34100136

 

 

 

출생-사망 1878년 2월 23일러시아 키예프 ~ 1935년 5월 15일 러시아 레닌그라드

 

 

 

예술양식

 

절대주의 화가, 미술을 환영으로 보는 개념에 대해 반대함,

하나의 기하학적 형태에 하나의 색만을 사용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구상 미술을 부정함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미래주의와 입체주의를 포함하여 다수의 유럽 미술 운동들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으나,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의 독특한 양식으로 유럽 추상미술의 발전에 있어 중대한 공헌을 했다. 1915년에 말레비치는 순수한 단색의 배경 위에 원이나 사각형, 또는 십자형 등의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만을 남겨두고, 이를 제외한 인식 가능한 형상의 흔적들을 모두 제거했다. 이로써 말레비치는 그가 '쓰레기가 가득 찬 연못'이라고 여겼던 아카데미 미술로부터 해방된 형태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또한 1915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말레비치와 다섯 명의 미술가들에 의해 시작된 최초의 순수한 기하추상회화 운동인 절대주의는 '순수한 회화 미술'로 간주되었다. 말레비치는 도상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 시기에 그는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인 <검은 사각형>(1930경)을 기구를 쓰지 않고 손수 칠하는 기법으로 제작했다. 흰 바탕 위에 검은 사각형 하나만을 그린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의 절대주의 작품으로, 마치 러시아 정교회의 가정에 걸리는 종교적인 성상처럼, 전시장 한쪽 구석에 높이 전시되었다. 말레비치는 환영으로서의 미술의 개념을 경멸했다. 그의 작품은 궁극적으로 구상 미술을 부정했으며, 하나의 기하학적인 형태에 단 하나의 색만을 사용하는 혁신을 꾀했다.

 

 

혁명적인 미술 작품 <절대주의 구성: 흰색 위의 흰색>

 

혁명적인 미술 작품 <절대주의 구성: 흰색 위의 흰색>

 

 

 

소비에트 연방의 국경을 지키러 가는 병사들을 그린 <말달리는 붉은 기병대>

 

소비에트 연방의 국경을 지키러 가는 병사들을 그린 <말달리는 붉은 기병대>

 

 

말레비치는 교육자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했는데, 처음에는 모스크바 국립응용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고, 이후 마르크 샤갈의 초청을 받아 비테프스크의 공립미술학교에서 가르쳤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예술문화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동안에, 말레비치는 건축에 관심을 가졌고 언젠가는 건축가로서의 꿈을 실현하기를 희망했다. 1927년에 그는 회화로 복귀했으나, 러시아의 사회주의적 배경 하에 탄생한 사실주의 양식의 고정된 관념들을 극복할 수 없었다. 절대주의의 이름 아래 제작했던 작품들이 오늘날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 있다.

 

말레비치 방식

말레비치는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선구자였고, 그의 작품은 미니멀리즘의 효시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후대 미술가들은 구상 미술을 벗어난 말레비치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 바넷 뉴먼, 이브 클랭, 애드 라인하르트의 단색 그림들과 엘 리시츠키의 추상화들에서 말레비치의 영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 <절대주의 구성 : 흰색 위의 흰색>(1918)의 제작으로, 아마도 말레비치는 캔버스 전체를 흰색으로 칠한 최초의 화가일 것이다. 이후 수많은 화가들이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지미르 말레비치 [KASIMIR MALEVICH]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마로니에북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작품 세계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선구자.

그의 작품은 미니멀리즘의 효시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가 함께한 최초의 순수한 기하추상회화 운동인 절대주의는 '순수한 회화 미술'로 간주되었다.

후대 미술가들은 구상 미술을 벗어난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말레비치는 처음에는 후기인상주의적 양식에 심취했지만 차츰 상징주의를 포함한 입체주의와 러시아 민속 미술 등 다양한 미술로 눈을 돌렸다.

 

1910년에 라리오노프(Mikhail Larionov)와 곤차로바(Natalia Goncharova)를 만난 그는 광선주의에 강한 영향을 받아 그들의 ‘당나귀 꼬리’전에 참가했다.

 

그는 야수파, 미래파,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던 미술단체에 가입했고,

 점차 극단적인 추상형식으로 나아갔다.

 

1912년 파리 여행 후 발표한 작품에는 인물의 형상을 원통 모양의 형태로 그려 페르낭 레제(Fernand Lèger)의 작품을 떠올리게 했다.

 

1913년 말레비치는 아방가르드 오페라 《태양에 대한 승리》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맡았다.

 

그는 여기에서 미래주의를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형태의 화려한 무대와 의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디자인 경험이 회화작품에도 영향을 주어 그림의 구조가 더욱 대담한 단순성을 띠게 되었다.

 

그는 불필요한 세부묘사 없이 캔버스를 깔끔하게 사각형, 원, 직사각형의 기본적인 형태로만 구성한 그림을 시도했고, 이따금 색채도 단색조로 제한했다.

그럼으로써 작품에서 구상적 재현의 흔적을 모두 제거하고 그 대신 미지의 영역이었던 순수추상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1915년 미술에서 추상의 우월성을 힘주어 단언한 말레비치는 39점으로 구성된 비구상작품들을 ‘러시아의 마지막 입체미래주의 전시 0.10’전에 선보였다.

 

《검은 사각형》(1915)은 이 작품들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작품으로, 전시실의 동편에 이콘화처럼 걸려 마치 러시아 정교회의 가정에 걸리는 종교적인 성상을 연상시켰다.

단순한 하얀색 바탕에 검은 사각형 하나가 있을 뿐인 이 작품은 이렇게 근대의 새로운 미술사조인 절대주의의 탄생을 알렸다.

 말레비치는 이후 ‘무’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켜 1919년에는 색을 완전히 제외시킨 《흰 바탕 위의 흰 정사각형》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절대주의의 논리적 종결점이고, 말레비치의 철학적 종결점이었다.

 

 

1920년부터 말레비치는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썼다.

처음에는 모스크바 국립응용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고,

 이후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의 초청을 받아 벨라루스의 비테프스크의 공립미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리고 레닌그라드 미술학교, 키예프 미술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예술문화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동안에 말레비치는 건축에 관심을 가졌고,

언젠가는 건축가로서의 꿈을 실현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스탈린 정권이 부상하면서 말레비치의 심원한 견해는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억압당했다.

 1930년에 말레비치 회고전이 키예프에서 열렸으나, 전시는 바로 폐쇄되었다.

 

 말레비치는 당국에 체포되어 그가 관계한 새로운 미술형식의 이데올로기를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는 두 달 뒤에 풀려났지만, 지속적으로 예술적인 자유는 위협받았다. 어쩔 수 없이 추상을 단념하고 구상회화로 복귀했지만 이 시기의 작품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공식적인 경향과의 힘겨운 투쟁을 보여준다.

 

말레비치는 1933년에 암 진단을 받았고, 1935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이 쓸 관을 디자인했는데 관 뚜껑을 검은 사각형과 원으로 장식했다.

