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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chardin, Jean-Baptiste-Simeon, 1699~1779, 프랑스)

작성일 작성자 Doldosa 김교수

 

 

장-시메옹 샤르댕 (chardin, Jean-Baptiste-Simeon),

 

 

장-시메옹 샤르댕(Jean-Siméon Chardin, 1699~1779)은 18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독창적인 그림을 그렸던 화가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대개 루이 15세 재위 기간(1715~1774)과 겹치는데,

이때 프랑스 미술계의 주류는 로코코(Rococo)라고 불리는,

낙천적인 유머가 담긴 우아하고 장식적인 양식의 미술이었다.

 

귀족들의 반짝이는 실크 드레스와 섬세한 레이스 장식, 신화 속의 관능적인 누드가 대다수 화가들의 화면을 채우고 있던 이 때 샤르댕은 소박한 부엌 살림을 주제로 한 정물화와, 절제된 부르주아 가정의 일상을 담은 장르화에만 집중했다.

 

가구 장인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난 샤르댕도 처음에는 역사화 수업을 받았다.

 

그에게 그림의 기초를 가르친 피에르-자크 카즈(Pierre-Jacques Cazes), 노엘-니콜라 쿠아펠(Noël-Nicolas Coypel) 모두 역사화가였고, 샤르댕은 와토를 닮고 싶어했다.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당시 미술계에서 그림은 그 주제에 따라 서열이 정해져 있었고, 이에 따라 화가의 위상과 수입도 차이가 났다. 가장 높은 위치에 있던 것은 신과 성자, 영웅의 서사를 펼쳐 보이는 ‘역사화’였고, 그 아래가 왕과 귀족의 위세를 기록한 ‘초상화’, 그 다음이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그린 ‘장르화’였다. 사람 다음가는 위치에 있는 모델은 ‘동물’이었고, 그 아래는 ‘풍경화’, 위계의 밑바닥에는 죽어 있는 사물을 그린 ‘정물화’가 있었다.

 

샤르댕은 도제 수업을 마친 1724년경부터 정물에 집중한 것으로 보이는데, 가장 인정 받지 못하는 장르인 정물화로 그가 ‘개종’에 가까운 파격적인 방향 전환을 한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의 세대에 파리 화단에는 아카데미의 교육을 받고 배출된 재능 있는 화가들이 많았고,

몇몇은 일찍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들과 비교할 때 샤르댕의 그림은 평범한 수준이었을 것이라 추측은 되고 있다.

 

즉 로코코 회화 속에서는 인물의 표정, 동작, 옷자락과 대기 등 모든 것이 끊임 없는 ‘움직임’ 속에 있었는데,

샤르댕은 움직이는 것을 그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화가는 모든 것을 자기 머리 속에서 찾아 구상을 해야 한다’는 아카데미적 역사화의 대의 역시 그의 기질과 맞지 않았다.

결국 그는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이젤 앞에 놓아두고, 머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정물화라는 정반대의 길을 통해 자기 자리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가오리] 1725~1726년경
캔버스에 유채, 114.5×146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작품 보러가기

 

 

정물화로의 개종

샤르댕은 1728년에 [가오리 The Ray]와 [뷔페 The Buffet]를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에 제출하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아카데미는 그를 ‘동물과 과일에 재능 있는 화가’라고 기록했다.

 

두 작품 모두 그의 다른 정물화에 비해 크고 복잡하여, 정물화가로 첫발을 내딛는 샤르댕의 야심을 보여주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아카데미가 소장하고 있다가 대혁명 이후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갔다.

 

특히 [가오리]는 대중에게 공개된 이 오랜 기간 동안 미술계와 문학계의 많은 인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세잔마티스가 이를 베껴 그렸고, 마네와 샤임 수틴도 이 작품을 인용했다.

샤르댕에 대해 특별한 호감을 표했던 드니 디드로마르셀 프루스트 등도 이 작품을 특별히 주목한 글을 남겼다.

 

그림 중앙에 매달린 가오리는 내장이 쏟아져 내릴 듯한 징그러운 모습뿐 아니라,

사람의 눈과 입을 닮은 윗부분이 섬뜩한 느낌을 주며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그 아래 선반 오른쪽에는 주방 용품인 거품 걷어내는 국자, 유약 입힌 도기 주전자, 냄비, 칼 등이 있고 왼쪽에는 음식 재료가 될 굴, 잉어, 파 등이 있다.

그림 안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모델인 고양이의 바짝 긴장한 모습은 가오리와 함께 이 정물화에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빛이 균일하지 않게 들어오는 갈색조의 벽, 화면과 평행하게 돌출된 돌 선반은 샤르댕이 그의 정물의 무대로 자주 선택한 것이다.

그 위에 요리와 식사의 재료와 도구를 늘어놓고, 부드럽고 섬세한 조명 속에 대상의 질감을 실감나게 살린 것 역시 그의 정물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 구성은 [단식 기간의 식사 The Fast-Day Meal], [주석을 댄 구리 냄비, 후추통, 부추, 달걀 세개와 찜냄비 Tinned Copper Pot, Pepper Box, Leek, Three Eggs and a Casserole] 등과 같은 원숙기 수작들에 비해 번잡하고 혼란스러운 느낌을 준다.

 

 

사물의 감정을 그리다

이미지 목록

[단식 기간의 식사] 1731년
구리판에 유채, 33×41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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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을 댄 구리 냄비, 후추통, 부추, 달걀 세개와 찜냄비] 1734~1735년경 패널에 유채, 17×21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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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들을 비롯한 그의 부엌 정물화는 너무도 소박하고 단순해 보인다.

 그 그림 안에는 한눈에 봐서 알 수 없는 것이 없다.

매일의 요리와 식사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 대부분 작은 화면에 적은 숫자로 그려져 있다.

 

정물화가 탄생하고 그 안에 세분화된 주제별 전문가가 활약했던 17세기 네덜란드의 작품과 비교하면 그의 정물화가 가진 성격이 더 명확해진다.

 그의 정물화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 같은 화려하고 사치스런 장관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네덜란드 작품들과 달리 도상학적으로 분석이 되지도 않아 생명의 무상함(vanitas), 필멸성(memento mori), 오감, 사계절 등에 대한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볼 수도 없다.

 

모를 것도 없고 특별한 뜻도 없는 그의 정물화가 신비로운 것은, 평소에 눈길도 제대로 주지 않았던 평범한 것들이, 기품과 위엄을 갖춘 아름다운 대상으로 보인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이루어 낸 구성과 색채, 형태의 정밀한 조화의 결과이다.

 

그는 대상에 대한 기존의 지식, 다른 작가가 그 대상을 그린 방식을 잊고, 작품을 제작할 때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최대한 정확하게 그리려 했다고 한다.

대상의 정확한 색과 질감, 빛과 그림자의 성질을 파악하고 이를 표현하기 위한 장시간에 걸친 성실한 노력의 결과, 자연에 충실하면서도(truthful) 격조 있는 아름다움을 가진(tasteful)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마티스는 샤르댕이 ‘사물의 감정을 그릴 줄 아는 화가’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의 정물화는 관람자들로 하여금 그림 앞에서 숨을 죽이고, 그려진 물건들의 감정을 헤아리고 느껴보는 몽상에 잠기게 하는 힘이 있다.

