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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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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518 시민군이 버스로 경찰 깔아죽이는 장면 5.18광주사태(5.18폭동)

2012/05/19 11:33

 

복사 http://blog.naver.com/yhnnhy12/130138593951

전용뷰어

 

출처 Dirty Truth | 조국찬가
원문 http://blog.naver.com/coldtruth/20158128808

동영상 처음에서 1980년 5월 15일 오후 한시경 유시민 시위대가 시민버스 탈취하여 남대문 앞에서 순경들을 깔아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동영상 03:40부터는 무장시민군이 트럭 등 각종 군용차량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 보인다. 동영상 06:30 부터는 미 항공모함 유언비어 대자보가 제작된 경위에 대한 증언이 나온다. 광주사태 발발 직전 미국은 북한군의 남침을 견제하기 위해 항공모함 두 대를 급파하여 5월 22일 부산항에 입항하였는데,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미국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보낸 것이라는 유언비어 대자보를 제작하여 퍼뜨렸다.

The 5.18 rioters produced a rumor wallposter to spread the lie that America sent two fleets to support the armed rioters in Kwangju.

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nk-518book.htm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UjREo-yPX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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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과연 우리가 알아야할진실은 무엇일까?? 5.18광주사태(5.18폭동)

2012/05/18 18:40

 

복사 http://blog.naver.com/yhnnhy12/130138556240

전용뷰어

 

손가락좀 누르고 가주세요 ^^


이거시 폭동이 아니고 무엇이당가











5.18 민주화운동
우린 모두 이렇게 알고있을겁니다 아니 저도 불과 1년전만 하더라도 민주화운동으로 철저히 믿고있었습니다 왜냐?교과서가 5.18민주화운동이라고 하니까 신문이 5.18민주화운동이라고 하니까 좌파들이 특히 5.18민주화운동이라니까
하지만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닙니다 적어도 광주사태 5.18사태로 불려야 적당합니다
제발 저의 마음을 아시고 한번만 밑에 글들을 정독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거짓말하지않습니다 사진들 동영상 기록들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한번 믿어주시고 밑에 사진들을 봐주십시오 분명한 광주사태에서 사진입니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민군 장교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임.

눈앞에 증거를 보여줘도 안믿는 사람들은 귀는 장식일까요?



 

 

 

 

 

 

 

 

 

 

 

 

 

1. 518 최초 사망자가 전경 4명이었떤 이유(폭동분자들이 버스로 밀어버림)

 

 

 

 

 

2. 순식간에 유언비어가 퍼지며 무기고 7개를 동시 습격한 사실

 

 

 

 

 

3. 폭동분자들 탱크 몰고 민간인들을 잡아 다가 투항시킨 사실

 

 

 

 

 

4. 교도소 죄수들을 풀어준 사실

 

5. 방송국을 불지른 사실

 

 

 

 

 

 

6. 방송국 지하에 tnt 설치와 도청 장치 설치한 사실

 

 

 

 

 

 

7. 어린 청년들까지 폭동에 동원한 사실

 

 

 

 

 

 

8. 매년 북괴 들이 518 기념을 하는 사실

 

 

 

 

 

9. 김일성이가 5.18때 남하하지 못한걸 후회했던 사실

 

 

 

 

 

10. 윤기권 같은 색희가 돈 챙겨먹고 월북한 사실

 

 

 

 

 

 

11. 518 폭동관련 사망자 부상자 조사 결과 폭동군들이 사용했던 칼빈과 m1에 의한 민간 사상자가 더많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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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 유언비어 중에 여학생의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여직원의 팔을 도끼로 자른다는 내용이 있음

이것은 유언비어로 과장된 선동문구로 흔히 알려져있는데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것은 실제 북한에서 생방송되었으며, 수십 차례 재방송을 했음

 

<광주 청문회는 그러나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발포 문제와 지휘 책임 문제, 초기 과잉 진압 문제 등 핵심 문제에 대해 증인들의 증언이 상반되거나 엇갈려 실체규명의 확실한 실마리를 찾지 못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발포 문제에 대해 최 웅 당시 11공수여단장 등 공수부대 관계자들은 5월 21일 오후 1시 반에 시민군이 먼저 총격을 가해 자위권 행사의 일환으로 발포를 했다고 증언했으나 야당 측과 피해자 측은 그 때는 시민군이 무장을 하기 전이며 공수부대가 발포를 해 시민들이 정당방위로 무장을 하게 됐다고 맞서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5.18시민군과 공수부대 중 어느 편이 선제 발포하였느냐는 5.18측으로서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을 것이다. 총성이 올린 때는 정확히 오후 1시경이었고, 5.18측은 불과 30분만인 오후 1시 반 이후에 시민이 무장했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어거지 주장은 한달 후인 1989년 1월 26일 광주청문회 때 놀랍게도 시민군편 증인 김영택 기자의 증언에 의해 와장창 무너졌다. 위 동영상 시작후 2분 24초에서 우리는 김석진 기자의 다음과 같은 멘트를 듣는다:

<김영택 씨는 이에 앞서 관광버스가 돌진해오기 직전 시위대가 탄 APC 장갑차가 공수부대 대열로 뛰어들었으며 이 때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치어 한 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영택 씨는 이처럼 낮 12시58분 공수부대가 첫 집단 발포하는 순간 시위대 쪽에서 다른 총 소리가 난 것으로 미루어 시위대도 함께 발포한 것으로 생각하며 이미 오전 중에 시위군중이 카빈총을 들고 간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함으로써 오전 1시 반 이후에 시민이 무장했다는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공수부대 집단 발포"라는 말은 국민을 속이기 쉬운 말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진실은 5월 21일 전남도청 앞의 공수부대는 총 200발이 실탄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민군은 그보다 천배가 넘는 실탄, 즉 20만발이 넘는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 위 사진에서 우리는 2005년에 또 발견된 당시 시민군 실탄을 본다. 그러면 실탄이 장진된 총을 가지고 온 시민군과 달리 실탄이 없었던 공수부대는 어떻게 그날 오후 1시경 200발이 실탄을 보유하게 된 것이었을까? 위 동영상 시작 3분 27초에서 김석진 기자의 멘트 "두 번째 증인으로 나온 임정복 당시 31사단 보좌관은 5월 21일 오후 도청 앞에서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할 때 실탄 두 상자를 공수부대에 인계했으며"를 듣듯 그 실탄은 공수부대 실탄이 아니라, 보병부대 31사단 실탄이었다.

그리고 31사단이라는 부대명으로 일컬어지는 광주향토사단 96연대 1대대 소대장 중위 한동석이 그 실탄을 전달한 장본인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계엄군 장교=공수부대 장교 이미지를 시청자들에게 심어주나, 한동석 중위는 공수부대 장교도 육사출신 장교도 아니었다. 그는 ROTC 출신이었다. 무엇이 대학생과 전경의 차이인가? 학교 다니다가 전경으로 지원하면 학생신분이 불과 몇달만에 전경신분으로 바뀐다.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한동석 중위가 바로 그런 입장에 있었다. 그런 그가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울분을 느끼며 2007년 5월부터 역사학도의 블로그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를 찾았다.

900개가 넘는 댓글이 빽빽한 이 블로그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는 2007년 5월부터 몇달간 두가지 유형의 울분의 전투장이었다 (댓글이 워낙 많아 댓글 페이지 1을 찾아 댓글 입력일 표시가 <한동석 2008.05.08 19:10>로 되어있는 댓글부터 보셔야 함.) 그리고 너무 댓글이 많아 지금은 한참 댓글 페이지를 뒤로 돌려야 하는 그 블로그 댓글 토론장이 한동석 중위가 실명으로 역사의 비밀을 증언하는 증언장이었다. 한편으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공수부대의 잔인성에 울분을 터뜨리며 그 울분을 거기 터뜨리는 네티즌들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사건의 현장 증인 한동석님은 전혀 다른 종류의 울분, 즉 영화 "화려한 휴가"의 역사왜곡에 울분을 터뜨리며 생생한 증언 보따리를 하나하나 풀었다.

무엇이 팩트였는가? 21일 도청 앞의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없었다. 탄통 3개는 한동석 중위기 헬기로 철수하면서 본인의 판단에 따라 7공수에 전해 주었던 것이요, 심지어 31사단 탄통을 7공수에 인수인계하라는 명령조차 없었다. 위 동영상에는 나오지 않으나 <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는 특전사 대대장의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광주청문회 당시에는 그런 진실된 증언은 묵살되었었다. <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연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었는가? 오직 헬기로 철수하면서 자신의 탄통을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주었던 장본인만이 그 사실과 그 상황에 대한 증인이 되어줄 수 있었다. 그래서 청문회 당시 국회 청문회장으로 전화를 걸지 못했던 것이 오래오래 한으로 남는 한동석님은 그 심경을 이렇게 토로한다:

<<저는 5월 21일 오후 2시경까지 도청 광장에 포위되어 있다가 불행 중 다행으로 헬기로 탈출하기 전에 저희들이 휴대 중이던 <국가보안목표 경계근무용 M-16 탄>을 제7공수부대 *** 대위에게 전달한 장본인입니다. 1988년(?) 청문회 TV생방송 당시, 저의 신분이 신분(해군 군무원)인 지라 오히려 진실를 이야기해도 더욱더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 뭐라고 표현할 수없는 위압감과 가족들의 안전이 염려되어 ... 전화 다이얼을 돌려서 "특전사 대대장의 말<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이 맞고, 31사단 병력 소대장(본인)한테서 받았음.을 증언해야 했었는데....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 진실은 언제나 하나 밖에 없고 반드시 밝혀지리라는 신념을 믿고 , 눈물을 머금고 인내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전두환 전대통령이 구속되기 직전에 <서울 지검>에 출두하여 위의 소신을 검사 앞에 처음으로 증언 하였던 것입니다. >>

영화 "화려한 휴가"에 스토리가 있는가? 광주사태의 진정한 스토리 중 하나가 바로 한동석 중위의 스토리였다. 그는 20일 밤 MBC방송국이 불타고 있었을 때 부하들과 더불어 그 속에 갇혀 목숨이 위태로왔다. 용산참사를 생각해 보면 불타는 건물 속에 갇혀있는 자들의 위기감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부하들과 더불어 모두 타죽는데도 소속 부대로부터 철수 명령이 없었다. 철수명령이 없는한 군인은 경계근무지를 이탈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그는 방송국 옆집 담장을 넘는 방법으로 비상탈출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폭동을 일으키는 난동자들에게 붙들리면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기에 심야에 겨우겨우 부하들을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키다보니 도청으로 와서 밤을 새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무장시민군에 겹겹이 포위된 그곳이 또 하나의 사지였다. 다행히 31사단이 헬기를 보내 자기 소대 병력을 비상탈출시켜 주었으나, 사지에 공수부대를 남기고 탈출하는 것이 너무도 미안해 탄통을 넘겨주었던 것이었던바, 그 사실을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저는 그 당시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의 한동석 중위입니다.80년 5월 20일 밤 9시 30분경에 시위대의 방화로 불타오르고 있는 MBC방송국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당시 향토사단 군인 소대장입니다" MBC 방송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비상 탈출하여, 밤 11시 경부터 다음 날인 5월 21일 <도청 발포사건>직후까지 (불행 중 다행으로 도청광에 공수부대와 같이 포위 되어 있었던) 도청광장에 있다가 오후 1시 반경에, UH-H 헬기로 31사단 연병장으로 철수했던 장본인입니다. 헬기로 철수작전하기 전에 , 5월 20일 밤까지 MBC방송국과 기독교방송국,전일방송국(?) 에 배치되어 있었던 3곳의 경계용실탄 3탄통(한 탄통 안에는 M-16소총 20발 짜리 탄창에 15발씩 장전되어 있었음)을 제7공수 *** 대위님께 전달하고 철수했던 바, 도청 광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 .... 27년 전에 발생한 그 상황의 진위를 가리는데 한가닥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발포명령은커녕 실탄을 인수인계하라는 명령도 실탄을 인수인계받으라는 명령도 없었다. 단지 그것은 사지를 탈출하는 소대장과 사지에 남은 공수부대의 한 장교 사이의 우발적인 행동이었다. 사지에 남은 공수부대원들이 살아남으려면 공포탄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겠기에 넘겨주었던 것뿐이었다. 너무도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우발적으로 취해진 그 행동에 대해 한동석님은 이렇게 증언한다:

<<7공수 외는 저가 잘모르지만 7공수는 실탄이 없었기에 철수하는 저희 병력에게 <실탄 인수인계>를 요구하지 않았겠습니까? 자기도 실탄을 보유하고 있는 데 다른 부대에게 실탄을 요구하는 경우는 어떠한 경우라도 없을 테니깐요.
<실탄 인수인계>라는 용어를 저가 표현한 것 뿐입니다.. 특전사 병력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냥 전달해주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들이라 그당시에 순간순간 지휘자(본인)의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상부에 보고하고 할 겨를도 없었읍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7공수 대대장은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하는 지도 몰랐을 것이며, 특전사 *** 대위도 사후에야 실탄 습득에 대한 보고를 했을 것일라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보고후 지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

전북 금마에서 온 7공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실탄을 보유하지 않고 있었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러면, 서울에서 온 11공수 3개 대대 병력에는 실탄이 있었는가? 11공수에도 실탄이 없었던바, 그 사실을 1995년 2월13일 국방부 검찰부 고등검찰관실 신문조서에서 안부웅 광주사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은 이렇게 진술한다:

<<교신이 끝난 뒤 조금 있으니 UH-1H 헬기가 상무관 앞에 착륙하길래 제가 벌써 교대병력이 왔나 하고 살펴보니 상무관 앞 쪽에서 일반 보병부대 전투복을 입은 병사들이 헬기 쪽으로 뛰어 가서 탑승을 했습니다. 제가 주위 병사들을 보고 ‘저 병력은 뭐지?’ 하는 동안 헬기는 이륙했는데, ‘그 병력은 31사단 병력인데 MBC 방송국을 경계했던 병력이랍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혼자 생각하기를 ‘배속받은 병력은 나 몰라라 하고 제 자식만 챙기는 놈들’이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대대장님! 병사들이 31사단 병사들로부터 실탄을 얻은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해 제가 ‘그러면 안되는데, 병사들이 실탄을 가지면 안되고 최소한 중대장급 이상이 휴대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병사들이 진짜 실탄을 얻었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데, 당시 저도 너무 피곤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제가 병사들이 실탄을 얻었는지, 그리고 병사들에게 배분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 실책입니다. 당시는 병사들이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실탄을 얻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31사단 병력이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78 )

이로써 11공수에도 실탄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한동석 중위가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준 세 개의 탄통에 들어있던 실탄 수는 총 200 여발이었는데, 7공수가 독차지하지 않고 그 중 일부를 11공수 병사들에게도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저 위의 탄통은 시민군 탄통이지만,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21일 도청 앞의 시민군은 20만발이 넘는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 (탄약고에서 시민군에게 피탈당한 실탄 수를 근거로). 그러나, 근 천 명의 공수부대원들에게는 고작 총 200발의 실탄밖에 없었다. 이 숫자대로라면 병사 한 명당 5개 이상의 실탄을 가질 수 없었다. 행정병 등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하사관급 이상의 병사와 장교들에게 10발씩 지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상부 명령에 의한 지급은커녕, 현장 지휘관의 명령에 의한 지급도 아니었다. 31사단 96연대가 철수하면서 우발적으로 넘겨준 실탄이 일부 병사들에게 우발적으로 배분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의 원인이 되었던 그 200 여발의 실탄을 한동석 중위가 보관하고 있게 된 경위는 무엇이었는가? 한동석님이 그 경위를 설명한다:

<<3탄통의 실탄은 저희 대대(담양)에서 출동할 때(5월 중순경) 소대장 3명과 30여명의 병력이 3곳으로 나누어서 광주 시내에 <국가보안목표경계임무>를 띠고 배치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MBC 방송국, 그리고,전일방송국 & 기독교 방송국에 *중위와 *소위가 배치되면서 경계용실탄 1탄통씩 보유하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저희병력이 5월 20일 밤 9시 반경에 MBC방송국에서 비상탈출할때 실탄과 소총만 휴대하고, 긴급하게 나와, 우여곡절 끝에 XX경찰서을 잠시 경유한 후에 무등산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우연히 도청 광장에서 먼저 철수한 *중위와 *소위를 만나 저희 부대원 전원(장교 3명 & 30여명의 병사)이 합유하게 되어서 각각 보유하고 있던 실탄을 합한 것이 모두 3탄통이 된 것입니다. (그 3탄통의 수량이 약 200 여발 정도 될 겁니다) 그리고, 2 -30 여분 후에 저희 31사단 병력은 UH-1H 헬기로 31사단 연병장까지 철수하게 됐던 것입니다.>>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는 공수부대에 살인 목적이 있었다는 거짓 인식을 주기 위해 조작되었다. 그러나, 실제 사건에서 살인 목적을 가진 자들은 시민군 틈에 있었다. 화염병이 일으킨 용산참사를 생각해 본다면 도청 앞에서 시민군 화염병에 맞아 온몸이 화염에 쌓이거나 시민군 장갑차에 깔려 죽거나 다친 병사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 한동석님은 그 광경을 이렇게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 당시(5월 21일)에 계엄군(31사단병력과 공수부대병력)은 도청 분수대를 거점으로 도청 광장에만 남아 있었지요. 그래서 도청 광장에 있는 군인들을 몰아 내기 위하여 도청 건물 뒤 뿐만 아니라 사방 팔방에서 차량, 화염병, 돌멩이 등 등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공격을 했으며, 최후의 저지선만 남아 있다가 금남로 대로 쪽이 먼저 뚤리면서 발포가 났고,후진하던 공수부대 장갑차에의해서 공수부대 요원이 피해를 보았고, 그 직전 까지는 맨몸으로 인간 바리케이트를 치고(대형을 갖추고 버팀) 밀집된 대형의 앞이 보이지 않는 관계(키가 큰 장병이 앞에 선두에 서고 키가 작은 장병은 후미에 섰기 때문에) 후미에 서 있던 공수부대 장병들은 날아오는 화병병을 볼 수 없기에 피하지 못하고 철모에 화염병이 맞아서 순식간에 머리부분 부터 몸 전체로 화염에 쌓이는 처참한 광경도 목격하면서 분개했던 기억도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부터 퍼진 광주학살 유언비어는 시민군 무장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조작되었다. 사건의 선후에 대해 속이는 이 유언비어와 달리 무장시민군이 계엄군을 공격하는 사건이 먼저 있었다. 공격하는 시민군 편에서 계엄군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그 실제 상황을 생각해 보라. 무장시민군 편에서는 헬기로 철수하는 31사단 병력이 공수부대에 실탄을 넘겨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민군 장갑차가 공수부대를 덮쳤을 때 시민군 편에서는 공수부대에 실탄이 있는 줄 몰랐기에 그렇게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전날 밤 시민군 편의 선무방송이 "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는 식으로 들렸다. 만약 당신이 ROTC 출신 장교로서 현장에 있었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느끼며 받아들였겠는가? 한동석님의 다음 증언이 그 상황을 객관전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어떻게 글로 설명하기가 그렇습니다만, 전쟁터라고 생각하시는 게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50월 20일 밤 상황은 시민들한 테 잡히면 끝장입니다. 그래서 챙피스러운 이야기지만, 무기로 시민들을 제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무작정 돌과 화염병을 맞을 수도 없고, 외부에서 지원병력이 시내로 들어올 수도 없이 고립이 된 상황인데, <귀가>라니요! <야영> 잠을 잘 수가 있나요? 목숨이 촌각에 달려 있는 데... 오죽하면 저가 단독으로 MBC방송국에서<탈출을 결심>하고 무전기 까지 끄고 병력을 인솔하는데 방향만 무등산 쪽으로 향했겠습니까?

그런데 운 좋게도 광주 경찰서(?) 까지 1차 탈출에 성공하여 잠시 쉬고 있는데, 뒤를 돌아 보니 MBC 방송국 건물과 옆의 병원 옥상까지 불길이 완전히 쌓였던 장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무전병이 실수로 무전기를 개방하여 교신하는 과정에서 2소대(분대병력)와 3소대(분대병력) 가 안전한(공수부대가 집결되어있었음) 도청광장으로 먼저 대피를 하게되었고, 저희 병력은 경찰서에서 간편한 복장으로 무기와 실탄만 챙겨서 무등산 방향으로 2차 탈출을 시도하다가 우연히 2,3소대 병력을 만나게 되어서 선임 소대장인 저가 96연대 1대대 소속 3개팀(선임소대장 저를 포함하여 두명의 소대장<중위 & 소위>)을 재편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가 자정 무렵(5월 21일 0시) 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영화에도 나오는 젊은 여성의 선무방송은 지금도 소름이 끼칠 정도 입니다. (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는 식의 엠프 방송)>>

위 동영상에서 김영택 기자는 12시58분경 시민군 APC 장갑차가 공수부대 대열로 뛰어들어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치어 한 명이 현장에서 사망하는순간 시민군과 공수부대가 동시에 발포하였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총성에 대해 보다 정확하고 전문적인 감각을 가졌던 한동석 중위는 분명히 시민군 총성이 먼저 울렸다고 증언한다: "저가 주장한 5월 21일 최초 총소리는 금남로 방향의 특전사 인간 바리케이트가 "탕 !~ "하는 사제총(?) (M-16소총 소리는 아님)가 나면서 뒤로 밀리면서 양쪽으로 갈라졌던 것입니다."

안부웅 광주사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 역시 시민군 편에서 선제 발포하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13시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와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t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78
)

안부웅 중령과 김영택 기자가 목격한 이 상황이 바로 한동석 중위가 헬기로 철수하면서 본 상황이었다. 실탄을 인수인계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도 없었으며, 실탄을 인수인계했다고 보고할 겨를도 없었다. 탄통 3개를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주며 30명의 96연대 병력을 헬기에 태우는순간 시민군 편에서 먼저 총성이 울리고 이어 약 1분간의 맞사격이 있었으며, 모든 것이 아주 순식간에 발생하였다. 한동석님은 그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은 도저히 보고 절차를 밟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실탄 인수인계>라는 용어를 저가 표현한 것 뿐입니다.. 특전사 병력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냥 전달해주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아 주 급박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들이라 그당시에 순간순간 지휘자(본인)의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상부에 보고하고 할 겨를도 없었읍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7공수 대대장은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하는 지도 몰랐을 것이며, 특전사 *** 대위도 사후에야 실탄 습득에 대한 보고를 했을 것일라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보고후 지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시위대가 순간적인 기습 공격으로 인간 바리케이트 방어대형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대형 트럭의 질주<공격>로 대기 중이던 대형이 각자 흩어져서(도청 정문 을 통해 내부로) 부대를 재정비하는데 지휘자들은 정신이 없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읍니다. >>

그리고 시민군 편에서 선제 발포하였다는 사실은 시민군 김수영이 증언하는 시민군 총기오발 사고로 증명된다. 최초로 총성이 울리던 순간을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당시 공수부대가 도청 안에 있었는데, 시민들이 계속 밀고 들어와 나와 삼촌은 떼밀리다시피 해 도청 앞까지 가게 됐다.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공포다."

누군가 외쳤다. 까닭을 모르는 뒷시위대열은 자꾸만 앞으로 밀려왔다. 삼촌과 나는 앞사람을 꼭 붙잡고 미문화원 쪽으로 빠지는데 뒤에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소리쳤다.

"아저씨 아저씨, 나 총 맞았어요."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801.html 에서 네번째 작은 제목 "21일 도청 앞 발포" 이하.)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는 무장시민군이 섞인 인파였다. 운집한 전체 시민 수는 이십 만이요, 무장시민군 수가 오천이라 했다. 총성이 울렸는데도 사람들이 도청 앞쪽으로 밀려왔다. 만약 공수부대 집단발포라는 것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밀려올 리가 있겠는가? 현장의 시민들은 공포로서 이해했으며, 더구나 총소리 방향을 모르고 있었다. 김수영은 공수부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그가 들은 것은 뒤에 따라오던 청년이 총 맞았다고 소리친 것, 그가 본 것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뿐이었다.

시민군 진영에서 먼저 총성이 울렸음을 한동석 중위와 안부웅 대령이 분몋이 들었다. 그리고, 시민군 진영에서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었음을 시민군 김수영이 분명히 목격하였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총을 반납해 버렸다. 동구청 옆(현재) 야광카바레 부근으로 갔는데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이 3-5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청년의 다리를 맞혔다. 청년이 다리를 잡고 뒹굴었다. 또 한 청년은 복부에 총을 맞고, 임신한 아줌마는 가슴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

시민군 지프차 위에서 오발 사고가 났다고 한다. 시민군 지프차가 왕래하고 있었다는 것은 도청을 점거할 목적으로 시민군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말한다. 시민군 지휘부가 지프차를 타고 금남로 일대를 왕래하며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지프차 위에서 총기 오발 사고가 있었다는 것은 시민군 진영에서 계속 발포 사건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최초의 총성은 시민군 진영에서 울렸다. 즉, 5.18시민군이 선제 발포하였다. 어쩌면, 그것은 시민군 김수영이 서술하듯이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수영이 목격한 잦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는 탈북군인들이 증언하듯 폭동 선동을 위한 의도적 오발사고였을 수도 있다. 그 경우 살인의도를 가진 자들은 시민군 틈에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에서 더러는 철모까지 쓴 폭도들이 지프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의 진실은 시민군 편에서 총성이 울렸다는 것이며, 그 총성 중에는 시민군 김수영이 증언하는대로 시민군 지프에서 발생한 총기오발 사고도 있었다.


(* 상단 동영상은 1988년 12월 22일, 1989년 1월 26, 27일의 광주청문회 영상물을 함친 동영상인데, 세번째 영상물인 27일자 광주청문회 표지 다음에 26일자 동영상이 겹쳤습니다. 도청진압작전 사망자 수에 대한 5.18측의 허위 주장이 드러나는 1989년 1월 27일자 광주청문회 영상물은 http://study21.org/518/video/auditing_5-27.ht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개소리하네 병신새끼들 무슨 약쳐먹은적도 없고 당시 투입부대는 전라도 출신 부대장에 전라도 출신군대들이었는데 뭔 팔이 짤려 임신부가 죽긴뭘죽어 개소리 하고 자빠졋네 아오 진짜 이걸 믿고 시위하러 나왔다가 경찰서 털고 시작된게 5.18의 시작이고만

http://study21.org/518/video/auditing_518lie.htm

광주폭도들의 최초 무장시점

지들 주장으로는 20일 21일 즉 진압이 시작되고 정당방위차원 으로 무기고를 털었다는데??

 

김대중 세력이 제2의 광주사태를 일으키겠다며 미국 쇠고기에 관하여 지난 여름에 퍼뜨렸던 유언비어들이며, 국민 여배우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토론게시판의 유언비어성 글들은 아직도 우리 한국사회가 얼마나 유언비어에 취약한지를 보여주는바,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 대표적인 예가 광주사태 당시 그리고 그 이후에 퍼졌던 유언비어들이다. 광주에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 그 가해자들은 당시 시민군이라 불리어졌던 5.18무장단체들이었음에도 선량한 군인들이 누명을 뒤집어썼다. 폭동을 일으킨 자들과 그 동조 세력은 책임전가를 위해 유언비어를 지어냈으며, 지난 28년간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런 불순한 픽션에 속아왔다.

광주사태 논의의 대상은 폭동이지 시위가 아니다. 5.18측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시민군이라 규정하였으며 시위대라 부르지 않았다. 즉, 5.18사건이란 시위가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폭동이 발생한 사건이었다. 시위란 5월 17일까지 진행되었던 시위를 말하며, 5월 18일 이후에는 학생들이 주도하는 시위가 더 이상 없었고, 단지 정체 불명의 무장단체가 주도하는 유혈무장폭동이 있었을 뿐이었다. 박남선씨와 김대중의 최측근 윤상원 등이 시민군 리더였으되 아직도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별도의 무장조직이 있었다. 위의 광주청문회 영상물에서 우리는 당시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가 시민군편 증인이었음에도 복면 무장조직이 있었음을 증언함을 듣는다 (아래의 복면무장단체 사진 참고).



광주청문회 위원장이 문동환이었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자는 격이었다. 문동환은 증인으로 출석해야 할 인물이었지, 결코 광주청문회를 주관하여서는 아니될 인물이었다. 광주사태는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유혈폭동을 선동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일어났다. 김대중과 문익환 목사가 제2의 동학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연설했었을 때 바로 그것이 유혈폭동 선동이었다. 특히 문익환 목사는 동학난과 같은 유혈폭동을--유혈폭동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역사의 목적으로 여기는 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민중의 계급투쟁을 역사의 목적, 역사적 사명과 동일시하던 문익환 목사의 사관은 분명 공산주의 사관이었으며, 최소한 좌익사관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폭동을 선동하였던 자들의 이념이었기에 문익환 목사의 동생 문동환의 편파적 시각에 청문회를 맡겨서는 이니되었다.

폭동 선동가들에게 민중의 계급투쟁이란 이념이 있었다 하더라도 폭동 선동의 방법은 매우 치졸하였다. 윤상원으로 대표되는 김대중 최측근들은 5월 18일 아침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을 여수로 보낸 후에 이른바 "박관현 사망설"이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리고, 광주경찰에 의한 "박관현 사망설"이 폭동의 기폭제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5월 18일 오후 한시 반부터 금남로 일대에서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퍼져나가기 시작하자마자 수천 명의 시민이 갑자기 난동자들로 변해 광주의 여섯 파출서를 돌과 화염병으로 파괴하였다. 그리고, 그날 5월 18일 낮의 화염병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김대중의 최측근 윤상원이 미리 제조해 놓은 것이었다. 따라서, 왜 김대중 세력이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화염병을 미리 제조해 놓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어야 했었으나 문동환 위원장이 주관하는 광주청문회는 한번도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었다.

5월 18일 박관현은 죽은 것이 아니라, 여수에 있었으며 여수에서 광주폭동을 생중계하는 북한방송을 듣고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저녁부터 북한에서 광주폭동이 생중계되고 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언이 바로 박관현과 동행했던 당시 전남대 학생회 총무 양강섭씨의 증언이다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706.html ). 그리고, 5월 18일부터 북한에서 다른 방송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광주폭동을 생중계하였다는 사실은 그날 이미 북한 세력이 광주에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그러면 북한 세력이 어떻게 미리 알고 광주에 잠입해 있었으며, 어떤 방법으로 실시간 북한에 사태의 전개상황을 전송하고 있었는지도 청문회 질문 대상이었어야 했었을 것이다.

박관현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일단 김대중 세력이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린 후에는 다시는 광주로 돌아올 수 없었을 뿐이었다. 만약 확인되지도 않은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에 흥분하여 파출서들을 돌과 화염병으로 파괴하고 세무서에 불을 지르는 것이 광주시민들의 반응이었다면 오늘날 최진실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인가? 박관현은 죽은 것이 아니었지만 최진실은 정말로 죽었다. 전자의 경우 사망설은 단지 유언비어 뿐이었는데도, 일본에서 푸른 눈의 목격자로 훗날 알려진 힌츠페터가 달려오게 할 만큼 그 영향력이 컸던데 비해, 후자의 경우 사람들이 국민 여배우를 너무 쉽게 잊고 있다. 그러나 양자 모두의 경우에서 유언비어는 정당화될 수 없다. 확인되지도 않은 사망설 유언비에 흥분하여 파출서를 파괴한 행위도, 한 가련한 여성을 상대로 무수한 군중이 미확인 유언비어로 공격한 행위도 결코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박관현 사망설은 단지 유언비어뿐이었는데도 폭동을 일으켜야 했을 이유였다면 5월 20일 시민군이 버스로 순경 4명을 숨지게 하였다는 뉴스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만약 광주청문회가 공평하려 했다면 분명히 짚고 넘어갔어야 했을 사안이었다. 윤상원으로 대표되는 김대중 최측근들은 이미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수일 전에 버스를 징발하여 유혈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기에 이것은 광주사태 발생원인에 직결되는 문제요, 따라서 결코 간과할 문제가 아니었다. 또 그날 새벽 시민군이 시민군 차량으로 3공수 정관철 중사를 깔아죽인데 대한 광주시민들의 반응은 무엇이었던가?

5월 20일 새벽에야 광주에 도착한 3공수는 19일 온종일 식사를 하지 못했기에 19알 저녁식사분이라도 늦게나마 급식 수령에 나서야 했다. 그런데 일군의 난동자들이 급식차를 쓰러뜨리니 놀라고 당황하여 달려온 정관철 중사를 난동자들은(그 다음날부터 시민군이라 불리움) 그 자리에서 시민군 차량으로 깔아죽였던 것이었다. 5월 20일 새벽 광주에 갓 도착하였기에 아직 폭동 진압에 동원되지도 않았으며, 전역 명령을 받고 한 달 후 제대할 몸이었으며, 더구나 임신 9개월 된 부인이 있었는데 광주시민들이 그를 죽여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시민군에 의한 정관철 중사 살인사건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정서는 무엇이었던가?