 

말레비치는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선구자였고, 그의 작품은 미니멀리즘의 효시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후대 미술가들은 구상 미술을 벗어난 말레비치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바넷 뉴먼(Barnett Newman), 마르크 로스코(Mark Rothko), 애드 라인하트(Ad Reinhardt)의 단색 그림들과 엘 리시츠키(El Lissitzky)의 추상화들에서 말레비치의 영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오늘날에도 말레비치는 끊임없이 해석될 수 있는 풍부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주요 작품에는

《호밀 수확 Taking in the Rye》(1912),

《검은 사각형 Black Square》(1915),

《검은 원 Black Circle》(1915),

《검은 십자가 Black Cross》(1915),

《절대주의 회화: 흰색 위에 노란 사변형 Suprematist Painting: Yellow Quadrilateral on White》(1917~1918),

《절대주의 구성 : 흰색 위의 흰색 Suprematist Composition: White on White》(1918),

《절대주의 Suprematism》(1921~1927),

《말달리는 붉은 기병대 Red Cavalry Riding》(1928~1932),

《복잡한 예감: 노란 셔츠를 입은 반신상 Complex Presentiment: Half-Figure in a Yellow Shirt》(1932),

《자화상 Self-portrait》(1933)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카지미르 말레비치 [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두산백과)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1878~1935)는 키예프 출신의 러시아 화가로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 칸딘스키와 더불어 추상예술의 개척자이다. 처음에는 후기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으니 나중에 M.F. 라리오노프 및 러시아 전위파 시인들과 친교를 맺고, 절대주의(Suprematism)을 주창하였다.

 

1911년에는 '다디아의 책'이라는 그룹에 참가하여 러이아의 입체파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12년 파리 여행 후 레제풍의 기하학적 추상화를 발표하고급속히 자기 방법을 발전히켜 <흰 바탕에 검은 네모꼴>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어 원. 십자가. 삼각형을 추가하고, 그러한 기본형태에 의한 추상예술을 이론화하여 절대주의라 이름 짓고 1915년 V. V 마야 코프스키와 함께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혁명 직후 교수직에 임명되기도 했으니, 미술 정책의 반동적 전환으로 상페테르부르크에서 자유를 잃은 채 지냈다.

1926년에 독일로 이주해 절대주의 선언을 상세히 설명한 <비구상의 세계>를 바우하우스 를 통해 간행했다.

 

자연의 혼돈을 지배하는 인간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절대적 기본형태로서의 직선은 그의 기하학의 중요한 바탕이 된다. 자연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사각형은 절대주의의 기본요소이며 외관적 세계를 부정하며, 과거의 미술을 부정한다. 창조를 위해서는 정신적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물질적 필요의 충족을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1917년 혁명은 환영했으나, 예술이 기계문명에 맞추어지고, 공리적 목적에 씌여진다는 것에 동조할 수 없었다.

또한, 예술가와 기술자간의 어떤 편의상의 결합도 부정하였다.

진정한 창작품은 시대를 넘어 영원성이 부여되는데 비해 과학과 기술의 발명은 일시적일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의식보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잠재의식(초의식)으로 보여지는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그는 보았다.

말레비치는 미술가가 수동적으로 자연 환경에 반응하는 전통적 재현 방법을 거부하고 자연 그 자체의 실재와 같이 의미있는 새로운 실재들을 창조하려 했으며 그 방법으로써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기하학적 형태를 택했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는 창작 예술에 있어서 순수감성의 절대적 우위를 말한다.'라고 그의 회화의 의도를 피력했으며 이는 곧 시작적, 물질적 현실세계를 초월하여 대상없는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 회화를 위해 사각형을 기본 요소로 선택했고, 정사각형은 가장 이상적 형태로 십자형, 장방형 등 다른 절대주의의

형태들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말레비치의 그림에서의 흰색바탕은 푸른 하늘의 경계를 부수고 무한한 공간으로 탈출하려는 그의 의지를 나타내며 절대주의가 전개될수록 색이 정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사각형에서 채색된 선명한 색채마저 배제하게 된다.

 

말레비치는 몬드리안과 마찬가지로 비구상에 이르기 위해 초기에 입체주의를 받아들였는데, 피카소의 큐비즘보다는 레제의 원통주의를 도입하였다. 서민의 생활상을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하여 보여주다가 1913년에 <흰 바탕위의 검은 사각형>이라는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의 절대주의 작품을 제작한다.

 

이 작품은 1918년 1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0,10' 전시회에 출품되었고 절대주의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1915년 이후 한동안 여러 색채의 크고 작은 사각형을 배열시킨 작품을 발표하여 다색시대를 맞이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는 색채의 순수성, 즉 색채가 회화의 부속물이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단위로 존재한다는 점을 추구한다. 1918년 <흰 바탕의 흰 사각형>이라는 궁극적인 절대주의 작품이 등장한다.

 

모든 불순물을 쏟아버린 무의 세계라는 말레비치의 표현에서처럼 절대적 우위성을 극렬하게 드러냈다.

 

말레비치는 '자연 그 자체의 실제와 같이 의미있는' 새로운 실제를 창조하려 했다.

'예술에 있어서 순수한 감정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그는 몬드리안의 이성 중심과는 반대로 감성의 극한적인 극점으로서의 추상을 주장했다.

 

단순한 현실적 감각세계를 거부한 것이 아닌, 순수한 감성으로서의 극점, 즉 주관주의적인 추상이며 몬드리안

보다 훨씬 앞서서 시작한 추상이었다. 몬드리안의 작품과 비교한다면 모두 기하학적 추상 형태로서 어떠한 정감이나 현실의 모습의 재현을 배제하지만, 몬드리안의 작품이 현실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지적이며 합리주의적인 장기간의 숙고의 결과물인 반면, 말레비치의 작품은 직관적 통찰에 의해 현실을 단기간에 초월하여 얻어낸 절대의 세계였다.

 

다소 산만한 듯한 빛의 방향과 빨강, 파랑, 흰색의 강렬한 색이 인상적이다.

지난 밤의 폭풍우가 마을을 눈으로 뒤덮고, 아침 햇살의 강렬한 빛이 마을을 덮은 눈 위에서 반사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시기의 말레비치는 모든 물체를 분해하는 입체주의와 차가운 금속미의 미래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로봇과 같은 모습의 이 나뭇꾼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레비치의 대표작이다.

그는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해서 역동적 구성이라 칭하기도 하였는데 따뜻한 색의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카롭게 떨어진 선과 빛의 각도가 입체주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다소 경건한 분위기가 밀레의 만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러시아 민족주의의 감정을 실은 이 작품은 앞의 나뭇꾼과 같은 스타일의 그림이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고향의 농부들의 생활을 단순하고 장엄하게 그려냈다.

명암 대비와 원색으로 강조된 곡면의 입체감이 앞의 나뭇꾼보다 훨씬 단순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처음 전시되었을 때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 그림은 러시아 정교의 성상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그래서 말레비치가 죽은 후 러시아 미술가 연맹에 안치되었을 때 그의 머리 위 벽에 이 그림이 걸렸다고 한다. 십자가 대신으로 말이다.