 

 

밀도 있고 풍요로운 화면 질감의 비밀

이미지 목록

[벽에 매달린 청둥오리와 세비야] 1728~1730년경
캔버스에 유채, 80.5×64.5cm, 사냥과 자연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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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화약통과 사냥 가방] 1728~1730년경
캔버스에 유채, 98×76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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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댕이 부엌 정물 외에 많이 그린 것은, 잡아놓은 동물들을 주제로 한 사냥 정물화(Game Still Life)다.

 

이 주제 역시 17세기 네덜란드에 기원을 두고 있고, 프랑스에서는 우드리(Oudry)가 이 분야의 전문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샤르댕이 그린 [벽에 매달린 청둥오리와 세비야 오렌지 A Mallard Drake Hanging on a Wall and a Seville Orange]에서 볼 수 있는 한쪽 발을 묶어 벽에 매달아 놓은 새의 자세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과 우드리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형식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과 비교하면 다른 사냥 정물화들은 지나치게 매끄럽고 객관화되어 차가운 느낌을 준다.

샤르댕은 새로운 주제나 형식을 창안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그려 새로운 종류의 그림을 만들어낸 것이다.

 

샤르댕은 대상의 숫자를 줄여 화면을 단순화하면서 이를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핵심, 순수한 진실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화면에는 구성과 색채, 빛과 어둠의 묘사를 통해 리듬감과 균형감이 담기게 했다.

그는 기존의 지식이나 다른 화가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동물의 털이나 새의 깃털을 하나하나 그리지 않고, 물감을 거듭해서 쌓고 붓질에 붓질을 더해 전체적인 덩어리의 사실감을 만들어냈다.

 

어떤 화가의 그림과도 다른 샤르댕 그림의 질감은 그가 독학으로 개발한 것이다.

 

여러 물감층이 쌓이고 그 한겹한겹의 색채가 스며 나와서 만들어지는 밀도 있고 풍요로운 질감(rich impasto)은, ‘수증기가 그림 위에 떠다니거나, 그림에 빛이 뿌려져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이것은 당시의 관람자들에게 마술과 같이 보였다.

샤르댕은 그 마술의 비법을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디드로의 말에 따르면, 그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본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오랜 시간에 걸쳐, 어렵게 그림을 그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샤르댕은 분명 빠른 붓질 몇 번으로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천재 화가는 아니었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샤르댕은 이를 극복하고자 성실하고 정직하게 노력했고,

여러 번에 걸쳐 쉽지 않게 움직인 그의 붓은 이런 노력의 흔적이었다. 그의 약점이 개성을 만든 것이다.

 

 

진지하고 정숙한 가정의 일상

[시장에서 돌아옴] 1739년
캔버스에 유채, 47×38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작품 보러가기

 

 

 

 

1733년부터 샤르댕은 인물이 포함된 그림, 즉 장르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출신이 아닌데다 낮은 서열의 그림인 정물화만을 그리는 것으로는 예술가로서의 위치뿐 아니라 경제적인 안정도 보장받기 어려웠던 것이 새로운 시도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1739년 살롱에 출품한 [시장에서 돌아옴 The Return from Market]처럼 하인이나 하녀가 있는 부엌의 내부를 그린 작품들은 그의 부엌 정물화의 자연스런 연장으로 보인다.

이 그림에서도 하녀의 앞에 있는 포도주병과 접시들, 그녀 옆의 도기 그릇, 화면 왼쪽 문 너머로 보이는 구리 물통은 그가 정물화에서 자주 그렸던 것들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음식 재료를 사들고 부엌에 들어와 물건을 내려놓는 중이다.

이런 일은 그림으로 그려지기에는 너무도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사로 보인다.

 

샤르댕은 그가 정물에서 컵이나 파에 정숙한 위엄을 부여했던 것처럼, 이런 흔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에도 장중한 힘과 아름다움을 담았다.

그림 자체는 작지만 화면을 당당히 장악하고 있는 인물은 주목의 가치가 있는 규모를 느끼게 한다.

주인공이 입은 옷의 흰 빛깔은 가장 밝은 빛을 받아 빛나고, 흰색과 함께 샤르댕이 즐겨 쓴 바랜 듯한 옅은 파란색은 그녀의 스카프, 앞치마, 왼쪽 후경 문가에 서 있는 여성의 머리 리본, 그녀 위로 보이는 삼각형 하늘에 사용되어 아름다운 색채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샤르댕의 작품은 똑같거나 비슷한 것이 여러 점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모두 화가의 손에 의해 이뤄진 경우도 있고, 다른 사람이 모방한 경우도 있다.

 

이 작품의 경우는 화가 자신이 똑같은 그림을 4점 만들었고, 현재 3점이 베를린, 오타와, 파리에 남아 있다.

(베를린과 오타와에 있는 작품은 1738년으로 서명되어 있고,

루브르 작품은 173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살롱에 출품했던 것은 오타와의 캐나다 국립 미술관 버전이다.)

 

이렇게 여러 점을 직접 그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장르화가 시장에서 인기를 얻은 것은 사실이다.

 스웨덴의 왕녀, 리히텐슈타인의 왕자 등 유럽 각지의 부유한 귀족이 그의 장르화 고객이 되었다.

 

 

 

[식사 기도] 1740년
캔버스에 유채, 49.5×38.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작품 보러가기

 

 

 

샤르댕의 장르화는 동판화로도 제작되어 유화를 살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팔려나갔다.

레피시에(Bernard Lépicié)와 같은 일급 판화가가 이에 참여했으나,

그보다 수준이 낮은 판화가가 불법적으로 만들어 유통시킨 작품도 많았다.

 

이런 판화들에는 도덕적, 교훈적 설명이 덧붙기도 했는데, 그림과 상관 없는 엉뚱한 글들도 많았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그뢰즈(Jean-Baptiste Greuze) 등이 그린 교훈적 장르화들이 유행했는데,

판화가들은 샤르댕의 그림도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샤르댕의 정물화가 알레고리적 의미를 갖지 않는 것처럼,

그의 장르화는 이야기, 드라마, 교훈이 최소화되어 있거나 아예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장르화 중 일화적이고 교훈적인 의미가 상대적으로 가장 많이 보이는 작품은 [식사 기도 Saying Grace]이다. 이 작품은 샤르댕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인 그림이기도 하다.

 

식탁 둘레에 모인 어머니와 두 딸이 주인공이다. 어

린 딸은 식사 기도를 하는 중이고, 큰 딸은 음식을 바라보며 기도가 끝나길 기다리고,

어머니는 작은 아이를 주의 깊게 보며 상을 차리고 있다.

식탁보와 인물들의 흰 의상을 빛내는 햇빛이 이 사소한 일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다.

 

 

1740년 살롱에 출품되었던 이 작품을 화가는 루이 15세에게 헌정했다.

 

살롱 전시 때에 별 반응이 없었고, 왕실 소장품이 된 후에도 거의 잊혀졌던 이 그림은,

19세기에 샤르댕이 재발견되면서 각별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즉 타락하고 방탕한 귀족과 대비되는 부르주아 계급의 근면과 절제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해석되고,

이탈리아나 네덜란드와 구별되는 프랑스 회화 자체의 상징으로까지 추앙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의 정물화, 특히 덜 일화적이고 덜 감상적이며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들이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그림도 작가가 1744년에 한 점을 더 만들었고 그것이 현재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있다.