시민군은 경찰과 군인만 차량 사고로 죽인 것이 아니라, 무수한 광주시민을 차량사고로 죽였다. 광주사태의 처참한 사진들이 있다. 그러나 그 타박상 가해자들은 시민군 차량 사고를 낸 시민군이었다. 시민군의 책임전가 유언비러에 의해 선량한 군인들이 누명을 뒤집어 썼으되 실제 가해자는 시민군이었다. 광주사태 당시 자가용 운전기사였으며 훗날 전남대 총무과 근무했던 오병길씨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여기저기 군용차량이 흩어져 있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온 것 같았다. 자동차에 대한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차량사고도 많이 발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용납품차량을 운전경험이 미숙한 시위대들이 무작정 끌고 다녔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장에 있었던 납품차량은 시운전도 하기 전의 것으로 냉각수도 안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시민군 사망 역시 모두 시민군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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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의 집단발포 사건의 진상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4명 사망이요, 시민군이 시민군 장갑차로 군인들을 깔아죽이면서 선제 발포하자 이에 놀란 공수부대원들이 공중으로 공포탄을 발사하였기에 누명을 쓰게 된 것뿐이었다. 청문회에서 발포명령자를 찾았으나 실탄 지급 없는 발포 명령이 있을 수 있겠는가? 7공수는 단 한 개의 실탄도 없어 광주향토사단 한동석 중위에게 경계근무용 실탄 2상자(200발)를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군은 30만발의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탈북군인들은 시민군끼리 총격전이 있었다고 증언하거니와 전남대 오병길씨 역시 시민군 편의 발포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앰뷸런스 소리, 소방차 소리, 불타오르는 건물, 피어오르는 듯한 예광탄 , 클랙션 소리,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를 하듯 쏘아 대는 총소리 등등으로 휩싸인 도시를 보았다. 그때 광주 시내에는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쏘는 총성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사망자를 부검 해보니 군에선 쓰지 않았던 카빈 총상으로 죽은 이들이 많았다. 광주 탈환 뒤 회수된 아세아 자동차의 트럭을 중엔 뒤집어 지고 부딪친 것이 무척 많았다. 이런 교통사고에 의해 숨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탈북군인들은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한 주요 목적 중 하나가 시민군끼리 오인 총격전을 벌이게 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하거니와 광주사태 당시 재수생이었던 시민군 장준영도 실제로 피아를 혼동한 시민군끼리의 총격전이 빈번하였음을 증언한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29 ). 여기서 북한군의 개입 여부는 별도로 한다 하더라도 시민군 총격전에 의한 시민군 사망의 가해자가 누구냐의 문제는 간과할 수 없다. 5월 21일 이후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던 광주 시내에서 시민군이 시민군에게 총구를 겨느고 있었을 때 그 가해자가 누구였는가? 왜 엉뚷나 군인이 누명을 써야 하는가?

그러기에 광주청문회에서 5.18무장단체의 최초무장시점에 대한 규명은 무 척 중요한 문제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5.18측은 광주청문회 때 그 문제에 정직하였는가? 총기로 무장하고 발포하면서 하는 시위는 없기에 5월 21일부터 시위대 대신 시민군이란 명칭이 통용되었거니와 그 시민군의 최초무장시점은 나주경찰서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한 5월 19일 3시였다. 흔히 광주청문회에서 다 밝혀졌다고 말한다. 무엇이 밝혀졌는가? 정상용 당시 광주도청 항쟁 지도부 외무부장의 위증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밝혀진 것은 5월 21일 낮 12시 이전에 시민군은 이미 총기 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시민군 편 증인 김영택 기자와 국군 편 증인 임정복(당시 31사단 작전참모 보좌관) 모두 시민군이 5월 20일 이미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거니와 위의 푸른눈의 목격자 힌츠페터의 영상물 역시 시민군이 5월 20일에 이미 총기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입증한다.

영상보실려면 위에 주소 참고하시길


5.18 광주시민군이 광주 시민들을 끓어앉히고 총구를 겨누고 있다.



어설프게 전경 복장을 한 정체가 수상한 시민군이 시민군 차량 위에 기관총을 설치해 놓았다.


노무현이 1989년 성탄절에 즈음한 광주청문회 때 전두환 전 대통령 얼굴에 명패를 던지고도 여전히 사과히지 않고 있기에 노무현에게 묻는다.


노무현은 1980년 5월 18일의 이 사진이 광주 경찰 사진이라고 우기겠지만 광주 경찰은 총들고 시위 진압하느냐고? 광주 순경들은 장발족이냐고? 그게 아니라, 폭도들이 광주 경찰을 괴멸시키고, 순경 40명을 납치한 다음 자기네가 경찰복 입고 폼 잡고 있는 장면이라네. 그래도 식별이 잘 안되거든 왼편 끝의 폭도 얼굴을 보거라.


그리고, 이 사진 오른편 끝에서 총들고 설치는 폭도의 얼굴을 보거라. 동일한 폭도가 진압 경찰로 변장하였다가 시민군으로 변신한 모습 보이지?


그러면, 이제 이 자들이 광주경찰인지 폭도들인지 식별이 될 것 아니냐? 폭도들에게 광주경찰이 괴멸되고 순경 40명이 납치당하자 광주시장과 광주경찰서장이 광주향토사단 사단장 정웅 소장에게 치안 유지 협조를 요청한 시간은 1980년 5월 18일 오후 3시. 광주사람 정웅 소장이 상황을 관찰하다가 광주향토사단 소속 2개 공수부대에 폭동진압명령을 내린 시간은 그날 오후 5시 30분.


도대체 폭도들에게 무전기가 무슨 필요가 있었느냐고? 도대체 이 복장이 선량한 광주시민 복장인지 북한 특수부대원 복장인지 구분 좀 해 달라고.


그리고 이 장면이 트럭탄 시민군을 총든 광주경찰이 환영하는 모습이냐고? 그게 아니라, 저 맨위 사진이 증명하듯이 폭도들이 한편은 광주 전투경찰 모습으로 위장한 후 총들고 있고, 다른 한편은 시민군 행세를 한 것이라네.


그렇다면 트럭타고 행군하는 이 폭도들도 북한 특수부대원들이거나 시민군인데, 그들이 국군이었다고 우기면 안되지. 경찰과 군인으로 위장한 시민군을 국군이라고 우기면 바로 여기서부터 광주사태의 논리가 뒤틀리게 되는거야.


그리고, 노무현아 시민군 장갑차 부대에 대해서 설명 좀 해 봐. 어떻게 시민군이 창군된 바로 그 날에 장갑차 부대가 편성되는 것이 가능하냐고? 당시 북한군은 시민군 장갑차 운전병들이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니깐 말이야.



그리고 무장폭도들이 지프 타고 다니면 노무현 눈에는 모두 민주화운동 투사로 보이느냐고?


그리고 말이다. 만약 북한군이 아니라 광주시민이라면 저렇게 폭도들이 가면을 쓰고 다닐 이유가 있었느냐고? 같은 광주시민끼리 한쪽에선 가면 쓸 필요가 무엇이냐고?


이 시민군은 지금 생화학 전쟁하는 것이냐고? 북한군이 가면 쓴 것인지 생화화전쟁 중인지 가려줄 의향은?


여기 맨앞의 시민군도 광주시민 맞느냐고? 도대체 저 패션이 어느 나라 패션이냐고? 그리고 광주시민이면 광주시민끼리 한쪽에서는 가면 쓸 필요가 있었느냐고.


그리고 장발족 폭도들이 국군 철모 쓰고 국군으로 위장한 것이 민주화운동으로 보이는 노무현 눈은 도대체 정상적인 눈이냐고?



그리고 민주화운동하는데 실탄과 술병이 무슨 필요가 있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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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맞습니까?


그리고 무장폭도들이 저렇게 전남도청을 점거한 상태를 10년, 100년 그대로 방치해 두면 A급 민주주의라는 논리는 도대체 어느나라식 민주주의 논리이냐고?

 

다시묻습니다 민주화운동입니까?

그리고, 당시 광주 의사들은 당시 사망자들이 바로 이 총, 그러니깐 국군에게는 없는 총기에 총상을 입었다는 소견을 남겼는바, 이 과학적인 사실에 대하여 노무현씨의 고견을 좀

 

정말입니까?

 

다시한번 묻습니다 민주화운동입니까?

정말입니까?

 

 

여러분 길게 말하지 않겟습니다 저건 법원에서 쓰인 실제 증거자료로 법원이 인정한 증거자료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좌편향교과서에서 시민군이 장갑차를 쓰고 수류탄을 쏘고 경찰을 잡아죽이고

국군을 20명사망시키고 100명이상을 다치게햇단는것은 들어보셧습니까?TNT설치는요?

저게 민주화 운동이면 왜 천안문사태는 민주화운동이 아닌거죠?천안문사태는 매우 평화롭게 시위를 진행햇는데 광주폭동보다도 몇십배의 사상자가 낫습니다 왜 천안문은 사태이고 광주는 민주화운동입니까?총을들고 교.도.소를 털고 무기고를 털어도 민주화운동입니까?

애초에 시민들이 돌을들고 화염병을 던지고 시위한 이유자체가 김대중이 잡혓다는이유만입니다 그리고 경상도군인들이 환각제를 먹고 전라도사람을 죽이러 온다는 유언비어가 돌앗죠 근데?저위에서 보셧다시피 경상도군인만 잇는게 아니엇죠 그리고 주동자 윤기권이 2억원을 받고 북한으로 월북해서 아직도 북한을 찬양하는 지금 광주폭동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환상에서 깨십시오 저것이 진실입니다 교과서에 전교조에 속아선 안됩니다

 

정리해드리겟습니다 최초에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과 연관되서 김대중이 그 단체회원으로써 자금을 관리하였음 분명히 문세광을 도와주고 이 사건을 공모함 그럼으로 감옥에 간것은 당연한처사 근데 갑자기 전국적으로 민주화 바람이 붐(이건 좋은현상 사실 나도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를 탄압했단건 인정함)근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임 다른 지역은 대부분 모두 수그러들고 자중을 하였는데 광주에서만 유독 심화되기시작하더니 여러 유언비어가돌더니(위에 참고)김대중을 석방하라는 미묘한 바람이 붐 그리고 점점 시위는 격화되고 그를 진압하는(이때 진압이라 해봣자 그냥 방망이 딱 하나 그것도 경찰들이)경찰들을 공격하고 경찰서를 모두 파괴함 그래서 공수부대를 투입시킴(애초에 경찰서를 모두 때려부시고 경찰죽이고 인질로 잡은 사람들보고 공수부대투입은 뭐라 할것도 안됨)

그리고 이 부문에서는 역시 공수부대라서 그런지 경찰들처럼 쉽게 당하지않앗음 서로 쌍방간 교전이 있었음 근데 분명한건 공수부대는 처음부터 폭력을 쓰지않았음 5월18일 대학교를 모두 폐쇄하게함(당연한거 아닌가?폭도들에 의해 경찰서가 모두 털리고 치안이 마비된상태)근데 대학생200명은 죽어도 들어가겟다며 돌을 꺼내서 공수부대를 공격하고 공수부대는 이에 반응해서 서로교전함 문제는 여기서부터임 이 대학생들이 작전이라도 짯다는듯이 서로 흩어지며 거리를 활보하며 문제의 저 유언비어들을 퍼트리며 김대중석방과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를 활보함(민주주의 같은 소리하네 ㅡㅡ 경찰서 턴놈들이)그에 유언비어에 속은 시민들이 나와서 폭도대열에 들어가고 공수부대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그야말로 진압을 시작함

좋다 이거야 여기서부터는 공수부대도 과하게 진압한면이 없지않아있음 일부 학살도 인정함 근데 생각해보길 먼저 경찰서 턴것도 폭도쪽 유언비어 퍼트린쪽도 폭도쪽(계엄군을 무슨 학살자 취급함 진압하기도전에)그리고 공수부대를 먼저 자극한쪽도 폭도쪽

대체 뭐가 정당방위인지?

그래서 폭도들은 안되니까 무기고를 털고 수십개의 건물을 방화하기시작함(대표적으로 MBC KBS가 방화당함 그리고 세무서랑 여러 건물들 경찰서 공공건물들이 수십개 불탐)그리고 더 코믹인건 위에서 봣듯이 공수부대의 적극적 진압은 20일부터인데 이미 19일날 나주무기고는 털렷다는 기록과 증언이있음 아니 대체 뭐가 정당방위임?

게다가 5000정의 화기와 수십대의 장갑차 수 톤의 TNT화약(이걸 해체한게 계엄군인데 학살자라고 매도할수있음?)

이때부터는 진짜 민주화고 뭐고 없엇음 모든 시민들이 집에 들어가서 벌벌떨었고 화려한휴가에서 보여주는 그 방송으로 뭐 감성개병신짓하고 그런건 레알 하나도없엇음요 진짜

 

이미 광주시내는 전쟁터였음 치안마비(무슨 서로 친하게 지내긴 개뿔 김밥털리고 하루에 수십건씩 총기사고가 났는데 ㅡㅡ)

 

 

그렇게 도청밑에 TNT를 깐 폭도들을 계엄군이 진압함(이 점에 대해선 진짜 난 불만없음 어느 병신새끼들이 도청에 TNT를 설치를함?병신아님?)TNT를 해체시키고 계엄군은 정상대로 진압을 했음 그리고 가장먼저 계엄군이 한 행동들?





위의 사진은 5월 단체들과 운동권 방송국이 국민에게 보여주지 않는 도청진압작전이다. 도청진압작전 완료와 더불어 계엄군은 5.18무장단체로부터 무기와 실탄을 회수하였던바 광주에 치안이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시민군을 무장해제시키고 무기를 회수함과 동시에 군인들은 폭도들이 난잡하게 어지럽힌 광주 거리를 깨끗이 청소하여 주었다.

 

자기 동료들이 130명이상 죽거나 다쳣지만 개의치 않고 그 동안 방화됫던 건물들 잔해를 모두 치우고 그 동안 굶어가던 광주시민들에게 쌀을 나눠줌 이게 포악한 공수부대들임?

 

한마디로 정리하면 폭도와 계엄군 서로 잘잘못이 있음 솔직히 폭도족이 원인이었고

그래서 민주화운동과 폭동의 중간말 광주사태를 교과서에 기록해야된다는것이 나의 생각

 

 

 

 

정말 5.18 민주화운동 맞습니까??

손가락좀 누르고 가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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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스크랩]5.18광주봉기의 북한군이 개입했던 상황에 대한 김일성의 발언 5.18광주사태(5.18폭동)

2012/04/21 10:07

 

복사 http://blog.naver.com/yhnnhy12/130136629024

전용뷰어

 

출처 카페 > 사이버안보감시단 블루아이즈 | 좌파척결
원문 http://cafe.naver.com/iblueeyes/21454


5.18광주봉기의 북한군이 개입했던 상황에 대한 김일성의 발언요지

 

1.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그중에서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가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어. 너무 수비게 생각했어. 광주가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게 놓쳤어...'

 

1986년 1월 6일 하기 훈련을 위한 평남도 덕천 교도지도국(한국에서 명명하는 특수8군단)본부에서 열린 지도국산하 여단장 정치위원 및 대대장 대대정치 지도원을 위한 군사 정치일군 상학에서 발언)

 

자료출처: 김정일의 사촌동생 김선일.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세 번의 기회를 놓쳤다는 발언은 전 인민군에 배포된 정치상학 자료에 출처가 있다.

 

2. '두 아들을 남조선 혁명에 바친 부모님들이 대견스럽습니다. 이제부터 국가가 아들들을 대신해서 부모님들을 모시겠습니다.'

 

출처: 대대장 여운학. 함장관은 1968년 1월 청와대 습격을 위해 남파되었다가 죽은 124부대원 중 한 사람인 함장근의 동생. 특수 8군단 최고의 여단이 17저격여단 4대대 출신

 

 

광주와 관련된 김정일의 발언

 

1. '광주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길 수 있었지만 결과는 진압됐다. 땀이 적었고 훈련부족이다. 교도지도국은 남조선해방의 전초병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당장 나갈 수 있게 만반의 동원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1982년 3월. 북한 특정여단 53.16.43.17.19.818.59여단들의 북부지구에서 벌린 쌍방 게릴라 훈련장에서 발언.

 

출처: 현장.

자료보관: 지도국 각여단 참모부 및 대대참모부

 

2. '많은 사람들이 평화시기에도 조국을 위해 적들 속에 들어가서 피를 흘리고 싸우는데 후방에 있는 군인들이 이렇게 해이되면 되겠습니까. 인민군대가 너무 만성적으로 해이되고 있습니다. 사상투쟁을 진행해서 강한 규율을 세워야 합니다. 오늘 일을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1981년 6월 21일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1군단 지구를 시찰하면서 군인들이 단추를 풀어놓고 무질서하게 다니는 현장을 비판하면서 한 발언.

 

자료출처: 인민국 각 사여단 참모부에 발송된 사상투쟁 교양자료

 

3. '우리는 광주사건에서 많이 얻었지만 놓쳤고 놓쳤지만 내일을 위해서 남겼다.'