 

말레비치 특유의 명암대비 인물표현이 엿보인다. 물고기, 문자, 카드 등 다소 비행사와는 상관없을 듯한 여러가지 물체들을 산만하게 배치되어 있다. 아직까지는 입체주의 영향이 남아 있는 듯 하다.

 

나뭇꾼과 흡사하게 그려진 인물을 뒤에 두고 재미있는 물체들이 화폭에 배치되어 있다.

단어들, 물고기, 촛불, 총검, 교회, 칼 등이 일관성없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는 영국인의 도시에 대한 경험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러시아는 혁명으로 인해 물질주의 세계관이 팽배해 있었다. 말레비치의 초기 절대주의 작품으로 물질주의적인 제목이 붙어 있다.

 하지만 예술의 효용성만을 따지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당시의 사회 흐름에 그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나타나게 되는 절대주의 스타일의 그림에는 <절대주의>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절대적 감각의 추구와 새로운 기호의 창조에 자신의 예술세계인 절대주의를 설명한 말레비치는 위의 그림과 같은 스타일을 시리즈로 그렸다.

훗날 이 절대주의 감각은 바우하우스를 통해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전해졌고 아직까지도 그 감각적 흐름은 현대 디자인의 주류가 되고 있다.

그의 초기작품에서 많이 보았던 명암대비의 물체 표현이 약간 보이지만 그동안 추구해 왔던 절대주의 스타일의 그림과는 사뭇 다른 작품이다.

 

그러나 감각적인 원색의 대비는 그의 디자인 경향을 느끼게 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집 한 채를 바라보고 있는 외로운 사람의 뒷모습은 고독한 말년의 말레비치 자신을 연상시키고 있는것 같다.

 

 

 

   

28. 추상표현주의( 抽象表現主義, Abstract Expressionism:1940~1950)

 

1940년대 말∼1960년대 초에 미국에서 전개된 미술의 한 동향을 말한다.

 

본래는 1919년에 O.헤르초크가 독일의 표현주의 잡지 《슈투름(폭풍)》에서 추상적인 표현주의를 구상적인 그것에 대치해서 사용한 것이다.

 

그 후, 미국에서 알프레드 바 2세가 웰스리대학의 강의(1929)에서 ‘칸딘스키와 독일의 추상표현주의’라고 했고, 그가 조직한 큐비즘과 추상예술전(1936)의 카탈로그에서 칸딘스키를 가리켜서 사용하였다.

 

이어서 R. 코츠가 H. 호프만의 전람회명(1946)에 전용한 이래 미국의 화가에 적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화된 것은 1940년대 후반∼1950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J. 폴록, J. 뉴먼, M. 로스코, C. 스틸, W. 데쿠닝, F. 클라인 등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폴록의 푸어드(poured:그림물감을 뿌리듯이 그리는 방법)와 뉴먼, 로스코 등의 컬러필드 페인팅(색채의 場의 회화)은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공간상 ‘그림’과 ‘바탕’의 관계가 근접되어 있다는 점, 올오버(전면을 덮는), 다초점, 또는 무초점의 공간과 정신내용을 가지는 그림이라는 점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후에 M.루이스의 작품에 의해 계승, 통합되었다.

또 이 용어는 D.스미스를 중심으로 금속을 소재로 한 조각에도 사용된다.

 

독일 표현주의의 자기표현을 내세우는 예술과는 이질적인 동향에 주어진 이 용어는 편의적임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미술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예감한 예술을, 그 어떤 형태로 포괄하려고 하는 자연발생적인 요구에 호응한 것이다.

 

한편, H. 로젠버그가 명명한 ‘액션 페인팅’이라는 용어도 이 동향에 포함되는데 특히 폴록 등과는 다른 회화공간을 가지는 데쿠닝이나 클라인 등의 작품에 가장 잘 어울린다.

 

 추상표현주의는 프랑켄살러, J. 존스 등의 네오다다이즘, 팝 아트 등의 미니멀 아트를 거쳐 1970년대 후반의 신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새로운 미술은 그 시대의 사회적 변화에 따른 의식의 변천으로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된다. 유럽문화의 모방과 연장이었던 미국의 정신문화는 양차 대전중 유럽의 나치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화가들과 부를 이룩한 미국의 문화적 위약을 보강하기 위해 미국적 양식을 주장하는 평론가들에 힘입어 20세기 후반부터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미국 미술은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과시하기 시작함으로써 독자적인 미국적 양식을 주장함에 이르른다.

그리고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써 연방미술정책(Fedral Art Project)이 미술을 공동체의 일상 생활과 통합시키기 위해 결성된다. 벽화작업은 공공작업을 통한 노동의 수요와 미국적인 미술의 한 특징을 짓는 계기를 마련한다.

 

멕시코의 리베라등이 추진한 벽화의 영향으로 큰 규모의 초대형 회화의 캔버스가 생기는 계기가 된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정부의 관심과 미국에 형성된 작가들의 자각이 함께 어울려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미국적인 주체성은 확보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고대 신화나 원형적의 의미, 또는 원시미술 특히

인디언의 제의에서 비롯한 숭고함과 비장감을 자신들의 이념을 세우는데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것은 초현실주의 영향으로 원시적 주제에 의한 오토마티즘으로 연결된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미국 미술, 특히 추상표현주의에 있어 회화 표현의 본질은 인간내면의 정신성에 두었으며, 그 표현양식으로써는 행위 추상과 색면 추상으로 나타났다.

 

그려지는 이미지보다도 그린다는 행위 자체를 주장하여 격렬함이나 생명감의 긴장이 강조되는 행위 추상에서 화면은 현실적인 또는 상상된 대상을 재현하고, 재설계 하고, 표현하기 위한 공간이라기 보다는 행위하기 위한 장이 되었다.

 

즉 행위 추상은 자기창조, 자기 한정, 또는 자기 초월과 관련이 있으며 행위는 넓게 뻗은 팔길이만한 충돌점에서 빚어지는 물질화된 속도화 에너지 자체이고, 표현 행위는 부단한 정신적 긴장에 의해 논리화 되었다.

 

추상미술이라 하면 지역과 시대를 초월한 모든 조형예술 속에서 발견되는 기하학적 문양을 그 源流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에 내재하는 일반적 능력으로써 이러한 문양화를 창조 능력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 점에 있어서 오늘날 추상미술 존재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추상미술은 입체주의(Cubism)나 초현실주의(Surrealism)와 같은 하나의 경향을 주장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추상미술이 갖는 內的 必然性에 의해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몬드리안(P. Mondrian)과 같은 기하학적 구성적, 지적인 경향, 말레비치(K. Malevich)와 같은 신비주의적, 금욕적 경향, 칸딘스키(W. Kandinsky)와 같은 본능적, 표현적 경향 등은 내적 필연성에 의해 주어진 각각 다른 성향인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는 크게 두가지 경향이 나타난다. 차가운 추상계열의 색면추상과 뜨거운 추상의 액션 페인팅(행위미술)이다.