 에르미타주 판에는 전경 오른쪽 바닥에 달걀 담긴 냄비가 추가되어 있다.)

 

 

아름다운 몰입의 순간

[소년과 팽이] 1738년
캔버스에 유채, 67×76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작품 보러가기

 

 

샤르댕은 남자보다는 여자, 그보다는 아이를 더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 속 어른들은 거의 가정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하고 있고, 아이들은 거의 모두 놀고 있다.

샤르댕은 아이의 놀이 역시 어른의 일처럼 진지하고 엄숙하게 다루고 있다.

 

그의 그림 속 아이들은 비누 방울을 불거나, 카드를 쌓아 올려 집을 만들거나,

[소년과 팽이 Child with a Top]에서처럼 팽이를 돌리고 있다.

이런 놀이는 짧고 금방 지나가 버리는 어린 시절처럼 덧없는 일이다.

아이는 곧 자라나고, 비누방울은 터지고, 카드로 만든 집은 무너지고, 팽이는 넘어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그림들을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상징, 그런 허망한 일에 젊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해석할 여지는 충분히 있으나, 그림에서 더 강력하고 매혹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이런 짧은 생명을 가진 것들의 아름다움이다.

 

[소년과 팽이]에서 책과 펜을 옆으로 치워놓고 돌아가는 팽이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아이는, 다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보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

그의 장르화의 인물은 크게 웃거나 떠들지 않는다.

보는 사람의 눈을 의식해 연극을 닮은 과장된 동작을 하지도 않는다.

모두 진지하고 조용하게 자기 생각에 잠겨,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샤르댕의 정교하고 아름답게 구축된 물감은, 이 순수하고 정직하고 고요하고 질서 있는 세계의 평화로운 조화 속으로 관람자를 끌어들여, 관람자가 그림의 주인공과 함께 명상을 하게 만든다.

 

샤르댕은 1731년에 결혼해서 같은 해에 아들 장-피에르(Jean-Pierre)를 얻었다.

아내는 1735년에 죽었고, 아들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역사화가가 되었다.

그 아들은 1754년에 아카데미의 로마상을 수상하여 장학금을 받고 이탈리아로 갔다.

 

그는 1757년에 친모의 유산 문제로 샤르댕과 다툼을 벌이고,

1762년에는 제노바 해안에서 영국 해적에게 납치되기도 했다가,

1772년에 베네치아의 운하에 빠져 죽었는데 자살로 추정된다.

장-피에르의 작품은 현재 전해지는 것이 없다.

 

샤르댕은 1744년에 부유한 미망인과 재혼을 했다.

두 번의 결혼에서 딸이 하나씩 태어났으나 모두 어려서 죽었다.

 

1755년에 샤르댕은 아카데미의 재무 담당으로 선출되어, 특유의 정직과 성실로 이 일을 1774년까지 수행했다.

그는 아주 충실한 아카데미 회원이었다.

아카데미의 교육 방법에는 비판적이었으나 기본적으로 그는 제도를 신뢰했고 기관이 회원에게 주는 위치와 기회에도 만족했다.

 

 

다시 정물화, 명암과 공기의 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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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오슈] 1763년
캔버스에 유채, 47×56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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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술잔] 1768년경
캔버스에 유채, 33×41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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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년부터 샤르댕은 다시 정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에 신고전주의와 관련된 새 흐름이 생겨나 그의 장르화가 비판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 이를 포기하게 한 이유 중 하나로 추측되고 있다.

안 그래도 오랜 시간 동안 힘들게 작업하는 샤르댕에게 장르화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여 힘에 부쳤을 수도 있다.

재혼과 그림 판매 등으로 생긴 경제적인 여유 또한 이런 전환에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1750년대 이후에 그려진 정물화에는 이전 정물화보다 값비싼 살림살이들이 현저하게 많이 등장한다.

 

초기부터 샤르댕은 자신이 쓰고 있는 물건들을 그림의 모델로 삼았다.

그가 그린 그릇들은 그림이 그려진 50여년의 시간 동안의 유행을 반영한다.

포도주병 같은 경우는 배가 불룩한 모양이었다가 점차 원통형에 가까워지는 것을 그림을 보고 알 수 있을 정도다.

 

[식사 기도]에 등장하는 흰색 접시와 같은 주석 유약이 입혀진 연질 자기는 프랑스 샹티이(Chantilly)에서 만든 것이고, 가끔 등장하는 중국 자기는 청나라에서 수출용으로 만든 것이다.

[브리오슈 The Brioche] 왼쪽에 보이는 수프 그릇은 독일의 마이센(Meissen) 자기이다.

이밖에도 일본의 이마리(Imari) 자기 패턴을 모방한 프랑스 자기 컵 등이 그의 작품에 등장한다.

이렇게 아무 뜻이 없이 그려진 듯한 그의 그릇들이 18세기 유럽의 취향 변화, 유행, 산업의 발달을 보여주며,

 사라져 버린 생활 양식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려진 대상의 가격이나 품질이 높아진 것 외에, 후기 정물화는 보다 세련된 붓질과 섬세한 명암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그는 특유의 임파스토와 인상적인 명암법 때문에 렘브란트와 자주 비교되곤 했는데, 실제로 두 화가 작품의 화면 질감이나 명암법은 차이가 많다.

 최근에는 그의 명암법이 16세기 베네치아 화가 베로네세와 연관된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브리오슈]에는 이국적 과일과 진귀한 물건들이 등장한다.

앞서 말한 마이센 수프 그릇(tureen)뿐 아니라 금도금한 장식이 있는 보헤미아 스타일의 프랑스 로랭(Lorraine)산 유리 술병(liquer decanter), 흰 꽃망울이 매달린 오렌지 가지, 디저트로 먹는 브리오슈라는 빵 등이 서로 다른 질감을 보여주고 있다.

[은 술잔 The Silver Goblet]에는 재질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함께 다양한 빛에 대한 화가의 관심과 이의 효과적인 처리를 볼 수 있다.

 그림에는 직접 들어오는 빛, 반사된 빛, 다른 물질을 투과한 빛 등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물건들을 둘러싼 빈 공간을 채운 공기와 수증기도 그림의 주요 주제가 되고 있다.

 

 

파스텔 초상화, 많이 본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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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775년
종이에 파스텔, 46×38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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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댕 부인의 초상] 1775년
종이에 파스텔, 46×38.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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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대 들어 샤르댕의 눈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납이 포함된 안료를 사용했던 18세기 유화가 눈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모두 그가 그림을 포기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파스텔화에 도전하여 1771년 살롱부터 파스텔 초상화를 출품하기 시작했다.

18세기 프랑스 미술계에는 모리스-켕탱 드 라 투르(Maurice-Quentin de La Tour) 등 훌륭한 파스텔 화가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모두 초상화를 그렸다.

샤르댕이 파스텔로 초상화를 그린 데는, 같은 주제로 이들과 능력을 겨뤄보고자 했던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디드로는 샤르댕의 파스텔 초상화가 그의 유화처럼 ‘대담하고 확신에 차고 마술적’인 걸작이라고 칭송했다.