 

출처: 광주평록 1983년 판

 

 

탈북자:

저는 북에 있을 때 광주폭동은 전두환 도당이 통일과 민주주의를 지향해 떨쳐나선 광주 시민들에게 환각제를 먹인 공수부대를 내몰아 5000여명을 죽이고 2만5000여명을 부상시킨 사건이었다고 배웠습니다.

 

여러분들도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는 전두환의 명령을 받고 온 공수부대가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밟아 죽였단 이야기, 부모가 보는 앞에서 여학생들을 발가벗기고 가슴을 도려낸 두 화염방사기로 태워죽였다는 이야기, 어머니의 시체를 붙잡고 우는 4살짜리 어린이를 보고 '폭도의 종자를 멸종시켜야 한다'면서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 이런 것들을 귀에 못 박히게 들었잖습니까.

 

이런 내용들은 1990년대에 북에서 만든 '님을 위한 교양시'라는 영화에서도 그대로 다 나옵니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치를 떨지 않은 사람들은 없었겠죠.

 

저는 남한에 온 그 해에 광주 망월동에 있는 5.18국립묘지를 갔었습니다.

 

광주폭동 희생자들을 여기서는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해 국립묘지에 안장해 주었습니다. 북한으로 말하면 '사회주의애국열사'칭호와 같은 열사로 인정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란 것은 당시 발생한 시민 희생자가 5천여명이 아니라 155명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북에서 교육받았던 치떨리는 학살 내용도 예외없이 근거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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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세계의 민주화 운동들 5.18광주사태(5.18폭동)

2012/03/19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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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뷰어

 

출처 정치 사회 갤러리 | 하나
원문 http://blog.naver.com/hana9870/40154838970

우리 폭도 아니다 개갴끼들아!!

 

 

암그라제!!흑인민주화운동이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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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투입된 북한군증언과 동일한 탈북자증언 5.18광주사태(5.18폭동)

2012/03/03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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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뷰어

 

남한의 정황증거와 탈북자들의 증언이 일치하면 사실 아닌가?

필자는 10만 쪽이 넘는 역사바로세우기재판의 수사기록과 법정기록 그리고 그 외 기록들을 5년에 걸쳐 조사하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여기에는 5.18 상황들이 날짜별 시간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여기에는 광주시민들이 한 행위라고는 도저히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들어 있고, 간첩을 포함한 북한특수군의 소행일 것으로 짐작되는 정황증거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북한특수군의 소행이라고 의심이 되는 정황증거들이 이번에 자유북한군인연합에서 발간한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해 뒷받침됐다. 남한의 정황증거와 탈북인들의 증언이 일치하면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탈북인들의 증언록인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 ‘카더라 통신’에 불과한 것이라거나, ‘내가 현장에서 취재를 했고, 현장에서 북한군을 전혀 볼 수 없었는데 무슨 엉뚱한 이야기냐, 탈북자들의 이야기 믿을 수 없다’고 강력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한발 더 나아가 “5.18광주에는 북한의 개입이 절대로 있을 수 없었고, 5.18민주화운동은 붉은 색이 침투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반공선상에서 순수하게 이루어진 반공민주화였다”는 취지의 주장을 편다 한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이제부터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공지의 사실’ 몇 개에 대해서만 짚어보도록 하자.

1. 무기고는 누가 털었나?

<수사기록 상에 나타난 정황증거>

1980년 5월 21일, 4시간대에 걸쳐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를, 화순광업소에서 8톤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순식간에 동시다발적으로 탈취한 것은 간첩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서울지검 작성의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100-101쪽.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 5.18’의 220-244쪽)

5.21일 아침 오전 8시, 시위대는 극비로 이루어지는 20사단의 이동계획을 미리 알고 광주 톨게이트에 300명이 매복해 있다가 화염병을 던지는 등의 공격에 의해 14대의 지휘차량을 빼앗아 곧장 아시아자동차로 갔다. 오전 9시,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는 또 다른 300명이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왔다. 이들 600명은 장갑차 2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를 탈취했다. 이 차량들은 누군가에 의해 17개 시군에 걸쳐 있는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 뇌관저장소, 도화선 저장소 등으로 일사불란하게 할당되었고, 낮 12시부터 오후 4시에 이르는 동안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들을 마치 외과의사가 족집게 수술을 하듯이 무기고로 곧장 달려가 2개 연대 무장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무기를 탈취했고 8톤 트럭 한 대 분의 다이너마이트와 이를 무기화한 뇌관도 도화선을 탈취했다. 이는 군사작전이지 시민들의 시위가 아니라고 의심했다.

시민들은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살아간다. 무기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사람들은 오직 간첩이라는 것이 필자의 상식이다. 시민들이라면 한 두 개의 무기고 위치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시에서 멀리 있는 무기고, 가까이 있는 무기고 38개가 4시간대에 모두 털었다는 것은 일반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38개 팀 한 팀 한 팀 모두가 위치를 정확히 알고 떠났다는 결론이 나온다. 특히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한 후,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을 탈취한 자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자들이었다. (서울지검의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 91-108쪽)

<탈북인들의 증언>

1) 직접 광주에 갔다왔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 남한 봉기자들이 무기고를 털어서 총(무기)을 주어도 잘 받지 않았다고 했다.(증언록 34쪽 하 3-6줄)

2) 남조선에 숨어있는 지하조직들과 협동해서 무기고를 탈취하고, 또 사람들을 죽이면서 광주인민들을 자극했다고 하였다. 강원도 어느 탄광인지, 그곳에서 일어났던 봉기에도 참가했다고 하였다.(증언록 37쪽 하2-38쪽 1-2줄)

3)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증언록 78쪽 2-10줄)

4) 광주에서 대학생들의 소요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우리 쪽에서 남조선에 나가서 활동하는 특수부대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남조선에 침투하여 단기 소부대작전을 하던 사람들은 게릴라전의 전문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고 광주에서 장갑차를 탈취하고 무기고를 습격한 것은 남조선시민들이 아니라 다 우리가 한 일이었다”(증언록 209쪽 11-16줄)

5) 한번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나눠주는 장소에서 광주시민 한 사람한테 정체가 노출될 번한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의 여성(대학생정도로 생각했다고 하였음)에게 무기를 들라고 하자 그 여성은 무기를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복면하고 있는 자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쌍 간 나 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머하고 서있니?” 총을 넘겨받을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여성이 그에게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순간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했다. 남조선 사람들과는 어떠한 대화도 주의해야 한다고 사전에 작전에 침투되기 전부터 상급으로부터 언질을 받았지만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괴뢰군”이라는 표현과 같은 북한말을 하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앞에 있는 여성이 자기의 말투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을 봐서는 무언가 다른 것을 눈치 채지 않았는지 불안한 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복면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으니 그 여성은 그의 정체를 충분히 의심할 만도 한 일이었다. “나는 강원도 태생 이야요. 광주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야요” 그는 그 여성에게 자기가 강원도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하다가 전라도 광주로 돈벌이를 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여성은 그가 아무래도 수상해 보였던지 총을 받지 않고 이내 골목 쪽으로 줄행랑을 치듯 사라져 버렸다. 그냥 놔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는 무기를 나눠주는 일을 대원에게 눈짓하고 젊은 여성의 뒤를 다급히 쫒아 갔다고 한다. 개인 살림집들이 들어서 있는 골목을 따라 여자의 뒤를 쫒던 그는 대문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발견하고 그리로 달려갔다. 여자가 들어간 대문밖에 도착해서 잠시 안의 동정을 살피는데 여자가 집안안의 누군가에게 벌써 자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복면을 한 이상한 사람들이 만이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명히 아니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 같아보였어요.” 순간 귀가 멍하고 가슴이 철렁 하였다. 적후에서 이런 순간에는 어떻게 행동하고 상황처리를 해야 하는지 그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도 환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좀 전에 만났던 젊은 여성과 그의 동료인 뜻한 남성이 마주서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성은 대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자기가 금방 말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남자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가 총을 꺼내드는 순간 위험을 눈치 챈 남자가 도망치려고 집안 담장으로 뛰어 올랐다. 그는 남자를 향해 총탄 한발을 쏘았다. 담장 밖으로 도망치던 남자가 총에 맞고 떨어지는지 소리가 쿵 하고 들렸다. 그는 파랗게 질려있는 여성의 가슴에 총탄 두발을 날리고 남자가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 쪽으로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피자국은 있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핏자국이 향한 방향으로 따라가니 허벅지에 총을 맞은 남자가 몇 미터도 못가서 신음하면서 골목길에 쓰러져 있었다. 그가 총을 꺼내서 들이대자 남자는 절망에 휩싸여 어디 가서 절대로 말하지 않겠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고 한다. 그는 살려두면 절대로 안 되는 그 남자의 심장에다가 총탄 한발을 쏘아박고 그 자리를 신속히 피했다고 말하였다. (증언록 347쪽 5줄-349쪽 7줄)

2. 교도소는 누가 습격했나?

<수사기록 상에 나타난 정황증거>

5월 21일에 발생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무장시위대에 의한 광주교도소 무력습격이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다.(“5.18관련사건수사결과” 91-117, 서울지검의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검찰 9쪽, 안기부의 광주사태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29-30쪽,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5.18의 213-214쪽)

<탈북인들의 증언>

1) 전라도 광주지역 근처에 있는 감옥소(남조선의 교도소)에 죄 없이 감금되어 있는 혁명적인 투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안창식의 일행들도 참가했었고 그중 한명이 심한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총탄이 복부중심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은 그 사람은 과다출혈로 치명상이었다고 했다.(증언록 83쪽 하1-5)

3. 장갑차는 누가 몰았나?

<수사기록 상에 나타난 정황증거>

장갑차를 몰수 있는 사람은 군 출신이라 해도 매우 희귀하다. 장갑차 위에서 기관총을 잡고 눈초리가 범상치 않은 사람은 시민처럼 보이지 않는다.

<탈북인들의 증언>

1) 광주봉기를 텔레비전에서 매일 방송하였고, 북한사람들은, 더구나 여자들은 무서워서 사람 죽이는 장면들을 볼 수가 없었다. 텔레비를 보면서 광주인민봉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장갑차를 몰고 총을 쏘는 사람들이 남조선 사람들이 아니라 북한에서 내보낸 특수부대사람들이라고 하였다. 회의에 참가해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증언록 39쪽 1-6줄)

2) 광주사건! 그거다 우리군대가 했어요. 장갑차 뺏어 몰고 총 쏘는 것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훈련 받은 우리사람들이 한 것이 맞아요. 평범한 시민들이 뭘 할 줄 알겠어요? 우리 쪽의 사람들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판이 그렇게 커질 수가 없지요” 어디에 가든 광주사건이라는 말만 나오게 되면 저저마다 입을 열고 말 나가는 대로 너도 나도 한마디씩 하는 정도였다.(59쪽 4-10줄)

3) 광주봉기가 한창이던 어느 날 중대병실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광주 봉기참가자들이 장갑차를 끌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자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중대 군인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 했다고 한다. 중대 군인들 중에서 성근이보다 몇 년 선배인 사관장이 텔레비전에다가 손짓을 하면서 고성을 질렀다고 하였다. “야, 저거 광수가 아니야? 광수가 어떻게 저기 나가있어. 저자식이 별을 달고 승진해서 어느 분계선 일대의 특수부대로 간다고 하더니 저기 나가있네. 세상일은 참 모르겠다.” 라고 소리치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광수의 얼굴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증언론 204쪽 하 7줄-205쪽 상1줄)

4) 남조선에 침투하여 단기 소부대작전을 하던 사람들은 게릴라전의 전문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고 광주에서 장갑차를 탈취하고 무기고를 습격한 것은 남조선시민들이 아니라 다 우리가 한 일이었다(증언록 209쪽 하 6-8줄)

5)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국군의 장갑차며 중무기들을 노획하여 봉기군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으며 무기와 각종장비들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시가전에 맞게 주요전투들을 조직하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증언록 235쪽 11-16줄)

6) 창고장의 일행은 광주인근지역에 있는 군수품공장을 습격해서 장갑차와 군용트럭들을 탈취할 때 북한에서 파견되어 나간 알 만한 사람들의 얼굴들을 적지 않게 보았으나 적후활동에서 지켜야 할 엄격한 준수사항이 있는 관계로 서로 침묵 속에 무언의 대화만 나누었다고 한다. 탈취한 장갑차는 시민군들이 기술부족으로 다룰 수 있는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북한에서 나간 특수부대요원들의 몫이었고 군용트럭들도 일부는 북한요원들이 사용하면서 대부분은 시민군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기동성을 보장하게 하는 한편 항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319쪽 하 1-8줄)

4. 시민을 누가 더 많이 쏘았나?

<수사기록 상에 나타난 정황증거>

1985년 5월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광주사태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95-103쪽에는 사망자들에 대한 총상 분석 자료가 있다. 신원이 확인된 학생 및 민간인 사망자 152명 중 총상 사망자는 116명, 76.3%가 총상 사망자다, 총상 사망자 116명 중 36명이 M-16 총상이고, 80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이다. 즉 총상 사망자 중 69%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인 것이다. 특히 시위대공격이 가장 치열했던 5월 21일 사망한 시민들을 보면 계엄군이 없는 곳들에서 많이 발생했다. 당시 계엄군은 도청앞과 전남대에만 있었다.

<탈북인들의 증언>

1) 광주봉기에 참가해서 남조선인민들 세 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내 생각엔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들과 현장의 간첩들의 조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4.19 혁명 때도 부분적으로 간첩들의 조작이 있다는 것을 북한에서는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 .전쟁이 일어날 경우 남조선에 숨어서 활동하는 10만 명의 간첩들이 교란작전을 할 것이라고 하더라.(35쪽 하3-36쪽 4줄)

2) 안창식(나의 내연남)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대원 세 명에게 여자를 추격해서 그를 조용히 처리하고 시신을 소각하되 사진기는 무조건 회수해 올 것을 명령했다. 분명히 다른 냄새를 맡고 따라다니는 남조선정보기관의 끄나풀이 아니면 정체를 숨기고 광주 시내를 뒤지면서 색다른 냄새를 맡고 있는 어느 특수기관의 스파이라고 짐작되었다. 그 여자는 북한요원들에 의해서 광주시내 모처로 납치되어갔고 저항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86쪽 5-12줄)

3) 광주의 일반적인 시위를 무장봉기로 확대하는데서 자신들이 빌미를 제공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절대로 가능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당사자 본인의 설명이었다는 것이다. 능력적으로 대학생들과 함께 시민들이 완전무장한 정규군과는 절대로 상대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생을 무릅쓰고 항쟁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들이 국군복장을 하고 배후에서 시민군을 죽이고 시민군과 국군 사이를 철저하게 교란한 작전의 효과라는 것이었다.(235쪽 16줄-236쪽 4줄)

4) “쌍 간 나 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머하고 서있니?” 총을 넘겨받을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여성이 그에게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순간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했다. 남조선 사람들과는 어떠한 대화도 주의해야 한다고 사전에 작전에 침투되기 전부터 상급으로부터 언질을 받았지만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괴뢰군”이라는 표현과 같은 북한말을 하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앞에 있는 여성이 자기의 말투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을 봐서는 무언가 다른 것을 눈치 채지 않았는지 불안한 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복면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으니 그 여성은 그의 정체를 충분히 의심할 만도 한 일이었다. “나는 강원도 태생 이야요. 광주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야요” 그는 그 여성에게 자기가 강원도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하다가 전라도 광주로 돈벌이를 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여성은 그가 아무래도 수상해 보였던지 총을 받지 않고 이내 골목 쪽으로 줄행랑을 치듯 사라져 버렸다. 그냥 놔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는 무기를 나눠주는 일을 대원에게 눈짓하고 젊은 여성의 뒤를 다급히 쫒아 갔다고 한다. 개인 살림집들이 들어서 있는 골목을 따라 여자의 뒤를 쫒던 그는 대문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발견하고 그리로 달려갔다. 여자가 들어간 대문밖에 도착해서 잠시 안의 동정을 살피는데 여자가 집안안의 누군가에게 벌써 자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복면을 한 이상한 사람들이 만이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명히 아니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 같아보였어요.” 순간 귀가 멍하고 가슴이 철렁 하였다. 적후에서 이런 순간에는 어떻게 행동하고 상황처리를 해야 하는지 그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도 환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좀 전에 만났던 젊은 여성과 그의 동료인 뜻한 남성이 마주서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성은 대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자기가 금방 말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남자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가 총을 꺼내드는 순간 위험을 눈치 챈 남자가 도망치려고 집안 담장으로 뛰어 올랐다. 그는 남자를 향해 총탄 한발을 쏘았다. 담장 밖으로 도망치던 남자가 총에 맞고 떨어지는지 소리가 쿵 하고 들렸다. 그는 파랗게 질려있는 여성의 가슴에 총탄 두발을 날리고 남자가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 쪽으로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피자국은 있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핏자국이 향한 방향으로 따라가니 허벅지에 총을 맞은 남자가 몇 미터도 못가서 신음하면서 골목길에 쓰러져 있었다. 그가 총을 꺼내서 들이대자 남자는 절망에 휩싸여 어디 가서 절대로 말하지 않겠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고 한다. 그는 살려두면 절대로 안 되는 그 남자의 심장에다가 총탄 한발을 쏘아박고 그 자리를 신속히 피했다고 말하였다. (347쪽 10줄-349쪽 7줄)

5)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전국적으로 광주인민항쟁의 여파가 퍼져나가게 만드는 것이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임무였지만 생각처럼 사건이 번지지 않자 북한에서는 현장에 파견된 특수부대 요원들에게 될수록 정체를 노출시키지 말고 주도적으로 폭동을 유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하였다. 북한으로 부터 새로운 지시가 떨어지면서 특수작전요원들은 시민군들 속에 위장 침투하여 본격적인 살인, 파괴활동을 조작하면서 광주시민들을 자극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광주인민봉기에서 죽은 사람들 중에 실제로 진압군에게 맞아 죽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요원들에 의해서 무참하게 죽었다고 공화국영웅의 말을 빌어서 친구는 말했다.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원들의 정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눈치를 채거나 이상한 기미를 보이기만 하면 그들은 두말없이 즉석에서 시체가 되어 처리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르지 않거나 그들의 요구에 불응해서 도망가면 그 사람들 역시도 절대로 살려두지 않았다는 것이다.(379쪽 9줄-380쪽 2줄)


시간과 공간상의 관계로 아래 내용들에 대해서는 추후 올리겠습니다.
5. 유언비어는 누가 뿌렸나?
6. 경찰 15명 인질 잡은 윤기권은 왜 북에서 데려갔나?
7. 5.18은 누가 기획-연출했나?
8. 김대중은 국가전복을 기도했나?
9. 1만톤 프레스에 새겨진 ‘5.18청년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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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사태에대한 한 미국의 아주 아주 아주 객관적인 평가 5.18광주사태(5.18폭동)

2012/02/2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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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10.26(박통 저격사건)이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지위가 됨으로써 격렬한 정치투쟁이 시작됨.