 

액션 페인팅은 잭슨 폴록과 윌리엄 드 쿠닝으로 대표된다.

잭슨 폴록의 회화 세계는 1948년 융의 무의식에서 비롯된 신화, 상징이 주요 개념으로 작용하고 원시미술에 주목을 한 신화시기를 거쳐 48년 이후 액션 페인팅시기에서 완숙하게 된다.

원시미술은 미국인으로서의 지각과 주체성 유럽에 대한 의식 사이의 결정적인 수단이자 요인이었다.

 

전후 미술의 두드러진 특징은 뉴욕을 중심 무대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인데 1930년대 미국의 예술계를 주도하던 미학적 관심은 당시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변동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29년의 경제 침체, 대외적으로는 나치즘의 등장과 스페인 내란, 모스크바 분쟁, 나치-소비에트 불가침 조약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의 유발 등이 사회적, 정신적 불안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하에서의 미국 미술의 주된 양식들은 여전히 사회적 사실주의(Social Realism)와 지방주의(Regionalism)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스트들의 매너리즘, 조잡한 삽화나 진부한 반복 부정직한 주제 등에 혐오감을 느낀 미국 미술가들은 때마침 물밀 듯 밀려온 유럽 추상미술을 환호하게 되었다.

 

특히 R.코츠가 H.호프만(1932년 이후 피카소의 드로잉과 마티스의 색채수업 예술의 사회적 목적보다 자율성 주장)의 전람회명(1946)에 추상표현주의를 전용한 이래 미국의 화가에 적용하게 되었고 일반화된 것은 40년대 후반∼

50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프란츠 클라인, 폴록, 뉴먼, 로드코, 스틸, 윌렘 드 쿠닝, 등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윌렘 드 쿠닝은 1948년 흑백회화를 충격적으로 전시하여 등장한다.

 

드 쿠닝은 자유롭고 거의 광란적인 붓질로써 격정적인 모습의 형상에 집중한다.

그의 유명한 <여인 연작>은 오만하고 비속한 여인을 그린다.

폴록의 회화가 고상한 추상의 고뇌라면 그는 속물적인 근성과 블랙 유머러스한 조소를 담은 형상적인 것을 담는다. 그에게서 형상은 이미 재현을 떠났으며 그는 인체에서 찾을 수 있는 격렬함과 폭력을 형상의 과정적인 붓질로 제시하는 것이다.

 

잭슨 폴록의 푸어드(poured:그림물감을 뿌리듯이 그리는 방법)와 뉴먼 로스코 등의 컬러필드 페인팅(색면회화 : Color-field Painting)은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공간상 ‘그림’과 ‘바탕’의 관계가 근접되어 있다는 점, 올오버(전면을

덮는), 다초점, 또는 무초점의 공간과 정신내용을 가지는 그림이라는 점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후에 M. 루이스의 작품에 의해 계승, 통합된 이 용어는 D. 스미스를 중심으로 금속을 소재로 한 조각에도 사용되었다.

 

한편 미술 컬렉터였던 페기 구겐하임도 도미하여 '금세기 예술'이란 화랑을 경영하였는데, 이 곳에서 화가 지망생들 간의 접촉이 이루어졌고, 그후 미국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미국 전위미술의 중요한 산실이 되었다.

 

1943년에서 1946년의 기간동안에 잭슨 폴록, 한스 호프만, 로버트 머더웰 마크 로드코, 클리포드 스틸 등의 개인전이 이 화랑에서 계속해서 열렸다.

 

유럽에서의 추상표현주의자로서는 장 포트리에, 장 뒤뷔페 등을 선구로 들 수 있다.

이들에 있어서의 마띠에르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물감을 두껍게 발라 올린 화면을 긁거나 파는 것처럼 그렸다.

 

포트리에는 석고나 석회를 굳게 화면에 발랐으며, 뒤뷔페는 물감에 모래나 유리조각 같은 것을 섞어 두껍게 발랐다. 이들은 마띠에르란 물질성을 강조한 것이고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습관적인 테크닉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라는 점을 강하게 의식했다. 마띠에르를 행위와 밀접하게 관련시킨 것이다.

 

이와같은 동향을 미치에르 다비에는 '앙포르멜'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것은 추상미술의 새로운 전개가 아니라 실로 '또다른 예술(L'artautre)' 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약동적 필촉과 거친 마띠에르의 비구상화가 오십 년대의 유럽 미술을 의미했다.

 

오십 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행위 마띠에르의 원초적 관계가 고정화되어 신선함을 많이 잃게 되지만. 기왕의 회화 이념을 탈피. 육십 년대 회화의 새 장을 열었다.

 

미국은 미국 나름의 독자적 세계를 개척했는데, 잭슨 폴록은 그 대표적 작가다.

 그는 멕시코 벽화의 또는 비유럽적 프리미티브 아트라 일컬을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바닥에 큰 화폭을 놓고 그 주변에서부터물감을 흘려 그리는 드롭핑 페인팅을 시도했다.

 

 '나 자신은 그렇게 함으로써 회화의 일부가 된 느낌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는 회화가 화가의 자아표현이라는 기왕의 관념을 넘어선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액션 페인팅" 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는 '화폭은 현실이나 사용의 대상을 재현. 구성, 분해, 표현하는 공간이 아니고 행위를 위한 경기장 같이 보인다'고 말했다.

 

종래의 회화와는 근본적인 이질성을 지적하여 이를 액션 페인팅이라 부른 것이다. 또한 추상표현주의에 있어서 오토마티즘(Automatism)은 초현실주의에서 출발하였지만 "이성에 의한 통제가 없는 것"이 아닌 "의식의 조정을 거치는 자발성의 표현방법" 이라는 새로운 조형의식으로 나타난다.

 

로젠버그에 의하면 표현으로서의 공간을 모두 행위하는 場과 사건이라는 하나의 시간 속에 회화를 흡수시킨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스케치나 데상의 개념을 수정하고, action으로써의 동일성을 가지며 행위의 회화는 예술과 생활사이의 모든 구별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즉 새로운 회화는 한 마디로 행위의 흔적으로써 작품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행위의 결과로써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Action Painting이라고 붙여진 호칭은 추상표현주의 보다는 훨씬 더 본질을 파악한 용어이었으며, Action Painting은 사건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린다는 행위의 연속을 말하고 이러한 점에 있어서 제작 방법은 누구보다도 폴록의 방법이 우수한 Action Painting이라고 로젠버그는 주장하였다.

 

추상표현주의는 195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미국추상회화·조각전"을 계기로 강력하고 주도적인 미술운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1951년부터 1961년 사이에 이 운동은 미국 전역으로 세계 각국으로 파급되었다.

 

1940년대 와 1950년대에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던 작가들 중에서도 이 경향으로 화풍을 바꾼 경우가 많았다.

본래 추상표현주의자는 폴록, 뉴먼, 로드코, 스틸 뿐 이었다.

 

이에 대해서 호프만, 고르키,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등은 다른 경향의 작가들이다.