파스텔 자화상에서 샤르댕은 까다롭고 특이한, 약간 웃기는 할머니 같아 보이는 나이트캡과 리본, 햇빛 가리개, 안경을 착용한 모습이다.

 

프루스트는 이 자화상의 ‘안경 너머 흐린 눈은 많이 보고, 많이 웃고, 많이 사랑해 본 눈’이라고 했다.

화가는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안다.

그의 옷은 낡았고 피부는 늙었다. 공쿠르 형제는 [샤르댕 부인의 초상] 얼굴 피부가 ‘겨울을 지낸 과일’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노년의 이러한 특징을 화가는 모방할 수 없는 기술로, 대담하고 자유롭게 그려내 색채주의자의 역작을 만들었다고 칭찬했다.

이 두 초상에서 색채 다발로 표현된 다양한 빛의 묘사는 아름답고, 모델이 보여주는 소박한 솔직함은 감동적이다.

 

샤르댕은 1779년에 만 여든의 나이로 루브르의 거처에서 사망했다.

생전에 존경과 인기를 누렸으나 사망 직후 신고전주의가 득세하는 분위기에서는 거의 잊혀진 작가가 되었다.

 

그러다 1840년대에 사실주의 비평가 샹플뢰리, 테오필 토레 등에 의해 그의 명성이 부활되었다.

 

토레는 그를 그 시대를 지배한 로코코라는 가식적이고 장식적인 양식을 따르지 않은 사실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로 평가했다.

1850년대 이후 루브르가 그의 작품들을 많이 구입하면서 그의 명성은 공고해졌고, 1860년대에는 공쿠르 형제가 그의 작품에 대한 학술적 논문을 출판했다.

 

19세기에 정물화를 그린 쿠르베, 마네, 모네, 세잔의 밑바탕에는 샤르댕의 작품이 있었다.

그의 작품은 자연 관찰에 기반한 미술을 좋아하는 사실주의자들뿐 아니라 형식적인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호소력이 있었다.

 

샤르댕은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작품에는 18세기 미술이 가진 많은 것이 없었다.

 

도덕적 교훈주의, 관능적인 유혹,

 로코코의 낭만적인 환상, 웃음과 소리,

내러티브와 이념,

상징과 알레고리, 화

려한 기교를 과시하는 스펙타클 등이 샤르댕 그림에는 없다.

 

 

대신 그는 순진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소박하고 진지하게 눈에 보이는 것에 충실했다.

이것은 화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술을 둘러싼 제도에 대한 파괴를 시작한 것이었고,

그의 시대를 벗어나 근대의 문을 연 행위였다.

 

1979년에 화가의 서거 2백주년을 맞아 파리, 보스톤, 클리블랜드를 순회하면 열린 전시에서 그의 전기적 사항들이 많이 정리되었다.

탄생 3백주년을 맞는 1999년에 준비되어 2000년까지 파리, 뒤셀도르프, 런던, 뉴욕에서 열린 전시에도 새로운 연구와 발견이 반영되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51&contents_id=3997

 

 

 

 

 

 

샤르댕 (Jean-Baptiste-Siméon Chardin)

 

출생일시 1699. 11. 2, 파리

사망일시 1779. 12. 6, 파리

 

 

친밀하고 사실적인 표현과 조용한 분위기, 밝은 채색을 특징으로 하는 정물화와 실내풍경화로 유명하다.

그는 보잘것없는 사물들을 주제로 정물화를 그렸으며, 풍속화의 주제로 평범한 일상사를 선택했다.

그는 또한 몇 점의 뛰어난 초상화도 그렸는데, 특히 말년의 파스텔화는 매우 훌륭하다.

172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샤르댕은 파리에서 태어나 실제로 그가 태어난 지구인 생제르멩데프레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미술가인 피에르 자크 카즈와 노엘 니콜라 쿠아펠 밑에서 잠시 일했지만, 그가 받은 미술 교육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724년 그는 독립 화가로서 '생 뤽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1728년 궁정화가인 니콜라 드 라르질리에르(1656~1746)의 도움으로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그 아카데미에 〈가오리〉와 〈찬장〉을 출품했는데, 이 두 작품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1740년 루이 15세를 알현할 무렵 샤르댕의 명성은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그가 백과전서파의 한 사람이자 철학자인 드니 디드로와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는데, 디드로는 그가 그토록 감탄한 '위대한 마술사' 샤르댕에게 기꺼이 최대의 찬사를 보내는 미술 비평을 쓰기도 했다.

 

친밀하고 사실적인 표현과 조용한 분위기, 밝은 채색을 특징으로 하는 정물화와 실내풍경화로 유명하다.

 

그는 보잘것없는 사물들을 주제로 정물화(예를 들면 〈찬장 Le Buffet〉, 1728)를 그렸으며, 풍속화의 주제로 평범한 일상사를 선택했다(예를 들면 〈편지를 봉하고 있는 부인 Dame cachetant une lettre〉, 1733). 그는 또한 몇 점의 뛰어난 초상화도 그렸는데, 특히 말년의 파스텔화는 매우 훌륭하다. 172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샤르댕은 아직 기반을 잡지는 못했지만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1731년 마르게리트 생타르와 혼인했다.

2년 뒤 최초의 인물화인 〈편지를 봉하고 있는 부인〉을 발표했으며, 그때부터 샤르댕은 정물화나 〈식사 전의 기도 Le Bénédicité〉와 같은 가정생활을 다룬 실내화와 〈젊은 화가 Le Jeune dessinateur〉·〈팽이를 들고 있는 아이 L'Enfant au toton〉(루브르 박물관)와 같이 일이나 놀이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 남녀를 다룬 반인물화를 번갈아 그렸다.

 

그는 같은 주제를 자주 되풀이해서 그렸으며, 같은 유형의 작품들을 여러 점 남겼다.

1735년 그의 아내가 죽은 뒤 작성된 재산목록은 그들이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무렵에는 이미 샤르댕이 화가로서 유명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40년 그는 루이 15세를 알현하고 그에게 〈일하는 어머니 La Mère laborieuse〉·〈식사 전의 기도〉를 바쳤는데, 이 두 작품은 현재 모두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4년 뒤 그는 마르게리트 푸제와 재혼했으며 그로부터 30년 뒤에 그녀를 모델로 하여 지금 루브르 박물관의 소묘 전시관에 걸려 있는 파스텔화를 그려 그녀에게 불후의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이 무렵에 샤르댕의 명성은 절정에 이르러 있었는데, 루이 15세는 현재 뉴욕의 프릭 컬렉션에 들어 있는 그림일 것으로 생각되는 〈새오르간 La Serinette〉을 받고 1,500리브르를 지불했다.

 

샤르댕은 아카데미의 전통적인 경로를 따라 계속 꾸준히 승진했다.

아카데미의 동료들은 살롱전(아카데미의 공식 전람회)에서 그림을 전시하는 일을 처음에는(1755) 비공식으로, 뒤에는(1761) 공식으로 그에게 맡겼는데, 살롱전은 1737년 이래로 2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려 왔으며 샤르댕도 성실하게 참가해왔다.

 

그가 백과전서파의 한 사람이자 철학자인 드니 디드로와 만난 것은 바로 공직에 있을 때였는데, 디드로는 그가 그토록 감탄한 '위대한 마술사' 샤르댕에게 기꺼이 최대의 찬사를 보내는 미술 비평을 쓰기도 했다.