- 야당인 신민당의 김대중과 김영삼 사이에 당권경쟁이 치열해짐.

- 경제사정이 악화됨에 따라 정치 불안 격심해짐.

- 학생들의 계엄철폐를 요구와 거리투쟁 시작.

- 폭력시위를 일으킨 탄광노조에 의해 경찰관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 1980년4월16일, 김대중은 계엄포고령을 무시하고 서울에 운집한 학생들 앞에서 투쟁을 고무시키는 연설을 함.

- 5월15일, 서울의 학생시위로 또 한사람의 경찰관이 살해됨.

- 5월16일, 이화여대에서 학생 조직 대표들이 5월22일 기점의 전국규모의 시위 지지 결의.

- 5월17일, 최규하대통령은 계엄을 강화할 것을 명령, 대학에 휴교조치, 정치활동이 금지. 주요도시에 계엄군이 배치됨.

- 계엄군 배치계획에 따라, 광주에는 7공수 여단의 33 및 35대대가 북쪽(금마)에서 광주시내로 이동.

- 전국의 시위는 끝이 났지만, 광주에서는 폭동(riot)이 일어남.

- 5월18일, 전남대 앞에서 수백명의 학생의 투석으로 군과의 격돌을 야기시킴.

 

- 소요 첫날,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을 죽이러 왔다''40명이 죽었다''김대중씨가 처형됐다'

'군인들에게 밥을 굶기고 마약을 투여했다'는 등의 해괴한 뜬소문을 믿고 사람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 5월19일, 쇠파이프로 무장한 시위자들은 경찰서와 방송국2개를 습격하고 재산을 파괴함.

- 5월20일, 폭도들(rioters)이 시청과 방송국에 불을 지름.

- 버스와 택시를 강제 징발하여 도로 위를 달림.

- 도청건물 앞에서 이들 차량중 하나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4명의 경찰관을 숨지게 함.

- 5월21일, 폭도들이 예비군 무기고를 공격, 소총과 실탄 기타 무기들을 탈취함.

- 오전 9시경 자동차 공장이 습격을 받음. <U>장갑차</U>를 포함한 수백 대의 차량이 탈취됨.

- 인접지역의 군경시설이 습격을 받아 <U>수백정의 총기들이 탈취</U>됨.

- 화약제조 업자들로부터 다량의 <U>TNT도 탈취함.</U>

- 폭도들이 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 해놓고 <U>군인들을 향해 사격</U>을 했다.

- 광주교도소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U>장갑차</U>와 소방차에 분승한 중무장한 폭도들로부터 공격을 받음.

- 5월21일, 오후 6시 군인들의 후퇴로 광주시는 완전히 반란군중(rebel)에 수중에 들어감.

- 5월22일, 광주지역 의사, 변호사, 언론인, 종교지도자들이 중재를 위한 사태수습시민위원회를 구성했다.

- 탈취된 무기는 <U>소총 5,008정, 엽총395정, 실탄288,680발, 수류탄526발, 다이너마이트 3,000상자</U>로 집계됨.

- 5월26일, 계엄군의 광주 시내 재진출 시도는 격렬하고 조직적인 시민군의 저항으로 실패함.

 

- 계엄군은 탈환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인명과 재산에 대한 피해 극소화를 위해

공중정찰과 정보 제보자들을 활용하는 등 반란 시민들의 본거지와 거점들을 하나하나 정확히 확인했다.

 

- 5월 27일, 새벽 1시 행동을 개시했다. 소부대단위로 병력으로 외과적 정밀 조준으로 목표에 타격을 가했다.

작전은 수 시간 이내에 완료되었고, 사살된 사람은 17명에 불과했다.

 

- 5월22일, 최규하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광주에 와서 질서회복을 호소.

- 광주시 전역에 무기반환을 호소를 하는 전단이 살포, 헬리콥터와 비행기 차량의 확성기로 호소문을 전파함.

- 계엄당국은 광주시민위원회에 협력했으며 시민위원회를 중간에 두고 폭도 대표들과 5회에 걸쳐 협상 시도.

- 신뢰회복을 위해 연행했던 시위자들을 여러 차례 풀어놓기도 했으나,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 5월27일, 시민위원회는 계엄사와 합동으로 철저한 시체 확인과 검시 작업에 들어갔다.

(민간의사, 군의관, 성직자, 변호사, 광주시민을 합하여 49인이 조사와 확인 작업에 참여)

 

- 시민위원회 위원장은 본 헤리티지 재단과 면접한 자리에서 사망자 시체 확인을 직접 했으며,

<U> 191명의 숫자는 정확한 것</U> 이였다고 강조 함.

 

- 쌍방의 중무장한 무력 집단 간의 격돌이 초래한 필연적 결과였다.

<U>- 광주교도소에서 죽은 50여명은 중무장한 폭도들이 광주교도소를 수차 강습, 공방전에서 사살된 것.</U>

- 정부는 모든 사망자 가족에게 16,000달러 상당을 각각 지불하고, 모든 부상자들에게 치료비를 보상함.

- 기타 시민들에게도 비상식량과 연료비조로 200만 달러 상당이 지원됨.

- 파괴된 가옥과 영업소에 대해서는 수리와 복구를 위한 지원 예산이 집행됐다.

- 구속된 시민들은 2,522명, 이중 404명이 군법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사면조치로 모두 풀려났다.

 

- 광주사태는 한국정부가 죄 없는 전라도 도민을 학살할 의도와 목적아래 사전에 모의해서 만들어낸 사건이 아니며,미국이 개입된 사건도 아니다. 이 반란사태(insurrection)의 규모가 방대함을 생각한다면 사망자 수는 상대적으로 현저히 낮은 것이며, 이 사실은 한국정부가 인명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기 때문인 것으로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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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5_18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반드시 보고 판단해야 할 몫) 5.18광주사태(5.18폭동)

2012/02/26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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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실을 알고자 하는 분들의 안식처 | 마트료시카 ㅡ
원문 http://blog.naver.com/dbwnstn88/130132460692

< 광주5.18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

◆필자가 드리는 말

광주 5.18은 민주화이고, 성역으로 둘러친 낙공불락의 무적으로 인정되면서, 그것을 건드리는 어떠한 것도 용납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고, 김영삼은 종북세력과 야합하여,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통해 5.18을 민주화로 바꿔치기하는 역적중의 역적의 짓을 해버렸다. 이후 5.18앞에 과학적 증거는 그저 민주화를 짖밟는 역적으로 몰리고 있다.

그것이 북한의 적화통일 목적에 철저히 이용당한 대한민국의 현실이고, 뼈 아픈 자존심의 상처다.

보수측의 입장에서 수사기록으로 사기극의 실체 5.18이 수 없이 제기 되었지만, 항상 역적으로 치부되었고, 정신병자로 몰리는 상황에 놓였고, 탈북한 자유북한군인연합은 북한에서 저지른 5.18인줄 알았는데, 막상 대한민국에 와서 보니 역행하는 꼴이 너무나 황당하여, 바로잡기위해 정치적 목적에 휘말리기 싫지만, 진실과 종북좌익세력에 의해 대한민국이 주체사상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막고, 정의를 찾기 위해 뭉쳐 진실을 말하고 있다.

자유북한군인연합에서 제기한 증거에 대해 5.18단체는 아직까지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진실이기에 대꾸조차 못하는 것이다. 이 기막힌 현실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5.18를 민주화로 인식하고 있다. 논리와 증거가 뒷받침되면, 자연스레 그것을 포기하고, 비판해야 함이 당연하거늘... 유독 5.18을 민주화의 꽃으로 신역화하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좌.우를 떠나 이것은 북한에 놀음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대한민국이 풀어나가야할 중차대한 임무이다.

대한민국 좌,우는 서로 칼을 겨누고 싸워야 할 것이 아니라, 모두 피해자란 사실이다.

광주 5.18이 북한의 철저하게 계획되고, 특수부대의 개입이었다면,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치부해서 만드시 감추어야 하는 것이라 여기고, 국군의 무자비한 탄압이면 민주화를 위한 거대 항쟁으로써, 굉장히 명예스러운 것으로 치부하는 처사의 논리로 접근하는 태도는 누굴 위한 행동인가?

당시의 수사기록과 북한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5.18의 증거들을 토대로 해석하자는 논리가 대체 5.18단체에 의해 말도 안되는 논리보다 저급하다는 것인가?

대체 이런 논리에 고개를 끄덕일 대한민국사람의 정체는 누구인가? 북한에 동조하고, 김부자새끼에게 충성하는 종북세력 외엔 아무도 없다고 필자는 단언할 수 있다.

북한 특수부대와 남한네 불순분자(김대중)이나 남한 종북세력을 제외한 무고하게 희생당한 광주시민과 억울한 누명은 쓴 국군은 모두가 피해자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북한과 그를 추종하는 남한 내 종북세력임을 반드시 잊지 말기를 필자는 간절히 말하고 싶다...

 

 

잔인한 장면보고싶지않으시다면 7분부터 7분50초까지는 넘기시는게 좋고 제대로 확실한 북한군 개입정화을 보실려면 보시는게 좋습니다

얼굴이 잘려나간 장면이나옵니다 그것을 계엄군이 했을까요?당시 수사기록엔ㅊ전혀나오지도않으며 전기톱을 사용했단기록도 증언도없습니다

이는 필시 북한군개입의 증거입니다 진실을 밝히는 솔로몬의 앞에선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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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역사는 다시 쓰여야한다 5.18광주사태(5.18폭동)

2012/02/2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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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월 2일, 독일 베를린에서는 팔레비 이란 국왕의 방문을 맞아 학생들의 항의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26세의 대학생 베노 오네조르크가 경찰이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사망했다, 이 사망 사건으로 독일학생운동은 과격화 폭력화되면서 독일 적군파로 유명한 바더 마인호프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바더 마인호프는 백화점에 불을 지르고, 건물들을 폭파하고, 비행기까지 납치하는 등 공권력에 무력 대항하며 전 세계에 충격을 던졌다, 이들은 결국 투옥과 자살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이들의 행동은 테러였을까 민주화운동이었을까, 공권력에 저항하는 행동을, 혹은 공권력을 집행하는 경찰을 살해했다는 행동을 '민주화'라고 부르는 나라가 있다, 5.18폭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른다면 독일 적군파의 테러도 '항쟁'이 될 수 있고 '민주화'투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5.18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할 때이다,

교과부가 중학교 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5.18을 삭제했다고 광주와 5.18단체에서 공세에 나서는 모양이다, 그러나 광주 5.18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고개가 많다, 두 얼굴의 5.18, 폭동과 민주화라는 양면의 선택에서 선택권은 국민에게 있다,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단체들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첩첩의 산을 넘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이 기억하는 5.18에는 두 개의 얼굴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5.18 단체에서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김대중이 정권을 잡기 위해 광주시민들을 선동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정권이 바뀌고 나온 '광주민주화운동'이다, 양자택일의 선택에서 국민의 선택권을 5.18단체가 결정한다는 것은 오만이다,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은 5.18폭동이라는 헌법의 판결을 뒤집으며 나온 헌법의 판결이다, 헌법의 판결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의 입맛에 맞춰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판결은 믿을 수 없다, 국민들은 사건의 본질에서 진실을 선택하는 권리를 행사해야 할 것이다,

파출소를 습격하고, 무기고를 털고, 군인과 경찰에게 총질하고, 도청에 폭탄을 설치하고, 교도소를 습격하고, 군인들의 대열 위로 돌진하던 술 취한 트럭들, 듣기에도 민망한 괴담들, 이것이 진정으로 민주화의 모습이란 말인가, 이게 민주화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민주화라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김대중의 민주화운동'은 될 수 있어도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은 될 수 없다.

▼=시청앞 서울광장, 5.18 31주년 기념식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5.18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단장시키기 위해서 5.18단체들이 넘어야 할 산이 또 하나 있다, 2006년 12월 20일, 정동 세실 레스토랑에서는 탈북군인 출신들로 이루어진 '자유북한군인연합'의 주최로 5.18폭동에 북한군 특수부대가 투입되었었다는 기자 회견을 가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주장에 대한 제대로 된 반론은 없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는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5.18단체에서는 12월 21일 반박 성명서를 내었고, 이에 대해 다시 자유북한군인연합에서는 5.18폭동에 북한군 특수부대가 투입 되었다는 주장을 하며 여러가지 자료들을 제시하였다, 5.18단체들은 교과서에 5.18 게재를 주장하기 전에 5.18폭동이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증거들을 제시하여 국민들을 설득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그 전에 북한군 특수부대의 5.18 투입을 주장한 자유북한군인연합을 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광주 5.18폭동에 북한군이 투입되었을 거라는 정황은 수두룩하다, 자유북한군인연합에서는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5.18 광주사태의 진실을 모아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라는 책을 내었다, 이 책은 지만원 박사의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라는 책과 더불어 5.18의 진면모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저서들이다,

자유북한군인연합에서 주장한 북한군 투입의 몇가지 정황을 소개한다,

- 광주폭동에 참가했다가 북한으로 귀대한 참가자들의 증언이 존재한다,
- 광주폭동의 희생자들 중에 아직도 신원미상자가 다수 존재하고 있다,
- 잔인하게 훼손된 희생자들의 시신은 의도적인 북한군의 소행이다,
- 앞에 총을 맞은 사람보다 등뒤에 맞은 사람이 맞은 것은 비정상적이다,
- 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한 한 것은 일반적인 사태와 다른 현상이다,
- 탱크와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운전하는 것은 특수 전문가들만이 가능하다,
- 5.18폭도들 중에 어설픈 군인 복장자들이 많았다,

바더 마인호프를 탄생시켰던 67년 베를린의 학생시위에서 사망자가 발생할 때 대학생의 머리에 총을 쏜 사람은 서독 경찰관 카를하인츠 쿠라스였다, 그러나 2009년 5월 독일 언론에서는 쿠라스가 옛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의 첩자였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서독의 폭력 학생운동은 동독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던 것이다, 서독언론들은 이렇게 썼다, '1967년부터의 독일의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

 

정말 비교되네 TNT까지 깔아서 시민들 위협하고 계엄군 위협하던 폭도들은 민주화투사가 되고

독일은 폭동으로 딱 규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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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의 의문점 5.18광주사태(5.18폭동)

2012/02/26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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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북한에선 매년마다 5.18을 "광주 인민 봉기" 라 칭하며 보고회를 여는가? (4.19나 6월항쟁 등 기타 민주화 운동에 대한 보고회는 없다)


2.당시 봉기상황이 북한으로 실시간 생중계된 것


3.봉기자들이 뒤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것


4.현재까지 미해명으로 남아있는 신원 미상자 (총 16명으로 139-123을 가묘형태로 만들어 놓음)


5.전기톱에 의해두개골이 파괴된 시체


6.봉기군이 봉기군을 사살한 것



7.봉기군의 아지트와 봉기군이 탈취한 탱크·장갑차·윤전기재 안에서 대량 발견된 술병의 진의



8.방위산업체·감옥·방송국 등 국가기관 점거와 군 능력을 초월해 전면전을 불사한 것



9.특수부대 출신 탈북자들의 공통적인 증언
-북한 사회안전부 대위 출신 김용화 씨는 “봉기 당시에 북한 인민군 중위로 있었고 황해북도 송림에 위치한 사회안전부 연봉부대에서 자동차를 관리하며 인민군의 수송을 담당했었다”며 “그 당시 ‘너구리 작전’이라고 해서 대동강 하류를 따라 남한군의 옷을 입고 자동보총을 들고 나가는 것을 수차례 목격했다. 밤 1, 2시가 되면 10명 정도를 태운 배가 조용히 빠져나갔고 그때는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고 그 때 빠져나간 북한군들이 광주에 가기위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북한에서는 광주사건은 북한에서 계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그것을 민주화항쟁이라고 하는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북한교도지도국 대위출신의 최준일씨는 “북한특수부대출신들은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다”며 “그 당시 나는 완전 전투태세로 무장한 채 광주사건에 대한 24시간 긴급속보 전해 들으며 20여일간 출전명령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야 상관들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대대가 광주에 투입됐고 희생도 많았고 공로도 있었다고 들었다. 3분의 1이 희생되고 나머지 2는 귀대했다”고 말했다.