 

왜냐하면 로젠버그가 지적했듯이 형상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60년대에 들어와서는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아쌍블라쥬 예술이라는 국제전이 개최되었는데, 아쌍블라쥬(집합, 조립)란 용어는 뒤뷔페가 처음 사용했다.

 

명칭에서처럼 기성품, 폐품, 가공품, 기타 여러가지 물체를 긁어 모아 만들어낸 전시회이다. 그리는 대신 긁어 모은다는 행위까지 확대된 것이다.

 

현대 도시 문명의 생활 양식이나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누보레알리즘 흑은 팝 아트와도 관련된 것이었다.

 

이 경향은 주관적이며 유동적인 추상예술로부터 떠나서 환경과의 새로운 결합을 시도한 것으로 해프닝과의 관련도 주목할 만하다.

 

잡동사니 물체로서의 작품에 관객이 끼어든 삼차원의 살아 있는 아쌍블라쥬는 해프닝에서 말하는 환경과의 새로운 결합과 유사한 것이었다.

 

추상표현주의 운동은 1960년을 그 정점으로 폴록, 클라인, 로드코, 톰린 바넷 뉴먼, 라인하트 등이 차례로 작고하면서 쇠퇴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남은 작가들, 드 쿠닝, 머더웰, 필립 거스튼, 고틀리브, 스틸, 브룩스 마카렐리 등은 그들의 이미지를 더욱 확대해 나갔으며, 프랑켄살러, J. 존스 등의 네오다다이즘, 팝 아트 등을 거쳐 70년대 후반의 신표현주의에 이르기

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추상표현주의에 갖는 의의는 피상적으로 미국미술의 국제화 분위기의 최초의 반영이자 미술메카로서의 상징적 첫발이다.

또 내용면에서는 추상이되 그 내용이 갖는 주제성은 몬드리안의 추상이 추구한 신지학적인 질서와 다른 철학적인 성찰이 따른다.

그것은 실존주의의 영향으로 작가의 실존적 문제의 적나라한 과정이 모두 공개되면서 고민의 흔적을 대중이 함께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추상표현주의는 매우 지적인 미술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 기하학적 추상:

 

기하학적 추상의 뿌리는 세잔느의 탐구적인 정물화나 풍경화,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최초의 진정한 기하학적 추상은 흰 바탕 위의 검은 장방형으로 1913년경 카시미르 말레비치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는 이어 일련의 보다 복잡해지는 기하학적 構圖를 그려나갔으며 원이나 사각형, 경사진 장방형, 평행사변형, 그리고 사다리꼴들은 非대칭적으로 그리고, 대각선 위치에다 정리 배치했다.

 

말레비치는 기독교적인 신비주의자였고 그가 1915년에 절대주의자라고 부른 그의 미술은 모두 외부세계의 모방으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느낌에 관한 것이었다.

 

말레비치의 개념은 1920년대초 엘 리시츠키를 통해 西유럽에 전달되었는데, 西유럽에서 피에트 몬드리안, 테오 반되스버그, 그리고 데스티일派로부터 나온 유사한 기하학적 개념과 통합되고 바우하우스에서 회화敎科의 핵심을 이루었다.

 

기하학적 추상은 바우하우스의 화가, 교사들에 의해 그후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리스즐로 모홀리스 나기도 1937년 시카코에서 新바우하우스를 열었고 조세프 앨버스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블랙마운틴大와 예일대학에서 색채와 인식 이론을 가르쳤다.

 

또 다른 전달자인 몬드리안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 5년(1940~44)을 뉴욕에서 보냈으나 그의 名聲은 대단하여 1930년대에 버고인 딜러같은 몇 안되는 견실한 미국 기하학적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추상표현주의는 기하학적 스타일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그 회화적 表面 밑에는 기하학적 구조가 깔려있다.

 

더욱이 추상표현 前의 기하학적 추상과 1960년대의 '하드 에지'파 변형된 캔바스, 옵 및 미니얼派 사이에는 수학적인 체계나 원, 장방형 또는 사각형같은 기본적 형태들을 공통적으로 사용한다는 명백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나 밀도있게 느껴지는 원래의 정신적 내용은 일반적으로 後期작품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끝으로 1980년대의 新기하학파 미술가들이 있는데 그들도 컴퓨터의 최소한을 바탕으로 기하학을 형성하는 피터 헬리 같은 작가들이다.

 

(2) 형태적 추상:

 

이 형식의 추상은 아르프, 마송 및 미로의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우연 또는 다다나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적 드로잉 방식에서 연유되었다.

 

이는 특히 1930년대에 유행했고 이때 이들에 의한 有機的 탐색에 피카소, 칸딘스키, 브랑쿠시 및 마타 등이 합류했다. 변형되는 아메바같은 형태나 덩굴손 모양의 선, 그리고 환각적인 색채가 애욕적, 植物性的, 그리고 꽃이나

水草를 연상시키는 유형의 構圖를 위해 사용되었다. 아쉴 고리키가 뉴욕에서 이러힌 요소들을 제일 먼저 사용했으나 곧이어 초기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된 바시오레스, 고틀리프, 스틸, 폴록, 그리고 로드코 등이 이에 참여했다.

 

★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 ★

 

20세기 초반, 혁명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 일어난 러시아 아방가르드(Avant-Garde:전위) 예술운동은 예술의 미적 감각과 역사에 대한 의식, 그리고 작업소재와 공간을 확대, 확산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운동으로 인해 기존의 예술은 새로운 개념, 새로운 작업들에 의한 도전에 직면하고, 급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러시아의 아방가르드는 혁명 전후 산업사회로 탈바꿈하던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에 의해, 미술이 정신적 연대감을 매개로 산업 현장과 직결될 수 있다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프랑스의 입체주의, 이태리의 미래주의와 함께 기존 미술의 관습적 틀을 넘어서 실험적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아방가르드는 문화예술 전 장르를 통해 공동작업으로 진행시켰다는 운동적 개념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어, 서구의 실험적태도보다 더 큰 파급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러시아 아방가르드미술은 형식이나 내용, 색채 및 재료, 텍스츄어, 공간감, 그리고 다이나믹한 실험주의로 후에 기하학적 추상이나 미니멀리즘, 컨셉추얼 아트, 키네틱 아트를 파생시키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미술은 분류상

네오프리미티비즘(Neoprimitivism)과 입체미래주의(Cubo-Futurism), 광선주의(Rayonism), 절대주의(Suprematism), 구성주의(Constructivism), 생산주의(Productivism)로 나뉘어진다.

 

이같은 장르적 운동은 종래 철학의 보편구조와 형식미술을 다양화시킨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들의 기본정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미학적 개념의 재정립과 새로운 역사와 만나는 「예술의 순수성」에 맞추어졌다.

 

요컨대, 러시아 아방가르드미술운동은 종래의 회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파악하려는 실험 정신이 핵심이 되었다.

혁명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맞물려, 혁명사상과 새로운 기술을 연결하고자 하였으며, 무대예술, 환경미술, 응용미술에 이르기까지 넓은 분야로 확장하게 되었다.