 

샤르댕의 가장 친한 친구들 중 한 사람인 판화가 샤를 니콜라 코슈앵은, 뒤에 샤르댕이 회원으로 있었던 '루앙 아카데미'에 그를 찬양하는 글을 보낸 엘레 드 쿠론에게 샤르댕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낸 편지에서, 샤르댕의 천재성과 18세기의 유럽 회화에서 샤르댕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를 예증하는 일화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느 날 어떤 미술가가 색을 순화하여 완전하게 만들기 위하여 자신이 어떤 방법을 쓰는지 장황하게 떠벌리고 있었죠,

 

샤르댕 씨는 그토록 무익한 잡담에 참지 못하고 그 미술가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그런데, 누가 당신에게 색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했소?'

깜짝 놀란 그 미술가는 물었죠.

'그러면 무엇으로 그린단 말입니까?'

그러자 샤르댕은

'물론 색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림이란 느낌으로 그리는 것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그림들은 당대의 많은 화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가볍고 피상적인 화려함보다는 17세기의 프랑스 대가인 루이 르 냉의 꾸밈 없는 장면을 생동감 넘치게 하는 조용한 명상의 느낌을 더 자아낸다.

 

그가 정성들여 그린 정물화는 식욕을 돋우는 것보다는 사물 자체 및 빛의 처리에 더 관심을 모은다.

풍속화에서 그는 예전의 화가들처럼 농민들을 모델로 하지 않고 파리의 소시민을 그렸다.

그들을 묘사한 그의 화풍은 훨씬 부드러우며, 그의 모델들은 르 냉이 그린 엄격한 농민들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샤르댕의 그림에 나오는 가정주부들은 수수하지만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있으며, 그들이 사는 집에서도 그와 똑같은 청결함을 볼 수 있다.

가정생활을 다룬 이 소규모의 그림들이 갖고 있는 매력은 화면 곳곳에 스며 있는 일종의 친밀감과 다정한 느낌인데, 이러한 느낌과 구성은 얀 베르메르의 작품에서도 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샤르댕은 초기와 중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말기에는 사생활과 활동이 모두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외아들 피에르 장은 1754년에 아카데미의 그랑프리(로마에 가서 미술을 공부할 수 있는 상)를 받았지만 1767년에 베네치아에서 자살했다. 게다가 아들이 자살할 무렵에는 대중의 기호도 바뀌었다.

 

아카데미의 새 회장이 되어 모든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장 바티스트 마리 피에르는 역사화를 다시 가장 고귀한 회화 장르로 만들기를 열망하여 샤르댕의 연금을 줄이고 아카데미에서 샤르댕이 맡고 있던 직무를 하나씩 회수함으로써 이 노장에게 굴욕을 주었다.

 

더욱이 샤르댕의 시력은 점점 나빠졌다.

그는 파스텔화를 시험삼아 그려보았다.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수단이 되었으며 눈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현재 대부분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그 파스텔화들은 20세기에 들어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샤르댕 자신의 시대에는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사실 그는 남은 생애를 사람들에게 거의 잊혀진 채로 살았으며 그의 작품은 냉대를 받았다.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에드몽 드 공쿠르와 쥘 드 공쿠르 형제 등의 몇몇 프랑스 비평가들과 수집가들(예를 들면 수집한 샤르댕의 작품들을 훗날 아미앵의 피카르디 박물관에 기증한 라발라르 형제)이 그를 다시 높이 평가했다.

 

특히 1869년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된 라카즈 컬렉션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샤르댕은 18세기의 가장 뛰어난 정물화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세계의 유명한 미술관과 컬렉션들은 대부분 그의 그림들을 탐내고 있다.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은 18세기 프랑스 미술의 세련미와 매력, 우아함을 두루 갖춘 양식을 개발한 미술가였지만 기법과 주제에서는 당대의 화가들과 달랐었는데, 그의 기법은 전통적인 아카데미 교육에 영향을 받지 않은 독학 예술가의 그것이었으며 그의 주제는 주로 정물과 가정생활을 다룬 것이었다.

 

그는 일상 세계를 발견하여 지칠 줄 모르고 무척 단순하게 그것을 묘사했지만, 그 단순함에는 그의 날카로운 관찰력이 숨어 있었다.

 

겉보기에 그는 요란한 허식이나 일화, 불필요한 기술적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범한 현실에 생기를 불어넣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샤르댕은 진실한 표현을 통해 절제와 고요함을 특징으로 하는 건강하고 꾸밈 없는 시적 감흥을 얻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1s3093a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Jean Baptiste Simeon Chardin

 

 

French Rococo artist
born 1699 - died 1779

 

일상과 정물에 깃든 생명력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18세기 프랑스는 두 얼굴을 지닌다.

화려한 대저택에서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잔잔한 일상에 묻혀 사는 서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화가들은 귀족들의 사치와 풍요로움을 화폭에 담아 내는데 주력했다. 샤르댕은 18세기 로코코 양식의 화가이면서도 소재 면에서 다른 화가들과 엄격히 다른 세계를 추구했다. 귀족들의 호사스러움에 휩쓸려 다녔던 당대의 화가들과 달리 그는 시민계급을 대표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평범함을 모티브로 한다.

 

샤르댕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일상성은 곧 그의 삶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아카데미 출신의 화가가 아닌, 직공의 아들이라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당시 시민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체험했고, 이를 통해 로코코의 화려함보다는 풍속화와 정물화로 자연스럽게 화풍의 변화를 가져갔다.


당시 제 3계급으로 치부 당했던 시민들의 모습은 엄격한 교육과 합리적인 생활, 검소한 생활 등으로 요약된다. 샤르댕은 이들의 삶을 자신의 화폭 위에 재현해 냈다.36살이 되던 해 샤르댕은 부인을 잃고 그 후 10년 뒤에 재혼을 했다. 재혼을 하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 샤르댕은 두 아이를 혼자 양육해야 했다. 따라서 그는 일상의 생활에 더욱 깊은 성찰을 느낄 수 있었다.

 

 

 

 

 

 

[자수 놓는 여인] 1735~1736년, 패널에 유채, 18 x 15 cm,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빨래하는 여인] 1730년대, 캔버스에 유채, 38 x 43 cm,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쥬

 

 

 

 

 

 

 

[물탱크 앞의 여인] 1733년, 목판에 유채, 38 x 43 cm,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The Draughtsman] 1737년, 목판에 유채, 81 x 64 cm, Staatliche Museen, Berlin, Germany

 

 

 

 

 

 

 

[카드의 집] 1736~1737년, 캔버스에 유채, 60 x 72 cm, 런던 국립미술관

 

 

 

 

 

 

 

[팽이를 돌리는 소년 (Auguste Gabriel Godefroy)] 1738년, 캔버스에 유채, 67 x 76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차 마시는 여인] 1735년, 캔버스에 유채, 80 x 101 cm, Hunterian Art Gallery, Glasgow, Scotland

 

 

 

 

 

 

 

[Portrait of Joseph Aved] 1734년, 캔버스에 유채, 138 x 105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편지를 봉하는 여인] 1733년, 캔버스에 유채, 146 x 147 cm, 샤를로텐부르크 성, 베를린

 

 

 

 

 

 

 

[바이올린을 든 남자 (Charles Godefroy)] 1734~1735년, 캔버스에 유채, 67 x 74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젊은 화가] 1733~1735년, 패널에 유채, 20 x 18 cm, Statens Kunstmuseer, Stockholm

 

 

 

 

 

  

 

[당구게임] 1723년, 캔버스에 유채, 55 x 82.5 cm, Carnavalet, Paris, France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 11. 2 파리~1779. 12. 6 파리.