10.김일성, 김정일의 어록
-김일성은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그중에서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 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김일성이 1986년 1월 6일 평남도 덕천 교도지도국본부에서 열린 지도국산하 여단장 정치위원을 위한 군사정치일군 상학(수업)에서 발언한 내용이며 전 인민군에 배포된 정치상학 자료에서 출처를 얻었다고 임 대표는 밝혔다.




또 김정일은 “광주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길 수 있었지만 결과는 진압됐다. 땀이 적었고 훈련부족이다. 교도지도국은 남조선해방의 전초병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당장 나갈 수 있게 만단의 동원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는 김 위원장이 1982년 3월 북한특전여단들이 북부지구에서 벌린 쌍방 게릴라 훈련장에서 발언한 것이며 출처는 교도지도국 각 여단 참모부 및 대대참모부라고 밝혔다.



11.북한에 5.18과 관련된 무덤이 존재하는 것


12.당시 남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공산권 무기의 발견
-PPSH-41 (당시 공산권의 주력 무기) 외에도 수십정


13. 518 주동자 윤기권의 월북
-윤기권은 5.18이 끝나자 수 억원의 보상금을 받고 곧바로 월북했다.



14. 5.18 사망자의 사망원인

참고로 검찰이 실제로 증거로 사용하고 재판에 회부됫던 증거들입니다
모바일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블로그앱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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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5.18민주화운동 전두환 광주사태 광주사태가 정답이다
5.18광주사태(5.18폭동)

2012/02/14 22:51

 

복사 http://blog.naver.com/yhnnhy12/130131371481

전용뷰어

 



이거시 폭동이 아니고 무엇이당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민군 장교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임.

눈앞에 증거를 보여줘도 안믿는 사람들은 귀는 장식일까요?






518 민주화운동같은 소리하네 ㅋㅋㅋㅋㅋ


민간인이 불법으로 무기를 소지하면 모다?


범죄~




그 불법소지한 무기로 군대를 향해 발포하면 모다?


폭도~




그게 또 커지면 모다?


반란~





결국 오일팔은 뭐다?



폭동~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들이대도 가려질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어떠한 그럴듯한 이유라도 민간인이 총을 잡고 자국의 군대를 향해 발포하는 건 명백한 반국가행위임. 법을 어기는 놈들은 몽둥이맛을 봐야지



북괴군의 선동으로 인해 선량한 시민들이 피해를 받은 아픔의 역사?



독재정권에 대항한 순국선열?ㅋㅋㅋㅋㅋ 4.3사건쯤은 되야 아픔의 역사라고 하지. 무기갖고 대항하다가 힘딸려서 몰살당한걸 민주화운동?ㅋㅋㅋㅋㅋ



아마 억지력이 더 강했으면 나라 엎으려고 했을걸ㅋㅋㅋㅋ아니라고 해봐라 얼른


http://www.ilbe.com/18369458


그리고 어떤 분이 5.18 당시 광주에 계셨던 어머니 에피소드를 올림.


 

그때 우리어머니 고등학생이셨는데


대학생 양아치새끼들이 지랄꼴깝은 다떨어서 뵈기싫었다고 함


마치 광주사람들 모두가 무장폭동을 원했던듯이 말하나


실제론 뭐 대학생들 뿐이지 뭐


실제로 교전땐 진짜 총소리나고 무서워서 집에서 이불 꽁꽁 싸매고 그냥 집안에만 박혀있으셧다고 하시네


결론은 몇몇의 선동분자들이 개새끼


http://www.ilbe.com/18693353


 

 

 

 

 

 

 

1. 518 최초 사망자가 전경 4명이었떤 이유(폭동분자들이 버스로 밀어버림)

 

 

 

 

 

2. 순식간에 유언비어가 퍼지며 무기고 7개를 동시 습격한 사실

 

 

 

 

 

3. 폭동분자들 탱크 몰고 민간인들을 잡아 다가 투항시킨 사실

 

 

 

 

 

4. 교도소 죄수들을 풀어준 사실

 

5. 방송국을 불지른 사실

 

 

 

 

 

 

6. 방송국 지하에 tnt 설치와 도청 장치 설치한 사실

 

 

 

 

 

 

7. 어린 청년들까지 폭동에 동원한 사실

 

 

 

 

 

 

8. 매년 북괴 들이 518 기념을 하는 사실

 

 

 

 

 

9. 김일성이가 5.18때 남하하지 못한걸 후회했던 사실

 

 

 

 

 

10. 윤기권 같은 색희가 돈 챙겨먹고 월북한 사실

 

 

 

 

 

 

11. 518 폭동관련 사망자 부상자 조사 결과 폭동군들이 사용했던 칼빈과 m1에 의한 민간 사상자가 더많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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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 유언비어 중에 여학생의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여직원의 팔을 도끼로 자른다는 내용이 있음

이것은 유언비어로 과장된 선동문구로 흔히 알려져있는데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것은 실제 북한에서 생방송되었으며, 수십 차례 재방송을 했음

 

<광주 청문회는 그러나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발포 문제와 지휘 책임 문제, 초기 과잉 진압 문제 등 핵심 문제에 대해 증인들의 증언이 상반되거나 엇갈려 실체규명의 확실한 실마리를 찾지 못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발포 문제에 대해 최 웅 당시 11공수여단장 등 공수부대 관계자들은 5월 21일 오후 1시 반에 시민군이 먼저 총격을 가해 자위권 행사의 일환으로 발포를 했다고 증언했으나 야당 측과 피해자 측은 그 때는 시민군이 무장을 하기 전이며 공수부대가 발포를 해 시민들이 정당방위로 무장을 하게 됐다고 맞서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5.18시민군과 공수부대 중 어느 편이 선제 발포하였느냐는 5.18측으로서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을 것이다. 총성이 올린 때는 정확히 오후 1시경이었고, 5.18측은 불과 30분만인 오후 1시 반 이후에 시민이 무장했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어거지 주장은 한달 후인 1989년 1월 26일 광주청문회 때 놀랍게도 시민군편 증인 김영택 기자의 증언에 의해 와장창 무너졌다. 위 동영상 시작후 2분 24초에서 우리는 김석진 기자의 다음과 같은 멘트를 듣는다:

<김영택 씨는 이에 앞서 관광버스가 돌진해오기 직전 시위대가 탄 APC 장갑차가 공수부대 대열로 뛰어들었으며 이 때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치어 한 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영택 씨는 이처럼 낮 12시58분 공수부대가 첫 집단 발포하는 순간 시위대 쪽에서 다른 총 소리가 난 것으로 미루어 시위대도 함께 발포한 것으로 생각하며 이미 오전 중에 시위군중이 카빈총을 들고 간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함으로써 오전 1시 반 이후에 시민이 무장했다는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공수부대 집단 발포"라는 말은 국민을 속이기 쉬운 말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진실은 5월 21일 전남도청 앞의 공수부대는 총 200발이 실탄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민군은 그보다 천배가 넘는 실탄, 즉 20만발이 넘는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 위 사진에서 우리는 2005년에 또 발견된 당시 시민군 실탄을 본다. 그러면 실탄이 장진된 총을 가지고 온 시민군과 달리 실탄이 없었던 공수부대는 어떻게 그날 오후 1시경 200발이 실탄을 보유하게 된 것이었을까? 위 동영상 시작 3분 27초에서 김석진 기자의 멘트 "두 번째 증인으로 나온 임정복 당시 31사단 보좌관은 5월 21일 오후 도청 앞에서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할 때 실탄 두 상자를 공수부대에 인계했으며"를 듣듯 그 실탄은 공수부대 실탄이 아니라, 보병부대 31사단 실탄이었다.

그리고 31사단이라는 부대명으로 일컬어지는 광주향토사단 96연대 1대대 소대장 중위 한동석이 그 실탄을 전달한 장본인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계엄군 장교=공수부대 장교 이미지를 시청자들에게 심어주나, 한동석 중위는 공수부대 장교도 육사출신 장교도 아니었다. 그는 ROTC 출신이었다. 무엇이 대학생과 전경의 차이인가? 학교 다니다가 전경으로 지원하면 학생신분이 불과 몇달만에 전경신분으로 바뀐다.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한동석 중위가 바로 그런 입장에 있었다. 그런 그가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울분을 느끼며 2007년 5월부터 역사학도의 블로그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를 찾았다.

900개가 넘는 댓글이 빽빽한 이 블로그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는 2007년 5월부터 몇달간 두가지 유형의 울분의 전투장이었다 (댓글이 워낙 많아 댓글 페이지 1을 찾아 댓글 입력일 표시가 <한동석 2008.05.08 19:10>로 되어있는 댓글부터 보셔야 함.) 그리고 너무 댓글이 많아 지금은 한참 댓글 페이지를 뒤로 돌려야 하는 그 블로그 댓글 토론장이 한동석 중위가 실명으로 역사의 비밀을 증언하는 증언장이었다. 한편으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공수부대의 잔인성에 울분을 터뜨리며 그 울분을 거기 터뜨리는 네티즌들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사건의 현장 증인 한동석님은 전혀 다른 종류의 울분, 즉 영화 "화려한 휴가"의 역사왜곡에 울분을 터뜨리며 생생한 증언 보따리를 하나하나 풀었다.

무엇이 팩트였는가? 21일 도청 앞의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없었다. 탄통 3개는 한동석 중위기 헬기로 철수하면서 본인의 판단에 따라 7공수에 전해 주었던 것이요, 심지어 31사단 탄통을 7공수에 인수인계하라는 명령조차 없었다. 위 동영상에는 나오지 않으나 <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는 특전사 대대장의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광주청문회 당시에는 그런 진실된 증언은 묵살되었었다. <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연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었는가? 오직 헬기로 철수하면서 자신의 탄통을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주었던 장본인만이 그 사실과 그 상황에 대한 증인이 되어줄 수 있었다. 그래서 청문회 당시 국회 청문회장으로 전화를 걸지 못했던 것이 오래오래 한으로 남는 한동석님은 그 심경을 이렇게 토로한다:

<<저는 5월 21일 오후 2시경까지 도청 광장에 포위되어 있다가 불행 중 다행으로 헬기로 탈출하기 전에 저희들이 휴대 중이던 <국가보안목표 경계근무용 M-16 탄>을 제7공수부대 *** 대위에게 전달한 장본인입니다. 1988년(?) 청문회 TV생방송 당시, 저의 신분이 신분(해군 군무원)인 지라 오히려 진실를 이야기해도 더욱더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 뭐라고 표현할 수없는 위압감과 가족들의 안전이 염려되어 ... 전화 다이얼을 돌려서 "특전사 대대장의 말<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이 맞고, 31사단 병력 소대장(본인)한테서 받았음.을 증언해야 했었는데....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 진실은 언제나 하나 밖에 없고 반드시 밝혀지리라는 신념을 믿고 , 눈물을 머금고 인내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전두환 전대통령이 구속되기 직전에 <서울 지검>에 출두하여 위의 소신을 검사 앞에 처음으로 증언 하였던 것입니다. >>

영화 "화려한 휴가"에 스토리가 있는가? 광주사태의 진정한 스토리 중 하나가 바로 한동석 중위의 스토리였다. 그는 20일 밤 MBC방송국이 불타고 있었을 때 부하들과 더불어 그 속에 갇혀 목숨이 위태로왔다. 용산참사를 생각해 보면 불타는 건물 속에 갇혀있는 자들의 위기감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부하들과 더불어 모두 타죽는데도 소속 부대로부터 철수 명령이 없었다. 철수명령이 없는한 군인은 경계근무지를 이탈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그는 방송국 옆집 담장을 넘는 방법으로 비상탈출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폭동을 일으키는 난동자들에게 붙들리면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기에 심야에 겨우겨우 부하들을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키다보니 도청으로 와서 밤을 새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무장시민군에 겹겹이 포위된 그곳이 또 하나의 사지였다. 다행히 31사단이 헬기를 보내 자기 소대 병력을 비상탈출시켜 주었으나, 사지에 공수부대를 남기고 탈출하는 것이 너무도 미안해 탄통을 넘겨주었던 것이었던바, 그 사실을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저는 그 당시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의 한동석 중위입니다.80년 5월 20일 밤 9시 30분경에 시위대의 방화로 불타오르고 있는 MBC방송국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당시 향토사단 군인 소대장입니다" MBC 방송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비상 탈출하여, 밤 11시 경부터 다음 날인 5월 21일 <도청 발포사건>직후까지 (불행 중 다행으로 도청광에 공수부대와 같이 포위 되어 있었던) 도청광장에 있다가 오후 1시 반경에, UH-H 헬기로 31사단 연병장으로 철수했던 장본인입니다. 헬기로 철수작전하기 전에 , 5월 20일 밤까지 MBC방송국과 기독교방송국,전일방송국(?) 에 배치되어 있었던 3곳의 경계용실탄 3탄통(한 탄통 안에는 M-16소총 20발 짜리 탄창에 15발씩 장전되어 있었음)을 제7공수 *** 대위님께 전달하고 철수했던 바, 도청 광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 .... 27년 전에 발생한 그 상황의 진위를 가리는데 한가닥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발포명령은커녕 실탄을 인수인계하라는 명령도 실탄을 인수인계받으라는 명령도 없었다. 단지 그것은 사지를 탈출하는 소대장과 사지에 남은 공수부대의 한 장교 사이의 우발적인 행동이었다. 사지에 남은 공수부대원들이 살아남으려면 공포탄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겠기에 넘겨주었던 것뿐이었다. 너무도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우발적으로 취해진 그 행동에 대해 한동석님은 이렇게 증언한다:

<<7공수 외는 저가 잘모르지만 7공수는 실탄이 없었기에 철수하는 저희 병력에게 <실탄 인수인계>를 요구하지 않았겠습니까? 자기도 실탄을 보유하고 있는 데 다른 부대에게 실탄을 요구하는 경우는 어떠한 경우라도 없을 테니깐요.
<실탄 인수인계>라는 용어를 저가 표현한 것 뿐입니다.. 특전사 병력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냥 전달해주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들이라 그당시에 순간순간 지휘자(본인)의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상부에 보고하고 할 겨를도 없었읍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7공수 대대장은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하는 지도 몰랐을 것이며, 특전사 *** 대위도 사후에야 실탄 습득에 대한 보고를 했을 것일라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보고후 지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

전북 금마에서 온 7공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실탄을 보유하지 않고 있었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러면, 서울에서 온 11공수 3개 대대 병력에는 실탄이 있었는가? 11공수에도 실탄이 없었던바, 그 사실을 1995년 2월13일 국방부 검찰부 고등검찰관실 신문조서에서 안부웅 광주사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은 이렇게 진술한다:

<<교신이 끝난 뒤 조금 있으니 UH-1H 헬기가 상무관 앞에 착륙하길래 제가 벌써 교대병력이 왔나 하고 살펴보니 상무관 앞 쪽에서 일반 보병부대 전투복을 입은 병사들이 헬기 쪽으로 뛰어 가서 탑승을 했습니다. 제가 주위 병사들을 보고 ‘저 병력은 뭐지?’ 하는 동안 헬기는 이륙했는데, ‘그 병력은 31사단 병력인데 MBC 방송국을 경계했던 병력이랍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혼자 생각하기를 ‘배속받은 병력은 나 몰라라 하고 제 자식만 챙기는 놈들’이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대대장님! 병사들이 31사단 병사들로부터 실탄을 얻은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해 제가 ‘그러면 안되는데, 병사들이 실탄을 가지면 안되고 최소한 중대장급 이상이 휴대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병사들이 진짜 실탄을 얻었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데, 당시 저도 너무 피곤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제가 병사들이 실탄을 얻었는지, 그리고 병사들에게 배분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 실책입니다. 당시는 병사들이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실탄을 얻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31사단 병력이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78 )