 

절대주의(絶對主義:Suprematism)는 최초의 순수한 기하추상회화 운동으로 1913년경 러시아에서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1878~1935)에의해 시작되었다.

 

말레비치는 입체파에서 끌어낸 순수한 감각을 지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기하학적인 색채평면 형태만을 묘사(기하학적 추상주의), 바탕에 검정색 정방형만을 그린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감성의 극한적인 극점으로서의 추상을 주장했다.

 

말레비치가 시도한 최초의 절대주의 작품은 흰 바탕 위에 연필로 검정색 4각형을 그린 드로잉이다.

여기서 그는 이전에 그가 추구하던 입체파적인 미래파 양식의 특징인 재현적 요소를 모두 제거했다.

그리고 '적절한 표현 수단이란 최대한으로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며 사물의 외형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 검정색 4각형은 감성을 뜻하며 흰색 바탕은 '감성을 초월한 공(空)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의 초기 절대주의 작품들은 대개 1913년경부터 제작되었지만 1915년에 전시되었다.

이 해에 그는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Vladimir Mayakovsky:1893~1930)를 비롯한 몇몇 문인들의 도움으로 절대주의 성명서를 편집했다.

 

4각형·원·십자형 등의 단순한 기하형태로 이루어진 초기 구성작품들에서 말레비치는 검정색·흰색·빨간색·초록색·파란색만을 사용했다.

 

 1916~17년에는 원의 부분이나 작은 3각형같이 좀더 복잡한 형태들을 다루었고 색채도 갈색, 분홍색, 엷은 자주색 등을 폭넓게 다루었다.

또한 복잡한 공간 관계를 엮어서 3차원적인 환상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의 실험은 1917~18년에 그린 <백색 위에 백색 White on White>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여기서 색채는 사라지고 희미한 윤곽의 4각형만이 나타나 있다.

1919년 개인전을 끝으로 그는 절대주의 운동의 종말을 고했다.

그 밖에도 이반 클리운(Ivan Kliun), 이반 푸니(Ivan Puni or Puny(Jean Pougny:1894 ~1956), 올가 로사노바(Olga Vladi-mirovna Rosanova:1886~1918) 등과 같은 잘 알려지지 않은 절대주의 화가가 있다.

 

이 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유명한 러시아의 화가인 바실리 칸딘스키는 1920년 이후에 그린 기하학적인 형태들에서 절대주의의 영향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다른 추상미술 경향과 더불어 이런 기하학적 양식은 칸딘스키와 러시아의 화가 엘 리시츠키(El Lissitsky:1890~1941)에 의해 독일에 전해졌고 특히 1920년대 초 바우하우스(Bauhaus)로 이어졌다.

 

 

출처;   http://blog.daum.net/wkdwngmldi/2

 

 

 

 

카지미르 말레비치 (Kasimir Malevich, 1878~1935, 러시아)

 

 

 

1. 러시아의 화가. 추상화의 절대주의 유파를 창시했다.

말레비치는 키예프 미술학교와 모스크바 미술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다.

   

2. 초기에는 인상파나 야수파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으나 1912년에 파리를 방문한 뒤로는 피카소와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잭 오브 다이아몬드'라는 단체의 일원으로서, 러시아 입체파 운동을 이끌었다.

 

   

3. 1913년에 말레비치는 그가 절대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기하학 추상형식을 만들었다. 1919~21년에 그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그림을 가르쳤으며, 죽을 때까지 레닌그라드에서 살았다.

   

4. 그는 1926년에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바실리 칸딘스키를 만나, 〈비구상의 세계 Die gegenstandslose Welt〉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이론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나중에 소련 정치가들이 현대 미술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말레비치와 그의 미술은 파멸의 운명을 맞았다. 그는 세상에서 잊혀진 채 가난속에서 죽었다.

   

 

5. 말레비치는 추상적인 기하학적 요소로 이루어진 그림을 발표한 최초의 화가였다. 그는 미술에서 모든 관능과 묘사를 배제하고, 순수하며 지적인 구성 작품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의 유명한 〈흰색 위의 흰색 White on White〉(1918, 미국 뉴욕 시 현대미술관 소장)은 절대주의 이론에서 나온 논리적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주의, Suprematisme(쉬프레마티즘)>

   

러시아의 화가 말레비치Kasimir Malevich(1878~1935)에 의해 시작된 기하학적 추상주의의 한 흐름. 원래는 입체주의의 미학에서 파생한 것이다.

말레비치는 1913년 가을에 <태양에 대한 승리>라는 미래파적인 오페라의 조형적인 연출(장식과 의상들) 작업을 하는 동안에 구상 작업을 포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약적인 진전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게 되며, 회화를 모방적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2년간의 힘든 작업을 필요로 한다.

1915년 6월 말레비치는 회화의 단면으로 나타낸 하얀 바탕의 작품 위에 하나의 검은 사각형을 그린다.

기하학적인 단순한 형상을 표현하는 것과는 달리 이 사각형은 자율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으며 역동적인 무게와 함께 율동감을 지니고 있다.

   

그의 첫번째 시리즈 작품들은 이차원적 색채의 형상을 지닌 구상들로 순수한 색감들의 절대성을 강조한다.

이것들은 수많은 면들의 율동감을 보여준다.

 

회화 외의 대상 세계와의 관계를 거부하면서 말레비치는 이 미술을 '비객관적'이라 명명하며,

절대주의라는 순수한 색감들의 절대성에 대한 시스템 정의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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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르 말레비치 (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

 

 

 

1. 러시아의 화가. 추상화의 절대주의 유파를 창시했다. 말레비치는 키예프 미술학교와 모스크바 미술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다.

 

2. 초기에는 인상파나 야수파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으나 1912년에 파리를 방문한 뒤로는 피카소와 입체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잭 오브 다이아몬드'라는 단체의 일원으로서, 러시아 입체파 운동을 이끌었다.


3. 1913년에 말레비치는 그가 절대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기하학 추상형식을 만들었다. 1919~21년에 그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그림을 가르쳤으며, 죽을 때까지 레닌그라드에서 살았다.

 

4. 그는 1926년에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바실리 칸딘스키를 만나, 〈비구상의 세계 Die gegenstandslose Welt〉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이론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나중에 소련 정치가들이 현대 미술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말레비치와 그의 미술은 파멸의 운명을 맞았다. 그는 세상에서 잊혀진 채 가난속에서 죽었다.