 

친밀하고 사실적인 표현과 조용한 분위기, 밝은 채색을 특징으로 하는 정물화와 실내풍경화로 유명하다. 그는 보잘것없는 사물들을 주제로 정물화(예를 들면 〈찬장 Le Buffet〉, 1728)를 그렸으며, 풍속화의 주제로 평범한 일상사를 선택했다(예를 들면 〈편지를 봉하고 있는 부인 Dame cachetant une lettre〉, 1733). 그는 또한 몇 점의 뛰어난 초상화도 그렸는데, 특히 말년의 파스텔화는 매우 훌륭하다. 172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샤르댕은 파리에서 태어나 실제로 그가 태어난 지구인 생제르멩데프레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미술가인 피에르 자크 카즈와 노엘 니콜라 쿠아펠 밑에서 잠시 일했지만, 그가 받은 미술 교육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724년 그는 독립 화가로서 '생 뤽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그러나 1728년 궁정화가인 니콜라 드 라르질리에르(1656~1746)의 도움으로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그 아카데미에 〈가오리 La Raie〉와 〈찬장〉을 출품했는데, 이 두 작품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샤르댕은 아직 기반을 잡지는 못했지만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1731년 마르게리트 생타르와 혼인했다. 2년 뒤 최초의 인물화인 〈편지를 봉하고 있는 부인〉을 발표했으며, 그때부터 샤르댕은 정물화나 〈식사 전의 기도 Le Bénédicité〉와 같은 가정생활을 다룬 실내화와 〈젊은 화가 Le Jeune dessinateur〉·〈팽이를 들고 있는 아이 L'Enfant au toton〉(루브르 박물관)와 같이 일이나 놀이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 남녀를 다룬 반인물화를 번갈아 그렸다. 그는 같은 주제를 자주 되풀이해서 그렸으며, 같은 유형의 작품들을 여러 점 남겼다. 1735년 그의 아내가 죽은 뒤 작성된 재산목록은 그들이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무렵에는 이미 샤르댕이 화가로서 유명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사전의 기도] 1740년, 캔버스에 유채, 49 x 41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식사 전 기도〉는 그의 대표적 풍속화로 같은 해에 제작되었던 또 다른 작품 〈부지런한 엄마〉의 구성을 따른 것이다. 〈식사 전 기도〉와 함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부지런한 엄마〉는 샤르댕에게 매우 의미 있는 그림이었다. 샤르댕은 루이 15세를 비롯한 귀족들의 후원을 받은 화가였다. 처음 그를 루이 15세에게 소개한 사람은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필리베르 오리(Philibert Orry 1689~1747)였고, 왕과 화가가 처음 만나던 날 가져갔던 그림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식사전의 기도_세묘]

 

샤르댕이 〈식사 전 기도〉를 유화로 완성하기 전에 제작한 스케치는 완성작과 구성이 다르다. 〈식사 전 기도〉의 스케치는 엄마와 아이가 마주하고 있는 〈부지런한 엄마〉와 매우 흡사한 구성이다. 앉아 있는 엄마와 작은 아이가 주축을 이루는 스케치에서는 언니의 위치 또한 동생의 뒤편이었다. 그가 이러한 구성을 바꾼 것은 그림이 완성되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그가 구성을 바꾼 것은 〈식사 전 기도〉가 〈부지런한 엄마〉와는 또 다른 명작으로 남길 바랬던 그의 소망 때문이었다. 이렇게 각각의 작품은 서로 다른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샤르댕 작업의 기본 공식에 모두 충실한 것이기도 했다.

 

 

 

 

 

[부지런한 엄마] 1740년, 캔버스에 유채, 49 x 39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위대한 마법’, 어느 비평가의 표현대로 이 두 작품은 샤르댕 예술 특유의 표정을 만든다. 식탁보의 청결함이 만져질 듯 하고, 식기의 부딪힘이 들릴 듯 하고, 음식의 온기가 전해질 듯한 신비로운 사실성이다. 이 모든 경이로움은 부드러운 색과 온화한 빛에서 비롯된 것이다. 샤르댕의 예술은 밝음과 어둠만으로 긴 여운의 꼬리를 만든다는 점에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스텐(Jan Steen 1626~1679)의 그것과 닮아 있다. 두터운 붓질과 가느다란 빛이면 충분했고, 과묵한 어둠과 순결한 밝음이면 족했다. 그의 예술이 너무 많은 기교, 너무 많은 재주를 필요로 하지 않은 까닭은 말이다. 인간적이고, 친밀하며, 정직한 아름다움을 별 다를 바 없는 일상의 풍경에서 건져 올린 그의 예술은 재료의 맛을 존중할 줄 하는 요리사의 미덕을 떠올리게 한다.

 

 

 

 

 

 

[시장으로부터의 귀가] 1739년, 캔버스에 유채, 47 x 38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이 그림은 1739년 살롱전에 전시된 것으로 특히, 구성이 돋보인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구리 물통 때문에 소녀가 그림 앞으로 더 바짝 다가와 있는 듯 느껴진다. 생각에 잠긴 소녀는 단조로운 현실의 일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듯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다.

 

 

 

 

 

 

[라켓과 셔틀콕을 든 소녀] 1740년, 캔버스에 유채, 82 x 66 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샤르뎅은 정물화가로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상의 모습들을 화폭에 담는 것에 열중했다. 그는 중산층 가정을 관찰하고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정물처럼 묘사했다. 정돈되고 단순화된 배경 위에 중산층의 상투적인 습관, 몸짓을 통해 인간적인 감정을 담아낸 샤르뎅은 작품이 주제나 크기의 선택에 있어서 17세기 네덜란드 양식에서 영향을 받았다.

샤르뎅의 일상의 담은 작품 중에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셔틀콕을 들고 있는 소녀>다. 이 작품은 살롱전에 출품하여 엄청난 영광을 안겨주었다. 뺨에 홍조를 띤 소녀가 배드민턴 라켓과 셔틀콕을 쥐고 꼼짝하지 않고 서 있다. 부드럽게 퍼져 있는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에서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쓰고 있는 레이스 모자와 밤색의 드레스 위에 입은 하얀 앞치마는 소녀가 하녀라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소녀의 푸른색의 드레스 리본에는 가위와 바늘쌈이 매달려 있어 배드민턴 라켓과 셔틀콕은 운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부드럽게 퍼져 있는 드레스와 나무 의자, 라켓과 소녀는 단순한 녹색의 배경과 대비되면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가위와 셔틀콕 등 세부 묘사가 뛰어나다.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1699~1779>은 가구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공부하지 않았다. 그는 에로틱한 누드화, 정원의 밀회, 귀족들의 침실 등 유혹적인 장면을 표현한 그림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던 18세기 프랑스 화단에 이단자였지만 그렇다고 프랑스 화단에서 소외되지도 않았다.