이로써 11공수에도 실탄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한동석 중위가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준 세 개의 탄통에 들어있던 실탄 수는 총 200 여발이었는데, 7공수가 독차지하지 않고 그 중 일부를 11공수 병사들에게도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저 위의 탄통은 시민군 탄통이지만,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21일 도청 앞의 시민군은 20만발이 넘는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 (탄약고에서 시민군에게 피탈당한 실탄 수를 근거로). 그러나, 근 천 명의 공수부대원들에게는 고작 총 200발의 실탄밖에 없었다. 이 숫자대로라면 병사 한 명당 5개 이상의 실탄을 가질 수 없었다. 행정병 등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하사관급 이상의 병사와 장교들에게 10발씩 지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상부 명령에 의한 지급은커녕, 현장 지휘관의 명령에 의한 지급도 아니었다. 31사단 96연대가 철수하면서 우발적으로 넘겨준 실탄이 일부 병사들에게 우발적으로 배분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의 원인이 되었던 그 200 여발의 실탄을 한동석 중위가 보관하고 있게 된 경위는 무엇이었는가? 한동석님이 그 경위를 설명한다:

<<3탄통의 실탄은 저희 대대(담양)에서 출동할 때(5월 중순경) 소대장 3명과 30여명의 병력이 3곳으로 나누어서 광주 시내에 <국가보안목표경계임무>를 띠고 배치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MBC 방송국, 그리고,전일방송국 & 기독교 방송국에 *중위와 *소위가 배치되면서 경계용실탄 1탄통씩 보유하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저희병력이 5월 20일 밤 9시 반경에 MBC방송국에서 비상탈출할때 실탄과 소총만 휴대하고, 긴급하게 나와, 우여곡절 끝에 XX경찰서을 잠시 경유한 후에 무등산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우연히 도청 광장에서 먼저 철수한 *중위와 *소위를 만나 저희 부대원 전원(장교 3명 & 30여명의 병사)이 합유하게 되어서 각각 보유하고 있던 실탄을 합한 것이 모두 3탄통이 된 것입니다. (그 3탄통의 수량이 약 200 여발 정도 될 겁니다) 그리고, 2 -30 여분 후에 저희 31사단 병력은 UH-1H 헬기로 31사단 연병장까지 철수하게 됐던 것입니다.>>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는 공수부대에 살인 목적이 있었다는 거짓 인식을 주기 위해 조작되었다. 그러나, 실제 사건에서 살인 목적을 가진 자들은 시민군 틈에 있었다. 화염병이 일으킨 용산참사를 생각해 본다면 도청 앞에서 시민군 화염병에 맞아 온몸이 화염에 쌓이거나 시민군 장갑차에 깔려 죽거나 다친 병사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 한동석님은 그 광경을 이렇게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 당시(5월 21일)에 계엄군(31사단병력과 공수부대병력)은 도청 분수대를 거점으로 도청 광장에만 남아 있었지요. 그래서 도청 광장에 있는 군인들을 몰아 내기 위하여 도청 건물 뒤 뿐만 아니라 사방 팔방에서 차량, 화염병, 돌멩이 등 등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공격을 했으며, 최후의 저지선만 남아 있다가 금남로 대로 쪽이 먼저 뚤리면서 발포가 났고,후진하던 공수부대 장갑차에의해서 공수부대 요원이 피해를 보았고, 그 직전 까지는 맨몸으로 인간 바리케이트를 치고(대형을 갖추고 버팀) 밀집된 대형의 앞이 보이지 않는 관계(키가 큰 장병이 앞에 선두에 서고 키가 작은 장병은 후미에 섰기 때문에) 후미에 서 있던 공수부대 장병들은 날아오는 화병병을 볼 수 없기에 피하지 못하고 철모에 화염병이 맞아서 순식간에 머리부분 부터 몸 전체로 화염에 쌓이는 처참한 광경도 목격하면서 분개했던 기억도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부터 퍼진 광주학살 유언비어는 시민군 무장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조작되었다. 사건의 선후에 대해 속이는 이 유언비어와 달리 무장시민군이 계엄군을 공격하는 사건이 먼저 있었다. 공격하는 시민군 편에서 계엄군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그 실제 상황을 생각해 보라. 무장시민군 편에서는 헬기로 철수하는 31사단 병력이 공수부대에 실탄을 넘겨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민군 장갑차가 공수부대를 덮쳤을 때 시민군 편에서는 공수부대에 실탄이 있는 줄 몰랐기에 그렇게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전날 밤 시민군 편의 선무방송이 "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는 식으로 들렸다. 만약 당신이 ROTC 출신 장교로서 현장에 있었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느끼며 받아들였겠는가? 한동석님의 다음 증언이 그 상황을 객관전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어떻게 글로 설명하기가 그렇습니다만, 전쟁터라고 생각하시는 게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50월 20일 밤 상황은 시민들한 테 잡히면 끝장입니다. 그래서 챙피스러운 이야기지만, 무기로 시민들을 제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무작정 돌과 화염병을 맞을 수도 없고, 외부에서 지원병력이 시내로 들어올 수도 없이 고립이 된 상황인데, <귀가>라니요! <야영> 잠을 잘 수가 있나요? 목숨이 촌각에 달려 있는 데... 오죽하면 저가 단독으로 MBC방송국에서<탈출을 결심>하고 무전기 까지 끄고 병력을 인솔하는데 방향만 무등산 쪽으로 향했겠습니까?

그런데 운 좋게도 광주 경찰서(?) 까지 1차 탈출에 성공하여 잠시 쉬고 있는데, 뒤를 돌아 보니 MBC 방송국 건물과 옆의 병원 옥상까지 불길이 완전히 쌓였던 장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무전병이 실수로 무전기를 개방하여 교신하는 과정에서 2소대(분대병력)와 3소대(분대병력) 가 안전한(공수부대가 집결되어있었음) 도청광장으로 먼저 대피를 하게되었고, 저희 병력은 경찰서에서 간편한 복장으로 무기와 실탄만 챙겨서 무등산 방향으로 2차 탈출을 시도하다가 우연히 2,3소대 병력을 만나게 되어서 선임 소대장인 저가 96연대 1대대 소속 3개팀(선임소대장 저를 포함하여 두명의 소대장<중위 & 소위>)을 재편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가 자정 무렵(5월 21일 0시) 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영화에도 나오는 젊은 여성의 선무방송은 지금도 소름이 끼칠 정도 입니다. (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는 식의 엠프 방송)>>

위 동영상에서 김영택 기자는 12시58분경 시민군 APC 장갑차가 공수부대 대열로 뛰어들어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치어 한 명이 현장에서 사망하는순간 시민군과 공수부대가 동시에 발포하였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총성에 대해 보다 정확하고 전문적인 감각을 가졌던 한동석 중위는 분명히 시민군 총성이 먼저 울렸다고 증언한다: "저가 주장한 5월 21일 최초 총소리는 금남로 방향의 특전사 인간 바리케이트가 "탕 !~ "하는 사제총(?) (M-16소총 소리는 아님)가 나면서 뒤로 밀리면서 양쪽으로 갈라졌던 것입니다."

안부웅 광주사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 역시 시민군 편에서 선제 발포하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13시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와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t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78
)

안부웅 중령과 김영택 기자가 목격한 이 상황이 바로 한동석 중위가 헬기로 철수하면서 본 상황이었다. 실탄을 인수인계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도 없었으며, 실탄을 인수인계했다고 보고할 겨를도 없었다. 탄통 3개를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주며 30명의 96연대 병력을 헬기에 태우는순간 시민군 편에서 먼저 총성이 울리고 이어 약 1분간의 맞사격이 있었으며, 모든 것이 아주 순식간에 발생하였다. 한동석님은 그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은 도저히 보고 절차를 밟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실탄 인수인계>라는 용어를 저가 표현한 것 뿐입니다.. 특전사 병력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냥 전달해주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아 주 급박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들이라 그당시에 순간순간 지휘자(본인)의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상부에 보고하고 할 겨를도 없었읍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7공수 대대장은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하는 지도 몰랐을 것이며, 특전사 *** 대위도 사후에야 실탄 습득에 대한 보고를 했을 것일라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보고후 지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시위대가 순간적인 기습 공격으로 인간 바리케이트 방어대형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대형 트럭의 질주<공격>로 대기 중이던 대형이 각자 흩어져서(도청 정문 을 통해 내부로) 부대를 재정비하는데 지휘자들은 정신이 없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읍니다. >>

그리고 시민군 편에서 선제 발포하였다는 사실은 시민군 김수영이 증언하는 시민군 총기오발 사고로 증명된다. 최초로 총성이 울리던 순간을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당시 공수부대가 도청 안에 있었는데, 시민들이 계속 밀고 들어와 나와 삼촌은 떼밀리다시피 해 도청 앞까지 가게 됐다.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공포다."

누군가 외쳤다. 까닭을 모르는 뒷시위대열은 자꾸만 앞으로 밀려왔다. 삼촌과 나는 앞사람을 꼭 붙잡고 미문화원 쪽으로 빠지는데 뒤에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소리쳤다.

"아저씨 아저씨, 나 총 맞았어요."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801.html 에서 네번째 작은 제목 "21일 도청 앞 발포" 이하.)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는 무장시민군이 섞인 인파였다. 운집한 전체 시민 수는 이십 만이요, 무장시민군 수가 오천이라 했다. 총성이 울렸는데도 사람들이 도청 앞쪽으로 밀려왔다. 만약 공수부대 집단발포라는 것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밀려올 리가 있겠는가? 현장의 시민들은 공포로서 이해했으며, 더구나 총소리 방향을 모르고 있었다. 김수영은 공수부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그가 들은 것은 뒤에 따라오던 청년이 총 맞았다고 소리친 것, 그가 본 것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뿐이었다.

시민군 진영에서 먼저 총성이 울렸음을 한동석 중위와 안부웅 대령이 분몋이 들었다. 그리고, 시민군 진영에서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었음을 시민군 김수영이 분명히 목격하였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총을 반납해 버렸다. 동구청 옆(현재) 야광카바레 부근으로 갔는데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이 3-5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청년의 다리를 맞혔다. 청년이 다리를 잡고 뒹굴었다. 또 한 청년은 복부에 총을 맞고, 임신한 아줌마는 가슴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

시민군 지프차 위에서 오발 사고가 났다고 한다. 시민군 지프차가 왕래하고 있었다는 것은 도청을 점거할 목적으로 시민군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말한다. 시민군 지휘부가 지프차를 타고 금남로 일대를 왕래하며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지프차 위에서 총기 오발 사고가 있었다는 것은 시민군 진영에서 계속 발포 사건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최초의 총성은 시민군 진영에서 울렸다. 즉, 5.18시민군이 선제 발포하였다. 어쩌면, 그것은 시민군 김수영이 서술하듯이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수영이 목격한 잦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는 탈북군인들이 증언하듯 폭동 선동을 위한 의도적 오발사고였을 수도 있다. 그 경우 살인의도를 가진 자들은 시민군 틈에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에서 더러는 철모까지 쓴 폭도들이 지프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의 진실은 시민군 편에서 총성이 울렸다는 것이며, 그 총성 중에는 시민군 김수영이 증언하는대로 시민군 지프에서 발생한 총기오발 사고도 있었다.


(* 상단 동영상은 1988년 12월 22일, 1989년 1월 26, 27일의 광주청문회 영상물을 함친 동영상인데, 세번째 영상물인 27일자 광주청문회 표지 다음에 26일자 동영상이 겹쳤습니다. 도청진압작전 사망자 수에 대한 5.18측의 허위 주장이 드러나는 1989년 1월 27일자 광주청문회 영상물은 http://study21.org/518/video/auditing_5-27.ht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개소리하네 병신새끼들 무슨 약쳐먹은적도 없고 당시 투입부대는 전라도 출신 부대장에 전라도 출신군대들이었는데 뭔 팔이 짤려 임신부가 죽긴뭘죽어 개소리 하고 자빠졋네 아오 진짜 이걸 믿고 시위하러 나왔다가 경찰서 털고 시작된게 5.18의 시작이고만

http://study21.org/518/video/auditing_518lie.htm

광주폭도들의 최초 무장시점

지들 주장으로는 20일 21일 즉 진압이 시작되고 정당방위차원 으로 무기고를 털었다는데??

 

김대중 세력이 제2의 광주사태를 일으키겠다며 미국 쇠고기에 관하여 지난 여름에 퍼뜨렸던 유언비어들이며, 국민 여배우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토론게시판의 유언비어성 글들은 아직도 우리 한국사회가 얼마나 유언비어에 취약한지를 보여주는바,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 대표적인 예가 광주사태 당시 그리고 그 이후에 퍼졌던 유언비어들이다. 광주에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 그 가해자들은 당시 시민군이라 불리어졌던 5.18무장단체들이었음에도 선량한 군인들이 누명을 뒤집어썼다. 폭동을 일으킨 자들과 그 동조 세력은 책임전가를 위해 유언비어를 지어냈으며, 지난 28년간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런 불순한 픽션에 속아왔다.

광주사태 논의의 대상은 폭동이지 시위가 아니다. 5.18측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시민군이라 규정하였으며 시위대라 부르지 않았다. 즉, 5.18사건이란 시위가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폭동이 발생한 사건이었다. 시위란 5월 17일까지 진행되었던 시위를 말하며, 5월 18일 이후에는 학생들이 주도하는 시위가 더 이상 없었고, 단지 정체 불명의 무장단체가 주도하는 유혈무장폭동이 있었을 뿐이었다. 박남선씨와 김대중의 최측근 윤상원 등이 시민군 리더였으되 아직도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별도의 무장조직이 있었다. 위의 광주청문회 영상물에서 우리는 당시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가 시민군편 증인이었음에도 복면 무장조직이 있었음을 증언함을 듣는다 (아래의 복면무장단체 사진 참고).



광주청문회 위원장이 문동환이었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자는 격이었다. 문동환은 증인으로 출석해야 할 인물이었지, 결코 광주청문회를 주관하여서는 아니될 인물이었다. 광주사태는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유혈폭동을 선동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일어났다. 김대중과 문익환 목사가 제2의 동학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연설했었을 때 바로 그것이 유혈폭동 선동이었다. 특히 문익환 목사는 동학난과 같은 유혈폭동을--유혈폭동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역사의 목적으로 여기는 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민중의 계급투쟁을 역사의 목적, 역사적 사명과 동일시하던 문익환 목사의 사관은 분명 공산주의 사관이었으며, 최소한 좌익사관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폭동을 선동하였던 자들의 이념이었기에 문익환 목사의 동생 문동환의 편파적 시각에 청문회를 맡겨서는 이니되었다.

폭동 선동가들에게 민중의 계급투쟁이란 이념이 있었다 하더라도 폭동 선동의 방법은 매우 치졸하였다. 윤상원으로 대표되는 김대중 최측근들은 5월 18일 아침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을 여수로 보낸 후에 이른바 "박관현 사망설"이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리고, 광주경찰에 의한 "박관현 사망설"이 폭동의 기폭제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5월 18일 오후 한시 반부터 금남로 일대에서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퍼져나가기 시작하자마자 수천 명의 시민이 갑자기 난동자들로 변해 광주의 여섯 파출서를 돌과 화염병으로 파괴하였다. 그리고, 그날 5월 18일 낮의 화염병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김대중의 최측근 윤상원이 미리 제조해 놓은 것이었다. 따라서, 왜 김대중 세력이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화염병을 미리 제조해 놓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어야 했었으나 문동환 위원장이 주관하는 광주청문회는 한번도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었다.

5월 18일 박관현은 죽은 것이 아니라, 여수에 있었으며 여수에서 광주폭동을 생중계하는 북한방송을 듣고 있었다. 1980년 5월 18일 저녁부터 북한에서 광주폭동이 생중계되고 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언이 바로 박관현과 동행했던 당시 전남대 학생회 총무 양강섭씨의 증언이다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706.html ). 그리고, 5월 18일부터 북한에서 다른 방송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광주폭동을 생중계하였다는 사실은 그날 이미 북한 세력이 광주에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그러면 북한 세력이 어떻게 미리 알고 광주에 잠입해 있었으며, 어떤 방법으로 실시간 북한에 사태의 전개상황을 전송하고 있었는지도 청문회 질문 대상이었어야 했었을 것이다.