5. 말레비치는 추상적인 기하학적 요소로 이루어진 그림을 발표한 최초의 화가였다. 그는 미술에서 모든 관능과 묘사를 배제하고, 순수하며 지적인 구성 작품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의 유명한 〈흰색 위의 흰색 White on White〉(1918, 미국 뉴욕 시 현대미술관 소장)은 절대주의 이론에서 나온 논리적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주의, Suprematisme(쉬프레마티즘)>

 

 

러시아의 화가 말레비치Kasimir Malevich(1878~1935)에 의해 시작된 기하학적 추상주의의 한 흐름. 원래는 입체주의의 미학에서 파생한 것이다. 말레비치는 1913년 가을에 <태양에 대한 승리>라는 미래파적인 오페라의 조형적인 연출(장식과 의상들) 작업을 하는 동안에 구상 작업을 포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약적인 진전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게 되며, 회화를 모방적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2년간의 힘든 작업을 필요로 한다. 1915년 6월 말레비치는 회화의 단면으로 나타낸 하얀 바탕의 작품 위에 하나의 검은 사각형을 그린다. 기하학적인 단순한 형상을 표현하는 것과는 달리 이 사각형은 자율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으며 역동적인 무게와 함께 율동감을 지니고 있다.

 

 

그의 첫번째 시리즈 작품들은 이차원적 색채의 형상을 지닌 구상들로 순수한 색감들의 절대성을 강조한다. 이것들은 수많은 면들의 율동감을 보여준다. 회화 외의 대상 세계와의 관계를 거부하면서 말레비치는 이 미술을 '비객관적'이라 명명하며, 절대주의라는 순수한 색감들의 절대성에 대한 시스템 정의를 내린다.


 

                                                     <절대주의 이전>

 

                                                     <예수의 수의>, 1908

 

 

극도로 양식화된 구성을 지닌 이 작품에는 비늘 모양으로 처리된 하늘 속에 두 개의 검은 태양이 나타나 있어, 예수가 누워 있는 공간 이 현실 세계가 아닌 신비적 공간임을 암시한다.

 

또한 예수의 몸으로부터 뻗어나간 식물들은 성장의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이 중 가운데 위치한 대칭형의 식물은 연꽃 내지 불탑(佛塔)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처리되어 역시 불교를 환기시킨다.

 

이상에서와 같이 말레비치가 기독교 주제를 지닌 작품들에 이국적 종교의 모티브를 혼합시켜 표현한 것은 그가 상징주의가 지녔던 이국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동방사상에 관련되었음을 입증해준다.

 

 

              

                                                        <자화상>, 1909

 

 

이 작품들에서 말레비치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천상에 있는 듯한 인물들에 둘러싸인 채 정면을 곧바로 응시하는 모습으로 제시함으로써 통찰력을 지닌 특별한 존재로 위치시킨 바 있었다.

 

이와같이 그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지녔던 정면상은 농부회화로 계승되어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신인간(新人間)을 표현하는 주요한 방식으로 사용된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그 시대의 새로운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를 러시아 농부에게서 발견하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농부회화를 제작했기 때문이었다.

 

 

             

                                                  <낫질하는 사람>, 1912

 

농부는 전신상으로 확대된 채 도끼나 긴 낫을 든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정면을 향하고 있어 신인간의 이미지가 지속되고 있다.

 

 

                    

                                                   <나뭇꾼>, 1912

 

 

낫, 톱, 도끼 등의 연장을 들고 작업하는 모습을 그린 농부회화도 제작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농부의 삶과 관련된 다양한 광경들을 담아 일종의 풍속화 연작을 이루었는데, 여기에 담겨져 있는 노동의 내용은 각 계절에 관련된 활동을 나타냄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암시해주는 역할을 한다.


 

               

                                              <모스크바의 영국인>, 1914

 

 

중절모를 쓴 정면상의 인물, 톱, 흰색 물고기, 그리고 인물로부터 뻗어나가는 빛이라는 모티브들이 공통적으로 쓰이고 있어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상징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미지의 병치와 문자의 분절을 통한 다의성은 지속된다. 화면 가득히 배치되어 있는 이미지들은 농촌, 종교, 전쟁을 나타내면서 당시 러시아가 처해있던 사회적 상황을 언급한다.

인물의 오른 편에 위치한 톱과 그 아래로 쓰여있는 ‘경주용 마굿간’이라는 붉은 색 문구가 농촌의 삶을 나타낸다면, 물고기와 교회 건물, 이콘 앞에 놓여있는 듯한 촛불로 구성된 중앙의 이미지는 종교를 상징한다.

 

또한 커다란 칼과 그 끝이 가리키는 위치에 놓인 세 개의 총검은 당시 진행 중이던 1차 세계대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비행가>, 1914

 

 

이 작품에 쓰인 문자요소를 보면, 인물로부터 방사된 빛안에 쓰여있는 ‘화학자’ 내지 ‘연금술사’라는 뜻을 지닌 'АПТЕКА'라는 단어를 통해 미래의 구원자를 신비적 능력의 소유자와 연결시킨다.

 

또한 이것은 특별한 의도로 분절됨으로써 다의성을 지니는데, 이 중 'КА'는 흘렙니코프가 쓴 시 제목이자 그의 다른 글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으로서, 그는 시간의 장벽을 뛰어넘어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연대를 기반으로 비밀스러운 연관성을 찾아내는 신비적 능력의 소유자였다.

 

 

                                             <절대주의>

 

                 

                                              <검정색의 정사각형>, 1914

 

 

이 작품은 절대주의 탄생의 근원이며 이후로의 발전을 내포한 싹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이 검정 사각형으로부터 다양한 기하형태들이 방사되어 나가도록 배치한 ‘0. 10’展의 전시방식 역시 그의 의도를 더욱 확실히 해준다.

 

이러한 절대주의의 발전 논리에 따라 단일한 기하형태만을 나타낸 작품으로부터 형태의 수가 증가한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살펴보면, 기하형태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은 보다 복합적인 것으로 발전해 나감을 알 수 있다.

 

 

                

                                  <농노여인의 2차원의 회화적 리얼리즘>, 1915

 

 

붉은 사각형의 네 각은 완벽한 직각을 이루지 못한 상태이다. 이렇게 변형된 듯한 사각형은 움직임에 대한 암시 효과를 주는데 그 형태들은 사각형이 뒤쪽을 향해 회전하고 있는 것으로 읽혀진다.

 

이와같이 단일한 기하형태만을 제시한 작품을 통해 암시적으로 시작된 움직임의 느낌은 이후 기하형태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그에 비례하여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배낭맨 소년의 회화적 리얼리즘>, 1915

 

 

검정 색과 붉은 색의 정사각형 두 개가 등장하는데, 붉은 사각형의 오른쪽 변의 연장선이 검정 사각형의 한 각과 만나도록 놓여 있어 붉은 사각형은 검정 사각형으로부터 분리되어 이동한
느낌을 준다.

 

 

                           

                                           <절대주의 회화, 비행중의 비행>, 1915

 

 

직접적으로 ‘비행’이 주제로 제시된다. 이미 절대주의 이전부터 자주 다루어졌던 비행의 주제는
절대주의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어 말레비치의 회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것은 실제의 물리적인 움직임을 나타낼 뿐 아니라 가시적 세계를 이탈하여 그 너머의 본질을 추구하는 열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후기 구상회화>

 

                  

                                               

뒷배경의 인물이나 세부적 풍물이 사라지고 땅은 수평의 띠로 감축되며 하늘은 우주의 일부로서 광활함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로써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을 향한 수직성이 강조된 인물들은 지상과 우주 사이에 위치한 중간적 존재로서 우주와의 합일의 소망을 강하게 드러낸다.