샤르뎅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작품이 인정을 받으면서 살롱과 아카데미에 중요한 인사가 된다. 샤르뎅의 작품이 유명해지면서 도덕적인 교훈을 담고 있는 문구를 새기는 배경으로 사용되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가정교사] 1739년, 캔버스에 유채, 47 x 38 cm, 캐나다 국립미술관, 오타와

 

 

 

 

 

 

 

[요리사] 1738년, 캔버스에 유채, 46 x 37 cm, 알테 피나코텍, 뮌헨

 

 

 

 

 

 

 

[비눗방울] 1739년경, 캔버스에 유채, 61 x 63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카나리아] 1750~1751년, 캔버스에 유채, 50 x 43 cm, 루브를 박물관, 파리

 

 

 

 

 

 

 

[젊은 여선생] 1736년경, 캔버스에 유채, 61.5 x 66.5 cm, 런던 국립미술관

 

 

 

 

 

 

 

[카드의 집] 1740년, 캔버스에 유채, 82 x 66 cm, 우피치 미술과, 피렌체

 

 

 

 

 

 

 

[챙을 쓴 자화상] 1775년, 파스텔, 46 x 38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이 자화상을 그릴 당시 샤르댕은 이미 76세였다. 샤르댕은 이 작품을 끝내자마자 결혼한지 31년 된 두 번째 아내 마르그리트 푸제의 초상화와 함께 1775년 살롱에 전시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작품은 샤르댕의 삶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인행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자화상이다. 현실세계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묘사했던 샤르댕은 이 자화상에 대해 독특하면서 예기치 못한 해석을 남겼다. 얼핏 보면 이 작품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자화상 정도로 보인다. 커다란 안경을 걸치고 빛을 가리기 위해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으며, 터번처럼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장이다. 마르셀 푸르스트는 이 작품을 보고, 여행 중인 영국 노인처럼 옷을 입은 화가의 모습에서 그의 기이한 독창성을 발견했다.
이 자화상은 파스텔로 그려졌는데 샤르댕은 몇 년 전부터 파스텔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매혹적인 자화상은 위대한 예술가들이란 결코 예측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샤르댕 부인의 초상] 1775년, 파스텔, 46 x 38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자화상] 1771년, 파스텔, 46 x 38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캔버스 앞의 자화상]

 

 

[샤르댕] 전반기 정물화 모음

 

 

 

 

[파이프와 물주전자] 1737년,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파리

 

샤르댕은 1737년 사망한 첫 아내의 유품을 상세히 목록으로 작성했다. 이 목록 가운데 <파이프와 물주전자>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작품은 샤르댕이 부인에게 선물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그림은 정물 일반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정물의 친밀하고 감동적인 시적 성질을 인식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기서 샤르댕은 푸른색과 흰핵의 미묘하고 섬세한 조화를 이루어 내면서 대상들의 윤곽선을 약간씩 흐릿하게 그리고 있다.마치 사물들 위로 기억의 먼지 부드럽게 내려 앉은 것처럼 말이다.

 

 

 

 

 

 

[붉은 가오리] 1728년, 캔버스에 유채, 114 x 146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이 작품은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을 묘사했다. 주방 벽 고리에 가오리가 걸려 있고 요리를 하기 위해 가오리의 배는 갈라져 있다. 가오리 옆에 청동으로 된 큰 냄비가 세워져 있다. 식탁 위에 있는 굴 껍데기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금방 뛰어 나갈 것 같다. 굴 껍데기 위에서 긴장하고 있는 고양이는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동물체다.식탁 위에는 냄비, 토기 항아리, 거품을 뜨는 국자가 보이고 식칼은 식탁 끝에 살짝 걸쳐져 있다. 고양이 옆으로 양념 그릇이 보이고 앞에는 굴과 생선이 놓여 있다.

 

샤르댕은 구리로 만든 부엌 용기에 식품의 그림자를 그려 넣어 조개·천·돌 등의 재질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식탁 위가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그릇은 오른쪽에, 음식은 왼쪽에, 가오리는 중앙에 배치했다. 샤르댕은 실제 요리를 할 수 있는 자신의 부엌을 묘사했지만 그는 부엌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물건들을 재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나타내고자 했다.

 

샤르댕은 이 작품에서 굴 껍데기나 생선·냄비 등 서로 다른 재질을 표현하기 위해 서로 다른 붓을 사용했다. 가오리는 가는 붓으로, 굴은 좀 더 굵은 붓으로 그리는 등 각각의 재질에 따라 붓의 굵기를 선택해 표현했다. 샤르댕의 이 작품은 정물화로서는 큰 편이다.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무명의 화가였던 샤르댕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A Lean Diet with Cooking Utensils] 1731년, 캔버스에 유채, 33 x 41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The Silver Tureen] 1728년경, 캔버스에 유채, 76 x 108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The Silver Cup]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The Fast Day Meal] 1731년, 구리판에 유채, 33 x 41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구리냄비와 달걀이 있는 정물] 1734년, 캔버스에 유채, 17 x 21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The Attributes of Science] 1731년, 캔버스에 유채, 141 x 220 cm, Jaquemart-André, Paris, France

 

 

 

 

 

 

 

[The Copper Drinking Fountain] 1734년경, 목판에 유채, 28,5 x 23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Game Still-Life with Hunting Dog] 1730년경, 캔버스에 유채, 172 x 139 cm, 개인소장

 

 

 

 

 

 

 

[The Buffet] 1728년, 캔버스에 유채, 194 x 129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The Attributes of the Arts with a Bust of Mercury] 1728년경, 캔버스에 유채, 푸슈킨 미술관, 모스크바

 

 

 

 

 

 

 

[유리물병과 과일이 있는 정물] 1728년, 캔버스에 유채, 55 x 46 cm, Staatliche Kunsthalle, Karlsruhe, Germany

 

 

 

 

 

 

 

[Rabbit, Copper Cauldron and Quince] 1735년경, 캔버스에 유채, 69 x 56 cm,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Rabbit with Game-bag and Powder Flask] 1728년, 캔버스에 유채, 81 x 65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Wild Duck with a Seville Oraange] 1728~1730년, 캔버스에 유채, 81 x 65 cm, Chasse et Nature, Paris

 

 

 

 

 

 

 

[The Silver Goblet] 1726~1727년, 캔버스에 유채, 81 x 65 cm, 개인소장

 

 

 

 

 

 

 

[Still Life with Plums] 1730년경, 캔버스에 유채, 45 x 50 cm, Frick Collection, New York, USA

 

 

 

[샤르댕] 후반기 정물화 모음

 

 

 

[Still-Life with Jar of Olives] 1760년경, 캔버스에 유채, 71 x 98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Attributes of Music] 1765년경, 캔버스에 유채, 91 x 145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Still-Life with Two Rabbits] 1750~1755년경, 캔버스에 유채, 50 x 57 cm, Musée de Picardie, Amiens

 

 

 

 

 

 

 

[복숭아 바구니] 1766년경, 캔버스에 유채, 33 x 40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The Butler's Table] 1756년경, 캔버스에 유채, 38 x 46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Still Life with Copper Pan and Pestle and Mortar]  캔버스에 유채, Public collection