박관현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일단 김대중 세력이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린 후에는 다시는 광주로 돌아올 수 없었을 뿐이었다. 만약 확인되지도 않은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에 흥분하여 파출서들을 돌과 화염병으로 파괴하고 세무서에 불을 지르는 것이 광주시민들의 반응이었다면 오늘날 최진실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인가? 박관현은 죽은 것이 아니었지만 최진실은 정말로 죽었다. 전자의 경우 사망설은 단지 유언비어 뿐이었는데도, 일본에서 푸른 눈의 목격자로 훗날 알려진 힌츠페터가 달려오게 할 만큼 그 영향력이 컸던데 비해, 후자의 경우 사람들이 국민 여배우를 너무 쉽게 잊고 있다. 그러나 양자 모두의 경우에서 유언비어는 정당화될 수 없다. 확인되지도 않은 사망설 유언비에 흥분하여 파출서를 파괴한 행위도, 한 가련한 여성을 상대로 무수한 군중이 미확인 유언비어로 공격한 행위도 결코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박관현 사망설은 단지 유언비어뿐이었는데도 폭동을 일으켜야 했을 이유였다면 5월 20일 시민군이 버스로 순경 4명을 숨지게 하였다는 뉴스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만약 광주청문회가 공평하려 했다면 분명히 짚고 넘어갔어야 했을 사안이었다. 윤상원으로 대표되는 김대중 최측근들은 이미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수일 전에 버스를 징발하여 유혈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기에 이것은 광주사태 발생원인에 직결되는 문제요, 따라서 결코 간과할 문제가 아니었다. 또 그날 새벽 시민군이 시민군 차량으로 3공수 정관철 중사를 깔아죽인데 대한 광주시민들의 반응은 무엇이었던가?

5월 20일 새벽에야 광주에 도착한 3공수는 19일 온종일 식사를 하지 못했기에 19알 저녁식사분이라도 늦게나마 급식 수령에 나서야 했다. 그런데 일군의 난동자들이 급식차를 쓰러뜨리니 놀라고 당황하여 달려온 정관철 중사를 난동자들은(그 다음날부터 시민군이라 불리움) 그 자리에서 시민군 차량으로 깔아죽였던 것이었다. 5월 20일 새벽 광주에 갓 도착하였기에 아직 폭동 진압에 동원되지도 않았으며, 전역 명령을 받고 한 달 후 제대할 몸이었으며, 더구나 임신 9개월 된 부인이 있었는데 광주시민들이 그를 죽여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시민군에 의한 정관철 중사 살인사건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정서는 무엇이었던가?

시민군은 경찰과 군인만 차량 사고로 죽인 것이 아니라, 무수한 광주시민을 차량사고로 죽였다. 광주사태의 처참한 사진들이 있다. 그러나 그 타박상 가해자들은 시민군 차량 사고를 낸 시민군이었다. 시민군의 책임전가 유언비러에 의해 선량한 군인들이 누명을 뒤집어 썼으되 실제 가해자는 시민군이었다. 광주사태 당시 자가용 운전기사였으며 훗날 전남대 총무과 근무했던 오병길씨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여기저기 군용차량이 흩어져 있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온 것 같았다. 자동차에 대한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차량사고도 많이 발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용납품차량을 운전경험이 미숙한 시위대들이 무작정 끌고 다녔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장에 있었던 납품차량은 시운전도 하기 전의 것으로 냉각수도 안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시민군 사망 역시 모두 시민군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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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의 집단발포 사건의 진상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4명 사망이요, 시민군이 시민군 장갑차로 군인들을 깔아죽이면서 선제 발포하자 이에 놀란 공수부대원들이 공중으로 공포탄을 발사하였기에 누명을 쓰게 된 것뿐이었다. 청문회에서 발포명령자를 찾았으나 실탄 지급 없는 발포 명령이 있을 수 있겠는가? 7공수는 단 한 개의 실탄도 없어 광주향토사단 한동석 중위에게 경계근무용 실탄 2상자(200발)를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군은 30만발의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탈북군인들은 시민군끼리 총격전이 있었다고 증언하거니와 전남대 오병길씨 역시 시민군 편의 발포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앰뷸런스 소리, 소방차 소리, 불타오르는 건물, 피어오르는 듯한 예광탄 , 클랙션 소리,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를 하듯 쏘아 대는 총소리 등등으로 휩싸인 도시를 보았다. 그때 광주 시내에는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쏘는 총성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사망자를 부검 해보니 군에선 쓰지 않았던 카빈 총상으로 죽은 이들이 많았다. 광주 탈환 뒤 회수된 아세아 자동차의 트럭을 중엔 뒤집어 지고 부딪친 것이 무척 많았다. 이런 교통사고에 의해 숨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탈북군인들은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한 주요 목적 중 하나가 시민군끼리 오인 총격전을 벌이게 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하거니와 광주사태 당시 재수생이었던 시민군 장준영도 실제로 피아를 혼동한 시민군끼리의 총격전이 빈번하였음을 증언한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29 ). 여기서 북한군의 개입 여부는 별도로 한다 하더라도 시민군 총격전에 의한 시민군 사망의 가해자가 누구냐의 문제는 간과할 수 없다. 5월 21일 이후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던 광주 시내에서 시민군이 시민군에게 총구를 겨느고 있었을 때 그 가해자가 누구였는가? 왜 엉뚷나 군인이 누명을 써야 하는가?

그러기에 광주청문회에서 5.18무장단체의 최초무장시점에 대한 규명은 무 척 중요한 문제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5.18측은 광주청문회 때 그 문제에 정직하였는가? 총기로 무장하고 발포하면서 하는 시위는 없기에 5월 21일부터 시위대 대신 시민군이란 명칭이 통용되었거니와 그 시민군의 최초무장시점은 나주경찰서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한 5월 19일 3시였다. 흔히 광주청문회에서 다 밝혀졌다고 말한다. 무엇이 밝혀졌는가? 정상용 당시 광주도청 항쟁 지도부 외무부장의 위증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밝혀진 것은 5월 21일 낮 12시 이전에 시민군은 이미 총기 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시민군 편 증인 김영택 기자와 국군 편 증인 임정복(당시 31사단 작전참모 보좌관) 모두 시민군이 5월 20일 이미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거니와 위의 푸른눈의 목격자 힌츠페터의 영상물 역시 시민군이 5월 20일에 이미 총기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입증한다.

영상보실려면 위에 주소 참고하시길


5.18 광주시민군이 광주 시민들을 끓어앉히고 총구를 겨누고 있다.



어설프게 전경 복장을 한 정체가 수상한 시민군이 시민군 차량 위에 기관총을 설치해 놓았다.


노무현이 1989년 성탄절에 즈음한 광주청문회 때 전두환 전 대통령 얼굴에 명패를 던지고도 여전히 사과히지 않고 있기에 노무현에게 묻는다.


노무현은 1980년 5월 18일의 이 사진이 광주 경찰 사진이라고 우기겠지만 광주 경찰은 총들고 시위 진압하느냐고? 광주 순경들은 장발족이냐고? 그게 아니라, 폭도들이 광주 경찰을 괴멸시키고, 순경 40명을 납치한 다음 자기네가 경찰복 입고 폼 잡고 있는 장면이라네. 그래도 식별이 잘 안되거든 왼편 끝의 폭도 얼굴을 보거라.


그리고, 이 사진 오른편 끝에서 총들고 설치는 폭도의 얼굴을 보거라. 동일한 폭도가 진압 경찰로 변장하였다가 시민군으로 변신한 모습 보이지?


그러면, 이제 이 자들이 광주경찰인지 폭도들인지 식별이 될 것 아니냐? 폭도들에게 광주경찰이 괴멸되고 순경 40명이 납치당하자 광주시장과 광주경찰서장이 광주향토사단 사단장 정웅 소장에게 치안 유지 협조를 요청한 시간은 1980년 5월 18일 오후 3시. 광주사람 정웅 소장이 상황을 관찰하다가 광주향토사단 소속 2개 공수부대에 폭동진압명령을 내린 시간은 그날 오후 5시 30분.


도대체 폭도들에게 무전기가 무슨 필요가 있었느냐고? 도대체 이 복장이 선량한 광주시민 복장인지 북한 특수부대원 복장인지 구분 좀 해 달라고.


그리고 이 장면이 트럭탄 시민군을 총든 광주경찰이 환영하는 모습이냐고? 그게 아니라, 저 맨위 사진이 증명하듯이 폭도들이 한편은 광주 전투경찰 모습으로 위장한 후 총들고 있고, 다른 한편은 시민군 행세를 한 것이라네.


그렇다면 트럭타고 행군하는 이 폭도들도 북한 특수부대원들이거나 시민군인데, 그들이 국군이었다고 우기면 안되지. 경찰과 군인으로 위장한 시민군을 국군이라고 우기면 바로 여기서부터 광주사태의 논리가 뒤틀리게 되는거야.


그리고, 노무현아 시민군 장갑차 부대에 대해서 설명 좀 해 봐. 어떻게 시민군이 창군된 바로 그 날에 장갑차 부대가 편성되는 것이 가능하냐고? 당시 북한군은 시민군 장갑차 운전병들이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니깐 말이야.



그리고 무장폭도들이 지프 타고 다니면 노무현 눈에는 모두 민주화운동 투사로 보이느냐고?


그리고 말이다. 만약 북한군이 아니라 광주시민이라면 저렇게 폭도들이 가면을 쓰고 다닐 이유가 있었느냐고? 같은 광주시민끼리 한쪽에선 가면 쓸 필요가 무엇이냐고?


이 시민군은 지금 생화학 전쟁하는 것이냐고? 북한군이 가면 쓴 것인지 생화화전쟁 중인지 가려줄 의향은?


여기 맨앞의 시민군도 광주시민 맞느냐고? 도대체 저 패션이 어느 나라 패션이냐고? 그리고 광주시민이면 광주시민끼리 한쪽에서는 가면 쓸 필요가 있었느냐고.


그리고 장발족 폭도들이 국군 철모 쓰고 국군으로 위장한 것이 민주화운동으로 보이는 노무현 눈은 도대체 정상적인 눈이냐고?



그리고 민주화운동하는데 실탄과 술병이 무슨 필요가 있었느냐고?

공감하셧으면 우리 눌러주고 갑시다 진실은 알려져야합니다

 

민주화운동 맞습니까?


그리고 무장폭도들이 저렇게 전남도청을 점거한 상태를 10년, 100년 그대로 방치해 두면 A급 민주주의라는 논리는 도대체 어느나라식 민주주의 논리이냐고?

 

다시묻습니다 민주화운동입니까?

그리고, 당시 광주 의사들은 당시 사망자들이 바로 이 총, 그러니깐 국군에게는 없는 총기에 총상을 입었다는 소견을 남겼는바, 이 과학적인 사실에 대하여 노무현씨의 고견을 좀

 

정말입니까?

 

다시한번 묻습니다 민주화운동입니까?

정말입니까?

 

 

여러분 길게 말하지 않겟습니다 저건 법원에서 쓰인 실제 증거자료로 법원이 인정한 증거자료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좌편향교과서에서 시민군이 장갑차를 쓰고 수류탄을 쏘고 경찰을 잡아죽이고

국군을 20명사망시키고 100명이상을 다치게햇단는것은 들어보셧습니까?TNT설치는요?

저게 민주화 운동이면 왜 천안문사태는 민주화운동이 아닌거죠?천안문사태는 매우 평화롭게 시위를 진행햇는데 광주폭동보다도 몇십배의 사상자가 낫습니다 왜 천안문은 사태이고 광주는 민주화운동입니까?총을들고 교.도.소를 털고 무기고를 털어도 민주화운동입니까?

애초에 시민들이 돌을들고 화염병을 던지고 시위한 이유자체가 김대중이 잡혓다는이유만입니다 그리고 경상도군인들이 환각제를 먹고 전라도사람을 죽이러 온다는 유언비어가 돌앗죠 근데?저위에서 보셧다시피 경상도군인만 잇는게 아니엇죠 그리고 주동자 윤기권이 2억원을 받고 북한으로 월북해서 아직도 북한을 찬양하는 지금 광주폭동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환상에서 깨십시오 저것이 진실입니다 교과서에 전교조에 속아선 안됩니다

 

정리해드리겟습니다 최초에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과 연관되서 김대중이 그 단체회원으로써 자금을 관리하였음 분명히 문세광을 도와주고 이 사건을 공모함 그럼으로 감옥에 간것은 당연한처사 근데 갑자기 전국적으로 민주화 바람이 붐(이건 좋은현상 사실 나도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를 탄압했단건 인정함)근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임 다른 지역은 대부분 모두 수그러들고 자중을 하였는데 광주에서만 유독 심화되기시작하더니 여러 유언비어가돌더니(위에 참고)김대중을 석방하라는 미묘한 바람이 붐 그리고 점점 시위는 격화되고 그를 진압하는(이때 진압이라 해봣자 그냥 방망이 딱 하나 그것도 경찰들이)경찰들을 공격하고 경찰서를 모두 파괴함 그래서 공수부대를 투입시킴(애초에 경찰서를 모두 때려부시고 경찰죽이고 인질로 잡은 사람들보고 공수부대투입은 뭐라 할것도 안됨)

그리고 이 부문에서는 역시 공수부대라서 그런지 경찰들처럼 쉽게 당하지않앗음 서로 쌍방간 교전이 있었음 근데 분명한건 공수부대는 처음부터 폭력을 쓰지않았음 5월18일 대학교를 모두 폐쇄하게함(당연한거 아닌가?폭도들에 의해 경찰서가 모두 털리고 치안이 마비된상태)근데 대학생200명은 죽어도 들어가겟다며 돌을 꺼내서 공수부대를 공격하고 공수부대는 이에 반응해서 서로교전함 문제는 여기서부터임 이 대학생들이 작전이라도 짯다는듯이 서로 흩어지며 거리를 활보하며 문제의 저 유언비어들을 퍼트리며 김대중석방과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를 활보함(민주주의 같은 소리하네 ㅡㅡ 경찰서 턴놈들이)그에 유언비어에 속은 시민들이 나와서 폭도대열에 들어가고 공수부대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그야말로 진압을 시작함

좋다 이거야 여기서부터는 공수부대도 과하게 진압한면이 없지않아있음 일부 학살도 인정함 근데 생각해보길 먼저 경찰서 턴것도 폭도쪽 유언비어 퍼트린쪽도 폭도쪽(계엄군을 무슨 학살자 취급함 진압하기도전에)그리고 공수부대를 먼저 자극한쪽도 폭도쪽

대체 뭐가 정당방위인지?

그래서 폭도들은 안되니까 무기고를 털고 수십개의 건물을 방화하기시작함(대표적으로 MBC KBS가 방화당함 그리고 세무서랑 여러 건물들 경찰서 공공건물들이 수십개 불탐)그리고 더 코믹인건 위에서 봣듯이 공수부대의 적극적 진압은 20일부터인데 이미 19일날 나주무기고는 털렷다는 기록과 증언이있음 아니 대체 뭐가 정당방위임?

게다가 5000정의 화기와 수십대의 장갑차 수 톤의 TNT화약(이걸 해체한게 계엄군인데 학살자라고 매도할수있음?)

이때부터는 진짜 민주화고 뭐고 없엇음 모든 시민들이 집에 들어가서 벌벌떨었고 화려한휴가에서 보여주는 그 방송으로 뭐 감성개병신짓하고 그런건 레알 하나도없엇음요 진짜

 

이미 광주시내는 전쟁터였음 치안마비(무슨 서로 친하게 지내긴 개뿔 김밥털리고 하루에 수십건씩 총기사고가 났는데 ㅡㅡ)

 

 

그렇게 도청밑에 TNT를 깐 폭도들을 계엄군이 진압함(이 점에 대해선 진짜 난 불만없음 어느 병신새끼들이 도청에 TNT를 설치를함?병신아님?)TNT를 해체시키고 계엄군은 정상대로 진압을 했음 그리고 가장먼저 계엄군이 한 행동들?





위의 사진은 5월 단체들과 운동권 방송국이 국민에게 보여주지 않는 도청진압작전이다. 도청진압작전 완료와 더불어 계엄군은 5.18무장단체로부터 무기와 실탄을 회수하였던바 광주에 치안이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시민군을 무장해제시키고 무기를 회수함과 동시에 군인들은 폭도들이 난잡하게 어지럽힌 광주 거리를 깨끗이 청소하여 주었다.

 

자기 동료들이 130명이상 죽거나 다쳣지만 개의치 않고 그 동안 방화됫던 건물들 잔해를 모두 치우고 그 동안 굶어가던 광주시민들에게 쌀을 나눠줌 이게 포악한 공수부대들임?

 

한마디로 정리하면 폭도와 계엄군 서로 잘잘못이 있음 솔직히 폭도족이 원인이었고

그래서 민주화운동과 폭동의 중간말 광주사태를 교과서에 기록해야된다는것이 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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