 

또한 얼굴에서 눈, 코, 입과 같은 세부는 모두 사라져 어떤 심리적이거나 일상적 내용도 제거됨으로써 초월성의 주제만이 부각된다.

 

 

            

                                                        <자화상>, 1933

 

 

말레비치는 창작의 마지막 단계로서 자신과 주변의 인물들을 실제 크기의 4분의 3정도로 담은 커다란 크기의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이 그림들에는 그의 최후의 관심사였던 불멸화에의 욕구가 표출되어 있다.

 

표현된 인물들은 얼굴이나 의상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전통적 초상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이 주는 전체적인 느낌은 비(非)사실적이며 초월적이다.

 

저 정적인 느낌을 주는 동결된 듯한 자세와 위를 향하여 약간 내뻗은 손의 제스쳐는 러시아 이콘에서 많이 쓰였던 정형화된 인물의 자세를 따른 것인데, 특히 위를 향해 올린 오른 손은 전통적으로 이콘에서 축복의 자세로 쓰여왔던 것을 감안할 때 그가 이 인물들에 신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했음이 나타난다.

 

이들의 시선도 전과는 달리 정면을 향해 관람자를 바라보지 않고 옆을 향한 자세로 위쪽의 먼 곳을 응시함으로써 초월적 세계를 꿈꾸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의상 또한 화려한 원색이 극적인 대비를이루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데, 그 디자인은 어떤 특정 범주로 분류하기 어려운 독특한 것들이다.

 

 

 

 

 

 

  카지미르 말레비치, 〈절대주의 구성 회화〉, 캔버스에 유화 / 88.5×71cm

카지미르 말레비치, 〈절대주의 구성 회화〉, 캔버스에 유화 / 88.5×71cm

 

 

“나는 나 자신을 제로의 형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무에서 창조로 나아갔다.

그것이 절대주의고, 회화의 새로운 리얼리즘이고,

대상이 없는 순수한 창조다.”

- 카지미르 말레비치

 

 

20세기 초반에 서양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화가들은 대부분 파리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에서 활동했지만,

러시아에서도 근대 미술의 큰 변화가 있었고 그 흐름을 주도한 역사적인 화가들이 있었다.

 

반갑게도 그중 가장 중요한 화가인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작품인 〈절대주의 구성 회화〉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의 순위 안에 들어 있다.

 

 2008년 뉴욕 소더비에서 6000만 달러(629억 5000만 원)에 팔려 러시아 미술 작품 중에서는 경매 역사상 가장 비싼 가격을 기록했다.

 

 

이 그림에서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얀 바탕과 그 위에 놓인 파란 정사각형, 검정, 초록, 노랑, 빨강, 주황 직사각형, 약간 일그러진 분홍 사각형들이다.

 

사실 이게 말레비치가 우리 관객에게 보여 주고 싶은 전부다.

그는 이렇게 ‘사각형’을 기본으로 한 아주 제한적인 형태의 도형만 그렸고, 바탕은 흰색을 고집했다.

 

흰색이 ‘무한 공간의 진정한 색’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 위에 그려진 사각형의 색깔도 삼원색과 흑백 등으로 제한했다.

 

 

말레비치는 회화가 외부 세계의 어떤 것도 재현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20세기 초반 파리에서는 과거 미술이 했던 외부 세계를 재현하는 것에서 벗어난 여러 스타일이 시도되었지만,

 그래도 기본이 되는 어느 정도 원래의 형상은 있게 마련이었다.

 

입체파만 해도 사실적이지 않게 그렸지만 구체적인 모델을 보고 그린 것이다.

하지만 말레비치의 그림은 아예 처음부터 염두에 둔 모델이 없다.

 

이렇게 외부 세계 재현을 완전히 거부하고 구체적인 형상을 없애 버린 당시 러시아의 새로운 미술을 ‘절대주의(Suprematism)’라고 한다.

 

 

 

말레비치는 유럽에서 회화, 조각, 건축을 다 공부했지만, 이런 공부를 통해 결국 깨달은 것은 ‘순수한 감성’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형태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상의 최고 진리는 100퍼센트 순수한 형상, 즉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는 순수한 도형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정사각형, 직사각형, 선 같은 기본적인 도형을 그린 그림은 누구나 사전 지식 없이도 알아볼 수 있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담아 1916년에 〈절대주의 성명(Suprematist Manifesto)〉이라는 글을 썼다.

 이 그림은 그 글을 쓴 해에 그려진 것으로, 말레비치가 주장하는 절대주의 회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말레비치의 미술은 이후 세대의 미술이 완전히 추상 미술로 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의 이런 생각은 당시 러시아의 사상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구체적인 형상을 뚜렷이 그리고 분명한 내러티브(서사, 이야기)가 있는 미술만을 용인한다. 심지어 나치는 서유럽의 전위적인 미술 작품을 싸잡아 ‘퇴폐 예술’로 몰아가기도 했다.

 

말레비치 작품 또한 ‘퇴폐 예술’ 목록에 올라 있었다.

그래서 1916년에 완성된 이 그림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는 동안 숨겨져 있었다.

 

이 그림은 1927년까지 말레비치가 가지고 있다가 독일 건축가 후고 헤링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1958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이 이 그림을 구입하여 50년 동안 소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레비치의 후손들이 17년간에 걸친 소송 끝에 이 그림의 소유권을 돌려받았다.

그들은 그림을 돌려받자마자 경매에 내놓아 팔았다.

 

말레비치 후손들 입장에서는 그림을 받아 낼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이 50년 동안 소장한 덕분에 유럽 곳곳의 미술관 전시에도 나오고 말레비치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더 비싸게 팔릴 수 있었다.

 

〈절대주의 구성 회화〉는 신원 미상의 구매자가 6000만 달러(629억 5000만 원)에 샀는데 이 가격은 러시아 미술품 거래 역사상 최고가다.

 

 

출처: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19XX34100046

 

 

 

 

 

 

 

 

 

 

 

 

 

 

 

 

 

 

 

 

 

 

 

 

 

 

 

 

 

 

 

 

 

 

 

 

 

 

 

 

 

 

 

 

 

 

 

 

 

 

 

 

 

 

 

 

 

 

 

 

 

 

 

 

 

 

 

 

 

 

 

 

 

 

 

 

 

 

 

 

 

 

 

 

 

 

 

 

 

 

 

 

 

 

 

 

 

 

 

 

 

 

 

 

 

 

 

 

 

 

 

 

 

 

 

 

 

 

 

 

 

 

 

 

 

 

 

 

 

 

 

 

 

 

 

 

 

 

 

 

 

 

 

 

 

 

 

 

 

 

 

 

 

 

 

 

 

 

 

 

 

 

 

 

 

 

 

 

 

 

 

출처;  

http://blog.naver.com/max63kr/110026910087

http://blog.naver.com/ypoohj/90014652509

http://blog.naver.com/sanghui80/138716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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