 

 

 

 

 

 

 

[포도와 석류가 있는 정물] 1763년경, 캔버스에 유채, 47 x 57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Still Life with Pestle, Bowl, Copper Cauldron, onions and a Knife] 1734~1735년,

캔버스에 유채, 17 x 21 cm, 코냑제이 미술관, 파리

 

 

 

 

 

 

[죽은 꿩과 사냥가방이 있는 정물] 1760년경, 캔버스에 유채, 72 x 58 cm, Staatliche Museen, Berlin, Germany

 

 

 

 

 

 

 

[살구병이 있는 정물] 1758년경, 캔버스에 유채, 57 x 51 cm, Art Gallery of ontario, Toronto, Canada

 

 

 

 

 

 

 

['La Brioche' (Cake)] 1763년경, 캔버스에 유채, 47 x 56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물컵과 주전자] 1760년경, 캔버스에 유채, 32.5 x 41 cm, Museum of Art, Carnegie Institute, Pittsburgh, Pennsylvania, USA

 

 

 

 

 

 

 

[Still Life with a Rib of Beef] 1739년경, 캔버스에 유채, 41 x 34 cm, Allen Memorial Art Museum, Oberlin, Ohio, USA

 

 

 

 

 

 

[Wild Duck with Olive Jar] 1764년, 캔버스에 유채, 153 x 96 cm,

Museum of Fine Arts, Springfield, Massachusetts, USA

 

 

 

 

 

 

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1779)
Self Portrait with an Eye-shade
Pastel on paper, 1775
18 x 14 7/8 inches (46 x 38 cm)
Mus? du Louvre, Paris

 

 

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1779)
The Governess
Oil on canvas, 1739
18 1/2 x 14 1/2 inches (47 x 37 cm)
National Museum, Stockholm

 

 

 

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1779)
The Attentive Nurse
Oil on canvas, c.1738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1779)
The Dressing Table
Oil on canvas, 1741
19 1/4 x 15 1/4 inches (49 x 39 cm)
National Museum, Stockholm

 

 

 

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1779)
The Diligent Mother
Oil on canvas, 1740
19 1/4 x 15 1/4 inches (49 x 39 cm)
Mus? du Louvre, Paris

 

 

 

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1779)
The Scullery Maid
Oil on canvas, 1738
17 5/8 x 14 1/2 inches (45 x 37 cm)
Hunterian Art Gallery, Glasgow

 

 


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1779)
The Prayer before Meal
Oil on canvas, 1744
19 5/8 x 15 1/8 inches (50 x 38.5 cm)
Hermitage, St Petersburg

 

식전의 감사 기도, 유채

 

 이제 막 식사 기도를 드리려는 한 가정의 어머니와 두 딸을 그렸다.

실내의 차분한 빛과 부드러운 색채 속에서 식사에 앞서 식전 기도를 드리려는 조용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세밀하게 그려진 몇 안되는 식기들과 함께 뒷벽의 선반에 놓인 변변치 않은 가재 도구들,

어머니의 수수한 옷차림은 소박한 한 가정의 모습 그대로이다.

어머니와 큰 아이는 아직 어려서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막내를 주시하면서,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그릴 것을 가르치고 있다.                  [글출처] 로코코미술-샤르댕

 


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1779)
Return from the Market 시장에서 돌아온 여인,
Oil on canvas, 1739
Mus? du Louvre, Paris

 

 

시장에서 장을 보고 부엌으로 들어와 장바구니를 정리하려는 여인의 모습을 담담하고 편안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평범한 옷차림을 한 여인의 미소 띤 얼굴, 한 손에는 사기지고 온 물건들이 담긴 보따리가 들려 있고, 다른 손은 책상에 얹은 빵덩어리에 놓여있다.

18세기 프랑스의 일반 시민들이 사는 생활의 한 단면이 유쾌하면서도 밝게 묘사된 이 작품에서 당시의 풍속을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글 출처] 로코코미술-샤르댕

 

 

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1779)
Draughtsman
Oil on canvas, 1737
31 3/8 x 25 1/2 inches (80 x 65 cm)
Mus? du Louvre, Paris

 

 

 

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1779)
The Canary
Oil on canvas, 1750-1751
19 5/8 x 16 7/8 inches (50 x 43 cm)
Mus? du Louvre, Paris

 

 

 

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1779)
The Laundress
Oil on canvas, c.1730-1740
14 7/8 x 16 7/8 inches (38 x 43 cm)
Hermitage, St Petersburg

 

 

 

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1779)
Woman at the Water Cistern
Oil on wood, 1733
14 7/8 x 16 7/8 inches (38 x 43 cm)
National Museum, Stockholm

 

 


Jean-Baptiste-Simeon Chardin (1699-1779)
The Young Schoolmistress
Oil on canvas, c.1736
24 1/8 x 26 1/8 inches (61.5 x 66.5 cm)
National Gallery, London

 

 

 

출처; http://blog.naver.com/yc510/40038963615

 

 

 

 

소박한 멋이 살아있는 샤르댕의 작품을 함께 감상해보실까요?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의 초상화입니다!

 

그림이 남겨져 있는 덕분에  몇 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옛 인물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인 것 같아요  

 

 

 



 

 

 

로코코 양식

18세기 유럽 미술의 큰 흐름이었던 로코코는 왕궁을 중심으로 발달한 화려하고 장식적인 미술사조였습니다!

샤르댕은 이와 다르게  서민들의 삶을 포착해낸 인물이었는데요!

 

 

 

 

 

가구를 만드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그는 서민들의 평범한 삶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당시 프랑스 시민들의 삶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과일이나 부엌용품, 채소 등이 등장하는데요!

당시 그들의 삶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죠! 

 

 



 

 

그가 정물화를 고집했던 이유는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모델을 고용할 돈이 없어서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아내를 잃고 두 아이를 키우며 직접 살림을 꾸렸기 때문에 일상에서 사용되는 물건들에 대한

애착과 정감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그의 작품은 당시에도 큰 호평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군더더기 없는 구조와 세심한 묘사 등으로 많은 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았습니다!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들이에요 : 

 

 

 

 

그의 초상화도 흔히 볼 수 없는 소박한 멋이 잘 스며들어 있는데요!

 샤르댕의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고요한 시간을 가지면 참 좋을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에 또 다른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기도 하죠?!

 

샤르댕은 묵묵하게 이와 같은 일을 해냈던 화가였습니다!

 

  



 

 
 
로코코의 열풍 속에서 흔들림 없이 정물화를 그려낸 샤르댕!

 

 

 

 

 



 


 

동기로 만든 급수기, 목판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파이프와 물병, 유채

 

 

이 작품은 테이블이 그려내는 선들이 그림 하단에 수평으로 받치고 있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구도를 가지고 있다.

개봉된 담배 상자에는 몇 가지의 소품들이 끝 부분만 드러내고 있으며, 긴 담뱃대가 담배 상자 왼쪽에 살짝 걸쳐 있다.

그림 오른쪽으로는 물병과 컵, 유리잔 등이 배열되어 있는데, 오래된 물건들에서 만져지는 투박하고 엷은 질감의 효과를 보이는 색채 혼합은 평범한 소재를 하나의 따뜻한 풍경으로 상승시키고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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